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만 돋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나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어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요리문답 1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부정적으로는’ 그에게 부가적인 영광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완전하시고 영광스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본질적인 영광에 조금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긍정적으로는’ 인생들이 그들의 삶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만물도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만(롬 1:20),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진 못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declare, 시 19:1)”라는 말씀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법정적으로 선포(선포는 법정적 용어, 요 6:35; 롬 1:4)할 뿐, 그것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여내질 못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연은 ‘자발성’과 ‘의도성’을 가진 인격이 아니기에, 인격자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돋보여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발성을 가진 하나님 형상의 인격자이긴 하지만, 죄로 인한 불완전함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흠하시고 자발성을 가진 하나님 형상의 인격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돋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과 결부시킨 것은 두 인격이 불가분리인 일체이며, 각 위의 영광의 돋보임이 서로에게 의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각 위(位, personality)가 개별로서는 영광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영광의 돋보임인 서로에게, 혹은 서로의 사역에 의존돼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성부의 영광의 돋보임이 성자에 의존돼 있음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다음 구절은 ‘성자의 영광’의 돋보임이 ‘성부의 영광’과 불가분리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면서 성부와 연결지어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이라 했음은, 독생자의 영광의 발원지가 성부이시고 성자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과 함께 돋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전적으로 무능해진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위할 뿐입니다. 이를 인정치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려다 사달(事端)이 납니다.

특히 율법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율법적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다 율법의 정죄를 받은 것은, 교회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궤적(軌跡)들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다가 저주에 떨어졌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했으며 인간들을 얼마나 무능하게 했는지를 모르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가 컸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데는 인간은 전혀 무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내실 때 염두에 두신 것은 성자 그리스도였습니다. 죄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아는 이도, 율법의 의를 이루어 자신의 진노를 풀어줄 이도 성자뿐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율법의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죄로 절망하여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께 피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려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은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뿐더러, 구원 이후의 하나님 섬김 역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 그리스도인’의 표상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함(빌 3:3)”이라고 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봉사 동력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하나님 섬김은 그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입니다. 곧 성도 안의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들입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선행)를 보고 만족해 하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인간의 행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 행위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심으로서입니다.

그들의 봉사, 선행이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는 것은 선행 자체의 가치보다, 그것을 있게 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없었다면, 그들의 봉사도 불가능했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 3:17)”고 한 것도, 우리의 봉사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 봉사를 있게 하는 예수의 이름을 가치롭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벧전 4:11).”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도 그들의 기도를 열납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공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신 것도(요 14:13-14)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께 열납 돼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기도의 응답을 이끌어 냅니다.

이 점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공로)을 돋보여 내는 통로입니다. 인간의 봉사나 기도는 모두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할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나 자연 만물 같은 피조물들에 의해 증거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웅큼으로 태평양 바닷물을 측량하고, 줄자로 오대양을 측량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됩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하나님은 오직 삼위 하나님에 의해서만 자증(自證, one's own evidence)됩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와 성령에 의해서만, 성부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요 5:32)”,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리고 이 삼위 하나님의 자증(自證)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룬 복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곧 복음 안에서 역사하여 이루신 삼위 하나님의 자증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자증인 복음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증거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무한자 하나님을 유한자 인간이 증거할 수 없다는 전제와 인간의 복음전파 없이는 하나님이 증거될 수 없다는 두 전제의 충돌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에는 인간의 ‘역할’과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이 측면들이 다 충족돼야 합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자증인 복음을 ‘전파하는 자(proclaimer)’로 한정시킴으로서 충족됩니다. 복음에 인간의 지혜가 가미되면 삼위 하나님의 자증 능력이 훼손을 입기에,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도록 ‘전파자(proclaimer)’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쉽게 말하면, 복음 전파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이란 삼위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스스로 자증(自證)하도록, 사도 요한이 말한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요 1:23)’의 역할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자증으로 된 복음을 듣고 세운 신앙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진 신앙이 됩니다(고전 2:5).


복음 설교자들이여! 여러분은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우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5234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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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1) -존 플라벨-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불가사의하고 영광스러운 신비이다.

성경은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시 47:2)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시 138:6)라는 말씀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신 것도 심원한 신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편 57편 2절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가지 신비가 서로 만나 하나가 되었을 때 신비 중의 신비를 이룬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괴로움에 처한 비천한 인간을 위해 만사를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주관하시며, 가장 부패한 생각과 반역을 일삼은 우리 인간을 다스려 복되고 행복한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성도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야 할 이유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지는 시편 57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위대한 사례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시편 57편은 표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이 기록했으며 기록한 시기는 그가 사울의 추적을 피해 동굴에 은신했을 때이다. 이 시는 “악장에게 준 다윗의 막담. 알다스헷. 그가 사울을 피하여 동굴에 있을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데, ‘알다스헷’은 저자의 의도를, ‘믹담’은 주제의 장중함을 암시한다. ‘알다스헷’은 “죽이지 말라” 혹은 “살육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사울을 염두에 두고 다윗이 부하들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위급한 상황에서 영혼을 쏟아놓으며 “저를 죽이지 마소서”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한편 ‘믹담’은 “황금 장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편 57편의 탁월한 주제와 매우 잘 어울린다.
시편 57편의 전반부는 다윗이 처한 극도의 위기, 극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절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이 기도의 논거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다윗이 처한 극도의 위기는 표제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이 시를 기록한 시기는 사울의 추적을 피해 동굴에 몸을 숨겼을 때이다. 그가 숨었던 동굴은 엔게다 광야에 있었는데, 그곳은 야생 염소가 서식하는 암석지대로 은밀하고 황량한 바위틈이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은 그곳까지 다윗을 추적해 갔다(삼상 24:12).
오랫동안 자고새처럼 쫓기던 다윗은 마침내 그물에 걸리고야 말 운명인 듯 했다. 원수들이 동굴 밖으로 몰려들었다. 그곳 외에 다른 출구는 없었다. 사울이 다윗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던 동굴의 입구까지 다가왔다. 다윗의 눈에 사울의 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이었다. “내 혼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내가 불 위에 놓인 자들 가운데 누웠으니”라는 탄식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시 57:4).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운데서도 자신의 의무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간절한 기도로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시 57:1).

다윗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조차도 불안해할 법한 상황에서 이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반복 어구는 극도의 위기 상황과 기도자의 간절한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그분의 긍휼뿐이었다.
극도의 위기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 몇 가지 논거를 제시했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한 그의 첫 번째 논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 하나님이여, 내 혼이 주를 신뢰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소서. 참으로 이 재난들이 지나갈 때까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 내 피난처를 두리이다.”(시 57:1)
다윗은 모든 체면을 내던지고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했다. 다윗의 태도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즉 자신의 날개 아래 피하려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이런 태도는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에게 주어진 보호의 약속을 믿는 신앙과 일맥상통한다(사 26:3). 다윗이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어라

두 번째로 다윗은 위기에서 벗어났던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소망과 용기의 근거로 삼았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시 57:2)
이 말씀에서 생각해 볼 점은 두 가지이다.
확고한 결심과 그러한 결심을 갖게 된 동기가 그것이다. 다윗은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고 결심했다. 그의 단호한 표현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강렬하고 열정적인 기도를 암시한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거룩한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뜻한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신속히 상달된다(시 18:6)(히 5:7)

다윗의 확고한 결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다윗의 믿음은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울은 왕이라는 높은 신분이었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울이 자신의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윗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혹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먼저 돕지 않으시면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윗에게는 사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나 그의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는 구원을 베푸실 방법이 무한히 있으시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믿음을 지탱해준 근거였다(시 59:9).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과거의 경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이루시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어근은 ‘완전하게 하다’, ‘중단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면 일하던 사람은 일손을 멈추고 일을 중단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과거에 직면했던 어렵고 불확실한 문제를 모두 완벽하게 해결해주셨다. 다윗은 그런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눈앞의 위기를 완벽하게 처리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시 138:8)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은 섭리의 개념을 가장 적절하고 확실하게 표현한다. 다시 말해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은혜로운 목적과 약속을 이루시는 사역을 의미한다. 다윗의 믿음에 큰 용기를 준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역경과 시련이 많은 인생을 살았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어떤 곤경에 처했든지 결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비록 눈앞의 위기가 과거에 겪었던 어떤 시련보다 더욱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 하나님의 섭리에서 발췌 -

 

 

http://thevine21.hompee.com/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도르트 신경과 칼빈주의 5대 교리

