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 이야기

세상은 점점 암흑기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각종 예언, 은사, 방언등...

온갖 형태로 이루어진 어두움의 그림자들이 복음의 빛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쓸모없는 가라지 신세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라지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겉모양, 곧 형태는 있으나 알갱이가 없습니다.
2. 참 생명은 알갱이 속에만 있고, 그 참 생명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요,

 말씀은 진리요, 진리는 성부하 나님이시며, 곧 성령님이십니다.

가라지의 출처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이단 및 다른 모든 잡종교)인 자들도 있고,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의(이성, 돈, 명예, 등등..)

미혹을 받아 말씀이 자신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마13:18-23절 참조) 그 씨앗을 뿌리는 자, 곧 가라지의 가라지의 근본

출처는 사탄입니다.

가라지로서 나타나는 현상
1.그 나라에서 모든 (거짓 예언, 거짓 환상, 이단 사설등으로) 넘어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마13:41상)
2.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법과 하나님의 구원의 법 등등..)

(마13:하)
가라지의 종점(final destination)
풀무불, 곧 영원한 지옥불입니다. (마13:4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말씀은 히브리어로 '카브'라고도 하며 라틴어로는 '카논'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곧 잣대란 뜻입니다. 말씀의 잣대로만 검증 되어진 예언,

말씀의 잣대로 검증 되어진 생활, 말씀의 잣대로 검증 되어진 은사만이

참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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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 후반부를 보면, 주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세례요한이 잡혔다는 것을 들으신 다음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다가 다시 바닷가 가버나움에 옮겨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한 이사야 9장에 기록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장으로 가 볼까요?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예언이 1,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은 우리가 성탄절 때마다 듣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메시아 탄생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5절을 읽어보면 미디안 족속이 ‘군인의 갑옷과 복장이 불에 지푸라기같이 타 없어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 아울러 나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적 없으십니까? 
왜 그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님을 좇아갔을까요? 
그들에게 벌써 그런 큰 믿음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남다른 풍모와 권위, 광채,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무슨 최면술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이셨으니까요. 또한 예수님이 그런 방법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 리도 없고요. 그렇다면 왜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시자마자 달려갔을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미드라쉬를 가지고 외우고 교육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옮겨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말한 대로 “흑암과 사망 가운데 앉은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치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자가 일어나는 큰 역사가 함께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나고 예수의 이름이 알려지자 그들은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기드온 같은 해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이사야의 예언대로 미디안을 물리친 기드온처럼 로마군인의 갑옷과 옷을 항아리에 숨긴 횃불로 섶같이 사르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이 부르자 주저 없이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 또한 아들들을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고 ‘아들들아, 어서 가거라, 가서 한 자리하고 출세해라’ 하고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나중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아들들의 자리를 부탁하는 치맛바람을 일으켰고 다른 제자들은 그 인사청탁에 분해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왕이 되실 것이라는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승천을 앞둔 순간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사도행전 1:6). 

그런 기대를 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 그 중에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반석 위에 세워질 교회와 천국열쇠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청천벽력(파란하늘에 날벼락) 같았을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로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영의정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내심 여겨온 베드로가 받은 충격은 더 컸을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만류합니다. 
그 베드로를 주님은 ‘마귀야 물렀거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영의정인지 국무총리인지가 되고 싶어 주님의 십자가사역을 만류하니 마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세계관, 가치관은 그렇게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넘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나라’ 약속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주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시킬 영웅으로, 자신들에게 한 자리씩 앉혀주실 주군(主君)으로 믿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너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너머, 요단강 건너에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주님을 믿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고서는 누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못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이 땅의 목숨, 이 땅의 삶에 매여 허덕이며 삽니다.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아닌 이 땅의 형통과 복락을 위한 구주로 만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매달렸던 제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순간입니다. 
우리의 이 땅의 삶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 땅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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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의 계절이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며 오곡백과 무르익어 풍성한 계절, 추수감사절이 눈 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모처럼 한국 가게를 나가보니, 여름에는 볼 수도 없던 각종 과일들, 고국에서 갓 들여온 듯한, 새빨간 연시(홍시)며, 토실토실한 알밤과 탐스럽게 익은 노란 배가 진열장마다 수북수북 보기만 하여도 흐뭇해지며 군침도는 요즈음이다. 이렇듯, 풍성한 가을의 열매들은 바라보는 이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면 풍성이란 것도 상대적이어서 우리가 풍성함을 누리고 기뻐하는 동안, 행여,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가을의 풍요를 노래하기가 조금 죄송스러운 것은, 우리의 이웃, 필리핀이 역사상 최악의 태풍 "하이옌"의 강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 때문이다.

 풍속으로만 따지면, 380km/h로 슈퍼를 넘어서 하이퍼 단계까지 불렸던 태풍으로, 상륙당시 허리케인 카트리나, 태풍 매미의 2~3.5배 로 강력했던 태풍이라고 하며, 모든폭풍(허리케인, 사이클론, 태풍)다 합쳐서 최강이라고 하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태풍 하이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었고,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은 그들은 지금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시신이 뒹구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먹을 것마저 없어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필리핀의 중부 도시 타클로반은 무정부 상태로 혼란을 겪고 있는 등 신속한 구호 활동이 요청되고 있고 정부는 국가 재난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더 많은 고무보트를 확보해 마닐라의 저지대 지역의 시체를 수습하기에 급급한데 가족과 삶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게되어 낙심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슬플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린다.

그러나 이런 천재지변도 알고 보면 모두 인간들이 잘못 뿌린 씨앗의 쓰디쓴 열매를 엉뚱한 곳에서 거두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견해를 토대로한 견해다. "필리핀 하이옌 피해, 천재보단 인재"…전문가들, 필리핀에서 태풍 '하이옌'으로 만여명 숨지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한 건 부실 건물과 과한 인구밀집, 지구온난화 등으로 피해규모 커졌다는 점에서 '인재'라고 설명했다. –CBS 뉴스

이런 참담한 지구촌의 소식들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싶은 여유로운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하지만,이런 아픔을 뒤로하고, 어찌되었거나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하늘이 더 높아서 좋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추수감사절도 며칠 남지 않은 이때, 풍성한 열매를 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도 필요하겠으나 이런 때는 내 인생의 열매를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한 번쯤 헤아려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들기에 기도 중에 정리를 해보았다.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고 깨달음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1) 열매가 있기 전 농부의 수고가 먼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풍요로운 가을을 결과로 기대하기에 농부는 한여름 땡볕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들의 고달픈 수고는 가을에 아름답게 열린 과일을 보는 기쁨으로 모든 것이 다 만회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농부에게 있어서 열매란 자식과 같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를 때 그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고 소망하면서 온갖 수고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수고가 수고로 느껴지지 않듯, 농부는 오직 가을에 거둘 열매를 바라는 소망 하나로 이른 봄부터 늦은 여름까지 뜨거운 햇살과 씨름하고 땀 흘리는 수고를 하면서도 힘든 줄도 모른다고 한다.

농부들은 이른 아침 새벽 동이 터기도 전에 일어나서 밭에 나가 기심을 매고 물도 대어주고 비료도 준다. 이뿐 아니다. 병충해를 막기 위해 농약도 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손에는 언제나 가위를 들고 다닌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쓸데없는 불량 가지, 영양분만 빨아먹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가지를 잘라버리기 위함이다.

우리가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자. 농부가 들고 다니는 가위로 가지를 자르는 것이 심판인가? 아니면 은혜인가? 얼핏 들으면 심판 같이 들린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은혜”다. 주인이 나무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열매다. 그렇다면, 가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그런 가지가 병들어 있거나 아니면, 너무 무성하게 쓸데없이 옆으로 퍼져 있다면 열매가 맺히는가? 열매로 가야될 자양분이 쓸데없는 곳으로 가기에 그런 가지를 그대로 두면 열매가 아주 빈약해진다.

주인이 창고에 넣어야 할 것은 가지가 아니고 열매인데, 열매가 열매답지 못하고 아무 쓸데없는 “들포도”를 조금 맺었다고 하자 그 주인이 쓸데 없는 들포도를 창고에 들이겠는가? 세 살 먹은 어린애라고 하여도 그 대답은 “NO!, 아니요.” 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인간은 대개 결과만 보고 불평불만을 쏟아놓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결과가 있기 전 먼저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풍성한 열매가 결과라고 한다면, 농부의 사랑과 수고는 원인이다. 농부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야만 가지도, 나무도 제구실을 하고 아름답고 실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 작은 열매라도 맺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농부의 수고와 사랑이 원인이란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가지가 열매를 맺었다고 하여서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 때문이다. 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하여서 가지가 스스로 잘한 것이 아니라 농부의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이것을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의 원리인 것이다.

다른 한편, 가을이 되어도 가져올 열매가 하나도 없는 농부라고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참으로 낙심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성도)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다.(요 15: 1-2절 참조) 그 뜻은 우리 인생의 일생 속에서도 열매가 있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말씀일 것이다.


2)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좋은 씨를 심어야 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우리나라 속담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 7).” 이 말씀은 진리다. 인생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는 질서와 창조의 원리다. 가을 추수를 바라는 농부는 반드시 봄에 그가 원하는 품종을 밭에다 심어야 한다. 콩을 거두려고 하면 콩을 심어야지 팥을 심어놓고 콩 수확을 기대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 8).” 라는 말씀이 있다. 또 “ 저희가 바람을 심과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 8: 7 上).” 말씀하신다. 지금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가라지와 알곡이 있다는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는 뭔가?

a.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순수한 믿음의 영혼을 소유한 영혼들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성경은 이런 사람들만 "구원의 후사" 즉, “알곡”이라고 하신다.

b. 가라지가 있다. 사단에게 그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적 초등 학문이나 이치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훼방하는 자들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사단의 회"라고 하신다. (계 2: 7)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 씨앗이다. 이렇게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디에 속하던지 자유겠으나,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하고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들의 훼방이나 미혹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단에 속했었다가 지금은 돌이켰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시금 이단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고 게중에는 이단들의 횡포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인양 오해하고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이전보다 더 악한 길에 빠진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 19-20)"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생명의 열매를 맺으라

B 플러스 D인생을 뛰어넘어 C인생을 남기도록 해야 한다. 무슨 소리인가? 오래전 한 번 나눈 적이 있는 말이기도 한데, 우리가 긍국적으로 다루어야 할 생명의 열매는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다시 재고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드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뿐인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존경받는 어느 학자가 말하기를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우리 인생은 B (Birth)로 시작해서 D(Death)으로 끝나는 인생이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神은 우리에게 B와 D사이에 C를 주셨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C란:
1. 선택(Choice)
2. 변화 (Change)
3. 기회 (Chance)
4. 도전 (Challenge)다
요약하면, 1. 우리가 선택을 잘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2.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자기가 세상에 변화를 당한다. 좋은 말이다. 3. 기회를 선용하란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역경을 기회로 삼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너무나 멋진 말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인생은 B에서 D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 D도 (Death)이냐 하는 것과 꿈(Dream)이냐 하는 것은 도전 정신에 달렸으니, 나이 핑계하지 말고 환경 이유 대지 말고 더 크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용기있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네 가지 C만 가지고서는, 삶의 질을 약간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 문제 B(Birth) + D(Death)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물론, 사람이 젊고 건강할 때는 그것만 있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람에게는 선택도, 변화도, 기회도, 도전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당장 눈 앞에 다가온 죽음과 죽음 저편, 곧 사후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궁극적 목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C는 단 하나뿐이다” 라고 감히 역설한다.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C (Christ)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 C (Christ)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1 5: 12).”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산 생명을 소유한 알곡’이기에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가라지’로서 영원한 백보좌 심판, 형벌의 지옥으로 나갈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는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것이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성경적 교훈임을 명심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함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 15-20)"



출처: 목양연가/최송연

노아의 시대는 날짜가 중요하지 않았을 모른다

정말 모든 것을 쓸어버릴 만한 대홍수가 일어날 것인가?

