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특징 10가지

美뉴욕 레저렉션 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셉 마테라(Joshep Mattera) 목사의 말이다. 그는 미국 보수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로, 최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10가지 징후"(10 Signs You Are a Secular Believer)라는 칼럼을 통해 이와 같이 주장했다.

조셉 마테라 목사는 이 칼럼에서 "1981년부터 목회 사역을 해왔고,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먼저 말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이들 중 상당수가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특징 10가지를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다(이를 무신론적 유신론이라 함 - 편집자주). 왜냐하면 이들은 결혼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것, 직업을 바꾸는 것, 교회를 바꾸는 것 등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성경 말씀을 찾아보지 않으며, 영적 지도자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한다.

세속적인 셀피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지혜의 시작인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보다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겉모습(외양), 지위, 인기를 더 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할 때, 우리는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이 아니라 돈에 이끌린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보다 돈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당신은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많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는 이들이 일을 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신앙의 공동체와 교제하는데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 이유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신다고 하셨다(마 6:33).

 

4.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위해서다(사람들을 사귀려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목적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주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하기 위해서다.

 

5.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방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연애(데이트), 혼전성관계, 옷, 대중음악 등에 있어서 세속적인 가치들을 신봉한다. 이것은 나에게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오리일 것이다(If it look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s a duck!)'는 속담을 상기시켜 준다. 당신이 내적으로 세상의 가치 시스템을 찬양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의 생각(spiritually-minded)이 아니라 육의 생각(worldly-minded)을 하는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일부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일부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전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7.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곳 저곳에서 잽싼 기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축복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며, 성경을 따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8. 당신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은 지난 5년이나 10년 사이에 단 한 명의 영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포섭되어 있어서 영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구원 받지 않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 등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9. 제자를 삼지 않는다.

구원 받은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 명의 영혼을 제자로 삼는 일을 위해 조금도 투자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당신이 현재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멘토링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회자나 장로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다른 이를 제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0. 재정에 있어서 성경적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편할 때만 헌금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자신들의 생명이나 돈이나 부에 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십일조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유의 10%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의 100%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돈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청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천헌옥 choug2@hanmail.net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http://m.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59

'묵상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0) 2018.02.28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  (0) 2018.02.28
믿음과 순종의 상관관계  (0) 2017.05.13
자녀를 위한 기도문 / 맥아더  (0) 2016.09.29
웨이터의 법칙  (0) 2016.07.09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서 첫 개신교 기도회 열려

독립 100주년 맞아 50개국 전·현직 기독 의원 참석… 한인 선교사 제안으로 시작


세계 각국 인사들이 지난 7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국회에서 열린

‘제1회 예루살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정홍기 선교사 제공


“저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습니다. 크리스천인 여러분은 그의 재림을 믿고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그가 오시길 원하고 있는 거군요.”


이스라엘 국회 산하 기독교동맹위원회의 조슈 라인슈타인 이사가 지난 7일 ‘제1회 예루살렘 기도회’ 행사에서 전한 인사말이다. 행사는 이스라엘이 ‘국제 예루살렘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는 이날 예루살렘 크네세트(국회의사당)의 한 회의장에서 열렸다.


라인슈타인 이사의 축사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인 자리임을 적절히 감안한 내용이었다.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이스라엘 국회와 예루살렘 일대에서 열린 기도회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이스라엘이 1917년 무슬림 치하에서 독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개신교 형식의 기도회였기 때문이다.


미주와 유럽, 아시아 등 50여개국에서 전·현직 크리스천 의원과 목회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도회와 더불어 음악회 등 다양한 부대 행사도 함께 진행됐다.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은 현지를 방문한 세계 각국의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공관에 초청했다.


이번 행사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도회 개최가 한국인 선교사의 아이디어에서 구체화됐다는 점이다. 수년 전, 이스라엘 출신의 기독교계 인사 A씨가 정홍기(63) 루마니아 선교사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1992년부터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정 선교사는 현지 국회의원과 관료 등을 중심으로 한 조찬기도회 등을 섬겨왔다. 틈틈이 인근 국가나 타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조찬기도회 선교’ 노하우도 전수했다.


