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1장1절-2장3절

창세기 처음 부분은 창조기사입니다.

1장 1절의 말씀은 서술적 도입부로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1장 2절은 창조 이전 상태를 말합니다.

1장 3절로 31절까지는 창조기사입니다.

2장 1절은 결론적인 요약입니다.

그리고 2장 2-3절은 맺는 말로서 안식일의 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씀은 틀도 없고 틀 안에 담을 내용물도 없다는 표현입니다. 거기다가 어두움이 온통 뒤덮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빛이 없는 연고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 자연스레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신(성령 혹은 성신님)은 수면 위에서 본격적인 창조를 위해 계실 뿐입니다.

첫 사흘은 혼돈(틀이 없음)에서 질서(틀을 만듬)를 만드시고, 뒷 사흘은 공허(속이 빈 상태)를 없애고 내용물을 채워넣는 창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의 창조-네째 날 해 달 별 창조

둘째 날 아랫 물과 위의 물 분리함으로 궁창(하늘) 창조- 다섯째 날 하늘의 궁창에 새 창조, 아랫 물에 물고기 창조

세째 날 바다와 땅을 창조-땅에 풀 채소와 과목 창조-여섯째 날 풀을 먹을 육축 짐승 기는 것들
그리고 씨맺는 채소와 과목을 먹을 사람(남여)을 창조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를 끝내시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사 복 주시며 쉬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만물의 주인이신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또한 열심히 일하신(창조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얼마나 온 힘을 기울여 일하셨으면 쉬셨다는 표현을 쓰셨겠습니까.

심혈을 기울여서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시되, 창조하신 바가 창조 목적에 부합했기에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충이란 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맡기신 모든 일들을 심혈을 기울여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의 참 된 의미를 온 마음과 몸으로 알게 되고 누릴 것입니다.

게으름과 나태, 무사안일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우리의 소임은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지금도 성 삼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첫 창조가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저주와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은 처음 창조를 바탕으로 재창조에 들어가게 되셨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이것을 단순히 우리의 이해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완성을 내다보고 일하시는 창조역사(役事)입니다.

창조의 완성 때까지 열심히 일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재창조의 결국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재창조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도성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할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첫 창조의 산물인 하늘과 땅과 만물을 붙드시고 섭리하시고 운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토대일 뿐입니다. 그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끝나고 나면 베드로후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지만 붙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과 함께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경영하시는 그 큰 경륜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은 '복음 전파를 통한 죄인 구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을 알았다면 그분의 자녀 된 우리도 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외로이 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보조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녀들과 함께 일하시되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천군과 천사를 부리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엎드리면서 그 분의 뜻대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동참함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나태와 게으름, 안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기뻐하는 자마다 열심을 품고 날마다 주의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창조기사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일하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일하심에 동참하는 복된 여러분이 다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 자신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그 직임을 이루어 가심을 뜻한다.

인간의 예로는,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을 청지기의 자세로 잘 감당할 때 각자의 경륜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글: 구자준 목사

제 5장 성신과 종말론 / 리처드 개핀

 

 

3. 하지만 성신의 사역의 종말론적 양상을 가장 현저하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는 성신을 '보증'과 '첫 열매'로 표현하는데, 그가 이러한 용어들을 써서 성신에 관해 가르친 데에는 교회가 현재 성신을 받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잠정적이면서도 진정으로 종말론적임을 알리려는 구체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아라본'(보증)과 '아파르케'(첫 열매)라는 이 단어들은 성신의 역사를 바울 종말론의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 안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에베소서 1:14은 성신께서 "우리(곧 교회)의 기업에 보증"이 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명백히 종말론적 범주에 해당합니다(참조. 특히 1:13과 4:30; 5:5). 그리고 로마서 8:23과 고린도후서 5:5은 성신께서 신자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 즉 육체의 종말론적 존재에 대한 '첫 열매'와 '보증'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성신에 대하여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한 목적은 교회에 임재해 계시는 성신, 곧 모든 신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풍성하고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성신께서 마지막 날에 치를 금액의 첫 지불금이심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이 첫 지불금은 그 자체가 종말의 실현입니다. 성신께서는 종말론적 존재의 첫 지불금이십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의미에서, 성신께서는 신자들이 이미 처음에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온전히 받게 될 것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성신의 역사는 육체의 부활로써 온전히 성취될 종말론적 변화를 미리 잠정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두 단어는 바울이 성신께 관해 생각할 때 그 방향이 현재로부터 미래로 움직이지 않고, 미래로부터 현재로 움직였음을 보여 줍니다. 즉 미래가 현재의 연장이라기보다(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긴 하지만) 현재가 (종말론적) 미래를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와 온전히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주의에서 취한 역사적-종말론적 구도를 근거로 성신과 연관된 권능을 "내세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6:4-5).

