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은 은혜의 땅 34

심령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한순간에 온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회심사건이 그랬고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던 성 어거스틴의 회심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인해 한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4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성직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육신의 쾌락에 빠져 향락을 즐기고 있는 동안 16세의 나이에 이미 사생아 아들을 낳았고, 한동안 마니교에 심취해서 우상숭배를 열심히 했고, 점성술에 심취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권고로 완전히 세상에 빠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한 신앙생활도 하지 못한 채 간간히 육체적인 쾌락에 온몸을 불사르곤 했던 어거스틴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중에 그는 옆집 아이들이 장난하며 떠드는 소음 가운데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무시하고 계속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번 또 같은 음성을 들은 후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서재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때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은 후 육신의 죄악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철저한 회개를 거쳐 심령의 변화가 경험한 후 당대에 가장 영성이 뛰어난, 그리고 1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심령의 변화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 한순간에 일어 난다. 심령의 변화는 어거스틴에게도 그렇게 역사했고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했다. 그래서 악한 영에 눌려서 물질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힌 채 황량하게 메말라 가고 있던 나의 심령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영혼을 위한 지속적인 중보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영혼을 향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장모님의 지속적인 기도가 가장 큰 힘의 근원이었다. 올해 96세가 되신 장모님은 기도의 사람이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 지난 18년 동안 장모님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부족하지만 주의 종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나를 위해서 불철주야로 기도해 주셨다. 어거스틴에게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면 내게는 장모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장모님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내린 적이 없다. 전화통화를 할 때도 늘 존댓말을 사용하셨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장모님이 나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마음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장모님은 자신의 친딸인 내 아내에게도 주의 종의 아내가 된 이후, 즉 사모가 된 이후에는 반말을 하지 않으신다. 주의 종에 대한 철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영적 섬김의 원리를 확실하게 일상 생활 가운데 실천하시는 분이 었다. 그래서 피닉스 사막은 내게 은혜의 땅이다. 우리 가족이 피닉스로 떠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덥고 건조한 사막 땅에 뭐 하러 이사 가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하 나님이 왜 우리 가족을 피닉스로 보내셨는지 그 뜻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막은 생명이 살지 못하는 황량한 땅으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사막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활력을 얻고 소생하는 기적의 땅, 은혜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심령의 변화를 경험하고 난 후에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덩달아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내 마음을 괴롭히고 사로잡았던 걱정과 근심, 조바심과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내 몸 안에 있던 더러운 요소들이 장맛비에 쓰레기 쓸려 내려가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지속적인 두통도 그쳤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불면의 고통도 사라졌다. 대인 기피증으로 여겨질 정도로 주변의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웃집에서 그만 좀 찾아오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게 되었다. 기도할 때 방언도 다시 회복되었다. 방언 기도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우선 기도 시간이 늘었고 기도의 질이 달라졌다. 나를 위한, 나의 가족을 중심으로 했던 이기적인 기도의 방향이 이제는 남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이타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전도의 열정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였다. 미국에 와서 이민 초창기에 전도하다가 뺨을 맞을 정도로 집요하게 전도했던 그 전도의 영이 다시 회복되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왔다. 그렇지만 주변에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영어 실력은 단어 몇 마디 뱉어놓고 나면 모든 밑천이 다 드러나는 상황이라 내심 망설임도 있었지만 일단 전도의 발을 내딛었다. 아내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 옆에 큰 마켓이 있는데 매일 아침 그곳에 찾아가서 우선 종업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Are you happy, today? Believe in Jesus. He will give you a real happiness. I will pray for you"

 

처음에는 조금 맛이 간 이상한 동양 사람으로 생각했던 종업원들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켓을 찾아와서 예수를 증거하며 자신들을 축복해 주는 것을 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두 호의적으로 태도가 변했다. 지금은 내가 마켓 안으로 들어가면 몇몇 종업원들은 먼저 내게 말한다.

 

"Pastor Kim, I'm happy today, and you?"

