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교수가 전라도인들의 원한과 울분을 이 영화를 인용하며 설명을 한 영상이라 합니다.
전라도인들의 원한이라?


(창 49) 아버지의 축복

 

“Jacob Blesses His Sons", 오늘 말씀에 NIV 영어성경은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하다"라고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47년 동안 걸어온 인생길을 마감하는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야곱 자신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험하고 거친 나그네길을 걸어온 야곱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산 다음 180세에 죽었습니다. 눈이 어두운 채 참 오래 산 셈입니다. 계산을 해보면 이삭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고 했으니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120세 되었을 때 죽은 셈입니다.

또 계산을 해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때가 17세였고, 애굽총리 된 때가 30세, 7년 풍년과 다시 2년의 흉년 뒤에 아버지 야곱을 만났을 때가 39세, 곧 22년 후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이 바로에게 '나그네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했으니 이삭이 죽은 것은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기 10년 전, 야곱이 120세 때라는 계산이 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을 보고 자랐을 것이고 요셉이 보디발의 감옥에 갇혀 있고 바로의 두 관원장이 투옥될 무렵 이삭이 세상을 떴을 것이라는 계산이 됩니다. (제가 쓸데없는 계산을 했나요?)

이제 야곱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모으고 아들들에게 후일에 당할 일들을 이르며 축복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르우벤부터 시작하여 세 아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저주라 해야 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그러나 이어서 말합니다. ‘물의 끓음 같아 탁월치 못 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라.’ 아버지에게는 맏아들이야말로 가장 큰 기대와 사랑을 쏟는 대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결코 용서 받지 못 할 죄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축복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어서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바로 세겜에서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살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혀 아버지를 모멸하였고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를 포함한 온 집안을 잔혹한 살인군단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리하여 위로 삼형제가 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아버지의 축복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십계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계명을 간단히 정리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습게 여기고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모를 공경하였다면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없다 하고 인륜을 저버리는 자에게 천국은 없을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더불어 함께 살던 이웃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추호의 용서도 없는 잔혹한 복수로 되갚은 것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이 셋이 저지른 범죄가 십계명, 주님의 계명을 범하는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지 못 한 축복은 그 다음 아들인 유다에게 쏟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향한 엄청난 사랑과 축복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순종함으로 쏟아질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그리고 엄청난 예언이 그에게로 더 하여 떨어집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이 예언은 메시아가 유다의 계보를 따라 오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에게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부끄러운 그 실족을 생명을 잇는 계보, 그리스도의 계보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때 그를 죽이지 말고 팔자고 하여 요셉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칠년 기근 때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을 때 베냐민을 도로 데리고 돌아오지 못 하면 자기의 아들을 죽이라고 하면서 야곱을 설득함으로써 온 가족을 기아로부터 건져낸 셈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기이하게도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어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 축복을 이어갑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할 것이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갓은 도리어 적의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야곱은 이렇게 열 두 아들들의 장래를 말하고 축복합니다. 평화와 풍요가 축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이게 축복인지 뭔지 분간이 안 갑니다. 싸움은 이어지고 이스라엘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끝까지 피흘리며 싸워야 할 것을 예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결국 온 이스라엘, 르우벤, 시므온, 레위 지파까지도 메시아의 축복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과 축복의 기도를 놓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연구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피투성이와 싸움의 축복입니다. 죄악으로부터 인류를 살리시려 피 흘려 죽으시려 유다 족속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의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기까지 애굽에서,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피흘려 싸워 반드시 살아야 하며 반드시 이겨내어서 그 생명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죄 많고 흠 많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마침내 싸워 이기듯, 어쩌면 죄 많고 흠 많은 죄인들의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세상과 피 흘려 믿음의 싸움을 싸워 이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축복일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 50) 애굽 안에, 관 안에  (0) 2017.04.25
(창 50) 천년을 하룻밤 같이  (0) 2017.04.16
(창 49) 복 된 인생  (0) 2017.03.20
(창 48) "나도 안다, 내 아들아."  (0) 2017.03.09
(창 47) 목자의 삶, 나그네의 삶  (0) 2017.03.01

 

로마의 복수, 한국의 굴종!


