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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0) 2017.04.25

북극성·스커드-ER 등 새로 개량하는 미사일 가능성
지난 16일 함남 신포서 발사한 미사일도 곧바로 폭발

(서울=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6일 시행한 4발의 탄도미사일 발사 훈련 사진을 7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했다. 사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4발의 미사일이 동시에 발사되는 모습. 2017.3.7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북한이 29일 오전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으나 공중에서 폭발해 실패했다.

북한은 현재 한반도 쪽으로 이동 중인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CVN 70) 등 미국의 대북 군사 압박에 대응해 저강도 무력시위성 도발을 감행한 것으로 분석된다.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이 오늘 오전 5시30분께 평남 북창 일대에서 북동방향으로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 미사일은 발사 직후 수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패한 미사일은 중장거리미사일(IRBM)인 북극성 계열 또는 스커드-ER 등 북한이 최근 새로 개량해 나가는 미사일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합참은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 기종과 비행 거리 등을 분석 중이다.

이번 미사일 발사는 북한군 창건 85주년 기념일을 맞아 지난 25일 사상 최대규모의 화력훈련을 한 이후 나흘만이다.

북한은 이번 화력훈련이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경고이며, 핵과 미사일 시험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북한은 지난 16일 함남 신포 일대에서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4~5초 후에 폭발한 바 있다.

북한의 이번 탄도미사일 발사는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한반도로 이동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8일(현지시간) 북한 핵문제를 근원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장관급회의를 개최한 것과 맞물려 이뤄졌다.

칼빈슨호는 이달 말께 우리 해군과 고강도 연합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유엔 안보리 회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부의 새로운 대북 기조를 입안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직접 회의를 주재했다.

안보리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따라 거듭된 일련의 대북제재에도 아랑곳없이 도발을 거듭하는 북한에 대해 고강도 대응 기조를 재확인했다.

북한의 국제사회의 압박에 대응해 탄도미사일을 북한 쪽 내륙으로 발사하며 저강도 도발을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threek@yna.co.kr

성령의 사역

부제 : 신앙에 대한 분파별 이해와 구원의 서정

D.M.로이드 존스


우리는 성령님께서 복음의 일반적인 소명을 주시는 분임을 고찰했으며, 또한 이 소명은 모든 이들, 즉 불신자로 남아 있는 자들과 신자가 되는 자들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메시지가 전해지고 선포가 일반적인 외적 소명으로 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우리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복음의 제시인 그 소명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한 분리를 가지고 온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 2장에서 봅니다. 즉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나눠진다는 점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에 이런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교회에 앉아 있는 회중이 복음을 듣습니다 : 어떤 이들은 그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로 우리 주님게서 예견하셨던 것이며, 또한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교회사 속에서 풍부하게 보여졌던 것입니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동일한 가정에서, 동일한 환경에서 양육되어 동일한 예베에 참석했는데도 한 명은 구원받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질문은 즉시 이렇게 발생합니다. :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이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연결해서 가장 신비한 문제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피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중심질문 :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주어진 역사적인 답들을 우리가 살펴 보는 것이 가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I. 질문에 대한 제견해

1. 펠라기안(Pelagian).
펠라기안(Pelagian)의 해답이란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주어진 답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는 성 어그스틴이 매우 효과적으로 살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인간적으로 펠라기우스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어그스틴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가르침을 많이 수정하는 글들을 쓰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는 원죄가 없습니다. 펠라기우스의 관점에 의하면 사람은 중립적인 상태에서 태어나 산다는 것이며, 각 사람은 완전히 자유의지를 소유하며 선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령님의 유일한 사역은 사람을 이용하여 성경을 산출 할게 한 것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하시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하는 결정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펠라기우스의 견해인데, 그는 현재까지도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많은 추종자들을 갖고 있습니다.

2. 준-펠라기안(Semi-Pelagians).
그리고 이런 견해와 거의 같았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기에, 때때로 준 펠라기안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은 사람들을 도울 뿐이며, 사랑은 사람 자신들 속에서 기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 원하며, 그들은 진리를 알기 원하며, 그것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준 펠라기안주의라고 부르는데, 여러분들은 이런 이름이 왜 주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견해는 협동의 은헤(co-operative grace)를 가르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와 협동하는 것으로, 우리를 진리의 지식과 구원에 도달하도록 은혜롭게 돕는다는 것입니다.

3. 알미니안주의 (Arminianism)
이것은 17세기 초에 살았던 화란사람 아르미니우스라고 불리운 자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요한 웨슬리가 그리했던 것처럼, 아르미니우스는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들만 남아 있다면 전혀 소망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사람이 태어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는 점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에 협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주어졌을 때에 왜 어떤 이들은 믿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에 대한 설명은 성령에 의해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단지 어떤 사람들만 그것을 사용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의 가르침입니다.

