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에게 주어진 날들(Days)은 평범하게는 1년이 삼백육십오일로 동일합니다.

그런가하면 내게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소중한 날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예컨데 생일날, 입학식날, 졸업식날, 약혼식날, 결혼식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등

모두다 잊어버리고 싶지않고 항상 기억하고픈 소중한 날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보니  환난 날에…”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에게는 언제나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환난의 날도 있다고 하는 것

정도야 진작에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 날따라 이 말씀이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인생길을 가는 동안에 만나야 할 갖가지의 환난들을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환난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도

자상하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는 그 사실이

 

그 크신 사랑이 나의 가슴을 두 방망이질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생, 곧 자신의 힘으로 숨을 쉴 수 있고, 살아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한 번쯤은 환난의 날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 당한 환난 날이 문제가 아니라 환난 날에 도와줄 이가 없는 거기에

생의 고통이 따르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자살하는 사람들의 데이타를 분석해 볼 때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이 가진자들,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의 자살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오랫동안 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론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요. 실생활 속에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환난날에 부를 수 있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놓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지 아니한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알고있는 불신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환난 속에 있는 나를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렇게도 분명한데

그렇다면, 내가 환난 속에 들어간 것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아주 멋진 호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이 사실을 망각한 나는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하기 보다는 낙심부터 먼저

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음을 성령님께서 오늘 내게 특별히 밝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그 환난속에서 건져 주시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멋진 호기가 되도록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50:15절 말씀)

 

글: 최 송연

 



[출애굽기 32: 24-25]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돈과 재물이 풍족하고 명예와 즐거움이 있으면 만족스러운 인생인가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힘써 살고 나이 들면 은퇴해서 넉넉한 재산과 연금을 가지고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조개껍질 모으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 같이 생각되는 세상입니다. 영적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고 삶만 풍요하고 평안하면 만족스러운 인생이라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이 좀 잘 살게 되자 효도관광 붐이 일어났습니다. 시골 아낙네들이 관광버스 안에서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익숙해졌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인생이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더 구경 가고 놀아야 한다고 그분들은 관광버스 안이 떠나가도록 소리치고 흐느끼며 노래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사실 하나도 즐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길에서 진리를 알지 못 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는 채 구경 다니며 떠들고 논다고 해서 만족해지고 인생이 더 기뻐질 리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인생,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노래하며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하나님도 아니 보이고 모세도 아니 보이자 불안해져서 아니 보이시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모세 대신 아론을 의지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마시고 춤추며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 속에는 불안과 허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마시고 더욱 소리 높여 큰 소리로 노래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허무와 슬픔을 이기지 못 하여 먹고 마시고 뛰어놀며 돈과 명예의 우상을 의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경험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마음속 불안감과 죄책감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도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뛰놀며 즐겁게 노래하는 것은 가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마시고 더욱 소리질러 노래하고 펄쩍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정작 기쁘고 즐거운 것은 원수들이었을 것입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으로 돌아와 소리치며 웃고 떠들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손뼉을 쳤을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길로 빠져드는 것이 통쾌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40일 후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동족이 우상 앞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고 ‘방자하여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은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까지도 조롱하였는지 모릅니다. “헤헤, 하나님, 내가 따먹으라는 선악과 열매는 잘도 먹던데,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어도 안 먹네요.” 그래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뜨렸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마시게 했고, 동족에게 칼을 겨누고 레위지파로 하여금 3,000 명이나 도륙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방자하여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처럼 풍족한 문명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며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든 사람들이 원수들의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복음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나 물질의 풍요와 삶의 즐거움을 성공한 인생이라 여기며 사는 모든 인생들이 원수들의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그럴수록 더욱 강렬한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오락과 즐거움을 넘어 더욱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고 인생의 허무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마약까지 하는 인생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오늘날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길에서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것 같고 시험이 닥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험은 결코 물질의 시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며 들의 생축도 내 것이라,’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험은 믿음의 시험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험은 오직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있어 끝내 이겨내어야 하는 믿음의 시험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떠난다면 어떠한 부귀영화와 노래와 춤도 우리를 허망함과 두려움에서 건져내지 못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우리는 결코 원수의 조롱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평안하며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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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草露 *
(인생초로)


한서 소무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생은 "풀초(草) 이슬로(露)"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 뜻입니다.

아침에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은 햇볕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도덕경의 저자인 노자는 세상을 살면서 버려야 할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驕氣(교기)
내가 최고라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多慾(다욕)
내 마음에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지나친 욕심을 버려야 한다.

*.態色(태색)
잘난척하려는 얼굴표정을 버려야 한다.

*.淫志(음지)
모든것을 내 뜻대로 해보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은 인생...

잠깐왔다
허무하게 가는 인생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우리의 마음을 방황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 인생초로 *
(人生草露)


어차피 인생이란
잠시 풀잎에 맺혔다가
스르르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것!!

그 찰라의 순간을 살다 가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마음에 담아야 하고
무엇을 내려놔야 할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원망하지 말 것,
자책하지 말 것,
현실을 부정하지 말 것,
궁상떨지 말 것,
조급해하지 말 것.

해야 할 것 다섯가지는 무엇일까요?

자신을 바로 알 것,
희망을 품을 것,
용기를 낼 것,
책을 읽을 것,
성공한 모습을 상상하고 행동할 것.

이 열가지가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다고 합니다.
실수하며 보낸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인생보다 훨씬 존경스러울 뿐 아니라
훨씬 더 유용합니다.

상대가 화를 낸다고
나도 덩달아 화를 내는 사람은
두번 패배한 사람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상대에게끌려드니
상대에게 진 것이고
자기 분을 못 이기니
자기 자신에게도 진 것입니다.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지금까지 읽은 시국관련 글 중 가장 통찰력 깊은 글이라 생각되어 올려봅니다.*

(펌 글)

악몽처럼 읽은 책 이야기.

윤용준: 재미교수.
Timothy Snyder의 “On Tyranny: Twenty lessons from the twentieth century”- “포악한 정치: 20 세기 의 스무가지 교훈”.

Thanksgiving 휴일에 내가 읽은 책이다.
Pocket size의 작은 책으로 126 page로 끝 나고, 일반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Yale대 역사학 교수로 20 세기 중엽의 동 유럽이 그의 연구 분야이다. Fascism, Nazism, Communism 의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속성(폭정)에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 이에 근거해 Trump의 독주를 경고한다. 공감하는 사람과 또 일각에서는 너무 hysterical 한 반응이 아니냐 고도 한다.

Snyder의 논리는 분명하다. 미국 정치의 전통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이 Hitler에게 농락 당한 것이 결코 독일 국민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며, 오늘의 미국 시민이 당시의 독일인 보다 현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Snyder의 기본 논리는, 사회의 버팀돌이 되는 사람들이 Hitler의 공갈(terror)에 너무 쉽게 넘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을 “Anticipatory Obedience” 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는 “알아서 기는”, “미리” 알아서 “굴종”하는 심리와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미리굴종” 덕분에 Hitler나 Stalin 같은 독재자가 별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거의 공짜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Snyder는 이러한 포악한 정치의 위협에 견디고 저항하는 20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Hitler의 Nazi와 Stalin의 Communism 속에서 생존해온 Kolowski(Poland 의 철학자) 같은 사람의 체험을 토대로 한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경고하는 바는 이미 한국의 현실이다. 이 책에 의하면, 현재 한국서 일어 나고 있는 일들이 Hitler-Stalin의 전체주의 체제의 시작과 유사하다.