그것이 더 핵심 관심사였을 것이다

노아가족은 동물들이 방주를 탑승하러 몰려오자 비로소 확신을 가졌을 것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은 했지만 설마 홍수가 실제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지금 주님이 다시 오셔서 공중으로 끌어 올릴 것을 믿는 신부들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신중하게 믿고 있지만

그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사실 더 중요한 관심사이며 정해지지 않은 약속날짜를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노아가 120년후에 대홍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날짜를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성경은 공중강림에 대한 날짜에 대해 미래의 신자들이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예견한 듯

날짜에 대해 명백하게 선언하였다

너희는 그 날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이것은 기다리는 기간이 거의 2000년에 수렴할 때 신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심각하게 경고하는 이유는

끔찍한 환난에 남겨지는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날을 유일하게 알고 계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오랜 후의 일이지만 경고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약 날짜를 주셨다면 오히려 세상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날짜가 많이 남아있을 시대에는 <아직 멀었다, 내 생전에는 없을 것이다> 먹고 마시고 취했을 것이다

날짜가 임박한 때에 사는 신자들은 <이제 끝났다, 종말이다> 일상을 포기하고 날짜만 기다렸을 것이다 

두가지 상황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니다


문제는 깨어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정말 남겨지는 것인가?

그 날에 대해 관심은 없지만 신앙이 좋은 신자가 있을텐데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과 차이점이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그 날을 혼인예식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혼인날짜에 관심이 없는 신부는 없다

준비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부는 최고의 웨딩드레스를 준비하고 다이어트를 할 것이다


성경이 지시하는 바는 명확한 것 같다

- 예복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 예복은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고 정결한 재료를 만들고 옳은 행실로 옷을 짜야 한다

- 죄로 더럽혀진 예복은 혼인예식에 초대받지 못한다

- 심지어 벌거벗은 미지근한 자들도 있는데 쫓겨날 것이다


너희가 그 날에 대해 관심도 없고 깨어 준비하지 않으면

마음은 무디어지고 세상의 방식을 추구하느라 신앙은 미지근해지며 죄에 노출되어 들림받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다

결혼날짜를 받은 신부처럼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심지어 10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음에도 그 중에 다섯은 실패했다면

집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빈둥거린 처녀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고 집중하며 기다려야 하는 이유다

예복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CHECK LIST

 

중 

하 

 뜨거운 신앙(성령충만)

 O

 

 

예복(기도생활+ 경건한 삶) 

 O

 

 

 주님과 동행, 죄에서 떠남

 O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또 하나는

깨어 예복을 준비하는 것은 웨딩드레스를 상점이나 쿠팡에서 잠깐 사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보를 많이 접한다고 예복이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점에 잠깐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에녹은 300년을 동행했고 노아는 120년을 준비했다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21:36)

항상은 긴 기간을 의미로 확장된다

하나님은 그리 만만하신 분이 아니며 연막을 치고 속일 수 있는 분도 아니다

신실하고 일편단심 신부들은 오랬동안 인내하고 눈물로 연단을 받아 금같이 정련된 자들이다

수십년을 그렇게 기다려 온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힘이 아니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도 체험으로 아는 자들이다

지금 우리는 2000년동안 신자들이 기다려 왔던 변곡점의 끝에 와 있을 것이다

때를 언급한 무화과나무 비유는 100년 이전에 살았던 신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디아스포라는 고토로 돌아왔고 이방인은 자리를 물러주고 그 길을 의연히 떠나야 한다

순례길 모퉁이의 작은 문들을 지나 왔고 그 먼 길의 끝에서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기대해 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미연방대법관에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판사인 브렛 캐버너(Brett Kavanaugh, 53)를 지명하였습니다. 그가 상원법사위와 상원본회에서 인준이 확정되면 대통령이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캐버너를 대법관으로 지명한 것은 대법관직에서 30년간 일하다가 지난 7월 31일 은퇴한 앤서니 매클로드 케네디(Anthony McLeod Kennedy, 1936년 7월 23일 ~ )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지금 미국의 연방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모두 9명입니다. 케네디의 은퇴로 8명인 대법관은 공화당 쪽 4명, 민주당 쪽 4명이데, 브렛 캐버너가 임명되면 5대 4로 공화당 쪽이 우세하게 됩니다. 미국의 대법관은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워싱턴 정계는 물론 온 미국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될 때 개표문제로 시비가 생겼을 때 연방대법원이 부시의 당선을 확정하기도 했고, 동성 결혼 합법화를 결정한 것도, 낙태를 허용한 것도 연방대법원 판사들입니다. 중요한 국가 정책의 타당성 여부에 시비가 있을 때 최종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연방대법원 판사들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130여 명의 법관을 보수적인 인물로 교체하였고, 자기 임기 동안에 2-3명의 대법원 판사를 보수적인 인물로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동안 진보 정치와 언론이 주도하여 만들어 놓았던 결정들이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당과 주류 언론과 선출되지 않은 정치 실세들인 소위 딥 스테이트가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든 브렛 캐버너의 연방대법원 진출을 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브렛 캐버너를 연방대법원 판사로 지명하자 그가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대학 심리학 교수인 크리스틴 포드입니다. 그녀는 35년 전 열다섯 살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 하우스 파티에서 자기보다 두 살 위인 캐버너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캐버너는 즉각 전혀 사실이 아닌 거짓말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포드가 그 파티에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 한 다른 세 명도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브렛 캐버너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케버너와 예일대 동창인 데보라 라미레즈(53)입니다. 그녀는 예일대 기숙사에서 있었던 한 파티에서 캐버너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캐버너가 성 폭력을 저질렀다는 세 건의 폭로가 더 있지만 신빈성이 매우 희박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상원법사위 청문회를 앞두고 지명자가 부적절하다는 폭로가 하나같이 성 문제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상원법사위 청문회에는 크리스틴 포드 한 사람만 증인으로 나와서 증언하였습니다. 포드는 성 폭력을 당할 뻔 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고 그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매우 힘들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일을 사실이라고 확증할 만한 진술은 없었습니다. 포드가 성 폭행을 당할 뻔 했다는 주장은 증인도 증거도 제시할 수 없는 청문회 증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드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드의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정황들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일단 미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유래 없는 정치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공화당이지만, 공화당 안에서 볼 때 트럼프는 굴러들어 온 돌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한 사람이 작고한 존 맥케인 의원입니다. 그 외에 공화당 안에 트럼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대통령 직무를 시작하면서 민주당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속한 공화당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기가 임명한 법무부 장관, 법무부 부장관, 그리고 뮬러 특검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미국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입니다. 트럼프는 정말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결사적으로 반 트럼프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과 주류 언론들과 딥 스테이트들의 집요하고 무차별적인 압박과 공격에 혼자서 싸우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반 트럼프 세력들은 탄핵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대체 트럼프가 무엇을 얼마나 크게 잘못하였기에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탄핵을 하려는 것일까요? 트럼프를 대통령에서 끌어 내리려는 이들은 트럼프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트럼프의 정책 때문에 기득권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미국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모든 개인과 집단들이 반 트럼프 진영을 형성하여 연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도덕군자도 아니고 혁명가도 개혁가도 아닙니다. 인품이 훌륭한 것도 아니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즈니스를 하여 성공한 욕심 많은 사업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지만 다른 사업가들보다 더 불법을 많이 행한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트럼프를 오해하거나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쉬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으로서 좀 더 진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그를 생각이 깊지 못하고 경박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약자와 약한 나라에 대한 배려가 없고 정적들과 타협할 줄 모르는 저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것에는 지지를 보내지만 지나치게 미국 우선주의로 나아가는 것도 불편합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소시민적인 사람들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저개발 국가들을 위하고 약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적 욕심만을 채워왔던 나쁜 자들의 검은 거래를 끊어 놓고 있습니다. WTO, 환경론, 소수자 보호, 동성애지지, 다문화주의, 개방적 이민 정책, 보편 복지 등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 진정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 세우는 자들이 뒤로는 부정축재를 일삼아왔습니다. 트럼프를 물고 늘어지는 이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민주당 안에 그런 사람들이 많고, 공화당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고, 대부분의 주류 언론들이 그렇고, 환경운동 하는 이들, 소수자 및 동성애 지지자들, 글로벌 기업가들, 문화 예술계, 대학 강단들, 문화 상대주의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는 이들이 사실은 소외 자가 아니라 기득권층입니다. 그와 같은 기득권 층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미국은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그 기득권층이 잡고 있는 줄을 끊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래 미국에서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결사항쟁 같은 반 트럼프 세력이 일어나 연대하여 트럼프 죽이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온갖 대의명분을 앞세우며 트럼프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만 그것은 개혁운동 같은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집착이고 발버둥입니다. 트럼프가 드러나게 나쁜 일을 한 것이 없는데도 반 트럼프 운동이 이렇게 집요한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브렛 캐버너가 성 폭행을 하려 했다는 고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자 트럼프 대통령은 캐버너를 위로하며 나도 그런 모함을 받아오고 있다며 동병상련을 토로하였습니다. 정치계의 싸움을 보면 정적에게 뚜렷한 혐의를 찾을 수 없을 때 어김없이 이용되는 단골 메뉴가 성추행이나 막말 발언 같은 것입니다. 그런 주장은 증인이나 증거가 없어도 내가 당했다고 하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언론이 떠들어 대면 일반인들은 허상을 사실로 믿게 됩니다.

 

그동안 민주당과 주류 언론이 주동이 되어 벌인 반 트럼프 폭로 사건들을 보면 트럼프는 그야말로 바람둥이에 허풍쟁이, 인종주의자, 막말 등을 해 온 저질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반 트럼프 진영에서 제기한 온갖 더럽고 추잡한 스캔들들은 거의 조작되고 왜곡되거나 과장된 거짓임이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러시아 스캔들입니다. 그 스캔들을 조작하는데 민주당전국위원회, 힐러리 클린턴 선거본부, 클린턴 재단, 법무부, FBI, CIA, 퓨전 GPS가 관여하였습니다. 트럼프 선거본부를 도청하도록 법무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출된 문건이 소위 러시아 스캔들의 핵심인 ‘트럼프의 도시에’인데, 퓨전 GPS가 민주당전국위원회와 헐러리 선거본부로부터 부탁을 받고 만든 것입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클린턴 선거운동본부는 이 문건을 만든 대가로 퓨전 GPS에 1,200만 달러를 지불했고 이 가운데 일부는 그 가짜 문건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국인 스틸에게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미국에서 선거에서 자기 경쟁자의 뒷조사를 하는 행위(Opposition research)는 합법이지만 외국인에게 금전을 지불하고 정보를 취득하는 행위는 불법입니다.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가짜 러시아 스캔들에 관련된 모든 수사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하자 워싱턴 정계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이 공개되면 워싱턴은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 현직 고위공직자가 조사를 받고 감옥을 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 수사자료 공개를 보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한 일부 언론은 꼬리를 내리고 그동안 러시아 스캔들은 단 한 명의 증인도 단 하나의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논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 번에 대법관 지명자인 캐버너의 성폭행 의혹이 제기 된 것입니다. 트럼프 죽이기 가짜 폭로 사건을 연달아 내놓던 주류 언론들이 이 번에는 캐버너 죽이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다면 대법원 판사로 보수 성향의 법관이 들어가는 것이라도 막아보겠다는 속셈입니다. 캐버너가 부적격자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가 보수 성향이라는 것이 부적격의 이유라고 하는 것 같아 여간 불쾌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 기독교 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 미국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란 본래 그런 거야.’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보주의자들과 기득권층이 red line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들에게는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 삼위일체의 뜻은? (Trinity)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 안에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즉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나이 한분 안에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3인격이 각각 다르며역사는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여기서 인격(person)이란 위()를 말하므로 세 인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떻게 한 하나님이 셋으로 나누어지는가 하고 의심이 생기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들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깨닫는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그러나 참으로 신비하더라도 얼마든지 믿어진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삼위일체 만큼이나 흥미롭고 확실하며 은혜가 넘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고후 13:14, 요 1:14)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없지만 2세기경에 교부였던 터툴리안이란 사람이 처음 사용하였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으로 나타내셔서 그때그때마다 구원 사역을 이끌어 나가시는가를 많이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안에 세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영원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여기서 말하는 셋(三位)이란 각각 완전한 인격이 다르신 하나님이시면서도 한(一體하나님이지 여러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기에 힘을 씁시다. (엡 1:17)

본체인 영광의 광체시며 초월적인 하나님 (히 1:3)

본체의 형상이시며 물질로서의 객체화되신 말씀의 하나님 (요 1:14)

본체의 영이시며 감 잡으시는 주체적인 하나님 (요 14:26)

이렇게 신비의 삼위일체를 성경의 조명을 받아 말할 수가 있습니다.

   

 ※ 인간도 삼위일체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은 마음이요 초월적이므로 영적인 세계를 마음으로 감 잡을 수가 있고겉 사람은 객체화된 몸 즉 오감 각을 통해서 감 잡을 수 있고감 잡는 인생 즉 미래의 감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장래에 소망이 있으므로 이런 사람을 선각자라고 하며그때그때 감 잡는 자를 현실주의자지나간 다음에 감을 잡는 자를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마음도 나요몸도 나요내 인생도 나입니다그러나 마음도 몸도 인생도 완전히 다르면서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볼 때 역시 신비한 삼위일체가 아닌가요?

