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오늘 부산에 입항했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의 살인병기 부대인 SEAL Team6도 오늘 상륙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을 참수한 ㄷㄷㄷ한 부대)






이 시국에 북한 정권을 향해 던지는 경고 메시지일 것입니다.


작년에 김정은 참수작전인 작계 5015 훈련을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미국은 적의 수뇌부만을 제거하는 작계 5015로 가장 작은 희생으로 적을 제압하는데, 이 작전으로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참수했습니다. 전면전인 제압 작계 5027 상황은 한반도내에서 절대 피했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배후세력으로 추측하는 글로벌리스트들과 이에 맞서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거침없는 실행력…


한반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위급하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입니다. 도무지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풍전야의 위중한 때입니다.


시국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그져 아무 생각도 없이 선동 당한 줄도 모른 채, 대통령이 파면됐다고 깨춤 추고 밤낮으로 흥청망청대는 사람들.


★ F-22 띄우고, 미 항공모함 들어오고, 전술핵 B61이 거론되는 이 상황이 아직도 미국이 대한민국에 무기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 대선 당시 연일 한국을 향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고 방위 분담금 독설을 날리던 트럼프가, 방위 분담금은 커녕, 요즘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를 공부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존경 안 해도 됩니다. 자연히 진실을 알게 될 때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이번 조기 대선, 잘 판단하십시오. 아니 어쩌면 대선 자체가 연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드반대" 어쩌고 "사회주의" 어쩌고 "재벌해체" 어쩌고, 이런 근시안적 사고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발전했으니 옛날과 달라서 절대 안 망하고 전쟁도 절대 안 나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분들 제발!



- 글쓴이: 헤일리님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오늘 부산에 입항했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의 살인병기 부대인 SEAL Team6도 오늘 상륙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을 참수한 ㄷㄷㄷ한 부대)






이 시국에 북한 정권을 향해 던지는 경고 메시지일 것입니다.


작년에 김정은 참수작전인 작계 5015 훈련을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미국은 적의 수뇌부만을 제거하는 작계 5015로 가장 작은 희생으로 적을 제압하는데, 이 작전으로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참수했습니다. 전면전인 제압 작계 5027 상황은 한반도내에서 절대 피했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배후세력으로 추측하는 글로벌리스트들과 이에 맞서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거침없는 실행력…


한반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위급하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입니다. 도무지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풍전야의 위중한 때입니다.


시국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그져 아무 생각도 없이 선동 당한 줄도 모른 채, 대통령이 파면됐다고 깨춤 추고 밤낮으로 흥청망청대는 사람들.


★ F-22 띄우고, 미 항공모함 들어오고, 전술핵 B61이 거론되는 이 상황이 아직도 미국이 대한민국에 무기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 대선 당시 연일 한국을 향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고 방위 분담금 독설을 날리던 트럼프가, 방위 분담금은 커녕, 요즘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를 공부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존경 안 해도 됩니다. 자연히 진실을 알게 될 때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이번 조기 대선, 잘 판단하십시오. 아니 어쩌면 대선 자체가 연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드반대" 어쩌고 "사회주의" 어쩌고 "재벌해체" 어쩌고, 이런 근시안적 사고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발전했으니 옛날과 달라서 절대 안 망하고 전쟁도 절대 안 나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분들 제발!



- 글쓴이: 헤일리님




황교안 권한대행이 대선 불출마 선언,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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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엘샤다이

하나님 '여성'으로 묘사…영화 <오두막> 흥행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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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독영화 <오두막>이 흥행 반열에 오른 가운데,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해 논란이 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미국에서 최근 개봉한 <오두막>이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기독 영화로는 드물게 흥행 반열에 올랐지만, 영화상에서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해 논란이 되고 있다.