[문재인의 종북정권은 이들의 낡은 Hitler-Goebells의 술책을 흉내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정권의 적패청산과 대북관계를 이해해 보자. 문정부는 의도적으로 핵대피 훈련을 실시하지 않는다. 미국이 북한을 때릴 것에 겁을 내어 국민들을 알몸으로 세워 놓는다. 국민들을 핵인질로 만들어, 김정은이 마음대로 공갈을 칠 수 있게 방치한다.

한편 언론과 공영방송을 이용하여 김정은의 백두혈통을 미화한다. 국민들의 경계심을 낮춘다. 그래서 국민들이 “미리굴종” 하여 앞으로 올 더욱 억압적인 통치에도 순응 하고 저항하지 못한다. 이것이 문정부의 대북정책의 핵심이 아닐까?

문정부의 “적폐청산”(70여 가지 계획이 있다고 한다)을 한국서는 조선조의 “사화” 의 재현 또는 “폭력” 이라고 이해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terror, terrorism 즉 공포정치이다.

적폐라면, 대한민국 70년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적폐는 문재인 정부의 “법치파괴"가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무너진 “법치” 를 문재인 정부는 “법치” 를 바로 세우기보다, 더욱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Snyder의 우려는 배부른 타령이고, 한국은 이미 악마의 늪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악몽이다.

그래서, 2016 년 말부터의 정치적 사변을 미리굴종 (Anticipatory Obedience)과 전체주의(totalitarian) 체제의 속성을 밝히면서 설명해 보려 한다.

Nazi Hitler, Stalin의 공산주의, 북한체재가 전체주의에 속한다. 악몽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

Snyder의 20 가지 교훈을 한국의 현 상황에 응용하여 다섯가지 계율(행동지침)로 정리 하였다.

I. 거짓말

“정치에서는 속았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박근혜 정권은 근대 민주주의역사에서 거짓선동이 무너뜨린 최초의 권력으로 기록 될 것이다. 지난 1~2년 간의 정치위기의 핵심은 “거짓말” 이다.

속이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 한국 사람들은 왜 잘 속는가? 쉬이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케 하는 질문이다.

이 정변의 원인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인기 잃음)과 언론의 과장 선동으로 본다. 그러나 Snyder의 논지를 따르면, 훨씬 전부터, 1987 민주화 헌법 제정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다.

좌파정부를 지지하는 종북단체들은 배후세력과 조직으로 지속적으로 terror를 manage(관리)해 왔다. 선동과 선전이 중요한 몫을 하였다. 여기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권력의 악용도 terror에 포함된다.

“주사파” 같은 조잡한 이념과 술수에서 “광우병 사태” 와 “촛불정변”을 가능케 하였던 것은 바로 “미리굴종”이 었다.

“미리굴종”은 위로는 사회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아래로는 일반 시민들로부터 나타난다. 좌파 terror의 시작을15년 전 “김대업 사건” 으로 잡을 수 있다. 이회창과 노무현이 대선에서 경쟁 할 때이다.

이 사건은 배후의 terror manager에게 한 수 가르쳐 준 바가 있다. 새빨간 거짓말도 한국서 통할 수 있고, 이것으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람은 잘 속는다고 한다. 평상심이 부족한 사람,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잘 속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같은 것이 평상심을 기르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 이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종북좌파와 주사파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광우병 사건”은 정부의 미흡한 사건처리로 테러관리인(종북주사파)에게 한국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더욱 알려준 셈이다.

여기서 공영방송 MBC는 혹세무민의 선봉에 섰다. 테러관리인의 하수인 역할을 확실히 하였다. 연속적인 선전과 선동으로 루머와 유언비어를 생산하여 속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종북세력의 또 전체주의의 중요한 공작이다.

사실(fact)과 거짓의 구분을 애매하게 하고, 역사의 기억을 둔화시키는 것이다. 2016 말 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와 탄핵은 이러한 테러의 결과이며, 그래서 “촛불테러”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이런 공작을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 (1948- )를 부정한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를 한국의 역사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려 한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헌법에서 지우려 한다. 대한민국의 상징이고 한국 사람들이 가슴에 담고 있는 태극기를 지우려 한다.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을 가능케한 모든 것을 지우려 한다.

왜? 이것은 마치 사람들의 생머리에 탈색약을 계속 주입하여, 완전 탈색을 만들고는 자기들이 원하는 색갈로 염색하려는 시도이다.

즉 사람들의 기억에서 대한민국을 지워서 자기들이 원하는 김일성주의로 채우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반인륜적 범죄 (crime against humanity)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라는 어린 세대에게는. 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나올 만한 얘기이다.

명심하자: “fact를 잊으면 자유를 잃는다” 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사실관계(fact)를 정확하게 알려주면 바른 선택을 한다.” 조갑제 기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왜 이들은 – 문재인, 임종석 그리고 김일성주의자라는 청와대 참모들은 이러한 끔찍한 공작을 하는가?
왜 이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당하게 경쟁하지 않고 선전, 선동과 거짓에 의존 하는가?

나의 답은 이렇다. 문대통령과 좌파들은 자신이 없다.
1948년에 건국한 대한민국 같은 나라를 만들 자신이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 같은 인물이 될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다.(우울한 이야기지만 계속하려 한다)

이러한 좌파의 일관된, 집요하고 연속적인 공작에 비해 이명박 정부는 그때마다 미봉책에 그쳤다.

박근혜는 노력을 하였다. 통진당 해산과 좌편향 교과서를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문창극 총리 지명철회 같은 “미리굴종”이 있었고 송민순 회고록에 보도된 문재인의 행보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다.

대통령은 내 임기 동안만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데 정치적 부담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수세에 몰린 반응은 terror-manager 에게 계속 수를 가르쳐 주어, 한국 사회의 헛점을 마음대로 휘젓게 된 것이다.

종북좌파의 목적은 선전, 선동을 통하여 사람들이
(1)사실과 허위를 혼동하여 사리판단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2) 이성적 판단보다 감성적 충동으로 행동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 국민들은 정부에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따질 근거를 잃게 되어 그야말로 어리석은 군중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겠다. 북한의 도발이 있으면, 1980-90년 대에는 안보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나왔다. 2000년 이후 북의 도발이 여러차례 있었는데, 북한과의 평화를 주장하는 대통령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유권자의 상당 부분이 아래로부터 북한에 “미리굴종” 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더욱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북특사가 3월초 북한을 다녀왔다. 문정부는 언론을 통하여 김정은을 미화하고 있다. 국민들의 김정은에 대한 경계심을 내리려는 것이리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의 공갈을 여과없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해주었다. “대화가 지속하는 동안 ….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겠다.” 북한과 문정권이 공모하여 국민들을 겁주어 “미리굴종”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리굴종”은 국가간에도 적용된다. 특히 상대국이 terror-manager의 성격을 띨 때. 대한민국은 천암함폭침과 같은 북한의 여러 차례의 도발에 따끔한 반격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핵공갈이다. 김영철은 천안함 terror의 주범 이다. 문정부는 김정은과 동업자가 되어 국민들에게 김영철을 받아주자고 한다. 어떠한 “미리굴종”을 예상 하고 있을까?