 

자신은 오늘 참 행복한데 김 목사는 어떠냐고 먼저 응수를 하는 것이다. 마켓 매니저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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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부흥을 위해 ‘비상한 기도’가 필요”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두 차례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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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부흥이다. 그런데 최근 40년이 넘도록 부흥이 임한 적이 없다. 그러니 1907년, 1920년, 1932년, 1950-53년, 1973-84년 부흥이후에는 부흥이 없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우리가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부흥을 외치던 사람들이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올인 하는 바람에 영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부흥을 위해 성령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데, 부흥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력을 잃어버린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혜를 받고 부흥을 놓고 기도하자고 하는데 부흥이 임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교인들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인들의 생각에 답변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개별적로 개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사도행전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에 보면 성령충만을 다 받았다. 부흥이 임하면 공동체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성령이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기에 성경에 있는 성령의 약속들이 더 깊이 있게 내 삶에 체험되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이다. 성령은 공동체적으로 부흥을 주시기도 하지만 개별적으로 당신들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역할을 성령께서는 동시에 하신다. 두 개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성령이 부으시면 개별적으로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역동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개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끓임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서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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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는 1734-36년과 1740-42년 두 번의 부흥의 파장을  경험했다. 어느 날 보니 부흥이 썰물처럼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언약서명서를 받아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서 부흥이 떠나지 않고 오래지속하기를 원해서 그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엄청나게 일어났는데 7월부터는 어떻게 하면 부흥에 대한 조짐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거의 없는 것이 저는 궁금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했다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부흥을 거두어 가신 것처럼 부흥이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고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부흥을 원한다고 해서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부흥이 가장 지속적으로 임했던 때는 1901-1910년으로 부흥의 계절이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 인도 카스 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8년 중국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 등 이때만큼이나 부흥의 시즌이 지속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연속된 적이 없다.

 

혹시 이런 부흥들이 조직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당시 공통적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흥을 사모하는 목마름의 기도를 하는 무리들이 그때만큼 일어난 적이 없었다. 성령께서 네트워크를 가지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이 전세계적으로 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는 곳 마다 공동적인 것이 기도이다. 목마른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이다. 목마른 기도의 사모함이 없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7년에 쓴 <겸손한 시도>에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부흥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는 말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상한 기도’, ‘특별한 기도’라고 표현했다. 부흥을 놓고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 기도는 정기적인 집회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부흥만을 놓고 특별하게 시간을 정해서 하는 기도이다. 부흥을 위해 그런 기도가 있어야 한다. 

 

카이스트의 부흥이라고 들어보았는가. 2005년에 생전에 처음 경험한 것이다. 대전 카이스트 집회를 인도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9시 반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회개기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새벽 1시까지 진행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진행될 기도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일 집회가 계속 남아있고 수업도 있는데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참된 부흥은 이런 진정한 회개가 가십거리가 아닌 오히려 거룩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담당자에게서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사례비를 못 드려 죄송하지만 드리는 것이 결례인 것 같아서 드리지 않았다. 오늘 집회가 교수님에게 선물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너무 멋진 말이다. 생전에 이렇게 멋진 사례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집회를 놓고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며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지난 6개월간 집회를 위해 저녁 9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후에 카이스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부흥을 놓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은 하나님이 주권적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지금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1995년 휘튼대학 내에 일어났으며, 2006년 2월에는 에즈베리에서 10월에는 인도 카시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2005년 12월에 카이스트에서 일어났던 것도 작은 부흥이라고 여긴다. 부흥을 옛날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가 직접 부흥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상하지 않게 은혜를 경험했다. 인도에서 에즈베리에서 부흥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부흥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을 때 부흥운동을 보는 것이 저로서는 큰 축복이다. 지금도 부흥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부흥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지만 북한을 이야기하고 싶다. 북한에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3년 전에 14만이라고 한다. 적으면 9만 많으면 18만, 평균 14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14만이라는 숫자가 북한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숫자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AD 30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50년 후에 로마제국 전체에 예수 믿는 사람숫자가 14만이었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일어나고 1910년 한반도 전역에 전체 장로교인의 숫자가 14만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예수 믿는 14만 명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마치 카타쿰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처럼 어둠의 땅 북한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14만 명이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북한은 이미 통일될 준비가 되었는데 남한이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있는 14만 명이 북한 전체를 복음화시킬 수 있는 정예요원들이 다 되는 것이다. 오히려 남한이 준비가 안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부흥운동의 목표는 ‘선교’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마다 늘 선교가 일어났다. 오순절 부흥이 일어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서 선교가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제주선교가 시작됐다. 1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북미원주민 선교가, 2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부흥이 늘 일어날 때마다 결과는 선교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오전 10시).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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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는 평양대부흥 연구이후 세계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세계 32군데 부흥현장을 다니며 <세계부흥운동사>를 출간하고 석박사 과정을 위한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 교수들은 5년마다 강의 주제를 바꾸는데 박용규 교수의 가슴에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부흥운동을 연구하며 깨닫아지는 은혜와 부흥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어 목회자들과의 세미나를 통해 이를 전하고 있다. “부흥을 위해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박용규 교수는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2003년부터 매달 17개 신학교 교수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기도회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동안 조용히 개교회 목회를 하고 있던 뉴욕영락교회 최호섭 목사도 뉴욕과 미주교계의 부흥을 위해 적극 나서며 세미나의 자리를 주선했으며, 박용규 교수와의 8주 연속 부흥에 대한 나눔과 기도모임을 통해 총체적인 난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자고 부탁했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총신하면 칼빈 신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에 성령에 대해 그렇게 역동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제가 개혁주의 관점에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해 정말 칼빈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개혁주의 전통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3대 칼빈주의자중 한 명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이 총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을 미친 신학이 오늘날 한국의 총신의 신학이라고 알려졌는데 제가 연구해 본 결과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론이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너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성령론을 보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영원히 나온다"라고 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령론이 제대로 개혁주의 성령론의 핵심을 잘 집어주고 있는데 이 부분들이 개혁주의 영역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부흥운동사를 연구하고 다음에 성경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부흥을 그렇게 살펴보면서 왜 한국교회 안에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부족할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나누는 것이 제 부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 사도행전 2:33

