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어떤 면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등산가에게 낮은 봉우리들은 단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최정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에 불과하다. 이로 유추해 볼 때, 개인의 중생이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과격한 변화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알고 있으면 성령의 사역의 충만한 분량을 놓치게 되며 낮은 등성이에서의 조망으로 만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거듭남이란 장차 완성을 기다리는 새로운 창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한 바와 같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체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 곧 그분의 광범위하고도 공동체적인 사역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하고, 이와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종말론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즉 모든 회중을 불러내신다.

그리스도 사역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묘사한 신약 성경의 많은 비유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떼를 이룬 양들이요, 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요, 신랑의 친구들이요, 성전의 돌들이요, 새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권면들은 개인적으로 심령에 적용되도록 의도된 것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은 개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한다.

바울의 신학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사용한 다음의 비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즉 교회란 우리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다.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1) 바울이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적.문화적 장벽이 무너진 그리스도의 '몸'(body)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무엇인가?

(2) 성령은 어떻게 세례를 통해 이런 몸으로 들어가도록 관여하는가?

 

 

그리스도의 몸

 

첫 번째 질문은,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의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바울이 의도한 의미를 규명하려는 노력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많다. 본문의 의미는 단순하게 어떤 용어의 어감이나 기원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바울이 가진 사고의 세계에서 몸이라는 개념이 나올 만한 배경을 다양하게 분석해 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도출될 뿐이다.

 

로마 제국의 문학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이란 개념은,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함께 결속된 집단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메네니우스 아그립바(주전 약 494)의 우화인데, 이것은 리비의 '로마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메네니우스 아그립바는 한 우화를 통해서 민중에게 폭동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그 우화는 몸의 다양한 부분들이 위장을 질투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결과 몸 전체가 망쳐진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의 성례전적 신학에서 그 근거를 찾으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 및 그분의 백성의 하나됨을 동시에 상징하는 빵을 떼는데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최근에는 이것을 고린도 지방의 한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연구도 나왔다. 고린도의 아스클레피온에 대한 고고학적인 탐사에서 인체의 여러 부분을 조각한 테라코타 작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치료의 신(神)인,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우스에 의해 치료된 신체의 각 부분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바울이 이 비유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이러한 접근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은유의 기원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단순하지만 최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는 개념이 '공중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바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를 채택한다. 특별히 그가 묘사하고 있는 '몸'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분은 몸의 머리요 지배자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섭리 목적에 따라서 우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머리이시듯이(엡1:22), 자신의 나라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를 지배하며 지도하는 머리가 되신다(골1:18). 여기서 '머리'(kepbale)는 신체의 일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해부학적 단어가 아니라, 관계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요, 우주(kosmos)와 교회(ekklesia)를 동시에 지배하시는 분이다. 개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즉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생명덩어리로 분리 불가능하게 묶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또한 서로에게 속해 있다.

 

 

성령 세례

 

다음으로, 이러한 몸으로 들어가게 하는 세례에서 성령의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례와 성령은 신약 성경에서 일곱 번 서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여섯 번은 명백하게 오순절을 지칭하는데,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5, 사도행전 11:16  -->

성령으로(en pneumati bagio)

 

위의 각 구절에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그 매개체이다. 일곱 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2:13  --> 영으로(en pneumati)

 

위의 진술들 가운데 '으로'(en)라는 전치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세례에서 성령이 집행자('by the Spirit')임을 지적하는 것인가, 아니면 매개체('with/in the Spirit')임을 암시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이 세례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라는 좀더 깊은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쓰인 '으로'(en)라는 전치사는, '의하여'(by), '함께'(with), '안에'(in)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성령을 매개체(with/in the Spirit)로 보고 있지 집행자('by the Spirit')로 보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주제를 만나는 곳마다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가지 용어, 즉 성령-세례(Spirit-Baptism)라는 언어 표현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일관되게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보여 준다. 즉 "그분이 세례를 주실 것이요..."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몸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한 성령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합병될 때 동시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에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성령이 창시자인 어떤 사역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요, 회심 이후의 성령 체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며, 신자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된, 즉 성령을 처음으로 받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참고. 요4:13-14; 7:37-39).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은 그 세례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이 몸 안에서 삶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수단들, 특별히 세례 의식, 주의 만찬과 사역 등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세례

 

물 세례의 시행은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그것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에 대한 세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 이전에도 그런 세례가 있었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요한의 세례의 경우에는 확실히 해당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반응으로 참된 회개가 시작된 표식이었다. 한편 요한에게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 시대와, 십자가의 세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사역으로 진입하는 공적인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었다(참고. 눅12:50).

