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한국의 자살율이 OECD 30개국 중 1위라고 합니다. 하루에만 35명, 1년에 13,000 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현실로부터의 도피와평안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자살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평온한 것 같아 보이니까 죽으면 평안이요 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죽음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 죽음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요 죄의 대가인 죽음이 어찌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죽음이 평안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죄인이 당하여야 하는 죄의 대가인 죽음의 형벌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요 혹독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죽음의 너머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들이 죽음의 벽을 넘어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종교들은 자기기만과 착각과 오해만을 제공합니다.
힌두교는 브라만(사제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사(평민), 수드라(노예계급)의 윤회를 믿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화장한 다음 갠지스강에 뿌리며 다음의 생에는 보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천상계,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여섯 길을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해탈하여 무(無, Nothing)로 들어가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캐고 싶어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주의 생성기원과 생명의 기원을 알아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물질을 쪼개고 생명체를 연구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결코 창조주의 비밀에 접근하거나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물질세계, 피조세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에서,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우리를 풀어내어 초월적 생명,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고통의 죽음에 갇힌 피조세계, 시공간의 벽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창조주요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피조물의 모습으로 피조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피조세계의 일원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음의 십자가의 고통을 지셨습니다. 죄 없으신 유일한 분, 죽음이 가두어 두고 붙잡아둘 수 없는 오직 한 분이신 그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끔찍한 고통의 죽음을 당하시고 죄와 죽음의 벽, 시간의 벽, 피조세계의 벽을 뚫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벽, 시간의 벽, 피조세계의 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방법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승객이 조종사와 선장을 믿고 비행기와 배를 타듯이 우리는 천국열차 되신 주님을 믿고 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믿는 행동의 표현이 세례의식입니다. 

기독교가 너무 세상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너무나도 세상적 복락과 현세의 삶을 가르치는데 빠져 있습니다. 물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바다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은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이 우리의 현세의 삶에 나타나는 것, 크리스천으로서 상의 소금과 빛 된 삶을 사는 것, 주님의 성품을 닮은 착한 행실, 예배와 찬양과 기도, 주님과의 교제 등,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세상의 삶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거룩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해도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결코 기쁨이 되지 못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현실세계에 갇혀있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 하고 주님을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나라를 회복시킬 왕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변화산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신 주님과 영광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너무나 황홀하여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그 제자들 또한 모세와 엘리야처럼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너머,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세계를 벗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 후에도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셨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끝부분을 보면 주님은 베다니 앞에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수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큰 기쁨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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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무오성 (1970)


제1장 성경의 무오성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오가 없으며 오류가 없다.


성경의 의도 


1. 우리는 원본을 참조한다.  본문비평학은 원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으며 성경의 무오성은 원문에만 한 한다고 말한다.(렘36:2)   

2. 우리는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주셨다.(암3:8)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셨다.(출4:12, 25)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조명하심으로 독자가 기자의 마음에 있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고전2:12, 엡1:17, 18) 이와같이 사상과 언어는 계시와 영감으로 된 것이다.  

3. 우리는 영감이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감에 의해서 성령은 성경의 기자들을 인도했다고 본다.  이와같은 성령의 감독은 기자들의 다양한 배경, 능력, 개성들을 전적으로 포용했고 성경의 정경에 나타낸 것처럼 그들의 쓴 모든 것에 적용된다.   

4. 우리는 “무오성”을 “과오로부터 면제된” 뜻으로 정의하며 “무류성”은 “과오를 범할 수 없는 확실한” 뜻에 근사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 두 단어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오성은 성경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무류성은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오성과 무류성은 모든 성경에 적용 되며 계시적인 무오성과 사실적인 무류성을 포함한다.  성경은 진리이다.(시 119:34,160, 요17:17,19, 골1:5) 


역사적 고찰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논쟁은 주로 최근에 있었던 현상이지만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와 함께 영감설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에는 성경이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성령의 독특한 저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영감은 성경의 문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마 5:18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Protepticus, IX, 82, 1) 그레고리 나지아누스(Gregory Nazianus)는 성경의 작은 선까지도 성령에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의미에 대해서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권면한다.(Oat., 2, 105) 순교자 저스틴은 인간과 하나님의 영감을 구분했고,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했다.(Apology I. ch. 36) 이레니우스 성경을 허위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Apology, ch, 18) 초대 교부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믿었으며,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 혹은 스콜라학파 시대에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위한 자료집 정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영감설에 관한한 비생산적이었다.  이 당시는 교회내의 다른 권위들과 성경의 위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록 아벨라드와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중세시대의 분위기에 의해서 영감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할만한 증거는 없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영감설을 채택하였는데 그 안에는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가 포함되었다.  쯔빙글리는 순수한 기독교 교리를 변호할 때 지속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라고 완전하게 확인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기를 기뻐하신 유일한 기록이라고 기술하였다.(Institutes, I, 7, 2, 4) 루터는 영감설을 지지하였으며 정경성 문제가 해결되자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개혁자들이 영감설의 주제에 대한 신학에 몰두했다고 할 수 없어도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성주의 시대에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설을 적용하는 것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문예부흥의 정신에 의하여 언어학적이며 본문에 의한 연구가 홍수를 이 루었다.  이성주의적인 접근방식으로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여 성경의 영감설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하는 주장에 불을 지르게 되었으며 따라서 비판자들은 영감설의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불행히도 정통주의는 똑같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으므로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낮은 견해의 영감설을 용납 해야 한다거나, 무오성의 교리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이 단지 성경에 요구하는 것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성경 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해야 옳다.  만일에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적이며 영감설 및 무오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주석학적 고찰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시발점은 성경 스스로의 증거이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와 충만한 영감을 분명하게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안에 는 무오성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뢰할만한 증인이며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에 의한 것임을 단언하였다.  마 5:18 에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점은 히브리어 글자중 가장 작은 것이며 획은 글자와 글자간의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 긋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의미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점일획은 성경의 세미한 부분을 가리키지만 의미는 같다.  예수님은 성경을 하찮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의 완전한 영감 과 무오를 믿지 않았다면, 그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각 부분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장은 요10:34,35 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가리키면서 율법의 어느 한 부분만 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이 부분적으로만 영감을 받은 것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여기서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22:32 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당한 이유는 성경의 자세한 부분 즉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 문이다.  마22:43-35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질문에서 대화의 강조는 “주”라는 한 단어의 사용에 있다.  갈3:16 에서 사도바울은 그의 논쟁점을 강조하기 위하 여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시제, 특별한 단어, 단수와 복수 등 세세한 예증들은 성경이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이 완전히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말씀 중에서 딤후 3:16이 있다.  이 구절 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혹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Breath out of God)것임을 가르친다.  이 구절은 번역할 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이라고 하거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해도 의미는 똑같은 것이다.  한 성경에서 진실한 것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에 대해서도 진실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저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해 볼만한 구절이 있다.  벧후1:21은 구약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대로” 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영감된 말과 비교해 볼 때, 이 문맥에서 이 구절은 성경의 독특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고 움직여졌다.  성경 자체의 변함없는 증거는 명확하다.  즉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개념을 말씀하였고(계시), 성령은 이 개념을 객관적인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도록 인도하셨고(영감),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를 통하여(조명)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래 계시된 것을 받게 된다.   이상의 구절 외에도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다른 구절에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그리고 “경에 이르기를” 등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

