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

개혁주의 교리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은 항상 신적 작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으로 부터 서술되지 않는 모든 구원의 서정에 대한 주장들은 거짓 교리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역사적 정통 교리는 항상 변함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신적 작정으로 부터 서술되어야 한다.

신적 작정의 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교리도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구원의 서정은 신약 성경의 교리가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교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에 신자들에게 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 신자들에게 해당한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이스라엘도 모두 신적 작정 가운데 유효적 부르심을 받아서 중생과 회심과 믿음과 칭의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에 이르렀다.

구약 모든 선택받은 백성들은 신적 작정을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구원의 과정을 따라서 영화로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 교리는 단지 신약의 교리가 아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교리이다.

가장 먼저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신적 작정 가운데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이 있다.

그리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유효적 부르심이 있다.

그리고 중생과 희심과 신앙과 칭의에 이르는 전 과정은 항상 논리적일뿐 시간의 순서는 아니다.

신자들의 구원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간이란 인류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한 방편일뿐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을 따라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이 되는 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선택이다.

인간 편에서는 공로는 전혀 없다.

다만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없지만 개혁 교리는 반율법주의를 거짓 교리로 단죄하기에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당위법 조차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신자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마땅히 해아할 도리는 있다.

그것이 당위법이다.

신자의 공로로 행할 수 없으나 행하여야 하는 영원한 도덕법이 있다.

그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자기 의로 자력으로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류는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위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있다.

중생한 신자들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결국 중생한 이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간다.

그 중생한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영원한 도덕법을 성취해가는 삶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순종이라는 과정이 요구된다.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있는 신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영원한 도덕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생한 신자들이 영원한 도덕법을 따라서 살아갈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거기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인간의 공로도 인간의 자기 의도 없다.

영원한 도덕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영화로움에 이르는 법으로서 십계명은 그것을 지켜가는 과정을 통하여서 영화로움에 이른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성화란 영화의 시작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화로움에 이르기 전까지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부단히 영화의 완성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선수와 같다.(갈 2:2)

그때에 사도 바울이 푯대로 삼은 영원한 도덕법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통하여서 마음에 심기워주신 영원한 도덕법이다.

신자들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켜가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되어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부단히 신자들 안에 하나님의 계명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영역의 개념 보다 통치의 개념이 앞선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가시적 교회에 모여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때에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한 신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아무리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도 그곳이 결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의 서정의 교리는 교회론과도 연결된다.

하나님의 교회란 중생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여서 세워진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가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 종교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법을 잃어 버리고 철저하게 세속화 되어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라는 색채를 띄고 있는 서양 종교이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신의 대리자로 여기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비참하게도 하나님의 법을 상실하여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교리는 참된 교회의 교리와 맞물려 있다.

참되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게 참된 신자들이 없는 교회는 그야말로 복마전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서 사데 교회를 책망하셨을때에 그러한 교리가 드러났다. (계 3:1~6)

결국 참된 신자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아닌가 우려 스럽다.

로마 카톨릭 교회 처럼 참된 신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이다.

지금의 개신교는 종교 정서주의 만 남아서 예배시에 꽥꽥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나라의 계명에 순종해야하는 교리들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 가운데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된 신자들에게 구원이란 자신에게는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교회론적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 기록한 증거들을 살펴 보면 알 수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4~12)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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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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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 / 존 머레이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죄와의 확정적인 단절과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에 대한 강조는 죄가 점점 더 멸해지고 거룩함에의 일치가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금욕과 성화 과정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 6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죄의 권능과 더러움으로부터의 결정적인 옮김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내주하는 로 인해 계속 갈등을 묘사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라고 스스로를 고발해야 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7:23, 24), "내 자신이.....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로마서 6장에서도 우리는 죄의 잠식(蠶食)에 끊임없이 깨어 있을 필요를 함축하는 권면들을 거듭 듣는다.

 

신약 성경 기자 가운데서 사도 요한보다 더 신자의 성화의 확정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람은 없다. 요한의 용어들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 또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명백한 사실들과 조화시키기에 아주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런데 이와는 달리 요한은 같은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그는 신자가 죄 없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가 범죄할 때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고 요한은 신자의 삶에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측면이 있음을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status quo) 유지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진보의 상태 즉 성격상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진보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금욕성화 양자를 포괄한다. 