 

사도행전 2:33이 사도행전과 부흥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을 주목한다. 물론 행 1:8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성결구절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행 2:33 구절이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베드로가 해석한 것이다. 베드로가 해석하면서 부어주셨다는 것은 오순절 사건을 가르치는 부분이다. 베드로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오순절에 모인 사람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사도행전 2:17-18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에서 “부어 주리니”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2:33 말씀에서 오순절의 사건을 가르쳐 ‘부어 주셨다’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2:33절 ‘부어 주셨다’는 표현은 사도행전 2:17-18 베드로가 한 이야기이고, 베드로는 요엘서 2:28-29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사도행전 2:33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약속하신 성령"

 

중요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을 보면 오순절의 성령을 가르쳐 아버지의 약속으로 표현한다.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이 아버지의 약속이고, 동시에 아들의 약속이고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엘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사도행전 2:33에는 성령을 가르쳐서 약속하신 성령이라고 했는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반복적으로 약속하셨다. 성령은 주님이 하신 약속이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이다.

 

2.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현이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후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다.

 

예수님이 이미 자기가 영광을 받으실 것은 예언하셨다. 높아지심은 주님이 하신 예언의 약속이다. 누가복음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을 보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둘로 나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낮아지심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이다. 높아지심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예수님이 높아지심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2:33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사건이 있어야 오순절 성령감림의 사건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이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F F 브루스는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 “부활후 예수는 지극히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그 성령을 땅위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부어주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든 청중들이 바로 이러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나타난 외적인 표적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했다. 

 

예수님도 영광을 받아야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7:3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감림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33에 이 표현이 성령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왜 예수님의 부활이후에 있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다.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왕자에 앉히시기 전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것을 연기하신 것"이다.

 

세대주의자와 개혁주의의 차이는 세대주의자들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십계명은 구약에 따르는 것이고 신약에는 은혜의 복음이라고 둘을 구분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언약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다 구원을 받지만 견해차이가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으로 받았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몰랐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이 없다. 유학시절에 공부하면서 투쟁을 했다. 책을 보니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도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통일성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복음이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세대주의자들도 동의한다.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중생이 없이 구원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중생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다윗과 사울의 예를 들어 구약에는 성령이 들어갔다 나왔다고 한다고 말한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구원의 통일성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신약에 있어서는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것이지, 구약에는 성령은 들어갔다나왔다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비 비 워필드의 책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구약도 성령의 역사 없이 구약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신약에도 성령의 역사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과의 성령의 역사가 구원에 있어서 같다면, 오순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성령이 역사하셨다고 하면 오순절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3-1.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부어 주셨다’는 것은 구약에는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구약에 없었던 사건이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성취된 것이다. 부으심의 사건을 요엘서는 'will'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성령이 부으실 것을 미래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견해준다. 사도행전 2:17-18절에도 ‘will’ 즉 미래로 표현한다.

 

그런데 사도행전 2:33을 보면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완료이다. 구약에 예언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현재완료형이다.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현재완료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마가의 다박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을 이미 시제가 보여주고 있다.