 

1. 우리는 원본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무오성의 교리는 가치가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유능한 학자들에 의하여 발달한 본문 비평학은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본문(헬라어, 히브리어)이 의미상 잘못이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은 신뢰할만하며 주의깊고 세심하게 연구할만하다.  둘째로, 만일 무오성의 교리를 배척한다면 진리에 대한 의문이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누가 결정 할 수 있는가? 어느 부분이 신뢰할 만하며, 어떤 부분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을 이성주의 아래 두거나 사람의 평가에 맡긴다면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성경의 주장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2.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개성을 제거하는 영감과 교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령의 감독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의 말씀을 기록할 사람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각 저자의 모든 개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경에 의하여 사용되어 다양성과 개인적 특성이 허용됨과 동시에 하나님이 저자에게 맡기기를 원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파괴시키지 않게 하신다.(벧후1:21) 

3. 성경은 과학, 역사, 윤리, 추론, 인용 등에 있어서 오류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없다.   첫째로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주장인 반면에 실증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나 과학과 시간은 항상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해 왔다.   둘째로 성경은 종교적이 아닌 주제에 대하여 교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영역 안에서 말할 때 성경의 진술은 비록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였고 불완전하지만 그 진술은 오류가 없다. 

4. 셋째로 성경은 그 당시의 배경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문화, 언어, 문화적 진행 등의 문제를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한다.  만일 신실하고 지성적인 연구자세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이 무류성을 갖춘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5. 영감설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을 가진다면 무오성의 교리는 불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3 가지 방향으로 해야 한다.  보다시피 역사의 증언은 설득 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영감설과 무오설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영감설에 대하여 강한 자세를 유지해 왔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하면 영감설과 무오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기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무오하거나 무류한 어떤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 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접근방식이다.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한 대로 잘못을 범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시31:5, 100:5, 요7:28, 8:26, 롬3:4, 고후1:18, 요일 4:6, 5:20, 계6:10)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만드는 작업을 주관하셨고 모든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그러나 작은 부분일지라도 오류가 있 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모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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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기록된 변화산은 어느 산일까요?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리 남쪽 다볼산을 변화산으로 알고 그리로 순례를 간다고 합니다. 다볼산은 높이가 1,843피트. 그러니까 600 미터 조금 넘는 그리 높은 산이 아닙니다. 위치도 갈릴리 호수 남쪽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마귀와 물렀거라.’ 꾸지람을 들은 그 일이 있은 엿새 후에(누가복음에 의하면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고 거기에서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모세, 엘리야가 주님께 말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엿새 뒤에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엿새 사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굳이 갈릴리 남쪽 멀리 있는 다볼산으로 가셨다고 보기 보다는 가이사랴 빌립보 북쪽 15마일 거리에 있는 헐몬산에 함께 올라가셨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헐몬산은 오늘날 시리아 땅에 있는 높이가 9,100 피트의 산으로 백두산과 높이가 엇비슷한 높은 산입니다. 가을, 겨울과 봄까지 흰 눈이 덮이고 오늘날에는 스키장도 개장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이 녹은 물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 갈릴리 호수로 흘러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볼산이 아니라 그 헐몬산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을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는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어 지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서 예수님께 말씀을 합니다. 이 황홀한 광경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고, 빛난 구름이 뒤덮이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리고, 제자들이 두려워할 때 예수님이 두려워 말라 하시고, 그 때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압니다. ‘초막 셋’도 알고 ‘내 사랑하는 아들.....’도 알고 ‘오직 예수’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때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는 도대체 예수님께 뭐라고 말하였을까요?

