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지일 교수 "이단 대처, 정적 제거·마녀사냥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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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 교회사·월간《현대종교》 편집인)  © 뉴스파워 윤지숙 기자 

 

“최근 교회의 연합활동이 오히려 이단대처 현장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우려가 이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한교연이 이단문제를 명분으로 정치적인 이합집산과 내홍을 오랜 기간 겪고 있다. 연합기관이 이단대처의 중심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불건전한 개인과 단체들이 신분을 세탁하고 면죄부를 받는 장소로 악용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단대처는 정적제거와 교권장악을 위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을 정결하게 수호하기 위한 선한 싸움이어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 교회사·월간《현대종교》 편집인)가 ‘한국교회, 개혁의 주체인가, 개혁의 대상인가: 교회를 향한 이단들의 도발적 질문들을 중심으로’라는 주제 발제에서 한 말이다.

  

한국교회사학회(회장 김수한 회장),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박용규), 한국장로교신학회(회장 이승구)가 공동주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개혁과 부흥'이라는 주제로 18일 오전 10시에 양재동 횃불회관 온누리교회 예배당과 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개최됐다. 

 

오전 10시 개회 예배(설교: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를 시작으로 외국 석학 논문 발표, 오후 분과 발표, 국내 논문 발표 등 순서로 진행됐다.

 

탁지일 교수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스스로 개혁되는(reformed) ‘개혁의 주체’이면서 개혁하기(reforming)를 요구받고 있는 ‘개혁의 대상’이기도 하다.”며, “이단에 대한 연구는 동시대 교회가 상실하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교회사 속의 이단들은 정통교회의 문제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기 때문에 이단대처와 교회개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서두를 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에 대해“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은 목사의 모습으로 활동한 사이비였다. 문제는, 다수의 진짜 목사들은 정치권력 핵심에 접근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가짜 목사 최태민을 이용했고, 최태민 자신도 신분 세탁과 정치적 활동을 위해 이들 진짜 목사들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며, “선친이신 故 탁명환 소장은 그런 기성교회 목사들의 모습을 한탄했고 최태민과 그 측근들을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기독교는 스스로 파문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의 앞서, 이번 파문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들 중 한국 교계 지도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역사와 민족 앞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다.

 

탁 교수는 이단문제에 대해서는 △가정도 포기하는 이단, 소유에 집착하는 교회에게 묻다, △여성 중심적 이단, 가부장적 교회에게 묻다, △신격화된 이단 교주,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에게 묻다, △세대교체 중인 이단, 세습 중인 교회에 묻다, △종말을 파는 이단, 종말을 잊는 교회에게 묻다, △교회가 정죄한 이단, 사회가 외면한 교회에게 묻다,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이단, 므두셀라 증후군을 앓는 교회에게 묻다, △모략과 모함에 익숙한 이단, 모순에 빠진 교회에게 묻다 등 이단과 기성교회와 비교한 8가지 질문들을 던지며 한국교회의 개혁방향을 구체화 했다.

 

특히 최근 주요 이단 단체의 후계자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통일교의 ‘재림주’이자 ‘6천 년 만에 탄생한 독생녀’ 한학자, 하나님의교회의 ‘어머니 하나님’ 장길자, 신천지 보혜사 이만희의 ‘영적배필’ 김남희, 기독교복음선교회(JMS)의 2인자 정조은, 중국 이단인 전능하신하나님교회(동방번개)의 ‘재림 그리스도’ 양상빈 등.

 

남성 일색이었던 이단 교주들 사이에 여성 지도력이 급부상한 이유에 대해 탁 교수는 “국내외 대통령과 총리에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사회 핵심 지도력으로 급부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계있어 보이며, 이단 단체에 소속된 여성 신도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퍼포먼스적 성격도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김백문, 문선명, 박태선으로부터 이어진 한국 이단 교리의 성(性)적 특징과 연관돼 교리적 온전한 음양이 결합을 죄사함과 구원의 행위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며, “이 때문에 JMS처럼 비윤리적 성적문제와 여성 신격화에 대한 자의적 성경 해석도 시도되고 있다.”고 전했다. 