 

사도 바울이 성신의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은 위대한 부활을 언급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도는 42-49절의 단락에서 신자가 장차 입을 부활의 (종말론적) 몸을 묘사하기 위해서 '신령한'(spiritual, 프뉴마티콘. 44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형용사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적인 것, 곧 정신에 적응되거나 정신의 지배를 받는 몸도 아니고, 본질적인 것, 곧 부활의 몸이 지닐 것으로 추정되는 비물질적인 영적 실체도 아니며, 다만 성신의 활동입니다. 사도의 논지는 종말론적 특성들을 지닌 부활의 몸이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성신에 의해 철저히 변화하고 새로워질 것이므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만한 한 단어가 구체적으로 '신령한'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단락은 종말에 성신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우주적인 차원의 것임을 생각하게도 합니다. 사도는 단지 관념적으로 부활의 몸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자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맥락이나 상황도 함께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가 부활 전의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할 때(42-44절), 그 근거를 각각 대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자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으로 대조하는 데 두는 사실에서 잘 나타납니다(45, 47-49절). 따라서 마지막 아담과 관련되시는 성신께서는 다름 아닌 새롭고 종말론적인 창조 질서의 모든 양상에 영향을 끼치면서 우주적인 규모로 수행됩니다(참조. 롬8:19-2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추상적이고 독립된 종말론적 원리들로, 즉 다소 고립된 영적인 교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교훈을 사도의 교훈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적-역사적 관점과 관련지어 다루어야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하반절)

 

내 판단으로는, 이 절을 주의 깊게 해석해 보면 다음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영'(프뉴마)은 성신의 위격을 가리킵니다. 둘째, '되었나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셨을 때 된 일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부활을 기점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에 이루어진 어떤 동일시, 혹은 연합이나 일치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기독론과 성신론은 물론, 신약 성경의 나머지 상당 부분의 교훈도 주관하는 대단히 중요한 고려 사항입니다. 성신과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에 관한 모든 사유는 이 동일화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기우이지만, 나의 이 말을 곡해하여 삼위일체를 혼동했다거나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의 위격 구분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했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삼위일체 사이의 내적 관계를 모를 리 없지만(참조. 예. 롬1:3, 8:3,32; 9:5; 빌2:6), 여기서 그것은 그의 시야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근거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안에서, 즉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는 바에 관하여 말합니다(47절). 그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되셨는가'에 눈길을 두는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성신의 하나 됨 곧 동일화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륜적이고 기능적이고 '종말론적'인 동일화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활(영화)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변화되셨을 뿐 아니라,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사로잡힌바 되신 까닭에, 두 분이 각자의 사역에서 하나가 되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분이 구체적으로 '생명을 주는', 즉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일에서 하나가 되셨기에 두 분을 한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15장의 문맥에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이러한 활동(20절)은 여전히 미래에 이루어질 추수, 곧 몸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지금 누구시고 어떤 분이 되셨는가('살려 주는 영') 하는 점 때문에, 종말론적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 하시는 것이 적어도 암시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 신학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은 사실상 오순절에 관한 사도 바울의 한 문장짜리 주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선포하듯이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와 연결된 일이고 단회적이고 영구한 의의를 가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신 강림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을 덧붙인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넘어서거나 보완하는 다소 독립된 활동 영역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순절은 그릿도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시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까지도 밝히 말해 줍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신을 선물로 주신 날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친히 '살려 주는 영'으로서 주님의 교회에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성신으로 세례를 베푸실 때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시어서 자기 자신으로 세례를 베푸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신을 선물로 주신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 곧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슷한 사고 유형이 요한복음 14-16장에도 나타납니다. 특히 14:12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심'을 전제로 성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약속입니다(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참조. 16:16 이하).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신 뒤에 성신께서 오심(참조. 7:39)은 곧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고 약속하실 때(마28:20),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신적 편재(遍在)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성신의 임재와 권능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4. 신약 성경의 이러한 조망을 정리하여 그 주된 논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종말론적 성신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납득할 만한 일반화인지를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는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이것은 매우 함축적이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성신 안에 있는 종말론적 생명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신과 공유하시는 생명입니다. 신약 성경이 성신께서 교회 안에서 이루시는 일에 관해서 말할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종말론적 생명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신약 성경이 현재의 관점이든 미래의 관점이든 부활에 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을 염두에 둡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9-11에서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들(9절 중)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 이 원리를 끄집어내는데, 여기서 그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9절 상)이라고 말하며, 만일 그러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즉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9절 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다'고 함축적으로 말합나다(10절 상). 짧은 세 문장 안에 가능한 모든 조합이 나옵니다. '너희가 성신 안에', '성신께서 너희 안에',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라는 표현을 사실상 동의어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삶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사용 유형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선행(先行)하고 근거가 되는 사실, 곧 그리스도께서 '살리시는 영'이시고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사실 때문입니다(9절 하). 그리고 11절은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의 죽을 몸도 일으키실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성신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셨듯이 신자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성신은 종말론적인 부활의 권능이십니다. 성신의 권능은 부활의 권능이기 때문에 성신은 종말론적 영입니다.