한국의 중국에 대한 “삼불”(3No) 선언은 중국에 한 수 가르쳐 준 결과, 국빈 방문한 대통령과 기자단에 대한 야만적 대우였다.

북한은 언젠가 패망 독일처럼, 주민을 학대한 반인륜적 범죄로 UN의 국재재판을 받을 수 있다. 북한에 동조한 한국의 고위직들이 함께 재판을 받지 않을까?

만약 문정부가 한미동맹을 무시하고 북한을 놓지 않는다면. 이러한 민주주의와 법치의 퇴보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한국의 언론은 잡화상이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판다. 거짓말도 팔고, 쓰레기도 판다. 물론 옳은 필자도 있다. 2016 가을부터의 촛불정변에서 알아서 긴 것이 언론사 기자였다. 사리분별이나, 직업윤리나 긍지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도 여기에 한몫 하였다. 언론의 월남패망 사태였다.

그들의 보도를 듣고 흥분한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처럼, 좀비처럼 행동하였다. 언론인의 “미리굴종”은 반사회적 행위이며, 범죄이다.

국회의원들이 “미리굴종” 하여 탄핵해 주었다. 헌법 재판소 판사들이 알아서 기었다. 인간의 역사에는 거짓과 광기에 의한 촛불테러와 같은 비극이 간혹 있다.

1923년 동경 대지진에서 일부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인 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영화감독 아키라-구로자와는 당시 13세의 소년으로서 목격한 무서운 광경을 그의 자서전에 쓰고 있다. 지진이 며칠 계속 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밤의 어두움이었다. 어둠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쉽게(한국인에 대한) 루머-선동의 제물이 되었다. 이러한 극단의 공포는 인간의 이성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한 구석에 숨어 있던 광기에 사로잡혀 살인도 서슴치 않았다.

촛불사태에도 루머와 선동이 핵심이었다. “극단의 공포” 대신 “질투와 사디즘”의 선동에 영혼을 팔았다. (sadism: 남의 고통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정신질환)

한국사람은 왜 고백하지 않는가? 인간의 마음에 숨어 있는 어둡고 우둔한 광기를. 이러고도 한국은 일본더러 사과하라고 한다.

II. 문의 사람들

문재인 정부는 집권 하기가 무섭게 전력투구하는 작업이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역사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헌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제도와 권위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정체)이며 지향하는 바(vision)가 무엇 인가? 모든 국민이 알고 싶어하고 불안해(야 하는) 사안 이다.

어쩌면 그들은 웃을 것이다. 도대체, 이래도 모른단 말인가? 청와대 사람들의 지적수준은 고졸 정도일 것이다. 대학은 다녔지만 배운것은 없을 것이다. 직장생활에서 일과 세상을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엉뚱한 일만을 배웠다.

그런데 좋은 학교 나오고 잘 나가는 검사와 판사와 같은 사람들이 제 발로 기어 들어온다. 속으로 비웃을 것이다.

그러면 제 발로 기어 들어온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인가? 그들이 좌파(left)인 것은 본인들도 인정한다. 그리고 친북- 종북이다. 미국과 유럽에도 left(좌파)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공산주의를 믿지 않는다. 북한을 혐오한다. 그러면 그들의 이념은 무엇인가?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자신들의 이념을 밝힐 기회가 있었다. 5-6년전, 공안검사 고영주가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 문재인은 고영주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여 현재 재판중이다. 그러나 그럴 게 아니라, 대통령은 이제 공인으로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면 된다.
그러면 문재인을 찍지 않은 59%의 국민이 흔쾌히 받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정치적 계산이라고 보자. 이렇게 선언 함으로서 오는 “이익” 보다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 손해가 무엇일까?

첫째 북한이다. 북의 김정은과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동업자 관계다. 한국의 지지자들은 대통령이 공산주의자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주사파라는 김일성주의자와 좌익정당을 지지하는 민노총, 전교조, 언론노조, 방송노조 등 이다.

영국의 BBC는 “문재인은 외교의 천재거나 자기나라를 망치는 공산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러면 고영주 변호사는 당연 무죄이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좌파정권을 받아들이고 있다. 헌법대로 선출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59%의 유권자들은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에서 명시한 대통령의 역할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문을 찍은 41% 중에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틀로서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우선 경제를 알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철학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영어와 미국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는 이러한 분야에 경험, 이론과 실제에 밝은 인재들이 많이 있지만, 문의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 가지 못할 것이다.

한반도의 정답은 자유민주이다. 그러면, 자유민주주와 한미동맹은 당연한데, 이 길을 따르면 “문의 사람들” 은 무식과 무능의 노출로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반미를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무시하려 한다.

그래서 그들의 주특기인 “종북” 으로 가며 김일성주의를 따르려 한다. 그러면 이들의 정치 이념은 북한식 전체주의이고, 이들의 vision은 김일성의 vision이다.

주체사상이라는 허구(거짓말)를 떠나서 김일성이 북한 주민에게 약속한 vision이 있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이밥: 쌀밥, 흰밥). 북한은 이 약속을 70년이 지난 지금도 지킬 능력이 없다. 대한민국은 이것을 오래 전에 성취하였다. 그러면 김일성주의가 대한민국에 보탤 것은 없다. 간단한 논리이다.

문정권의 정치적 행보를 국민들은 지난 10개월 동안 보아왔다. 두 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일 친북 좌파가 아닌 대통령을 뽑았다면, 한국의 정치는 단연코 이렇지 않을 것이다.

한편 김일성주의자를 뽑았다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다소 피상적 논리에서 문정부는 김일성주의자인 것이다. 이들도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중 혹은 인민민주주의라 한다.

자유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는 개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한다. 순수한 우리말로 가짜란 뜻이다. 개떡, 개살구, 등. 파시즘, 나치 힛틀러, 스타린의 공산주의 등 전체주의 체제가 여기에 포함된다.

차잇점은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다. 한 국가의 활동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구분하자.
자유민주주의에서, 정부는 정치 영역을 주도하고, 경제, 사회, 문화는 개인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진다.
헌법이 개인의 재산권, 기업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정치권력 위에 놓고 보장하여 이를 가능하게 한다.

반면 개민주주의에서는 정치권력이 정부,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을 주도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독재로 진행하게 되어 있다.

문정권은 이미 언론과 방송 (KBS, MBC), 수사기관 (검찰)과 법원을 장악하고 있다. 공권력을 남용, 악용하는 것을 막을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다. 왜 이 지경까지 왔는가?

근본은 무임승차에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공공재(public good)이고 공짜가 아니다. 한 개인이 국가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인(국회의원)을 활용하여 대한민국을 유지하는데 자기 몫을 소홀히 하였다.

무임승차를 허용하는 철도회사는 도산하게 되어 있다. 그전에 탈선과 전복사고가 잦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해당하는 것이 안보이다.

문정부는 김정은과 북한에 대한 주적개념조차 확실하게 한 게 없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개념은 황장엽 선생이 미국에 와서 한 말이 있다. “김정일이 공격할 것이냐 아니냐고 묻는 것은 “독사가 물것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과 같다”. 상대가 방심하면 언제든지 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정은에게 적용된다.

김정은은 핵을 놓지 않는다. 핵보다 더 무서운 것을 만나기 전에는. 마찬가지로 문정부의 김일성주의자는 김정은을 놓지 않는다. 김정은보다 더 무서운 것을 만나기 전에는...

