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와 우리의 삶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담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읽는 근본적인 목적이며 신학 본연의 주제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며,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언설들을 체계화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어지며,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밝혀진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한다. 필시 오직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신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신들을 창조해 내었다. 사람들은 신들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후에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다가 그러한 신들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신들을 단지 자신들에게 복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삼았으며, 신들과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조작된 신들과 다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하심이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수한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나 지체가 없으시며, 정욕도 없으시고, 불변하시며,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시며, 전능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자유로우시며, 지극히 절대적이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불변성과 영원성과 무한성을 가지고 계시며, 존재론적 한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존재와 완전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는 결코 창창하지 않으며 우리의 앞날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신뢰할만하지 못하며, 우리는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각종 사고에 취약하다. 필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 지혜, 권능, 거룩하심, 공의, 인자, 진실하심에 있어서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인간들과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참고. 잠 3:5-6).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예배와 경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기도로 구현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경배해야 하며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필요를 아뢰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가지신 불변하시고 지극히 의로우신 뜻의 협의들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다. 따라서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절대적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데,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이에 대해서 불평할 만한 아무런 이유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순복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품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신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참고. 요일 4:8).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인간의 말과 글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어려움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신다(참고.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심히 구하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신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전함과 육신의 연약함과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원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며,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풀어주시고, 물질과 건강을 부어주시며, 영적인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또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에서 지극히 공의롭고 두려우신 분이시며, 모든 죄를 미워하고, 범죄자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죄를 면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기에 죄를 정확히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잘못을 짚고 넘어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동시에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은 홀로 자신에게 자족하시며, 자신이 만드신 어떤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저들로부터 어떤 영광도 얻어내지 않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을 통하여 피조물에게 나타내신다. 즉 모든 피조물은 생명을 외부(하나님)로부터 가지고 오지만,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돌림이나 피조물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답하실 거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해를 보는 거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면서 홀로 만족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유일한 근원(원천)이시니,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만물 위에 주권적 지배권을 가지시고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을 통하여 만물을 위하여 만물 위에 행하신다. 그분 앞에는 만물이 열려있고 명백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위에 드리워 있음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온전히 깨달아 그러한 영광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알게 한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완전한 주권과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피조물에 의지하지 않으시니,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협의, 모든 행사와 모든 명령에서 지극히 거룩하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와 경배와 순종을 돌려드려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만물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초월적인 지혜와 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피조세계에 내재하시는 그분의 위대한 영광을 깨닫는다면 겸손하게 되고 그분을 경배하게 된다.

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말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것은 인간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이 교리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혹은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의 지식과 지혜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방도가 없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섣불리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 분 하나님의 상호협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전한 조화와 협력을 이루시면서 일하셨고, 그분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이나 갈등도 없었다.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에 이러한 일치가 가능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일체이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교제(관계)를 생각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21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가르쳐주는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됨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접하면서 우리의 연합과 일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분열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 교파가 많고, 교회 안에 분쟁이 있어서 서로 싸우는 현상은 심히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러한 조화와 협력을 모색해야 함을 배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를 나눈 한 형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떠한 분열이나 갈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치를 도모해야 하며 화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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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천주교에는 연옥이라는 교리가 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영혼의 중간 정거장과 같은 곳으로 예수를 영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영혼들, 또는 일찍 죽은 아기의 영혼들이 천국에 올라가기를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도 하고 가끔씩은 특별 헌금도 한다.  
  
가톨릭교회의 연옥교리가 가장 활성화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시기는 중세시대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면서면죄부를 대량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 들은 연옥에 가 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면죄부를 사들였는지 모른다. 저들의 마음 가운데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래서 중세 교황들은 이를 교활하게 이용해서 면죄 부 장사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둘째 누나를 위한 기도를 하다 보면 나도 어느 사이엔가 면죄부 같은 것이 있다면 얼마의 돈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구입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오,하나님! 저는 연옥의 교리나 면죄부를 통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 하나에 내 생명을 걸고 믿습니다. 하나님,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우리 모든 인류의 죄값을 치르셨던 것처럼 자신의 꺼져가는 생명을 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던 우리 둘째 누님의 불쌍한 영혼을 하나님께서 친히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사역, 즉 구원의 사역은 우리 인간들의 이해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는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구원 방법이 영혼의 세계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 누님에 대한 풀 수 없는 회한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사랑하는 둘째 누님,우리 이제 조만간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납시다. 누님! 정말 사랑하고 많이 감사합니다." 
  
나는 야간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둘째 누님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지난 2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투병생활을 했 던 고향집을 떠나 다시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했다. 당시 내 나이 19세였는데 고향에서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폐병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어 이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대도시로 나가서 인생을 새롭게 도전하고 싶었다. 서울까지 올라가는 완행열차가 왜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던지 마음만 바쁘게 움직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밤이 새는 줄 도 모르고 기차 구석에서 이런 저런 공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형님 집을 찾아갔다. 둘째 형님은 그 당시 경찰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과 형수님은 독일 간호사로 나가 일하고 있어서 그나마 생활이 좀 안정된 편이었지만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3명의 자녀와 살림을 거들고 있는 어머니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살림에 나 같은 식솔이 한 명 더 추가된다는 것은 아무리 형제지간이라고 해도 힘든 일이 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 직장을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형님 집에 얹혀 살아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형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어머니는 2년 전 폐병으로 피를 쏟으며 고향으로 쫓겨 내려갔던 내가 아직 좀 여위긴 했어도 건강을 회복한 모습으로 나 타나자 눈물부터 주르륵 흘리셨다. 
  
"그래,이제 다 나은 것이여?" 
  
"예." 
  
"밥은 잘 먹냐?" 
  
"예."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 형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터인데." 
  
"시골에서 뭐 할 것이 없어서요. 그냥 취직할 때까지만이라도 부탁 좀 해보렵니다." 
  
열일곱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둘째 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물론 형님의 마음 가운데도 형제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워낙 사는 형편이 힘들 때라 8남매나 되는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둘째 형이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다시 상경한 것을 알자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나는 당장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오랫동안 경찰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강직하게 훈련된 둘째 형님에게 며칠만이라도 집에서 신세를 좀 지자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노숙자가 되었다. 거리에서 하룻밤을 새우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노점상이 버리고 간 불씨 옆에서 몸을 녹이면서 별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겨울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때 폐병이 치유되던 날 새벽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갔다. 2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투병하던 폐병을 말끔하게 치유해 주셨던 성령의 뜨거운 손길이 다시 기억났던 것이다. 
  
'하나님,사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당신이 나를 치유해 주셨을 때 이렇게 노숙자 신세나 되라고 병든 몸을 낫게 해주셨습니까. 차라리 누님과 함께 저승에 가게 두시지 치료는 무슨 치료입니까. 이제 나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 주시옵소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갖 푸념을 하는 동안 어느덧 새벽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밤새 추위에 떨고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허기를 붙잡고 잠깐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형님이 출근하고 난 이후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래, 지난 밤에는 어디서 지냈냐." 
  
자식을 눈앞에 빤히 두고 노숙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가 찬밥에 간장을 붓고 삶은계란을 하나 들고 들어오셨을 때 나는 그 밥을 불과 몇 초 사이에 다 먹어치웠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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