 

사도행전 2:33에 ‘받았다(has received)’도 현재완료형으로 나온다. 한 번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계속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버지께 성령을 계속 받으셔서 계속 부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것이다. 이 부분을 발견하고 나서 사도행전을 보면서 개혁주의 성령론에 대한 바른 정리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베드로가 부어주셨다고 증언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두고 한 표현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사도행전 2:17-18)라고 베드로가 증언한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에 약속되어 있지만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 부으심은 구약에도 없었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심지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도 성령의 부으심이 없었다.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야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이 일어난 것이다. 이 부으심은 오순절에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존 칼빈은 "성령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시기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일을 연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부어 주리라'는 말로 잘 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어주시는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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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되는 증거

 

세미나의 키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부어 주신다’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부어 주시는 것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에게만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약에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 하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역사 하셨다.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계속된다는 것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도행전 2:17-18을 보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120문도에게만 그 같은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했다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 그것도 말세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120명으로 끝나면 예언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다.

 

F F 브루스가 사도행전 주석에서 말대로 "분명히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을 다 성취시켰다고 불 수 없으며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시작이라는 것은 성취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어떠냐에 따라 성령을 사모하고 간절히 간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분문의 "받아서"라는 말과 "부어주리라"는 말의 시제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여기 ‘받아서(receive)’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has received)으로 쓰였다. 쭉 일어난 사건을 말할 때 현재 완료형을 사용한다. 과거 한번 일어난 것이라면 시제를 과거로 사용해야 한다.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도 현재완료이다. 현재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성령의 부으심이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는 연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기 때문에 현재완료형을 사용한 것이다.

 

셋째,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약속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립된 사람이 구하면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관계가 정립되었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굉장한 약속이다.

 

넷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에도 나타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을 보면 ‘proceeding’이 진행형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나오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면 구하는 자에게 임하신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지원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다.

 

다섯째, 성령의 부으심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순절 날 일어난 성령의 부어주심의 역사가 사도행전에 다시 나타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하면서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한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은 사도행전의 2장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 사건이다.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과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고 베드로가 증언해 준 것이다.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을 보면 베드로가 마가 다박방과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의 부으심 사건을 보고 생각났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으신 사건은 이방선교의 장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이고,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 부터 구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옹해주시며 그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에 높여 주셨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구원에 이른 것처럼 이방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이방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준해주시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의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사도행전 11:17-18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주시는 사건을 증언하니 더 이상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방선교를 예루살렘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방인에게 부어주신 심벌이다. 앞으로 이 땅에 계속해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성령의 부어주심을 예견하는 것이다.

 

여섯째, 지난 2천년여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의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 운동, 평양 대부흥운동, 웨일즈 대부흥운동 등 성령의 부으심이 계속되었다. 

 

사도행전 2:33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이다. 이 부분을 분명히 이해하면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흥을 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을 다르게 이해한다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한다면 목양의 현장에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목양의 현장에 성령께서 구원의 역사를 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간절한 열망

 

조나단 에드워즈는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1747)>에서 ‘성령은 모든 축복중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성령은 축복의 총화’라고 표현했다. 또 "성경은 전반적으로 그 밖의 모든 것들보다 성령을 위해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교회가 말세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과 그것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위해 대단히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말씀한다"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과 교회는 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지만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을 놓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는 말은 성령의 부으심이 기도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말세’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도행전 2:17에도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나온다. 성령의 부으심은 말세에 일어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는 초림하시고 재림할 때까지 말세라고 한다. 초림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이 땅에 많아 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매우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시려면 에스겔 36장 37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그 일보다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는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 (슥 12:10)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 간절한 사모하는 기도의 영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무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함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길을 찾았다. 칼빈이 저에게 위대한 도전을 주었다면 칼빈과 현대를 연결해주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한다.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 신학적인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 성령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연구를 했겠는가. 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또 성령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으로 누가복음 11:13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을 말씀했다. 

 

성령은 부흥을 주시는 영이시지만 동시에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하시고, 죄를 미워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이시다. 로마서 8:26에는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신다.

 

맺는 말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해 주는 사건이다.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은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없었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사건이다. 신약교회가 태동된 사건이다. 교회는 성령이 이끄는 교회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에 임했고, 이후에도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F. F. 브루스의 표현대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의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언은 '성령의 부으심'이 바로 부흥이다. 또 이 성령의 부으심,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청교도 설교에 나타나는 전도의 기본은 왕성한 성경적 유신론이었다.

철두철미한 신론이었다. 현대 전도의 경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다.

그러나 청교도 전도자들의 경우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이었다.