 

<오두막>은 전세계 46개국에 출간돼 2천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2008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윌리엄 폴 영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했다. <오두막>은 어린 딸을 잃고 절망 속에 살던 남자가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으며 겪게 되는 이야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막내딸을 잃은 오두막으로 향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을 '파파'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함께 오두막에 머물며 믿을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을 경험하고, 상처를 치유해간다.

 

여기서 ''파파'라는 이름의 여성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부 크리스천 관객들은 "하나님을 언급할 때 포괄적으로 묘사하거나 혼성으로 묘사하는 등 좀더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의 작가 토니 레인케는 "성경은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성적 혹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며 "하나님이 어머니로 언급돼선 안된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남자로 지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님의 행위나 성품을 설명하기 위해 잉태나 양육 등과 같이 여성적인 이미지의 단어가 사용된 예들이 많지만 여왕, 숙녀, 어머니, 딸 등 여성적인 호칭이 사용된 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여성적 이미지의 단어는 사도 바울을 포함해 하나님뿐 아니라 여러 남성에게도 적용 됐다"면서 "이같은 여성적 수사법 때문에 바울의 남성성에 의문이 제기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제언했다.

 

한편 영화의 원작인 소설 <오두막>은 뉴욕타임즈 49주 연속 1위, 워싱턴포스트 55주 연속 베스트셀러,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 2008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Top 100으로 선정되며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2,888개 영화관에서 상영돼 총 1610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때로는.../최송연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외면당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주여....
우리의 기도는 결코 외면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의 이 흑암은,
더욱 아름다운 길로 이끌어주시는 은총이며
당신만이 참 목자 되심을 나타내는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이요, 확실한 응답입니다

 

 

201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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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소고(小考)

"언니, 우리 교회 주보에 'Ash Wednesday'라며 모두 엄숙하게 지키라는 예전에 볼 수 없던 문구가 있던데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가 있나요?" "글쎄, 우리 개신교에서는 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다종교 문화가 대세인지라 아마 개신교에서도 천주교의 형식을 이전보다 더 많이 따르려는 것이겠지." 장로교회를 다니는 여동생과의 전화 내용이다. 그렇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나 사순절,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의 순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뜻의 기념일을 나무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80e23836a3b5bc79a720057cd8f90a1_1488812569_28.jpg다만, 천주교회에서 하는 모든 절기를 무조건 따라하는 개신교회가 늘어나고 다른 교회가 다 하니까 우리 교회도 해야 한다고 하는....내면을 가다듬기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기보다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행태를 성도님들이 알게모르게 도입하고 점차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십자가를 이마에 긋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순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형식과 외적 지향적인 신앙생활의 결과물에서 벗어나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그 의미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 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 : 19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준다. -'매일의 미사' 중에서. 

 성경에서 인간은 흙(dust)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흙에서 나왔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맞다. 그런데 재(Ash)와 흙(dust)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억지해석일 뿐이다. 재를 태워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 회개의 상징이 된다고 하니, 개신교에서 자란 나의 눈에는 어이없는 우상숭배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문제는 그런 형식을 따라 한 줌의 재를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개신교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얼마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재는 아니라지만, 기름을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예식을 자신도 하고 다른 이에게도 강조하여 물의를 빚은 것을 안다. 이렇게 절기에 치우치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탓에 결국은 이단에게 핍박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를 마음속에 새긴다면 또 모르겠지만...유행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과연 우리(성도)가 행할 일인지.... 

 금식(禁食)과 금육(禁肉 )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자들은 금식재와 금육재를 의무로 지킨다. 금식재[禁食齎]란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점심식사는 평소대로 하되 저녁식사는 요기 정도만 하는 것을 말한다. 금육재[禁肉齋]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재의 수요일과 모든 금요일에 지켜야 한다. 금식재는 만 18세 이상 60세까지,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킨다. ​ 