*<이 다음에 큰 식당을 경영하고자 꿈을 앉고 지금껏 힘써 왔는데 결국 포장마차 사장이었더라.>

참고 성구(창 1:1-2, 1:26, 마 3:16-17, 28:19, 요 14:26, 고전 12:4-6, 벧전 1:2, 엡 2:18)

   

 ※ 이단적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이단적 교리는 터툴리안에 의해 사용된 그 후로부터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이런 교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여 일어났습니다. 3세기에 나타난 이단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샤벨류즈란 신학자인데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자나 성령은 별개의 신격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이 구약시대 때는 성부로 나타나시고 신약시대 때 잠깐 성자로 변모하여 나타나셨으며 오늘날은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더 쉽게 예로 든다면 나 김 목사는 생명샘교회 성도들에게는 담임목사요신학교 학생들에게는 

교수요 집에서 사모에게는 남편이요딸 한나에게는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는 그럴듯한 학설입니다.

   

 △ 반증

듣기에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속에는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입니다한 인격자로서 3직분을 맡은 김 목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3직분을 담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교리를 보고 천부 수난 설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하나님도 성령님도 모두 죽었다는 무서운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주후 325년 당시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학설입니다.


오늘날도 유명하고 신령하다는 부흥사들이 부흥회 때 침 튀겨 가면서 이렇게 고함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삼위일체를 올바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교인들은 삼위일체가 뭐 그리 대단하며 중요하단 말이냐그냥 예수만 믿으면 됐지하고 편한 말씀을 하십니다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자식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하나님의 삼위일체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집을 지으려면 먼저 땅을 잘 정리하여야 하며그 위에 주춧돌을 세우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의 말씀을 공부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잘 정리해 놓은 다음 그 위에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말씀을 잘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이 밝히는 삼위일체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밝혀주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그 대표적인 것만을 골라서 그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1) 구약성경

(창 1:26) “우리라는 복수의 단어를 사용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 18:1-21)여호와의 사자 (천사) “”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출현으로 알 수가 있습 니다.

(이사야 48:16)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2) 신약성경

(마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 3:16-17)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께서성령이하늘에 소리가 있어

(고전 12:4-6) “성령은 같고주는 같으며하나님은 같으니

(고후 13:13) 축복기도 중에서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예수 그리스도의

(엡 2:18) “저로 말미암아한 성령 안에서아버지께 나아감을

이 외에도 (사 6:3, 요 14:16, 요 1:1-4, 4:10, 히 4:12, 롬 4:17, 1서 5:6-8)

   

 ※ 삼위일체 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그 논쟁과 변증이 끊임없었습니다.


옛날 (주후 325)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아리우스라는 말 잘하고 똑똑한 신학자가 있었는데그는 말하기를 예수는 하나님과 다르다예수는 육신을 태어난 피조물이다신성은 전혀 없다.”고 온 천지를 향해 떠들어댔습니다그 문제로 기독교계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걷잡을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나자 황제는 교계의 대표 300명을 소아시아에 있는 니케아란 도시로 소집을 시켜 놓고 친히 종교 회의를 열었으니 그것이 유명한 1차 니케아 회의였던 것입니다하나님을 학식으로 믿는 머리 좋은 기독교 대표자들이 말 잘하는 아리우스의 웅변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물이라는 그의 설교에 많은 종교 지도자즉 박,목사들이 고개를 끄떡이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보이는 촌사람이 아니요!” 하고 소리치며 일어섰습니다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집사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라는 30세밖에 안된 시골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호모우시아(Homousia,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그는 성자 예수님은 본질이나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신 동일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신성을 단호하게 주장하면서삼위일체를 말하였습니다.대세가 아리우스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사전에 준비한 사람 아타나시우스의 추상같은 표호였던 것입니다참으로 기적의 순간이었습니다비록 말에는 능하지 못한 초라한 시골 띠기였지만 진리에 굳게 섰으며 성령 충만한 청년 아타나시우스콘스탄틴 황제와 니케아 종교 회의는 그의 정통 변증에 완전히 압도당한 채 회의는 끝났습니다소수의 진리가 다수의 이단을 격파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아리우스는 완전히 이단으로 파문당하였고그때로부터 니케아 신조가 작성이 되었으며뒤이어 아타나시우스 신조(AD 295-373)" 같은 정통 신조가 뒤를 이었고후에 천주교에서 고백한 사도신경이 천주교에서 나왔고후의 "톨트 신조(AD 1618-1619)," "웨스트민스터 신조(AD 1643)" 등 유명한 신조들의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삼위일체 부분만,

정통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곧 삼위로서 일체이시고일체 가운데 삼위이신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이 삼위를 혼돈하거나(유일본질을 분리함이 없이 성부의 한 위()가 계시고성자의 다른 한 위()가 계시며또 성령의 다른 한 위()가 계신다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도 같으며그의 존엄도 동일하게 영원 하신다그러나 세 분들로서 영원한 분이 아니시며한 영원한 분이시며 한 전능자이시며 한 주이시다성부도 하나님이시고성자도 하나님이시며성령도 하나님이시다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보다 크거나 작거나 할 수 없다.


※ 이단자 아리우스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를 완강히 반대할 때 그는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라하고 일격을 가했다고 합니다이 얼마나 통쾌한 표현입니까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 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6-17)"


이 글을 쓴 김영빈<벤허> 목사가 한마디 한다면, “셋은 구별이 되나 분리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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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목사 지음 

흙에서 천국까지 (From Dust to Heaven) 평신도 신앙교재 중에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이야기!
 

1945년 6월 런던광장에서

육군중령 브라운은 시계탑을 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다. 

 3년 전 죽음의 공포속에 탈영한 경험이 있던 브라운은 우연한 기회에

젊은 여성작가 주디스의 책을 읽게 되었다.


전쟁 속에서 그녀의 글은 한줄기 빛처럼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브라운은

용기를 내어 작가에게 편지를 썼다.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2주 후에 왔고

두 사람은 전쟁기간 중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랑의 감정이 싹튼 브라운이 주디스에게

사진 보내 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사진 대신 질책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토록 제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말해 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못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만약 당신이 보시기에 얼굴이 추하기 짝이 없다면

그래도 당신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연인-03.jpg

 


자신의 요청에 이런 반응을 보인 그녀를 이해 할 수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지만 더 이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서 귀국하는 브라운은, 주디스에게 만날 약속을 정했다.

주디스는 브라운에게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었다.

 

“런던 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 척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만약 제가 당신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척하셔도 됩니다.”


3분뒤면 만난다는 생각에 브라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에

조금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연인-04.jpg

 

그때 금발의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계의 미인(美人)이 나타났다.

브라운은 녹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지나쳤다.

 

순간 브라운은 그녀의 가슴에 장미꽃이 없다는 걸 알았다.

브라운은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하고는 그녀도 녹색 옷을 입은

여인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6시.

멀리서 가슴에 장미꽃을 단 여인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브라운은 머리 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듯 했다.

놀랍게도 걸어오는 여인은 못 생기다 못해 매우 흉측한 모습이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는 한쪽팔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 반쪽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연인-06.jpg

 

짧은 순간 브라운은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른척 해도 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정말 그녀를  모른 척 해야 하나?’ 

그리고 브라운은 생각했다.


'아니야. 원망해야 할 상대는 독일군이야.

이 여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고… 

3년동안 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사랑했어.

이건 변할 수 없어.

이제 와서 그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비겁하고 함께 했던 시간을

배신하는 거야.'

 

브라운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만요!”

 

그녀가 돌아보자 브라운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책을 들어 올렸다.

 

“제가 브라운입니다.

당신은 주디스이지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연인-02.jpg

 

그러자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브라운을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전 주디스가 아니고 페니예요…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 녹색 옷을 입은 여자 분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장미꽃을 달고 이 앞을 지나가 달라는…

그리고 저에게 말을 거는 분에게 식당으로 오시라고 전해 달라더군요.”


식당에 들어서자 녹색 옷을 입었던 주디스가 환한 웃음으로

브라운을 반겨 주었다.
주디스는 놀라 당황하는 브라운에게 붉어진 얼굴로 부탁하였다.

 

“오늘 일은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당신을 실험 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만의 비밀로 간직해 주세요.”


브라운과 주디스의 가교 역활을 하였던 페니가 실명을 쓰지 않고

"감동적인 사랑 실화”라는 제목으로

 

연인-01.jpg

 

영국 타임즈지에 게재했고,

이야기는 영국 전역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비슷한 이야기가 소설로도 쓰여 지기도 하고,

심지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이 얘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해 하였다.


1996년 5월 3일 존 브라운이 세상을 떠난지 몇 시간 뒤

그의 아내 주디스도 그 뒤를 따랐다.
일생동안 깊은 사랑을 나눈 이 두 노인은 죽는 날까지 같이 했다. 

장례식이 진행 되는 날 이 두 노인의 친구인 페니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불편한 몸으로 단상에 올랐다.


“오늘에서야

지난 50년동안 비밀로 지켜왔던 이야기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 때문에 밝히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평생 이 두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질투하였는지 모릅니다.”

 

연인-05.jpg

 


브라운과 주디스가 죽은 지 두 달 후

페니의 병도 급속히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1997년 [웨딩드레스와 행복] 창간호 편집자는

페니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페니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녀가 이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실화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출처]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이야기

 

◆은희(Eun Hee) - beautiful brown eyes

(↓아래주소클릭)

https://youtu.be/F5_F0HKMX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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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요단강으로 나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세례’라고 불리었지만 사실 회개의 세례만으로 인간의 죄가 씻어질 리 없습니다. 
그 세례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길이 평탄케 되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즉 마음의 길을 닦는 것이요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례‘입니다. 
하나님의 오시는 길, 구세주를 영접하는 마음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신데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펄쩍 뛰면서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당신이 제게 세례를 해 달라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 말씀하시고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주님은 죄인과 같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동일하게 되셨고 죄인들과 공동운명체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신 순종, 죄인과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는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하늘에서 기뻐하신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죽음경기장에서 사망권세와 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사망권세를 죄인들이 죄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무슨 재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싸움조차 안 되는 일방적인 죽음의 패배일 뿐입니다. 
그 경기장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관중석 높은 곳에 앉아서 죄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코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직접 그라운드로 내려오셔서 죄인들과 한 팀이 되신 것입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 나사렛마을, ‘그런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나다나엘이 말한 척박한 시골구석에서 목수의 아들로, 또 목수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시던 30년 동안 마귀와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까요? 
귀신들은 ‘귀신같이’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덤비거나 손 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권세는 죄 있는 곳, 죄 있는 자에게만 해당이 되니까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들이 어찌 다가올 수조차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는 세례,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말입니다. 죄인도 아니면서 세례를 함께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래? 죄인들과 한 팀이라고?” 하고 마귀가 덤비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에서 받으신 마귀의 시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죄인과 동일한 입장에서, 신성(神性)이 아닌 인성(人性)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시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넘어뜨리려는 마귀와의 필사적인 한판 승부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주님은 인간이 이겨내기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시험, 곧 주렸을 때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먹는 불의를 행하는 것,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눈 딱 감고 단 한 번 마귀에게 절함으로써 천하만국을 얻는 쉬운 길을 택하는 유혹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으로 물리치고 이기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대결에서 승리하시자 마귀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었습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3년 공생애기간 동안 마귀와 귀신들은 주님을 감히 대적하지 못 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그 앞에서 모든 질병이 떠나가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한 예언을 이루실 수 있으셨고, 사망권세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도 빛이 되고 소망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주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이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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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의 의미와 유래!

개천절 10윌3일은 나라의 건국일이자 한민족의 생일날임니다. 개천은 '하늘을 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늘의 마음과 하나되어 우아일체의 의식으로 온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정신과 이화세계의 정신을 의미'함니다.  개천의 본래의 뜻은 환웅이 환인의 뜻을 받아 처음으로 하늘문을 열고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의 대업을 시작한 날임니다!  이를 잘  실천한 것이 단군조선임니다!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신라.고려의 팔관회,  근현대에는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하면서 개천절이라는 명칭을 처음사용하였다.  임시정부에서도 음력 10월3일을 개천절로 지정하고,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지냈다. 광복후 1949년 양력 10월3일이 개천절로 지정되어 경축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한민족의 뿌리가 시작된 날,  고조선이 개국한 날,  우리 민족의 탄생된 날로 10월 상달이다!
이번 개천절행사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린다. 서울에는 광화문,  원구단,  탑골공원 등에서 열린다!  여러분의 참여가 있기를 바람니다! 감사합니다!