 

성령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시작하도록 한다. 물로 받는 세례는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상징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여기서 회개, 물 세례,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속으로의 교제로 진입하는 하나의 실재의 연결된 측면들로 보인다(마28:19).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영적이며 내적인 특성을 가진다면, 그러한 외적인 의식들이 과연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새로움과 일치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곤 했다. 외적인 의식이 성령 사역의 충만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내적인 빛'(inner light)에 대한 가르침이 지배적이던 17세기에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세례는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다....요한의 세례는 그에 대한 비유였고 한시적으로 명령된 것이며, 영원히 존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초대교회는 마태복음 28:18-20의 정신에 따라서 물 세례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조심스럽게 물 세레와 성령 세례의 차이점을 구별하였다(행10:47; 참고.11:16). 여기서 바클레이와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외적이며 물리적인 세례 의식에 내포된 신학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 세례와 성만찬 모두 복음의 언어적인 표현에서 사용된 상징들(the signs; 단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이 알려지신 바 된다.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가 오면서 쓸모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복음이 우리 인간의 조건과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 더 잘 들어맞음을 가시적으로 예증해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지상명령에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생길 때마다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주님이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임재하시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마28:18-20).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내적인 끈으로 역사한다. 그분이 그들과 맺으신 각각의 언약은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보증하는 특별한 증표(sign)에 의해 확정되었었다. 노아와의 언약에서는 무지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할례가 명백한 증거가 된다(창9:8-17; 17:1-4). 이것들은 언약의 약속을 상징하며, 믿음을 갖도록 그 언약을 확정시키는 물리적인 증표로 작용하는 것이다. '증표와 인침'이라는 용어는 할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롬4:11), 이것은 모든 언약의 증표들이 작동하는 방법(modus operandi)을 잘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노아는 폭풍우 뒤에 언약의 상징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창9:12-17). 약속에 덧붙여서 증표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확증(도장)으로 작용하였다.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그가 베푼 세례의 주된 역할은, 세례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실존적이며 개인적인 중요성과는 별도로, 메시아가 계시되게끔 역사적 상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1:31). 자주 간과되는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세례 시에 그분에게 주어진 증거와(막1:11), 그의 세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의 성취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견해와 함께(눅12:50; 막10:38-39), 물 세례가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 내적 의미(증표)를 지적하고 인치심을 받은 그에게 이를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세례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부의 말씀이 첨가되었으며, 성부의 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여 지금 상징된 그것이 십자가 상에서 참되고 최종적인 세례 가운데 충만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구비시킨 것이다. 곧 그분의 피에 담긴 새 언약을 향한 발걸음이요 그 중심에는 새 언약적 성령의 선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겔36:26-27).

 

신약 성경에 의해 '세례'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세례에 유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 성경의 두 사건은 한결같이 호된 물 시련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저주받는 동안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으로 인도되었다. 이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벧전3:18-21),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고전10:2) 모두에게 해당된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진정한 세례도 물로 말미암은 호된 시련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시편 69편은 호된 물 시련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69:1-2).

 

이 시편은 성격상 신약 성경에서 메시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구절들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언급되었다(시69:9은 요2:17과 롬15:3에서; 시69:4은 요15:25에서; 시69:25은 행1:20에서; 시69:22-23은 롬11:9-10에서). 물 세례로 상징된 극도의 시련이 십자가 상에서 실재로서 나타난 것이다. 요단 강에서 행해진 상징이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머리 위에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폭풍의 압도적인 힘 속에서 성취된다. 그분은 자신을 죽이다시피 한 비애와 쓸쓸함을 경험하였다(막14:33-34). 여기서 그분의 할례(눅2:21)가 상징하는 바와 그분의 세례가 상징하는 바가 하나로 결합된다(참고. 골2:11-15). 그리스도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다'(사53:8). 그는 자신의 양 어깨에 멘 '우리의 모든 죄악'(사53:5-6, 8, 10)으로 인해서 압제 당하신다(사53:7-8).

 

바로 이런 수단들에 의해서, 용서와 구원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언약적인 저주를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복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로 성취된 것이다(갈3:13-14).

 

새 언약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이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실체를 상징하며 인치는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따라서 믿음은 물 세례를 통해 상징되고 인쳐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세례가 지닌 내적인 의미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따라서 거듭나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는 상징과 실재 사이의 제삼의 조건(tertium quid)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세례에 대한 신약 성경의 모든 공식적인 진술 속에 전제되어 있다.

 

로마서 6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런 원리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표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세례 받았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분의 부활의 권능 가운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라고 여기도록 격려받는다.

