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 마지막 설교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 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 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帝王), 장상(將相), 재사(才士), 가인(佳人)도 다 죽었고 성현(聖賢), 군 자(君子), 위인(偉人), 걸사(傑士)도 다 북망산(北邙山)에 가 묻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만은, 주님을 버리고 천년 살고 만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설교 중간에 잠시 기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 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에게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소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발을 쾅 구르며)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 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 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 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 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 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고 신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 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 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 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 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 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 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 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 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 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 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 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春風 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 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차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 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 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 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 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 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을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 끝없이 처절합니 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이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저의 자식들도 주 님 품에 부탁합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 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 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 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저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저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은 줄 압니다. 저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 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 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 주옵소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 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떨리는 목소리, 깊은 흐느낌,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회중.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도 슬금슬금 교회당 밖으로 나가버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께 짐 지울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 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 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 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 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 (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 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위하고 또 그 교회와 그 의를 붙들고 "국궁진쇄 사이후이", 죽도록 충성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나라를 위해서 선죽교에다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시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은 시를 읊은 그의 충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우랴! 예수를 사랑 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 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 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 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 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 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몸 죽고 죽어 열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 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 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흐느끼는 교우들을 바라보다가 찬송가 196장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피와 같이 붉은 죄/눈같이 희겠네……/(3절까지 부른 다음, 숨을 돌려 다시 설교)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 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 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384 장을 함께 부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방패와 병기 되시니

성령의 사역[1] (2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위한 5인의 미국 칼빈 신학교 교수들(캘덜먼, 볼트, 쿠퍼, 훌스터, 스미스)의 대담[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캘덜먼: 좀더 세계적인 관점에서 성령의 권능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가 북미권에서 겪는 것보다 더 극적인 힘 - 그들 자신이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겪는 - 에 관해 증거하는 것 같다. 적군은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도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걸까?

훌스터: 나는 당신의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적의 힘은 세계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정말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가시적이다. 나는 상당 기간동안 북미개혁교단(CRC)의 한 교회를 섬겼고, 비록 적군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드러냈었지만 그곳에서 적들의 힘과 어둠의 권세를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가정폭력, 강간,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중독 문제들을 취급하게 될 경우, 당신은 실제로 당신에게 소리치는 귀신을 상대하진 않겠지만 적군은 그처럼 현실적이고,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서 당신은 인도네시아에서 만큼이나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 대적들의 힘이 실제적이고 교활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루이스(C. S. 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를 읽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가운데 내가 깨달은 점들 중 하나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청중들에게 대적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쿠퍼: 훌스터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 또한 북미의 기독교가 [1692년에 있었던] 역사적 살렘 마녀재판 이후엔 천사나 귀신에 관한 부분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우 경건한 자세로, “나는 천사를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천사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머니즘이나 원시 종교의 강신술적 배경에서 자란 제 3세계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일들에 정말 관심이 많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언하는 거의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샤머니즘이나 강신술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성령에 관한 어떠한 성경적 표현일 수 있는 이상으로) 샤머니즘적일 수 있는 징후들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매우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것을 쫓아내기 위하여 이름을 부르고 쫓겨가야 할 곳을 정해줘야 하는 지역적인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샤머니즘에서 그것은 일반적인 풍습이다. 샤먼(Shaman)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적인 세계의 달인이다. 동물소리, 웃음(소리), 영적 권위자가 손을 댓을 때 정신을 잃는 것, 방언, 병고침, 사람을 저주함 ? 이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매우 분별력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오순절운동과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이어 새롭게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운동인] 제3의 물결 운동(Third Wave Movement)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위조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들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지 궁금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 동료 교수들인 룻 터크(Ruth Tucker)와 마리아노 아빌라(Mariano Avila)가 그들의 소수파-보고서에서 교단총회에 주의를 주고자 애썼던 것들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이 어떻게 예배와 설교에 관련되는 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훌스터: 오늘날 예배에 대한 많은 경험적 이해가 있다. 만일 음악이 좋고 설교가 좋다면, 성령은 그날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예배가 그리 좋지 못할 지라도 좋았을 경우처럼 성령이 그곳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이 예배당에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성령은 예배당에 있다.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의 임재 (the presence of God) 의 척도가 아니다.