- 리차드 멀러 (Richard Muller, 전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도르트 신경은 야곱 알미니우스 (Jacob Arminius, 1559-1609)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유럽 전역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에서 파송된 목사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대표단들의 신중하고 일치된 노력에 의해 1618-19년에 작성되었다. 알미니우스의 신학과, (그가 목사와 교수로 임명되었던) 개혁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가르침과 그의 견해의 차이점에 대한 알미니우스 자신의 공식적 주장은 그의 ‘소신 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 1608)’을 통해 네덜란드에 알려지게 되었다. 은혜는 저항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한 번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것이 효과가 없게 되는 데까지 저항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달려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또한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특별히 구원에 절대적 토대가 되지 않는 교리적 요소들에 관해서 – 추정되기로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들이 신앙고백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정의들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으로 – 그렇게 주장했다. 그가 자신의 견해와 같은 관점들이 이미 일련의 교회 총회들에 의해 신앙고백적 경계 선상 내에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거부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알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마흔 여섯 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항의서(Remonstrance, 1610)로 자신들의 견해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응답, 즉 항의서에 대한 반대 견해(Contra-Remonstrance)가 뒤 따라 나왔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위해 네덜란드 의회는 전국 교회 총회를 1618년에 도르트에서 개최하도록 요청했다. 총회 대표자들은 네덜란드의 다양한 지역들 –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왈론 사람들의 교회들, 라이던, 흐로닝헌, 하르데르윅, 그리고 미델뷔르흐에 있는 종합대학들 혹은 학교들의 교수들 – 과 개혁주의 유럽의 도처에 있던 일련의 개혁주의 도시들과 공국들에서 임명되었다. 프랑스 대표들은 프랑스 왕 루이 13세에 의해 참석이 금지되었다. 도르트 신경은 알미니우스파 항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견해에 관한 대표자들 간의 수많은 회의들과 대표자들의 보고서들을 최종적으로 비교분석한 결과물이다.


도르트 신경에 대한 일반적 오해들

하나 되는 세 고백서들(The Three Forms of Unity3]중, 도르트 신경은 가장 작게 이해되어 왔고 가장 작게 평가되어 왔다. 이것의 주요 원인은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오히려 유감스러운 문구의 안경을 통해 도르트 신경을 환원주의적으로 읽는 것과 두문자어인 TULIP으로 이 신경을 설명하려는 심지어 더 문제가 많은 시도에 기인한다. 하지만 도르트 신경은 다섯 가지 교리적 논제들을 언급하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다섯 가지 교리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알미니우스파 항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교리의 항목들이 다섯 가지 주요 부분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혹은 더 정확한 이름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의 더 폭넓은 가르침들은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남아 있다. 도르트 신경은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알미니우스파 항의자들을 강력히 반대하는 이 두 주요 고백서들의 해석적 추가조항 혹은 부록으로 기능한다. 두문자어 TULIP은 근대적 시도이고 아마 20세기 초반에 기원한 것 같으며 19세기 후반 이전에는 분명히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환원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이 신경을 매우 잘못되고 축소되게 읽도록 인도한다. 우리가 도르트 신경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은 어떻게 그것이 이러한 용어들에 의해 억지로 쉽게 짜 맞춰질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르트 신경의 가르침

도르트 신경에는 네 개의 항목들로 나누어지는 다섯 가지 “표제들(heads)” 즉 기본적인 신학 논제들이 있다. 그것들은 각각 (1)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2)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구속”; (3-4)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께로의 회심”; 그리고 (5) “성도의 견인”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도르트 신경의 실제적 순서가 TULIP의 순서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 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즉시 분명해 진다. 더욱이 이 신경의 가르침에 대한 고찰은 심지어 ULTIP과 같은 두문자어의 재배열도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이 용어들 중 도르트 신경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단 하나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그리고 무조건적 선택은 이 신경의 실제적 문구들로부터 이끌어 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용어들은 오로지 난관과 많은 설명과 함께 할 때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논제는 단순히 무조건적 선택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이슈가 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죄악됨; 죄의 대가, 즉, 영원한 죽음; 그리고 복음에 관한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은 영생의 선물을 받을 것이고, 반면 믿지 않는 이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 것이다. 도르트 신경은 특별히 불신앙을 포함하는 모든 죄의 원인이 인간에게만 귀속한다고 말한다. –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가르치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엡 1:4-5; 2:8, 10; 빌 1:29).

그 두 번째 논제에서 도르트 신경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온 세상의 죄들을 속하기에 충분한” 속죄와 동일시함으로 구원의 은혜로운 성격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 충분성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이 신경의 선언에 기초를 제공한다. 게다가 이 신경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이들”이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다고 역설한다. 어떻게 이러한 교리가 “제한적 속죄”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가는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도르트 신경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님을 또한 인정한다. 도르트 신경은 한편으로는 모든 구원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돌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든 이들에게는 은혜로 믿음이 주어질 것이고 구원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신앙의 잘못이 인간들 스스로에게 있다고 또한 선언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나 혹은 인간의 선택이 충실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나 믿음에 대한] 그분의 예지에 기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근거한 영원히 작정된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의 영원한 선택이다. 따라서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불변한다. 반면 정죄 혹은 심판은 죄로 인해서만 발생한다. 선택이 복음의 선포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시간 속에 드러나는 것처럼, 선택에 대한 확신 또한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양상이다. 확신은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 죄에 대한 애통, 그리고 의에 대한 목마름의 체험으로부터 일어난다. 유기는 어떤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죄악 된 상태에 그들을 내버려두는,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죄에 기반해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심으로 마지막 정죄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로 간략하게 언급된다. 유기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무죄한 사람들을 거절하시는 것으로는 진술하지 않는다.

도르트 신경의 첫 번째 논제의 초반에 하나님께로의 회심에 관한 문제와 함께 소개되었던 인간의 상태에 관한 문제는 이 신경의 세 번째 부분(3-4 논제들)에서 다시 나타나고 첫 번째 논제에서 이야기되었던 기본적 문제들에 대한 더 완전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성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무능, 특별히 의에 대한 신적 요구를 성취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 이것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가 아니다. 이 신경은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선에 대한 감각과 심지어 그것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진술한다. 오히려 이것은 자연적 이성의 빛을 통해서건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건 그들 자신의 부패한 죄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에 관한 교리이다. 이 모든 것들은 참된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복음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름을 통해서만 유효하다. 복음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

도르트 신경은 또한 주장하기를, 복음이 사람들에게 마치 그들이 꼭두각시인 것처럼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며 강제적으로 구원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을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는 제1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다른 수단들은 성례들과 교회의 권징, 즉 개혁신앙에서 말하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지들이다. 성례들과 교회의 권징은 복음에 대한 증거들이다. 그 표지들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중요하면서도 종종 잘못 이해된다. 여기서 이슈는 교회의 삶과 활동들을 제한하는 것에 대함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역사가 말씀과 성례를 통해 올바르게 전해지고 집행되는 곳으로서의 참된 교회의 존재를 보여주는 구체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특성들을 확인하는 것에 대함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논제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의 지속적인 선포와 성례들의 집행은 다섯 번째 논제에서 거론되는 이슈인 성도의 견인으로 바로 인도한다. 도르트 신경은 여기서 또한 오해되거나 희화될 수 있다. 그것들은 결코 죄에 대한 손쉬운 승리나 구원으로의 손쉬운 길 혹은 일단 어떤 사람이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의 삶은 성령의 사역을 반영할 필요가 없다는 가정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신경은 중생이 그리스도인들을 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님을 진술하는 데 신속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많은 실패와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를 포함한다. 하지만 이 신경이 가르치는 바는 구원에의 견인이 실패할 수 있는 인간의 과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틀림없는 역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은혜의 방편들은 또한 견인의 방편들이다.


결 론

1. 도르트 신경의 전체에 걸쳐서 성경의 지속적인 인용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의 가르침은 형식적이거나, 사변적이거나, 혹은 철학적이지 않다. 그 가르침은 어쩌면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이 신경이 교회의 기본적 고백이나 요리문답적 가르침이 아니라 신학적 문제에 관한 대답이라는 데 있다. 알미니우스파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개혁 교회들은 도르트 신경에 의해 진술되는 성경적 진리를 계속해서 확신하고 있다.

2. 리차드 멀러 교수는 듀크대학의 스타인메츠 교수 아래서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197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논문은 1986년에 출판, 2008년에 재판되었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가르쳤고(1980-1992), 칼빈 신학교에서 작년에 은퇴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존더반 석좌교수 자격으로 역사신학 분과에서 가르쳤다. 그의 저서로는 A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1985), The Study of Theology (1991),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2000),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1991), Post 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4 vols; 2003),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2003),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2012) 등이 있다.

3. 여기서 ‘하나 되는 세 고백서들’은 종교개혁 시대를 통해 수립된 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가리킨다. 이 신앙 고백 문서들의 사상과 내용이 일치한다는 점에 이름이 연유한다. 개혁주의 신앙을 잘 표현하는 문서로 여겨지며, 개혁교회를 다른 교파들과 구분 짓는 중요한 문서들이다.


