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명상센타의 성폭행 세션?



‘힐링’ 미명하에 수행자들에 가혹행위한 J명상센터
MBC 시사매거진 2580“성폭행 세션 문제 등 경찰 수사 중"


 
기독교포털뉴스 카카오톡 아이디: kportalnews
  

▲ 경남에 위치한 J 명상센터


MBC 시사고발 프로그램 시사매거진 2580이 한 명상센터에서 일어난 비정상적 ‘성폭행·학대’ 등의 문제를 2016년 7월 10일 다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경남 하동에 위치한 J명상센터


피해자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센터에서 수행하는 과정이 ‘지옥’과도 같았다고 폭로했다. 이혼의 아픔을 가졌다는 수행자에게 센터에서는 “당신은 ‘창녀 파동’으로 인생이 힘들다”며 “파동을 배출하고 회복하기 위해선 ‘성폭행 세션’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션을 진행하는 비닐 하우스에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이 피해자의 방에는 남자 1명, 여자 2명이 들어왔다고 한다. 죽비로 주요 부위를 찌르는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게 피해자측의 주장이다.

  

▲ 피해자들은 성폭행 세션이란 이름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수행자도 “센터측에서 부모님이 성폭행을 경험해서 너 또한 수치심이 있고 트라우마가 있다며 성폭행 세션을 진행했는데 학대 행위가 중단되지 않더라”며 “가해자 역할 하는 사람들도 수행자인데 그들은 이 세션을 수행법이라고 생각해 죄의식이 없었다”고 폭로했다.

  

▲ 두피를 절개할 때 사용했다는 예리한 도구


이외에도 이 명상센터에선 사람의 관념에서 나쁜 파동이 들어온다며 그 관념을 빼내는 수행의 방법으로 집단폭행·감금·신체 절개 등 상상할 수도 없는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죽비로 머리의 열을 빼야 한다며 정수리 때리기, 밧줄로 포승을 해 9시간을 묶는 감금 행위, 나쁜 관념을 빼내야 한다며 수행자들에게 칼을 나눠줘 두피를 절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절개 후에는 부항으로 피를 빼내기도 했다고 한다.

  

▲ 두피 절개 후 피를 뽑는 모습


  

▲ 치유를 위해 명상센터를 찾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피해자측은 영혼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명상센터에서 수행이란 이름으로 지옥과도 같은 억압과 공포감을 경험했다. 반대로 수행원을 관리·감독하는 디렉터들은 우월한 지위를 갖고 “(치유를 위해)내 얘기를 믿고 따라오라”며 치유라는 미명하에 강요·폭력을 행사한다는 지적이었다. 피해자들은 가혹·학대 행위를 당하고도 자신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는 자책감 때문에 문제점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일부 수행자 중에는 치유를 받으러 갔다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병을 얻어 입원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한편 피해자측의 입장에 대해 J선가측은 성폭행 세션은 정확한 명칭이 성트라우마 세션으로서 성적인 문제로 발생한 트라우마를 없애고 대응책을 키우기 위한 역할 극이었다고 반론했다. 집단폭행이나 밧줄 묶기 같은 경우도 강제성은 없었고 수행자가 요청했을 경우에 행해지는 역할극이었다고 반박했다.

  

▲ 설립자를 비롯해 전 대표 등이 경찰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


  

▲ J명상센터의 주요 관계자의 강연 모습


이 명상센터에 대해 경찰은 설립자는 물론 전 대표, 수행 마스터 등을 상대로 수사를 펼치고 있다. 혐의점은 약사법, 의료법 위반 외에 성폭행 문제 등이고 이 단체로 인한 피해자는 1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강경호 목사(한사랑가족상담연구소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MBC 시사매거진 2580의 J명상센터 고발 프로를 봤다”며 “문명이 발달할수록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명상·기수련·단수련 등 정신세계를 다루는 단체들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고 내다봤다. 강 목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단체들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명상센터나 기·단 수련원의 경우 종교성을 갖는 경우가 많고 현대인들의 상처나 치유를 불법적이고 왜곡적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까지 발생하는 선례가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단요가 스캔들에서 비판 보도된 이승헌 씨