창조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계획하신 목적들을 이루어 가시는 일들이 펼쳐지는 결과였다.

 

의롭다 하시고 화목을 이루시며 죄인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속죄, 화목, 죄 용서, 칭의 등의 개념들이

성경적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셉 얼라인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 하나가 전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죄인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전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진리를 심으사

죄인으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공의, 그의 신실하심,

그의 순결하심이 모두 그 죄인을 대적한다고 한다.

 

토마스 라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주제가 너무나도 뚜렷한 특징으로 드러난다.

 

존 플라벨,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쇼요리문답 3)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의 책임을 함께 묶어 놓는 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메시지였다.

청교도 목사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만큼

죄에 대하여 반응한다고 보았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그의 거룩하심보다

죄인들에게 더 끔찍스러운 것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토마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첫째 방책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의 앞에 서 있고, 예배로 여러분의 영혼이 그와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초라하고 낮고 가볍고 경박할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해도 마귀가 온통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으로,

모든 영광스러운 완전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위엄과 순결과 영광 가운데 계시사

악을 조금이라도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마음에 일어나는 헛된 생각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그렇게 능력적으로 선포한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인간의 책임의 기초로 제시하였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다섯 째 방책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더욱 가득 차도록, 모든 영적 실체들과 하늘의 것들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힘쓰는 것이다. 잔이 포도주로 채워질수록 그 잔에 물을 담을 여유가

그만큼 적어지는 법이다. 여러분, 하나님으로 더욱 가득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손을 정말로 권능의 손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잠잠히 있게 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5:6).

하나님의 손을 약한 손으로, 가냘픈 손으로, 낮은 손으로, 천한 손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손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유신론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들의 설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토마스 브룩스,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의 손안에 있는 황금 홀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나, 그의 역사하심으로나, 그의 긍휼하심으로나, 그의 심판으로나

그것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끄셔서 고개 숙여 절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서 구원 과정에 대한 시각도 결정되었다.

청교도들은 그 어떠한 죄인도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받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죄인에게 주셨기 때문에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설교하였다.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위엄 있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후커, “죄인이 회심하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죄인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혹은 유효적 소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렇게 효력 있게 만드셨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인 사상을 열열히 증거하였다.

 

토마스 굿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르심이 아주 갑작스런 선택의 회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택하심이 사람을 완전히 휘어잡고, 강력한 힘으로

그 사람을 끌어내며, 그 사람에게 신적인 본성을 각인시키고, 부패한 본성과

이기적인 사랑을 뿌리째 뽑아 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심어 놓으며,

첫날부터 그 사람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며, 바울 이후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런 예들이 없지 않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신적인 능력으로만

그런 갑작스런 놀라운 변화가 사람의 영혼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의 기쁘심에 따라

처리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정의하였다. 에드워즈는 그의 교회를

휩쓸었던 부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 보건대, 죄인을 구원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교리를 강조하고, 기도 응답의 문제와 자연인의

고통들이 계속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하신 자유를 강조하는 설교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설교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교도들의 전도의 메시지의 기본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있었다.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였고, 사람의 마음을 찔렀다.

그러나 현대의 전도는 이러한 강조점과 비교할 때에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최근 십 수년 동안 <사영리>라는 전도 책자가 널리 사용되어 오고 있다.

국제 대학생 선교회가 제작하여 배포하는 이 책자가 전도에 관한 현대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영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여기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무언가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 받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로 나타난다. 현대의 복음의 경우 그 핵심적 주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국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도 하나님의 위엄과 그의 성품, 그리고 그의 본성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요구보다는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다. 죄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다루셔야

했다는 식의 그의 진술에 대해서 청교도 목회자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차녹,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전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본성의 이러한 탁월하심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악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다.”

 

구속의 계획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깊으신 뜻의 경륜 가운데서

행하기로 정하신 바의 결과였지, 결코 죄악된 인간에게 혜택을 주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시도록 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으로 보았다.

차녹, “피조 세계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지으신 바 되었듯이,

그의 경영하시는 모든 역사들도 그와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강력한 성경적 신론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함께 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그 불의를 벗어버리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하심을 벗어버리시든가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의 원 주제였던 것이다.

 

- 브루스 비클, 복음과 청교도설교, pp 127-141에서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강대식
/강대식

'뉴스앤조이' 기독교 소멸이 목표?