- 개혁정론 ( http://www.reformedjr.com )

출처: 안산회복교회/안상범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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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어가는 사람처럼 설교한 백스터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백스터의 성경 사랑과 회심 체험

17세기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한 영국의 슈롭셔 주 로우톤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청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였고 어머니의 건강 악화 때문에 그는 10년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지내야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회심하게 되자 백스터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청교도’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단지 경멸의 용어로 배웠을 뿐이었고, 그의 고향 교회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낭독자가 있었으나 성경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스터의 회심에 제일 먼저 영적으로 감명을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도박꾼이었으나 혼자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삶이 변화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백스터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역사 부분을 읽게 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과 미래의 삶에 대하여 말해 주어 그것으로 인해 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비록 교리적인 부분과 구속의 신비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성경에 깊이 몰두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백스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경을 읽고 회심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때가 15살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놀라우신 사랑을 경험한 백스터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실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그의 마음은 영적인 것에 더욱 더 절실하게 되었고 그가 죄를 범할 때면 그의 양심은 몹시 괴로워했다.

백스터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지만 존 번연처럼 독학하였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으며, 신학적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학과 형이상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신학과 중세 신학자들, 철학, 의학, 약학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이 쓴 책을 읽음으로써 종교 개혁 사상을 배웠고, 영국 청교도들의 서적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생생하게 느끼며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러한 회심 체험이 그의 사역에 열정을 쏟게 만들었다.

점점 세속화 되어 영적 능력을 상실해가는 성직자들 


사회적으로 방탕과 유혹의 시기였던 그 당시에 목사들은 무지하고 나태하여 교인들의 생활에 무관심하였다. 백스터의 고향인 로우톤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4명의 낭독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도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가운데 2명은 부도덕하여 성도들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또한 3개월에 한 번씩 설교를 전하고, 자주 술집을 드나들며 때로는 술에 취하기도 하였다. 어떤 성직자는 설교 준비보다 술집에 앉아 있기를 즐기다가 교회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또한 목회자의 재정적인 타락도 극에 달하였다.

교회의 부패는 평신도들에게서도 극심하게 드러났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는 운동회나 무희들의 패션쇼와 같게 되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대신 운동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배 후에 밤이 지새도록 춤을 추며 쾌락에 빠져 흥청거리곤 했다. 영국 교회의 예배가 의식주의로 만연되었다.

키더민스터 교회에서 백스터의 목회사역

1638년 백스터는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더들리에 있는 교구교회와 주변 마을 교회에서 종종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설교할 때 마다 예배당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후 그는 브리지노쓰로 옮겨 2년 동안 열정적인 설교 사역을 하다가 1641년에 작은 도시 키더민스터 (Kidderminster) 교회로부터 칭빙을 받았다. 영적으로 황무지 같은 교회에 부임한 백스터는 키더민스터 교회를 청교도 신앙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였다.

* 열정적인 설교 사역 

백스터는 목회 사역에서 최우선적으로 설교 준비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백스터에게 설교가 항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그는 최고로 부지런하게 설교를 준비했고, 또한 설교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했다. 그는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려는 열렬한 소원을 갖고서 항상 회심을 이끌어 내는 복음 설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강단에서의 그의 설교는 청중들의 양심과 심령에 죄를 자각케 하고 모든 위선을 들추어 내게 하였다. 그는 죄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였고 죄인들에게 살아있는 진리를 선포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아주 힘 있고 꾸밈이 없었고 불꽃처럼 타 올랐으며 항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생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살아있는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들은 자들은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설교사역에 많은 회심과 부흥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키더민스터 교회에서의 그의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설교사역을 축복하셨다.

* 개인별 교리문답 교육

백스터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보조 사역자들과 함께 매주 2일에 걸쳐 교구민들의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개인별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한 가정당, 한 시간 정도를 교리 교육을 하였는데 특별히 회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양육하였다. 사역자들은 성도 개개인의 성향과 수준에 맞는 교육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여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심방을 하였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던 회중들이 요리문답 교육을 통해 많은 영적 지식을 얻도록 하였다. 백스터는 개인들에 대한 수준 높은 목회 (pastoral care) 를 실천했다. 리차드 그린햄은 “교리문답 교육이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고 로마 카톨릭 교회를 심각하게 도전하고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백스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복음을 집으로 가져와 가정이 복음으로 물들게 하였다. 이처럼 열정적인 심방 사역은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영혼들의 회심에 목회 초첨을 둠 

백스터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교리문답 교육을 필수적인 목회 요소로 보았던 이유는 영혼들의 회심을 위한 가장 유익한 수단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회심한 사람들의 올바른 성장을 촉진시키며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는 최상의 길은 회심이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회심이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아마 백스터의 전후의 어떤 저술가나 목사도 회심의 중요성과 회심이 교구 개혁과 맺고 있는 연관성에 대해 이처럼 확고한 신념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기도생활, 공 예배 출석, 신앙 실천 강조

백스터의 기도는 매우 강력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그는 그의 무릎에서 그의 설교들을 얻어냈으며 특별히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는 회중을 위해 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쉬지 않는 기도 생활을 가르쳤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변하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변화된다”고 말하면서 영적개혁을 위해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더 나아가 백스터는 철저한 공적인 예배 출석을 강조하였다. 성도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신약적인 예배 즉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드리던 예배를 회복할 것을 가르쳤다. 이처럼 예배의 개혁을 촉구함으로써 키더민스터를 성경중심적인 마을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백스터는 가정 예배를 권장하면서 신자 교육을 위해 자신이 쓴 책 한 두 권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백스터는 경건한 신앙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성도들의 생활이 개혁되기를 원했다. 특별히 거룩을 많이 강조하였는데 그는 ‘거룩이란 가장 많이 유익을 얻고 안전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요, 가장 영예스럽고 즐거운 길’이라고 말하였다. 백스터의 경건과 영성 그리고 열정적인 목회사역은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마을 전체가 회심했던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진리를 선포함”

리처드 백스터의 열정적인 설교와 교리 교육, 그리고 심방과 복음 전도로 인하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특별히 그의 강력한 설교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분명한 결단을 내렸고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의 심령에 불을 지펴 오순절 불길처럼 키더민스터 성도들의 영혼 속에서 타올랐다. 그의 사역은 키더민스터 마을을 변화시켰다. 작은 촌락 키더민스터에서 살고 있는 성인 2천명이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 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이었고 겸손하고 경건한 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몇몇 술집 주인들의 가족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회중의 규모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키더민스터 교회는 매주 600여명의 신자가 회집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교회가 비좁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개의 발코니를 더 확장해야 했다.

그리고 많은 가정들이 양심의 회개를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열매를 맺었다. 부흥으로 인해 아침과 저녁의 가정 예배 시간이 되면 모든 가정에서 시편을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든 골목이 찬송과 기도 소리로 메아리 쳤다. 한 가정에서 찬송이 끝나면 다른 가정에서 찬송이 연이어졌고, 한 가정에서 설교 소리가 끝나면 다른 가정에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모습 속에 신앙적 생명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특별히 주일이면 거리에서 단 한 건의 무질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평화롭고 고요하였다. 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시편을 찬양하였다. 또한 그들은 설교문을 읽고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수 많은 회심자들 가운데 세속의 길로 빠져 실족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백스터가 영국 우스터셔 (Worcestershire)에 위치한 키더민스터 교회의 목사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한 거리에 한 가정 정도만이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지만 사역 후기에는 그 마음에 있는 모든 가정이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게 되었다. 이와같은 키더민스터 부흥으로 인하여 교회는 소문나게 되었다. 그의 목회사역에 성령의 부으심과 역사하심으로 인해 키더민스터 마을 전체가 회심했던 부흥 이야기는 놀랍고 감동적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목회자들을 깨우치는 백스터의 ‘참된 목자’ (The Reformed Pastor) 

백스터는 목회자 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교회의 온갖 부패가 목회자에게서 시작된다고 보고, 먼저 목회자의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주변 교회의 목사들에게 매월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성경 말씀에 대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안을 받은 목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석하여 기도와 성경 연구 모임이 활성화 되었다. 교회의 성장이 외적인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던 백스터는 교회의 문제를 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다고 권하였다.

