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에녹(enoch@goodtv.co.kr) l 등록일:2017-08-02 16:41:22


  ▲스웨덴 문화·민주주의 장관 앨리스 바 쿠른케(Alice Bah Kuhnke)는 "ISIS에 참여한 스웨덴 사람은 환영받으며 고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데일리굿뉴스 


스웨덴이 이란 기독교인은 본국으로 추방하는 반면,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활동한 ISIS 테러리스트에겐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고 있단 소식이 전해졌다.   
 
현지 언론 엑스프레센은 "현재 150명의 ISIS 테러리스트들을 스웨덴 정부가 보호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이들이 지하드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웨덴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과거에 ISIS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조국에 돌아와 일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도움을 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2004년까지 ISIS에서 활동한 27세 왈라드 알라이 유세프는 "옛날에 ISIS에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해 살상 무기를 들고 홍보용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는데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떠돌고 있어 스웨덴 정부가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줬다"고 익스프레센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세프는 이어 "계속 구직활동을 하는데 문제의 사진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39세 바할린 데킬라 길도도 2012년 시리아 육군 병사들의 시체를 배경으로 자축하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스웨덴정부는 그에게도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 문제없이 살아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현재 대략 100명의 스웨덴 사람들이 여전히 중동에서 이슬람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
 
스웨덴 문화·민주주의 장관 앨리스 바 쿠른케(Alice Bah Kuhnke)는 "중동에서 급진적 이슬람 단체(ISIS)를 도우며 함께 싸우는 스웨덴 사람들은 환영받으며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CBN 뉴스는 "스웨덴에 8,000명의 기독교인 망명자가 강제 추방을 피해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아래 이미지는 탈북자 출신 웹툰작가 최성국씨의 글입니다.

아래글에 대한 리액션을 담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나는, 통일은 무조건 '평화적'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때, (그땐 어리고 관심도 없어서 잘 몰랐지만...) 북한에 가서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보며 저렇게 악수하고 웃으면 곧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될수록,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북한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북한 정권에게 ‘평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평화와 달랐다. 북한에서 ‘평화'는 모든 인민이 오직 수령님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북한에게 평화적으로 손을 내미는 건 마치 팔이 없는 사람에게 악수를 하자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이 망설이는 지난 70년 동안 북녘에서는 전쟁보다 더 끔찍한 일로 수많은 생명들이 고통받고 죽어갔다. 지금 통일을 한다 해도 이미 죽은 천만명의 생명들을 다시 살릴 수가 없는데, 이게 과연 평화통일일 수가 있는 걸까?


나는 그동안 전쟁이 날까봐 두려웠고, 북한에 대한 진짜 진실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지금이 평화라고만 생각했다. 한국의 삶, 시골은 조용하고, 도시에 사람들이 가득히 웃고 떠드는, 이게 평화라고 생각했다.


가끔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건 영화 속 이야기만큼이나 낯선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게 진짜일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걸 믿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니까. 또 한국도 이렇게 힘든데 북한까지 신경 쓸 수 없다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나는 한끼만 굶어도 짜증내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지금부터라도 그 죄값을 용서받고 싶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아마도,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으니 무작정 공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으니 ‘때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북한이 정말 핵을 쏠까? 그것은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자는 최후의 발악일텐데, 그렇게나 공들여 유지한 70년의 독재체제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을까? 핵은 그들의 독재체제를 지키는 협박용 무기이다. 포악한 사람들은 큰소리치고 화를 내며 협박을 한다. 하지만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비굴해진다.


한국이 포악한 북한에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더라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협상카드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는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최고의 과학기술과, 국제사회의 지지와, 탈북자들이라는 엄청난 정보통이 있었으니말이다.


북한땅은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한국과 연결되어 있다. 중국정부는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느라 북한 인민들을 돕지 않는다. (지금도,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오히려 탈북자들을 강제북송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한국이 어려운 상황인건 맞지만, 전 세계에서 북한을 도울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들이 굶어죽는다는 사실 외에도,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국가로서, 아니 바로 옆에 있는 이웃으로서라도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우리나라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구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데 왜 오지 않는 평화를 기다리고, 멀리 있는 남에게 도움받기를 기다려야 하는걸까? 추운 북한땅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한국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는가.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평화적 방법' 그것은 남북의 모든 주민을 놓고 봐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나눠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우리가 직접 재앙을 겪게 하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의 절실한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다.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한국의 평화를 유지했다.


'평화'도 상대적인게 아닐까? 전체 생명을 놓고 무엇이 가장 평화로운 방법인지 찾아야 한다. 우리의 생명보다 북한 사람들의 생명이 하찮아서 우리만 잘사는게 ‘평화’가 아니다.