 

금욕과 관련해서 신약 성경에 그 구절들이 등장하는 문맥으로 인해 특히 두드러지는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두 구절들은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영역으로서의 이전이 강조되고 있는 문맥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도움이 된다. 로마서 6장은 이 확정적 성화를 강조하는데,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말이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8:13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향해 말하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데 신자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이것은 그가 이미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목되는 것이다(롬 6:6). 이 활동은 성령의 힘과 은혜 안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영으로써'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들이 참여해야 하는 활동이며,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격렬한 활동이다. 골로새서 3:5의 문맥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한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이라는 같은 사고를 포함하고 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권면은 선행하는 범주적 명제들로부터 나온 권면이다. 로마서 8:13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 신자의 활동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골로새서 2:20; 3:3에 언급된 죄에 대한 확정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사욕과 더러움으로부터 신자가 해방되지 않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들을 죽이는 도살장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확정적인 죽음을 말할 때 쓰였던 어법이 수동의 어법인 것같이-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너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롬 6:2; 골 2:20; 롬 7:4)-이제 그 용어들은 신자 자신 편에서의 활동의 용어이다. 고린도후서 7:1의 권면도 같은 취지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여기의 주장은 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과 영의 더러움이 있으므로 우리 자신을 그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욕과 정화(淨化)의 과정은 신자에게 여전히 붙어 있는 죄 및 더러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표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의 제거다. 이러한 죄 됨의 완전한 근절(根絶)은 신자의 목적 즉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의 일치와 양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하고 흠 없고 점 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었는데, 그들은 그를 닮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형상과도 일치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리고 요한도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는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요한이 이 소망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가 곧장 우리의 죄 됨과 관계가 있는 이 소망의 의미의 주의를 집중시켜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곧장 덧붙인다. "주(아버지)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근절과 이것에 기여하는 금욕의 요구는 구원을 누리는 것과 그 구원이 향해 있는 목표의 성격에 내재해 있다.

 

성화의 과정은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근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7:1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을 덧붙여야 했던 것은 뭔가 더 적극적인 측면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완전의 총합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완전의 농축으로서의 거룩함에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점진적인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용어는 다음 두 경우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예수님의 변형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도 바로 이 용어다(마 17:2; 막 9:3).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전 구속 과정의 목표는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난 그리스도의 형상에의 일치이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3:18보다 점진적 성화의 방법을 더 정확히 규정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든, 두 가지 모두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요한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영광을 보기 때문이요, 보면서 점점 더 변화되어 그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에(참고. 히 1:3), 비길 데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고정되어, 우리는 점점 더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의 특성들을 띠게 되고, 마침내는 온전히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과 의욕을 갖고 몰두하는 것을 닮는 것은 심리학의 법칙이고, 이 경우에도 그 법칙은 적용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자연적 요소들은 이 변화의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이 표현을 '영이신 주로 말미암음이니라'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성령에 대한 암시가 배제되지 않으며, 성령의 깨우는 권능과 효과적 사역을 새 언약의 탁월성을 특징 짓는 일례로 늘고 있는 6절과 8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여기서 바울이 '영이신 주'를 말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구속 과정의 목표를 완성하려는 목적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을 상기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 14).

 

적극적 측면에서의 점진성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한다(빌 1:9).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말미암아 구원 즉 종말에 완성되고 계시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가라고 말한다(벧전 2:2; 참고. 1:5). 그는 또한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 주 곧 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에베소서 4:12-16은 특히 에베소서 전체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고찰할 때 이 점에서 가장 도움이 된다. 여기서는 성장 즉 지식과 사랑으로 구체화된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1절에 규정된 직분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향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신자들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절)는 것도 동일한 권면이다.

 

그러므로 성장의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과정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에 이 원칙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쓸모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기괴한 일일 것이다. 어른이 어린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행위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는 어린 아이가 있으며, 청년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런데 성장의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기괴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교회의 증거를 얼마나 손상시켜 왔던가!

 

이 과정은 특히 지식사랑으로 구현된다.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로서의 지식과 이해력의 개화(참고, 엡 1:17, 18; 4:13-15; 벧후 3:18)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것들이 증진됨에 따라 사랑, 희락, 화평 등 성령의 열매가 증진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강화시켜 준다. 이 둘의 상보성(相補性)은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분변함 속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빌립보 신자들을 위한 바울의 권고에 예시되어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러나 사랑은 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증진되고 풍성해져야 한다(참고. 빌 1:9; 살전 3:12; 4:10).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분, 사랑 자체이신 분의 영광을 점점 더 알게 됨으로써 자라간다.

