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은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
이성호교수

종교개혁의 구호 중에서 “오직 믿음”만큼 오해된 말도 없을 것이다. 이 구호를 잘 못 오해하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든지 혹은
‘믿음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은 다른 영적 덕목들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의 “오직”은
그 성격 상 배타성을 지닌다. 즉 “오직... 믿음”은 행위를 배제한다. 그러나 이 배타성도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제한적인
영역에서 배타성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핵심을 이야기하면,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칭의에 관한 한 믿음은 배타성을
가지며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고려의 대상 혹은 원인도 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따르면, 칭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오직”만 있을 뿐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칭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을 여기까지만 이해하면, 선행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를 믿음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믿음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이나 교회가 전하는 말을 믿고 싶은 열망도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로마교회는 형성된(formed) 믿음과 미형성된
(unformed) 믿음을 구분하고 지식없는 미형성된 믿음도 일종의 믿음으로 간주하였다.

로마교의 믿음관에 대항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에 대한 그 유명한 자신의 정의를 내린다. 믿음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
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졌다.”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인쳐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오직 이 참된 믿음만을 통해서 획득된다;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참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의 일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가들이 믿음
이라고 이야기라고 할 때는 항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전자는 헛된 믿음 혹은 죽은 믿음이라
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실제로 전혀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다음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신자는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
‘오직 믿음’을 이렇게 온전한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신칭의가 선행을 소홀히 취급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전혀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칭의, 선행, 믿음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선행의 전제가 되고, 믿음은 칭의를 받아들이는 수단이며 그와 동시에 선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칭의, 선행, 믿음이 아주 밀접하고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학자들은 선행을 칭의와 어떤 인과론적인 관계에까지 ‘격상’시키려고 하였
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결론들을 칼빈에게서 직접 찾으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원종천 교수의 경우에는 칼빈이 선행을 칭의에
있어서 열등적 원인(inferior cause)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교수는 칼빈이 그 용어를 사용한 문맥
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칼빈이 열등적 원인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는 우월적 원인들도 언급하
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용어를 빌려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리 구원의 효과인(efficient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질료인(material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순종이다; 수단인(instrumental cause)는 성령님의 조명, 즉, 믿음이다; 최종인(final cause)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우리 구원에 있어서 선
행은 앞에서 언급된 4가지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라도 될 여지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들은 [앞에서 말한 원인들] 주님으로 하여금 선행을 열등한 원인(inferior causes)으로 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주님께서 자비로 영생의 기업을 위해 정하신 자를, 당신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을 통하여 소유하도록 인도하신다.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그는 앞에 나오는 것을 뒤에 나오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때로 영생을 선행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왜 선행을 열등한 원인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순서를 정하실
때 선행이 있고 나서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선행 때문에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비해서 단지 순서상 먼저 발생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칼빈은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
자신이 한 말이 오해가 되지 않도록 덧붙인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나 참된 원인이 고려될 때에는,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행위에 피난처를 두지 말고 오직 그분의 자비만을 묵상하도록 명하신다.” 적어도 이 말에서 확실한 것은 칼빈이 언급한 “열등한 원인”은 “참된 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자
신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로마서 6장 23절을 인용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주님의 은혜는 영생이다.” 여기서
칼빈은 질문을 던진다. 사망의 원인이 인간의 죄라면, 영생의 원인은 인간의 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영생의 원인은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원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칼빈이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불렀을 때는 구원과 선행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원종천 교수는 또한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를
루터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이것도 사실에 그렇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우리의 순종을 “부분적 원인”이라고까지 부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것이
쓰여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루터와 칼빈의 견해가 크지 않다
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의 순종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부분적 원인이다. 필수적
인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원인이거나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지구는 필수적이지만 의롭게 하지 않는다. 만약 죄인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 . . 어거스틴이 한 말은 진리이다: "당신 없이 당신을 창조하신 분은 당신 없이 당신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행위는 구원에 필수적이
다, 그러나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때문에 우리는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루터가 선행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루터는 선행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았다. 특히 선행의 필수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루터는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것 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선행이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요소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행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말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선행은
단지 구원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이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나안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신앙이 있지만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교회에서 상처를 입었거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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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이 미국의 리서치 그룹 '바나 리서치'가 진행한 가나안 성도 관련 보고서를 공개했다.ⓒ데일리굿뉴스 

 

美 가나안 성도 증가 추세…전통적 신앙관은 유지

 

최근 문화선교연구원(원장 백광훈, 이하 문선연)은 바나 리서치의 보고서를 소개했다.

 

바나 리서치는 보고서에서 가나안 성도를 "예수는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지난 6개월 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2004년에는 4%에 불과했던 가나안 성도가 최근에는 10%로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남성보단 여성이, X세대와 베이비 붐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전통적 신앙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 93%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답했고, 응답자 94%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주이며, 전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데 동의했다.

 

특이한 점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을 준다'는 데 동의하는 비중이 높았다.

 

"가나안 성도, 교회 사역 이해하는 중요 요소"

 

그렇다면 이들은 왜 예수님은 사랑하면서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걸까. 문선연은 이 부분에 대해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상처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영적 성장에 교회의 행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서 떠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제도적인 교회를 찾았다면, 지금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진리를 탐색하고 외부에서 확인을 얻는 방식의 삶을 택한다는 것이다.

 

문선연은 "가나안 성도들의 이런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가나안 성도들과의 소통 문제,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문선연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은, 그들은 신학과 공동체, 제자도,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런 개념들에 대한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와 경험을 쌓는 효과적인 공간으로 더 이상 기존의 교회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바나 리서치 로세나 스톤 편집장은 "가나안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 사역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해지고 있고, 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앞으로 교회가 이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적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 무엇일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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