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병 3기까지 앓았던 나는 가슴을 칼로 후벼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며 '나도 이렇게 매 맞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구타하던 소대장은 보이지 않고 주위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나를 둘러싸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 사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네." 
  
가슴 명치를 졸지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인해 나는 얼마 동안 숨을 쉬지 못하고 그렇게 혼절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영적 싸움이었다. 삼청교육대라는 곳에서 악의 세력과 선한 세력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앱 6:12). 
  
지옥 훈련이 끝난 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부대에 도착하던 첫날과 같이 400여 명의 훈련원들을 연병장에 도열시켰다. 그리고 나서 중대장이 단위에 서서 훈련을 제대로 마쳐서 사회로 귀환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과 제2차로 훈련을 더 받게 될 사람들의 명단을 호명하였다.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대표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사단장이 수여하는 표창장까지 받으면서 삼청교육대를 떠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고 기뻐했다. 이제 이 지옥 같은 훈련소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100여 명 정도는 2차 훈련소로 보내졌다. 순화교육 기간 동안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곳에서 무엇을 잘하고 잘못한다고 성적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또 구타당하기 싫어서 훈련에 임했을 뿐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고, 또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게 되어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연병장에서 별 3개를 단 사단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또 한 번 일장 연설을 해댔다. 
  
"여러분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정신, 육체 훈련을 받았다. 앞으로 다시는 사회의 질서를 거슬리는 범법행위를 하지 말고 건전한 사회인이 되길 바란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크신 은혜가 있어서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오늘을 기해서 사회로 환원하게 되었다. 부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근면, 성실한 삶을 살기 바란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 수군하는 술렁임이 있었다. 아니 전두환이라는 괴물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고생을 했는데, 그 놈의 은혜라니 …. 아무리 권력 앞에 모든 것이 충성을 서약하고 무릎을 꿇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마음 속에서는 무언의 분노가 용솟음쳤다. 
  
우리를 태우고 왔던 버스는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은 장소에 우리를 던져 놓았다. 구치소에 도착하자 관리들이 뛰어나와 우리들을 환영(?)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계엄령이 발효되고 있는 시기이니 몸조심하고 다시는 잡혀 오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들은 아직 블랙리스트에 이름들이 올라 있으니 앞으로 6개월 동안은 어디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주지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일이 아닌가. 무고한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구치소에 보내고 강제로 사회적응훈련이라는 것을 받게 하고서는 나는 어찌할 수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이라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고 "나는 어찌 할 수 없었다"라고 변명을 한다니 도대체 말이 된단 말인가.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함께 훈련을 받던 사람들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는 계속 군 부대에 남아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가운데는 군부대를 거쳐 청송보호감호소까지 만 3년 이상 삼청교육대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로 3년 동안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왔을 때 사회는 오히려 이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소위 말하는 사회적응훈련을 다 마쳤으니까 이제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가기 전보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하기 힘들게 되었던 것이 었다. 또한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정과 사업체가 삼청교육대 훈련으로 인해 박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곳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사람들은 비록 가정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삼청교육대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삼청교육대는 애매한 시민들의 권리와 인권을 완전히 묵살하고 권력의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전두환 정권의 상징이었다. 
  
삼청교육대 지옥훈련 후유증은 내 인생 전체에서 지난 25년을 사로잡고 있었다. 비록 죽거나 불구자가 되어서 나오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지만 그곳에서 나온 후로 세상이 전과 같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과 그저 혼자만 있고 싶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가장 먼저 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내와 두 살 난 아들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웃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알아보니 아내는 아이를 셋째 형님 집에 맡기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지 도망간 여편네를 찾아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 면서 그런 아내가 이해되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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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성전이시다 / 샘 스톰스

 

 

내가 인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예들 중 하나를 들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시며 구약 시대 성전의 물리적 구조가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종말에 나타날 사건들과 더불어서 또 하나의(제3의) 물리적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승인하고 감독하시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해석 원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기 위해 이 주제를 잠시 검토하겠다.

 

이 중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구약 성경의 서사(narrative)인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광휘, 하나님의 장엄하고 빛나는 영광이 자기 백성 중에서 가시화되는 광경, 곧 하나님의 '쉐키나'를 목격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광휘와 영광, 즉 '쉐키나'가 없다면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 세계를 특징짓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가 지은 장막 곧 성막에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자기 백성을 더불어 만나시려는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게 할지니라"(출25:8)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곳에서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섰고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셨다"(출33:9).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출40:34)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참고. 레9:23; 민14:10).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머무는 동안 성막에 적용된 원리는 솔로몬 성전에 훨씬 잘 적용된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로 메어 들였을 때"(대하5:7),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기 때문"(대하5:14).