 

이러한 진보는 개인뿐만 아니라 통일성과 연대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도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개인의 성장은 성령과의 교제와 마찬가지로 교회와의 교제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신자들은 결코 독립된 단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았다(엡 1:4). 그들의 구속이 성취되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후 5:14, 15; 엡1:7). 구속의 적용에서 그들은 그리소도와의 교제로 인도된다(고전 1:9). 그리고 성화 자체도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온전하고 전적으로 흠 없고 점 없이 나타날 때에야 비로서 개인에게 실현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온 몸의 성화를 계발하고 진전시킬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책임, 특권, 호기(好期)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들이 명백해진다.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무관심하고 은혜, 사랑, 믿음, 지식, 순종, 거룩함 안에서의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 자신의 성화를 방해한다. (1)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부족 자체가 영적 성장의 밑동을 갉아먹는 악덕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안에서의 성령의 열매에 관해서 갖지 않거나 깨어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데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모든 단점과 죄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사람들의 결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그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가 하지 않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메마르게 하며, 이러한 메마름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지지, 격려, 가르침, 교화, 권면을 충분하게 그에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의 상호 작용과 상호 소통이 하나님의 백성의 점진적 성화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측면들을 보게 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그리스도의 몸의 연대성 안에서의 우리의 상호 의존의 진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성화에만 몰두하는 것의 위험성과 모순됨을 밝혀 준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은 독립성과 초연성의 반대되는 덕목을 얼마나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참고. 롬 12:4 이하; 고전 12:12 이하; 골 2:19). 

 

성장에 있어서의 이러한 교제는 방금 인용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라는 표현에 유의할 것을 요구한다. 이 표현은 성화 과정의 목표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 자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의 나눠 줌과 받음보다 이 과정의 특징을 더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1:19부터 살펴보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이 본문은 존재론적으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모든 충만'은 영원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충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을 논박하고, 경륜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이고 중보적인 정체성 안에 있는 충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8절이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면서 특히 메시야로서의 경륜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명칭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명칭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영원한 성자의 신분과 신성에 고유한 탁월성이 아니라 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에게 발생한 탁월성이며, 나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는 계획된 결과라고 분명히 진술된 탁월성이다.

(3) 19절은 탁월성의 획득의 인과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탁월성이 그에게 속하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본질적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행사할 만한 자격이 없었다면, 즉 신성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그의 것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탁월성은 그에게 부과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진정 사실이다. 그러나 19절이 그 탁월성을 만들어 내는 수여(授與)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은 경륜에 대한 문맥에 있어서의 강조와 더욱 부합한다.

(4) 만약 19절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전혀 만들 필요가 없는 중대한 신학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성자 안에 거하는 것은 성부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성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골로새서 1:19이 말하는 충만은 구원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에 부여된 충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2:9은 이러한 결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2:9은 영원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신성의 충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주된 의도는 이 충만이 그의 성육신된 상태 안에 거하며, 육신이 말씀으로서의 그의 육체적 정체성으로 인해 삭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신성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그가 메시야 직분의 수행으로 인해 얻게 될 충만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충만은 생명, 은혜, 진리, 지혜, 지식, 선함, 자비, 의, 권능의 충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바울의 본문을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성화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다.

이제 에베소서 1:23로 돌아가 보자.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첫번째 문제는 여기서 '충만케 하다'로 번역된 용어의 의미다. 그것은 능동태 또는 수동태 중 어느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수동태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충만케 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은 충만케 된다는 개념을 강조할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그가 온전히 충만케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그에게 적용된 충만이 가리키는 것으로 계속 충만케 된다는 것이 된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 영속적으로 거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엡 4:10). 이것은 최소한 나눠 주심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능동적인 의미를 택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은 우주적 관련성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이다(엡 1:22). 그리고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엡 4:10). 그러나 '만물 안에서 만물'은 단지 교회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는 교회를 온전히 충만케 하신다. 문제가 되고 있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충만'의 선행사는 무엇인가? 22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교회인가?

그리스도가 선행사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거의 유지될 수 없는 견해다.

(1) 구문론적으로, '충만'의 선행사를 22절로 소급해 찾는 것은 조악하다. 그러므로 다른 견해들이 극복되지 않는 난점을 갖기 전에는 이러한 구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2) 그리스도 자신이 '충만'이라면, 이어지는 문맥을 보아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또 다른 위격의 충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셔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념, 특히 바울의 관념에 이질적인 개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성부의 충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충만이 거한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또 다른 위격의 충만으로 얘기되지는 않는다.