한편 한국사회에 명상센터·기 수련 단체들이 끼친 충격적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2010년 1월 13일에는 SBS 시사고발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전남 광주의 ‘H수련원’에서 벌어진 집단 성관계·마약 등의 문제를 폭로했었다. 2010년 3월 6일에는 ‘단요가’, ‘단월드’, ‘단학선원’으로 알려진 이승헌 씨와 관련한 문제를 ‘단요가 스캔들’이란 제목으로 방영했었다. 힐링이란 미명하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치유·영성·명상·수련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훈련을 주의 깊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http://www.jesus114.org/?ckattempt=1


제자도와 복종운동


최근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가 신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로 많은 옛날의 장애물들이 무너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갈급함이 일어났다. 매일같이 기도와 성경공부란 목적으로 새로운 모임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모임들 중 어떤 모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가진 지도자가 없다.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전통적인 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바쁘든지,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상담하거나 도와주는데 유익한 오순절 경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훈련시키고 지도력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공인된 목적을 갖고 유명한 성경교사들이 목양, 제자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조장하고 있다. 옛적 충성으로부터 이탈된 많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인도해 줄 사람이 없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좋은 결과처럼 보이는 것으로 진공사태를 메꾸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 왔다. 파괴적이고 분파적인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경과 교회와 신자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과 연관해 이러한 운동의 주장을 조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성경


이러한 교사들 모두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행위에 대한 영감된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성경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고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의 매일의 필요와 문제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현재 말해진 말 즉 레마에 보증되지 않은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와 동등하다고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통역같은 성령의 은사가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과 격려 그리고 안내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사해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의도에 의해서 그 말들을 판단하는 대신에 선택된 구절을 영해하거나 비유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합리화 할 때는 위험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10 장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요한복음 10:1-6 에서 예수께서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적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림을 바꾸시고 평이한 말로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요 10:7,8) 또한 선한 목자와 같이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자 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든 사람이 문(door)인 목동(undershepherd)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목동이 절도와 강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을 빼앗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로부터 보호한다고 가르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목동이 그의 양을 평생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상당하고 안내하는 일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새로운 개종자가 누군가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며, 진리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지할 경우 그는 성경을 찾아보기를 그칠 것이며 거짓 교사에 저항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거짓교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그 해결책이 신자를 보호해 줄 인간 목자를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6:1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성경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굳게 서야 한다.(엡6:10-18)


요한복음 10 장을 더욱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예수께서 문이 되신 것 같은 의미로 어느 사람이 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모든 양의 문이시다. 참된양은 그리스도 외에 어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그를 알고, 그 분만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양들의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그 양의 음성을 듣고 안다. 이와같이 요한복음 10 장을 취하여 개종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인간 목자를 끼어 넣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인간 교사를 문으로 만들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교리를 억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목자들)이 양무리를 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늑대가 그 가운데로 들어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장로들이나 목동들 안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성경을 왜곡하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즉 그들은 얼핏 좋은 선생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자기를 좇는 자들을 늘리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할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목자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는 성령의 인도아래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교회

이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자세에서 볼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현존하는 교회와 목자들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성 교회와 목사들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어떻게 애쓴다 할지라도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목자제도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교단을 세우고 있다. 