III. 오계

이 지경에서 나의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Snyder의 교훈(lesson) 20 가지를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5가지로 정리 하였다.

화랑도의 세속오계처럼 오계라 부르자. 처음 세가지는 기본원칙을 말하며, 다음은 개인의 사적 생활, 그리고, 개인의 공적 생활에 대한 조언이다.

계1.. 미리 알아서 굴종하지 말라 (no anticipatory obedience). 놀라운 일이 생겨도 침착하라. 겁내지 말고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애국자(patriot)가 되어라.

계2. 직업윤리를 지켜라.

계3. 신뢰하는 사회제도(institution)와 기구를 옹호 하라.
민주국가에서, 언론과 국회, 사법부가 대통령의 독재를 견재할 수 있다. 현정부 아래 언론, 검찰과 사법부는 이미 독립성을 잃은 흉물이 되었다.

그러나 헌법이 있고 아직 언론의 자유가 있다. 국회와 국군이 있다. 그러나 제도와 기구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 이것을 활용할 때만 가능하다. 정부를 견제할 제도가 없기 때문에, 국민 하나 하나가 헌법으로 무장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를 활용하여야 한다. 큰 힘을 낼 수도 있다.

다행이 IT 기술에 힘입어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언론매체가 등장하고 있다. 조선일보, 조갑제TV, 정규재TV, PenNMike 등은 수준급 언론이라 할 수 있다. KBS, MBC를 끄라. 대신에 좋은 책을 읽어라. 상대방(정치인)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고전으로 George Orwell의 “1984” 과 Dostoyevsky 의 “The Brothers Karamazov” 를 권한다.

국회의원을 찾아가라. 정권의 독재를 견제할 것을 구체적 사항으로 제시하고 탄핵을 통해서, 탄핵의 발의로라도 정권을 견제하라고 요구하라.

계4. 종교의 근본을 생각하라. Fact를 기억하고 진리를 믿어라. Internet을 믿지 말고 자신의 노력으로 사태를 직접 파악하라. 남에게 전할 때는 책임있게 말하라.

계5. 외톨이가 되지 마라.
밖으로 나와서 새로운 친구,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고 함께 행진하라.

외국에 있는 한국동포, 또 외국인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한국의 문제를 알려라. 단체에 가입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라.-(k기s)-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고, 궤도를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행성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오시기 전의 그때 그 시대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현 세상이나 캄캄한 암흑기에 진입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 드높아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퇴색되어 그 빛을 잃어 캄캄하여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BC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 두 번 오시기 전에 일어날 한 징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라면, 무엇보다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현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맘몬 신에게 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십일조가 무슨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듯, 앞에서 풍월치는 그들의 욕심은 바벨탑만큼이나 높아가더니 결국 ‘십일조 폐지 운동이 곧 개혁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오늘 이 지경까지 몰고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절제되지 못한 명예욕, 성욕, 인간의 본능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사정없이 넘어진 목회자들이 홍수처럼 쓸려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뒤흔들어 댄다. 또한 근세에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사상이다.)

다음은, 생의 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영위하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헛점을 노려서 깊이 파고 드는 이단사설이 고달프고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하고 사냥질 해간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교계가 재앙을 만나게 된 원흉을 “십일조”에 두고 “개혁’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혹은 난도질하며 폄훼하기도 한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기독교 이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기독교계는 개혁되어야 한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거센 목소리가 질풍처럼, 성난 물결, 우는 파도소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거세게 불어친다. 다 옳은 말이다, 동의한다. 아무렴, 우리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안되고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자질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은 내가 개혁하자. 너와 나 우리 모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자.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방법론이 문제다. 

개혁(改革, reformation)을 먼저 알아야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이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개혁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은 무엇이며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제도나 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주먹 구구식의 개혁, 말만의 개혁은 분란만 일으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어오던 성경,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는 옷을 재단하기 전, 먼저 ‘패턴’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빌딩을 짓기 전 ‘조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상 물질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에 합당한 ‘패턴’이나 ‘조감도 (architecture)’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자고 호소하는데 그만한 ‘조감도’ 나 ‘잣대(Cannon)’가 없이 개혁하자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게다가 완전무결하다고 할만한 ‘척도’요 ‘잣대’(Cannon)이며, 인생이 나가야 할 여정의 지도(map)며, ‘조감도(architecture)를 훼손시키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일까? 변질과 개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현 교계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성도의 삶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종교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몇 구절을 변개시키고 잘라낸다고 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다.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개혁이다!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누가(who)?= 내가. 무엇이(what)? = 나의 삶, 나의 인성이, 어떻게(how)? =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기에, 성도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불리우지 않았던가? 프론티어(the frontier), 앞서가는 개척자선구자라고 불리우지 않던가? 우리는 앞서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 개혁, 그 시금석(試金石)
“1517년 어느 쌀쌀한 가을날 오후, 성경을 연구하던 어떤 작달막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 앞(지역 게시판)에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일련의 논제를 못으로 박아 내걸었습니다. 그는 장차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알려질 이 사건을 널리 퍼트릴 사람들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수도사(신부)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판매했던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독교권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던 로마 베드로 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황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분담금과 맞바꿔 버렸습니다. 교황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도미니칸 설교자였던 테첼(John Tezel, 1455-1519)이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가장 교활했습니다. 심지어 테첼이 여행 중에 불렀던 사중주곡조차도, '동전이 금고 안에서 원을 그리며 땡그랑 소리낼 때, 한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취향대로 '동전이 금고 안에서 소리를 낼 때, 교황은 더욱 부유해진다' 등과 같은 유사한 곡들을 남겼습니다.- JuNick님의 댓글 중

루터가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 루터의 개혁은 완벽하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일게다. 그렇다면 그 루터가 외친 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는 개혁이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루터의 종교 개혁 5대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이다. 그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개혁주의마을

개혁주의의 (튤립)이라고도 하는 5대 교리 역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리를 지지하자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무엇인가? 개혁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기에,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튤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기 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언젠가도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재론하건데,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성도)가 개혁을 하되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인간 자신이, 내가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생의 잣대가 되고, 천국가는 길의 약도가 되며,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고서야 어떤 개혁을 하고자 한들 그 개혁이 올바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십일조 낼 형편이나 믿음이 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구원과 십일조 상관관계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변질시키거나 빼거나 더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개혁은 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파묻혀서 진리를 외면하고 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개혁의 시금석을 저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있음에도 그 성경을 입맛대로 풀이하거나 가감하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말씀을 호도하는 것이 개혁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지구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고, 양복 재단사가 '패턴'없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없고, 성도에게 훼손된 말씀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쓸모 없는 휴지로 만들고서야 어찌 그분의 낯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 그 흘린 피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근간이요,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리는 더욱 위헙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가 진정한 개혁을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힘들지라도 성경 말씀에 내가 순종하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혁이요, 성경이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진리는 사수되어야 한다!!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 10-11) 

 


 

 

글: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진실보다 아름다운 거짓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무엇하나 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넘쳐 흐르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런 그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덮쳐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알 수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지요.
그렇게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남편은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러 날을 골똘히 생각하던 남편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남편은 이웃에게 인삼
한 뿌리를 구해 그것을 산삼이라고 꿈을 꾸어
산삼을 구했다고
아내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남편은 말없이 잔뿌리까지
꼭꼭 다 먹는 아내를 보고 자신의 거짓말까지도
철석같이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삼을 먹은 아내의 병세는 놀랍게도 금세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아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된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미소를 띄우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는 인삼도 산삼도
먹지 않았어요.
당신의 사랑만
먹었을 뿐이에요"

세상에는 진실보다
더 아름다운 거짓이 있습니다.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습니다.