한국이 북한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였다면,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 재앙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태평하게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외면한 채 '평화적(?) 통일'만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유를 빼앗기고 고통을 겪고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오로지 '북한에서 태어난 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원하는 평화적인 통일은 동화책에 나오는 해피엔딩일 뿐이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1%의 ‘평화통일’에 국가의 안보를 거는 한국. 그것이 한국의 99%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한국 정부와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는다. 우리가 굳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평화를 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를 보면, 문제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거의 대부분 부모에게 있다. 북한도 중국과 한국이 그렇게 내버려둠으로써 이렇게 고삐풀린 개망나니 독재집단이 됐고, 또 국제사회 고립이라는 단호한 정책을 씀으로써 억울한 북한 주민들만 죽어나갔다.


놀랍게도 북한 독재자의 욕심은 단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깡패같은 양아치를 반 죽을만큼 때리고 패고 굶겼는데, 어찌된게 얘는 더 포악해지고 자기보다 힘없는 애들을 괴롭혀 잘먹고 잘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를 외쳐도 북한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 평화가 아니다. 지금 당장 그들을 구해야 한다. 그게 공개적이지 않아도 좋다. 비공개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한의 끔찍한 범죄를 알게된 남한 사람들이 벌써 비밀작전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여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탈북자들이 한국 정부에게 북한에 대한 관심과 대응방법 등을 건의했지만, 그들의 의견은 30년이 지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지쳤고, 한국 정부에 대한 미련을 거의 포기해버렸다.


그럼에도 헐벗은 북한 주민들과 눈앞에서 굶어죽은 생명들을 잊을 수가 없어서 지금도 북한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곧 허공에서 사라진다. 지금 매일매일 뉴스에서는 '한반도 위기설'이라며 떠들어대고 있지만, 정작 남한 사람들은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잘 먹고 잘자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2천만 주민들은 처절하게 고통받고 억압당하며 죽어가고 있다. 아주 많이 늦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좋은 때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지금'이다.



출처: 조아영님 페이스북

제 7장 그리스도의 몸(3) / 루이스 B. 스미디즈

 

 

2. 그리스도의 몸이 계신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그 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몸이 어떤 특정한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해서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조직인가? 그것이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교단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은 제도적인 교회에 의해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공동체인가?

 

바울은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은 예배와 섬김의 행위로 나타나는 친교라는 것이다. 둘째, 그 몸은 지역적(local)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다"(고전12:27). 바울이 고린도의 한 가정의 거실에 모인 어떤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 무리ㅡ그 이름, 직분들, 예배의식, 그리고 가시적인 활동들과 더불어 그 무리ㅡ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사진처럼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은 조직이나 구조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나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구성 요소들이 부재한 경우는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그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들은 하나의 기관에 달려 있으며, 그 가장 주된 구성 요소는 그 기관의 대주교인 베드로의 권위 하에 살고 예배를 드리는 곳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삶을 나타내는 개신교도들이 등장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러한 공식을 계속 유지하는 데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밝히 증거하는 북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성장과 진정한 기독교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종의 교리적인 승인을 만들어 내려고 고심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회때 출간된 교회에 관한 법은 그리스도의 몸이 가톨릭 교회에 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법은 몸과 가시적인 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의 두 차원 혹은 국면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신비적인 국면인 몸은 그 가시적인 구조를 초월하여 확장된다. 이런 식으로 교회와 유사한 차원이 비 로마 가톨릭의 영역들과 중첩된다.

 

반면,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그 몸의 위상을 그리스도인들의 비가시적인 친교에 두는 경향이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기관(제도-역자주)은 기껏해야 그 몸을 양육하기 위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을 모호하게 하거나 방해하기도 한다. 그 의미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인 '몸'이라는 단어는 믿음과 감정에 있어서 무정형이며, 막연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관계를 언급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교회의 분리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때로는 분리를 일으키는 데 대한 허가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가톨릭 성례주의자들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이 내주하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믿는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교회에게 은혜와 생명의 저장소를 제공해 주며, 각 개인들은 성례를 통해 그것들을 받는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개인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며, 각 개인은 다른 개인들 안에서 동일한 실재[성령]를 인식한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몸 안에 계시며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 없이 창조하신 몸 안으로 인도된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서로간의 사귐에 의해서 새롭게 된 몸을 구성하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주장한 대로 그리스도이 몸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환영과 같은 몸에서 위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역동적인 실재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기관이 그리스도의 몸 신분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몸은 성령 안에서 주의 역동적인 활동에 반응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환언하자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것은 오직 몸으로서 활동할 때에만 진정한 몸이다. 그 공동체는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위해 활동할 때에만 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3. 얼마나 많은 몸이 존재하는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에게는 지상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는 몸이 하나밖에 없는가? 아니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많이 만들어 왔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느냐"고 도저히 못믿겠다는 어조로 질문하였다. 교회의 정체성을 고려해 볼 때,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교회의 분열은 믿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이상한 것이었다.