 

자연스럽게도 해석자들은 이것을 실제적인(혹은 유사) 성례주의라고 추론하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여기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물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교단적 입장을 대변한다. 제삼의 대안이란 허용될 수 없다(Tertium non datur). 그러나 믿음을 떠나 의식 자체만으로 그 상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약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다. 제삼의 가능성이 있다. 즉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 결과로 세례를 통하여,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믿도록 조명한다("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따라서 말씀과 관련된 그분의 사역과 성례와 관련된 그분의 사역에는 직접적인 병행 관계가 존재한다. 둘 다 객관적인 증표이다. 두 경우 모두 성령이 의미를 깨우쳐 주고 적용시키며, 그것들이 지시하는 실재가 믿는 자들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게끔 한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회심이라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거울로 생각되며, 그 핵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 종종 간주되곤 한다. 따라서 회심 시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한 증표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점이 아니며, 세례의 축복을 과소평가함은 물론 세례와 관계된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에 따를 때, 모든 사람은 세례를 자신의 믿음의 결단을 반영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은혜의 상징이요 인치심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예비하신 부요함의 상징이다. 상징되고 인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물 세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이다. 따라서 믿음은 세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표에 의해서 인쳐지며,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에 대해서처럼 믿음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말씀으로 해석되는 상징과 함께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되며, 그 확증에 의해 믿음이 강화되고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행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세례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되, 그분의 메시아적 사역에 포장된 바 그분께 속한 것들을 취하여 백성에게 그분을 밝히 드러낸다.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말씀은 변화를 시키든지, 강퍅하게 하든지 그 기능을 수행한다(사55:11; 막4:10-12). 이와 유사하게 복음의 성례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은혜 안에서 변화를 초래하거나 심판 아래 강퍅하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경고할 때 무분별한 정신으로 성만찬에 참여할 때 그들은 아무 변화 없이 떠나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실상 그들은 심판을 먹고 마신 것이다(고전11:27-30). 복음의 상징에 대한 거부는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거스르고 반항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런 원리를 인식하면서, 미혹으로 곤궁에 처했을 때에 스스로를 향해서 '나는 세례 받은 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해 성령이 밝혀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보내신 분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듯이, 세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게 된다.

 

성령이 세례를(성찬도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성례 신학에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을 피할 수 있다.

(1) 한 가지 오류는, 의식의 상징적인 성격을 매우 주관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동, 결단, 경험에 의존하게 만들어 믿음의 기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즉, 믿는 자 스스로의 자원이나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로 돌이키게 하는 믿음의 기능을 망각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오류는, 상징이 축복의 효력을 지나치게 객관화함으로써, 상징의 수납을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수납과 동일시하고, 그 상징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믿음의 여지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의 유효성은 성경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의 효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듯이 성령의 사역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주의 만찬

 

세례와 성찬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언약의 상징이자 인을 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례는 독특한 기능과 독특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세례는 시작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징으로서 단 한 번 받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의 상징이요 자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성령은 어떤 것을 특별히 증거하는가?

 

성찬의 핵심은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그것을 받아 먹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이것 역시 세례처럼 언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월절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은(그것의 성취가 성만찬이다, 고전5:7-8), 하나님의 심판 곧 죽이는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그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린양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참여함을 의미했다(출12장). 그것은 언약에 의해 구속되고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한데 묶여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성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새로운 언약을 인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담당하셨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도모할 새로운 언약의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언약의 저주와 심판의 잔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받으셨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자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그분의 간청은(마26:39),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이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암시한다(시75:8; 사51:17,22; 렘25:15,17; 겔23:31-33; 합2:16;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잔을 마심으로, 예수님은 헐벗음과 가난함과 목마름과 굶주림 가운데서(참고. 신28:45-48), 그리고 어둠 속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저주(마27:45; 참고. 창15:12) 아래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는 저주 받은 사람의 경험을 모두 겪으셨다(갈3:13).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고 치시며 괴롭히신다고 느끼셨다(사53:4-6,10; 마27:46).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두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눅24:39).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 것이다. 그분이 떡을 떼실 때 제자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근본적인 역동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심판의 저주를 퍼부으시는 대신,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 언약의 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이제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이 그처럼 중요한 이유는 분명해졌다. 오직 성령의 사역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성찬에 대한 가톨릭(ex opere operato: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소위 예전적 성례론으로서, 성만찬을 신부로부터 받아 먹으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주장-역주)과 복음주의(기념설 주장자들: 루터에 반대하여 츠빙글리가 내세운 견해-역주)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다가 이제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는 것은 교회의 제도나 우리의 기억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장소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제한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로마 가톨릭의 견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단지 그분을 기억하는 일뿐인 것처럼 성만찬에서 떠나 계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기념설의 견해).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by the Spirit) 그 물질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알려지시는 이다. 성만찬에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교통(communion)이 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주님이 성경 안에(장소적으로), 혹은 믿음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어떤 물질적인 요소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행3:21). 그러나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되며 그분은 우리 가운데 서 계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성만찬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기리켜 언급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것은 요한이, 교회가 '주님의 날에 성령 안에서'(계1:10) 그분과 함께 즐거워할 것에 대해 믿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역사상 줄곧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를 들면, 세빌의 이시돌은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임재하게 만든다고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믿음으로 성만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성찬의 권능 혹은 힘을 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르비에의 라트람누스는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화체설에서 최고의 신학자로 자주 거론됨)와 맞서서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뛰어난 논쟁을 벌였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를 성령에 의한 임재로 간주하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노렸했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칼빈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강력한 설명에도 여전히 신비의 여지가 남아 있다.