★개천절 노래!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2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따라 하늘이 텃다
이 날이 시월상달에 초사흘이니
이 날이 시월상탈에 초사흘이니
3절
오래다 멀다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1년에 한 번 10월 상달에 행사를한다. 우리 민족이 하늘문이 열린 날 즉 개국일이다. 5천년의 역사가 엄연하게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한겨레의 역사는 1만년까지 올라간다(환국~배달국~단군조선)
그러나 식믹사관을 배워 온 우리는 단군을 신화로 치부해버린다. 이러한 것은 일제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짜르고 조상을 무능한 인간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외래 종교들은 우리의 민족혼을 빼어버렸다. 우리는 강대국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내에서도 좌우의 분열로 남남갈등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좌우를 넘어 바른 한겨레의 정체성을 찾아,   일체감과 공동체의식으로 남북이 통일되고 인류가 하나되는 길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되지않을까?


개천절(開天節)이 건국절(建國節)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분이, 19199월 상해임시정부 수립 일을, 대한민국 건국일(建國日)로 한다고 하며, 국회의원 및 정치인들은 1948815일이 건국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떠들고 있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생각 없이, 비판도 없이, 이에 동조하여 기사화함으로서 국민들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 누구 말이 옳은지, 누구 말을 따라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역사교수나,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아무소리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 한심하고 또, 한심할 따름이다. 도대체 국사를 어떻게 가르쳤고, 국사를 어떻게 배웠는지 모를 지경이다.


국민여러분!

4대 국경일(國慶日)을 아십니까? 4대 국경일 중 개천절(開天節)을 아십니까?

개천절이 건국절(建國節)임을 모르십니까? 아니면 배우지를 안했습니까?

아니면 잊어버린 것입니까?

19199, 많은 곡절 끝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것도 잊어버리지는 안했겠지요!

상해임시정부는 먼저 나라의 이름인 국호(國號)를 정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군주제(君主制)인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버리고, 공화제(共和制)인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했습니다.

국호를 정하고 나니, 대한민국의 뿌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한 끝에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나오는 단군왕검황제(檀君王儉皇帝)가 세운 고조선(古朝鮮)에 두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국조(國祖)를 단군왕검황제로 하고, 연호(年號)를 단기(檀紀)로 정하고, 서기전 2333년을 단기 원년(元年)으로 삼고, 음력 103일에 나라를 건국하였기에, 이날을 대한민국 건국기원절로 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건국절은 서기전 2333년 음력 103일 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당시 상해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에 기재되어 자랑스럽게 선포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하실 분이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당시독립신문 참조)

이러한 사실이 독립신문에 선포된 3일 후에 상해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어떤 정치적인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건국절의 명칭을 개천절(開天節)로 바꾼다는 신문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건국절의 명칭이 개천절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개천절이 바로 건국절인 것입니다.

상해임시정부는 그때부터 음력 103, 건국절을 개천절로 축하하며, 매년 행사를 1948년까지 해왔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는 상해임시정부에서 결정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제헌국회 의사록 참조) 다만 음력 103일은 날씨가 추워 행사하기가 불편하니, 음력 103일을, 양력 103일로 고쳐 행사를 하자고, 국무회의에서 정하여 1949년부터 양력 103일을 건국절인 개천절 행사를 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러른 것입니다.

이렇게 건국절이 어엿이 국경일 개천절로 정하여 있는데, 역사를 모르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고, 또한 제헌국회에서 무엇을 정했는지도 모르고, 이제 와서 상해임시정부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하자고 하고, 19488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분들은, 그동안 어디 있다가 나타난 것입니까? 잠꼬대를 하는 것입니까?

역사를 모르고 함부로 제멋대로 주장하는 것은, 역사교육 할 때, 역사교수나 선생님이 잘못 가르쳤거나, 아니면 공부시간에 농땡이 짓 하느라고, 배우지 못한 탓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상해임시정부 수립 일, 또는 1948815일을 건국절로 한다면, 우리나라의 과거역사는 무시되는 신생독립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한 헌법전문도 거짓이 되고, 우리민족의 문화와 전통, 역사가 모두 부정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1948815, 대한민국이 출발하는 날을 개국절(開國節)이라고 해야 합니다. 같은 땅, 같은 국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열어가기 때문에 건국(建國)이 아니라, 개국(開國)이라고 해야 됩니다.

역사상 건국(建國)은 한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103일은 건국절(개천절)이고, 815일은 광복절이며, 개국절이 되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문의 바랍니다.

서기 2018(단기 4351)910

) 국사바로알기중앙회 한국상고역사교육원

대표전화 02-978-9728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 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 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 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 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 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 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 (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 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 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 으로부터도 구원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 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 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 에 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 장) 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 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 역자주. 눅4:33)과 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 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 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 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 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 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슨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 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 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 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 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 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 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 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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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두타 인질 BIP교회’에 Batik Air Pilot, Mafella기장이 도착하여 2018. 9.29 대 지진이 난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Palu 공항에서 왜 이미 정해진 이륙 시간보다 3 분이나 빨리 이륙하고자 재촉했나에 대하여 간증을 하였다.

그는 당일 하루 종일 왜 그의 마음이 혼자서는 물리칠 수 없는 염려와 걱정으로 짓눌렸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더라고 했다. Ujungpandang에서 Palu까지의 비행을 통해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그는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보통은 나는 콧노래로 부르기도 했지만, 그날은 가능한 한 소리 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다.) 무슬림인 부 조종사가 조종실로 들어올 때까지  불렀는데 부 조종사는 농담으로 찬양 CD를 하나 만들지 그래요 하고 말했다고 한다.

대 지진 전에 그가 Palu 공항에 착륙하려고 할 때, 하늘은 맑게 보였지만 바람은 너무 강했다. 그리고 그는 착륙하기 전에 마음의 음성으로 한번 선회하고서 착륙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Palu 공항의 위치는 2 개의 산을 끼고 측면에 있어 마치 시편 23 : 4의 구절을 상기시켜주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마펠라 조종사 에 따르면, 조종사에게 있어 산악지대에 있는 공항은 착륙 시에 매우 조심해야하기 때문에 죽음의 골짜기라고 불린다.
그래서 시편 23 편 4 절 (시편234 –DjiSamSoe-라는 칭호는 크리스천 조종사의 조정간이 다)을 늘 암송하곤 한다.

자기가 조종한 비행기가 성공적으로 착륙 한 직후, 그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이 공항을 떠나라는 마음의 목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자기가 몰고 있는 바틱에어가 Ujung Pandang을 거쳐 자카르타로 다시 출발하기 전에 그의 승무원에게 평소보다 짧게 단 20 분간만 휴식을 취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비행기의 조종실에 내리지도 않고 이미 예정된 비행 스케줄보다 최대한 (3 분 정도) 이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관제탑Control Tower에 계속 허가를 요청했다.

그는 관제탑으로부터 이륙 허가를 받은 후. 신속히 이륙 준비에 들어갔다.

마펠라 조종사는 고백하기를 이륙허가를 받고서 바로 항공기의 속도를 가속 시켰기는 부조종사의 임무를 자기가 뺏어 수행했기 때문에 비행 규정을 위반했다고 했다. 그 자신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손이 이미 레버를 잡고 있으면서 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며 동체가 빨리 날아올랐다.

물론 그 당시 그는 지진이 Palu를 강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다만 그는 이륙 시 비행기가 이상하게 좌우로 흔들렸다고 했다. 즉, 이륙 당시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3분만 더 늦었다면 140 명의 승객을 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항 활주로 아스팔트가 바람에 날려가는 헝겊처럼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륙 후 몇 분 후에 그는 관제탑과 연락하려고 했지만 관제탑 근무자 Agung씨는 다시 응답하지 않았다.(그는 관제탑 붕괴로 희생됨)

그는 이륙 후 바다를 내려다보았는데 이상한 자연 현상을 보았다. 해변의 가장자리에 있는 해수는 해저가 보이도록 매우 큰 구멍을 형성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우중판당에 도착했을 때에야 팔루에 지진과 쓰나미가 있었고, 비행기가 이륙했음을 확인한 관제사는 비행기가 탈출하는 그 시간 바로 지진을 당했다고 들었다.

2018.9.30 오후 그는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항행 일정을 취소하고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민감해야한다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말고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려 해야 한다고 했다. 빨루 공항 이륙 당시 그가 속도를 올리는 부조종사의 임무를 접수 하고서 가속할 때 기체가 좌우로 크게 요동치는 것을 보고 부조종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 질렀지만 요동하지 않고  침착했기에 성령님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

** 말세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Mafella기장의 증언을 통해 더욱 근신하며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간증을 번역하였다.  할렐루야!

 

카톡방에서 펌글

한순간만이라도 주()가 되었으면 좋겠어.”
  
한국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노()선교사의 말이다. 그녀는 파키스탄에서 선교했던 사람이다. 이 말은 그들이 주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좌익의 후손인 그녀와 그 시댁은 우익이 주류가 되었던 한국 사회에 대해서 심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의 고향은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있던 곳이고 그곳에 어느 다리는 반란 당시 경찰과 그 가족을 비롯하여 우익 인사들이 매일 같이 살해를 당하고 다리 밑 강에 버려져 강물을 붉게 물들인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일을 어려서부터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우익에게 당한 일이 법률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좌익의 득세를 위하여 기도를 한 사람들이고 실제로 북괴와도 내통하는 사람들이다. 우익들에 대한 학살에 대해 그들이 갖는 태도는 안 되었다.”라는 것 정도라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좌익의 후손인 또 다른 독신 여성 전도사는 나와 대화 도중에 조상이 지은 죄에 대해서 참회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며 교회 안에서 동향(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과 함께 전도사들마저 빨갱이 앞잡이로 만드는 거 싫.”이라고 말을 하다가 멈춘 적이 있었다. 아마 나의 성이 문 씨이니까 혹시 전라도 좌익 계열이 아닌지 오해했던 모양이다. 
  
교회 안에서도 전라도 사람들은 자기 쪽의 수가 더 많은지 여부를 살피고 자기 쪽 사람들을 온갖 칭찬과 띄워주기로 사람들의 평판을 좋게 하여 주요 직분에 많이 심은 후 어느 정도 자기 쪽의 세()가 커졌다고 판단되면 노골적으로 우익에 대한 정치적인 비판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거나 소외시키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런 방식은 공산당의 혁명 전술과 똑같다. 아마 그 선조들로부터 배운 것이 어느 덧 일상적으로 체화된 모양이다. 동창회나 마을 회의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해온 탓에 그런 행동을 보고 배운 사람들이 타 지역에 가서도 똑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들과 맞서 싸우지는 못했다. 
  
교회는 현재 반공이라고 할 수 없다. 625와 좌익의 만행을 경험한 목사님들이 반공을 설교하신 적이 많이 있으셨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소천 하셨거나 은퇴하셨고 10여 년 전부터는 종북좌익과 전라도 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런 분들을 반공 기독교라고 부르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동안 냉전시대에 좌우익이 서로 싸웠는데 이제는 탈냉전시대는 반목과 전쟁보다 화해와 평화로 가야 한다는 것이 김대중 햇볕정책 이후 그들의 주장이었고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교회의 입장과 같다고 여겨져서 이제는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북한 공산당과 좌익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보다 교회 안에서 주류적인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북한은 그 본질과 속성이 바뀐 바가 없다. 그들은 폭력과 거짓과 감시로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유린하면서 불평등하고 자유가 없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본질과 속성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만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푼다면 선량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북한 공비에 의하여 암살과 테러를 당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대북송금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암살도 부지기수로 많았으며 잠재적으로 북괴와 김대중 측에게 적대적인 세력에 대한 테러도 계속 자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신학교에서도 같은 신학생이 식기도를 하는 틈을 타서 밥에 독약을 타는 짓도 서슴지 않고 자행한 자들이 전라도 신학생들이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다. 
  
안보 문제를 다룰 때 남한의 군사력과 경제력만을 다루는데 실제로 역사를 보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월등히 앞선 나라가 오히려 그렇지 못한 나라에게 패배한 예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리스가 스파르타에게 패한 경우나 중국에 남송이 거란의 식민지가 된 경우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문제는 정신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평화를 얘기하지만 악과 타협하거나 악에 굴종하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마귀와 대적할 것을 가르친다. 북한이라는 체제는 인간의 죄성과 마귀의 역사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악의 체제이다.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잘 살겠다는 악한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한 소련과 김일성 집단이 만들어낸 체제가 북한 체제이다. 김일성은 특유의 교활하고 사악한 통치 스타일로 정적을 모두 숙청하고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이 남아나지 않게 하는 혹독한 숙청 정치를 지속해 왔다. 
  