(3) 이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그 위격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바울에 따르면, '만물 안에서 만물'이 우주를 가리키든지 교회를 가리키든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같은 서신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엡 4:10). 그러므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방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특히 두번째와 세번째의 이유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해석은 기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은 교회를 '충만'의 선행사로 보는 것이다. '그의 몸 된 교회'가 밀접하게 선행한다는 사실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구성이 되게 한다. 그리고 강력한 증거가 다른 해석을 요구할 때까지는 이것을 논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충만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를 충만케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 특히 바울의 가르침에 반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받는다(요 1:16).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골 1:19; 2:9). 그리고 교회는 때를 따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엡 4:13). 하지만 충만은 온전케 하는 것 즉 보충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참고. 마 9:16; 막 2:21). 경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자격과 직분은 결코 그와 연합된 자들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다. 몸과 분리된 머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항상 서로에 대해 보완적이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이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충만'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통해 보충 관념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충만'은 또한 어떤 것을 저장해 두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서신에서 이 의미는 두 번 나타난다(3:19; 4:13). 그리고 이 두 경우에 유일하게 적절한 의미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라는 요한복음 1:16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4:13) 된다고 인식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이 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를 때, 이 상태는 그리스도가 구현한 은혜, 덕목, 진리, 지혜, 의로움,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다. 이러한 전달은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신 자의 형상을 닮아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1:23의 바울의 가르침의 유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분여(分與)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회는, 영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이 동일한 전달의 목적과 실현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경륜에 의해서 그 안에 거하는 의로움, 지혜, 지식, 권능, 은혜, 선함, 인내, 사랑, 진리, 자비의 충만의 수혜자다. 이 충만을 신자들은 분리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통일성과 교제 안에서 받는다.

 

그러므로 점진적 성화가 수반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동화(同化)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의 분여, 우리가 지상의 삶 속에서 익숙해 있는 유기체나 생물보다 무한히 높은 차원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하여 흘러 나오는 분여에 의해서 획득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과 특권에 적용될 때, 그것은 점진적 성화에서 기본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연합과 교제 또 그로부터의 전달의 의미들을 점점 더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의 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에서 연유하는 절박한 요구, 그의 몸의 지체가 됨으로써 생기는 요구,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는 데서 행해야 할 직분 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부터 제공된다. 성화의 목표가 수반하는 모든 요구의 실행에 있어서 그의 은혜의 총족성을 의심하는 것은 모든 충만이 거하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맏아들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즉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궁극적인 성취의 소망과 자신감을 생기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충만뿐이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에서 발췌(307-318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언론이 말하지 않는 5.9 대선의 섬뜩한 진실!
포장만 선거일뿐 실제는 체제전쟁.. 민중혁명 완성 맞서는 큰 게임 직시할 때


대선 레이스 3일째인 4월 19일 언론의 고질병인 이른바 경마장식 보도가 다시 도졌다. 어느 후보가 어디 가서 상대 후보를 뭐라고 헐뜯고 고함쳤다는 식의 겉핥기 보도가 반복되면서 정작 이슈-정책은 실종된다. 여기에 세몰이식 여론조사가 대세론을 부추긴다.


이 통에 문재인-안철수 양강 구도만 조명하고 홍준표-유승민을 투명인간 취급하니 유권자 선택의 폭은 더욱 줄어든다. 이런 구조에서 역대 대선과 전혀 다른 성격의 5.9 대선의 숨겨진 진실이 조명될 리 만무다. 숨겨진 진실이란 게 무엇일까? 재확인하지만 이번 대선은 포장만 대통령 선거일뿐이며, 실제는 전쟁이다.

정확하게는 체제 전쟁인데, 대한민국 정체성을 흔드는 체제변혁-민중혁명으로 넘어가느냐, 그 흐름을 끊어내느냐가 관건이다. 1948년 건국 이래 유례없는 위기 국면이지만, 1987년 체제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사실상의 국공합작을 해왔다.


1987년 이후 국공합작이 깨진다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된 인민민주주의 세력 혹은 사회주의 세력이 체제 안에 스며들었고, 그게 지난 30년 이 나라 항구적 위기의 뿌리다. 그동안 민노총-전교조 등으로 힘을 비축해온 좌익세력은 '좌우익 동거'를 끝내려고 용트림이다. 그래서 저들의 눈에 지금은 영락없는 '혁명의 만조기(滿潮期)' 국면인데 왜 이런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을까?

언론이 엉터리인데다가 다른 요소가 가세한 탓이다. 즉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고조된 정치환멸, 이념지형의 완전 붕괴, 한반도 주변상황에 대한 정보 부재 등의 요소가 지금 우리의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있다. 선거란 공동체의 오늘을 직시하는 시민교육의 장인데, 현 상황은 정반대다.

