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은 은혜의 땅 27

 

흑인 동네 중심부에 수년 동안 거의 방치된 상태로 버려진 건물이 있었는데 나는 이 건물을 잘 수리해서 아내 가게도 이곳으로 이전시키고 나머지는 렌트를 주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거의 헐값에 건물을 구입하고 목수 몇 명을 고용해서 한 달 정도 수리를 해서 아내의 가게를 그 건물로 입주시켰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몇 년 동안 방치된 건물이라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는데 수리를 하고 손톱 손질 가게가 들어서자 건물을 찾는 사람들이 매일 늘어났다. 또한 상가 건물의 빈 공간을 임대해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해서 짧은 시간 안에 건물의 빈 공간을 모두 임대했다. 아내의 사업장은 이곳에서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 동전 세탁소(Coin Laundry)를 운영할 때도 하나님께서 사업장에 큰 복을 부어 주셨다. 이 세탁소도 당초 시작할 때는 여 러 사람들이 가능성이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던 장소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무척 험한 동네였기 때문에 한인들이 쉽게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리만큼 나는 이 곳에서 동전 세탁소를 시작하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가 손톱 미용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쌓은 신용으로 세탁소를 매입했다. 그리고 새로 세탁기 130대를 추가로 설치하고 세탁소 분위기를 완전히 새롭게 개조했다. 호주머니에 땡전 한푼 없는 상황에서 신용을 가지고 모든 일을 벌여놓았으니, 사실 세탁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아 파산선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었다. 내부수리를 다 마치고 세탁소 그랜드 오프닝 사인을 내걸었 다. 첫날은 손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문득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밖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좀 심각한데. 이 일을 어쩌지.'

 

나는 아무에게도 내 생각을 말하지 않고 그저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3-4일 정도는 계속 세탁소가 파리 날리듯 한산했다. 그런데 5일째 되던 주말부터 세탁소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며칠 사이에 깨끗한 동전 세탁소가 새로 오픈했다는 소식이 입을 통해 소문이 나면서 주말에는 아침부터 130대나 되는 세탁기가 잠시도 쉴 틈 없이 밤늦은 시간까지 풀가동되었다. 월 매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 비즈니스를 1년여 동안 운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시세보다 많이 싼 가격에 매도했다. 그래도 우리는 시작할 때 들였던 투자 비용의 2배를 남겼다. 운영하는 사업체, 구입하는 부동산마다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물질의 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부동산을 몇 번씩 사고파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안목을 허락해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물질적인 부를 누리게 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목사의 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 참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된다. 어느 신문 통계를 보면 한국에 개신교 목회자가 줄잡아 7만여 명, 미국 내에 1만 5천여 명의 한국인 목회자가 안수를 받은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한국 내에 무당, 점쟁이가 1 백만 명이라는 숫자적인 통계에 비하면 개신교 목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준비된 사람들이 목사가 되었느냐에 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도 목사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면 구멍난 부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목사를 무당에 비유하는 것은 사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비유이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을 쫓아다니며 성령으로부터 받은 바울의 능력을 돈 주고 사려고 했다가 아주 심하게 야단을 맞았고 그 후에 정통 신앙을 떠나 모든 기독교 신앙 이단의 아버지가 된 마술사 시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마술사 시몬과 같은 그런 목회자들은 과연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 목사라는 직책을 사회적 지위와 명예로만 생각했다. 오히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은 신학공부를 하지 않고 안수를 받기 전이었던 평신도 시절이 더욱 뜨거웠다. 목사가 된 후에 나는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이제는 그 누구도 목사가 된 나를 감히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의 변화였다. 오랜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 내 마음 속에는 목사 안수만 받으면 그런 모든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온전한 목사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나는 철저히 인간적인 목사였다.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충성해야 하는데, 나는 나의 의와 명예를 위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차라리 평신도로 있을 때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그 기쁨과 감격에 넘쳐 노방 전도를 하고, 직장 안에서 동료에게 뺨을 맞으면서까지 전도를 했다. 그런데 목사가 된 후로는 노방 전도 같은 것은 평신도들이 해야지, 신학교 교육까지 받은 목사인 내가 직접 나서야 되겠냐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 확실히 달라진 것은 짧은 목에 더욱 힘만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 마디 하면 "내가 목사인데 목사 앞에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라고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특히 아내에게 더욱 심하게 그랬다. 기도 를 많이 하는 아내는 내가 영적으로 극히 메말라 있는 것을 감지하고 "기도를 더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일언지하에 아내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네가 기도하면 얼마나 하겠냐. 나는 목사다. 목사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당신이 교만해서 그런 것이다. 여자는 그저 집 안에서 잠잠하는 것이 남편의 사역을 돕는 최선의 길이다."