예루살렘 기도회 개최와 관련, 행사 준비와 운영 방식 등에 있어서 A씨는 정 선교사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지난 3월에는 한국의 국가·국회 조찬기도회를 견학하기 위해 방한했다.


정 선교사는 13일 “많은 분들의 기도로 행사를 은혜 가운데 마쳤다”면서 “첫 번째 예루살렘 기도회를 통해 역사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느끼는 감격을 맛봤다”고 전했다. 예루살렘 기도회에는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과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 채의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등이 한국 대표로 초청 받아 참석했다.



출처: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64786&code=23111117&sid1=chr)


사막은 은혜의 땅 32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기도를 많이 해왔는데 나는 기도 시간부터 더 늘리고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혹시 잘못한 것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철저히 회개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상가 건물을 조속히 처분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 주시옵소서."

 

내 기도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뉴욕에서 잘 알고 지내던 목사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중보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의 힘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주의 종들이 설사 자신의 행실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종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 권위가 있기 때문에 저들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영적인 힘이 실려 있는 것이다. 여러 목사님들에게 현재 상황을 전하고 기도 부탁을 했다.

 

"목사님, 우리 식구들이 애리조나에 와서 잘 지내고 있는데, 지금 상가 건물이 제때 팔리지 않으면 좀 어려운 상황이 될 처지에 있습니다. 꼭 기억하고 기도해 주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목사님은 물질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권면의 말을 해주시는 분도 있었고, 어떤 목사님은 두말하지 않고 전화를 통해서 그 자리에서 중보의 기도를 해주시는 분도 있었다. 나는 기도만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나갈 통로라는 확신이 있었다. 한번은 시카고에서 사역하고 있던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중보기도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 목사님은 더 이상 교회에서 사역하지 않으셨고 다른 목사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사실 얼굴도 모르고 그 목사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점도 없었지만 주의 종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확인하고 전화로 중보기도를 부탁했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했다. 나는 물질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적은 없다. 지금도 물질에 특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옛날에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지긋지긋하게 기억나는 때는 있지만, 그렇다고 물질을 갖기 위해서 게걸스럽게 욕심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부동산 거래에 대해서, 기술에 대해서 배워 본 적은 없지만 몇 번 거래 를 직접 성사시키면서 부동사 거래 절차에 있어서 중요한 점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물질에 욕심을 부리는 것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물질적인 복을 내 것으로 잘 받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상가 건물 거래가 이제 일주일 안에 성사되지 않으면 땅을 구입하기로 하고 걸었던 계약금을 그냥 날리게 될 형편이었다.

 

땅 주인은 불과 몇 달 사이었지만 땅값이 또 뛰어오르자 은근히 계약이 깨졌으면 했다. 그렇지만 나와 아내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이 거래도 반드시 성사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단지 그 방법은 아직까지 알 수 없었고 그 길도 보이 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아는 분들에게 중보기도만 열심히 부탁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방법으로 다가왔다. 당시 우리 상가 건물 거래를 맡고 있던 부동산 에이전트 가 우리의 상황을 알고 일정 이자만 받고 30만 달러를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부동산 에이전트인데 우리에게 뭘 믿고 빌려주겠다는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에이전트가 계산에 귀신처럼 밝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영어가 좀 짧아서 그러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주겠습니까?"

 

"그냥 내 마음에 당신들을 도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내 친척들 중에 은행 CD 어카운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CD를 취소하고 현금으로 한 30만 달러 정도를 당분간 유통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까 이자는 한 5천 달러 정도 될 것 같고 원금 환수는 상가 건물 거래가 성사되면 돌려 주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놀라서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간신히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해 놓고 집에 돌아와서 나와 아내는 기도하면서 펑펑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유대인 에이전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일어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에이전트가 친척들을 통해 급전한 30만 달러를 가지고 땅 구입 계약을 완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상가 건물 구입자가 타주에서 나타나서 좋은 조건에 건물 매매를 마칠 수 있었다. 거래를 다 마치고 난 후 알게 되었지만 우리를 도와주었던 유대인 에이전트는 유대교에서 개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두고 계셨다가 급박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통해 도움의 손길을 마련해 주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것이다.

