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많지 않다.

인류 역사의 출발점인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 1절 이전의 시대를

신의 시대(창세전 영화의 시대)라 하고

1장 1절 이후의 시대를 인류역사의 시대로 구분한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 1장 1절의 태초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굳이 년도로 따지자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기원전 4000년경의 천지창조의 때이고,

요한 1장 1절의 태초는 천지창조의 이전의 때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신의 시대를 말한다.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몇가지 단서가 있다.


첫번째 단서: 창세 전 영화의 시대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대를

창세전 영화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에서 유래한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이 말씀에서 단서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셔서

하나님과 아들이 영화로운 시대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두번째 단서 : 아들이 천지창조에 참여 


또 다른 단서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아들이 천지 창조의 수행자로 하나님과 함께

참여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창조의 행위가

두 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물이 창조될 때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으로 상징했는데

하나님과 말씀이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하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8번

"하나님이 이르시되...이 있으라" 말씀으로 창조하신다.

말씀은 나중에 성육신(Incarnation)되어 구세주로 오신다.

히브리어 창조의 뜻을 가진 '바사'는 무로부터 창조를 의미한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무에서 유를 생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에서 우연히 출발했다는

빅뱅이나 생물의 출현은 가설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다.


창세기의 창조로부터

물질, 공간, 시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빛과 어둠이 가장 먼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낮과 밤의 교대를 통해 시간의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창조의 피조물들이 한시적 시간의 한계를 가진 것으로

이런 시간성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원성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영생이 가능하게 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생명의 원천이 되어 인류의 지배권을 갖는 동시에

그를 믿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가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개의 사건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중보자로 드러난다.

그 분은 우주의 기원일 뿐 아니라 그 목적이기도 하다.


전 우주적으로 가장 위대한 법칙이 한 가지 있다면,

만물은 그 분에게 복종해야 하며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서류를 구비하거나

심오한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가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구도는

또다른 사건으로 차질이 발생하였다.


세번째 단서 : 천사들이 처소를 떠난 사건  


하늘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생기는 사건이 일어났다(유 1:6).


천사의 최고층인 그룹에 지위에 있었던 사탄이

천사들을 충동하여 하나님께 반역한 사건이 천지창조 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이 천지창조전이라 예상하는 것은

에덴에 살고 있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사탄이 유혹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에덴에 왔던 사탄은 이미 타락한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두 개의 진영으로 분리되었다.


하늘에 있었던 반역사건이 악의 기원이었다면,

에덴에서의 선악과 사건은 죄의 기원이 되었다.


악과 죄는

인류를 두 개의 종족으로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을 따르며 자기 처소를 지켰던 천사들이 있었던 것처럼

인류도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이 백성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을 따랐던 타락한 천사들이 있는 것처럼

인류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탄을 따르는 사탄의 백성들로 양분되었다.


두개의 세상과 두 백성이 있다.


사탄의 백성을 불신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곳을 세상이라고 일컫는데

그 세상의 임금이 사탄이다.


사탄은 만국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데,

세상에 속한 자, 어둠의 자녀, 거짓 아비의 자녀들로

거짓종교, 진화론, 무신론을 신봉하는 불신자들의 집합체를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와 사망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들의 특징은

사탄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극도로 증오하는 것처럼

그의 아비의 속성을 닮아 그리스도인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만 미워한다.


세상을 같이 즐기고

세속주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좋아한다.


모든 거짓종교(이슬람,불교,힌두교), 무신론,

공산당, 진화론자들이 신을 존재를 부인하며

공통적으로 기독교를 싫어한다.


아무리 탁월한 인격이나 지식을 가졌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을 아들 예수에게 주었는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방법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만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요,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다.


하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류의 구원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예수님은 이렇게 천명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다" (요 14:6) 

  

"나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4)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한편 현재 불신자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악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이 세상의 임금의 영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풍조를 따라가게 한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그들은

진노의 자녀들이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처럼,

저들도 사탄과 세상을 따르고 하나님이 없으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도록 전파하며 활동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고 미워하며 반복음을 전도한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요 10:10)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 안에 생명의 빛이 없는 고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모두 거짓의 아비 사탄의 자녀가 되고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사탄을 따라

그의 나라 지옥, 불못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임금이 지배하는 세상:

언론, 정치, 문화, 종교, 공산당, 인본주의, 무신론


이 모두 기독교를 미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 것이다.


그들은 사탄의 소유로 지옥에 속했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요 8:47)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출처: 카이로스 / ars

다 하려 들지 마라!


영적으로도 함정이 있다.

처음에는 말씀대로 한다.

받은 은사대로 한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

형제들이 할 일들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성과가 나고 일이 잘 되고,

열매가 맺어지면 다 하려 든다.


내 은사를 너머서서 하려 들고

형제들의 일을 대신하고

나중에는 하나님 하실 일도 대신 하려 한다.