이 변화산 사건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무슨 내용의 말씀을 예수님께 드렸는지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쌔”(눅 9:31)라고 간단하게 나옵니다.
NIV영어성경을 보면 '떠나심', ‘Departure’라고 나옵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을 찾아보면 ‘엑소더스’라고 나옵니다.
이 ‘엑소더스’는 단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의 ‘엑소더스’, 곧 애굽장자들의 죽음과 어린양의 피의 유월절사건, ‘출애굽’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은 이제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실 ‘출애굽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습니다. 그 밤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로 바로왕의 손아귀와 애굽을 벗어나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 드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어린양 희생제물이 되실, 그리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풀어내실 ‘엑소더스’ 말입니다. 그런데 엑소더스는 어린양 희생제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어린양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실 것을 말씀드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빛난 모습으로 변화되셨을까요? 성경에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두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 에녹과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죽어 모압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장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다서를 보면 모세의 시체를 미가엘 천사가 사단과 다투며 거두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외경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변화산에 모세가 영광중에 나타난 것을 보면 모세의 시체를 미가엘 천사를 시켜 하나님이 거두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왜 죽습니까? 왜 썩고 멸망합니까?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십니다.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도 죽음을 거치지 아니하고 하늘에 올리웠는데 하물며 예수님이 하늘에 못 올리시울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이루셨으며 당연히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 올리시울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늘로 올라갈 때 세상모습으로 올라갈까요? 아닙니다. 하늘에 올라갈 때는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승천준비완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당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 성자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엑소더스”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말씀드렸는지, 간곡히 말씀드렸는지, 울면서 말씀드렸는지, 감사와 찬송의 말씀을 드렸는지는 기록이 안 되어 있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에녹과 모세와 엘리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아니라면 죽고 멸망되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없다면, 예수님이 엑소더스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에녹, 모세, 엘리야 그들도 모두 하나님이 데려가실 수도 없고 영광의 몸도 될 수도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들이 하늘로 들리운 것은, 영광의 몸을 얻은 것은 모두 예수님의 대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 “어린양 예수님의 죄를 대신 갚으심”을 전제로 미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시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실 것을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다음 가인도 미리 용서하시고 에녹도 미리 하늘로 올리시고 아브라함도 미리 부르시고 엘리야도 미리 들어올리신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어린양 예수님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미리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영광의 몸을 입혀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말 ‘마이가리’로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지 않으신다면 모든 것이 헛것이 될 것이고 그들의 영광의 몸도 썩어버릴 것입니다. 에녹도, 모세도, 엘리야도, 우리도 죄 속에서 함께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격려와 아울러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이 광경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증인이 되라고 보여주신 것일 것입니다. 또 그것은 바로 믿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에녹, 모세, 엘리야처럼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바뀌어 부활하며 공중에 들리워 주님을 뵙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대속을 전제로 ‘마이가리’ 영광의 몸을 입었다면 우리는 더욱더 틀림없이 영광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 가운데 이 세상을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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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저런 거짓 예언에 미혹되어 사람들이 저토록 흔들리고 있나, 그래...?” 저녁 식사 후, 녹차 한 잔을 들고 거실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남편이 보고 있던 신문은 내팽개치고 TV에 눈길을 준 채, 참으로 어이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소리에 궁금증이 발동한 필자도 설거지하던 손을 대충 닦고 얼른 들어가 저녁 뉴스를 보는 내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황당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fiction이 아닌, 저녁 뉴스, 그것도 우리나라 두메산골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서구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했다는 프랑스 한 작은 소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뉴스 진행자 역시 재밌다는듯 연신 방글방글 그의 눈에는 장난기마저 섞여 있었다.
 
내용인즉, 지금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고 있다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었던지, 행여, 대형참사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 조심해 달라고 당부하는 관할 시장님의 당혹스러운 모습이 크게 클로즈업되기도 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군중들 속에 자신은 신(神)과 깊은 내통(?)이라도 하고 있기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눈을 감은 채 깊은 경지로 몰입(?)하는 듯, 묵상을 하고 있었다.(에휴~ 혼자만 하나님 바로 밑, 몬 특별보좌간 당상이나 따논 듯... 저런 얌체족은 어디에나 있다니까, ㅎ 흰옷을 입고 명상을 한다고 해서 과연 그동안 지은 죄악이 해결될 수 있을까? 글쎄다. ㅠ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우왕좌왕 어디를 가야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호기심이 엇갈린 표정으로 두리번두리번 놀란 눈을 하고 헤매며 술렁인다. 그렇다면 조용하던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소도시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저토록 술렁거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고대 '마야' 달력에 따른 예언 때문이란다. 고대 '마야' 달력은 2012년을 끝으로 더는 기록이 없고, 그것이 세상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일부 학자들의 호도로 '마야' 달력의 종말론은 세계 속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던 것이다.

‘마야’의 종말론에 겁을 먹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재난을 피해서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해서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왜 구태여 프랑스의 그 작은 도시인가? 그곳은 오래된 ‘피라미드’ 한 개가 있고 그 ‘피라미드’가 신성하단다. 신성한 ‘피라미드’ 아래 있으면 종말의 무서운 대재난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없다. (가여운 인생들..오래 살고는 싶어서…ㅠ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기존에 알려진 바로는 마야인들은 2012년 12월 21일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그 시간에 달력이 멈추어져(끊겨)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지에 의하면 최근에, 한 젊은 고고학자가 고대 마야인의 “엑절턴”이란 도시의 작은 건물에서 2012년 이후에도 계속되는 달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새로 발견한 마야 달력엔 무려 7000년이 추가로 더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그럼 지금까지 만들다가 만 미완성의 달력을 가지고 종말론 운운하면서 촌극을 벌렸더란 말인가? 경종을 울려주는 종소리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종소리
예언이란 종치기가 종을 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어릴 적, 교회 종소리를 들어보면, 첫 번 종을 치고 난 후, 약 30여 분의 간격을 둔 다음 두 번째 종소리가 울린다. 첫 번째 종소리가 그날이 주일임을 알리는 정도의 것이라면 두 번째 종소리는 곧 예배가 시작될 것을 알리는 소리다. 두 번의 종소리를 끝으로 종은 더 울리지 않는다. 그 두 번째 종소리로 교회의 문은 닫히고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종소리의 뜻을 아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방인들도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고한 첫 번째 성탄절, 선지자들의 첫 번 종소리는 일 점일 획도 틀리지 않았고 때를 맞추어 정확히 울려 퍼졌으며 그 힘찬 종소리를 따라서 메시아는 성육신 하셨다. 이처럼 주님이 재림하실 두 번째 종소리도 명백(Crystal Clrear)한 소리로 울려야 한다. 그때는 세상 종말이 될 것이다. 제대로 경고한 예언서, 진리의 종소리는 성경말씀 뿐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재림하심을 알려주어야 할 두 번째 종소리, 분명한 소리를 내어야 할 종소리가 무엇 때문에 현대는 이토록 혼탁하며 혼란스럽게만 느껴지고 있는가?