높이 있는 사람보다
깊이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보다
배려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
부유한 사람보다
풍성한 사람,
성격이 보이는 사람보다
인격이 보이는 사람.
엄격한 사람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더 좋습니다.

비교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좋은 것만 바라보며 가끔 주위도 돌아보는
넉넉한 여유속에 모든 일들이
형통으로 담겨지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입니다


♡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펌글

🍎내 앞에 멈춘 것들을 사랑하자

싫다고 떠나는 것,
멀리 있는 것을
애써 잡으려 하지 말자.

스쳐 지나간 그리운 것에
목숨 걸지도 말자.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욕망이든, 물질이든
흐르는 시간속에 묻어두자.
지금 내 앞에 멈춘 것들을
죽도록 사랑하며 살자.

오랜 시간이 흘러 나를 찾았을 때
그때도 그들이 못 견디게
그리우면 그때 열어보자.

아마도 떠난 것들,
그리운 것들이 순서대로
서서 나를 반겨주리니.

그때까지 미치도록
그리워도 시간속에 묻어두고
지금 내 앞에 멈춘 것들에
몰입하며 죽도록 사랑하며 살자.

펌글

기독교는 강성 애국이다

행2장 (글롯사와 디알렉토스)

(행 2:1-5) 오순절 날에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는120문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던(창11:1) 인류의 언어 체계가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구음의 언어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빼앗기고 흐트러지게 됩니다.(창11:7-8) 이렇게 빼앗기고 흐트러졌던 인류의 언어가 하늘의 언어로 회복되는 때라. 요엘2:28에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이 있겠다 예언하신 요엘2장의 말씀의 성취가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행2장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들은 행2장의 방언을 영언이라 부름니다.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였던 (창11:1) 시점에서 창2:7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곧 (창11:1)의 언어가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시던 동일한 하늘언어였음이 확인됩니다. 이로써 곧 (행2:1-5)방언을 곧 영언(하늘언어)이라 추리해 낼 수있는 근거가 됩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잃어버렸던 인류의 하나였던 언어 체계가 행2장의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늘언어, 영언이 회복되는 사건이라 주장한다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겠는지요?

행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방언의 원어는 글롯사 즉 ‘혀’ tongue, 언어 language라는 의미로 방언은 혀에서 나는 소리, 혀에서 발생하는 언어라는 의미 입니다.

6 절에는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여기에서 “듣고 소동하여” ‘듣다’의 원어의 의미는 디알렉토스, 들려 오는데로 들었다 하는 의미 입니다. 즉 혀에서 글랏사로 말한 방언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듣는이의 귀에 각각 다른 언어 디알렉토스로 들렸다는 의미 입니다.

글롯사와 디알렉토스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글롯사)
1. 방언을 본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2. 방언을 외국어 말로 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을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던 하늘 언어(영언)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디알렉스토)
A. 혀에서 방언을 말하는 대로 들렸다.
B.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다른 언어, 또는 하늘 언어로 들렸다

다음과 같은 6가지 형태로 방언으로 말하고 들릴 수가 있다

1A: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본국어로 들렸다
1B: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2A: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외국어로 들렸다.
2B: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3A: 영언 방언을 말 한대로 영언으로 들렸다.
3B: 영언 방언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본국어로 들렸다.

120문도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국어와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자 오순절 날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모여 온 디아스포라와 현장에 있던 본토인들에게 각각 자기언어로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던 현장에는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 와 얼굴을 보이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올라 온 사람들을 나라별로 세어보니 대략 17개국의 사람들과 본토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7개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들에게 각각 자기나라 말로 방언이 들렸다.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나라 외국어로 들렸으므로 오순절의 방언은 순전히 외국어 언어였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이 다만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들리는 각 나라의 방언이었다면 디알렉토스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오순절의 마가 다락방 주위에는 본토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모든 방언이 외국어라면 오순절 날에 본토인들에게 유대인 언어로 들렸던 본토 방언은 영언이 아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하는 방언 글롯사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방언,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모든 언어일 수도, 하나님의 언어인 하늘언어 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의 언어이든지, 하늘의 언어가 디알렉토스로 들리는 방언소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 땅과 천상의 어떠한 방언으로도 들릴 수가 있습니다.

강성 애국은 기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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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만드는
Seven-Up

나이가 들어서 멋있고도 당당한
대접을 받으려면
최소한 일곱가지 정도는
지키며 살아야 한다네요.

첫째🌿 클린업
(clean up)
몸을 항상 깨끗하게 하고
생활 주변도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네요!

둘째🌿 리슨 업
(listen up)
자기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 말을 듣는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네요!

셋째🌿 샫 업
(shut up)
가능한 입을 다물고
가능한 한 말을 아껴야 한다네요!.

넷째🌿 드레스 업
(dress up)
옷은 날개라네요.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입지 말고
당당하게 잘 차려
입어야 한다네요!

다섯째🌿 쇼우 업
(show up)
자기를 적당히 노출시켜야 한다네요.
일이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양하지 말고, 가능한 한 참석해서
사교적인 인간 관계를 한다네요!

여섯째🌿 오픈 업
(open up)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자기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
중요하다네요!

일곱째🌿 기브 업
(give up)
세상 것들에 너무 미련과 집착을
두지 말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네요!..

🔹세상은 사필귀정
🔹인간은 역지사지
🔹인생은 인의예지신

언제나 웃음 기쁨 보람으로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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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대학 재활과학 및 기술학과 가현욱(46) 교수가 7월 8일 주일 뉴욕어린양교회(박윤선 목사)에서 특별집회를 열었다. 요한복음 15:5-6를 본문으로 “붙어 있어야 답이 보입니다”라는 제목의 간증으로 오전에는 한인 회중들을 위해, 오후에는 청소년과 영어 회중들을 위해 신앙도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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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영어 회중들을 위한 집회
 

가현욱 교수는 시각장애인 부모에게서 자신도 선천성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직업 없이 거리에서 지내던 부모님이 돌보기 힘들어 여섯 살 때 고아원에 보내진다. 열심히 공부하려 했지만 공부를 포기하고 물리치료사로 일하기도 했다. 가현욱 교수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15년이나 교회를 다녔지만 “할렐루야”라고 할 때 “아멘”이라고 답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다가 주일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외우다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공부한 결과 연세대 공학과에 입학하여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피츠버그로 유학을 온 후 시각장애인용 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던 말라 죽어가던 시각장애인을 공학박사로 만드시고, 미국대학에서 연구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같은 아픔이 있는 장애인들과 노약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가현욱 교수는 “저의 불굴의 의지가 아니다. 탁월한 지성이 아니다. 저는 이미 장애에 굴복했던 사람이다. 혹시 저를 어디가서 소개할 일이 있다면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라고 절대 소개하지 말라.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들으시면 섭섭해 하신다. 그렇게 된 유일한 이유는 말라죽어가던 내가 생명나무 되신 그리스도에게 붙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리고 듣게 하신 주의 말씀과 깨닫게 하신 주의 은혜를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을 들여 최선을 다해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을 뿐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찬양했다.