아직까지도 뉴스앤조이를 위시한 교회파괴 야합세력이 진짜 교회개혁세력이라고 철저히 미혹 당해 계십니까? 스스로 찾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1. 관세음보살 성령님?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설파


뉴스앤조이는 지금까지 동성애 관련 기사들을 다루면서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보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동성애에 호의적인 토론회가 열릴 경우 현장의 소식들을 생중계하듯이 빠짐없이 전했고, 기사 중에는 제목 자체도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축복할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찬성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시각전환을 꾀했다.
    
특히 동성애와 관련한 기사 중에는 대표적인 동성애 반대 성경구절인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로마서 1:27(바울의 권면) 등에 대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동성애’에 대해 반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들을 일방적으로 다루면서, 결국 “동성애를 죄라고 표현한 구절은 성경에 없다”는 주장을 대부분 기사의 결론부에 내놓고 있다.
    
    

- [인터뷰] 진정한 소수자로 살고 싶다. 최초 레즈비언 후보의 소수자 향한 외침
 
-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무조건 축복할 일"
 
- 소돔이 멸망한 진짜 이유
 
정죄 일변도의 동성애 논의는 소돔의 죄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어
 
- 현경 교수 '기독교 안의 동성애' 공개강연
 
'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입을 떼다'

    
    
뉴스앤조이의 기사 중에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관용적인 입장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종교의 구원을 주장하는 신학자들 인터뷰나 그들의 위기를 적극 변호하고 나서는 보도들에서 이러한 자세들을 볼 수 있다.
    
<‘창조적 신학자’와 ‘마녀’ 사이에서>라는 기사에서는 유니온 신학대 현경 교수와의 인터뷰를 길게 보도하면서 기독교의 경계를 오가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싣기도 했다.
    
그는 아시아 여성이 보는 성령의 얼굴로 ‘관세음보살’을 그리기도 했고, 한번은 한국 무속의 모티브를 빌려 무당처럼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무슬림, 정신대에 끌려가 죽은 할머니,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군인 등 인류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을 부른 다음 해원을 시켜주는 ‘초혼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 뉴스앤조이는 불상에 절하고, 종교다원주의 교육을 해서 강남대에서 해직됐던 이찬수 교수 사건과 관련, ‘부당해직’이라고 강조하면서 연일 이찬수 교수를 우호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밖에도 타종교에 대해 다루는 기사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용적 자세를 넘어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보인 사례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다음은 뉴스앤조이의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옹호기사 목록의 일부.


-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1)
 
-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2)
 
- 북한의 주체사상과 붉은기 사상(3)
 
- 마르크스의 '자본'에 살아있는 '복음'
 
- 종교화한 주체사상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 핵을 가진 북한이 두려우십니까?
 
- 북한을 대할 땐 연애하듯
 
- 김병로 교수, "북한인권 주장은 현 정권 비판 위한 것"
 
- 북한 봉수교회는 가짜교회 아닌 '이질적인' 교회
 
- 북한인권, 인권 운동인가 정치적 도구인가
 
- 북한 교회도 여중생 죽인 미국 규탄
 
- 김정일 위원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
 
- "우리가 아무렴 동족한테 핵 쏘갔어"
 
- 평양에서 한반도기 함께 흔들며
 
- 기독교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
 
- "우리 민족끼리 통일합시다"
 
-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이해
 
- 북한교회 진위 논쟁 '우리 몫 아니다'
 
- <극동방송> '극우 시국토론회' 파문(3)

    

2. 공산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반기독교 성향


뉴스앤조이는 소위 진보임을 자처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허무는 기사들을 무수히 쏟아냈던 곳이다.
    
주목되는 점은 평소 ‘개혁’을 부르짖는 동시에 교회파괴적인 기사들도 많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볼 때 뉴스앤조이가 친북NGO로 안착하는 것은 친북미디어로서의 교회공격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계산이 나온다.
    
유물론적 사관의 가장 큰 적은 유신론적 사관이며 이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핍박하는데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교회를 핍박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와 안티기독교는 ‘반교회’라는 코드가 서로 통한다.
    
뉴스앤조이는 공교롭게도 교회의 치부들이 드러날 때마다 선정적인 비판으로 문제를 확대하고, 자연스레 안티기독교들이 활동할 명분과 기본소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의 분쟁 소식은 뉴스앤조이를 통해 매우 신속하게 보도된다.
    
지금까지 뉴스앤조이에 보도된 교회분쟁 소식은 수백여 건에 달할 정도다. 이런 분쟁소식은 안티기독교들에게 매우 요긴한 정보와 활동의 근간이 된다.
    