볼트: 계획된 즉흥성은 주의 깊게 준비된 기도나 설교보다 성령의 임재에 관한 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훌스터: 모든 설교자는 최선이 아닌 설교를 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방의 햄버거 헬퍼(Hamburger Helper: 제너럴 밀스라는 미국 식품그룹에서 생산하는 인스턴트 파스타)이다. 그것은 그 역할을 할 것이지만, 필레미뇽(filet mignon: 값 비싼 뼈가 없는 소고기 부위로 안심이나 등심부위를 나타내는 프랑스 조리용어)은 아니다. 당신은 설교단에 서서 그것으로 전력을 다한다. 끝에 당신은 부끄러워서 강대상 뒤쪽에서 조금 고개를 숙일 것이고, 설교 후엔 변함없이 누군가 다가와서 “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설교를 통해 오늘 정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겸손이 잘 자리 잡혔는지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당신에 관한 일이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설교자로서의 그런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캘덜먼: 나는 잔디밭 축제에 나타난 스컹크가 되는 것이 정말 싫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얘기된 어떠한 것도 틀렸다 생각하지 않지만,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책임을 져야 할]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이 스스로의 신앙유산의 부유함을 모르고 있다고 성급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떠났나요?” 라고 물을 때, 그들의 대답을 관통하는 주제는 종종 이렇다: “있잖아요, 저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싶어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매 주일마다 다녔던 교회에서는 그걸 볼 수 없었어요. 목회자와 찬양인도자와 전체 회중들 중 그 누구도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깊이 믿는 것 같지 않았어요. 시늉만 많았지요.”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길 갈망하고 있다.

 

훌스터: 나는 우리가 증거하는 일에 취약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분명히 말할 줄 모른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른다. 증거(testimony)는 당신 삶에서의 하나님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가 예배와 회중들의 삶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증거의 능력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스미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청하는 일에 있어 더 많이 개방되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라고 부르게 될 수도 있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전통에서의 관행이다. 봉헌 증거에서부터 “누가 오늘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는가?”로 이동하는 것은 그리 큰 발전은 아니고 발전을 위한 좋은 예가 될 순 있겠다.

 

쿠퍼: 분명히 우리는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이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랫동안 열심히 지켜봐야 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육체적 건강과 영적인 건강 사이의 비교가 알려 주는 바가 있다. 나는 스스로의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 아니면 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건강이란 선물을 강화하기 위해 먹는 것을 조절하고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표지들 중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그 선물을 받고도 그것을 양성하고 있지 않는 현상황의 기독교에 만족하고 있다. 내 생각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그들이 찾기 원하는 바는 생명력과 성숙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카리스마적 증거라기 보다는 중생의 일반적 열매들이다. 내 생각엔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아마 어떤 교회에서는 대다수가,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이다.

 

훌스터: 많은 사람들이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으로서 예배에 참석한다. “제가 불이 붙고 변화되는 건 예배 인도자인 당신에게 달렸어요.” 하지만 예배는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한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뭔가 해야한다는 각오를 하고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교회가 매주 크게 한 건 하지 못하는 설교자를 두고 있을 때,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적극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 예배 음악이 당신의 기호에 맞지 않을 경우, 당신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이 예배로부터 무엇을 얻었는가”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신이 예배 속으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의 문제일까? 우리는 예배를 통한 스스로의 영적 성장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볼트: 우리는 또한 겸손히 성령을 의지하는 데 있어 분명하지 못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이지만 미국의 “할 수 있다-주의 (can do-ism)”의 배경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can do)”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이 없이는 죽은 교회이다 라는 인상을 우리가 늘 주고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과 기도에 관해 잠시 얘기해 보자.

 

훌스터: 나는 최근 그들의 당회장이 당회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가에 대해 얘기하는 어떤 장로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당회 때 얼마나 많은 시간 기도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칠 때” 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그러면 당신들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든 일에 대해 얼마나 오래 얘기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는 “글쎄, 우린 정말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나는 “아마 당신들의 효율성이 당신들의 영적 리더십을 이기고 있는 것 같다” 라고 대답했다. 만일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교인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필요를 직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기도와 열정의 사람인 영적 지도자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만큼 성령에 민감해 질 수 없을 것이다.

 

캘덜먼: 우리는 기도를 교회 내에서의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 더 깊고 더 충만한 기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에게 도전을 줄 필요가 있다. 이 일은 (생명력 있는 기도생활을 위한 조직신학적 가르침과 실천과 책무 등의) 기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교인들 가운데 매우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대개 오래 전부터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왔고 교인들을 보다 잘 기도하도록 돕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주의 깊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기도 갱신을 위한 프로그램을 평가절하 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또한 참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각 교회마다 있는 수십 여명의 성도들을 간과하기도 원치 않는다.

 

스미스: 다시금 그 주제가 떠오른다: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특별한가, 또는 우리의 삶 전체에 걸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얼마나 일상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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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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