※ 준-펠라기안과 알미니안의 차이.
준펠라기안은 먼저 바라는 자가 사람이며 성령께서 다음에 와서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견해는 사람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죄로 죽어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이며,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모든 이들에게 바랄 수 있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성령과 협동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웨슬리와 그를 따랐던 모든 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던 바로 그 견해입니다.

4. 루터란(Lutheran).
루터란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루터란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죄악 중에 죽어 있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다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루터란은 답하기를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 은혜를 거절하면 그들은 불신자로 저주아래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은혜를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 알미니안과 루터란의 차이.
루터란과 알미니안주의와의 차이점을 여러분들은 발견하십니까? 알미니안 주의는 사람이 반드시 협동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루터란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은 적극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저항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역사적인 루터란의 가르침이며, 정통 루터주의자들이라는 범주에 속한 세상의 모든 자들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5. 개혁파(Reformed) 견해.
개혁파의 견해는 영국교회의 39개조항에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와 화란 혹은 벨직 신앙고백서와 다른 개혁적 교리의 고전적 진술들 속에서 분명하게 명백하게 가르쳐 집니다.
여기에서의 가르침은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힘도 능력도 완전히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는 구원받고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한 이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대답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구원받은 자속에서 역사하시고 그렇지 않는 자 속에서는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즉 사람 속에서 은혜가 먼저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무엇인가 발생하기 이전에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궁극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열님 마음으로 성경으로 가야한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우리 자신의 철학에 의해서 곁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교리를 접하는 우리가 취해야할 분명한 자세입니다. 행복스럽게도 우리는 이런 견해들을 이해함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하늘에서는 펠라기안들이나 알미니안들 그리고 루터란들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구원과정에 대한 생각과 이해에 좀 혼란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이해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 더욱더 지적이며 더 큰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지 않습니다.

※ 이 교리이해의 필요성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이 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왜 그런 것들로 귀찮게 합니까?"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귀찮게 하는 이유"는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만약 이런 이해에 대한 국면을 포기한다면, 저는 믿을 강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저의 호가신을 세워주는 것도, 제게 놓여 있는 복된 소망에 대한 어떤 확신도, 기독교 교리를 이해함도, 그 길을 이해함도, 또한 구원의 길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흥미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비록 이것이 지적인 기준으로도 매혹적인 흥미가 있지만 말입니다. 단지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이유에 제 자신의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로를 주며, 참으로 강하게 하며, 굳건히 설수 있게 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견고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가 후에 이단으로 빠지는 경우들을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엡4:14). 따라서 이런 것들이 비록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살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과 실천적인 항목에 있어서 그것들은 진실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II. 구원의 서정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다음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자들의 영혼들 속에서 이런 특별한 역사가 있다면,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어떤 순서로 하시는가?
우대한 권위자들,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여러 세기 동안의 위대한 신학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성인들은 이것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썼으며, 그들은 이것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order of salvation)라고 불러 왔습니다.

성경 그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명확한 순서를 주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가까운 접근이 로마서 8:28-30절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합니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순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리 정하셨으며, 부르셨으며, 의롭다 하셨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순서이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완성된 목록이 아닙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완성된 목록을 주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도의 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보증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필수적인 단계들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화에 대하여 언급한 곳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순서에 대한 이런 질문에 관하여 동의하는 두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다섯 개의 다른 학파들에 속한 사람들 조차도 이미 제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들 사이에서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이 개혁파의 권위자들을 ?려보아도 그들 속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순서로 이런 항목들을 설명하는 두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한 일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 할 수 있는 두가지 주된 방법이 있습니다.
① 먼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런 구원으 순서를 생각할 수있습니다:
자신의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죄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순서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영원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순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또 다른 방법은 분명히 앞의 것과는 반대인데 일시적인 방법, 즉 시간과 경험 속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근거로 순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는 구원의 본질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바른 순서, 바른 과정으로 이런 것들을 말했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지만, 진실로 매우 유익하고 가치있으며 나아가 놀라운 한 영적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신다면 이렇게 순서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근본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와의 연합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원받기에 여러분들을 이것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것 때문에 다음 순서로 칭의를 놓을 것이며, 그 다음으로 중생을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양자됨을 놓은 다음 여러분들은 회개와 전환 그리고 신앙을 포함하고 있는 돌이킴을 둔 다음 성화와 견인을 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경험적으로 이것을 놓고 싶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순서를 둘것입니다; 확신, 돌이킴, 믿음, 칭의, 중생, 양자, 성화, 연합과 견인.