 

탁 교수는 "세대교체 중인 이단 단체중 하나님의 교회는 자칭 재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인 설립자 안상홍이 1985년 사망한 후, 어머니 하나님을 자처하는 장길자의 권한은 제한적으로 보이며, 그녀 곁에서 영구직 총회장 김주철이 실세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의 경우, “설립자 이만희가 측근인 김남희를 소위 ‘영적배필’ 후계자로 지명한 신격화에 초점을 맞춰가며 두 후계 구도를 구축하는 듯 보인다. 이만희 사망 혹은 통제력 약화시기에 유력 지파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 혹은 분리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탁 교수는 “최근 이단들에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거짓말의 종교적 합리화다. 포교활동과 신도 통제를 위해 모략 혹은 거룩한 거짓말을 자유롭게 사용한다.”며, “거짓을 진실로 믿으며 사실을 왜곡(리플리 증후군)하는 이단에게는 자신이 믿는 진실이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좋은 모습만 취사선택하려는 교회에게는 역사가 증언하는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므두셀라 증후군)도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진솔한 자세가 요구된다.”고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시급한 당면과제인 이단, 이슬람, 각종 비성경적 문화에 대해 교회가 목소리를 높이면, 교회 스스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반대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것이 오늘 교회의 직면한 현실”이라며, “연합적 이단대처는 중세교회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특히 교파주의를 운명적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에서 연합적 이단대처는 운명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절실하다. 이단대처 현장은 반드시 교단정치의 청정지역이 되어야 한다.”며, “이단대처는 정적제거와 교권장악을 위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을 정결하게 수호하기 위한 선한 싸움이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 자신이 처한 현시을 부저하면서 자신이 꿈꾸고 동경하는 허구의 세상을 진실로 믿고 거짓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는 증상이다. 자신이 절실하게 원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 과거의 기억들 중 좋은 추억은 기억하고 나쁜 기억은 지우려 하는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선별 기억을 통해 부담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윤지숙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 아멘넷

      가끔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도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 계시는데도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선하심을 찾는 자세를 갖는다면 당신의 삶은 변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스토미 오마샨

기도할 수 있는데

 

 

가끔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도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 계시는데도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선하심을 찾는 자세를 갖는다면
당신의 삶은 변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스토미 오마샨

기독교와 윤리②

 

 

 

 

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셰익스피어에 의하면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등장하여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진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누군가 아주 재미있는 상상을 하였습니다. 아주 먼 훗날 인간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존재가 등장하여 지구의 역사를 재정리하게 될 때 두 가지 사실을 예상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역사책에 인간 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은 순간처럼 짧게 살다가 절멸(絕滅)한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종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생존 기간은 짧지만 지구 환경에 끼친 해악이 워낙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동물의 생태질서를 먹이사슬로 설명합니다. 먹이사슬이란 다른 말로 하면 약육강식입니다.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자기보다 더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먹이사슬을 정글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생태환경에는 약육강식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기생의 방법도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symbiosis)이나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생물들도 많습니다. 또한 말미잘과 숨이고기는 편리공생(commensalism)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동식물들에게 약육강식이니 공생 혹은 상리상생 또는 편리공생이라는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동식물은 본능의 생존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인간이 이해와 연구를 위해 그렇게 분류한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착취행위를 동물적 약육강식의 방식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공생과 상리상생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의 생존방식을 인간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만 동식물의 행동은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게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윤리적 평가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 중의 의지와 상관없는 본능적 행동은 윤리적 가치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이미 앞 글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당위적인 행위입니다. 철학에서는 인간 행동을 사실적인 것과 당위적(obligatory)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당위란 의무를 지우는, 의무적인, 강제적인, 필수 등의 뜻입니다. 마땅히 뭐 뭐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최순실씨가 국정을 농단한 게 사실이라면 “최순실씨가 국정을 농단했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 진술입니다. 그러나 “아 글쎄 최순실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 줄 몰랐다. 대통령을 가지고 놀았구먼!”이라고 하면 이것은 평가적인 발언이 됩니다. 개인적 행위뿐 아니라 인간 집단의 행위에 대해서도 이렇게 평가가 들어가는 행위를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라고 합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탄핵했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 진술입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그렇게 엉터리인 줄은 몰랐다.”라고 하는 것은 평가적 발언입니다.

