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으로 너무 일본에 휘둘리는듯한 한국의 정치판과 외교정책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글을 이곳에 옮겼습니다.



"조선 국토는 대마도-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1750년대 영조시대 제작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말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부터 우리 땅, 고려-조선의 왜구정벌이후 구한말까지 대대로 이어진 영토인식이다. 이런 기록은 너무나 많다.


“잃어버린 우리 왼발을 다시 찾자!”

일본의 ‘독도 강탈’ 공세가 노골화하면서 대마도 반환운동을 벌이는 목소리가 뜨겁다.
임진년의 악운! 올해는 임진왜란 420주년, 일본은 독도를 끝내 침공할 것인가. 독도보다 더 크고 억울한 대마도는 다시 찾아 올 길이 없는가.



이승만 “대마도 반환하라” 60여차례 요구

대마도 반환을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8년 8월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이 무력강점했지만 의병들이 일어나 이를 격퇴했고, 도처에 그 전적비가 남아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경계선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따라서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국회에서는 ‘대마도반환’ 결의안을 만들었고, 이승만은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법적조치’를 취하면서 수시로 “대마도 내놔라”고 요구한 것이 6.25때까지 무려 60여차례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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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김일성이 우리를 살려준다” 환호

당황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회피하다가 북한의 6.25 남침전쟁이 나자 쾌재를 불렀다. “김일성이 일본을 살려준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승만의 ‘대마도 요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전쟁특수로 경제대국 발판까지 거머쥐게 된 일본. 김일성과 소련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소련 공산당 앞잡이 김일성이야말로 ‘친일파 왕초’라 할만하다.

1952년 1월18일 이승만은 ‘평화선’을 선포한다. 6.25전쟁중 독도를 괴롭히는 일본에 대하여 ‘독도와 이어도’를 주권수역 울타리로 쳐서 확보했다. 대마도까지 평화선 안에 넣고 싶었지만 어쩔 것인가. 대마도 해방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이 강점한지 80여년이 지난 그때, 공산당과의 전쟁에 일본군이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자 “총뿌리를 돌려대겠다”며 반대한 이승만도 수륙 양면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제법전문가(프린스턴대 박사) 이승만이 ‘실효지배’의 힘을 모르겠는가. 대마도를 도둑맞은 고종 때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싸우다가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대마도는 식민지 그대로다. 6.25가 그의 숙원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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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속방’ 대마도주에 관직...‘군신지간’

부산에서 45㎞ 큐슈에서 150㎞-거리만 봐도 우리 땅인 대마도!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요시시게(宗義調)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한 전쟁 임진왜란. 왜국의 강압에 굴복하여 본의 아닌 용역을 맡았던 대마도는 조선의 엄벌을 받아 굶어죽기 직전에 다시 조선이 곡식과 면포 공급을 재개하여 살아났다.

삼국시대엔 각국세력이 혼재했으나 통일신라때부터 고려와 조선 말까지 대마도는 <계림(鷄林=신라) 관할도서> <고려사 '고려의 목(牧)'><동래부(東萊府)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한중일(韓中日) 3국의 사서(史書)들과 지도들, 구미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땅, 코리아 땅이다.


◆ 조선 왕조 5백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한 예로 세조가 대마도주에게 내린 직명은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崇政大夫判中樞院事對馬主兵馬都節制使)였다.

조선왕조의 대마도 인식은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성종, 연산, 광해, 영조, 순조등이 내린 ‘대마도 교지’를 비롯, 빈번한 교류기록에 <대마도는 조선의 속방, 군신지간(君臣之間>이란 표현은 한곁 같다.


◆ 1750년대 영조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大東總圖)>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라는 말은 수천년 내려오는 우리의 국토인식, 주권의식에 다름 아니다.

해좌전도(海左全圖),팔도천하지도(八道天下地圖), 동국조선총도(東國朝鮮總圖), 조선방역지도, 동국도, 천하대총일람지도, 조선전도, 강원도도(江原道圖), 경상도도(慶尙道圖)등등 대마도 지도가 많기도 하다.