백스터의 감동 저서인 “참된 목자 (The Reformed Pastor)”에서 그는 목회자의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 생활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과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지식, 목회적 열정, 목회자의 언행일치, 지도력과 행정 능력 등이 교회 부흥과 침체를 결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백스터는 참된 목자가 되려면 부단한 자기 개발이 필요하며, 죄의 유혹을 멀리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권면하였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자신이 은혜 가운데 있다고 만족하지 말라. 당신의 은혜가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실천 속에서 지켜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자신이 공부하고 준비한 설교들을 스스로에게 먼저 설교하라.” 백스터는 목회자에게 먼저 믿음과 사랑과 열성이 넘치면 이와 동일한 은혜들이 회중들에게 신선한 은혜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백스터는 목회자들이 참으로 훌륭한 교리를 설교하면서 반드시 생명력 있는 적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메시지를 통하여 청중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갖기를 갈망하였으며, 반면에 그들의 마음을 경박하고도 웃기게 하고 즐겁게 하는 설교를 가장 혐오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적 의사인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잘못된 치료제를 처방하는 것은 그들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영혼 살인자가 되게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백스터는 “내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을 받거나, 아니면 나의 나태함으로 멸망하여 지옥에 간다는 무섭고 중대한 생각을 해보라”고 말하면서 이처럼 무섭고 엄청난 생각이 항상 설교자들의 심령 속에 머물러 있기를 권면하였다. 또한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마음을 각성시키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살펴 깨우고 각성시키며, 세상적인 경향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열정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생기가 없는 게으른 설교자는 졸고 있는 죄인들을 결코 각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 책은 필립 도드리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찰스 스펄전 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저명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백스터의 많은 저서와 신학 사상 문제 

백스터는 설교사역의 침묵을 강요당한 기간 동안에 집필에 열중하였다. 169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150편의 논문을 썼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별히 그의 감동적인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과 “회개치 않는 자들에의 부르심”, 그리고 목회자들을 위한 필독서 “참 목자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회심하였다. 그리고 그의 베스트셀러 중에 “크리스천 핸드북, 거룩, 천국을 준비했는가, 백스터의 자취 혹은 회고록” 등이 있다. 그는 기독교의 저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그의 책들은 주로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글 보다는 헌신적이고 목회적인 강해서들이 많았다. 청교도 목사인 존 제인웨이는 자신의 회심에 있어서 백스터의 책을 읽은 것이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백스터의 신학적 오류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책들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 그의 작품들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특이한 혼합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작정, 속죄, 칭의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리처드 백스터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제임스 패커 (Packer)는 백스터는 이것 저것을 마구 섞어 놓았는데 그의 신학 때문에 다음 세대가 교리적 혼란을 겪는다고 말했다. 백스터는 개혁주의 신학 라인을 따라 형성해 가면서도 때로는 알미니안주의적 사고에 기울였다. 예를들면 백스터의 칭의론과 속죄론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비국교도 운동의 지도자 백스터 

백스터는 1638년에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나 실은 비국교도 목사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예배 의식과 규율에 얽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비국교도들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정부 당국과 청교도들과의 대립은 백스터의 설교사역을 순탄케 하지 못하였다. 1662년 5월, 찰스 2세는 통일령을 발포하였는데 백스터는 발포된 통일령의 정책에 항의를 표하면서 궁정 목사직을 사임하고 비국교도 목사들 편에 서게 된다. 찰스 2세의 박해로 비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수 많은 목사들이 교회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이 통일령은 수 많은 청교도 목사들을 거리로 내 몰았으며, 백스터도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토록 사랑하던 목회지를 떠나야 했다. 이때에 백스터는 통한의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백스터는 1662년 대추방 이후로 비국교도들 가운데 보수적인 집단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1664년 비밀 집회령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정부 당국이 설교를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스터는 설교를 들을려고 몰려든 성도들에게 설교하였다. 결국 이 일로 그는 체포되어 18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1675년 모든 비국교도 설교권이 다시 상실되었지만 한 예배당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다.

세상 떠나기 전 런던시를 위한 기도 - “하나님, 무지한 이 도시를 긍휼히 여기소서!”

백스터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육체적인 질병이었다. 많은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건강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었던 몸이었다. 그는 매주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지만 혹시 내려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스터는 자신이 질병을 늘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 육체적인 고통이 그로 하여금 세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않도록 해 주었으며, 그리고 매 순간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매일을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았다. 백스터는 그의 병이 여러 번 재발한데다 핍박까지 받아 몸이 몹시 지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런던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불쌍하고 무지한 이 도시를 긍휼히, 긍휼히, 긍휼히 여기소서.” 1691년 12월 8일, 비국교도의 아름다운 말씀 사역자 백스터는 76세의 나이로 주님의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

백스터는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이요, 교회를 개혁시킨 강력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신실하고 긴박한 설교자요, 청교도 설교자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해외 선교사역에도 동일한 열정적 관심이 있었다. 그는 복음 전파 선교회를 설립하는데 주역을 맡았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다. 백스터는 죽음의 병상에서 엘리옷 선교사의 생애를 읽고서 감동받기도 하였다. 불같은 열정으로 사역했던 백스터의 생애가 끝났다.

리처드 백스터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진리를 선포함”

1. 백스터는 복음으로 영혼을 일깨워 준 신실한 말씀 사역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을 힘을 다해 설교했던 위대한 설교자였다. 개혁과 부흥의 시기에는 항상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다. 백스터에게 설교가 항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설교는 모든 목회자들의 복음 사역에 속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는 항상 회심을 목표로 하였다.

2. 백스터는 기본적인 교리문답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교리문답 교육에 힘썼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본적인 교리 문답 교육을 통해 회심할 자를 찾아 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양육하였다. 이처럼 백스터의 목회 사역의 핵심은 말씀선포와 교리 문답 교육 이었는데 백스터의 이러한 열정적인 사역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셨다. 그가 목회하였던 키더민스터 마을 전체가 회심하였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부흥이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면서

부흥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고 나타나는 것인데 지금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부흥이 필요하다. 개혁과 부흥의 시기에는 항상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다. 복음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설교할 때 마다 지금 이 시간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죽을 힘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말씀과 교리를 붙잡는 균형잡힌 설교자가 진리위에 든든히 서 가는 교회를 세워갈 것이다. 누가 점점 침체해져가는 교회를 살릴 것인가? 누가 회심을 목표로 한 강력한 말씀선포와 교리문답 교육을 할 것인가? 누가 이 시대에 부흥의 주역이 될 것인가? 강단에서 하늘의 진리를 불처럼 토해내는 열정적인 설교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약 300년 전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이 우리의 설교 사역 가운데 다시 리바이벌 되기를 갈망한다.

*김현배 목사/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신자들은 비복음적인 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 가지고 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무오한 진리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되 그 권위가 인간에게 의존하거나 교회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오직 성경에 따라 자연 속에 있는 자유에 대한 강조가 고백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택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그 방식 혹은 길에 대한 고백에 앞서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고백이 하나의 장으로 고백되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보존에 대한 고백과 은혜와 구원의 보증에 대한 고백 이후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에 대해서 은혜 아래 중생된 자들의 경우 더 강화된 성격을 강조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에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고백이 뒤따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옛 교회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즉 그의 행위들과 고난들 및 은택들을 예표하는 규례들인 의식법에 대한 폐지와 정치적 집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재판법의 만료를 담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도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도덕법으로서 율법과 관련해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된 자들에게 성경에 따라 더 강화된 그런 고백 조항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논리적으로 종속될 수 없을 것 같은 예배와 안식일에 대한 고백, 법적 맹세와 선서에 대한 고백, 관원에 대한 고백 및 결혼과 이혼에 관한 고백 등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고백 조항들에 일종의 저항 정신을 담고자 하는 면이 있다.


   그와는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이후에 이미 작정과 예정에 대한 고백에서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져 있는 택자들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백들이 순서 상 자유 의지에 관한 고백에 종속이 되어 있다는 입장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에 대한 고백의 제1항 안에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이 포함이 되어 있다는 점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시편 115편 3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가장 자유롭다고 하면서 그 자신의 의지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논의에 의해서 일어날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영원 전부터 결정하였고 그의 의지의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서 그의 영광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미리 정하였지만, 그 결정에 있어서 피조물들의 의지에 어떤 폭력이 제공된 일이 없고 두 번째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도 없애버리는 일이 없는 방식이었음을 처음부터 정의해 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섭리도 첫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해서 모든 것들이 불변하고 틀림없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제2 원인들의 본성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연하게 일어나도록 질서화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상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란 그 핵심으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라는 고백에 근거해 있으며 반대로 이것은 기독교 자유의 가식아래 양심의 참된 자유를 배역하고 기독교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어떤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의 교리들이나 명령들에 저항하는 데 있다.