 

비록 우리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에게 침투하여, 그로 인해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떻게 성령의 비밀스러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초월하여 우뚝 솟아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분량을 우리가 측량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기억하자. 우리의 마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믿음으로 품어 안게 하자. 즉, 성령은 장소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거룩하게 나눌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뼈와 골수에 파고들게 되고, 그분은 또한 성만찬에서,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인을 치신다. 이것은 단순히 공허하며 헛된 상징을 보여 줌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이 그분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함을 밝히 드러내심으로써이다. 그리고 진실로 그분은 거기에서 상징되는 실재를 영적인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고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 즉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참된 믿음으로 그처럼 위대한 자애로우심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받을 수 있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17.10.)

 

이러한 사상[그가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인성의 실재에 대해 강조한다는 이유로 실제주의라고 불리는]은 칼빈의 성만찬 교리 전체에 깊이 배어 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스럽게 되신, 바로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신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다."(Institutes, IV.17.4.)

 

성만찬에 대한 일반적인 복음주의 교리보다 오히려 칼빈의 용어가 훨씬 더 실재적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그의 강해는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어는 요한복음 6:51-58과 고린도전서 10:16에도 확실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말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때문에 성경 자체에 대한 불편함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신중해야만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실제로(real) 먹고 마신다는 견해를 가진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carnal, 식인종처럼) 그 몸과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문맥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칼빈이 주장하는 바 성령의 권능과 역할이다. 성만찬에 관한 그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강림하시는 성령 사이의 연결성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고자 강림하신다(참고. 골3:1-4). 이와 유사하게, 성만찬에서 성령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성도 사이의 '떨어진 간격을 메꾸려고', 그리고 승귀하신 구주와 교통하게 하려고 찾아온다.

 

그러나 칼빈의 질문은 좀더 나아간다. 성찬의 식탁에서 신자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와 교통하는가?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 당하고, 죽으시고, 장사지내고, 살아나실 때에, 또한 지금 영광 가운데 승천하실 때 인성으로 옷 입으신 그 그리스도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Logos ensarkos) 외에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을 통하지 않는 다른 은혜의 방법은 없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합체라는 신비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통한다. 우리는 성령으로/영적으로,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교통한다.

 

칼빈이 이보다 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될 필요는 없다. 이보다 덜 말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고전10:16) 교통(koinonia)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혹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성의 지속적인 실재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칼빈이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말한 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독론적 사상이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의 진리를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물론(이 종교개혁가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것이 나타내는 진리는 여전히 신비 속에 감춰져 있지만, 덜 난감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6:14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 그것을 제자들에게 알린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도적 계시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만찬에서는 성경에 이미 알려지지 않은 다른 것이 새롭게 계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만찬에는,

(1) 눈에 보이는 상징물이 있으며

(2)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에 대해 단순하고도 특별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로 인도하며, 성령 사역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새로운 계시란 없다. 다른 그리스도가 알려지는 것도 아니다. 로버트 브로스(Robert Bruce, 1554-1631)가 잘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성만찬 때에 말씀에서 얻는 그리스도와 다르거나 혹은 더 나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이 말씀과 결합된 물질적 상징의 증거를 통해 역사하실 때, 동일한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Robert Bruce, pp. 64, 85.)

 

과거에 기독교 저자들이 솔로몬의 아가서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성을 설명하고자 구애, 사랑 그리고 결혼 등의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맞춤'이란 말을 했는데, 이것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을 의미한다. 입맞춤이라는 육체적인 표시 혹은 행위가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또는 상징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가리키는 물질적인 표시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에 의해 사용되어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을 향해 품으시는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은혜의 확정인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있다. 즉 신자들이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성령에 의해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은 완성될 것이다(고전11:26). 또한 성령께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때(계22:17), 상징물에 의해서 표시되던 것의 충만한 실재가 임할 것이며, 그러한 상징물은 성전 건물처럼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다(계21:22).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발췌 / (219-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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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혀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재자들을 둘씩 짝을지어서 보냅니다. 여섯 팀이 구성된 셈이지요. 10장의 첫 단락이 이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13장) 성령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셔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하여 둘을 보내게 하십니다.