그 선을 넘을 때,

그 일은 영적인 일이 아니라,

내 욕심을 따른 일이 된다.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생긴다.

하나님의 역사는 줄어들고 사람의 생각이 커진다.


내가 나오기 시작하고,

물러서기 어려워진다.

내가 정점을 찍어야 한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셨지만,

이제는 내가 기도할 때마다,

내가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이 병을 고치셔야 하고,

반드시 역사하셔야만 한다.


처음에는 부분으로 시작했지만,

바뀌지 않는 전체가 절망스럽다.

더 이상, 부분으로 남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우리가 개혁주체세력이다.

그래서 이 땅에 장로교단만 200개다.

그래서 모두 좁쌀만하다.

연합이 없다.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과 연대,

내가 못하는 것을 해주는 형제에 대한

경의와 사랑과 겸허함이 적다.


내가 거대한 하나님 계획의

일부라는 절제와 책임감.


하나님의 도시의 구석을 쓸다가는

작은 청소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영광된 만족인지,

그 기쁨도, 그것을 알아주는 형제들의

박수와 사랑도 아쉽다.


내가 다 하지 말자.

그것을 맡은 못하는 형제가 더 잘하도록 돕자.

연합하자. 우리는 한 몸이다.



- 채영삼 목사님 페이스북 -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 두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명확함에도

교회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직도 휴거가 환란 전인지, 환란후인지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휴거가 환란 전인지 환란 후인지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를 내려주지 않은 면도 이런 혼란을 야기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종말의 말씀을 읽고 정황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1. 노아의 때와 같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님은 때에 대한 단서를 알려주기 위해 노아의 때를 말씀하셨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모두

평소처럼 지내며 시시덕거리고 즐기며 살았다.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 버릴 때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홍수란 대환란을 의미한다.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는 단서는

환란이 들이 닥치기전까지 평소와 다름 없는 상태에서

불시에 일어난다는 교훈을 준다.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노아의 때는 분명 환란전 휴거설을 지지한다.


다수는 환란이 닥쳐야 알게 된다.

미리 앞을 내다 보는 것을 선견지명이라 하고,

일이 일어나고서야 알게 되는 것을 후견지명이라 하는데,

흔히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럴 줄 알았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

이런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어진다.


휴거를 준비하는 사람은 선견지명이고,

휴거가 일어난 다음에야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후견지명이다.

 

 

2. 심판 전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패턴

 

성경을 읽을 때 심판에 대한 패턴을 볼 수 있는데,

심판하시기전 반드시 경고하시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에서 이런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실한 백성을 대환란에 몰아넣고

하나님의 진노를 쏟는 것은

이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난다.

 

 

3.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이 말씀을 환란 상황에서

잡혀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황당한 해석도 있다.


만약 데려가는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짐승의 표를 이미 받은 사람으로 해석할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함께 밭에서

일을 하고, 잠을 자고, 맷돌질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후절도 전후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사례는 휴거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4. "다 졸며 잘 새" (마 25:5)

 

10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오자 다 졸며 잠에 빠지게 되었다.

다 졸며 자는 상황은 긴박한 환란상황을 표현한다기보다

평화롭고 안일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70년이 한 세대에서 인내의 한계를 의미하듯,

'다 졸며 잘새'도 인내의 끝자락을 상징하고 있다.

 

 

5.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이 날(휴거)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데(눅 21:35)

휴거는 전지구적으로 퍼져있는 이방인 교회를 의미하는 반면,

짐승의 우상이 세워지거든 유대에 살고 있는 자들은

도망가라(마 24:15~16)는 말씀은

대상자가 유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수신자다.


이는 휴거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이방인 교회에서 유대인으로 다시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거짓 선지자

 

휴거전 거짓 선지자는 많은 사람을 미혹하지만(마 24:11),

환란 시대의 거짓선지자(두번째 짐승)는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미혹하고(마 24:24),

짐승의 우상에 경배하게 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한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예수님이 죽으셨던 장소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라는 의미로 계시록의 독수리들이

유대인을 피난처로 안내할 것이라는 해석이 있고,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독수리들이 주검

즉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장소에

모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단순히 때가 충족되면 주님이 오신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7. 더디 오리라 생각한 악한 종

악한 종은 그 날이 더디오리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이 악한 종이 환란시대의 상황이라면

짐승의 표를 받았을 것이고,

더디 오리라 생각하기에,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악한 종은 환란 전의 모습이고,

환란의 때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한다.

(마 24:22)

 

 

8. 등불과 기름

 

적그리스도의 치하에서

성령은 이미 지구를 떠나셨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기름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처녀들을 환란시대에 찾을 수 없다.


환란시대에는 성령충만함이 아니라

자기의 인내와 순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계시록 4장 이후에

성령이 지상에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성에서 휴거자를 맞이하고 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후회하는 결말을 보는 법이 없다.

가슴 벅찬 그 날을 고대한다.



출처: 카이로스 / 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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