문제는 사람들이 진리의 종소리, 바른 종소리를 듣고도 그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유사 종소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온갖 사이비, 극단적 종말론 자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그 강도를 높여간다. 너도나도 종말을 예고한다면서 진리의 종소리가 아닌, 유사 종, 꽹과리를 마구 두들겨대어 사람의 혼을 쏙 빼간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아니하면 휩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종말론을 잘 정립하여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헤프닝(촌극)에 휘말려서 프랑스건, 산속이건, 어디든지 달려가 우습게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요즘은 대한민국에 가야만 십사만 사천명 속에 들 수가 있다고도 하고…사단은 유사 종소리를 요란하게 흔들어 사람들을 농락한다. “그렇게 해야, 정작 하늘 종소리가 들릴 때. 사람들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라면서 조롱하며 믿지 못하도록 사단이 술수를 쓰는 것 아닐까요?” 우리 집사님의 총명한 따님 한 분이 그 예쁜 눈을 초롱거리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이토록 혼란스러운 때인데…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라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예언되었으며, 종말의 징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께서 그 제자들에게 친히 일러주신 종말론 적 ‘두 번 째 종소리’는 이미 울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각종 재난, 이스라엘의 회복, 무화과나무에 꽃이 핀 사건, 이 모든 징조가 주께서 다시 오심을 알리는 두 번째 종소리, 경고의 나팔 소리인 것이다! 첫 번 성탄절을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는 사랑의 종소리였다면, 두 번째 울리는 종소리는 심판의 종소리가 될 것이다! 그때는 지옥과 천국을 갈라놓는 엄청난 백보좌 심판대가 우리 눈앞에 하늘을 가로질러 쫙 펼쳐질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이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종말이 오고 있는 것이다.(살전 5: 2, 마 24: 44, 히 10: 36-37 벧후 3: 1-14) 이런 사실을 전제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에 관하여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를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뜻을 지닌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1) Parousia(파루시아): 이뜻은 (Physical presence, arrival – The main use is the physical presence of a person)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인 인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뜻이다.

2) Epiphaneia (에피파네이아): 나타나심(커튼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얼굴을 뵙는다. 그런 뜻이 있다. (딤전6:14; 딤후1:10; 4:1; 8; 딛2:13; 살후2:8)
 
3)Apokalupsis(아포칼립시스)” “계시” “수건을 벗김” “가렸던 것을 벗김” 그런 뜻이다.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 이 말에서 '묵시(apocalypse)'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계 1:3, 22:7, 10, 18, 19).

이 세 단어를 종합, 유추해 볼 때, 재림의 현상은 (수건으로 벗긴 듯, 커튼을 거두고 밝히 보여주듯 그리스도의 실체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실 것) 반드시 사실적이어야만 한다! 분명한 것은 재림하실 그리스도께서도 심판 주로서, 영광의 주로서 그 모습을 만인 앞에 그 실체를 들어내실 것이란 점이다! 첫 번 크리스마스 때 아기 예수님이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오셨듯 재림 때에도 예수님은 모든 눈이 그를 볼 수 있게 오실 것이다! 영적으로나, 환상적으로나, 피상적이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하늘 구름(여기서, 구름이란 큰 영광의 광채를 의미할 수도 있음)을 타고 하늘을 쫓아서 강림하신다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란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먼저 믿는 성도들의 맹활약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번 필리핀의 해일, 일본의 대지진 때문에 해일과 무시무시한 원전 사고, 그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여 살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온다.살전 이것이 문제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이다!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못하는 것이다.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 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심히 안타깝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짜와 시간은 알 수없다.”고 하는 것,.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로부터 영적 테러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철저하게 무장되어야만 한다.

종말이란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질 않은가?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온다. 그러나 그 또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셨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바로 '준비를 잘하는'성도일 것이다.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

이것이 유사 종소리와 진리의 종소리가 다른 점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그 어떤 방법으로든 종말을 계산할 수도 없고 또 계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패역무도한 짓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설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이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한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든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한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 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 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얼마전에 일어났던 일본의 지진 , 원전 사고로 인한 대참사, 동남아 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멕시코의 스와인풀루엔자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2,000여 년 전, 첫 번째 들려온 종소리만 기뻐하고 아기 예수가 이 땅 위에 오셨음을 축하하노라 말하면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그 기이한 기사를 이미 뒤안길에 사라져버린 역사로 치부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성도는 이미 오신 주님도 축하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일어나 허리를 동여야 한다. 혹독한 겨울, 시련의 겨울은 이미 시작되었다. 저 우렁차고 명백(Crystal Clear)한 두 번째 종소리, 심판의 종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고개를 들고 주를 바라보자. 우리 구속의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마라나 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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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석 교주는 누구인가?

   
 

기독교복음선교회(기복선, CGM)의 설립자 정명석 교주는 1945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월명동)에서 출생했다. 1974년 11월 15일 통일교에 입교했고 이곳에서 승공강사 생활을 했다. 그후 통일교를 탈퇴, 1980년 서울 남가좌동에 애천교회를 개척하며 주로 청년층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명칭도 세계 청년대학생 MS연맹, 동서크리스챤연합, 동서 크리스챤선교회, 국제크리스찬연합 등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현재는 기독교복음선교회(CGM)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교주측 단체는 일명 JMS로도 불린다. 정명석의 영문 첫 자에서 따왔다. Jesus Christ Messiah Savior 혹은 Jesus Morning Star 등을 의미한다고도 하지만 정명석 교주의 이니셜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새벽별(계 22: 16)과 중첩된다. JMS라는 명칭의 이미지가 추락한 상황이어서 기복선 내부적으로는 이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본부 앞에 건물에도 MS, JMS소속을 의미하는 배지, 정명석 교주 스스로도 사인을 할 때 MS를 자주 사용했던 과거를 감출 수는 없다.