북괴라는 악을 바로 인식하고 그 악에 대적하지 않는다면 북괴라는 악은 남한 사회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종북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북한 선교를 얘기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사도 바울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해 놓았듯이 법대로 경기하는 방식을 버리고 북괴와 야합하고 타협하는 방식의 선교를 주창해 왔는데 사실 김대중 햇볕정책을 계승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교회에까지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교간, 곧 교계 간첩도 존재한다. 북한을 방문했다가 성관계를 맺고 북괴에 덜미가 잡힌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좌익의 후손이면서 우익 기득권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북괴에 포섭된 목사들도 있다. 북괴에게 이용당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두환을 미워한 나머지 김대중을 돕다가 결과적으로 남파간첩에게 이용당하는 자들도 많다. 이런 사실들을 일반 성도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런 사실을 전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기독교인이 무신론과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지당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이 반공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한 나머지 목사도 간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신실한 성도라도 악의 체제나 악인을 옹호하거나 그에 굴종한 예는 너무 많다. 한국교회사에서도 신사참배를 결의한 목사가 그에 반대한 목사보다 훨씬 수가 많았으며 이들이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국가의례에 불과하니 문제되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치고 인도한 바 있다. 
  
간첩은 인간의 시기심, 공포심, 탐욕, 교만, 게으름, 어리석음 등 모든 죄성을 다 이용해서 공작을 한다. 비단 간첩뿐만 아니라 북괴 김일성 집단과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도 그렇게 통치를 하고 있다. 남한에서도 전두환도 인간의 모든 죄성을 이용해서 통치를 하였으며 모든 권력자들이 어느 정도씩은 그렇게 하고 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선량한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만으로 통치가 이루어지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간첩의 공작이 어느 정도로 사악하냐면 잠재적 적대 세력, 곧 애국 반공 세력에 대해서 영아살해나 중고생에 대한 투약 범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른 자들이다. 고문을 하기도 하였고 고문 피해자를 다시 고문단의 일원으로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남한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야구 시합이나 영화를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남한 사회는 한없이 평화롭게 번창하는 사회로 여겨져서 북괴의 대남공작에 관한 사실 주장이 거짓말처럼 들릴 테지만 간첩의 암살, 고문, 투약, 감시 등의 범죄는 분명한 진실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비가 남한에 내려 왔다가 테러를 하고 간다는 사실을 아는 경찰 간부도 많이 있으나 뉴스에 나온 적은 없다. 증거를 못 잡았기 때문이다. 다만 지문 인식 수사 기법과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북한 사람들의 소행일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종북은 북괴의 지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본인에게 자신은 간첩이라는 고의가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종북이 자신과 유사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들은 대부분 북괴가 지령한 대로 남한의 종북 세력이 움직인 결과다. 그렇다면 종북에 대하여 교회가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북괴에 의하여 교회의 신앙이 다시 한 번 큰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본다.
  
교회에서 반공 성향이거나 북괴에 비판적인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음해도 종북 세력, 주로 전라도와 반()전두환 성향의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나도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날라리 교역자라는 소리를 들은 바 있는데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탁현민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한다. 지독한 이중 잣대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주를 위해 헌신하고 십자가를 진 주의 종을 비웃으면서 동성애 등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는 자들을 비호하고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저주로서 보응하신다는 것을 주의 종으로서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나는 대학시절 헌법과 법률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탄핵의 부당성을 충분히 인지한 사람이며 북한의 대남공작의 실태를 잘 알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태극기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북괴의 악을 추종하고 비호하면,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 교묘한 말로 자신들이 의롭다고 포장하려고 하여도 진실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와 공평과 진실이라는 속성을 버리실 수 없으며 이 속성들은 곧 하나님의 존재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누가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누가 거짓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누가 모든 진실을 다루고 있으며 누가 한편의 진실은 숨기거나 외면하고 있는가? 북괴의 악을 편들거나 그들의 악을 다루지 않으려는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을 넘어서는 복수심 때문에 악의 세력에게 일원이 된 것이다. 
  
북한은 지금도 고문을 하고 있다. 북한 땅에서만 하던 짓을 이제는 남한 땅에서도 하고 있다. 북한이 남한 사람을 테러한지는 70년이 넘었고, 김대중과 국정원검찰경찰 내 간첩의 도움을 받아서 남한 사람들을 테러한지는 20년이 다 되어 가고, 전두환과 홍석현 측의 도움을 받아 남한 사람들을 테러한지는 10년이 넘어간다. 
  
이제 전라도와 좌익의 후손 가운데 김정은을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도우려는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북한 사역의 고역을 감당하든지, 아니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거짓평화 쇼로 북한과 함께 남한의 경제를 유린하는 자들에게 땀 흘려 수고한 수익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동참하여 방첩활동에 앞장서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간첩 문재인은 남한 경제를 망하게 할 생각을 갖고 있다. 어차피 북한과 연계된 세력이 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망해서 서민이 된다면 IMF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번 중산층마저도 좌파가 되어 보수 세력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악한 계략을 아시고 이들이 망하게 하실 것이다. 

교회는 반공 교육을 시켜야 한다. 공산당과 북괴와 여기에 야합한 매국노 간첩 세력들은 적그리스도 세력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선악 분별은 영적 분별력이기도 하다. 오히려 교회가 타락해서 영적 분별을 어둡게 하고 있는 종북 간첩 세력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이나 삼성의 죄는 알면서 그들이 간첩인지는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겸손하게 진실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북한과 야합하기로 결심했었다. 삼성은 2005년에, 전두환 2009년에 결심했다. 교회사를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나, 모세에 대적한 고라 일당이나, 이스라엘 남북조 시대의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동성애자들, 영국 국교도 중에 권력에 아부하여 비국교도를 탄압한 자들,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찬성한 자들, 신사참배 한 목사들 등 타락한 교회는 너무 많다. 이들은 진실하고 의로운 종들을 탄압했다. 자신이 악한 짓을 행하는 줄 알고 의인을 탄압한 자도 있지만, 자신이 의로운 일을 하는 줄 착각하고 의인을 탄압한 우매한 자도 있다. 북괴가 교활하고 사악한 방법으로 교회를 파괴하려 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고문하는 등 해치고 있는데 교회는 악을 편들어 온 것을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이혼과 재혼: 성경적 원리의 적용


결혼

1. 결혼은 기본적인 인관관계이다.   

①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사람을 지상에 살도록 창조하신 것의 특성은 서로에 대하여 남자와 여자를 의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관계는 사회적이며 또한 육체적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 (창2:18)   처음 여자는 남자에 대하여 돕는 배필(배우자)이었으며, 옆구리에서 취한 자였으며,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었으며 그의 완전한 짝이었다.(창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권과 책임을 나누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이 확실하다.   

②하나님은 평생 일부일처의 연합을 이루는 결혼을 의도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사랑과 충성으로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마태복음 19:5 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연합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아교를 붙이다” 혹은 “가깝게 묶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 것을 사용 하였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일부다처제의 첫 번째 경우는 가인의 계보이었음을 볼 수 있다.(창4:19)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 처제가 이상적임을 보여준다.(시128:3, 잠5:18, 31:10-29, 전9:9) 예수께서도 처음 하나님의 이상적인 결혼도 일부일처제였음을 말씀하셨다.(마19:8) 


2. 결혼은 언약을 포함한다.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해지는 엄숙하고 구속력 있는 계약 즉 언약이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세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2:14) 에스겔은 결혼의 개념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8) 이상에서 살펴 볼 때 남편은 아내에게 맹세하고 (충성을 서약하고) 깨뜨릴려고 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언약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희생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좀더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언약을 맺는 것”(cut a convenant)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와는 구별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히브리어 헤세드(hesed)라는 말로써 “충성스럽게 언약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혼 

1. 하나님은 이혼을 싫어하신다.   

①“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시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시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말2:1416)   이 구절은 이혼이 자기 배우자에 대하여 궤사(속이는 것, 충실치 못한 것)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잘못된 심령에서 나오는 위법한 일이다.  더욱이 나쁜 것은 그것이 “경건한 자손”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가정이 깨어 지면 건전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다.   

②“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이혼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멍에를 부러뜨림으로서 해롭게 된다.  이 목적은 짝으로써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복종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엡5:21-31에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2. 율법은 이혼을 제한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 가운데 이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고대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많은 다른 풍습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들의 잘못된 관습에 대하여 제한을 두시고 그들을 지도하시려고 시도하셨다.   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했을 때 그들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모세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분명한 잘못을 범하였다.  예수는 모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이지 그 당시에 성행하던 것처럼 모든 경우에 해당하 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19:3,7,8) 이것은 신명기24:1-4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모세가 인용한 히브리어는 이혼을 명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결혼을 유추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그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인정할 뿐이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부정한 것 [이 히브리어 단어는 변을 덮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며(신23:12-14), 노아가 벌거벗은 것(창9:21-23), 그리고 술취한 여인으로 상징한 에돔(애가4:21) 등과 관련된 것이며, 이는 간음이 아닌 도덕적, 성적 불결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간음을 행한 자는 율법에 의하여 죽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써주어 집으로 내어보내고 그 여자가 집을 나가 남편을 구하였는데도 그 남편이 그 여자를 싫어하여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써주어 집에서 내어 보내거나 혹은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인 그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를 내어보냈던 첫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다시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기 전에 아무리 타당한 이유처럼 보여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쩌면 그 여자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미 재혼했으며 그는 그 여자를 아내 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3. 예수는 이혼을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배치되는 것으로 금하였다.  예수는 마 19:5,6 과 막10:6-9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4.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금하였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니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하게 될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5.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 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고전7:12-16) 이와같이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이혼할 것을 고집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굳이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6. 예수께서는 음행이 관련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의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①(마5:32, 19:9 참조) 이것은 허용 일 뿐이지 명령은 아니다.   음행에 대한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특별히 반복적인 간음을 포함하기도 하나 보통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 습관적으로 행하는 성적 부도덕성을 의미한다(포르네는 창녀를 의미함) 몇몇 학자는 여기서 음행의 의미를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것 으로 제한하지만 이것은 이 단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하여 예외로 규정한다  이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두 구절을 근거로 교리로 만드는 것이 적합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년왕국의 길이가 비록 성경 한곳(계20:2-7)에만 언급되고 있지만 천년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같은 원칙이 다른 성경적 가르침에게 적용된다.  어느 한 구절이 어떤 단일 주제에 대한 진리의 모든 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떠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에 이 르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취해야 한다.

 

재혼 

1. 이혼이 재혼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율법은 용납한다.  이것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신 24:1-4의 구절로 보아 명확하다.  동일한 구절은 율법이 재혼에 대하여 모종의 제한을 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2:11은 불신자와 재혼하는 것을 정죄하였다.  제사장에게는 이혼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금지되었다.(레21:7) 


2. 예수는 그의 기본적인 가르침에서 이혼한 사람들의 재혼을 금하였다.  예수는 재혼을 간음행위 즉 첫번 결혼의 언약에 대한 죄로 정죄하였다.(마5:32, 19:9, 막10:11-12, 눅16:18) 그러나 예수는 기본적인 문제가 이혼 그 자체임을 인정 하였다.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이 결국 재혼하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간음을 행하고 새 배우자에게도 간음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의 근본 목적은 첫 번째로 이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 마5:32은 예외적인 조항을 더해 주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이것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자와 이혼한 남편인 이 여자로 간음하게 아니한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이미 간음하였기 때문이다. 