   그런 기독교 양심에 의한 저항의 내용에 맹목적 신앙이나 절대적이고 눈먼 순종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포함하지만, 훨씬 깊게 유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택자들이 값없이 자유롭게 의롭다고 여겨지는 일이란 단지 그들의 죄들이 용서되는 방식이 아닌 마치 의가 부어지는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배제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 때문이 아닌 그들 안에 일어나거나 행해진 어떤 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든지, 혹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의 전가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자신의 의로서 신앙 자체나 신앙 행위 혹은 어떤 다른 복음적 순종의 전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일체의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고 쉬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런 고백들과 함께 극히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양심 자체는 비 성경적인 일들에 대하여 이미 저항의 근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조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놀라운 강조도 아직 고린도전서의 초반 논증들이나 로마서 전체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 자신의 실제적인 강조의 방식에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오래된 순수한 저항 정신은 실로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최소한 그런 고백들과 사도 바울과 같은 진리를 가진 자로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 개인들은 과학과 그 기술들이 그 합리성으로 대표되어 가고 있는 미래 사회에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점점 더 심하게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성장과 함께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저항하는 양심 뒤에 가식과 더불어 숨어 있는 더 본질적이고 더 큰 허무주의가 점점 크게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는 언제든지 돈이나 물질로 오염된 국민 개인의 신앙 자유를 세법개정으로 압박해 오는 국가적 통제나 감시자로서 실제적으로는 부패의 덩어리이요 원상인 기관장들에게 더 힘을 싫어주고, 오히려 이제 가냘픈 서민의 양심까지 그들에게 다 맡겨야 하는 현실적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주는 압박보다 더 좌절되게 하는 힘의 깊은 원천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구 환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밀려오는 피해들보다 더 큰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할 내용으로 인한 그런 짐이 더 무거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로만 위로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마지막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피눈물이 나는 눈물을 닦고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임을 믿으며 그런 내적인 무서운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를 참아내어 끝까지 하나님이 바로 진정 그들의 보상이요 영광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힘은 여전히 부활과 그 영광에 이르기 전에 그와 같은 일을 증명해 내는데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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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2014년 봄 경건서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를 읽고 요약한 것입니다.

 

저자는 지금부터 약 15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사역하신 목사님으로, 그의 책들은 정통 칼빈 신앙으로부터 변질되어 가던 당시에 개혁주의 신앙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합니다. 본 책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원제목은 ‘The Abiding Presence’로서 변치 않는(지속적인) 임재(함께 하심)라는 의미입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본 책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약속대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지난 2월에 열린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정기 세미나에서 Ian D. Cambell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관한 마지막 시리즈 설교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들으며, 이 책의 내용도 궁금해졌고 잘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의 구성은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고 소제목도 달려 있으나, 모든 부분이 임재라는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처음에는 책 전체의 구조가 쉽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첫 파트(1-6)임재와 전기의 결합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로 임재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어 조금 낯설게, 혹은 새로운 원리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원리로 기술한 듯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지만, 여전히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복음서(전기)는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구체적이고 생생히 볼 수 있게 해주고, 임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교제를 나누게 하는 수단이 되므로, 전기와 임재가 둘 모두 필요합니다. 성령을 통한 임재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함께 하셨던 것보다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로 말미암아 이 어두운 세상인 인류에 올 수 있었다면, 성령을 통한 임재는 그 을 영원히 우리에게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P44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복음서가 지금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에 관해 읽을 때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미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하며,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을 읽을 때 지금의 우리도 그 자비를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어느 시대에 속하든지 회개하면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4) 성경을 이렇게 읽는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더 많은 위로를 받고, 더 자주 회개하게 되고, 더 간절히 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 책은 복음서를 왕의 갤러리라고 비유합니다. 구절구절이 예수님 생애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야만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하늘에 속한 영적인 축복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많은 은혜들을 누려야겠습니다.

두 번째 파트 7장에서는 임재의 원리에 의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네 가지 사건(세례 받으심, 광야시험, 회당에서의 설교, 십자가의 희생)을 고찰해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영속성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서 복음서를 읽고 해석하고 은혜를 누리는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함)를 받으신 후 성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해 주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함)를 받을 자들도 자녀로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시간 순서가 뒤바뀐 듯 하지만, 그리스도가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인을 위한 제물이 되실 때, 성부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에 속한 우리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P85  2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것은 아들되심(Sonship)에 대한 것이었으며, 지금의 우리도 동일한 것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녀됨은 영적인 것으로서, 그 영광스러움의 증거들은 세속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에게 배를 채울 떡이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고, 아무런 기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은밀하게, 그러나 안전하게, 아직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P103 이러한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과 동일하게 말씀과 성령에 의존해야 합니다. P115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함을 체휼하셨으며 오직 성령과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p112

3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하신 설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4:16-22)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성경)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구해야 할 것은 새로운 계시나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말씀에 나타난 진리의 빛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34)

4 십자가의 효력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 효력이 미칩니다.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시키시기 때문입니다. P43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 9:4) 그리스도는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P154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세 번째 파트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집니다. 1첫 장은 신앙이 실재적이고 인격적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어야 함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우리는 영적인 것(하나님의 속성과 영광, 우리의 죄악, 대속과 의, 거룩한 공의, 구원의 기쁨.. p 180)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2두 번째 장은 이신 하나님(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공의와 자비)을 밝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3세 번째 장은 임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기뻐하시는 뜻임과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되어 가고, 서로 사랑하게 되며, 박해를 인내할 수 있게 되고, 더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15:4) 4네 번째 장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는 시간을 초월하므로, 모든 성도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믿음의 선조들의 삶과 영적인 복락이 우리에게 기쁨과 은혜가 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28:14)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에게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임마누엘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이루어지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며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세심한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임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지식적으로만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읽기가 조금 힘들었던 책이었지만, 우리의 구원을 적용하시고, 성화를 이루어 나가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임재의 측면에서 깊게 배울 수 있는 유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어떻게 하면 거룩한 삶이라는 위대한 목적에 이를 수 있는가? 거룩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방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셔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네 가지 자질이 있다. 이런 자질을 다 가지고 있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이런 자질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14:31). 모든 어둠의 권세와, 세상과 세상의 유혹들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와 타락을 대적하여 싸움에 나가면서, 악한 세대와 맞서 싸울 영적인 준비가 바로 되었는지 점검하지도 않고 나갈 것인가?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본성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싸우러 나간다. 그 결과, 항상 패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만큼이나 영적인 싸움을 싸울 능력이 없다. 이 말을 믿으라. 우리가 가진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죄와 악에 맞설 수 없다!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한 무엇이 필요하다!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주셔야 하는 첫 번째 자질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심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맹목적인 충동으로 복종할 수 없다. 이성 없는 동물과 같이 본능대로 행동할 수 없다. 죄를 피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총체적인 내면의 성향이 있어야 한다. 자연적인 상태로라면 우리 마음은 악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로는 죄와 사탄의 종 노릇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미워하는 사람이 그것을 지킬 리 없다! 계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저 그런 관심만 가지고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위대한 계명은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분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방식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그분을 가장 탁월한 분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사로잡혀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송이꿀보다 더 달콤해야 한다(19:8). 평생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바라고 목말라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된 정욕을 이겨야 한다. 우리 자신의 죄와 싸우고,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5:17, 36:4).

 

참된 순종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즐겨하는 것을 말한다! 노예가 자유를 갈망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지 않고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야 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죄를 미워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청결한 마음에서 흘러나온다(딤전1:5). 우리의 마음이 먼저 악한 성향과 더러운 생각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마음이 새롭게 된 다음, 거룩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죄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우리의 영혼에서 다뤄야 할 가장 큰 악은 남아 있는 죄이다. 남아 있는 죄로 인해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을 향해 나아간다. 남아 있는 죄에서 모든 실재적인 죄악이 나온다. 죄짓는 것을 멈추고 싶다면 먼저 이런 본성적인 성향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성향을 없애려면 먼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내적인 갈망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마음의 성향이 없다면 계속 뒤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선한 일은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설사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죄를 향한 자유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역사를 통해 죄에 종 노릇하는 우리를 풀어 주신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거룩으로 회복하신다. 돌과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어린아이의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신다(36:26,27).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신다(12:2). 이런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생명이 가진 경향을 바꾸신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악을 향한 갈망을 선을 향한 갈망으로 바꾸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참된 순종의 원천이다.

 

경건한 삶을 위한 두 번째 자질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구렁이 완전히 채워졌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요 가장 큰 복이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케 되었다(4:5-7). 일단 의롭게 되면,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실 구원 역사를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화평케 된 것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으면서, 내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복음 진리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진실로 율법에 순종하고 싶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그분의 은총 아래 사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을 죄책에서 풀어 주사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후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용서는 선행이라는 마차를 끄는 말이다.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자!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생각해 낸 모든 방법을 버리자!