 

 
▲ 언론의 고질병인 이른바 경마장식 보도가 다시 도지면서 이슈-정책은 실종되고 세몰이식 여론조사가 대세론을 부추기고 있다. 사진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오른쪽)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유세전을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어리석은 유권자들이 좌파 정치인, 얼치기 지도자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눈먼 공멸(共滅)의 게임을 벌인다.

그걸 부채질하는 세 요소 중 정치 환멸이야말로 큰 덩어리인데, 죄 없는 대통령을 '마녀'로 몰아 내쫓아낸 이후 유권자들은 적대적 정치의식으로 똘똘 뭉쳤다.

이후 그들 나름으로 만든 해결안이 이념적 정체성이 불투명한 두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율을 몰아주는 선택이다. 그게 이른바 대세요, 양강 구도라는 것의 섬뜩한 뒷모습이다.

두 후보란 홍준표의 지적대로 좌파 하나, 얼치기 좌파 하나를 말한다. 그들을 통상적이고 정상적인 정치지도자로 착각한 채 즐거운 마음으로 그냥 뽑아도 될까?

그동안 뭔가가 찜찜하셨다고? 그럼 원로 정치학자 양동안 교수의 가슴 철렁한 다음 경고를 경청해보라."공산주의 위험이 문 앞에 와있다. 대선에서 보수세력이 패배한다면 부역자 청산을 신호로 공산화의 문을 여는 체제변혁이 급속하게 진행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지형의 붕괴현상도 매우 위태롭다. 이념지형의 붕괴란 유권자들이 이젠 좌익도 괜찮다고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정당지지율을 묻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운동권 정당’민주당이 과반에 육박하는 46%로 당당 1위로 나타난다. 자칭 보수라고 말하는 유권자들의 46%가 안철수를 찍겠다고 응답하고, 나머지 18%가 문재인을 찍겠다고 말한 다.

이념의 아노미 현상이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이다. 그런 정치환멸-이념붕괴에 브레이크를 잡지 않을 경우 이 나라는 민중혁명-체제변혁을 향해 거침없는 질주를 거듭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지금 상황은 1970년 중남미 대륙 최초로 선거를 통해 자발적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칠레 아옌데 정권의 재판(再版)이 될 가능성이 높다.

   
▲ 혼돈의 대선판이다. 최악(문재인)보다는 차악(안철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 홍준표의 보수진영 표만 결집할 경우 승리할 수 있다는 자강론(自强論) 사이에서 유권자의 판단이 어느때보다 중요한 때다. 사진은 유세전을 펼치고 있는 홍준표(오른쪽)·유승민 후보. /유승민 홍준표 후보 공식사이트


한국의 자살민주주의가 완성되는가

대선이란 포장 속의 체제전쟁을 눈치 채지 못하는 우리 수준은 한반도 주변 국제상황에 대한 정보 부재의 깜깜이 구조에서 다시 반영된다.

일테면 주요 출마자 5명 전원이 당선될 경우 한일 위안부협정을 파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우물 안 개구리도 이럴 순 없다. 왜 어느 누구도 한미동맹의 초석인 한일관계 개선을 말하지 않는가?

방어무기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갑론을박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전세계가 알고 있는 '한반도 4월 위기설'을 우리만 애써 외면하는 꼴이다. 동태평양을 담당하는 미 3함대 소속의 칼빈슨 호가 한반도 주변을 찾은 것은 2차대전 이후 처음이고,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은 기정사실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우리 언론의 시야는 여전히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에 갇혀있다. 청와대와 국회 사이를 맴맴돌이할뿐, 한반도 전체 구조를 지켜볼 능력이 안 된다.

건국 이후 69년, 아직은 젊은 대한민국이 이렇게 공멸하고 말 것인가? 그걸 묻지 않을 수 없다. 촛불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10월 이후 나는 그점을 반복해 지적했다.

조중동-종편 등은 대통령을 내쫓은 걸 시민혁명이라고 포장하지만 그건 거짓이며, 헌법 4조가 명문화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민중혁명-체제변혁이 진행 중이라고 걱정했다. 저들이 볼 때 대선은 승리의 고지다. 좌익은 최후 승리의 깃발을 꽂으려 총공세다.


드디어 한국의 자살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대한민국 패망의 불길한 징후가 본격화되는가? 요즘 어딜 가나 묻는다. "누굴 찍어야 합니까?"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답이다.


최악(문재인)보다는 차악(안철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 홍준표의 보수진영 표만 결집할 경우 승리할 수 있다는 자강론(自强論) 사이에서 중심 잡으시길 새삼 기대한다.



-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

출처: 미디어펜 (http://www.mediapen.com/news/view/257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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