이것과 일치하여 이들 중 어떤 교사들은 그들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은 더 이상 복음적이지 못하지만 이 지상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이 시대에 순수한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추구할 때까지 곡식 중에 가라지도 있게 마련이다. 다니엘서 2 장, 데살로니가후서 1 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이루어지기 전에 현재의 세상질서를 파괴하는 심판이 필요하다. 현 시대에 교회의 복음적 목적을 무시하는 이러한 후천년설의 주장을 피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관계에서 새로운 제자도의 질서에 대한 모형을 찾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유대주의 배경 안에서 행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안에서 교회의 모형에 대한 안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는 다양한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함께 교회안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선호하여 민주주의적인 자세가 내리막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는 것처럼 추측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사도들은 단지 그 자격요건을 말해 주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일곱명을 선택하여 뽑아줄 것을 부탁하였다.(행 6:3,5) 행 14:23 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안수하였는데(한글 성경에는 “택하여”라고 번역된:역자주) 안수에 대한 헬라어의 뜻은 “손을 들어 선택하다 혹은 뽑다”라는 의미가 있다. 고후 8:19 에서 “택함”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주어이므로 행 14:23 에서의 “뽑다”라는 말과는 같은 뜻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사가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에 대한 자격을 설정한 후에(딤 3:1-7 에서와 같이) 선거를 행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고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신약에서 한 가지 고정된 형태의 조직보다는 다양한 조직을 본다. 조직의 목적은 항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역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었을 때 그것은 관심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나바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조언을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주의해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그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의 권위 아래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둘 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바울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바나바와 다투었으며(행 15:36-41)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과 베드로와 다른 일로 인하여 다투었다.(갈 2:11-14) 그의 권위는 말씀이었으며 성령과 말씀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결례를 행하라는 야고보의 요청에 바울이 응한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행 21:17-26)

성경은 사랑 안에서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제이다. 성경은 또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계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벧전 5:3)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개종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돕는 자였으며 이 개종자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 기대 되었다.(고후 1:23,24) 베드로는 (벧전 5:5) 젊은이들이 순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모든 사람이 서로 복종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덧붙이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 위에 함부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각 사람이 사단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

신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 목자운동(Shepherding movement)의 경향은 성경을 지나치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으며 너무나 광범위하게 비유화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신자가 어리석은 양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는 극단적인 비유를 취한다. 성경에 신자는 양으로 비유되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를 인도하며 먹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그는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각자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시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이 신자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롬 12:4-8, 고전 12 장, 엡 4:11-13)

이 목자운동의 강조점은 신자 자신이 목자를 발견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엡 4:16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지지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우리가 마디 혹은 줄을 통하여 몸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또한 비유의 인간적인 측면을 너무강조한 것이다. 이 문맥은 모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일치에 이를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도 여러 가지 교회의 풍조에 밀려 이리 저리 방황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써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 올바른 위치에 있게되면 각 부분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아서 몸은 자라게 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 

요한복음 15 장에서 예수는 포도나무이다. 모든 가지는(모든 신자) 직접 그와 연결되어 있으며 직접 그의 생명을 받는 것이지 다른 가지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몸에 대한 다양한 사역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엡 4:11) 이러한 사역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지혜로운 공급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크리스챤이 인간 목자를 떠나서는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든지 혹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고 한다면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히 4:14-16)

이와 관련하여 목사는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결정사항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목자는 그 사람을 덮어줄(cover)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용어는 사람들을 오도한다. 성경은 “덮는다”(cover)는 말을 피의 대속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것이며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관계를 비교함으로써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역자에 대한 나이먹은 사역자의 관계였을 뿐이지 목자와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의 비유이지 한 사람에 대한 신자의 비유가 아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결론

아마도 현재의 목자-제자 복종운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말씀의 권위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을 우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그들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충고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살전 5:12)

비인격적인 우리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모임의 밀접한 교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개교회 안에서 목자의 지도를 받아 지도자 훈련을 통하여 제공될 수 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것 같이 인간 지도자를 따름으로 해서 생기는 분파작용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필요가 한 사람이나 한 교회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개 교회 안에서 사역과 은사의 다원화를 요구하고 있다. (고전 12 장) 또한 성경은 아볼로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행 18:27,28) 또 다른 사람을 훈련받기 위해 성경 학교에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분파를 조장하는 죄는 가장 심각한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롬 16:17,18, 딛 3:9-11) 오늘날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려고 한다면 보다 큰 몸으로서의 연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치된 노력은 많은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의 효과에 대한 증언이다. 각각 개별적으로 일하는 소수 집단들이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수행되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분만이 양의 위대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언약은 그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히 13:20,21)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8.10.02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0) 2018.09.27
영원한 심판  (0) 2018.09.24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8.09.23
기독교는 강성 애국이다  (0) 2018.07.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