 

가현욱 교수는 “천국가면 하나님이 ‘너는 어떻게 살았니?’라고 물으실 것이다. 이런 일도 했고, 저런 것들도 만들었고, 박사학위와 교수 등은 자랑이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한 것도 아니며, 그것들은 열매도 아니다. 단지 잎사귀일 뿐이다. 물론 나무에는 광합성을 하고 양분을 만들어 그것으로 열매를 맺게하는데 잎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릴 열매는 아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헛것이다. 그런 것을 내놓을 수 없다. 내가 했던 어떤 일을 가지고.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지고 했더라도 그 속에 악한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이어 “그러나 한 가지는 말씀드리고 싶다. 저의 믿음 없음과 저의 불순종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낭비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저를 인도해 주셨다. 그것이 주님이시다. 내 인생은 오직 주님께서 인도하셨다. 그것 한 가지이다. 혹시 제 장례식에 오실일이 있으면 <예수 인도하셨네> 찬양을 불러달라”며 집회를 마감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 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 서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 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 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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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펌" 참고하세요)
"여호와의 증인, 인간사회를 ‘사탄 세상’ 규정… 국가 의무 거부"

헌법재판소가 지난 28일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종교적 병역기피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결정하면서 여호와의증인 교리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병역거부자의 99.2%가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가르침이 병역을 거부토록 했을까. 이들은 헌재 결정 이후 “군 산하 대체복무는 안 된다”며 집총거부와 병역거부에 이어 대체복무 기관까지 입맛대로 요구하는 등 국가와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여호와의증인은 그들의 책자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에서 인간 사회를 ‘사탄의 세상’으로 해석한다. 사탄의 세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로 ‘정부’와 ‘상업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사탄의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 악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1일 “병역을 거부하고 반국가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이 교리적으로 정부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사탄의 권세를 상징하는 국가권력을 따르지도, 국가 의무에 복종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탁 교수는 “그들에게 참된 정부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뿐”이라며 “이 왕국은 마지막 때에 세상 정부를 대체할 것이며 이는 모든 지상 국가들의 전복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국가(國歌)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수혈 거부 등도 여호와의증인이 갖고 있는 반국가적·반사회적 면모를 드러내는 대표적 특징들이다. 이들의 반국가적 태도는 헌재의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 후에도 확인됐다. 여호와의증인 관계자는 29일 한 언론을 통해 “대체복무 기관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라며 “군 산하에 있어서는 안 되고 순수 민간 대체복무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태도는 여호와의증인이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여호와의증인은 무엇을 믿습니까’와 정면 배치된다. 이들은 이 글에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의 권위를 존중한다”며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납부하며 공공복지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협조한다”고 명시했다.

여호와의증인은 병역거부 등 국가 체제와의 갈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여호와의증인을 ‘급진적 활동과 연계된 단체’로 규정해 법인 해산과 활동 금지 조치가, 스위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호와의증인) 서적 전시대 설치 및 포교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C T 러셀에 의해 시작된 여호와의증인은 1872년 창립된 ‘국제성서연구자협회’가 전신이다. 삼위일체를 거짓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예수는 피조물에 불과하며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가르친다. 1914년 예수가 영으로 재림했다고 주장한다.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간의 영혼은 사망하면 끝난다고 가르친다.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73841

7월 12일(목) 과천의 법무부 앞에서 [국가인권정책 기본 계획] 폐지를 요구하며 길원평 교수와 염안섭 원장이 삭발을 단행하였다.

▶삭발 후 발언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염안섭 원장


▶삭발 직전의 모습

NAP 폐지하라
법무부 성평등 정책 반대한다!

▶ 삭발후 발언하고 있는 길원평 교수
▶함께한 시민들도 두 사람의 삭발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또한 전국 328개 대학 3207명의 교수들은 잘못된 국가인권정책 기본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는 전면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을 반대하는 국민연합'은, "현 정부의 국가 인권정책으로는 혼란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인권정책으로 역차별 받을 차례는 바로 당신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누구라도 양심 선언만 하면 군대 안가도 되는 나라인가"라고 반문하였다.

△함께한 시민들과 활짝 웃고 있는 염안섭 원장(가운데 붉은셔츠)

성명서는 현정부의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 계획'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언어 오해, 그들의 잘못된 성경해석*****

<“아들”의 뜻>
성경에 기록된 “아들”의 뜻은 문자 그대로 “아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성경을 떠나서라도 아들은 아들이다.
아버지와 똑같은 아들 말이다.
사람의 아들이면 사람, 소의 아들이면 소, 돼지의 아들이면 당연히 돼지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아들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래 뜻이다.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사상도 마찬가지다.
“아들”이란 “아버지 안에서 나온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어(語)에는 할아버지니 조상이니, 손자, 자손이란 단어가 없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벤”이고 ‘아버지’는 “아브”이다.
히브리사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이 “하나”라는 의미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다 “아브라함의 벤(아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인 자신들이 “하나”라고 믿는다.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옛날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들어 있었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들도 함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민사상이다.

<아들임을 주장하시는 예수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주장하신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사상에 의하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히브리사상에 따라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하나라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이겠는가?
바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뜻이요, 자신이 하나님과 같다는 뜻이요 자신이 곧 하나님, 아들 하나님이라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한 것이다.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을 읽어보라.
얼마나 여러 번 예수님은 자신이 아들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계시는가?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이 심판주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또 보여 달라 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친다.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고 하신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돌로 쳐 죽일 일이다.
“이 사람아, 큰일 날 소리 말게. 나더러 하나님이라니!” 했어야 옳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신다.
심판을 할 능력(하나님과 동일한 전지전능, 초월성)이 없다면 맡긴다고 맡겨지겠는가?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이 없으시다면 주신다고 주어지겠는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삼위일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인가?
하나님의 이름이면 됐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족하단 말인가?
왜 건방지게(?) 아들의 이름을 끼워 넣느냐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라.
영어성경을 봐도 좋다. 헬라어 원어성경이면 더 좋다.
“이름”이 단수로 써져 있는가, 복수로 써져 있는가?
왜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따로따로 말하지 않고
또는 “이름들”이라고 복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단수인가?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합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주체로 지칭하고 계신 것이다.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뜻인 것이다.
바로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 사도들의 고백, 예수님은 하나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아들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본체, 곧 본질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사람의 모습, 종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하고 복종하시는 성구들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보다 못 하다, 낮은 존재다,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보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호와의 증인 분은 좌측에 여호와, 우측에 예수라고 써넣고 여러 가지를 늘어놓고 비교를 하면서 예수님이 열등하신 분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로마서 9장 5절을 보라.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멘”으로 강조하면서 밝히고 있다.