 

 

리처드 개핀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의 '제5장 성신과 종말론'에서 발췌(73-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신소걸 목사가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서 단에 올라 "나라가 망하면 하나님도 섬길 수 없다"며 목사로서의 소신을 단호하게 외치고 있다.     ©Screenshot 유튜브

코미디언 출신의 신소걸 목사가 2월 11일 서울 시청광장과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서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면 교회도 목사도 성도도 다 없어진다. 내 나라가 망하면 하나님도 섬기지 못한다. 태극기 집회를 비난하거나 침묵하는 대한민국 목회자들은 깨어나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 시간으로 정월대보름이었던 1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탄기국(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 주최 ‘제12차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0여개 보수단체로 구성된 이날 집회는 주최 측 추산 역대 최다 참여인원 210만명이 참여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1부 집회를 마치고 3시30분부터 가두 행진을 진행했다. 대한문에서 출발해 한국은행, 남대문, 중앙일보사를 거쳐 다시 돌아와, 오후 4시 52분부터는 2부 집회를 시작했다.

▲ 2부 태극기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기각, 탄핵반대를 외치고 있다.   © Screenshot 유튜브
 
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흔들며 ‘탄핵기각’, ‘국회해산’, ‘특검해체’ 구호를 외치며 “애국시민들이 일어나 조국을 지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연사로는 탄기국 정광용 대변인, 국회의원 김진태, 청년 이장우, 국군간호사관학교 애국장교단 박숙자 대령, 해국사관학교 국국동지회 백동일, 정미홍 아나운서, 미디어워치 대표 변희재 , 재미교포 박용락 회장, 탈북자 김재승, 박철 천주교 신부, 서석구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 미국 변호사 인지인 씨 등이 나와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를 이끌었다.

특히 이날 처음 태극기 집회 연사로 나온 신소걸 목사(서울 순복음우리교회)는 단에 올라 먼저 “할렐루야”라고 집회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사랑하는 애국국민 여러분, 저는 너무 화가 나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나라가 망해도 교회가 있을 것 같은가? 나라가 망해도 목회할 것 같은가?”라며 목회자들이 조국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호소했다.

신소걸 목사는 “조국의 현실을 보고 이 땅의 존경하는 기독교계 어르신이신 지도자 목사님들과 중대형교회 목사님들께 감히 호소합니다. … 목사님들은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계실 겁니까? 나라가 망해 가는데도 두 손 들고 기도만 하며, 나라 앞날의 존폐위기 속에서 한 치 앞도 분간 못 하는데도―종북 좌파가 ‘피라니아’와 같이, ‘하이에나’와 같이 민주주의를 물어뜯는데도 전도만 외치며 오직 기도에 힘쓰시겠다며 시국을 외면하시겠다면―언제까지 이런 위선으로만 일관하실 겁니까? 혹시 성도들이 흩어질 까봐 종북 좌파들 눈치만 보고 계신 겁니까? … 아니면 교회에서 쫓겨날까 봐 옳은 말씀도 못 하시고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러시다면 목사님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비겁하신 분들입니다”라며 약 6분가량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 태극기 집회에서 연사들이 단에 올라서 있는 가운데 신소걸 목사가 스피치를 전하고 있다.   © Screenshot 뉴스타운 TV  
 
이날 집회의 영상을 유튜브 방송을 통해 접한 네티즌들은 “목사님의 피 끓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그만 손바닥 만한 태극 물결이 지금은 거대한 구름같은 태극물결을 이루었다” “저들이 침묵하면 하나님께서는 길가의 돌들로도 소리치게 하실 것이다(눅19:40)”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에4:14)” “목사님, 추운 날씨에 수고 많으셨구요. 건강에 유의 하세요” “애국충절의 호소를 듣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등 응원의 댓글들이 쏫아졌다.

한편 신 목사는 지난 9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후배 개그맨 김제동의 시국 발언에 대해 “탄핵은 기각되어야 하며, 국민 오도 선동의 스피커에서 이제는 국가 발전을 위해 일익을 담당하는 큰 스피커로 변화되길 바란다”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진리의 길 vs 죽음의 길”

(영적세계의 실상)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크리스찬들에게는

세상과 염려와 유혹의 영들이

끊임없이 죄 가운데 빠지게 하려고

독화살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대다수의 크리스찬들이

성령의 인도와 순종의 도를 따르기보다는

성경책과 교리 자체를 우상시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크리스찬들을

이단으로 몰아 등을 돌리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아주 유익한 영상입니다!


깨어있는 크리스찬들은

영적 전쟁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 예수 안에서 천국본향을 향한

여정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번역: 지저스파워 /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사람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14가지  (0) 2017.03.01
싸우는 이유  (0) 2017.02.27
믿음의 선배  (0) 2017.02.02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0) 2017.01.23
휴거후 남겨진 사람들(3)  (0) 2017.01.14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