 

거룩한 삶을 위한 세 번째 자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행복하고 영원한 장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한 안전이다. 영원한 안전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첫째, 천국에서 누릴 복된 장래에 대한 확신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며 살기란 불가능하다. 진정한 순종은 바로 이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아담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광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순종으로 독려하시는 것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12:2).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은 무수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고후4:16-17).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알았기 때문이다(10:34).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도 헛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 말한다(고전15:58). 하나님은 영광의 소망을 주셔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다(6:11-12,요일3:3).

 

셋째, 영원한 하늘의 복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지 깨닫고 이 복락을 확신하는 사람은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일부다. 영생을 확신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과 육체보다 하나님을 더 바라게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선한 분인지 알수록 하나님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하나님이 사랑스러울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하나님을 향해 타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치 않다(11:16). 하나님은 사랑의 사슬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이 놀라운 특권과 은택을 우리 앞에 펼져 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가장 위대한 은총 가운데 하나는, 경이롭고 영원한 기업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기업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더욱 사랑하지 못할 사림이 누구인가?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한 네 번째 자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대로 살기 바라고 또 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셨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망뿐 아니라 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쁜 습관을 조금 바꾸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될 줄 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한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로 겸비해진 적이 없는 사람이고, 자기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원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진짜 목표는 단순히 몇 가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나쁜 습관을 만들어 내는 타락하고 죄악된 욕망을 죽이는 것이 진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죄악된 탐심을 충족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대신 거룩한 사랑과 거룩한 욕구로 채우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쉽고즐거워진다!

 

우리를 부르사 하게 하신 일을 우리가 바라고 또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혜를 따라 충분한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실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하시는지 성경은 잘 보여준다.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기 전에,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6:13-14). 그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고 말한다(6:10-11). 요한은 신자들이 이미 강하고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한다(요일2:14-15).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독려하신다.

 

-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pp 39-61

 

출처: 청교도 아카데비/강대식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김세윤 교수 주장은 개혁교회가 이미 배격한 것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죄인이 의인되는 신학적 논의다. 정통신학은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산물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주장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한번쯤 다시 뒤돌아 볼 필요가 반드시 있다.

오늘날 현대신학은 정통교회의 이신칭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는 지적에서 거듭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칭의와 성도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대신학이 계속 칭의를 논하면서 루터와 칼빈식의 칭의론이 바울이 가르쳤던 칭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 대표자가 김세윤 교수다. 그는 자신의 책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포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한 가운데 오로지 '보수'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시대와 처지를 물론하고 오로지 종교 개혁자들식으로만, 그러니까 바울의 '의인됨'의 범주로만, 그것도 포괄적으로 옳게 이해된 '의인됨'이 아니라 오직 '무죄 선언됨'의 측면으로만 이해된 '의인됨'의 범주로만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보수'한다는 성경의 많은 가르침을 무시해버리는 우를 범할 뿐 아니라,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그리하여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도들의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도 이제는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포괄적으로, 그러면서도 삶의 정황에 적합하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구체화되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김세윤 교수)

김세윤 교수는 정통교회가 단지 무죄 선언됨의 측면에서만 칭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법정적 칭의는 오류를 포함한 칭의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김 교수의 주장처럼 정통교회가 무죄선언의 측면에서만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오히려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신학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왜 한국교회가 김세윤 신학을 비판하지 않는가? 어마어마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거짓 교사일 뿐이다. 지금부터 김세윤 신학이 성경을 왜곡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복음(칭의)은 그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김세윤 교수는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함으로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죄 선언됨의 측면으로만 칭의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상황과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은 오로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죄인이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율법과 인간의 행위로 의를 취득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선언만이 죄인이 의인이 된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하는 선택보다 앞서지 못한다. 따라서 택자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여기에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김세윤 신학은 인간이 최선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고 하는 것을 믿어도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이르러서 선언하시는 그 선언만이 의인이 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삶속에서 거룩함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김세윤에 의하면 의롭다고 선언 받아도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어도 아직은 의인이 아니고 최종 심판의 자리에서 결정이 되기까지 유보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정통교회의 법정적 칭의는 반쪽짜리 칭의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김세윤 교수가 일명 유보적 칭의를 주장하는 이유는 법정적 칭의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는 법정적 칭의가 무죄 선언만 하는 칭의라고 본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죄인이 의롭다고 하는 무죄 선언으로만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존 칼빈은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이중칭의라고 주장한다.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의인됨을 말했다. 죄인이 법정에서 일방적인 은혜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판결을 받으면 죄인의 내면에서는 자신이 다시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칭의를 종교개혁자들이 무죄선언만 하는 칭의로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것은 김세윤 교수가 종교개혁자들의 책과 글들을 전혀 읽지 않고 말하는 무식한 말이다. 성경에서 예수를 믿으면 무죄하다고 가르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성경은 예수를 구주로 믿어도 여전히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바울도, 어거스틴도, 그리고 루터와 칼빈도 그렇게 가르쳤다. 김세윤의 주장대로라면 오늘날 종교개혁에서 가르치는 칭의는 마치 구원파가 가르치는 칭의와 같다. 성경에서 말씀하여 주시는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그 아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어 주시는 칭의이다. 구약에서부터 모형으로 계시된 어린양의 피 제사가 바로 그것이었고, 신약에서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므로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하나님이 그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려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피가 그 사람에게 뿌려지는 것이다. 결국 죄를 덮어주신다. 시온좌에 동물의 피를 뿌려 덮어주시는 것과 같다.

법정적 칭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김세윤 교수는 이 칭의를 바울이 말한 칭의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김세윤 교수의 잘못된 신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칭의를 연관시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도는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아도 여전히 죄인이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나간다. 자신에게 의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서 죄 용서를 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아 기쁨을 누린다.

그 과정에서 성화가 계속 점진적으로 어떤 사람은 빨리, 또 어떤 사람은 느리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화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화를 표준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성화되었다고 해도 계속 성화되어 가는 것이 의롭다고 칭함 받은 성도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인간의 환경에 의해 변화되거나 상황 때문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여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이 사죄의 확신으로 성도는 오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주 예수를 믿어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확신으로 산다.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칭의는 구원의 확신을 성도에게서 빼앗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칭의론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이루신 구속의 사건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 가르침이다.

최근에 김세윤 교수는 한 언론 매체에 한국교회의 칭의론에 대하여 새로운 칭의론 정립을 주장하였다. ‘칭의와 성화를 병행’하는 칭의를 말했으나 사실 이것은 그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다. 이미 칼빈은 이중칭의를 통해 칭의와 성화를 함께 말하였고, 개혁교회가 그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칭의는 결국 성화가 없으면 의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성화중심의 칭의이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칭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되고 이루어지고 있다. 죄인이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길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산다”는 이 말씀의 바른 해석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산다”이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고, 의롭게 된 자는 믿음 안에서 계속 자신을 부인하며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쳐준 칭의다.

 

 

 

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

 

 

 

 

http://www.ctimes.or.kr/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맛이 나는 교리다. 오웬은 내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논할 수 있지만 거기서 내 마음속에 어떤 맛이나 달콤함이 없다면, 그분이 내 영혼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내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패커의 요약이다. “오웬에 따르면, 우리가 묵상, 기도, 적절히 규제된 생활 속에서 신격의 세 인격과 규칙적인 교제를 갖는 패턴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향하신 각 인격의 특별한 자비와 사역을 유념하고, 특별히 각 인격과의 사랑 및 교제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과의 충분한 교제를 유지해야 한다.”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믿음을 확증하고 강화시킨다. 오웬의 말이다. “이것이 모든 복음 진리의 본질이고, 그것들은 믿는 영혼이 경험하는 데 적합하고 합당하다. 은혜로운 영혼이 그 모든 것 속에서 탁월함, 실재, 능력, 효능을 경험하는 것만큼 --- 장엄하고 웅대한 것은 없다. 항상 은혜로운 삼위일체 교리만큼 고귀하고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묵상할 때 성부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중보와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자의 크신 역사 속에서, 영혼 속에 은혜와 위로를 창조하시는 성령의 전능하신 사역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인지를 맛본 신자가 되고,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과 능력을 경험해 보라. 그러면 그는 일천 명의 논쟁가가 단지 마음속에 그 관념만 갖고 있는 것보다 이 신비로운 진리를 더 견고한 확신을 갖고 붙들고, 몇 마디 평범한 증언의 말씀만으로도 그 진리 속에 들어가, 그 진리를 확증하게 될 것이다.”

 

한편 오웬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에 따라 형성된다고 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왜 그토록 기독교적 경험에 중요할까?