 

바로 이런 예비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포를 듣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스케누)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 또는 "천막에 거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가 지은 천막 곧 이동식 성막과 최종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처소로 삼았던 구약 성경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요지는 하나님이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되 더 인격적인 방식으로, 곧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이신 나사렛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참되고 궁극적인 '쉐키나' 영광, 곧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처는 자기 아들의 육신이다! 지금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된 대단히 탁월한 영광에 비하면, 과거에 신비로운 구름으로 갈진 천막/성막/성전 안에 간직되었던 그 영광은 단지 예시적으로 깜빡거리는 램프의 불빛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참고. 골1:19).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천막이나 장막에 거하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분명한 현존은 대리석과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자기 장막을 치시는 분이다.

 

요지는 옛 언약에 속한 성전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모형 또는 전조였다는 것이다(모형론에 대해서는 아래서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성전은 바로 모세 율법이 보관된 장소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그 율법의 성취이시다. 성전은 계시와 관계의 장소였는데, 하나님은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만나시고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만난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였는데, 죄 용서는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죄 용서를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다(막2:1-12을 보라). 이스라엘 자손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하고 절기를 기념했다. 오늘날 우리는 지리적 장소와 상관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참고. 요4:20-26).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만나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지은 특정 건물이나 장막이나 구조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게리 버지(Garry M. Burge)의 다음 진술은 옳다. "신성한 공간은 더 이상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성전으로 여겨진다. 여호와 하나님의 '쉐키나'는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능력 있게 깃들인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2:21-22).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처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인 성전도 아니고 단순히 하늘도 아니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이 일부를 이루는 교회다."

 

이 성전의 설립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이며 지속적인 과정이다(또한 엡4:15-16을 보라). 비록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우리가 교회를 유기체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도 다소 역설적인 어법을 사용해서 신자들을 "살아 있는 돌들"(벧전2:5)이라고 언급한다는 점을 상기하라!

 

바울은 이 진리를 근거로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호소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바울은 성적 순결을 요청하는 대목에서도 다음과 같이 거듭 호소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또한 이 진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벧전2:4-10을 보라).

 

우리는 이 모든 논증을 통해 고린도후서 6장 16절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최종 선포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바울은 이런 논지를 보강하기 위해 장차 올 성전에 대해 예언한 구약 성경의 여러 본문(레26:11-12; 사52:11; 겔11;17, 20:34, 41; 삼하7:14)을 종합하는데, 그중 하나인 에스겔 37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게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거두절미하고 요지를 말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히 거하실 종말론적 성전에 대한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시작하여 부활에서 완성함으로써 성취하고 계신데,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점진적으로 세우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이고 물리적인 성전은 어떻게 될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 목적에서 영적인 중요성을 상실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마태복음 23-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나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이에 대해 많이 언급할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 백성에 대해 심판하실 때, 성전 건물들은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기 위해 떠나시는 그 순간에 물리적.영적 측면에서 모두 주님께 버림받는다. 예수님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를 그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을 때"(마27:51), 하나님은 성전을 자기 현존으로 축복하거나 성전을 이가봇(영광이 떠났다)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정하기를 영원히 그만두신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에 극적으로 들어가신 것(마21:1-7. 소위 "개선 입성식")과 똑같이 극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을 떠나신다. 한 때 웅장하고 영화로웠던 이 하나님의 집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완전히 넘겨진다("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너희에게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 강조는 필자의 것임).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겔10:18-19, 11:22-23을 보라). 주후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물리적으로 최종 파괴되는데, 이로써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유기가 외형적으로 완결된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서 결코 되돌아가시지 않는다. 참으로 성전을 떠나 감람산에 앉으시는(마24:3) 예수님의 행동은 에스겔 11장 23절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이것은 오늘날 바위 돔 사원이 서 있는 장소 근처인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는 미래의 성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성전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종교 활동을 재개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 일이 가져오게 될 종교적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함축된 정치적.군사적 파장 또한 명백하다. 이 일이 앞으로 언제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록 실제로 발생하더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세우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종말론적.신학적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은 예수님과 그분의 영적인 몸인 교회다.