   


# 정명석 교주는 왜 10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나?
여신도 강간 등의 성범죄로 정 교주는 올해 2월 18일 오전까지 10년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종교단체의 교주가 여신도 강간 등 성범죄로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성범죄의 경우 정확한 물증이 없으면 사법적 판단이 어렵다. 피해자들이 사법처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대형 교단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피해자들은 큰 부담을 갖고 나서기를 꺼려한다. 그럼에도 정교주가 사법처리됐다는 것은 그만큼 정 교주의 죄질이 나빴다는 방증이다.

   
 

JMS측 신도들의 말대로 정 교주는 무고하게 감옥에 간 것일까? 정 교주 구속의 직접적 계기는 2006년 4월 18일 JMS측 신도들의 성범죄 폭로 기자회견이었다. 이날 여성들은 “4월 2일 정명석 씨의 거처로 이동해 예배를 드린 후 오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정 씨와 수십 명의 여성이 집단 성관계를 가졌으며 김모양과 장모양은 정 씨에게 이 과정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두 피해 여성은 강간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으며 한 명은 변태적 성폭행으로 인해 걷기가 힘이 들 정도로 상처를 입고 하혈을 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후 대법원(2009도2001)은 2009년 4월 24일 “피고인 정씨가 자신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피해자들이 심리적으로 반항하기 곤란한 상태에서 수차례 성폭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범행 내용이나 수단, 방법 면에서 죄질이 극히 나쁘다”고 판결했다. 재판 과정에서 줄곧 성폭행·강간 등의 혐의를 전면부인한 정 교주이지만 인정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목욕탕에 가서 알몸으로 일부 여신도들과 샤워를 하거나 몸을 씻어주거나 포옹을 한 일, 여신도에게 침실에서 팔 베게를 해 준 일 등에 대해서다.

   

정 교주는 성범죄 피해 여성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한 전례도 있다. 2008년 1월 11일 대법원(2006다22524)은 성범죄 피해여성들에게 교단측과 정 교주에게 총 6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재판과정에서 위증을 한 두 명의 JMS 여신도들은 법정 구속됐다. 그 위증을 밝힌 검찰 공소사실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대로 기록해본다.


“‘월명동’ 정명석의 사택에서 공소외 김OO등과 그룹섹스를 하고 1997년. 8. 경 위 같은 곳에서 공소외 OOO이 보는 앞에서 위 정명석과 성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명석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정명석 총재의 강요나 교리 때문에 정명석 총재와 성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라고 증언하여··· 기억에 반하는 허위의 공술을 하여 위증하고···.”

   

여신도들을 대상으로 성범죄가 정명석 교주의 복역의 이유였다. 정 교주는 출소 후 7년 동안 전자발찌를 차야 하고 성범죄자 알림사이트에 신상이 공개된다는 언론 보도도 나올 정도다.


# 신도들은 정 교주의 감옥생활 10년을 무엇이라 생각하나?
정명석 교주의 신도들은 정 교주의 감옥생활에 대해 마치 의를 위한 핍박의 세월을 보낸 것처럼 미화시키고 있다. 정명석 교주 스스로, 10년 전 법정에서 피고인 최후 진술을 할 때 “지금까지 여신도들과 성폭행이나 성접촉은 결단코 없었다”고 말했다.

기복선 측 또한 △정명석 총재에게 현행법적으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일부 여성들이 총재님께 누명을 씌우고 있다 △언론에 비판적으로 보도돼 재판부에도 선입견이 쌓여 있어서 나온 판결이었다 △예수님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 형을 받으셨다 △이 모든 게 섭리역사를 펴기 위한 고난의 과정이다는 입장이다. 정명석 씨와 관련한 법적 판결, 언론 보도를 모두 불신하는 상황이다. 교주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그야 말로 ‘옥중서신’, 그가 당하는 징역에 대해서는 신앙적 의미의 무고한 ‘매’와 ‘핍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신도들도 마찬가지다. “실제적 물증은 없고 오로지 피해자라는 여자들의 진술에만 의존한 판결이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그가 출소하며 돌아간 충남 금산군 석막리 인근 마을에조차 ‘정명석 총재님 고향에 돌아오심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 출소 후 기복선은 재기할 것인가?

   
 

한국교회에 대한 거센 도전을 할 것이라는 게 이단문제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경천 목사(안산 상록교회 JMS 상담 전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들이 믿는 교주가 출소한 만큼 새 힘을 내며 각개각처에서 재기를 위해 파이팅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주원 목사(주원침례교회 담임)는 “한때 대학가에서 신천지의 10배 이상 가는 신도들을 이끌던 JMS의 열정을 아직도 기억한다”며 “대학가에서 그냥 미미하게 사라질 단체가 아니다”고 경계심을 나타냈다. 정 교주가 만기 출소하는 해를 맞아 기독교복음선교회측은 2018년을 '희망과 기쁨의 부활의 해'로 명명했다는 것 또한 예사롭지 들린다.


# 기복선, 한국교회는 무엇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하나?

   


JMS는 대학가를 포교의 거점으로 하고 있고, 전통적으로 응원, 댄스, 연기, 모델, 스포츠 분야의 동아리를 운영해 왔다. 이에 따라 엔터테인먼트적 기질이 있는, 끼 많고 젊고 늘씬한 젊은이들이 주요 포섭대상이 돼 왔다. 이들 중 JMS측 교리에 깊게 빠진 일부 여신도들은 교주의 성노리개로 전락하기도 한다. JMS를 초기에 분별하도록 예방 교육을 하는 게 중요하다. 다음 도표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정명석 교주가 설립한 단체의 공식 명칭은 기독교복음선교회(CGM), 교단 명칭은 예수교대한감리회다. ‘정명석선교회’ 등으로 이름 지었다면 빠지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관 명칭에 건전한 기독교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기독교’, ‘복음’, ‘선교회’, ‘예수교’, ‘대한’, ‘감리회’다. 건전한 교단 중에도 예수교대한감리회가 있다. 정명석 교주와 관계된 교단과는 구분해야 한다.