반공설교 비판과 중계에 가까운 교회분쟁 기사들은 하나의 지향점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들이 있었다.
    

3. 목표는 기독교 소멸

뉴스앤조이 사장 방인성 목사는, 창립자가 ‘기독교 소멸’ 소신을 갖고 만든 것으로 알려진 시민단체 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공동대표 홍세화 등, 이하 종추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방인성 목사와 김동호 목사가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의 출간 기념 북토크에 참여하고 있다.

 
종추련 창립멤버인 이드 씨는 “제 자신의 신념은 기독교 교리와 바이블 그리고 예수의 소멸”이라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종교비판의 자유가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시민운동을 하겠다”고 밝힌 안티기독교계의 대표적 인사다.
   

▶종추련(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창립멤버이자 사무처장 이드:


결국 방인성 목사는 기독교소멸론자가 그 소멸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종교비판에 오히려 힘을 보탠 모양새가 됐다.
    
어떻게 이러한 대표적인 안티기독교인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또한 뉴스앤조이는 종추련이란 단체에 대한 비판은 일체 하지 않은 채 이들의 활동을 오히려 홍보해주는 보도행태도 보여 왔다.
    

4. 기독학생 홍위병 양성소 뉴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

    
뉴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 3각 구도의 연합은 한국의 미래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뉴스앤조이가 과연 스스로 밝혔듯이 ‘하나누리’라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목적사업에 부합하는 기관지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 의중이 주목된다.
    
동시에 친북, 종북적인 편향된 사고로 한국교회의 기독청년들을 교육하고 양산해, 한국교회가 주체사상을 또 다른 신앙으로 받아들여 섬기게 하고 통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의중은 아닌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시점에서 뉴스앤조이를 하나누리로 안착시키겠다는 이승균 편집장의 선언은 매우 큰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5.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존?!

    
▲본지가 입수한 기독청년아카데미 ‘한국근대사 강의’ 자료에는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해 “식민지 해방보다는 전후 처리라는 비즈니스”라며 “미군은 환영식에 참가한 군중에 총격을 가했으며 남한이 좌익과 중도좌파에 의해 장악돼 있어 미국의 의도대로 남한을 장악할 수 없게 되자 파괴공작을 벌였다”고 공산주의 이념과의 투쟁 역사를 ‘장악’이란 개념으로 폄훼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인민공화국은 80%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소련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정치위원회 등 민중의 자치조직을 통합해 좌우익을 망라한 조직을 구성하고 행정권을 줬다”고 설명했다.
    
또 이 교육자료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소련의 세력확대 정책과 김일성의 적화통일 정책이 전쟁의 원인이지만 수정주의 입장에서는 미국에 의한 한국의 단독정부수립 자체가 민족국가 수립을 방해한 것이라고 부연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자체를 북한과 하나된 민족국가 수립의 방해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교육자료는 전시에 발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국군과 미군에 의해 1백만, 인민군과 빨치산에 의해 13만이 학살됐다”면서 “88.5%의 절대 다수가 국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 가운데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지켜왔던 거시적인 역사 안목은 전혀 도외시한 채 정확한 집계가 어려운 왜곡된 자료로 이념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북한의 이해’ 강의 자료는 북한의 선군정치에 대해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고 위기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이것은 군부독재와는 다른 것”이라고 추켜세우는 부분까지 발견된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선군정치에 대해 “김정일이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차지한 이후부터는 당의 독재로부터 군사독재로 이행됨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태동배경에 대해서는 “혹심한 경제 위기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자 인민들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해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강의와 소감들을 종합해 볼 때 기독청년아카데미는 공존이 불가능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존을 말하고, 북한에 대해 장밋빛 환상만을 심어주는 교육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 가치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한국교회 청년들에게 북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장해야할 ‘인권의 문제’와 ‘신앙의 자유’를 도외시한 채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고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 함께 보면 좋은 기사
http://blog.naver.com/dreamteller/220977249510