또한 퇴계 이황(李晃)의 문서, 실증사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외전'(東史外傳)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물론, 특히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비어고'(備禦考)에서 대마도현장 사료 및 주민의 언어, 복식, 풍습등을 종합하여 '일본 왜'와 다른 대마 조선인의 문화인류학적 특징을 고증해 놓았다.


◆ 이승만이 말한 '전통적 경계선'이란 현해탄(玄海灘)을 가리킨다. '현해탄'은 '현해'의 잘못된 표기(일본사전)라는 이 해역은 큐슈의 북쪽 연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듯이 대마도 해협이나 대한해협과는 전혀 무관하다. 큐슈의 북쪽이래서 북현무(北玄武)의 ‘현해’인 것이다.

명치유신→지도 변조→대마도를 훔치다

1868년 명치유신 혁명에 성공하자 일본에 불어닥친 정한론(征韓論)의 열풍은 대마도부터 탐냈다. 구한말 약해질대로 약해진 조선의 혼란기를 틈탄 일본은 식민열강의 남의 땅 빼앗아먹기 수법부터 흉내낸 것이었다.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黑船) 공격에 놀라 막부(幕府)를 무너뜨린 사무라이들은 조선식민화로 치달았다. 우선 대마도를 이즈하라번(嚴原藩)으로 만들었다가, 1877년 나가사키현(長崎縣)에 편입시켜 버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행한 것이 <지도 변조>! 절도 사기꾼 행각이었다.


최근 나온 책 <일본이 숨겨오는 대마도-독도의 비밀>을 보면, 독도보다 대마도에 관한 ‘한국소유권’ 자료가 무수히 넘쳐난다.

대마도 연구가인 저자 김상훈씨의 연구 결과를 요점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786년 일본인 하야시(林子平)가 만든 지도<삼국접양지도>에서 ‘대마도는 조선땅’이다.
▶ 1861년 일본정부는 이 지도를 열강에 제시, 일본영토의 경계를 국제 공인 받는다.(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 일본은 이 지도 제작때부터 80여년간 공식 국가용으로 사용했다.
▶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지도 모두 ‘대마도는 코리아’ 영토다.
▶ 미국지도에 대한해협(Strait of Korea)은 대마도 남쪽 바다로 표시되어있다.
▶ 1868년 미국 페리제독 (삼국접양지도 공인 당사자) 자서전에 나온 지도 역시 대한해협은 대마도 남쪽.
▶ 1873년 일본해군이 만든 지도부터 대마도 색깔을 일본 땅색깔과 일치시켜 변조한다.
▶ 1878년 프랑스 주재대사 다나베 타이치(田邊太一)에게 훈령, 프랑스어판등 삼양접양지도를 모두 수거한다. 대신 대마도-일본 색깔을 일치시킨 ‘필사본’을 각국에 보급시킨다.
▶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일본학자들은 조선의 대마도 기록 문서를 재정리한다.
▶ 1923년 조선사편찬위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일당은 대마도에 건너가, 한국관련 문서 66,469매, 고기록 3,576권, 고지도 36건, 고서 18점, 그림 53점등을 수거 은폐, 변조하고 불태웠다. 유적도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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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대마도 안내놓으려 독도 싸움 계속한다”

“일본이 왜 저러는지 아십니까? 대마도 때문입니다. 대마도를 잃을까봐 독도 시비에 매달립니다. 한국이 대마도에 눈을 돌리면 돌려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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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상훈씨는 순진한 우리가 일본 술수에 말려들고 있다고 흥분한다.