# JMS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은?

예장 고신측이 1991년 41회 총회에서 이단, 예장 통합측이 2002년 87회 총회에서 이단, 예장 합동측이 2008년 93회 총회에서 반기독교적 이단으로 규정했다. 정명석 교주가 이단인 이유는 △정 씨는 재림주가 육체를 갖고 한국 땅에서 1945년 경 태어났다 △초림주는 서남 아시아에서, 재림주는 한국에서 태어난다 △자신이 쓴 <구원의 말씀>을 읽고 믿고 행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선악과 타락을 성적인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영의 부활이다(신천지 등과 동일)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명석 교주의 만기 출소 후 JMS는 제 2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캠퍼스에서 JMS가 치어댄스, 모델강습, 축구, 연극 동아리 등 문화적 전략을 통해 신천지의 10배 이상의 신도를 거느리던 시대가 있었다. 이들이 유명무실하게, 미미하게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한국교회에 거세게 재도전할 것이라는 이단 문제 전문가들의 주장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06

출처: 영적분별력/ 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헨델의 할렐루야!!🌹

1741년 겨울, 어두운 런던 거리 한 모퉁이에 지친 다리를 끌며 흐느적 흐느적 걷는 한 초췌한 노인이 있었다.

꾸부정하게 허리 굽은 모습의 그는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심한 기침 때문에 한동안 걸음을 멈추곤 했다. 조오지 프레데릭 헨델. 그가 저녁 산책중 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한 차림새에 초라하고 지쳐 보였지만 그의 마음 속은 마치 용광로 속처럼 부글 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지난날 누렸던 그 영광스러운 기억들과 현재의 심연처럼 깊은 절망감이 어우러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 였다.

지난 40여 년 동안 그는 영국과 유럽 일대에 걸쳐 하늘을 찌르는 명성을 누려온 대 작곡가였다.
새로운 곡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왕실에서도 그에게 온갖 명예를 안겨주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어떤 가?

마치 보잘것없는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그들 모두에게서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은 그날 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빈궁 속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4년전에는 뇌출혈이 생겨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다.

걷기는 커녕 영감이 떠오를 때도 손을 움직여 음표 하나 그릴 수 없었다. 의사들은 도저히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만큼 병세는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이다.

헨델은 온천에 매일 1시간씩 몸을 담그고 있으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독일의 '악스 라 샤펠'이라는 온천장에서 목욕을 했다.

한번에 계속해서 3시간 이상은 온천 물 속에 있지 말라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에 대한 무서운 욕망은 의사들의 말을 무시했다.
한번에 9시간 이상씩 물 속에 들어가 있곤 하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병세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근육에 생기가 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손과 발을 조금식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재생의 환희. 그는 끓어오르는 창작열에 도취되어 연달아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 갈채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장마 때 잠시 내리쬐는 햇빛처럼 잠시 반짝이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열렬한 후원자 캐롤라인 여왕이 작고 한 후 공연이 점차 줄게 되고 겨울의 혹한이 휘몰아쳐 왔다. 얼음장 같은 극장에 관객은 줄고 공연은 속속 취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생활고는 더해 갔다. 창의력도 의욕도 감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점점 지쳐 갔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정신적인 타격은 노쇠를 촉진했고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안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듯한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저녁이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책을 나서곤 했다.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다는 것은 마치 스스로 죽음을 손짓해 부르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헨델은 계속 인적이 없는 길을 천천히 걸어 갔다.
저 만치 어둠속에서 교회의 종탑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 앉아 통곡 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제에게 소생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가 또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버리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에게 창작 생활을 계속할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그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는 밤이 깊어서야 한없는 슬픔 가운데 초라한 숙소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소포 한 덩어리가 있었다.
그는 조금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그 소포를 풀었다. 내용물은 한 묶음의 오라토리오 가사였다.
시인 '찰스 제넨스로 부터'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다.

헨델은 그 가사 뭉치를 훑어보면서 투덜거렸다. '방자한 녀석, 이류 시인인 주제에..." 그는 모멸감이 앞섰다.
혼잣말로 불평을 터트리면서, 동봉한 편지를 대충 읽어 내려갔다. 곧 그가사를 붙여 작곡을 착수해 주기 바란다면서 덧붙여 '주께 로부터 말씀이 있었다.'고 씌어 있었다.

헨델은 다시 분통을 터트렸다.

헨델은 사실 그다지 믿음이 두터운 편은 아니었고 성격도 워낙 격렬한 그는
"아니, 그래 뻔뻔스럽게도 제까짓 놈에게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고? 그래 나에게 오페라 대본도 아닌 겨우 이 가사 쪼가리를 보내 주었단 말인가"

심히 불쾌한 마음으로 그 오라토리오의 가사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헨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상하게 가슴을 찔러 오는 대목이 얼핏 눈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도다.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 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않으셨 도다. 그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그로부터 헨델은 글자 하나 마다 마치 영혼이 있어 구구 절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동으로
그 원고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 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빛나는 것 같았다.

<.. 현명한 지도자. 나의 구주가 살아 계심을 나는 알 도다. 기뻐하라. 할렐루야.>

헨델은 황급히 펜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 휘갈겨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놀랄 만한 속도로 음표가 오선지를 메워 나갔다.

다음날 아침 하인이 조반상을 들여 올 때까지도 그는 책상에 엎드려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날이 밝아 아침이 된 것도, 또 조반상이 들어와 있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성스러운 하인의 권고에 따라 빵을 집어 들긴 했으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는 빵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연신 손으로 부스러뜨려 마룻 바닥에 떨어드리곤 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악보를 그리다가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방안을 큰 걸음으로 왔다 갔다 서성거리기도 했다.

때로는 팔을 쳐들어 허공을 후려치기도 하고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하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것 같은데 그 눈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신다고 소리치기도 했지요. 
그분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닌가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니까요."