사막은 은혜의 땅 33

이런 일들이 왜 생겼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적인 복을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물질적으로 상상하지도 못한 복을 받게 된 이후 나는 영적으로 메마른 '영적 사막의 시기'를 경험했다. 피닉스로 이주한 후 얼마 동안은 아마도 내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았던 것 같이 부동산 거래에 온 신경이 쏠 려 있었다. 그 결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땅도 소유하게 되었고 집도 사고 조그마한 비즈니스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많은 영적인 것들을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함이 나의 모든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벤츠 최고급 SUV 승용차를 구입했다. 최고급 옷과 신발 그리고 가구들을 구입해서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 16세가 되어서 임시 운전면허증을 받은 둘째 아들 성수에게는 분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사주었다. 아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나의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집안에서 대중 방송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성경 말씀은 형식적으로 읽었다. 기도에도 힘이 없었고 간절한 마음이 실리지 않았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서 기도할 기도 제목도 없었다. 피닉스로 이사 온 후 아내와의 사이가 얼마간은 좋게 회복되는 것 같더니 다시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사사건건 판단의 눈을 가지고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지난 18년 동안 계속해온 부부싸움이지만 이제는 그 강도와 횟수가 더 늘어갔다. 이틀에 한 번씩은 아이들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부부싸움을 했다. 아내는 늘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막내 성구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나는 한국으로 나가서 전도만 하면서 살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당신과 같은 사 람하고는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들어서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꾸로 그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아내를 마음 속으로 정죄했다.

 

'아니, 저 여자가 성령 받은 사람이 맞아? 성령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남편에게 별거하자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저 사람도 어찌 보면 가짜인지도 모르지.'

 

아내와의 갈등은 심적, 영적 갈등으로 확산되면서 그 폭이 날마다 깊어지고 넓어져 갔다.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마음 속에 공허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주변의 사막처럼 모든 것이 메마르고 황량하기만 했다. 우울증과 불면의 밤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싫었다. 삼청교육대 지옥훈련을 받고 난 후 나를 사로잡았던 대인 기피 증세가 다시 살아났다. 극도의 무력감에 빠졌다. 그래도 간간히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냥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제 재산도 많이 생겼으니까 세계 여행이나 하면서 남은 여생을 그냥 풍족하게 살고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 편하게 먹고 그렇게 살자"라는 음성이 들릴 때였다. 그것은 분명히 사단의 음성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이 들면서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내 마음은 계속 절망과 좌절 가운데 뒤범벅이 되곤 했다. 갖고자 했던 모든 것을 소유하고 보니 정작 내 손 안에 잡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적 공황의 시기는 오래갔다. 삶의 의미가 없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짜증났다. 간간히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아이들에게나 아내에게 화를 내며 조그만 일에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더 많았다.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차라리 가난할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할 때는 그래도 먹고 살기에 바빠서 딴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하다 보니까 자연히 기도도 마음을 내려놓는 절실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시꺼먼 거미와 복잡하게 엉켜 있는 거미줄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곤 했다. 그 거미줄이 바로 나의 영적인 상태였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거미줄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하다 보면 너무도 갑갑한 생각이 들어 혹시 이러다가 호흡이 막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영적인 공격이었다. 그래도 오기를 가지고 기도했다. 악한 세력의 영적인 결박을 완전히 뚫고 나가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의 줄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싶은 열망이 간절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새벽에 습관처럼 일어나 말씀을 보고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새벽도 그저 묵묵히 무릎을 꿇고 멍한 느낌으로 그렇게 앉아 있었다.

 

'네가 나를 믿느냐 그리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라 너의 속에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아라.'

 

어느 순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모든 것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얀 세마포 같은 천이 뒤에서부터 무릎 꿇고 있는 나를 덮어씌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성령님이 나를 감싸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폐병 3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새벽 공기와 함께 나의 폐부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왔던 그 손길…. 미국에 도착해서 40일 동안을 열병으로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인근 한인교회를 찾아갔을 때 전신에 감전되듯이 짜릿하게 나를 자극해 왔던 그 감격을 그날 새벽에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렘 11:15).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영적인 간음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한 번 느끼고는 재를 뒤집어 쓴 채로 회개 기도했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나는 그 날 새벽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체험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의 거미줄을 제거해 주신 것은 물론이고 기도할 때면 보이곤 했던 시꺼먼 거미까지 완전히 없애 주셨다. 문제의 현상은 물론 그 근원까지 제거해주신 것이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 너희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 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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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하면 행복은 멀어집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기 부러워할 정도의 여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듯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의 조건을 알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은 만족을 모를 터이니 마음은 추운 겨울일지도 모릅니다. 몸이 추운 것은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마음이 추운 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사는 기준이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처럼 행복의 조건이 하나일 수는 없답니다. 생긴 모양새가 다르면 성격도 다른 법 가진 것이 작지만 행복을 아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이지요. 남과 비교할 때 행복은 멀어집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 좋은생각 中에서 - Just Loving You (그저 당신만 사랑해요) / Mary D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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