독도를 방문했던 극우파 자민당 의원들은 물론, 한국 편을 드는체 활동하는 국내 일본 학자들도 사실은 ‘대마도 지키기’에 나선 ‘X맨’들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구한말 명성황후를 살해한 낭인(浪人)들도 사실은 정부고관, 신문사사장, 학자들이었다며 일본의 ‘양동작전’을 조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왼쪽 발을 잃었으니 나라가 바로 설 수 없지요. 대마도 강탈문제를 공론화하여 대마도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하면 독도 문제도 더불어 풀릴 것입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8월29일은 망국국치 102년이다. 왕비를 살해하고 왕을 멋대로 갈아치워도 속수무책이었던 조선 왕국. 일본은 매국노들을 양성하여 나라를 통째로 먹었다.



 

 

 


(창 47) 목자의 삶, 나그네의 삶

    7년 기근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을 떠나 야곱 일가가 모두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고센 땅에 도착합니다. 요셉은 형들 중 다섯을 택하여 바로를 알현하게 합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습니다, “너희 생업이 무엇이뇨?” 한국에서는 누구를 만나 인사를 나눌 때 옛날에는 어디에 사는 아무개, 누구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요즈음은 대개 자신의 소속회사나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어느 아파트 몇 평짜리에 사는지로 신분(?)과 등급과 써클이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이들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생업을 묻습니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이 같은 질문을 하실지 모릅니다.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 그 때 “저는 이렇게 이런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외다.” 그런 다음 야곱이 바로에게 나아가 축복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목자가 축복의 권세를 가진 사람, 천하의 바로까지 축복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로군요. (영어성경은 축복의 인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게 그거 아닌가요?)

    축복인지 축복인사인지가 끝난 후 바로가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나이인가 봅니다. 오래 살고 보아야겠군요. 야곱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조상의 연수에 미치지 못 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보세요. 바로 앞에서 야곱의 대답은 ‘목자’였으며 ‘나그네’였습니다. 그리고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목자는 집이 없습니다. 양떼를 몰며 양떼와 함께 이동하며 장막에 기거합니다. 그 삶이 그리 평안하지는 못 합니다. 때로는 뜨거운 태양 아래 목마르고, 때로는 험악한 폭풍우에 부닥치며, 때로는 추위와 더위와 싸우며 때로는 악한 짐승을 지팡이와 막대기로 쫓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일백삼십 년을 살았다고 야곱은 대답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 인간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험하고 거친 세상 가운데서 악한 자들이 잡아먹고 삼키려고 노립니다. 양들은 악한 자들의 올무에 걸리고 구덩이에 빠지며 위험과 환난에 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시 28:9).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며 목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도다.” 하시며 거칠고 험악한 나그네의 삶을 몸소 사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 17)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귀한 직업이 목자인데, 그러나 애굽사람들은 그들에게 고센 땅, 좋은 땅 라암세스를 주긴 했지만 목축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목자를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목자를 따르려 하지도 않고, 목자의 삶을 살려고도 않고, 나그네의 삶은 더욱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초라한 장막 보다는 웅장한 집을 짓고 거하며, 거칠고 힘든 삶 보다는 안온하고 풍족한 삶을 살기 원하며, 재산을 모으며,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좋은 것. 즐거운 것들을 좇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이 땅에 살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땅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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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크리스천투데이, 발렌타인데이 맞아 소개

    사랑
    ⓒPixabay

    발렌타인데이가 하루 지났다. 발렌타인데이는 원래 기독교의 성인 발렌티노의 축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 연인들끼리 카드나 선물을 주고 받는 날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여성 쪽에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날로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낭만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최근 성경적인 관점에서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경구절 14개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아가 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3.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4.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5.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6. 요한일서 2장 5절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7. 히브리서 10: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8.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9. 잠언 15:17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

    10. 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갚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8~19)

    11. 레위기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2. 데살로니가전서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라”