율법에서 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그리고 둘은 협력을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 셋은 의견일치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몇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비사(비유적 언설)를 드신 이유는 '지혜와 순결'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권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혜롭게 잘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전도현장은 평소와 같은
세상이나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뱀과 비둘기는 지혜와 순결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들입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뱀이 사람처럼 지혜롭다는 뜻이 아니라 뱀의 용의주도한 공격의 자세나 은신, 그리고 발도 없이 배로 밀고다니는 것 등을 보면서, 전도자도 자신만의 대처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턱대고 나대지말고 신중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능력만 믿고 겁도 없이 설치다가는 사역을 망치게 됩니다.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비둘기는 순결하면서도 정결한 새로서 가난한 자들이 드렸던 제물이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번 겨울에도 산행을 댓 번 했습니다. 산비둘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참 순결해보이더군요. 비둘기소리를 들어보면
조용합니다. 구,구,구... 나직한 소리로 주변에 자신을 알립니다. 밭에서 모이활동을 하다가 가끔 맹금류에게 잡혀먹히기도 하지요.

전도자의 순결이란 오늘 본문 앞 단락에서 말씀하신바 대로 돈 조심하고 대접받으려들지 말고 평안을 비는 것으로 기본을 삼고 복음외적인 일로 빌미를 제공하여 공격을 받지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7절, 그런 가운데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회란 유대인들의 지방의회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가 아닙니다. 공회에서 정죄를 받고 회당에서 채찍질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로부터 박해가 있을 것을 알고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여러 당파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말로 시험하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지요.

스데반이나 야고보 사도는 알찍 순교했습니다만, 전도자는 이리떼가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순교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경우로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최선의 수단은 아닙니다. 기독교 순교는 무슬림들처럼 거짓에 세뇌되어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간계와 포악함을 간파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생활도 단정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18절로 20절 입니다.
앞서 말한 종교적 박해뿐만 아니라 정치적 박해도 받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 통치자들을 피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인 줄 알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믿음과 각오로 담대히 서야 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할 말을 주십니다.
아버지의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든든한지요.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만큼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겠습니까.

현대의 환난전 휴거론자들을 보면 대개 환난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신적인 죽음은 그리 무서운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로 '나'도 가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 것이 진정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적 종말과 함께 개인적 종말의 때를 항상 준비하는 신자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21절, 장차 국가와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되면 볼짱 다 본 셈이지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언제? 말세지말에!
가족해체를 넘어서 골육상쟁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가정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북한이 그렇지요. 그 정도는 맛뵈기 수준입니다. 큰 환난과 함께 무서운 때가 올 것입니다.

22절,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남은 자 사상은 신약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남은 자란 '이기는 자'로 나타납니다.

보이는 교회에 속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믿음이 아닌 종교적 신념으로도 얼마든지 교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말세에 배교의 대열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결과적 선택입니다. 그리스도(구원자-하나님이 보내신 자) 안에 있는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예정(계획)하셨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나 가라지는 버려집니다.

농사를 지어본 분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고 심을 땅도 주시고 씨도 주셨습니다. 농부가 땀흘려 일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니요 하나님이 결실케 하십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은 믿음과 순종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입술의 고백이란 행위를 담보(보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신행일치, 언행일치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끝으로 박해를 받으면 피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순교가 좋사오니!,
한다면 누가 말리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복음의 그릇이 쉽사리 빨리 순교당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한 일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만민에게 속히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여전히 아직도 많습니다.

재림 후에는 전도의 기회도 구원의 기회도 없습니다. 오직 두려운 심판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기만 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연속강해를 이어가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을 상고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주의 뜻을 받들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예화나 긴 적용을 되도록이면 삼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전도자의 직임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언어(言語)의 위력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빛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고 말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인생살이를 한마디로 축약한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운 표현이다. 사실, 말을 많이 한다고 말 잘하는 것 아니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정확히 그 뜻을 알고 사용하는 것과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비록 매끄럽지 못하고 조금은 거칠게 보여도, 화자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진솔하게 하는 한 마디 말이라면 그것은 곧 금은과 같으리라.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럼프 씨가 바로 그 한 예다.

