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빌라-

마태복음 10장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고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참조구절;사도행전 20:17-38 중,

17 -32절은 생략...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여러분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먼저 사도행전 20장 위 참조구절을 살펴봅니다.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밀레도 항구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합니다.

이들은 에베소에 있는 각 지역의 여러 가정교회를 맡아서 양떼를 돌보는 감독자로서 장로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각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이지요.

위 사도행전 20장 본문(17-38절)은 바울의 실천신학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식냄새 풍기는 현학적인 설교가 아닌, 삶이 녹아 있는 체화된 말씀입니다.

이 것은 장로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로서, 단순히 지적 동의를 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 자신의 모본(모범적 본보기)을 따라 바르게 목회할 것을 권면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도 자주 읽고 묵상하면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는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그 누구의 금품을 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아는 바와 같이 손수 일해서 자신과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했다고 말합니다.

35절에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준대로 (여러분도) 수고하여-손수 일해서 물질을 얻어-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하심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주로 고린도, 에베소 등지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지역교회의 장로들한테 그들도 바울 자신처럼 직접 일하면서 목회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약한 자들을 도우면서 목회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자비량 목회에 대한 논쟁을 보니까, 바울은 특별한 케이스(경우)로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다면 이는 또 다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례비를 받을 수도 있고 자비량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비량 목회를 비성경적이라고 폄훼하는 분들이 있기로 필자 나름의 성경적인 근거를 대보는 것입니다.


위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 전대에 돈을 가지지 말라, 전도여행을 위해서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목회나 전도나 선교가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투자의 개념이 개입할 소지가 있습니다.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의 여지는 첨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생계의 수단)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말씀)전하러 갈 때는 빈 지갑으로 갔다가 올 때는 지갑을 채워서 오는 것은 삯꾼(?)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올 때도 빈 지갑으로 와야 합니다.

'전송'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전'이란 글자는, 먹을 '식' 변에 돈 '전'자가 두 개 붙어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올 차비 갈 차비 주어서 보내면(전송하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타(?) 강사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부흥회를 무슨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일 부흥회 인도하고 2-3백만원 받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칩니다.(이것도 20년 전 기준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나 선교사는 자나깨나 돈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배낭, 두 벌 옷, 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낭에 무엇을 담습니까? 여행에 필요한 비상 물품들이지요. 그리고 여벌의 옷과 여벌의 신(당시는 샌들), 그리고 여벌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객들이 일반적으로 구비하는 것들을,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군사로 부름받은 자는 지가 벌어서 먹고 살면서 군대생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나 사도후 교부시대(속사도시대)에는 자비량 사역자가 많았습니다. 혹 사례비를 받아도 최소한으로만 받았습니다. 사역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코자 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기독교회(특히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온갖 악하고 추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들, 특히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특권을 삼아야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산다고해서, 그것이 부러워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의 참 제자 된 모습을 드러낼 때, 세인들도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것은 초기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실체적 진실입니다.

다음으로는,
11절로 14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합당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평안이란 단어도 세 번 나오고요. 그런데 본문 12절에 나오는 평안(한글성경)은 그냥, '인사하라'는 단어입니다. 원문에는 평안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의 인사는, 상대를 만나면 '샬롬!' 합니다.
평안, 평강을 비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평안을 빌기 전에 머물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머물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장 6절

사도들은 복음을 담지한 그룻이요 사신입니다. 질그릇에 거룩한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 곳에나 머물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머물기에 합당하다는 말은 '제자들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인품)이 되는가, 물질적으로도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그 집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무턱대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손님 대접을 지상의 미덕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그런 일반적인 관습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은 싸구려 상품이 아닙니다.
잡상인이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그런 유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의 집에 머물게 되면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고 화를 당하게 됩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는 일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별을 요하는 일입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과 의지적인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성을 일컫는말입니다. 물론, 말씀(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지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러야 합니다. 밥이 어떠니 반찬이 어떠니 잠자리가 어떠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집의 형편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대접받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평안'이란 얼마나 귀하고 중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몇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과(가정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화해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인사말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빈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거기 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절대로 땅에 떨어져서 밟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평안(평화 혹은 화평,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어지기에 갈 곳을 찾지 못하면 평안을 빈 자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서, 만민을 위해서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평안이 함께 할 것입니다.

14-15절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나태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행했던 대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 대로) 그들도 이방인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자기 확신(선민사상)은 물거품처럼 될 것입니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서 밣힐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악 가운데 살다가 멸망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복음)에 거하여 참된 평안(샬롬-에이레네)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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