    13.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4. 골로새서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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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적으로 풍요한 미국 땅에 살면서 그것도 40여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을 기억해낸다는 것은 마치 모래사장에 떨어뜨린 동전 한 닢을 찾아내는 것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고향 충청도의 I960년대를 생각하면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지지리도 못살았다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고 동네 아이들의 행색은 아마도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몇몇 부잣집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먹을 것, 입을 것을 늘 걱정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한국은 참으로 특별한 나라다. 한 세대(generation)가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했던 국가에서 세계적으로 잘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는 급성장,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 수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계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나가, 특별히 후진국인 제3세계 국가에서 서방권 선교사들보다 효과적으로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 40대 이상의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그들의 혈액 속에 빈곤을 이해하고 가난을 경험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국인 선교사들은 빈곤한 국가의 선교사로 헌신한 다른 어느 나라의 선교사들보다 대체적으로 빠른 시간에 현지 적응을 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까마득한 과거의 일들이 되었지만 막상 과거의 한국처럼 못살고 있는 선교지에 도착해보면 과거의 기억들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그래서 아프리카 또는 남미, 아시아 등 선교지를 방문하는 한국 성도님 또는 목회자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대개의 경우 "어휴, 꼭 30~40년 전 한국 모습을 보는 것 같네!"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가난했던 것도 하나님의 역사였고, 또한 단시간 내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한 나라가 된 것도 하 나님의 강권적인 물질적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지말에 한국 민족을 세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렇게 가난도 겪게 하셨고 그 후에 선교에 필요한 물질도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와 한국에 기독교인이 팽창하던 시기가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의 물질적인 복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물질적인 풍요함을 받기 위해서는 세계 선교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은 물질적인 복을 엉뚱한 곳으로 쏟아붓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받은 물질들의 상당한 부분을 개인의 향락과 사치를 만족시키는 데 소모하고 있다. 한국 민족이 받은 복을 나눠 주는데 인색한 모습을 계속 보이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성령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 열심을 내서 봉사해야 할 것이며, 각 선교단체들은 쌀 한 톨이 없어서 굶은 상태로 잠자리에 드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위해 자선과 자비의 깃발을 높이 올려야 할 것이다. 받은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면 썩기 시작한다. 받은 것은 나눠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가난한 한국의 1950년대에 8남매(5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나 굶는 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랐다. 위로 형님들이 있었지만 우선 자기 입을 채우기가 바빴고, 부모님들 또한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눠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연로하신 아버님은 그 와중에 중풍 증세를 보이셔서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길을 가다가 풀 한 포기라도 반듯한 것이 보이면 누가 먼저 뽑아 먹을 세라 번갯불처럼 달려가서 풀포기를 뽑아 먼저 제 입에 털어 넣곤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인가 동네 입구에 작은 교회가 하나 세워졌다. 그 당시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교회는 뭐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 생긴 교회에 가면 가끔 맛있는 사탕도 집어주고 때로는 흰쌀밥에 고깃국까지 얻어먹을 수 있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한 달에 몇 번씩 교회 문을 두드렸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교회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 몇 명이서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찬양대를 만들었는데, 한번은 대전 근처 한 신학교 주관으로 교회대항 찬양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등수는 몇 등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회 참가 부상으로 연필 한 자루와 조그마한 공책 한 권을 받았다. 그런데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인솔한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함께 간 친구 한 명이 주최 측의 착오로 인해 상품을 아무 것도 받지 못했으니 연필, 공책 두 가지를 다 받은 사람이 한 가지를 나눠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소중하게 한 손에 쥐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그 친구에게 전해줬 다. 선생님이 너무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는데 그 친구에게 준 연필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특별히 그 연필을 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 친구에게 다시 가서 연필을 돌려 달라고 해야겠다.' 깜깜한 한밤중에 이웃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연필을 다시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물론 그 친구가 연필을 돌려 줄 리는 만무했다. 나는 애원하고 간청하다가 결국 내 성질에 내가 화가 나서 주먹다짐까지 했던 기억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연필 한 자루라도 그렇게 귀한 시대를 살아왔다.  
      
    교회와의 첫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도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면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회를 나가지 않고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길고 긴 불신의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16세 때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 당시 큰형님과 둘째 형님이 서울에 올라와 단칸방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지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와 형님들에게 갑작스런 민폐가 됐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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