그를 보면, 알고(knowing) 사용하는 언어, 그 위력이란 어떤 것인가? 가르쳐준다. 모든 언론, 대다수의 미국민,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 지적 당한 것이 그의 말이었다. “막말 가, 인신공격 자, 인종차별 자,”등으로 불리우며 그는 많은 지성인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심하게는 그를 가리켜  ‘미친(Insane)자”라고까지 비웃었다. 그러나...트럼프는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그의 막말은 더욱더 강도를 높여가는 것같아서 보는 이들의 눈에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저런 사람이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개표결과는 완전 충격 그 자체였다. 글자 그대로 세계를 경악게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지지표를 얻은 후보는, 모두가 기대했던,  세련되고 知적인 힐러리 후보가 아니라 ‘막말 가’로 언론의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 ‘트럼프’였다. 놀랍지 않은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의 언어 능력이 일구어낸 결과라고 본다.  그랬다. 민심을 파고드는 그의 언어능력은 탁월했고 많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국 내에서도 기득권자들에 의해 버림받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노동자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동성애 천국으로 변해가는 미국을 보면서 개탄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무차별적 완화정책(똘레랑스 정책)으로 망가져 가는  국제정세까지… 이런 사회적 그늘을 그는 한 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를 향해서 울분을 토하고 막말을 쏟아붓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찌르면서 그들의 감성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보는 ‘트럼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탁월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라 말하고 싶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공약을 지켜나가는 참된 지도자일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정치계나 사회생활에서만 언어가 위력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말씀이(logos)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구속주가 되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을 입을 수 있다니?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은 더욱 놀라운 힘이요, 위력이다.  뿐만 아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사탄이 최초의 인간, 하와를 미혹할 때 쓴 무기도 다름 아닌 바로  ‘현란한 말의 위력’이 그 기초였다는 것을 아는가?  잘못된 언어 사용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말(언어)이란 위선의 방패로서 한 방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종종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일까? 이렇듯, 언어란 사용하기에 따라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그 말 때문에 영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언어 능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이런 사실을 매순간 인식하고 내 입에서 나가는 모든 말이 정제되고 절제될 수 있다면 후회가 없는 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저주의 말을 쉽게 내뱉지 말아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다. 한 기독교 병원에 만삭이 된 젊은 임산부가 해산하러 왔다.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기에 벽마다 예수의 성화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것을 본 젊은 임산부가 짜증을 내면서 “저 액자 좀 떼세요, 보기 싫어요.”  "저희들 맘대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간호사들의 말에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남편은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남편의 권한으로 저 액자를 내리고야 말겠어요. 태어날 내 아이에게는 절대로 저 예수라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너무 화를 내는 임산부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병원 측에서는 하는 수 없이 원장과 상의하여 예수님 액자를 모두 떼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 여인은 아주 건강해 보이고 잘생긴 아들을 출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여인의 말대로 이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액자를 볼 수 없는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예가 아닐까 싶다. 말이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성경에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 : 28)"라고 심판의 기준을 우리 입에서 나온 말대로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심을 본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사건이 바로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 정권과 협렵자들이 12년(1933~45)동안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관료적인 탄압과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불에 의하여 희생된 제물(번제)'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라는 뜻에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홀로코스트의 결과 사망한 유대인은 575만여 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과사전

이것이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아픈 역사이건만, 무엇 때문에 유독 유대인들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시기 질투에 눈이 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선동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친 유대민족들, 그 포학한 입술의 열매란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마땅할 죄인이라며 끌고 온 예수,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떠다가 군중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씻는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에게 선동을 당한 어리석고 무지한 군중들은 외쳤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 (마 27장 24-25절 참조)”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말인가? 그들이 무심코 뱉어낸 그 저주의 말이 훗날에 그대로 그들과 그 자손들이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다음, 어려운 때일수록 믿음의 말(언어)로 승리해야.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분 안에서만 내세의 소망이 있음을 매순간마다 고백하며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입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하며 “죽겠다, 죽겠다”. 부정의 소리로 자신을 옭아매기도 한다. 더 심하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마저 던져버리기도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내가 하는 모든 언어들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생각을 한다면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벧후 3 : 10절 참조)". 했다.