     

그런데 그 평가는 반드시 전제된 가치의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 가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살인과 거짓은 나쁘다는 것이나 정직과 공평은 좋은 것이라는 가치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결혼은 아름다운 것이고 간음과 간통은 악하고 추하다는 것도 보편 가치이기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가치입니다. 아직까지는 거짓과 살인이 왜 나쁜 것이냐 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아름다운 것이고 간음이나 간통은 악하고 나쁜 것이라는 데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살인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니체는 강한 자만이 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니까 니체 철학에 지배 받는 무신론자들을 비롯하여 상대주의를 존중하는 현대인들은 언제 노골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인간이 존중해야 할 가치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윤리 도덕적 가치, 아름다움의 가치, 경제적 가치, 과학적 가치 등이 있습니다. 정의와 선과 사랑은 윤리 도덕적 가치이고, 의식주에 관계 되는 것은 물질적 가치 또는 경제적 가치이며, 음악이나 예술 등은 아름다움의 가치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도구를 과학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창출하거나 해치는 행위도 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평가를 할 수 있는 행위 중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평가를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하다.’ 혹은 ‘선하다.’라고 평가 할 수 있는 행위가 그런 종류에 속합니다.

     

그 다음은 ‘당위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상대주의가 지배적인 현실을 생각할 때 보편 가치는 무엇에 의해 보장되고 왜 존중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담론의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정직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거짓 말 하면 안 될까요? 왜 살인을 하면 안 되고 거짓말 하면 안 되고 법과 질서는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은 철학에서 오랫동안 제기해 온 문제입니다. 철학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철학의 의무요 역할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스스로 제기한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 그 질문들에 대해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첫째는 목적론적 이론입니다.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목적론적 설명이론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은 우리가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착하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지킬 뿐 아니라 보편 가치를 존중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질서가 유지되어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탄핵되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무질서입니다. 막연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무질서가 무서운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대통령과 국회와 헌재와 검찰과 언론이 법을 어긴 것보다 더 위험하고 두려운 것은 무질서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와 나아가서는 언론과 국민 모두가 보편 가치와 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지나친 정도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주장과 행위를 법과 정의와 나라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외국인들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내리게 될 평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아직까지 보편 가치와 법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해와 그것들을 지키려는 행위가 부끄럽게도 미숙한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점입니다.

 

이번의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이 법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이념에 대해 미숙하고 국가관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한 셈입니다. 어린아이는 유치함이 무엇인 줄 모르고 유치함을 드러내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리석은 짓을 하듯이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수준을 잘 모르기 때문에 미숙하고 유치한 행동을 정당하다는 듯이 용감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둑이나 게임에 비유하면 불과 몇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나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론적 행동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이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영역에서 하나님을 몰아낸 상황에 어차피 절대가 없으니 목적론적 수준에서라도 당위론적 행동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착하고 정직하게 행위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에서라도 보편 가치와 법과 질서가 존중되고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언론들은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언론뿐 아니라 정치인과 온 국민이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면서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의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거짓말을 8가지로 분류했고, 마크 트웨인은 889가지의 거짓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만과 미움과 증오와 시기심 때문에 과장하고 왜곡하고 또 편리를 따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될까요?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필요해서 하는 것일 텐데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서로가 인정해 주면 어떻게 될까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거짓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거짓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입는 피해가 과거에 비해 지금은 엄청나게 크고 치명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개인이 거짓말을 해도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현대는 언론 매체가 발전하여 개인이나 공공 언론이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거짓말을 하면 그 폐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광범위 한 영역과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됩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며, 힘이 없는 이유는 단결하지 못해서이고,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속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거짓말의 가공할 해악을 간파하고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었습니다.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했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안창호 선생은 조선이 망한 원인을 일본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탈세율은 26.8%로 그리스나 스페인과 비슷하고, 보험금 13.9%가 보험사기로 지불되고, 교통사고 입원 율이 일본의 9.5배나 되는 나라, 작금의 대한민국 언론이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하고 국회와 검찰과 많은 국민이 그 거짓말에 휘둘리는 것은 국가의 존립이 몹시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회와 검찰과 언론과 온 국민이 총체적으로 거짓말 광란을 벌이는데도 나라가 이만큼 지탱하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기적이고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오래 참으심 때문이지 한국인의 의식과 국격이 고상해서가 아닙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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