"로마의 복수"라는 말이 있다. 이천년 전 로마는 그들의 시민 중 단 하나라도 여행 중에 해를 입으면 그 대상을 끝까지 추적해 무자비하게 보복하는 걸로 유명했다. 로마 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도시나 국가를 초토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디서든 로마 시민(Civis Romanus)이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전 세계의 협조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의 시민에게 해를 입히는 순간 로마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로마의 복수는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 한 마디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 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22:25,26,29)


그 국민과 영토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자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세금을 낼 이유가 없고, 그들에게 부여된 국민의 의무를 수행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나?


멀리 갈 것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굵직했던 사건들만 살펴보자. 천안함 피격사건. 북한 잠수정이 우리 초계함에 어뢰를 쏘고 도망쳤다. 한창 나이에 국가의 부름을 받아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나라를 지키던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전세계 전문가가 북한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각국 정부가 이를 비판하는 와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을 비롯한 몇몇 얼빠진 인간들이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둥, 미군 잠수함의 공격이라는 둥 정신나간 소리를 늘어놓으며 북한을 변호했다. 우리 정부는 관광중단, 개성공단 폐쇄 등의 제재 말고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연평도 포격 사건은 어떤가?

휴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우리 영토를 직접 포격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과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상자가 된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이었음에도, 국군은 재빨리 대응사격을 해 원점타격에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야 정상인 상황에 우리 정부는 공허한 비난성명과 제재로 대응했을 뿐이다.


우리가 북한에 더 큰 피해를 줬다며 자위하던 어처구니 없는 발언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도 일부 미친 인간들은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햇볕정책을 폐기한 보수정부를 비판하고, 적 세력의 포격행위를 변호했다.


불과 일년 전에는 목함지뢰 도발이 있었다. 북한이 우리 철책선 안에 목함지뢰를 설치해서 우리 군인들이 두 다리를 잃었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은 그들은 여생을 목발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확성기를 틀었다. 걸그룹 노래와 프로파간다 따위로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파한다는 것이다.


고작 확성기를 트는 걸 대응이랍시고 하고 있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이거 가지고 "지금 전쟁하자는 겁니까?"라며 확성기를 끄라고, 북한을 노엽게 하지 말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이 국민을 대표해 정치를 한다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북한은 한달이 멀다하고 핵실험, 불바다 발언 등 크고 작은 도발과 위협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국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이 일어났어도 수십 번은 더 일어났을 상황에 우리 정부는 허울뿐인 제재만을 반복해왔고, 북한 문제, 안보 문제에 진영논리가 씌워지며 정부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해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설쳐댔다.


게다가 북한을 편드는 진성 종북, 이적세력들은 그러한 정치인들의 그림자 뒤에 숨어, 민주주의를 방패막이 삼아 나날이 그 힘을 키워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휴전 중에 적의 공격으로 국민이 다치고 죽었는데 정부가 이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어디까지 끌려오나 크고 작은 돌을 던져가며 우리의 인내를 시험해왔고, 이제는 핵무기라는, 우리를 단숨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재앙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정치인들은 북한 문제로 편나눠 싸움박질만 하고 있었고, 정부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이제 와서 급하게 대응책을 찾고자 방어무기 등을 들여온다고 하니, 또 정치인들과 좌익선동꾼들과 종북이적단체들이 방해하며 발목을 잡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 정치구조 때문에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


나는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를 비롯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최선을 다해 성실히 수행해왔다. 그런데 국가는 나를 지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천안함에 탔었을 수도 있고, 내가 연평도에 살았었을 수도 있고, 내가 최전방에 배치되어 목함지뢰를 밟았었을 수도 있다. 내 가족이나 친구가 그랬을 수도 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쌍방향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나는 이 나라를 뜨겠다.


북한의 핵무기가 완성되는 순간 한국이 안보 문제에 있어 굴종의 길을 걷는 것도 머지않아 보인다. 차라리 전쟁을 한다면 내 가족, 친구들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군복을 입겠다.


그러나 북핵이 완성되고, 북한의 위협 속에 여생을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짊어져야만 하는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겠다.




- 우원재 자유기고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