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34장 13-14절)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찌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모세가 깎아 만든 돌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구름을 타고 강림하셔서 은혜를 베푸실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돌 같은 우리 마음을 쪼개고 깎은 마음판을 끌어안고 올라갑시다. 
시내산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갑시다. 
거기에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거기에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하신 이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깎은 돌판 두 개를 안고 올라간 모세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옛날(창세기 15장)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송아지와 염소를 쪼개라(브릿트) 하셨고 하나님은 그 사이를 지나시며 쪼개셨습니다. 언약, 곧 ‘브릿트’를 ‘브릿트’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언약‘과 ‘쪼개다’라는 말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언약은 원래 혼자서는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은 쌍방이 함께 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약속하시고 이루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시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쪼개는 브릿트를 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언약의 브릿트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을 주시면서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쌍방계약의 형식을 갖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존재인지요? 
그 간단한 선악과 먹지 말라는 약속도 못 지킨 죄인의 습성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남아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 하고 있습니다. 

돌판 두 개를 들고 올라간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나타내지 않으셨던 놀라운 일들을 모세와 백성들에게 행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모세와 백성들이 지켜야 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가장 처음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테니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헐고 깨뜨리고 쪼개며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질투”, 히브리어로는 ‘카나’입니다. 그리 어감이 좋은 단어가 아닙니다. 
남을 시기하거나 남녀간 사랑싸움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질투’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시며 자신의 이름을 “질투의 하나님, 엘 카나”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라니요. 이 말씀을 듣는 모세가 얼마나 황공하고 민망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성경을 읽어나가노라면 하나님의 질투를 나타내는 수많은 말씀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는 시기나 욕심, 혹은 심술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전부를 걸고 사랑하시는 존재들인 우리를 향하신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선언인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금방 우상숭배로 돌아가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희미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도 진노도 불같이 뜨거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할아버지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절대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지으셨고 불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정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요만큼만 사랑하자, 요기까지만 사랑하자, 하고 금을 긋고 한계를 정해놓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스톱도 될 수 없고, 제한될 수도 없고, 조절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님, 자매님,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그 사랑을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기에 하나님의 질투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량없이 사랑하는 우리가 다른 신이나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체면불구하고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다 하여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그 새파란 질투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깎고 쪼개어 양손에 들고 갈보리 언덕을 오릅시다. 
질투처럼 끓어오르는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피와 물로 다 쏟아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그곳에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크고 두려운 이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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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8:11절 말씀)

주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그날이 바로 오늘일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웹
상에 글을 기고하는 대부분의 필진이 모두 목사님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 이야기나 도깨비 이야기, 혹은 기복사상,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양 크게 확대시켜 궤변을 늘어 놓을지라도 이 말세지 말을 살아가는 성도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성도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입니다. 주님의 종들이라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가르쳐야 마땅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편견을 버리고 말씀에 굳게 서서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항상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래 전, 어느 블로그에 들어 가보니 (, 주님)이라는 필명으로 다음과 같은 댓글이 올라와 있어서 가슴을 앓고 기도하던 중, 주께서 밝히 보여 주시는 것을 나누려고 여기 퍼다 놨습니다.

 

(_플로리다 부흥은 밥 존스 목사님 릭 조이너 목사님 체안 목사님 존 아놋트 목사님 등 많은 목사님들이 주님의 임재 하심과 역사 하심을 증언하고 실제 집회 현장에서는 타드 밴틀리가 선배 목사님들에게 예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 받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늘에 구름 십자가가 나타나고 검은 독수리 3마리가 출현하고..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

 

여기를 보십시오. 타드 벤틀리가 선배 목사들에게 예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 받는 때에, 하늘에 구름이 십자가 형태로 나타나고 검은 독수리 3마리가 출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독수리입니다. 그 사람은 독수리가 주는 성서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그들의 안수 시간에 그 위를 맴돌고 있었다면 이것은 정말 벤틀리와 그의 선배?들이 말세에 일어날 거짓 선지자들이란 표식임을 성서 적으로 확실히 검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자 보십시다. 마태복음 24장은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신 주님의 경고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요? 거기에 무엇이라고 말씀을 했나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24:27-28절 말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라고 하신 말씀이 상징적 의미인 줄만 알았는데…, 문자적으로도 사실이 그러한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자들의 영과 교제하는 자들이기에, 독수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틀리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진리입니다!