 

물질적인 복은 영적 메마름의 지름길이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물질적인 복과 영적 풍요함은 많은 경우에 반비례 곡선을 긋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질적으로 받은 복을 잘못 활용하거나, 물질의 풍요함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메말라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물질적인 가난함이 영적으로는 풍요함을 경험케 하는 좋은 토양이다. 그래서 중세시대 때 많은 수도사들은 풍요와 육신적인 안락함을 떠나 의도적으로 극도의 가난함과 육체적인 고행의 길을 걸음으로써 영적인 풍요함을 누리고,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한국의 예를 봐도 그렇다. 한국이 잘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다. 1960-1970년대 한국의 형편을 돌이켜 보면 전국 곳곳이 빈민촌이었고, 끼니를 제때 찾아 먹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오죽하면 "식사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일종의 안부 인사가 되었겠는가. 한국은 현재 영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 물질적으로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된 반면, 영적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것이다. 목회자들의 윤리의식에 큰 구멍이 뚫렸고, 성도들도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이중인격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면서 심신이 피곤하다. 사회적으론 반기독교 세력이 판치고 있다. 안티 기독교 운동으로 불리고 있는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익명의 공간인 사이버 세계, 인터넷을 통해서 바이러스처럼 확산되고 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은 은혜의 땅 34  (0) 2017.06.22
사막은 은혜의 땅 33  (0) 2017.06.22
사막은 은혜의 땅 31  (0) 2017.06.19
갈등  (0) 2017.06.17
'순종'에 대한 놓칠 수 없는 성령의 음성  (0) 2017.06.15
바빙크, 벌코프 그리고 박형룡
이상웅 | 조회 76 | 05.12.31 16:45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53
 
 

헤르만 바빙크(1854-1920),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레이든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잠시 목회를 하고 나서 깜뻔 신학교에서 교의학 교수로 20여년 ,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20여년 교의학을 가르치다. 그의 주저는 1906년-1911년 사이에 간행된 [개혁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 제2판, 전4권(Kampen:Kok)이 있다.

 

루이스 벌코프(1873-1957)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이민가서 귀화하다. 그랜드 래피즈에 소재한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다. 그는 명예박사학위 조차도 받은 적이 없다. 목회를 하다가 모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벌코프는 초기에는 신약학을 가르쳤고, 후기는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입었다. 1941년에 증보된 [조직신학]과 [신학서론]이 그의 주저이다.

 

박형룡(1897-1978)은 압록강변에서 대주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평양 숭실전문 졸업후 남경 금릉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받았고,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변증학 교수가 되다. 평양에서 학위논문을 마쳤고 Ph.D.학위를 취득하였다. 만주에서 처음으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1972년 총신대학교를 은퇴하기까지 30여년 동안 교의신학 7권을 비롯하여 조직신학의 제분야에 대해서 가르쳤고 저작전집 20권을 남겼다.

 

이상은 세 사람의 간략한 프로필 소개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 사람의 신학적인 관계가 무엇일까요? 벌코프는 프린스턴을 방문한 헤르만 바빙크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못읽어봤습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1954년에 미국 방문시 만년의 벌코프 교수를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한 자리에 만난 적이 없지만 주저를 통해서 바빙크는 벌코프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고, 벌코프는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틀을 만들고 살을 채우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후에 바빙크의 저술들 중 영역본으로 간행된 Our Reasonable Faith이나 The Doctrine of God 을 직접 읽었습니다.

 

그러나 벌코프는 바빙크를 단순히 요약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고 미국의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하지 부자와 워필드,보스)이나 남장로교 신학자들(쉐드, 댑니)의 글들을 소화하여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서를 저술했습니다. 물론 벌코프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화란어라는 아주 제한된 언어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액면 그대로 영어권에 소개하고 싶은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후세대에 이르러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영어로 번역은 끝난 상태로 있고, 출판은 1,2년 내에 완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바빙크의 주저 보다는 읽기에 간편한 느낌을 줍니다. 아무래도 바빙크의 책은 유럽피언 스타일이다 보니 간편하다기 보다는 심원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 읽고 고민해야 하는 책이지요.

