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그리스도의 몸(2) / 루이스 B. 스미디즈

 

 

(3)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공동체의 기원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서 행하신 바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혼란과 공동체, 아담 안의 옛 인류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공동체 사이를 나누는 분할선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 공동체에 관해 언급된 모든 것은 여기에 그 지향점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공동체의 전환점은 역사의 전환점, 즉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과 동일하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십자가로 인하여 옛 분열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옛 언약을 파괴하지 않았다. 율법에 기록된 "우리를 거스리는 의문의 법령들"은 폐지되었으나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된 언약공동체는 폐지되지 않았다. 십자가는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갈3:8), 그 복음은 율법이 폐할 수 없었던 북음이었다(갈3:17).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은 처음부터 만민을 위한 복으로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였으며, 그가 죽으셨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들에게 가져다 주셨다(갈3:14).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갈3:7). 십자가는 새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 관계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로 인하여 아담에 의해서 이룩된 혼란의 와중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몸 안에 계신 성령 

 

교회 안에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몸에 영혼이 제공되었다는 오랜 전통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며,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몸이 된다. 그러나 가장 바울의 관심을 끈 것은 성령이 그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2장). 그러나 초점은 활동하시는 성령에 맞춰져 있다. 성령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신다(12:7). 이 은사들은 그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서 부여된 여러 직책들과 대략적으로 대비가 된다. 어떤 때에는 보기드문 믿음을 행사하는 능력의 은사들로 나타난다. 그 공동체 안팎에는 수행해야 할 사역, 즉 사랑의 사역이 있다.

 

우리가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시금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상기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그 몸 안에서 효과적이 되게 하는 것, 즉 공동체로 하여금 화목케 하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성령은 그의 주권의 능력과 목적 안에서 역사하시는 지상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성령은 각 개인들을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대망하는 몸 안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로 수립된 공동체 안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전12:11). 그는 말씀 선포와 성례로 구원 사건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를 재삼 기억케 하신다. 성령은 미래의 보증(첫 분할금)이시며 현재의 촉매가 되신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실현된 새로운 것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상의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 공동체가 가시적인 행동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도록 인도하신다.

 

필자는 성령이 교회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자유로우시다. 또한 그는 그 지체들 안에 생명이라고 불리우는 물질을 집어 넣으시는 일괄 작업 배치를 묵묵히 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무시되고 거부되며, 무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편, 그의 임재는 단독적인 보장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령이 일하시니 지체들도 일해야 한다. 성령이 활동하고 계시니 지체들은 그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학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이 결여될 때, 그 몸은 좋게 말해서 동면 중이며, 나쁘게 말해서 죽어 있는 것이다.

 

몸의 머리

 

바울이 사용하는 상(像)들은 계속되며, 매우 다양한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그것을 좇아가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전체-즉 머리와 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동시에 그 몸의 머리가 되신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머리 상(像)은 두 가지 개념을 암시해 준다. 그 중 하나는 주인, 통치자 혹은 인도자의 개념이다. 이것은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비유이다. 우리는 우두머리 혹은 지배자를 의미할 때 어떤 단체들의 머리, 혹은 정부의 수뇌부를 지칭한다. 그러나 바울이 몸의 머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그와 동시에 몸과 머리의 긴밀함과 몸의 머리에의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상은 몸에 대한 머리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두 번째 상은 그들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바울은 그 상이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우월하신 그리스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가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머리이기도 하다(골2:10). 그러나 이것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베소서 1:21, 22에서 그리스도는 한 때 세상의 주인들처럼 보였던 정사와 권세들의 주로서 찬양을 받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를 향한 그분의 관심에 부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양자의 머리이다. 그는 승리하심으로써 모든 곳에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 새로운 상황은 범세계적이다. 그것은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각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주와 머리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의 머리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세상을 그 관심과 사역의 대상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교회가 자신만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한다고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주변의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론은 기독교적인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라는 사실은 분명 그분께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신분의 우월성을 지적해 준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신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엡5:23). 그것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신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1:3). 남성의 우월한 신분은 직분과 관계가 있다. 이 말은 남성의 신분이 우월한 특성 혹은 자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의 신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예증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근본'이시며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함으로써 몸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근본'(biginning)이라는 말은 짐작컨대 희랍어 "아르케"를 가장 훌륭하게 번역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뿐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시는, 다른 모든 힘 배후에 있는 창조적인 능력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당장에라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imminent creative power)이시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격체이신 그분은 권위에 있어서 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몸보다 우월하시다. 따라서 '근본'이라는 말은 내재성(immanence) 혹은 긴밀성(closeness)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히브리적인 어조를 담고 있다. 먼저 난자는 지명된 상속자, 종족의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그와 동시에 그 이후에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 첫째였으나, 중요한 것은 그의 우월한 신분이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역사상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권위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먼저 나신 자이다. 그리스도는 "으뜸이 되려"하시기 위해 "먼저 나신자"가 되신다(골1:18). 이 모든 사실들은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상과 조화된다. 그는 머리로서 우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몸의 머리인 그리스도에 담겨 있는 무엇보다도 첫째되고 분명한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신분과 통치하는 기능에 있어서 우월하시다는 것이다.