첫째,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를 규제하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이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다.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오웬은 경고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에 나아오지 않거나 예배가 성령의 힘으로 진행되지 않거나 예배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의 모든 규칙을 위반하게 될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적인 영성이 유일하게 참된 복음적 영성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경륜은 성자가 유일하게 성육신하신 중보자로 오셨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직접 드러낸다. 오웬의 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들은 창조와 섭리 사역에서 반드시 협력하시지만, 삼위일체적인 관계들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의 경우,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직분은 삼위일체를 계시하고, 삼위일체에 따라 복음에 반응하도록 우리를 규제한다. 우리는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을 통하지 않으면 성부께 나아갈 수 없다.” 삼위일체가 없는 영성은 복음이 없는 영성으로, 단순한 자연 종교에 불과하다.

 

셋째, 삼위일체 교리는 영성을 심원하게 관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성이 비인격적 신격, 아니 심지어는 범신론적 신격에 대한 신비적 경험이 되지 않도록 방비하기 때문이다. 이 세 인격 안의 한 하나님 교리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원하게 인격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참된 교제에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오웬은 교제를 서로 연합하는 인격들 간에 선하고 즐거운 것을 공유하는 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오웬의 신적 교제 교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한다. 이 상호 관계 속에서 주권적인 주님이 이끌면 신자들은 이에 반응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이 인격적 조우 속에 함께 들어간다. 웬의 삼위일체적인 교제 교리는 우리에게 풍요롭고 따스하게 성경적이고, 교리적이고,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개혁파 기독교의 훌륭한 모델을 제공한다.

 

오웬의 언약 신학은 하나님과의 정서적 상호 관계로 충만하다. 오웬의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것 가운데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나 동일한 신적 본성의 단일성 속에 존재하는 세 인격의 위격에 대한 신비보다 더 영광스러운 신비는 없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우리의 지성이 이에 대한 관념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유하도록 하나님 안에 신뢰를 두는 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법, 하나님과의 교제를 얻고 행하는 법을 올바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pp 141-143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존 낙스의 회심: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건짐 

존 낙스 (John Knox, 1513-1572)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가까운 해딩턴 (Haddington) 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곳에서 문법학교를 마치고 글라스고우 (Glasgow) 대학과 세인트 앤드루스 (St. Andrews) 대학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낙스는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잉글랜드에서 윌리엄 텐데일이 성경 번역에 헌신하고 있을 때 스코트랜드에서는 틴데일의 영성을 이어 받을 존 낙스가 태어난 것이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14살이었을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또한 토마스 길리엄 (Thomas Guylliame)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서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낙스는 개신교 교리를 확산시키고 있었던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게 되고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낙스는 카톨릭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개신교로 전향하였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했다. 낙스는 “하나님이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 내기를 기뻐하셨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 당국에 비판적이었다. 이처럼 낙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지 위샤트였다.

그리고 낙스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면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 그는 “내가 처음 신앙의 닻을 내린 말씀이 이 말씀이다”라고 말했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분명 낙스를 새로운 믿음으로 불타오르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으며, 3년 동안 성경연구에 몰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약 1540경 회심 후 그는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여 부패한 영혼들의 심령을 깨우치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의 암울한 상태

1) 성직자들의 무지와 부도덕과 타락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성직자들과 교회의 주교들, 수도원장, 수사, 성당 참사회원들은 너무나도 무지했다. 심지어 어떤 사제들은 알파벳도 모를 정도였다. 주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설교는 우선순위에 있어서 뒤로 쳐져 있었고,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사람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으며, 그들의 그릇된 삶이 그릇된 교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재산과 수입과 인력이 풍부했으며, 스코틀랜드 전체 재산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가난했지만, 교회는 가장 좋은 건물을 차지했다. 이처럼 교회가 부패하고 비대해져 안일에 빠진 이유는 면죄부, 연옥, 성례전과 같은 것들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순결을 서약하였지만 성적타락이 극심했고 여러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제들도 문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직자들은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매우 세속적이었다. 이처럼 교회는 무지하고 부도덕했고 타락했다.

2) 종교개혁자들이 핍박을 받고 화형 당함
16세기초 쯤 위클리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교회에 의해 심한 핍박을 받거나 처형을 당했다. 예를들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패트릭 해밀턴 (Patrick Hamilton)과 조지 위샤트 (George Wishart)는 붙잡혀 세인트 앤드류 성 밖에서 화형 당했다. 이들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될 때 까지 약 30년 동안 20여명의 개신교도들이 교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한 시대임을 알려 준 것이다. 타락한 그 시대가 낙스의 가슴에 교회 개혁의 싹을 키우게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대각성의 불을 지피게 하였다.

존 낙스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 -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꿈”

존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를 세워가는 꿈이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스코틀랜드 성시화에 대한 꿈이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혀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있으면서도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다시 설교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난 낙스는 영국에서 설교자로 사역을 했다. 먼저 존 낙스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황들의 추악한 삶을 폭로하고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적 복음을 계속 전파했다. 낙스는 공기도서의 사용을 거부하고 설교를 중심으로 자기가 고안한 예배서를 사용하였다. 낙스가 전한 말씀 앞에서 개개인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먼저 그는 영국에서 카톨릭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는데 특히 성찬식 때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관습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면서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행위를 금지시켰고 신자들을 성찬상에 둘러 앉게 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주의 방식으로 성만찬을 집행하였다. 그의 종교개혁적 설교는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불과 몇 달 만에 주민들은 로마 카톨릭을 폐기하고 미사 대신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개혁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카톨릭교도 ‘피의 메리 (Bloody Mary)’가 영국 여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 잔학한 여왕은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 하지 못하도록 개신교를 박해했고 수 많은 목회자들을 처형하였다. 낙스는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반 종교 개혁적이어서 나중에 낙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난민 목회사역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의 박해를 피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낙스는 칼빈을 만나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 칼빈 강당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며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했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1556-1559년 까지 영어 사용 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선포하였다.

또한 낙스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벌어지는 종교탄압과 폭정에 맞서 유명한 글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를 발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두 여왕들을 ‘괴물’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낙스는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 전체를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성경 주석의 집필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판된 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다. 그 후 영국 백성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은 영국을 ‘책의 나라’로 바꾸어 놓았으며 청교도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고 제네바 성경에는 장로교의 교리 문답서가 추가되었고 각주가 들어갔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열렬한 칼빈의 제자가 되어 개신교 신학에 깊이 빠져 들었고 그의 신앙은 상당 부분 칼빈주의화 되었다. 또한 그의 사상을 지배했던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들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 원리의 핵심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낙스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가리켜 “사도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한 낙스의 기도 -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낙스가 고향 스코틀랜드로 귀국할 때 했던 감동적인 기도가 있다.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하여 목숨 건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귀족들과 시민들이 돌아오는 존 낙스를 환영했지만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낙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심판하지 마소서. 그리고 주로 세상이 내게 대해 비난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심판하지 마소서.”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민족보다 강하다”고 말하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단 한 사람의 기도로 인해 스코틀랜드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백성들의 심령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교리 설교 -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남”

1559년, 낙스는 12년 동안의 힘든 망명 생활을 끝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교회는 카톨릭 일색이었지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을 알리며 카톨릭 색채가 가미된 모든 것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으며,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낙스의 설교의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진리라고 말하면서 설교 말씀을 적용한 후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전력을 쏟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개혁주의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희망으로 살아 있었고, 개혁주의 운동의 새로운 영적 생동감과 열정을 불어 넣었다. 낙스의 종교개혁은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메리 여왕 앞에서의 낙스의 강력한 설교

그러나 메리여왕의 등극으로 인해 카톨릭 교회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왕 메리는 의회를 설득하여 개신교회라는 이단을 박멸하고 옛 카톨릭 왕국을 재건하고자 했다. 여왕 메리는 법으로 금지시켰던 미사를 거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다음 주일에 종교개혁에 불탄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 (St Giles' Catheral) 강단에서 복음주의 교리를 주장하고,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제도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면서 미사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메리 여왕이 낙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떨었으며 그녀는 잉글랜드가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서 보낸 군대보다도 그의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여왕특사인 토머스 란돌프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시간 안에 귓전에 계속해서 때리는 5백 개의 나팔보다도 더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한 청년은 낙스의 다니엘서 본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내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설교 이후 낙스는 곧 메리 여왕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여왕은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며 자신은 로마 교회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므로 로마 교회를 수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낙스는 “로마교회를 창녀라고 부르면서 로마교회는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져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존 낙스를 이기지 못해 자신은 더 이상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메리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건드리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복수심에 가득찬 메리 여왕은 낙스를 반역죄로 몰고 가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낙스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의 설교를 듣던 많은 회중들이 다시 살아났다. 많은 시민들은 성경적인 개혁 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개혁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서민 대중을 개혁의 대열에 동참시켰다. 그의 설교의 권세는 도시를 개혁시켜 버렸다. 스코틀랜드에 말씀을 통한 대각성 운동과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과 부흥은 낙스의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낙스를 통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승리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이 찾아왔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교황의 관활권을 폐지했다. 또한 카톨릭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급적인 교회 제도의 악습과 오류를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와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1560년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균형 잡히고 건전한 교리”라고 승인하면서 국가의 신조로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교회 의식 가운데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며,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찬을 영적 임재로 해석했다. 이 신앙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교회가 재조직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복되고 장로교 형태의 스코틀랜드 개혁 교회가 합법적으로 확립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기독교 국가로 변하여 갔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계속되는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불굴의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용기있는 설교였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낙스의 삶과 죽음