 

박형룡 박사 역시도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근간으로 해서 교의신학 7권을 썼지만 벌코프를 무조건 수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박사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는 구 프린스턴신학도 벌코프를 통한 화란 개혁주의 신학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의 근본적 기초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전하여준 선교사들의 신학, 자신의 용어로 하자면 청교도 개혁신학이었습니다. 이 기초 위에서 그는 구프린스턴신학도 읽었고, 어거스트 스트롱의 침례교 신학도 읽었으며, 벌코프의 조직신학서도 수용했던 것입니다.

 

바빙크나 벌코프는 자신의 주저를 대중들에게 읽기 쉽도록 대중화하는 일을 하였지만 박형룡 박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바빙크와 벌코프의 책은 그럭저럭 인기를 잃지 아니하고 읽히는 반면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은 별로 인기가 없는 이유중 하나일 것입니다.

  -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을 대중적인 필치로 간결하게 쓴 [하나님의 큰 일]을 1909년에 출판한 후에, 보다 더 간결한 형태의 개요서인 Handleiding bij het on derwijs in den Christelijken Godsdienst를 1913년에 출간했습니다.  

 - 벌코프는 자신의 주저 [조직신학]을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든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기독교신학개론)를 1933년에 출판하고,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줄여서 고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를 1938년에 출판하였습니다. 1991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이상의 벌코프의 저서들(원서들)은 총 25만권 팔렸다고 합니다.

 - 박형룡 박사의 경우 난해한 중국어 용어들이 많은데다가 방대하기 때문에 신학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읽기를 꺼려합니다. 만일 현대화시켜서 그의 신학을 쉽게 요약해서 소개하는 입문서를 출간해 주었더라면 그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줄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이상은 저물어가는 2005년 세모에 생각나는대로 술술술 써보았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회당에 모여 있는 가짜 예배자들!


루이 14세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주일이 되면 루이 14세가 가족들,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나오곤 했습니다. 절대 권력자가 교회에 나오니 그 앞에서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몰려들었는데 넓은 교회당이 모여든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의 대주교는 프넬론인데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황을 보며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라고도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배가 목적이고 예수님이 목적이라면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다른 목적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넬론 대주교는 사람들의 본심을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일에 광고하면서 다음 주에는 왕께서 못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일 루이 14세가 왕족들을 거느리고 교회에 갔을 때 교회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썰렁한 상태였습니다. 깜짝 놀란 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대주교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웃음이 나는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왕을 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사람들처럼 지금도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교회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당이라면 그것은 결코 부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어찌 부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거철이 되면 큰 교회마다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입니다. 어떤 후보자들은 방문만이 아니라 아예 교회에 등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등록을 했다고 해서 꾸준히 예배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목적은 예배가 아니라 큰 교회 안에 모여 있는 교인들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보자들이 찾아와 준 것에 감지덕지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높여주고 대접해준다면 그것은 비참한 일일 것이고요.


교인들의 표가 아니라 교인들의 돈 혹은 교회의 돈을 겨냥하고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 숫자가 많을 경우 교회에서 무언가를 제작하거나 구입하면 그 비용이 상당합니다. 그것을 노리고 큰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교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 연감을 만드는데 교인 수가 워낙 많다보니 연감 만드는 액수도 막대하다고 합니다. 연감 제작에 따르는 이권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기반으로 노회나 지방회 정치에 끼어들고, 또 그것을 발판삼아 교단 정치에 뛰어들어 이익을 챙기는 정치장로들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접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도 아니고 예수님을 닮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예배도 아니고요. 다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간섭하고 그런 과정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런 정치장로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정치 목사들입니다. 목사로서의 긍지를 스스로 밟아버리는 것이지요. 그들 역시 교회당에 머물고 있지만 예배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긴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예배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제사장들을 향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장 10절)


우리는 말라기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당 문을 닫기를 원한다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모든 것이 다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체면도, 돈도, 지위도, 습관도 아닌 오직 예수님 한 분 때문에 교회에 모여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릴 예배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들이 가득할 때 교회가 비로소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 안희환 목사님 / 한국 예수비젼성결교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