 

몸의 분열은 새창조와는 기괴한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있는 일이다. 몸이 나뉘인다는 것은 이상하고, 모순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무나도 실제적인 현상이다.

 

몸은 나누어질 수 없으며, 사람들은 오직 그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로마 가툴릭의 견해가 되어 왔다. 몸은 세상에 흩어져 있는 "진정한 신자들" 간의 비가시적인 친교의 끈이며, 따라서 제도가 해체되고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 몸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앞 단락에서 내렸던 결론이 옳다면, 이러한 신학적 해답들은 그 문제의 정곡을 찌른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해답은 어떤 것인가?

 

바울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지역 공동체의 연합[통일성]에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고 성찬 예식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그의 즉으심을 선포하는, 남.녀.노.소로 구성된 매우 구체적인 공동체를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 성찬 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함으로 인해 파괴된 그 연합은 한 지역 회중의 연합이었다. 사람들간의 사소한 마찰이 구체적인 실예에서 몸을 분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한 구체적인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몸의 하나됨을 위해 하셨던 기도 가운데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 몸의 하나됨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대한 가시적인 선포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디에서 새 사람의 연합 혹은 분리를 볼 수 있는가?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최소한 무엇보다 먼저 지역 교회 안에서 그 몸의 하나됨을 보지 않겠는가? 세상이, 인종과, 사회적 배경, 직업상의 신분과 세상적인 성취 등이 각기 다른 개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아가페적인 사랑 안에서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곳은 구체적인 지역 교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된 것과 얼마나 거리가 멀게 나타나는 것도 지역교회가 아닌가? 분열의 첫째 되고 최우선 되는 비극은 지역교회에 개인주의와 분파주의가 존재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세상에 가장 걸림돌이기도 하며 따라서 가장 해로운 곳이 바로 지역 교회가 아닌가?

 

고린도나 근교의 다른 곳에 있는 한 공동체 안에 서로 분리된 혹은 서로 분쟁을 벌이는 몇 개의 몸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도저히 못할 짓을 행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누어진 것이다. 가장 긴급하고도 힘든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의 문제이다.

 

연합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다 커다란 의미에서 존재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전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한다(엡1:22, 23; 골1:18). 지역 공동체들은 단지 커다란 몸의 지체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전체적인 몸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 흩어진 몸들, 그리고 몇몇 지역에 흩어진 교파들은 모두 함께 지상에서 화목케 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이다.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각자는 상대방을 인식히고, 상대방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 당시 각 지역에 흩어진 몸은 한 몸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되었었다. 예를 들어, 안디옥에 있는 몸은 그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그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기도하며 고난을 받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새로운 실재, 즉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여야 하며, 마음 아파해야 한다. 서로 다투고, 배척하고 적개심을 품고, 분열하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우쭐대며 주장하는 것은 지상교회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지역적인 면에서 분명히 사실인 것은 대륙의 국경을 초월한 교회 일치 운동이 점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각 교파가 상대방의 사역을 배척하고, 서로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경쟁을 일삼으며, 다른 교파의 성례전에 대해 배타적이며, 공개적으로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곳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보게 된다.

 

세계 교회 협의회(ecumenicity)에 대한 거부는 대개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쁘게 말해 그 거부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신학적인 껄끄러움, 진실성 없는 고백에 기인한다. 좋게 말해 그것은 주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구속에 신실한 몸을 유지하려는 바람에 기인한다.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령의 실재, 그리고 그의 구원의 역사성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동맹들에 가입하기를 매우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그처럼 동맹을 꺼리는 교회들은 주님께서 한 몸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그리스도의 몸-비록 그것은 항상 병약하고 죄로 가득찼지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은 어떤 이름 그리고 어떤 신조를 지니고 있던 간에 그것은 하나의 몸이며 동일한 실재인 것이다.

 

복음주의적 배타주의자들과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일치주의자들은 칼빈이 가톨릭 교도인 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돌레토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일행에게 교회적인 연합의 유일한 참된 띠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하셨으며, 현재 흩어져 있는 우리를 불러 그의 몸의 친교 안으로 모으시는 주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하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칼빈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 중심적인 마음과 소망을 좀더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께서 그 일을 행하셔야 하며,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 사역을 수행하신다는 확신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51-2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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