 

그 당시 내게 있어서는 목사라는 직책이 최고의 감투였다. 교단 정치판에 이리 저리 개입하느라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 고 있었지만, 그래도 안수를 받았는데 교회 개척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플러싱 지역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목회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다른 교회에서 협력사역을 하든 지 아니면 부목사로 사역 경험을 쌓는 것이 바람직한 단계였다. 그러나 나는 누구 밑에서 사역을 돕는다는 것이 왠지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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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은헤의 땅 26

그 당시만 해도 4백 달러면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몇 시간 동안 슬롯머신을 열심히 당겼더니 졸지에 4백 달러나 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나는 신이 났다. 

 

'야,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나는 카지노의 짜릿한 맛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그 후로 나는 몇 달 동안 거의 매 주말이면 신학생이라는 직분도 망각하고 카지노를 전전하며 슬롯머신을 섬기는 맛에 살았다. 그 당시 아내는 신학공부를 시작한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맨해튼에 손톱 손질하는 가게를 시작했는데 가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운영이 잘 되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   고 있었다. 덕분에 내 호주머니에도 여유 있는 돈을 조금씩 챙길 수 있었고 그런 돈만 생기면 나는 카지노로 달려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신앙 양심에 큰 갈등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이 주말이면 카지노로 달려가는 형색이 말이 안 된다는 자각의 음성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양심의 소리는 듣고 있었지만 '한 번만 더,한 번만 더'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몇 달을 도박과 신학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또다시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박을 계속하면서 세상의 재미를 더 즐기든지, 아니면 다시 하나님의 양심에 합당한 신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가 나를 볼 때 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회개를 참 잘한다는 것이었다. 잘못한 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나는 하다못해 아이들에게라도 나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용서받기를 원했다. 하나님 앞에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있다면 나는 철저히 용서받기를 원하며 회개의 눈물도 많이 뿌렸다. 이번에는 도박문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도박에 맛을 들였는데 하나님이 고쳐 주세요 주말만 되면 도박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흘을 베풀어 주셔서 저를 죄악의 구렁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이틀을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치유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고 난 후 나는 다시 는 도박장을 찾지 않았다. 도박에 한 번 빠졌던 사람들이 들으면 믿기 힘든 일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카지노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도박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끊을 수 있다. 자신의 의지로는 결코 끊을 수 없는 끈질긴 죄의 결박이 바로 도박이기 때문이다. 

 

도박과 신학 사이에서의 갈등은 그렇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해결하고 3년 동안의 평신도 성경학교에서 요구하는 모든 학점을 이수할 수 있었다.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나는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연습을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무척 교만한 생활을 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돈 잘 쓰고 찬양 잘하고, 기도 잘하는 소위 말해서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신학생'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가난은 이제 옛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내의 비즈니스를 통해서, 그리고 부동산 구입을 통해서 물질적인 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다. 주급 150달러짜리 어려운 생활을 하던 때가 잊그제 같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한 달 생활비로 1만 달러를 쓰는 중상류층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부어 주실 때 우리는 좀더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물질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한동안은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현금을 가 지고 도박에 빠졌다가 성령님의 호된 질책의 음성을 듣고 도박을 끊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서 목사들이 신학교를 방문하면 무슨 대단한 갑부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봉투에 돈을 넣어서 용돈까지 챙겨주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순수하게 주의 종을 섬기는 마음에서 했으면 좋았을텐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일종의 거만함이었다. 돈 잘 쓰는 신학생으로 알려지면서 학교에서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학생으로 꼽혔다. 그래서 본과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후 2년 동안 학생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신학교를 뜻하는 영 어 단어인 Seminary는 공동묘지라는 뜻 의 Cemetery와 발음도 비슷하고 단어도 유사하다. 나는 이 두 단어 사이에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영성을 개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더 가깝게 대면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신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학교는 오히려 영적인 공동묘지가 된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주의 종으로 준비되기 위해 시작한 신학교(Seminary)가 오히려 영적인 침체, 결국은 영적 사망의 공동묘지(Cemetery)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신학교는 어쩌면 영적인 공동묘지에 더 가까운 기간이었다. 하나님을 열망하며 기도하던 순수한 마음이 신학교를 거치면서 영적 교만과 거드름으로 대체됐다. 그렇게 타락했던 신앙의 순수성을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했다. 내가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아내는 곧바로 작은 사업장을 시작했다. 손톱 손질을 해주는 조그만 가게는 매일 손님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잘 됐다. 우리 가게가 잘 된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에 동일한 손톱 손질가게들이 생겼지만 유일하게 아내의 가게에만 손님들이 몰렸다. 경쟁 가게들이 가격을 인하하면서 손님들을 빼앗아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가게의 매상은 한 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업소보다 가격을 더 높여 받는데도 새로운 손님들이 계속 늘었다. 아내는 처음에는 혼자서 일하다가 도무지 일손이 딸려서 사람을 두지 않고는 가게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 사람씩 종업원을 고용하기 시작했던 것이 가장 많을 때는 그 조그만 가게에 9명의 종업원을 두기까지 했다. 물론 아내의 솜씨가 좋아서 손님이 몰리기도 했겠지만 그 사업장은 하나님이 복 주심으로 잘 될 수 있었다.