4. 마19:9 역시 이러한 예외적인 조항을 지니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음행한(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이혼하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예외는 성적 부도덕성 때문이지 단순한 한번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성적으로 부도덕한 습관은 회개, 고백, 용서 그리고 회개 과정을 통하여 다루어져야 하며, 이와 같이 하여 그 결혼을 유지시켜야 할 것 이다.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은 이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음행 혹은 성적 부도덕성은 침대와 식탁을 따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하지만 결혼관계를 끊거나 그것을 해체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과 맞추기가 어렵다. (고전7:2-5) 그러므로 대부분의 개신교는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라 는 구절에 적용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혼이 필요한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재혼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마19:9 에서 예수께서 사람이 재혼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구절은 이혼과 재혼을 다루고 있으며 문법상 예외 조항은 양쪽 모두에 적용된다.  “내버리다”는 말에 대한 헬라어 “아폴루오”라는 단어는 마 5:31과 막10:2-12에 인용된 신명기 구절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거기서 “내버리다”는 말은 확실히 결혼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는 이혼의 본질을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것으로 바꾸지 않았다.  예수는 단지 음행(포르네이아, 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이외의 다른 변명이나, 이유나 원인을 이혼의 조건으로 하는 것을 거부한 것뿐이다.  또한 롬7:1-3 고전 7:39 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선언에 대하여 어떤 예외도 허용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혼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만 깨어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기본적인 원리를 진술한 것으로 예외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롬7장은 율법 아래에서 남편이 이혼할 수 있지만 아내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율법에 의해서 남편이 죽을 때까지 메여있었다.  또한 율법 아래서는 간음에 대한 벌은 죽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죽음의 형벌은 결혼관계를 끊기 위하여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끊어 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5. 고전7:15 도 예외를 담고 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는 말은 강한 표현이다.  롬 7:2에서 바울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제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야 한다.  바울은 단지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자의 종속을 설명하기 위하여 남편이 죽은 후에만 자유케 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여자의 독특한 위치를 사용한 것뿐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 남자는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으나(신24:1-4), 여자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여자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건전한 성서해석학의 원리는 여기에 이혼과 재혼에 관한 바울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하고자 할 때 신자가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다면 그는 이에 대해 자유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혼하려 하고 주도하는 이가 믿지 않는 배우자이기 때문에 신자의 자유는 그(혹은 그녀)를 떠나게 하는 자유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혹은 그 녀)는 어차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신자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재혼 할 자유가 있는 의미처럼 드려진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는 재혼 할 것을 권하지 않는다.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고전7:27,28) 


6. 재혼은 새로운 계약 혹은 언약이다.  어떤 사람은 재혼한 자는 간음 중에 있다 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간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지만 진정한 회개는 도적이 도적질을 그만두는 것처럼 그 죄를 그만두는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재혼한 사람이 새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을 계속적으로 간음을 행하고 있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결혼과 도적질은 그렇지 않다.    잘못되어진 재혼은 전에 맺은 계약에 대하여 간음행위가 성립된다.  이것은 전에 맺은 계약을 파괴한 것임으로 전 배우자는 자유하게 된다.  한번 재혼한 사람은 또한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충실할 책임이 있다.  신24은 결혼계약으로 돌아 가는 것이 잘못임을 보여준다.(호세아는 다시 가서 아내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을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과 잘못된 계약을 맺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바라셨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를 돕기 위하여 우박의 기적과 해를 길게 하는 기적을 행해 주셨다.(수9,10장) 이사야는 아하스가 앗수르와 계약 맺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나 아하스는 듣지 않고 맺었다.(사7장) 그리고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그 계약을 깨드리고 도움을 청하러 애굽에 가려는 것을 경고하였다.(사30,31)


교회안에서 이혼과 재혼의 위치 

1. 모든 중생한 신자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받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할례받은 자, 노예의 신분에 있던 자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법적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당시에 지니고 있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7:1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을 받아주셨다.(행10,11 장) 그 당시 로마인들 중에는 이혼과 재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고넬료의 집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살기를 원하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 계속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 대다수가 아직도 이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을 받으셨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은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재혼한 사람은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없다.  장로(목사에 해당)나 집사의 직분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의하여 제한된다.(딤전3:2,12)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일부다처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 당시 일부다처제는 일반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지만 이혼과 재혼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굉장히 성행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에서 이러한 직분을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에 대하여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들이 교회 밖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증거를 위해서나 복잡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이러한 조건과 다른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도덕성의 기준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집사의 특별한 사역에 대한 자격문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혼한 사람을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몸의 모든 지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사역은 성령에 의해서 주신 것이다. (롬12:6-8, 고전 12:11, 엡4:16) 

총회에 의하여 수정 채택된 조례에 대한 성경적 원리의 적용 제 8 조 5항

 

회원 

1. 지금 많은 크리스찬들 중에 지난 날 죄악 가운데 살 때 결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이런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지역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복잡한 결혼관계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추천한다(고전7:17,20,24) 

2. 우리는 현재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회원으로 받지 말아야함을 추천한다.

 

재혼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기준을 낮추는 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그리스도의 일에 많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합법적 수단과 가르침을 통하여 이혼을 배격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음행이나 간음의 연고 외에 다른 이유로 신자가 이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19:9) 이러한 예외적인 환경이 있었거나,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에 의하여 이혼당했을 경우 우리는 재혼 문제를 신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결정하기를 추천한다.(고전7:15,27,28) 


개교회의 지도력 

1. 신약성경이 이혼하고 재혼한 신자가 교회의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받는 것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지역교회가 이 기준을 준수할 것을 추천한다.(딤전3:12, 딛1:5-9)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에게 적합한 다른 봉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추천한다. 

2. 추천은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지역교회는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특권을 유지해야 한다. (헌법 제11조에 의거하여) 


결혼식 주례 

1. 우리는 조례 8 조 5항 2 목에 기술된 예외적 상황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닌 한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면 전 배우자가 현재 살아 있는 한 경우 결혼을 주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정받지 못한(위와 같은 경우) 결혼의 주례를 행한 본 교단의 목사는 결백하게 속아서 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단에서 제명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회 목사는 결혼식 집례하기 전에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성경의 지침에 따라 결혼식 신청자와 상담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의견에 결혼 당사자들이 적절한 사례나, 지혜나 진지함 없이 결혼을 하려 한다고 판단 될 때 결혼식 집례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우리는 8조 5항의 2목에 있는 예외적인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의 재혼이 목사의 양심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사실이 그렇다면 목사는 결혼식을 집례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자격 

  하나님의 성회의 결혼한 목사로서 목사나 그 배우자의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경우에 그 목사직을 거부한다.(7 조 5 항의 2목과 3 목 참조) 

1. 우리의 한 지역총회가 다른 지역총회에서 자격증을 받은 설교자에게 목사안수를 행할 때 목사 안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안수 받기를 원하는 지역총회에서 적어도 1 년간 자격을 유지해야 하며, 전에 자격증을 받았던 지역총회의 임원으로부터 확인 증서가 있을 때까지 목사 안수를 보류할 것을 추천한다. 


2. 우리는 결혼한 사람이나 그의 배우자 중 누구든지 그 사람의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경우 지역총회가 그러한 사람에게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제8조 5 항 3목 참조) 


3. 본부총회 실행위원회는 신청자의 전 결혼의 취소가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거나 유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적으로 부합한지, 혹은 이혼이나 결혼해체의 경우 그 상황이 결혼 취소로 분류 될 수 있는 상황인지 결정할 권위를 보유한다.  이러한 신청은 거짓이나 사기에 의한 불법적인 결혼이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하고 만족할 만한 증거와 함께 제출되어야 한다.  본부총회 실행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상소는 본부총회 총대회의에 보내질 수 있다. 


①)어떤 사본들은 “다른 데 장가드는”이라는 부분을 생략했지만 시내 사본을 포함한 다른 사본들은 이 부분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문맥상 적합하다. 이 예외적인 조항을 생략하는 것은 아무런 사본적 증거가 없다.(존 머리, 이혼. ) 

주의! 이단 연구 단체 인터넷 명단

 

한국교회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 이단성 또는 참여금지 등으로 규정된 주요 ‘연구 단체’들의 인터넷 사이트 명단을 정리해 보았다. 한국교회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39곳을 선정했다. 구원파, 통일교, 하나님의교회(안상홍), 김기동(성락교회), 만민중앙교회(이재록) 등은 이단으로 규정된 곳이다. 반면, 이유빈(예수전도협회), 이인규(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은 참여 금지(또는 1년 교류 금지)의 결과를 받았다. 이단, 참여 금지 등의 규정을 모두 다 받은 곳도 적지 않다.

인터넷 시대다. 대부분의 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과 모습들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단체 공식 홈페이지는 물론 대표자 개인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SNS 그리고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신들의 집회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방송국까지 개설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감출 게 없다는 식이다. 숨기려 하는 게 무엇인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낳게 하는 인터넷 시대에 적극적으로 행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즐겨찾기에 입력되어 있는 인터넷 명단들 <교회와신앙>

그렇다고 인터넷을 통해 보여지는 게 전부는 아니다. 보이고 싶은 것만 공개하고 있을 뿐이다. 감추고 싶은 것은 여전히 창고 속에 깊숙이 들어 있다. 특히, 한국교회 공 교단으로부터 이단 등으로 규정 받은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단체는 거의 없다.

평강제일교회(고 박윤식목사)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신의 교회가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함께 가고 있는 정통교회라는 이미지를 내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한기총으로부터 박윤식 씨가 이단으로 규정받은 사실이 있다(2005년). 물론 이후 2013년에 한기총으로부터 이단 해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이단 규정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공 교단인 예장 통합(1991년, 2015년)과 예장 합동(1996년, 2005년)으로부터도 각각 ‘이단’으로 규정 받은 바도 있다. 그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소위 ‘가계저주론’이라는 것으로 통합(2006년)과 합신(2001년)에서 각각 ‘사이비성 농후’, ‘위험한 사상’ 등으로 규정을 받은 이윤호 목사(꿈의축제교회)가 있다. 그는 ‘사과문’ 발표 등으로 인해 위 교단들로부터 2013년 모두 해제 받았다. 몇몇 이단 문제 연구 기관에서 발표하는 연구 단체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내려가기도 했다.

문제가 있다고 지적 받은 이들 중 일부는 소위 ‘고치겠다’는 뜻이 담긴 문서를 해당 기관에 제출하기도 했다. ‘회개문’, ‘한국교회에 알리는 글’ 등의 제목으로 언론이나 해당 기관에 문서를 제출한 것이다. 자신에게 지적된 문제를 수정하고 한국교회와 동행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진정성’의 단계가 남는다. 문제가 되었던 주장을 철회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해당 신도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또한 배포된 서적 등의 자료를 회수하는 등 후속 조치가 기본으로 따라야 한다. 고치겠다는 행위의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정성의 단계를 넘지 못한 이들이 있다. 김풍일 씨(김노아, 세광중앙교회), 김성로 목사(춘천 한마음교회), 류광수 씨(다락방), 박철수 씨(아시아교회), 최바울 씨(인터콥)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후 해당 기관에 소외 ‘고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 진정성의 단계를 넘지 못했다. 따라서 각 교단의 연구 결과가 그대로 유효한 상태다.

아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연구 단체’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원파, 다락방(류광수), 안상홍측(하나님의교회) 등의 단체에는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 수가 상당히 많다. 지면상 모두 싣는다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다. 반면 이초석 씨(예수중심교회, www.jcc.tv), 여호와의증인(www.jw.org/ko) 등은 하나의 사이트를 중심으로 자신의 단체를 알리고 있다. 존재했던 인터넷 사이트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장길섭 씨(하비람), 박철수 씨(아시아교회), 이장림 씨(다미선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 전쟁 등의 거짓 예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홍혜선 씨(예수생명교회)는 기존의 인터넷 홈페이지 대신 SNS(페이스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래 명단을 자신의 컴퓨터 즐겨찾기에 올려놓고 가끔 ‘클릭’해 보는 것도 또 다른 면에서 유익하리라 본다. 연구 단체의 면면을 살펴봄으로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앙을 재점검해 볼 수 있다. 복음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울 수가 있다. 또한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좋은 지침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 한국교회 공 교단 발표, 주요 연구 단체 인터넷 명단>