마음 설레며 새해를 맞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3주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한해의 삶을 계획하기도 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새해라고 해서 늘 행복한 일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앞에 언제나 평탄한 대로(大路)만 펼쳐져 있겠는가?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걸어야 할 길(路),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안 된다 절망하고 주어진 삶을 내 입술로 저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생명을 살리는 언어”로 내 가슴 한가득 채우고 날마다 내 입술로 믿음의 언어를 선포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 기준이 되는 언어의 위력을 항상 기억하면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성숙함이 내게 더할 수 있기를….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 : 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더디하라( 약 1: 19).”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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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령님의 내주하심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기독교는 참으로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섬기는 실재적인 종교이다. 이슬람교와 같이 허황되거나 거짓된 종교가 아니다. 또 로마 신화와 같이 인간이 치밀하게 궁리하여 꾸며 낸 이야기도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참된 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다른 증거들과는 구별되며서도 훨씬 더 탁월하여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그것은 바로 신자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심어 주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위대한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여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하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궤변이나 사탄의 술책으로도,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악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이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증거들을 뒤로하고 친히 증인석에 앉아서 사역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대적하여 "누가 정죄하리요?"(롬8:34)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이 증언의 갑옷을 입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가장 연약한 제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서는 '매우 이성적이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는 있지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확신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은 없다.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신앙이 정직하고도 담대하게 선포되고, 또 이 정직하고도 담대한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에 강력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회의론자들이 그에게 도전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고, 여러분이 대답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공격할 수도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던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증인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적 추룬의 능력이 힘을 얻고, 그의 영혼이 더욱 온유해질 것이다. 또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그 신자의 모든 행동이 진실해지며, 결국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대적자들이 지난날 주님께서 받으신 찬사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7:29).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믿을 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어떤 대적도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눅21:15)를 그에게 주셨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주된 이유에 대해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특별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복된 이 교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 더욱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곧 자신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신자들이 경험하는 위로와 거룩하고도 자녀다운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이 주제는 그 무엇보다 위대하고 소중하다. 특히 이 주제의 광대함은 가히 압도적이라고도 할 만하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사57:15)가 사람과 함께, 아니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인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한 민족을 불러내어 그들을 성령님께서 거하실 장소가 될 만큼 새롭고도 거룩하게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또 이 천상의 방문자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면서 자신의모든 능력, 곧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인 치고 위로하는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광대하고 영광스러운지, 이 유한하고도 보잘것없는 마음으로는 절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 주제에서 흘러넘치는 위로가 참으로 크고, 이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너무나 큰 동기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 주제를 통하여 큰 영광을 거두신다. 그래서 이번 장의 가장 첫머리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부디 성령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진리를 펼치시며, 그 거룩한 영향력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1. 하나님의 성전으로 창조된 신자, 그리고 타락

~생략

 

2. 성전의 회복

~생략

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순종

2)그리스도의 죽으심

3) 그리스도의 부활

~생략

 

 

 

3.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경의 증언

 

먼저, 이 교리에 대해 성령님이 어떻게 증언하시는지를 보자. 이 진리가 잘 나타나는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특히 신약성경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보면, 그 시대에도 이 교리가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를 보라.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겔36:27).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겔37:14).

 

신약성경에는 이 교리가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펼쳐져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롬8:11).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고후6: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더 많은 구절을 찾지는 않겠다. 이 정도로도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성경이 증언하는 교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중생의 역사

 

성령님께서는 언제 영혼 가운데 들어가시는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중생의 순간'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행하시는 첫 번째 은혜로운 역사이다. 중생의 순간 이전에는 모든 것이 어둡고 황량하며 죽어 있었다.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앞에서 다룬 바 있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교훈과 생명과 빛과 질서를 가지고 영혼에 들어오시기 전에 그 사람이 겪던 도덕적인 몰락에 대한 두려움과 영혼의 황폐함에 대한 공포를 어느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시는 것이 더 정확하고 생생한 묘사일 것이다.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19).

 

그런데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은혜 언약에 합당한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분은 이 언약을 자신의 사랑의 날개 위에 올려놓고, 그 위대한 힘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구세주께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산 성전을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소유하시는 모습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 어둠과 적의와 더러움과 죽음은 물러가고, 빛과 사랑과 거룩과 생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에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하다(눅11:21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모든 저항에 맞서 싸워 결국 그 의지를 굽히고 적대감을 없애며 그 마음을 풀어서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해야 한다.

 

'여호와께 복 받을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창24:31). 들어 오셔서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취하소서. 제가 오랫동안 주님께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저를 정복하고 지배하셨으니, 복되신 성령님이시여, 저에게 들어오셔서 저를 주님의 것으로 인 치소서.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한 슬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시며, 우리의 영혼을 낮추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재 가운데 스스로 낮아지게 하시고,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양심에 용서와 평화를 선언하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3)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문이 건축했던 성전의 웅장함과 장엄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 땅에서의 영광일 뿐이다.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는'(행7:48 참고) 성령님께서 설령 그 성전 가운데 강림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세우시고 거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전과 비교해 볼 때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그 성전이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명령하신 기준을 충실히 따랐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복음의 경륜과 비교해 보면 그 성전이 가진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인가? 오늘의 복음시대와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는 성령님의 임재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대를 그 어떤 시대보다 특별하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성도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3:8-10).

 

 이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영광이 탁월한 것은 그 영광이 더욱 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리시는 역사가 전보다 더 자주, 풍성하게 일어난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고 인 치시는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그리스도와 닮아 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거룩한 역사가 더 자유롭게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더 단순하고 영적인 모습이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주하시는 역사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특별한 현현(顯現)이 있다.