 

2. 구름이 십자가의 표식으로 변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역시 주검의 표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 달리신 우리의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십자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주검의 표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 나타난 그 십자가가 꼭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극악한 모든 죄인들에게 내리는 형벌이 바로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십자가 중에서 우리가 신성시해야 할 십자가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고로 십자가 형태의 구름마저 나타났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는 “이 악한 거짓 선지자들을 보아라, 이들이 있는 곳에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검으로 이끌고 가는 주검의 영령들의 잔치 자리이니 조심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경고임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는 표식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3.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명 오, 주님께서는 벤틀리의 집회 장소의 특성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말씀이 결여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 ~카더라" 에 의존하는 분임을 알 수있습니다. 이 역시 말세지 말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의 표식일 뿐, 구원의 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24절 말씀)" 하고 경고해 주고 있으며 정확히 그런 사건들이 증표로 나타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 ~표적과 기사 + 말씀결여 = , 주검을 가져다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식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

 

작금의 사태를 보니,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프다 못해 메어집니다. 이 모두가 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이지 않고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고 부흥(인간적 욕심)에만 신경을 곤두세워 어느 교회가 부흥이 되고 있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어느 프로그램이 좋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다니더니 오늘에 와서 이런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론 적으로 같은 장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24:45-46)”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종들에게 충성과 불충성을 재는 척도는 "얼마나 큰 기적을 이르켰느냐? 교회를 얼마나 크게 부흥시켰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충성되고 지혜있게 생명의 양식을 얼마나 잘 나누어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명예심을 부추기며 사람의 교훈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다 두어 당신과 당신의 사역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사탄의 간악한 흉계를 간과하지 마십시오!!!

 

지금 사람이 많이 몰려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전주 율리아에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지요. 전주 율리아는 자신의 소변을 "율피"라고 은가루 금가루를 뿌린 후, 이것을 마시면 병이 났는다고 주님이 말씀했다고 속이니까, 신부님께서도 그 기적의 치유수 '율피'를 받아 마시드군요.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면 일어 날수록 더욱 피해야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쥐약 주위를 뱅뱅 맴도는 쥐가 제일 먼저 쥐약을 줏어먹지요. 안 그렇습니까?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배운다고 하십니까? 각종 프로그램에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없습니다. 교회가 나가야할 방향은, 첫째도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둘째도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는 것, 셋째도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 뿐입니다!

 

현대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입니다. 말씀 속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믿고, 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갈하지 아니하는 생수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 나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글/최송연

 

 

🍃자기 몸을 적당히 괴롭혀라
너무 귀하게 모시지 말라


"편안함을 추구하면
몸이 망가진다."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매어 놓는다고 한다.

묶어 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힌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하면서 본능적으로 대추를 많이 열도록 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도 그냥 편히 두면
급속히 쇠퇴하고
질병과 노화에 취약해진다.

좀 섬소하게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굽혔다 펴기도 하고 흔들어 주고

 문질러 주고 비틀어주기도 하여야
생기가 더욱 발랄해진다.

노자의 에는
이러한 논리를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으로 설명한다.

귀생, 즉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고,

섭생, 자신의 생을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선섭생자, 이기무사지(善攝生者, 以基無死地) -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은 죽음의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물질의 풍요와 삶의 편리함이
내 몸을 한없이 귀하게 대접하는 오늘날의 귀생이 오히려
화와 병이 될 수 있고,

내 몸을 적당히 고생시키는 섭생이 건강한 생을 위해 이롭다는 역설이 귀에 들어 온다.

"몸은 귀하게 여길수록
건강은 더욱 나빠진다."

명심 또 명심하세요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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