이런 모든 것을 다룸에 있어서 위험은 너무 연대기적(시간적)으로만 치우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위험한 것은 너무 시간적인 요소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렇게 될 때 각각의 항목을 반드시 기계적인 순서로 앞의 것들을 따라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위험하며 진실로 항상 잘못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가 울고 외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울음이 먼저 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외치기 이전에 탄생이 먼저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삶의 증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삶 이전에 그 증거가 먼저 왔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 대하여 저는 거의 의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적인 관점에서 하나가 다른 것에 앞선다고 여러분들은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여러분들은 이런 것들에 올바른순서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수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이런 것들을 순서로 보는 것은 우리의 업무이며 우리의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붙잡으려 할 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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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성경 계시 자체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인간이나 세상은 유한한 인간이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가 없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주의자들은 역사가 어떤 법칙에 의해 진행하고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수 없이 확인되었습니다. 역사를 논리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듯이 성경의 진리도 논리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논리와 합리적 영향을 받은 헬라 문화권 사람들의 눈에 복음을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들은 헬라 문화권 사람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은 그러한 노력의 긍정적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의 부작용 중 하나가 이원론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원론의 매력은 설명이 안 되는 성경 진리를 이원론적으로 설명을 하면 설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설득력으로 어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나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은 몸과 영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여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속되다고 생각합니다.

 

이원론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여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속되며 예배는 거룩하고 상업은 속되고 찬송은 거룩하고 유행가는 속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구분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교육을 상당히 받은 사람이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이들도 기독교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런 이원론적인 영향을 분별하지 못하고 어떤 것은 속되고 어떤 것은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같은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제사와 구제와 금식 자체까지도 악이라고 질타한 것을 보면 어떤 것이 존재 자체로 거룩하거나 속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스토어에서 장사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악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라고 한 것은 성경 계시가 구원 얻는 도리를 충분히 계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온전한 규범이라는 뜻이지 성경 말씀이 아닌 모든 것은 속되다고 무조건 거부하고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천지창조에서 시작되었고 영원히 지속될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영역은 교회뿐 아니라 온 우주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에 비해 제한적입니다. 제한된 교회의 역할을 하나님 나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정치나 사상이나 경제를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활동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구체적인 일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이 제한적이지만 교회는 교인들에게 구체적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은 정치와 사상과 이념과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 현장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정치와 경제와 세상적 가치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그 속에서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피아를 구별해야 합니다. 적이 누군지 아군이 누군지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아군 같지만 속에는 생명을 노략질 하는 이리가 많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정치와 경제와 사상이나 이념적 실력을 쌓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거나 역행하게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창조 세계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천지 창조에서 시작되었고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 나라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영역은 해가 빛을 비추는 곳과 비가 내리는 곳과 그리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를 포함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을 하나님 나라 영역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장소도 없고 집단도 없고 분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인간이 만든 제도나 사상까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거나 허용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당신의 백성뿐 아니라 불신자와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해 지대한 사랑과 관심을 쏟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관심을 쏟으시는 바로 그 곳에 우리도 사랑과 관심을 쏟기 위해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목사가 정치나 경제나 정의나 윤리의 용어를 입에 담기만 해도 왜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만 전하지 않고 세상 이야기를 하느냐며 걱정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원론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세상은 누구의 세상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훈련하여 실천해야 할 곳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금도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간들을 통해 온갖 사상과 제도와 교육을 허락하시고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내시며 다스리고 돌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공의 영역은 인간을 비롯한 창조 세계 전체입니다. 정치는 대학 정치학과에서 가르치고 경제는 경제학과에서 가르치지만 그것들이 노골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는 것에 대한 분별력은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배워야 할까요? 당연히 교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서 누가 가르치나요? 목사가 가르칩니다. 목사가 정치나 경제나 물리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가르치나요? 목사가 정치나 경제나 물리학이나 생물학 자체를 가르치는 게 아니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에 대해 분별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학문을 전공하지 않은 목사는 조심스럽게 분별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대항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철학과 사상과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만 아는 것은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는 정치나 경제나 윤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말은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정치나 경제를 가르쳐서 정치활동이나 경제활동을 하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나 경제나 철학이나 문화의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께 대항하는지 여부를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무리 잘 훈련된 군인이라도 적을 분별하지 못하면 싸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우고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원론으로 왜곡된 생각들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주 전체와 모든 사상과 철학과 과학과 생물학과 문화와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를 포괄합니다. 나 개인이나 우리 가정이나 우리 교회도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지만 하나님 나라 공공의 영역은 창조 세계 전체라는 사실을 잠시라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 공공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통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로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신비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늘날 정치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경제 분야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미치는지 너무나 신비롭고 경이롭습니다. 초강대국 미국 정부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련을 갖는지, 우리 집 마당 텃밭 흙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생명체들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우리는 관찰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배우며 깨달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한 모퉁이와만 겨우 관련을 맺고 살아가지 말고 우리의 의식 세계와 실제 몸으로 활동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 공공의 영역임을 기억하고 그 나라의 풍성한 영적 생명에 참여하고 누리고 증거하며 나누며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허락된 은총이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공공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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