 

성령님께서는 임마누엘께서 성취하신 광범위한 속죄 사역의 기초 위에서 은혜 가운데 불쌍한 죄인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룩하게 만드시고 영원토록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증언하고 역사하시사 그들을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물려받게 될 기업에 합당하게 만드신다.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2:22)가 된 영혼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전능한 능력이 영화롭게 되고, 예수님의 속죄 사역과 충족한 은혜와 죄인들을 향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영화롭게 되며, 저항할 수 없는 성령님의 능력과 무한한 인내와 효과적인 사역이 영화롭게 된다. 영혼을 회심시키고 그 영혼에게서 일어난 회심이 지속되도록 돌보며, 그가 거룩하고도 정직한 걸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그 긴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피고 마침내 그를 영원한 행복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천 개나 더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보여 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거하시되 영원토록 거하시며, 모든 은혜와 평안의 영으로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진정으로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모든 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또 영혼이 거룩한 호흡을 하고 거룩한 것을 열망하며,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뜻과 형상을 닮고자 소망하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모든 것과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도 전적으로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보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데 10절 말씀을 보면, 이 샘물이 곧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알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선물'이 성령님을 의미한다는 점은 요한복음 7장 38,39절에서 더욱 강조되어 제시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것이야말로 은혜로운 진리이다. 모든 영적인 복이 깊고도 생명력 넘치는 샘물이신 성령님에게서 솟아난다. 성령님께서는 고여 있는 물처럼 영혼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날씨가 궂을 때나 좋을 때나 습할 때나 건조할 때나, 그 어떤 외부 환경에도 상관없이 사시사철 항상 흘러 넘치는 샘물이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게 되는 열매들은 절대 저절로 맺힐 수 없는 것들이다. 의에 주리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려는 것이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소망하는 것, 죄의 법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나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의 원리에 대해 슬퍼하는 것 등은 모두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맺게 하시는 귀중한 열매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자연적인 것과 은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했던 적이 많을 것이다. 또 율법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의 사역과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비결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차이를 밝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마련이므로, 그것이 처음 시작된 근원으로 다시 올라가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죄인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솟아나는 샘물, 곧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다.

 

자신의 마음에 임한 재앙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재 가운데 엎드려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과연 사람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또 자연적으로 은혜의 보좌를 사랑하게 되고, 속죄의 보혈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로, 잘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이 저절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모든 일들은 자연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들이다. 여러분이 방금 말한 상태에 있는가? 위를 바라보라. '혈육'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못한다(마16:17 참고). 이것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신 분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복된 성령님을 통해 그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5) 거룩의 영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되, '거룩의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가볍게 여기면, 그분을 증인이나 위로하시는 분으로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도 다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다음 장에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성화의 사역을 다루겠지만, 여기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관련하여 성화의 사역을 잠깐 살펴보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감당하시는 사역 가운데 특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한 부분이다. 성령님께서는 단지 신자 곧 성전의 질서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의 순결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영혼이 다시금 거룩한 통치를 받도록 만드시고,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확립시키고 율법의 교훈을 드러내시며, 그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신다. 또한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널리 전파되어 그 율법이 가진 온유하고도 강력한 구속력 아래서 신자들이 '주의 계명들의 길로'(시119:32) 달려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 안에서 성령님은 '거룩의 영'이 되신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어떻게 진행하시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장(5장)을 참고하라.

 

6) 영원토록 내주하심

 

우리는 성령님께서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영원하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자신의 보좌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요14:16)를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영적 임재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임재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님께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이 진리를 간과하지 말라. 영적 어둠과 불신앙의 역사가 일어나 자신에게 내재하는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안과 위로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구름과 어둠이 일어나 이 진리를 둘러싸 가릴 수도 있다. 혹독한 시련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비관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불길한 예감 때문에 두려워 떨 수도 있고, 험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만나기도 하며, 어둡고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믿음이 약해져 불신앙에 뒤덮일 때도 있고, 여러분의 영혼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도 있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42:36).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시77:7-9).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이 기운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안팎으로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스러운 그때에도, 거룩하게 하시며 위로자 되시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하신다. 여러분이 강력한 부패성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위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져 다윗처럼 기도하게 될 수도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그러나 여전히 복되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분의 작고 고요한 위로의 음성이 그 모든 요란한 폭풍우 소리를 잠재우고서 들려올 것이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동행하신다. 여러분이 아무리 방황하고 게으르며 불친절하고 무가치하며 신실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 무엇도 성령님을 여러분 안에서 떠나시게 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우리를 향한 위로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의 경망스러운 모습을 슬퍼하신 나머지 잠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뇌두시고, 우리를 위해 증언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잠깐 동안 중단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마음을 깨뜨리셨다면 그 마음을 다시 싸매실 것이다. 상처를 내시고는 치료하실 것이다. 마음을 거룩한 슬픔으로 가득 채우시고는 그 마음을 변화시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54:7).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23:3).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남은 내용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요점만 다루겠다. 이 사역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다른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성령님은 증인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님은 미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증표요 약속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3,14).

 

성령님은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는 분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이 모든 영광스러운 역사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동일하신 한 분 성령님의 역사이다.

 

 4. 적용과 권면

~생략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中에서 발췌(143-170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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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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