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34: 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그 곳에 성지순례를 가보지 못 했지만 어느 글에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아침 6시에 해 뜨는 광경을 보려면 새벽 3시에 호텔을 출발해야 한다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내산이 성경의 그 시내산인지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 시내산은 상당히 높아서 올라가는데 3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이야기지요. 지금은 길이 나 있지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는 길이나 있었겠습니까? 그 산을 80세 넘은 모세가 무거운 돌판 두 개를 안고 넘어지고 자빠지며 기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돌판을 깎아 만드는 것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당한 크기의 넓적한 돌을 골라 찾아야 했을 것이고 정과 망치로 두들기며 밤새도록 땀 흘리며 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산꼭대기에 도착하기 위하여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서서 험한 산길을 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 그런 의문을 가져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오리지널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린 것은 불경스럽고 지나친 행동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 말씀 않으시고 모세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이 주신 돌판은 소용없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계약)도 무효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아침 일찍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명하십니다. 왜 처음처럼 하나님이 돌판을 직접 주시지 않고 모세더러 깎으라 하셨을까요? 처음엔 하나님이 주셨지만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다음엔 인간이 스스로 깎고 다듬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자 해도 주실 수 없도록 타락한 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두들기고 쪼개고 깎고 다듬어야 합니다. 죄인 스스로 겸비하여 마음을 쪼개고 깎고 울며 통회하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깎은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 그 앞에서 하나님은 반포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배반하여 죄로 더러워지고 부패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부르시고 그 피로 죄를 씻으라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깎고 울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제 하나님께서 돌판이 아닌 우리 마음판에 말씀을 새기시기를 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그 마음판에 말씀이신 주님을 새긴 자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린도후서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십자가의 주님을 새겨야 할 곳은 돌판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우리 가슴,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들고 두 돌판을 그 법궤에 담도록 하셨습니다.
조각목 법궤를 황금으로 싸고 지성소에 두셨으며 그룹천사가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성소 안의 법궤와 그 안에 담긴 돌판을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의미만이 아닙니다.
조각목은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은 보잘것없는 나무요 돌은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흔하디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듬은 조각목 법궤와 깎아서 말씀을 새긴 돌판은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깎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새긴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황금으로 싸서 영화롭게 하시고 지성소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시고 그룹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그 자녀들을 이같이 귀하게 여기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깊이 새기려면 우리의 모나고 거친 마음을 두드리고 쪼개고 깎고 다듬어서 끌어안고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야 합니다.
이른 아침 거룩한 시간에 홀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깎고 다듬은 돌판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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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단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 엡 2:2>로서 '자기권세'를 지키기 위해 공중 아래 사는 자들을 유혹하고 협박합니다. 바로 <세상 풍조를 따른 자들>이 되도록 합니다.


세상 풍조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등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채우는 쪽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덫에 올려 놓은 미끼처럼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자들을 크게 몇 가지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첫번째 "1차 그룹"은 <스스로 좋아서 세상풍조>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사단을 따르는 자들로서 좋고, 하고 싶고, 뒤지고 싶지 않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풍조를 따르는 맨" 마지막 그룹"은 <불안과 두려움, 위협>이 있기에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의 대다수가 넌크리스챤들이 아니라 교회당을 다니는 기독교인들로 가득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공중권세를 포기해야 하기에 사단은 절대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막습니다. 그래서 신랑되신 주님을 맞이할 <신부>와도 같은 성도들이 준비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맨 마지막 방법이 바로 불안과 염려, 두려움과 위협을 가하는 것인데 이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살아가고 있는 모든 영역들(공중 아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될수록 "깨어 있음"이란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의 특징이며 진짜 그리스도인, 리얼 크리스챤의 대표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에 세상 풍조를 따르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깨어 있음으로 이를 거역하고 돌파하는 자들,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자들로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오늘 하루도 "깨어 있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사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힘겨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세상 풍조를 거스르기로 작정한 자>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 24:6)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라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예수님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내 삶의 이유이기에 신부요 용사된 자로서 깨어 기도하며 오늘도 복음을 살아냅시다.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사랑>으로 일어섭시다. 마라나타!



글: 김영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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