디모데전서 3장 15-16절을 보라.
“......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디도서 2장 13절을 보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직접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예수님>
생각해보라.
누가 감히 하나님 아닌 자에게 영광을 돌리는가?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허락하시겠는가?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지 자기가 가로채서 받을 수 있겠는가?
“아무에게도 영광과 찬송을 주지(빼앗기지) 아니 하시겠다” 하신 하나님 아니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앞에 엄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그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음에도 그 엄위하신 모습과 영광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이 죽었다가 산 자, 곧 예수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일곱 뿔과 일곱 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어린양으로 나오시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단이다.
도무지 삼위일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인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유일신, 한 분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그 정체가 무엇인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해답을 “미가엘 천사”에서 찾았다.
성경 이곳저곳을 끌어다 꿰어 맞추어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천사에게는 신성이 없다.
신성이란 영어로 Divinity, 곧 “하나님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성을 확대해석하여 천사도, 마귀도 귀신도 신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한자어의 귀신 신(神)자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성(하나님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신 분은 에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말할 것이다.
미가엘 천사장을 하나님이 높이셔서 하나님으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었다고......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미가엘 천사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설사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지위를 양위 받았다 쳐도 자신을 가리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어찌 만들어진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어찌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자리를 이어받겠는가?
어찌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신 차려라. 당신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천사로 만들어 모독하고 있다.
그러고도 구원이 있을 줄 아는가?

.
(2010년에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입니다)

엄밀히 따져볼 때, 

신학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놓고보면, 

"중립적 가치"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신학 자체를 

'절대선'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신학을 

'절대선'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말씀안에 신학이 종속되는게 아니라,

신학안에 말씀이 종속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신학을 공고화 하기 위해,

되려 말씀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고,


그 신학의 틀에서 벗어난 것들은

모두 반진리, 비진리 취급을 당하게 되고,

결국 신학 자체가 

절대진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진짜 중립적 가치에 있는 신학이

진리에 맞는 수단으로 적용되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 경외함을 최우선에 두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속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자세가 

중심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중심이 바로 서 있다면,

신학은 내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선한 '수단'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기가 배운 신학이 

말씀안에서 

어떤 오류가 있고 문제가 있었는지를,

나중에 성령님과의 교제 속에서 

진리에 맞게 교정될 수도 있고,


건강한 영적상태를 유지하며 

믿음을 더 성장시켜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중심에 

그런 영적 기반이 깔려 있지 않고

오로지 신학 자체가 

절대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하나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고

성령의 역사가 아닌, 

그 신학적 지식을 절대기준 삼아 

하나님의 뜻도 다 제끼고, 

성령의 역사도 다 제끼고

되려 진리와 상충되는 

미혹된 흐름으로 가도록

신학을 마귀가 역이용해 

악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자칫 신학을 통해서 

맺어질 수 있는 최악의 열매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이런 최악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든다.


신학에 매몰되어 버리면,

현실적으로 풀어지는 문제에 있어서

영적인 접근이 전혀 안되기 떄문에, 

분별 자체가 되지 않는다.


WCC 총회현장에서 그 참담한 실체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냈음에도,

이게 영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식 자체가 전혀 되지 않기에,


자기 신학 지식만 가지고서,

WCC의 태동은 이랬고,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는,

말같지 않은 소리나 하고 있고...


휴거도 없고, 7년대환란도 없고,

이런건 다 세대주의자들이 만든 교리고,

이스라엘은 이미 구약에서 관계가 끝났고,

그 언약은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하나님 마음과 전혀 상관없는 소리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훗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신학이란 간판 달고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며, 

미혹된 흐름을 따라가며,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얼마나 그 미혹을 전염시켰는지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신학'이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행태다!



글: 엘샤다이

얼마전 어떤 목사님과 

WCC 관련 대화를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된 것들이 있었다.


WCC에 가입되어 있는 교단에 속한 목사님들과

WCC 관련 문제점에 대해서 말하면

그래도 많은 목사님들이  

WCC가 종교다원주의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신다.


하지만 교단의 공식 입장과 별개로 

자기 개인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분들 중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은 

만약 어떤 목사 개인이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면 

그것은 배도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들은 

개인이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갖는 것은

확실한 배도라고는 하시지만 특이하게도 

WCC 같은 종교다원주의를 

공식 입장으로 갖고 있는 단체에 

교단 자체가 가입 되어 있는 것은 

크게 문제로 여기시지 않고

그 교단에 속해 있더라도 

개인들 신앙만 똑바로 있다면 문제 없다는 것이다.


교단 차원의 입장이 아무리 비성경적이고

성경과 상충되도 

자신 개인만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국 마지막 때 최종 배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그럴까?

한번 생각해보라.


교단의 권위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누구로 부터 부여 받는 것인가?

목사의 권위는 누구로부터 부여받는 것인가?


말씀 아니었는가?


교단의 권위가 말씀보다 높을 수가 있는가?

말씀을 거스르거나 어길 수가 있는가?


교단들이 왜 생겨났는가?


만약 교단이 아무리 비성경적이고 문제가 있어도

그안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들이 

그 비성경적인 교단 입장에 반대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가?


생각해보자.


정상적인 개신교인이라면

카톨릭은 사이비 이단 혹은 

배도한 음녀교회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왜 그런가?

심플하다. 

카톨릭의 성경을 벗어난 비성경적 공식 입장들 때문이다.


이 분들의 논리대로라면 

카톨릭이 아무리 비성경적인 입장들이 있었어도

그 안에 소속 된 개개인들이 

동의 안하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애시당초 카톨릭에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분리될 필요도 없지 않았던 것 아닌가?


(물론 종교개혁자들이 

처음부터 카톨릭에서 분리해 나가려 한 것이라기 보다

카톨릭이 회개를 거부하고 그들을 내쫓은 것이라고 봐야지)


카톨릭의 공식 입장은 

비성경적이라 할지라도

그것과 별개로 카톨릭에 속해 있는 개개인들이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성경대로 잘 믿으면 되는거지

뭐가 문제이겠는가?


게다가 그 카톨릭 교단이 워낙 크니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성직자들이 있지 않겠는가?


카톨릭의 비성경적 입장을 

개인적으로까지 동의하는 배도자들도 있고

그 비성경적 입장에 동의 안하는 

'순결한(?)' 성직자들도 있으니

카톨릭에 속하였다고 해서 

이단자 혹은 배도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교만한 태도이고 

하나님 앞에 '벌받을 짓'이겠는가?


그런데 왜 종교개혁을 한 믿음의 선배들은

굳이 카톨릭에서 구별되어 나왔어야 했을까?


카톨릭안에 그냥 머물지 

왜 굳이 카톨릭에서 '연합'을 깨고

'분열'을 일으키고 나와서 

기어이 개신교 교단들이 만들어지는 

'분열의 열매'를 맺은 것일까?


그리고 아예 결론적으로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카톨릭에 

다시 흡수되게 된다면 굳이 카톨릭을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카톨릭의 공식 교리 중에는 비성경적인 것도 있지만

나름 성경적인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카톨릭 10계명중 첫째 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다.

이 것만 보면 카톨릭도 고백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아니겠는가?

말은 오직 예수인데

행동이 종교다원주의일 뿐이다.


그러면 카톨릭안에 속하여서도

지금처럼 개개인 차원에서만 비성경적인거 동의 안하고

마음 순결히 잘 지키면 되는 것 아닌가?


'연합'도 잘 유지되고 

시끄러운 '분열'도 안일어나고?