무려 24일 동안 그의 이러한 광적인 망아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는 거의 먹지도 쉬 지도 않고 무섭게 일에만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침대 위에 나가 떨어졌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악보가 마구 흩어져 놓여 있었다.

헨델은 혼수상태에 빠져 계속 14시간을 잤다.
하인이 겁이 나서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헨델은 의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인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마치 굶주린 들짐승처럼 그는 햄 덩어리를 꾸역꾸역 입으로 틀어 넣고는 음료수를 한없이 들이켰다. 얼마만에 그는 불러 오른 배를 쓸어 내리면서 물러 앉아 방금 도착한 의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선생이 나와 더불어 유쾌한 이야기를 하러 오셨다면 환영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몸뚱이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고 툭툭 두드려 보러 오셨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보시다 시피 나는 멀쩡합니다."

곡을 완성한 그는 런던에서는 헨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메시아>를 들고 아일랜드로 갔다. 그는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데 한 푼도 요구 하지 않았다. 공연이 생기는 모든 수입은 자선사업 기관에 보냈다.

"<메시아>는 나를 가장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기적이었다. 이제 이것은 온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더블린으로 간 그는 합창대를 두개를 하나로 합쳐 연습을 시켰다. 공연 날이 가까와 옴에 따라 더블린 시민들의 마음은 점차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입장권은 단 시일에 매진되었다.

좌석을 더 만들기 위하여 부인들에게는 버팀 테(당시 여자들이 치마폭을 벌어지게 꾸미는데 쓰던 것)를 쓰지 말고, 남자는 칼을 차지 말고 입장하도록 요청 되었다.

1742년 4월 13일, 공연 몇 시간전부터 극장 앞에 인파가 장사진을 쳤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더블린에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 당시 왕이었던 조지 2세 는 평소에 헨델을 좋아하지 않던 왕이었지만 할렐루야 연주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관중이 그를 따라 모두 기립하여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이 유연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이 합창이 연주될 때마다 청중이 일어나 듣는 관습을 만들었다.

헨델이 살아 있는 동안 이 곡은 해마다 공연되었고, 공연 수입은 모두 파운들링 구제 병원으로 갔다.

헨델은 앞으로도 이 작품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계속 이 병원으로 보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1759년 4월7일 (그의 나이 74세) 그는 <메시아>가 공연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나팔 소리가 울리리'가 시작될 때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 갔다.

며칠 뒤에 그는 '나는 성 금요일-예수의 수난일-에 죽고 싶다'고 말했다.

4월13일 <메시아>가 초연되었던 바로 그 날,
자신의 소원대로 헨델은 눈을 감았다.

-할렐루야 다시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9&v=VI6dsMeABpU

할렐루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하여 만든 곡 이었고 듣는 자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
🌹

서설입니다만,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인간 저자가 말하고자 한 의미, 나아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에 충실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기록된 원문을 능숙하게 읽고 독해한다고 해서 원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알았다고 단정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겸손히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지만 인간의 해석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원어성경을 모국어성경 읽듯이 읽을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학자들이라고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일반 독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원문에 가까운 번역본 성경을 구해서 읽고자 하는 것이지요.

필자는 원문 읽기에 있어서는 어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본문과 씨름하며 바른 의미를 알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왕상 13장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어보면, KJV는 지나친 문자적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RSV는 좀 덜합니다. NASB는 덜 문자적이면서 현대인이 읽기에 좋게 번역을 한 성경입니다. NIV는 역동적인 대응번역을 해서 그런지, 의미는 통할지 몰라도 원문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13장 1절에서 "보라!"라는 감탄사가 NIV에만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구성상 반드시 나타내야 할 13:25에서도 "보라"를 빼먹고 있습니다.(원문에서는 두 곳 다 '보라'로 문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했다고 의미를 바르게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설픈 사역(私譯)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구하고자 할 때 오류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좋은 번역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우리 한글 개역이나 개정판에서는 25절에 나오는 "보라"가 빠져 있습니다. 바른 의미를 도출하는데 있어서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 됩니다. 이상(以上)은 참고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에게 속임을 당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늙은 선자자가 참 선지자인가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게 됩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흐름과 왕국들에 대해 기술한 사무엘서에서부터 차근히 읽어내려오다보면 이 늙은 선지자가 선지자이긴 한데 본분을 잃은 선지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20-23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가 선지자 직임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늙은 선지자는 삯꾼과도 같은 선지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한 자란 말이지요.

한 때는 선지자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아래서는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왕국이 분열되고 악한 여로보암이 등장하자 선지자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일반 백성 중 하나처럼 되어버리고말았음을 본문은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여로보암의 악행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집'이라고 일찌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하나님의 집에 우상을 세우다니요!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자신의 등 뒤로 버린 악한 자가 였습니다(14:9). 이 악한 왕 여로보암 앞에서 그 늙은 선지자는 오직 목숨을 보존하기에 급급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로서는 방관도 무서운 직무유기인데 동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금송아지 우상 제단에 분향하는 여로보암에게로 보냅니다. 왕의 위세에 눌려서 자기는 늙었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안 했을지라도 자기 아들들은 보냈습니다. 묵인 동조의 작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참 선지자는 언제나 율법으로(당시 여로암시대에는 율법이 유일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일깨우고 왕일지라도 율법을 어기면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해야 함이 마땅한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이 자는 짖지 못하는 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책망은커녕 왕이 제단에 분향하려 왔다고 해서 아들들을 보내다니요! 선지자의 이런 침묵과 방관, 방조, (대리인을 내세웠을지라도) 우상의 제단에 참예함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앞에서 선지자가 아님을 확연히 드러내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백성들이야 선지자도 그러는 마당에 오죽 우상을 섬겼겠습니까. 뭇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늙은 선자자의 말과 행동거지를 통해 우리는 타락한 선지자의 면모를 더욱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 앞에서 제단을 향해 외치면서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왕이 회유하자(자기 왕국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칩니다. 그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13장 전반부(1-10)를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상을 싫어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노를 격발케 하는 행위가 우상숭배임을 말해 줍니다. 제단을 의인화 해서 제단을 향해 외친 그 말씀은 바로 여로보암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13장의 전반부(1-10)의 광경을 목도한 자들은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입니다.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11절-개정). 이에 대한 그 선지자의 반응은 하나님의 사람을 추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선지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바로 반복해서 드러나는 기록입니다. 8절에서,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절에서도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또 15절에서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계속 16절에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절에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8절에도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19절,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  22절, "...너더러 '떡도 마시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마지막으로 23절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리고,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서 하나님의 사람을 태워 보냅니다.