아내는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냥 손님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도 그렇게 열심을 냈다. 아내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 손님들 모두가 이 업소에 들어오면 일단 예수님에 대해서 단 한 마디라도 듣지 않고 나가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의 이런 전도의 열정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믿는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부동산을 사고파는 안목을 주셨다. 아내의 사업장이 잘 되면서 더 넓은 장소로 가게를 이전해야 했는데 이때 기왕이면 건물을 구입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몇 군데 상가 건물들을 보러 다녔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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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예수 그리스도의 새 심장을 이식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지옥불못으로 내 영혼을 끌어내리던 죄와 사망의 법은 폐하여지고, 영원한 천국으로 내 영혼을 끌어올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왕이 바뀌었고 정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탄마귀는 쫓겨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합법적으로 내 삶을 장악하던 그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죄는 불법이 되었고 내 삶에 조금도 발붙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를 고발하던 죄를... 이제는 거꾸로 내가 죄를 고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정죄하는 사탄마귀의 모든 불법적 도발과 참소와 정죄를, 역으로 내가 하나님께 죄다 일러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사탄마귀가 당신의 자녀된 나를 감히 정죄합니다. 거짓말로 참소하는 저 입을 다물게 하소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정밀하고 세밀하고 완벽하고 설득력 있게 내 안에 이루어졌는지를 나타내주는 구절입니다.

죄로 물든 내 육신을 살리려고 찾아온 율법은 죄악덩어리인 내 영혼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X-레이, CT, MRI가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순 있어도 치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육신이 연약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 장벽을 육신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죄로 물든 육신은 죄가 없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성을 지닌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도 넉넉히 죄를 다스리고 지배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사망으로 끌고 가던 죄의 숨통을, 부활을 통해 끊어버리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육신을 입고서 완벽하게 죄를 이기신 첫 케이스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내주하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모든 거듭난 자들에게도 율법이 요구가 넉넉히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5~8)

사탄마귀의 최후의 발악입니다. 사람들의 혼의 영역인 '생각'속에 자주 들어가 미혹하는 사탄마귀는 끊임없이 연약한 육신을 부추기고 육신의 생각을 주입하고자 발악을 합니다.

"넌, 안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으셔. 너같은 미미한 존재에는 관심도 없으셔. 하나님은 너를 주목하지도 않아. 너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안돼. 넌 여전히 계속 밥먹듯 죄를 짓고 있잖니? 하나님은 너를 버렸어. 너는 거기까지야. 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미달이야.... 넌 안돼... 넌 아니야... 하나님은 널 버릴거야..."

이런 새빨간 거짓말로 구원받고 거듭난 성도들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가장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생각속에 들려온다면 빨리 주님께 고발하고 일러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즉각 경찰을 보내셔서 그러한 생각들에 수갑을 채우고 체포해 가십니다.

육신의 생각을 공급하는 옛 자아의 생각의 대동맥, 대정맥은 이미 잘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에 부착되어 있는 성령의 대동맥, 대정맥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혈관을 통하여 순종과 감사의 생각들이 줄기차게 흘러가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절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매순간 육신의 생각을 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매순간 육신에게 생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성령께서 생각의 주도권을 쥐게 해드릴 수 있을까? 그 열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24시간 내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입니다. 사랑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죄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루종일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생각하고, 음란을 사랑하면 음란을 생각하고, 명예를 사랑하면 명예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온통 주님을 향한 생각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9-10)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은 거듭난 자들은 이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성령)에 속한 자입니다. 구원받고 안 받고의 여부는,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느냐 아니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 자들은, 훗날 몸은 죄로 인해 죽고 땅에 묻혀 썩어질 것이나 그 안에 있는 영은 의(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하여 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날(주님 공중강림하시는 그날)에 썩지않는 새 몸을 입고 원죄가 없는 영,혼,육의 완전체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육체도 다시 새몸으로 교체해 주시고 영,혼,육의 완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는 자들은 결코 죄와 적당히 타협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협 자체가 안됩니다. 물론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질 순 있지만 오뚜기처럼 다시 주님과의 일시적 단절을 회복하려는 <회귀본능>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는... 이 회귀본능이 '죄된 몸으로 회귀하려는' 정반대의 회귀본능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이후에는 하나님 품으로 회귀하려는 '정상적인 회귀본능'으로 복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괴로와 견딜 수 없으며 아주 작은 죄에도 마음아파하고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잠이 안오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스스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면, 죄를 짓고도 아픔도 없고 하나님 품으로 회귀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적당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죄를 미워하고 떠나려고 하고 아파한다는 것 자체가 명백히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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