 

[2]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 몸과 긴밀하게 그리고 활력있게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컨대, 바울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고 권고한다.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생소한 생물학적 개념을 도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생리학적인 상(像)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그 다음에 계속되는 내용으로 보아 분명하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그는 성장과 생명을 공급받기 위하여 몸이 머리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상을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의존성에 적용하고 싶어하는가?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단언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로서 교회의 섬김의 수단인 은사들과 직분들을 부여하신다(4:11, 12). 우리 모두는 각자의 소명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사랑 안에서 섬기며 그렇게 할 때 성령의 하나됨이 유지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4:13, 14). 이러한 묘사는 매우 역동적인 묘사이다. 우리는 순종과 사랑의 실천, 믿음과 지식의 습득, 교회의 특수한 직분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섬김을 명받는다. 이것들은 "머리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비유의 의미를 파악하는 배경이 된다.

 

몸의 "머리" 비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가 얼마나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으며 얼마나 총체적으로 하나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다.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바울의 말 또한 동일한 사실을 가르친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비유를 몸과 머리 간의 구별로 확대 적용함에 있어 바울이 마음에 두고 있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가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비유는 그 둘 사이의 구별을 다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나와 내 몸이 그러하듯이 통일된 두 개체 간의 구별은 있다.

 

이 단락을 마치기 전에 바울이 머리와 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은 몸에 관하여 말하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바울은 교회가 그 자체 안에 그리스도의 전체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유의 구절은 통상적으로, 단어들에 대한 주석이 아니라 바울의 메시지의 전반적인 대의에 의하여 해석되곤 한다. 성례주의자들은 그 구절을 인간의 신성화를 위해 성육하신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에 의해서 해석한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에 흘러넘치는 그리스도의 신인으로서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성례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일종의 생명이라는 물질의 저장소이며, 성례를 통하여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 성례주의자들은 머리ㅡ몸의 비유를 최대한 활용하여, 몸은 생명을 공동체 안으로 부으시는 머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창조적이며 능력 있는, 살리는[생명을 공급하는] 영이다. 성령은 머리로부터 나와 몸을 채우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이 그리스도를 채우는 방식들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골1:24).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 사람"이 드러나고 실현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온전케하여야 한다. 화해가 이루어지며, 인간과 하나님이 그리고 인간들이 화평케 될 때, 그리고 새 인류가 전체적으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그리스도는 온전케 될 것이다.

 

전술한 것을 요약하자면, 몸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상은 그가 교회에 대해서 그 신분과 권위에 있어서 우월하신 존재이심을 지적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교회의 생명의 살아 계신 샘이라는 사실을 전해준다. 교회에 대한 그의 우월한 신분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긴밀한 관계와 대비된다. 두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다.

 

몸의 사역

 

예수님의 몸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희생적 사역을 성취하시는,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몸은 세상에서 떠나 여기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지속되며 그의 고난은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골1:24). 그의 화목케 하는 직분을 이제 그 공동체가 맡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아직도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성령은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성령은 홀로 활동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 공동체 배후에서,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체를 수단으로 활동한다. 그는 공동체를 세우시고 실현하여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몸 이 되도록 구비하신다. 성령은 공동체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심으로써 그리고 공동체를 세상을 위한 희생적인 활동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공동체를 화목케 하는 사역자로 만드신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 행위로 세우신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가 계속 수행하는 활동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동일하다. 그러한 동일성은 바울이 언제나 매우 관심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다. 바울은 그 기능에 있어서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듯이, 몸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자신의 몸과 더불어 시작하신 사역은 역사에서 자신의 몸을 통하여 화목케 하는 그 사역으로써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영으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시대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서로에게 화목케 하시는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하여 형성하시고 실현하시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보충적인 의미 혹은 뉘앙스를 띠고 있다. 그 근본적인 의미는 활동이다. 즉 몸은 활동으로써 외부로 나타나는 인격체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내용은 그 몸의 기능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배경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 구속 사건이다. 새 사람이 갈보리에서 존재하게 되었을 때 몸으로서의 그 공동체가 창조되었다. 그 몸의 활동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십자가에서 수립된 새 사람을 실현시키며, [2] 세상에 대한 화목케 하는 사역을 계속하는 일 등.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몸인 교회 간에 진정한 동일성이 존재한다. 그 동일성은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그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화목케 하는 사역 혹은 섬김을 계속하신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신분, 권위,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 우월하시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자유롭고 은혜롭게 교회를 화목케 하는 사역에 그의 동반자로 부르시는 주님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분은 교회에게,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원수의 담을 허무심으로써 창조하신 생명의 보편성을 반영하라고 명하신다. 그는 교회에게 자신과 함께 사역하여 그 몸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라고 명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밖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어 있거나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몸은 몸이 아니라 시체에 불과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 간의 연합은 서로 맞지 않는 당사자들간의 연합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주이시다. 몸인 교회는 언제나 종이다. 그리고 순종이 없는 곳, 세상을 위한 화목케 하는 행동이 없는 곳에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활동하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새창조가 활동을 개시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40-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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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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