1. 강병국 - 생애의 빛 www.sostv.net
2. 구원파 - 권신찬, 유병언 계열
              기독교복음침례회 www.ebcworld.org
                                     www.ebchistory.com 
              권신찬 설교 www.ebcgrace.com
            - 이요한 계열
              서울중앙교회 http://seoul.jbch.org 
              생명의말씀선교회 www.jbch.org
            - 박옥수 계열
              기쁜소식강남교회 http://gangnam.goodnews.kr
              IYF(국제청소년연합) www.iyf.or.kr
              마하나임신학교 http://kr.mahanaim.org/
              박옥수 개인 홈페이지 www.ospark.pe.kr
              성경세미나 www.bibleseminar.kr
              동영상 http://goodnewstv.kr
3. 김계화 - 할렐루야기도원 www.hallelu.net
4. 김기동 - 서울성락교회 www.sungrak.or.kr
              베뢰아아카데미 www.iberea.or.kr
5. 김성로 - 춘천 한마음교회 www.hmuchurch.com
6. 김풍일(김노아) - 세광중앙교회 http://isegwang.or.kr/
              예장총회신학교 http://shjc.kr/
              세계미디어선교회 www.wmma.co.kr
7. 류광수(다락방)
             임마누엘교회(부산) http://immanuel.rutc24.com
             임마누엘서울교회(당회장) http://rutc24.kr
             임마누엘울산교회(당회장) http://irutc.kr
             방송국 www.rutc.com
             출판 자료국 www.wedarak.net
             인터넷 방송 http://rutc.tv
             인터넷총국 www.jcking.net
             예장개혁총회 www.rpck.tv
8. 몰몬교 -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www.lds.or.kr
             종교교육원 www.facebook.com/InstituteKorea
9. 문선명(통일교)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www.ffwp.org
             TV방송 www.ipeacetv.com
10. 문제선 - 예루살렘교회 http://jerusalem.or.kr
            성산기도원 http://jc.thejoy.kr/61
11. 박명호(한농복구회, 구 엘리야복음선교원)
            돌나라 한농복구회 www.hannong.com
            돌나라 www.doalnara.com
            에코리코 http://cafe.naver.com/ecorigo
12. 박무수 - 부산제일교회 www.church.or.kr
13. 박윤식 - 평강제일교회 www.pyungkang.com
14. 변승우 - 사랑하는교회 www.belovedc.com
           대한예수교장로회 부흥총회 http://assoc.belovedc.com
          성령신학교 http://ssnu.cafe24.com
15. 새일파 - 여호와새일교회 www.jesus2.org
          승리새일교회(김정윤) www.newthing.kr
          이뢰자목사 http://newthing.kr/xe/roeja
          스룹바벨선교회(최대광) www.headstone924.net
          여호와새일교단 www.saeil.org
          여호와새일교단 새일교회 http://goodtidings.kr
16. 서달석 - 서울중앙침례교회 http://cafe.naver.com/hebrews922
          생명의서신 www.jesusoflove.com
17. 안상홍 -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www.watv.org
          홍보동영상 http://uccspace.net
          새생명복지회(장길자) www.newlifewf.org
          국제위러브유운동본부(장길자) http://weloveu.or.kr
18. 안식교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www.adventistkr.org
          블로그 http://blog.adventist.kr/
          SDA 삼육어학원 www.sda.co.kr
          ACT(대학생선교회) www.act.or.kr
          AWR(희망의소리 방송국) http://awr.or.kr
          ADRA(아드라, 해외아동 결연) www.adra.or.kr:50007/
19. 여호와의증인 - 왕국회관 www.jw.org/ko/
20. 위트니스리 - 지방교회(서울) www.churchinseoul.or.kr
          한국복음서원 www.kgbr.co.kr
          전 세계 지방교회 리스트 www.localchurches.org/churches/
21. 윤석전 - 연세중앙교회 www.yonsei.or.kr
         흰돌산수양관(수원) http://hindol.yonsei.or.kr
         TV동영상 www.ybstv.com
22. 이광복 - 목양교회 http://mokyang.or.kr
         흰돌국제선교센터 www.hindol.com
         흰돌기독국제학교 http://solomon.hindol.com
23. 이만희 - 신천지 예수교증거장막성전 www.shincheonji.kr
         시온기독교선교센터(인터넷) www.eduzion.org
         신천지 방송 www.scjbible.tv
         신천지뉴스 www.scjnews.com
24. 이명범 - 레마성서연구원 www.rem.or.kr
         예명대학원대학교 www.ygu.ac.kr
25. 이송오 - 말씀보존학회 www.biblemaster.co.kr
        성경침례교회 www.kjv1611.or.kr
        킹제임스성경신학교 www.kjbc.org
        서울크리스천중고등학교 www.schs.or.kr 
26. 이승헌 ? 단월드(구 단학선원) www.dahnworld.com
        글로벌사이버대학교 www.global.ac.kr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www.ube.ac.kr
        벤자민인재영재학교 www.benjaminschool.kr
        이승헌 개인 홈페이지 www.ilchi.net
27. 이영수 - 한국기독교에덴성회 www.holyedenchurch.or.kr
28. 이유빈 - 예수전도협회 www.eafj.org
        도서출판 예전 http://yejeon.or.kr
29. 이인강 - 아멘충성교회 www.amencs.com
        개인 홈페이지 http://leeinkang.com
30. 이인규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http://cafe.naver.com/anyquestion
        예레미야 이단연구소 http://jeremiah.co.kr
31. 이재록 - 만민중앙교회 www.manmin.or.kr/KOREAN/
        개인 홈페이지 www.drlee.or.kr/korean/
        인터넷 방송www.gcntv.org/KO/Home/ 
32. 이초석 - 예수중심교회 www.jcc.tv
33. 이현래 - 대구교회 http://www.churchlife.net
        인터넷 방송 http://www.clntv.com/
34. 인터콥(최바울) - www.intercp.net
35. 임보라 - 섬돌향린교회 www.sumdol.org
36. 장길섭(하비람,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
       - 레드스쿨(대안학교) www.redschool.or.kr
37. 정명석(JMS) - 기독교복음선교회 http://cgm.or.kr/
        정명석 http://정명석.com/
        정명석 만남과 대화 www.god21.net/
38. 조종성 ? 복음중앙교회 www.cch.or.kr
39. 홍혜선 ? 예수생명교회
https://www.facebook.com/예수생명교회-Jesus-Life-Church-460808624089810/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62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저 (김성웅 역)

현대 교회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
문: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사탄이 만들려고 하는 교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인가? 호튼은 이 물음에 대해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미국 교회 전반에 대한 진단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우리는 미국 교회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미국 교회에서 만든 제품을 가장 빠른 시간에 직수입해서 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쌍둥이라 해도 좋을 터인데, 호튼이 말하는 미국 교회의 현실이 한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복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호튼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호튼은 현재 미국 교회의 메시지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더 열심히 하세요. 더 노력하세요" 일색이며, 보수 진영에서 자유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에서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뉴에이지에서 남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미국 교회의 '영성 탐구'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을 발견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 된 교회'로 생각한다.

1.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
호튼은 미국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을 질병명을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가 말한 '도덕적이 심리적인 이신론'이라고 규정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핵심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세째,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다섯째,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호튼은 미국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2차 대각성 이후 즉 찰스 피니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찰스 피니는 미국 교회에 펠라기우스를 유행시킨 전도사였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심각성은 찰스 피니의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이 미국 교회에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명목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까지도 일부 침투했다는 점이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 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 필이 미국 개혁 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 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2. 조엘 오스틴 비판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엘 어스틴이다. 조엘 어스틴은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라는 책과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과 전 세계에 이러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호튼은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되었고' 어스틴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어라"라는 형통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라 말하면서 어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 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라고 진단한다. 조엘 어스틴의 책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도 조엘 어스틴의 긍정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책을 제시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심각한 병은 점점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염되고 있다. 물론 왜 조엘 어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에서 가르치는 자기 계발식 메시지가 문제가 되는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항변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살면 된다는 조엘 어스틴의 메시지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호튼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스틴과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 토니 로빈스처럼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

3. 맥클라렌의 이머징 교회 운동 비판
최근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맥클라렌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다소 자유주의신학적 성향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 떠오르고 있다. 호튼은 '조엘 어스틴의 형통복음에 나타나는 자기도취와 개인주의와는 동떨어져 있기는 하나 맥클라렌의 메시지는 중요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스틴이 말하는 죄와 구원은 하나님에서 도덕적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행복과 향상으로 옮겨갔다면, 맥클라렌에게서는 지구 온난화, 가난, 에이즈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탐심으로 옮겨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이 두 경우 모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형동 복음을 주장하는 조엘 어스틴 류의 <믿음의 말씀 운동>이나 맥클라렌 류의 <이머징 교회 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호튼은 이들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금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초대 (맥클라렌)라고 규정하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어스틴)라고 하든, 우리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4. 영지주의와 닮은 꼴인 미국 기독교 영성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최근 미국 기독교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영지주의적 영성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뉴에이지' 혹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종교 시장의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탐구'가 미국의 시사 잡지 커버스토리에 자주 등장하고, 역사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등이 '영성'이라 부르는 영지주의적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튼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실은 복음주의자들의 예배, 전도, 영성은 역사적인 기독교라기 보다 여러 면에서 몰몬교나 뉴에이지 그리고 자유주의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미국 영지주의 전문가 브룸에 따르면 고대 영지주의는 즉 브룸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피오레의 요아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재세례파, 천년왕국 열광주의자, 내면의 빛 분파주의자, 미국의 모든 초월주의 (위트만, 소로 그리고 에머슨), 몰몬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양한 변종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최근 미국의 영성이 고대 영지주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요소란 무엇일까?

호튼은 고대 영지주의와 최근 미국의 영성을 이렇게 비교한다. 루프가 고대 이단에 관해 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미국 영성에 관한 기술은 영지주의의 주요 특성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 특성들로는, "교리보다 경험을 우위에 둔다, 공적 제도가 아니라 사적이다, 인식의 문제를 피하고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공공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의 종교를 지향한다, 부드럽고 마음 써 주는 신관을 가지고 있다" 등이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우리 시대 미국인들이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형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의 축으로서 내면의 영을 강조한다.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변형판들마다 표면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호튼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기독교를 관찰했을 때, 오늘날 개신교 자유주의와 개신교 복음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기본적인 종교 형태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5. 미국제 기독교의 특징: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
호튼은 현재 미국제 종교의 특징을 도덕주의와 신비주의의 결합으로 본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이다. 현대 미국 기독교는 바로 이 두 가지 이단이 결합한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라는 것이 호튼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이르는 영지주의의 길은 선한 창조주, 죄를 부른 타락,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처참한 죽음 그리고 육체의 부활 이야기를, 한 악신, 물질을 악하게 한 타락, 내면적인 계몽으로 인한 구속이라는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우리 밖을 보도록 하는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둘은 합쳐서 미국제 종교라는 완벽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6. 교회가 그리스도를 다시 회복하는 길
펠라기우스주의건 영지주의건 이 모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 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호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기독교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구원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튼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음과 율법이란 무엇인가? 호튼은 복음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지쳐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호튼의 진단에 따르면 복음이 강조되지 않고 복음없는 율법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해야 할 요구사항만 자꾸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벗어나 다시금 그리스도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될 수 있을까?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바른 치료를 할 수 있다.

호튼에 따르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이며, 결국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선포하지 못하고 복음 없는 율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튼의 해결책은 명확하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바로 알고,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선포하며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하는 길이다.

호튼의 책을 읽고 나면 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이 차이를 자각하고 나면, 복음은 복음, 율법은 율법으로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율법, 복음은 복음이 되게 하자. 이제부터 호튼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둘째,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셋째,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무엇이며,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일원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복음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 곧 성경이 말하는 '다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호튼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였다. 그동안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 <언약의 하나님: 언약신학 입문서>등을 통해서 복음과 율법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서 교회사의 모든 이단들이 사실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뿌리요 원인이 '복음과 율법의 혼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호튼의 기존의 책들을 통해 복음과 율법의 원리를 배웠다면, 이번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실전을 배운 느낌이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초다. 앞으로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금 복음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달고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독교가 되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가주 주님의 교회에서 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 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 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 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 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 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 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 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 ’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 33:19 에서 사용 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 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 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 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 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 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 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 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 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 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 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 이나 고후15:18,19 에서 “화목 ”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 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 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 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 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 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 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 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 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 (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 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 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 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 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 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 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 (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 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 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 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 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 13:2 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의 첫 번째 조항은 성경의 중요성에 대 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무오하고 권위 있는 행위와 믿음의 규범이다.”(딤후3:15-17, 벧1:21, 살전2:13) 이러한 원리를 고수하는 교회나 개인은 안전한 기초 위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탈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권위있는 규범으로 여겨야 하지만 특히 부흥운동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흥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자주 교회에게 무시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상기 시켰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극단적인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부 흥의 교리를 거부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친 열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범 위를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해로우며 그리스도의 대의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흥의 결과로서 그 동안 강조 되어온 진리 중 “지체사역 ”(Body minist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진리를 잘못 적용하거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극단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지체사역의 타당성 

  지체사역에 관한 진리는 원래 성경적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교회는 사람 의 몸과 비교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과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 가지는 살아있으 며 친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30) 성경은 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엡4:15, 5:23,32, 골1:18) 몸은 하나이며 그것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전12:26, 엡2:16, 4:4) 그러나 몸이 하나인 반면 그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고전12:14) 그리고 이 지체 들은 서로를 돌본다(고전12:25,26) 지체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역하 며(엡4:15,16) 그것을 보전하며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비록 몸의 지체들이 다르며 직분, 사역, 기능에 있어서 다르다 할지라도(롬 (12:4) 여전히 몸의 일부이다.  지체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 자리에 있 게 된 것이다.(고전12:18) 우리가 지체사역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이에 대한 교회 의 전 사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에 주신 사람들의 사역을 포함하는데 이들의 사역의 실제이다.  즉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4:7-16참 조) 그것은 또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데 각각의 신자는 성령의 은사나 혹은 영적 사역의 다른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지체 관 계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지만 지체사역이 다음과 같은 상호 인격적 기능을 포함 하는 것은 명확하다.  즉 위로와 격려하는 것(고후1:4, 살전4:18, 5:11), 권고하 는 것(히3:13, 10:25), 기도하는 것(엡6:18), 사랑하는 것(요일93:23), 대접하 는 것9벧전 4:9),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는 것(벧전4:10), 충고하는 것(롬 15:14, 골3:16)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지만 개념 의 양극화, 강조, 실시 등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몸의 지체들에 의한 표현과 참여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극단은 성령의 참된 움직 임보다는 인간의 개성과 지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참여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 다. 