 가톨릭 신자가 금식재와 금육재를 동시에 지켜야 하는 날은 ‘재의 수요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틀이다. 십자가의 길: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14개의 조각을 볼 수 있다. ‘14처(處)’라 불리는 이 미술품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 중 하나인 ‘십자가의 길’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개 사건을 묵상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1-2세기 신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지나간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하도록 권고된다.  - [사순절, 사순시기 의미] 중에서 

 이마나 머리에 재를 뿌리는 형식,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가 아닌, 교회의 법으로 제정하고 의무로 금식을 해야하는 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일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질 않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 2: 12-13)  

 그렇다. 우리는 이 사순절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사순절이 되면 그리스도의 그 모진 고난을 기억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진심으로, 마음을 찢는 듯)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형식과 절기에 얽매이고 마음은 따로라면....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나는 아주 오래 전,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적이 있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숭고한 길,“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는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카”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카’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랬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이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한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이다. 하물며 한줌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우상숭배적 행위로 변질된 교회이겠는가?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본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라도 형식에 치우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마음을 찢고 주께 돌아오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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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천성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이 근근이 어렵게 사는 환경은 우리 결혼 생활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의 잘못은 없었다. 다만 나의 부족함과 주변 환경들이 우리를 서로 의지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내는 어느 날 짐을 챙겨서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가장 박대했던 둘째 형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둘째 형님은 경찰 공무원으로 일을 했었고 형수는 독일 간호사로 지원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독일 간호 근로자 테이프를 끊은 분이었다. 1960년대 초 박정희 군사 정권은 서독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한국 간호사와 탄광 일꾼을 서독으로 인력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간호사 인력 수출은 현지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경우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과 서독 간호사 수출 관계를 잘 설명한 감동적인 글이 있어서 옮겨 본다.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1960년대의 경제 사정을 보면 1인당 GNP 87달러,한국은행의 외화 보유잔고 2,300만 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 등으로 빈곤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 5.16이 일어났다. 5 .16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이듬해인 1961년 가을 최초의 해외 방문으로 미국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한 박 전대통령은 케네디를 위시해서 미국 의회 지도자들로부터 차디찬 냉대를 받고 돌아왔다. 당시 4.19혁명 이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 정권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미국 여론의 빗발친 냉소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풍전등화의 어려운 역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뜻밖에도 서독의 뤄프케 대통령으로부터 공 식 초대를 받는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살살이 보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그는 1964년 12월 6일 독일로 떠났다. 12월 7일 아침 9시 40분 뤄프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등의 영접을 받으며 일행은 독일에 도착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통일의 그날까지 경제 발전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그리고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국민들로부터 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크게 환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1963년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이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대서특필로 소개하였고, 이국만리 타향에 와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근무태도를 격찬하고 있었다. 이국 땅 낯선 곳에서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간호활동은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 속에 따스한 정을 주었고 '동양의 프로세안'으로 끝없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미 1960년대 초에 가톨릭 계통의 민간협력 차원에서 취업 알선으로 30명 내외의 간호사가 서독의 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 정부에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 국민의 열기는 대단하였고 그 후에는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 정부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의 방독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4년 12월 8일 아침 10시 55분, 방독 중이던 박 대통령은 뤄프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광산 도시에 도착해서 수많 은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들 앞에 섰다.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간 박 대통령을 맞아 국민의례가 행해졌다. 애국가를 한 소절 한 소절 부르다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간호사들은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생하는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자기 나라 대통령을 보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간호사 여러분, 광원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 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끝내는 자신도 울고 말았다. 장내는 눈물 바다로 변했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뤄프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끝내 연설은 중단되었고 박 대통령은 밖으로 나오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간호사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고 "각하, 손 한 번만 쥐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떠나십니까?" 하고 목메인 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 고속도로의 차 안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뤄프케 대통령은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라고 위로하며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老) 대통령이 40대의 가난한 대통령에게 격려하는 우정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창밖에 비치는 석양의 황혼길에 철광 산업으로 보이는 한 공장굴뚝에서는 하얀 연기만이 하늘 높이 내뿜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간호사 파독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극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I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둘째 형수님이 바로 그 시대에 한국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된 독일 간호사로 자원해서 현지에서 또순이 같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했던 장본인이었다. 둘째 형수님은 서독에서 간호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본인이 먼저 미국으로 입국한 후 영주권을 받아 둘째 형님과 조카 등 가족 모두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래서 둘째 형님은 1975년, 그러니까 한국에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미국으로 이민 가서 정착 한 초기 이민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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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무조건 나쁘고 평화는 무조건 좋은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언론은 북한정권의 전쟁 협박에 맞장구치고