단순히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 곳(벧엘)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함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결코 벧엘에서는 먹고 마셔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우상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우상에 참예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신신당부하신 말씀인 그 명령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인가를 반복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우성을 섬기는 것을 눈뜨고는 보지 못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심판을 경고하신 그 벧엘의 제단과 제단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속아서 우상의 제단에 참여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나서는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엄중한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노회하고 교활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아는 자입니다. 속여서라도 그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먹고 마시도록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속임은 단순한 속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부추긴 속임입니다. 직설적인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입니다. 남왕국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려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는 실로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말씀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여 악에 빠지게 하고 그 결과를 주목하여 보고자 한 악한 자였습니다. 그 결과 여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한 자였습니다. 제단을 향해 외친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로 난 것인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남의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하는 것으로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한 어리석은 선지자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육신의 목숨 보존에 있어서는 뗄래야뗄 수 없는 일입니다. 먹고 마셔야 하는 원초적인 문제가 이토록 빈번하게 기록된 이유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되 주 안에서 먹고 마셔야 할 자들입니다.


뒤에 나오는 그 선지자의 일련의 행동들이 호의적으로 비춰짐으로 해서 우리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는 타락한 그 선지자의 교묘한 거짓을 드러내주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분별이 요구되는지를 밝혀줍니다.

벧엘의 그 선지자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습니다. 선지자의 입에 말씀을 한 번 넣어주셨다고, 이 전에 선지자 노릇했다고 그 선지자가 지금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참 선지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이 심판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같지만 실은 그렇게 만든, 다시말해 범죄케 한 늙은 선지자에게도 해당되는 심판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의로 살인한 자가 받는 심판의 말씀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입니다.

속여서 그 곳에서 먹고 마시게 한 후 그를 나귀에 태워 보냅니다. 앞에서 먹고 마시게 한 것이 대접이 아니라 심판을 부른 것이 듯 나귀를 태워서 보내는 행동도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시던 그 명령을 어기도록 한 것이지요. 왜 냐구요? 그가 사자에게 물려죽어 버려진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이었습니다.

그래서 25절은 "보라"로 시작합니다. 늙은 선지자가 타던 그 나귀는 나귀 타기에 서툰 그 하나님의 사람을 태우고 유다에서 벧엘로 나 있는 길(하나님의 사람이 왔던 바로 그 길)로, 평소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고 늙은 선지자도 다니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번에 돌아가던 길은 상수리나무가 있는 한적한 산길이었음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여러분은 이것을 그 선지자의 호의로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더하여 늙은 선지자는 최소한 두 필 이상의 '탈 수 있는 나귀'를 가진 넉넉한 집안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목사의 집에 차가 두 대 이상 있는 꼴이지요.

25절 이하에 보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 사실을 알고 시신을 거두러 갑니다. 거두러 가는 목적이 단순히 슬퍼하며 장사지내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속이는 거짓말에 속아 벧엘에서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좀 더 깊이 말하자면 우상의 집에서 먹고 마신 죄에 대해 엄중한 심판으로 갚으신 사실을 목도한 그 선지자는 처음 13장 서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해 외친 그 말씀이 반드시 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묘실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죽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한 것이지요. 뼈가 제단 위에서 태워지는 그 심판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조상의 묘실에 들지 못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의 묘실에 들지 못 한다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분리된다는 말이요, 또한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한데도 우상의 제단이 있는 벧엘에 뼈가 묻힌다고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믿음 좋은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 갈 수 는 없는 일입니다. 사후의 명예까지도 생각하는 늙은 선지자이지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어떤 행동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벧엘에서 나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데만 치중하다보면 전후 문맥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놓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삽화처럼 기록된 이야기는 좀 더 넓은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어김없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여로보암이 우상숭배를 버리도록 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이 일을 보고도(알고도) 계속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면서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고 악행을 자행하고 있음을 13장 말미(33-34)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지금은 비록 악한 왕일지라도,그 전에 하나님은 그에게 먼저 선한 약속을 11장 38절에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끝내 돌이키지 아니한 여로보암은 평행구절인 역대하 13장 20절에서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심판을 자초했는가를 역사를 통해 교훈하고자 기록한 말씀입니다. 포로생활 가운데서 자신들과 그들 조상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회복을 구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정경 가운데 한 권의 책으로서 열왕기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열왕기 중 오늘 본문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구속사의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알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그 어떤 배역과 훼방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그림자로 해서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약속하신 구원자의 오심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구약의 예언과 그 성취의 기록인 복음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십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임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하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셧습니다.(딤후3:15-17)

오늘 강해의 본문으로 삼은 왕상 13장은 큰 줄기의 교훈뿐만 아니라 작은 지류의 몰소리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구속사적 언약적 성경읽기와 하나님 나라 관(觀)으로 성경 읽기도 좋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좀 더 풍성한 적용을 해서 우리 삶이 영적으로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일 것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성경을 가까이 하셔서 이 혼탁한 시대에 거짓 교훈에 빠지지 않고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더하여 벧엘은, 마침내 기름부음 받으신 산돌(Living Stone)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그 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집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거처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시는 여로분이야말로 진정 복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다시말해 자기 목숨 보존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죽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지라! 아멘!

*누지문서 님의 글에 댓글로 달려고 했지만 너무 길어서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좀 더 풍성한 적용을 할 수 있음에도 약(略)한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출처: 아멘넷, 글/지혜자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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