지체사역을 제한하는 것의 위험성 

  교회가 마땅히 조심해야 할 위험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사역을 제한하려 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몇 영역에서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섬기고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성령의 나타남을 믿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공중 예배 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지체들이 유용한 기능을 완전히 거부당하는 데까지 이르는 극단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목사들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대부분의 지체들은 소극적이다.  장려하는 강조점은 지체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세속적인 마음을 향하여 돌려졌다.  때때로 그냥 계속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경향도 있다.  원대한 프로그램에 고정되는 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대신하고, 정통은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지체사역을 남용하는 것의 위험성 

  지금은 성령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시대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 이전의 조건을 돌아보면서 영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에 대하여 조직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조직된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를 피하고 그러한 조직을 한쪽에 젖혀두는 경향이 있다.  가라지를 태우려는 열심 때문에 알곡가지 날리게 된다.  전통은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위 지 체사역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이쪽에서 저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예배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하는 것 대 신에 소위 지체사역이 기다리는 형태의 모임(waiting-type meeting)을 연습하 는 것으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예 배시에 언어적인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 을 때마다 비록 지도자가 그룹 중에서 개인들에게 요청해야 하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하여 개인들 에 관한 소위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체사역의 다른 형태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과 잘못을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 간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적인 민감도 훈 련 기술(sensitivity-training techniques)에 근사한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벗어난 것들 중 하나는 목사의 지도력과 조직 그리고 보다 조직화된 예배를 거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목회의 은사(엡 4:11)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경험을 유지하도록 도우려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 떨 어져 나가고 있다. 

지체사역에 있어서 균형의 필요 

  잘못된 것을 다루는 일 중에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떠났거나, 명 확히 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어느 관점을 부적당하게 혹은 지나치게 강 조함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우려고 시도하는 지도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칫 오해받기가 쉽다.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그리 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들에게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과 사랑 안에서 관용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의 가치 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엡4:1-3).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교회 안에 목사의 은사를 두셨다.(엡4:11-16). 만일 양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전반적으로 공급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양떼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 고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행동하는 제멋대로 구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목사-교사 직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만일에 소그룹 개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목회사역이 연장될 수 있다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은 이러 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들은 독재자가 아니라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2,13, 딤전5:17-19, 히13:7,17)   우리는 교리적인 탈선을 피하기 위하여 도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때때로 남용되어진다.  성경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 위여야 한다.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교회성장에 있어서 채워야 할 역할을 가지 고 있음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남용이 존재할 때 목사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교회 봉사를 조사해 야 하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조장하는 잘못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목사는 하나 님의 말씀으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말 씀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성경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의 몸의 지체들에 제기된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받아들인 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두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지도력의 한계를 넘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 각한다.   성경은 연합이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가 다 하나 님의 아들을 빋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때까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엡4:3,13) 위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성실한 노력이 있 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서 살며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운동(movement)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의 성경적 기능에 우 리 자신들을 새롭게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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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번역TTS음성녹음하여사용하기.hwp


  국어나 영어 듣기평가를 하다 보면 성우가 읽어주는 것처럼 사람이 읽어주는 소리를 녹음해야 할 때가 있다. 요즘은 아파트 관리실에서 방송을 하거나 공공기관에서 방송을 할때도 자주 사용하는 글을 읽어주는 기능이다.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어도 구글번역을 이용하면 쉽게 원하는 문장을 읽어주는 소리를 화일로 만들수 있다. 특히 구글번역을 사용하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다양한 국가의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어서 활용도가 높다.

1. 크롬으로 구글 번역에 접속한다.
크롬을 이용하여 https://translate.google.co.kr/ 사이트에 접속한다

2. 크롬에서 개발자 모드(F12)를 실행한다.
. 크롬이 실행된 상태에서 단축키 F12 를 누르면 개발자 모드가 나타난다.
. 개발자 모드에서 Network - Filter - Media 를 선택한다.



3. 구글번역에 원하는 문장을 적어 넣고 읽게 한다.
 
. 원하는 문장을 입력하고 아래 스피커모양 아이콘을 눌러 목소리를 듣는다
 
. 우측 개발자 모드에 방금 읽은 문장 이름이 나타났는지 확인한다.



4. 개발자 모드에서 url 주소를 알아내고 저장한다.

. 이름을 선택하고 마우스 오른쪽을 눌러 Open in new tap 메뉴를 선택한다.



. 새로운 탭이 열리면서 플레이 창이 나타나면 플레이를 눌러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우측끝 점3개를 눌러 다운로드 하면 목소리 화일을 내려받을 수 있다.

 

. 목소리 화일은 확장자 mp3 화일로 내려 받아 진다. 만약 mp3 화일로 받아지지 않으면 아래 사이트에 가서 mp3 파일로 바꾸면 된다.

 

5. 소리화일을 mp3 화일로 변환하는 방법
 
. https://online-audio-converter.com/ko/ 사이트에 가서 다운로드 받은 소리 화일을 올린 후 원하는 확장자(mp3) 형태로 다운로드 받는다.


. 이제 ppt나 동영상등 필요한 곳에 넣어 사용하면 된다


화성시 예수향남교회 정갑신 목사, 목회 인생 담은 '대답하는…' 펴내
개척 때부터 '교회분립운동' 앞장 "작은 교회가 더 많은 일 할 수 있어"

경기 화성시 예수향남교회는 2009년 개척 때부터 '분립(分立)하는 교회'를 목표로 세워졌다. 개척한 지 9년 만에 2개를 분립했고 현재도 3~4개를 분립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15년간 15개 정도로 분립하고 정갑신(55) 목사가 65~70세 사이 은퇴할 때에는 현재 어린이를 합해 2000명인 교회 규모를 500명 정도로 줄이겠다는 계획도 있다. 이 교회는 기독교 대안학교도 운영한다. 현재 유치원~고등학교 2학년까지 120명이 재학 중인 이 학교는 교회 건물 1층과 4층을 사용한다. 1년 365일 하루도 아이들 웃음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신학대학원생들 사이에선 인기 목회지로 꼽히고 있다.

 

예수향남교회 건물은 예배당과 대안 학교가 함께 쓰고 있다. 지난 19일 점심시간에 정갑신 목사가 어린이들을 찾았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 데 대한 상(賞)으로 정 목사가 ‘쏜’ 닭강정이 특식으로 나왔다. /김한수 기자


 

 

최근 정 목사는 자신의 목회 인생을 돌이켜본 책 '대답하는 공동체'(아르카)를 펴냈다. 그런데 책은 지독한 반성문이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서울 충현교회, 안산동산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고, 서울 서초동 창신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2009년 예수향남교회를 개척했다. 이력만 보면 평탄하게 목사 생활을 해왔을 것 같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무수하게 깨지고 상처 입었다. 성도들과의 갈등도 있었고 자신과의 갈등도 있었다. 그는 책에서 이 모든 과정을 '내 탓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한 영혼에 목숨 거는 목사'가 아니라 '한 영혼에 목숨 거는 목사라는 공명심에 목숨 거는 목사'였다" "개혁적으로 보일 만한 몸짓을 하려 했다" 같은 통렬한 자성(自省)이 즐비하다. 한때 공황장애와 우울증까지 겪은 이야기도 숨기지 않는다. 지난 19일 만난 정 목사는 "주변에서 저를 '고백 중독증'이라고 부른다. 찌질하죠?"라며 웃었다.


최근 정 목사는 자신의 목회 인생을 돌이켜본 책 '대답하는 공동체'(아르카)를 펴냈다. 그런데 책은 지독한 반성문이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서울 충현교회, 안산동산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고, 서울 서초동 창신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2009년 예수향남교회를 개척했다. 이력만 보면 평탄하게 목사 생활을 해왔을 것 같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무수하게 깨지고 상처 입었다. 성도들과의 갈등도 있었고 자신과의 갈등도 있었다. 그는 책에서 이 모든 과정을 '내 탓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한 영혼에 목숨 거는 목사'가 아니라 '한 영혼에 목숨 거는 목사라는 공명심에 목숨 거는 목사'였다" "개혁적으로 보일 만한 몸짓을 하려 했다" 같은 통렬한 자성(自省)이 즐비하다. 한때 공황장애와 우울증까지 겪은 이야기도 숨기지 않는다. 지난 19일 만난 정 목사는 "주변에서 저를 '고백 중독증'이라고 부른다. 찌질하죠?"라며 웃었다.


그런 지독한 과정을 겪고 2009년 교회 개척에 나섰을 때 결심이 '지분(持分) 의식을 갖지 말자'는 것이었다. "교회를 개척하면, 목사든 성도든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지분 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죠.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지분 의식을 내려놓기 위해서 개척 때부터 분립하는 교회를 못 박았죠."

창신교회, 안산동산교회, 은혜동산교회 등의 지원을 받고 상가 건물 80평을 임차해 개척한 교회는 시작부터 교인이 밀려들었다. 5개월 만에 공간이 비좁아지기 시작해 8개월째에는 한 개층 전체를 임차해야 할 만큼 '성장'했다. 초심을 돌아볼 겨를 없이 밀려닥치는 일 처리에 바빴다. 마침내 2014년엔 현재의 허허벌판에 새 건물을 지어 입주했다.

그 이듬해 정 목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떠난 제주도 여행길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유명 갈치 음식점을 찾았는데 아무리 손님 줄이 길게 늘어서도 40년째 규모를 늘리지 않고 맛을 지킨 집이었다. 그 음식점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손님 늘어나자 건물 확장한 음식점 주인 같았다. 정 목사는 "그때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작은 성장에 기뻐하는 '성장주의자'이며 하나님을 내게 유리하게 이용한 '하나님 유저(user)'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교회로 돌아와 다시 초심을 되돌아봤다. 그 결과, 이 교회에서 5년 이상 목회한 부목사는 분립할 수 있도록 했으며, 1억5000만원의 임차 비용과 2년간 월 200만원의 목회비를 지원하고 시무장로 1명과 신자 100명까지 파송하는 등 원칙을 정했다. 새로 등록하는 신자들에게도 분립교회로 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교육한다.

정 목사는 교회분립운동을 개신교계로 확장해 미국 리디머장로교회 팀 켈러 목사가 벌이고 있는 복음적 교회 개척 및 갱신운동인 시티투시티의 한국 지부 창립에도 참여했다. 정 목사는 "건강한 정신을 가진 교회가 많아진다면 대형 교회 하나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출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21/20180921000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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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의 법칙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진나라로 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적이 있었습니다

아끼는 수제자 안회가
가까스로 쌀을 구해 와 밥을 지었습니다.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 보려고 부엌을 들여다 보다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안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회는 제자 가운데
도덕 수양이 가장 잘되어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공자는크게 실망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안회는
곧장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훍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성인 공자도 이렇게 오해를 했는데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떠 하겠습니까?

때문에 귀로 직접 듣거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해도 항상 심사숙고 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 평생
후회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그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타고르가 해고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 합니다. 어젯 밤에 딸 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 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는 잠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시장통을 거쳐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입니다.

보따리 마다 주고 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 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 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
“아~짜증 나... 정말 “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섭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는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애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서야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맙니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에 승객들은 그제야 웃음이 번졌나왔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 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 을 세워보입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 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내린뒤 버스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어도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프레임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법칙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으로 상대방을 배려함이 없이 모든 걸 자기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어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함께 맞이 할
이 10월엔 진정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아름드리 단풍같은 인생 여정을 즐겁게 열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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