우리들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니

전쟁은 절대 안된다고 합니다.



전쟁은 정말로 여호와께 달려 있습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북한이 항상 전쟁으로 협박해왔죠.

주로 언제 협박해왔냐면,

우리가 북한정권에 대해 올바른 소리, 정의로운 소리,

북한동포들의 인권에 대한 소리를 낼 때,

그리고 자신들의 악한 요구에 따라주지 않을 때마다

전쟁하고 싶냐며 협박해 왔죠.


이처럼 만약 북한과 우리가 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불의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불의를 거부하고 더 이상 북한정권의

동포 학살, 불의, 부정, 불법에 발 맞춰주지 않을때 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적용을

참 편파적이고 이기적으로 합니다.


우리는 여지껏 북녘에서 죽어가는

동포들의 소식에 대해서는

당장 내 생명 아니니까 못들은 척 무시하고 있다가

누군가 동포들에 대해서 북한정권에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면 북한정권의 전쟁 협박에

맞장구 쳐주며 괜히 쓸데없는 소리해서

전쟁을 불러 일으키지 말라고..

평화를 해치는 전쟁광이냐고...

전쟁나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는데

그런 소릴하냐고 다그치며 조용하라고 해왔었죠...


우리가 생각하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의 적용은 등따숩고 배부름에 겨워

감사는 커녕 원망에 원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하고 있는

남한 사람들에만 해당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이미 사악한 독재자에게

계속해서 노예된 상태로 학살 당해오고 있는

북한동포들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적용은 둘째치고

사실 우리는 아예 북한동포들의 노예된 상황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 올 수 있는 거죠.


만약 내가

가족들과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상황이었다면

제발 나와 가족들을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

거내주길 바랄 겁니다.


게다가 나와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촌각을 다투며 생지옥을 겨우겨우 생존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처럼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전쟁은 우리들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니 절대 안된다.

북녘에 동포들이 죽던 말던 지금 이 상태의

평화를 유지해야만 한다"라는 말을 하고

나와 가족들을 못본척하는 것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는 동포들의 절규를

못들은척 하는 조건으로,

적그리스도 독재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조건으로

겨우겨우 지켜왔던 평화(?)를 지켜오고 있고

그것이 깨질까봐 두려워하고 있죠...


과연 이 평화는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하고 기쁨이 되는 평화일까요?


양심이 있다면 대답할 수 있으실 겁니다.

역겹고 가증한 평화이죠.


우리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남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경향이 큽니다.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우리의

극단적 이기주의와 악독함으로 인해

한반도에 재앙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자기에게만 해당시키는 교회에서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겠죠.


왜 전세계 가장 큰 교회 부흥을 체험한 우리가

신사참배를 하였고 그 전 교회가 신사참배 할때

목사들과 사역자들은 뭐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때 과연 골방에서 정말 하나님께

올바로 서서 기도하는 사람이 정말 10명도 없었던 것인지...


왜 6.25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 거부 성명을 낸

경상남도 지역만 피해가 없고

나머지 한반도는 반복해서 초토화가 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현재 우리는

그때의 신사참배에 비하면 훨씬 더

사악하고 악독한 죄의 한 가운데 거하고 있으면서도

'나에게만은 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25보다 더 큰 재앙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왜 남북전쟁이라는

처절한 내전을 치뤄야 했는지....