이러니 이 말세에 '연합' 명분으로

구별됨을 사탄이 조장한 '분열'로 죄다 싸잡아 매도하면서

카톨릭으로 하나되자는 말이 먹히지..... ㅠㅠ


종교개혁이 사탄의 분열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유명 개신교 목사들이 어떤 논리로 그러는지 

오늘 더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ㅠㅠ


그들은 '선두주자'로서 

자기 교단 차원을 넘어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확장해서 

이 미혹의 논리를 적용했던 것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자기 교단과 한국 교회 차원 안에서만으로 

국한되게 그 논리를 적용 중이신 목사님들은

아마도 본인들이 하시는 말씀이 진정 무슨 뜻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없으셔서 

교단의 비성경적 입장과 개인의 신앙을 별개라고

생각하시는 걸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본인은 열심히 목회하고 

신앙이 순결하니 괜찮다고 생각하시지만

이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미혹으로 인도하는지 못보시는 것 같다.


눈을 열어주시길 기도한다.


이 분들 뿐 아니라

이분들의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 보고

그 미혹들을 받아들여 배도의 길에 들어서는 

영혼들이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 하다.


사탄 이 씹어먹을 놈이 

이렇게 체스를 잘둔다


생각할때마다 안타까움에 

열받고 속이 훼까닥 뒤집어진다... ㅠㅠ


하지만 소망은

그래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분들은

결국 들을 귀 갖고 이 전세계적 배도의 

흐름에서 다 구별된다는 것이다.


주님 곧 오신다.

단장하자.



글: 박성업 선교사님 

(https://blog.naver.com/up0124/221312078568)

10. 여호와의 증이들이여, 당신의 아들은 개, 돼지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천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 뜻이 전혀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아들”은 만들어진 아들, 양자 삼은 아들이다.

그들은 예수는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 최초의 피조물은 미가엘 천사장이고 미가엘 천사장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사를 만들어서 아들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과 다른 종류의 아들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사람인데 아들은 사람이 아닌 아들 말이다.
혹 당신들은 개나 돼지를 데려와서 뛰어난 이름을 주고 당신의 아들로 삼았는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주셨을 것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
왜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당신과 똑같기 때문이다.
당신에게서 나온 당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개나 돼지를 아들삼고 귀여워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당신들은 하나님이 천사 한 마리를 붙들어다 아들로 삼으셨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다른 종류라고 말하는가?
당신에게는 당신과 똑같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정작 자신은 자신과 같은 아들이 없어서 천사 따위를 만들어서 아들로 삼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후사로 삼으셔야 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천사를 데려다가 아들 삼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능멸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여, 어찌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여호와의 증인, 당신들은 욥기 1장을 들고 나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욥기 1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의 하나님의 권속들을 폭넓게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이 옳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무수히 많아야 하고 “독생자, Only Begotten Son"이 수없이 많아지는 모순이 생길 것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아들은 아들이어야 한다.
히브리어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아들을 뜻한다.

천사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라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 땅에서 우리가 부리는 것은 동물들이다.
가축들이다. 소, 말, 개, 돼지........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은 천사들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네 생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
독수리 같고, 소 같고, 사자 같고,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천사들. 
그들은 날개를 갖고 있다.
날개를 갖고 있는 그룹, 스랍, 네 생물......
천사들은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부리는 동물들인 것이다.

666을 뭐라고 하는가? 짐승의 수라고 한다.
왜 짐승이라고 하는가? 왜 용이요 옛뱀이라 하는가?
하늘의 짐승인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땅에 내려온 것이다.
하늘짐승이 땅에서 하나님 노릇 하려는 게 사단이요 마귀들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여.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잘못인지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라니!
이것은 당신의 아들을 개, 돼지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능멸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이러고서 구원 받을 생각 말라.

.
(2010년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입니다)

김정은의 木馬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성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적이 좋아하는 선물로 유혹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아군의 희생이 따르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후자는 적이 믿기만 한다면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할 수 있다.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다. 고대 도시국가 트로이는 그렇게 망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보면 그리스군은 트로이 성이 좀처럼 무너지지 않자 전략을 바꾼다. 평화의 선물인 양 커다란 목마(木馬)를 성문 앞에 남겨두고 떠난다.
병사 한 명을 탈영병으로 위장시키는 덫까지 놓는다.
트로이군에 잡힌 병사는 “목마는 신에게 바치는 선물”이라고 거짓 자백을 한다.
평화의 덫에 걸린 시민들은 전쟁이 끝났다며 축제를 벌인다.

트로이에는 그래도 의인이 있었다. 제사장 라오콘이다.
그는 군중을 향해 “목마는 적의 계략이다.
목마에는 무서운 음모가 담겨 있고 목마의 뱃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다”고 외쳤다.
제사장의 경고는 무시되고 결국 목마는
성 안으로 들어온다. 그날 밤 목마 속의 적군들이 성문을 열어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만다.
‘승리의 상징’이던 목마가 ‘멸망의 상징’이 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의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선물은 평화일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의 평화는 목마일 개연성이 짙다.
미국의 압박에도 핵 폐기 일정을 안 내놓고 버티면서
세 번이나 중국으로 달려간 연유를 생각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피붙이나 인민들을 서슴없이 죽인다.
그런 독재자가 자기 인민에게도 주지 않는 평화를 남쪽에 보장해줄 리 만무하다.

이런 간명한 이치가 현실에선 외면당한다. 김정은의 목마에 한·미 동맹과
우리의 안보관은 풀어지기 시작했다. 한·미 군사훈련이 중단되고 주한미군의 위상까지
흔들리고 있다. 국민들은 북핵엔 눈을 감고 개마고원 관광을 떠날 꿈에 부풀어 있다.

적이 보장하는 평화는 불안하다. 아무리 문서로 서명하고 약속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언제든 깨어질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수천건의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나 대개 2년도 못 가 전쟁으로 이어졌다.
평화는 그것을 지킬 힘을 지녔을 때에만 보장된다.

중국의 송을 침공한 금 태종은 송나라 결사대의 저항에 막히자 평화를 제의했다.
송나라는 금 황제에게 황금 500만량 등을 바치고 평화조약을 맺었다.
금의 군대가 물러간 뒤 송나라에는 평화론자들이 득세했다.
2년 후 금은 무장해제된 송을 다시 침략해 황제를 죽이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일본 오사카성의 성주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꾐에 속아 멸족을 당했다.
이에야스는 세 겹의 수로로 둘러싸인 오사카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때 꺼낸 카드 역시 평화였다.
“이제는 평화롭게 삽시다. 평화의 상징으로 성의 수로부터 메웁시다.”
히데요리가 밤을 새워 수로를 메우자마자 적군이 쳐들어와 성을 점령했다.
성주의 일족을 참살한 이에야스의 일성은 이러했다. “적장의 말을 믿는 바보는 죽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위기의 경고음을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자칫 전쟁주의자나 극우주의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누군가 거짓 평화의 위험을 알리면 “그럼, 전쟁을 하자는 거냐”고 팔을 걷어붙인다.
대통령마저 민심에 동떨어진 행위로 비판하는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형국이라면 목마를 경계하는 제사장의 목소리는 미친 소리로 치부될 수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6개국 재상을 지낸 소진이 스승인 귀곡자에게
“어떻게 하면 역사 발전이나 정치 현실의 전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냐" 고 묻자 스승이 대답했다. “뒤쪽에서 보아야 하느니라. 세상의 모든 사리가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변화에 따라
전개되어 가느니라.” 우리 국민이 견지할 안보 자세가 아닐까 싶다.

부디, 목마의 겉모습만 보지 마라. 목마 속에 숨은 살의를 주시하라.
김정은의 뱃속을 보라.

 -세계일보 배연국(논설실장) 칼럼(2018.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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