 

하나님이 장차 성전 재건을 승인하시리라고 제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구속과 관련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퇴행을 나타내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부인하는 처사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고린도후서 6장의 이 대목과 다른 곳에서 바울이 명시적으로 단언하는 내용을 모욕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의 이 구절에서 밝히는 현실적인 주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어떤 표현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오늘날 세상에 나타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또 하나의 문화 단체나 우리 이웃의 "체감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봉사 집단"이 아니다. "대신에 교회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공통의 신원으로 연합되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 같이 예배하고 경외하는 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영광스럽고 고상한 신원을 늘 반영하기를 기원한다.

 

 

샘 스톰스의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발췌(21-2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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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생지옥이었던 삼청교육대에서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강제입소된 지 10여 일 정도가 지났을 때, 하루는 전체 입소자들 4백 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중대장이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있는가?" 하고 공개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예수를 믿지도 않았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손을 번쩍 들고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너 기도할 줄 아나?" 
"예." 
"오늘부터 네가 매일 저녁마다 대표기도를 한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기도가 끝나면 모두 아멘을 복창한다. 알겠나!" 
"예." 
"자,그럼 한 번 대표기도해 봐." 
  
그때 첫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마디 짧은 기도를 하는 동안 온몸에 진땀이 얼마나 홀러 내렸던지 입고 있던 군복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날부터 나는 저녁 점호시간에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은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기도를 마칠 때 유일하게 "아멘"이라고 입을 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삼청교육대 안에서 내가 대표기도 훈련을 받게 되리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다.  
  
그 당시 나는 거의 비슷한 내용의 대표기도를 계속 반복했다. 주로 회개의 기도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참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불신 가운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항상 원망과 불평과 짜증만을 토하며 우리들 멋대로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여기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우리 400여 명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잘못한 것, 부모에게 잘못한 것, 아내에게 잘못한 것, 사회에서 잘못한 것 모두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합니다. 여기 잡혀 온 우리들은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의 병든 심령을 고쳐 주시옵소서. 우리를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와의 인연이라고는 어렸을 때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절기 때마다 선물을 받기 위해 동네 주일학교에 나갔던 것이 내 신앙 경력의 전부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입을 통해서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와 치유의 기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기적이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적도 없었지만 대표기도를 하면서 나는 내면으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알기 원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아마도 그 중대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 같다. 자신이 비록 삼청교육대를 지휘하는 장교의 입장에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신앙에 비춰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입소자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 대표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 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조교들이 하나같이 악랄하고 못됐던 것은 아니었다. 조교 가운데는 입소자들에게 인간적으로 동정을 표시하고 절대로 구타를 하지 않는 그런 신사적인 조교들도 있었다. 어느 날 하루는 잠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건빵 한 봉지와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메모를 읽어보고 나는 누가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훈련받는 것이 많이 힘들겠지만 당신이 기도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요. 조금만 더 인내해서 꼭 건강하게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나는 그 메모 내용으로 미뤄 그가 기독교 신자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고 또한 누구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다른 조교들과는 많이 달랐던 그는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설을 내뱉는 일이 없었고, 내무반 점호시간에도 이 조교가 점호를 하는 날이면 가장 쉽게 넘어갔다. 물론 단체기합이나 구타가 없어서 좋았고 그는 늘 "이제 이곳에서 조금만 고생하면 곧 사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불어 넣는 말을 해주곤 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 조교의 얼굴을 떠올린다. 황량하고 삭막한, 그리고 공포 분위기만 조성되고 있었던 삼청교육대 안에서 그런 조교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저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소망을 키울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하는 대표기도를 일주일 정도 했을 때였다. 어느 날 하루는 점심식사를 30초 만에 마치고 모두 다시 훈련장으로 집합했는데 소대장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너희들 중에 매일 대표기도 하는 놈이 누구냐?" 
"예, 접니다." 
"그래,너 이리 나와봐. 이 자식이, 너 여기가 무슨교회나 종교집단인 줄 알아?" 
  
가슴 정중앙으로 돌맹이 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가 떨어졌는데,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 이 새끼야. 네가 하나님을 믿는 놈이면 지금 기도 열심히 해서 내가 너를 못 때리도록 한 번 해봐. 이 망할 놈의 예수쟁이야." 
그는 평소에 기독교인들을 무척이나 혐오해왔고 점호시간에 대표기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해서 언젠가 중대장이 없는 틈을 타서 대표기도 하는 놈을 잡아 해코지를 하려고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자 곧바로 다시 가슴 정곡을 주먹 으로 가격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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