왜 그 전쟁의 중심에 노예제도 폐지가 있었는지....

왜 그 당시 미국 북부에서 난 교회 부흥의 사회적 결과가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는지...


과연 부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북부가

왜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예제도를 용인하는 타협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왜 겁쟁이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같이 포로로 끌려가다가

도망친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주변 동맹 족속과 자기 집의 318인을 이끌고

롯을 데려오기 위한 '전쟁'을 주저하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탈북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노예 됨을 듣고

우리는 전쟁을 피하는게 우선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전쟁'이라는 댓가가 지불되더라도

포로된 동포들을 풀어주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위에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재앙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이 재앙이

우리에게 국가적 부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과연 불의와 타협하며

가증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분쟁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지...

성령의 조명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이 우리에게 재앙이 될지

부흥의 계기가 될지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알량히 내 목숨 유지 위해

살고자 하면 죽고

남을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면 삽니다.


부디 우리도 과거 미국처럼

우리 위에 예비된 재앙의 심판이

진정 멸망의 재앙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복음으로 섬기는

본래의 국가적 부르심에 합당케 되는

풀무가 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 박성업 선교사님

 

 

 

여러분은 “신성모독 법”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이 만일 캐나다에 살고 있다면 곧 이 법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이슬람포비아”를 처벌하기 위한 M-103이라고 불리는 법이 발의되었다고 한다. 이 법안은 캐나다 자유당 당수인 Iqra Khalid씨가 몇 주전 하원에서 발의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와 유사한 M-37이라 불리는 결의안이 지난 2월 23일 온타리오 지방 의회에서 Nathalie Des Rosiers 의원에 의해 발의되고 통과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법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가? 보도에 의하면 M-37 결의안은 의원들에게 “모든 종류의 이슬람포비아”를 비난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정부로 하여금 인종차별을 비판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과 프로그램과 공공서비스를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방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벌써부터 이런 법안들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이 법안에 상응하는 “유대교 포비아”, “기독교 포비아”를 금하는 법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는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언급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취하는 법안을 만든 바 있기에 이 법안도 결코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 법은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 그리고 바이포비아(동성애혐오자)들을 반대하는 국제 지정일인 작년 5월 17일에 소개되었다.

 

기사원문>> It has Begun! Canada Rolls Out New Blasphemy Laws

 

* 동성애를 죄라 언급하거나, 이슬람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하면 감옥에 가는 일명 ‘동성애 포비아’, ‘이슬람 포비아’를 처벌하는 법안이 캐나다에서 실시되거나 실시 될 예정이라 한다.

 

대한민국도 차기 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이런 기가막힌 일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현재 여야의 유력 대선후보들의 차별금지법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이재명 시장은 가장 적극적인 추진의사를 밝히고 있고, 여시재(일루미나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안희정 지사는 동성애자인 홍석천을 대선 캠프에 영입할만큼 차별금지법 추진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고, 문재인 후보도 겉으로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무리한 추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만 여건이 바뀌면 태도도 바뀔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야권 주자들의 이런 입장 때문에 많은 분들이 황교안 국무총리(전도사)가 대통령이 되어야 차별금지법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현재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혜훈 집사(의원)는 황교안 총리의 경우는 법무장관 시절, “(그에게) 기독 의원들이 법무장관에게 법안 철회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차별금지법 추진) 정보를 알고, 법무장관에게 많은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분은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답변을 줬다. 결국 기독 의원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 이 법이 국회로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라고 이혜훈 집사가 한 강연에서 밝히고 있다.




 

관련기사>> 새누리당 이혜훈 의원이 반기문과 황교안을 비판했다

 

결국 여야를 막론하고 그 누가 대통령이 되던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차별금지법의 통과를 막아낼 수 없고, 이를 통한 기독교의 차별이 공식화 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분열된 마음들을 하나로 모아 두 달후면 출범하게 될 차기 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 예레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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