낙스는 수 많은 환난들과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낙스는 저격을 당하기도 하고 매복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의 목숨은 종종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다. 혹독한 박해가 심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던 낙스의 순례자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었다. 낙스의 인생가운데 이 고난의 시기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훈련 기간이었다. 고난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 잘 준비된 낙스를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불과 황무지와 흘리는 피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낙스의 영향력은 특히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지대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해 주었다. 낙스가 생각한 성경적인 교회정치는 장로회주의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개혁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도 튼튼한 개혁교회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낙스의 불굴의 신앙과 확신이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을 낳게 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게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인생 말년을 맞이한 낙스는 뇌졸중으로 인해 심신이 몹시 약해졌다. 그는 임종 전에 부인에게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후 낙스는 아무런 고통도 움직임도 없이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회심 이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낙스의 인생은 끝이 났다. 제네바 대학 바스티용 종교개혁 기념비에는 국제적 종교개혁 운동가 기욤 파렐, 존 칼빈, 장 테오도르 드 베자, 존 낙스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낙스는 칼빈, 파렐, 베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낙스는 교회를 진리의 토대 위에 세운 스코틀랜드 개신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요, 16세기 로마교회의 교권주의가 팽배했던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 주목할만한 사건들을 일으킨 개혁운동의 아버지이다. 진리를 위해 담대하게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수 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의 귓가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존 낙스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용기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1. 그는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적 기류가 악한 길로 갈려고 할 때 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깨웠던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또한 여왕과 시의회가 교회 개혁을 꺽을려고 할 때 마다 방향이 흔들리지 않게 나아갈 길을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을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셨던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였다. 그는 시대를 분별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성경적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였으며 진리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2. 그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삶에서의 중요성은 그의 탁월한 설교의 능력이었다. 설교가 그의 생애의 중심이었고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고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설교의 메시지는 그분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또한 성령께서 설교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확신을 굳게 붙들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죄사함, 복음적 교리, 성령의 조명,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그리스도의 의와 풍성하신 은혜, 하나님의 자비와 형벌” 등 이었다.

3. 그는 기도하는 설교자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기도에 관한 글도 많이 썼다. 낙스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4. 그는 용기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인생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용기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낙스는 왕의 절대 권력과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여왕도, 교황도, 국민들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턴 백작은 낙스의 묘 앞에서 "여기 일평생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누워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건전한 교리와 악을 꾸짖은 담대함에 있어서 모든 참된 목회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며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설교였다. 강단에서 낙스와 같이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악하고 음란하고 매우 혼탁하다. 이러한 때에 악한 시대를 잘 분별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진리로 심령을 깨우는 불꽃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낙스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있는 설교자를 그리워 하고 있다. 부흥이 없는 이 때에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에 또 다른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또 다른 부흥은 낙스와 같이 진리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자, 능력있는 설교자, 기도하는 설교자, 용기있는 설교자들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칭의와 성화? 제발! 한국교회 vs 헤르만 바빙크]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을 때 한국교회는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고 서로 싸움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벌어지는 양상은 좀 다릅니다. 예전에는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가 판을 벌였다면, 오늘날은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가 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모호하게 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칭의에 성화를 뒤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릇되게 칭의만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그저 천국가는 티켓 하나 확보하는 것 정도의 싸디 싼 복음으로 만들었는데, 최근 이것에 대해 맞짱뜨기 위해 등장한 신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책임있는 삶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에다 행위를 섞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래저래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이쪽 저쪽에서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에 대하여 바빙크는 노, 노우!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칭의뿐 아니라 성화에도 결정적인, 아니 전부라고 말합니다. 칭의도 성화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 그분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칭의와 성화에 대해 바빙크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번 들어보시죠. ^^

헤르만 바빙크는 칭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칭의에서는 우리가, 우리 바깥에 있고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근거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음이 선언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우리 편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지극히 분명하게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부어지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우리 속에 부어지는 은혜를 거론할 때에, 우리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다만, 이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선포되는 근거가 되는 그 의의 일부로 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칭의와 성화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과 죄의 오염의 제거가, 서로 혼동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의의 완전함이 제거될 것이고, 따라서 신자의 영혼은 위로와 확신을 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무조건 예수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한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합니다. 일종의 복음 세일즈죠. 정작은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저 천국'가는 기차티켓으로 확보하려는 한국교회. 예수믿는 것은 이 땅에서의 공의와 형평, 그리고 인애를 행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에 대해 잘 말하지 않고 있어요. 칭의론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이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음을 바르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왜곡된 칭의론을 두고 또 다른 신율주의적 언약론으로 칭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허수아비 논쟁인 거죠. 만약 진정한 의미에서 칭의를 이해한다면, 정말 개혁자들이 말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의 구원론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믿음과 행위가 따로 놀고 칭의와 성화가 싸움하게 할까요?

그런 차제에 등장한 그릇된 신율법주의적 칭의론도 저희는 경계합니다. 율법적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는 아닌 거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율법적 순종을 언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아 최종적 칭의의 근거로 삼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의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심각한 오류니까요. 우리의 유일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가를 배제하는 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의 실체, 곧 황금사슬임을 못보니까 그래요. 칭의와 성화 등, 구원의 서정을 논리적으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사건'인 거 거든요. 거듭난 자에게는 참된 믿음의 고백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귀결되니까요. 이것은 모두가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하심에 기초되었고 그리스도의 십가가의 공로의 효력으로 나타나며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이기 때문인 거죠.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화에 대해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취하신 이 성화는 우리의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다. ... 우리에게 부어지는 바 은혜라는 것이 실제로 있으며,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도 있으며, 의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는 것도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만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의 모든 은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칭의도 성화도 하나님의 큰 일인 거죠. 결국 우리가 자랑할 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베푸심과 구원의 유일한 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오늘도 고백할 뿐이에요. ^^::

출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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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승구 교수 / 합동신학대학원



<기독교 개혁신보>의 요청으로 써서 기고하는 글을 여기 미리 소개합니다. 여러 분들이 다 같이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50여년-40 여 년 전부터 ‘바울에 대한 새 관점’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신약학계에서 나타났으니 이것이 이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타났고, 이에 대한 좋은 비판서들도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또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여러 관점들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2성전 시기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와 바울에 대해서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의 견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근거한 주장과 논의라는 문제를 지닌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 분들은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에 대한 기존의 이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문헌을 정확히 살펴보면 제 2 성전시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말하는 모습과는 다르다고 하며, 따라서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장을 따라서 생각하지 말고 역사적 검토를 거친 역사적으로 바른 판단을 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의 렌즈로 읽지 말고 바울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근거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정향성을 지닌 독특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객관적으로 옳지도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작업도 자신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사료에 근거한 철저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는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이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그 내용과 관련해서 이런 해석을 하는 분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구원에는 은혜로 들어가며, 단지 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1) 마치 바리새인들과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시사를 주는 해석들은 그것이 성경의 묘사된 예수님의 해석이든지 개혁자들이 해석한 바울이든지, 다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 자신들이 해석한 유대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그리고 은혜로 구원 얻은 자들이 그 은혜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임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은혜에 근거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유대교가 말하는 율법을 지켜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여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의 논의에 충실하면서, 새 관점주의자들은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삶을 잘 살아 그들의 순종의 삶 전체에 근거하여 최후에 칭의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음과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근거하여 최종적 칭의를 받는다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칭의 선언이 우리의 삶 전체를 염두에 두고 내려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믿음에 근거해서 앞당겨 선언하는 것이 현재적 칭의라고 한다.

이처럼 무게의 중심이 최후 심판에서 칭의 선언이 주어질 것에 주어지고, 그 때에는 우리의 행위 전체를 고려하여 칭의하신다고 함으로 결국 이전에 천주교에서 주장하던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런 바울 해석이 옳다면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기의 논의에서 개혁자들이 틀렸고, 천주교적 반펠라기우스적 입장이 옳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종교개혁이 잘못한 것이라는 주장이 되므로 개신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주장이다.

넷째로, 그렇게 해석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imputation)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새 관점주의자들은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의 믿음으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구원 얻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들은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삶으로 궁극적 칭의를 받는다고 하여 결국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 관점주의적 해석이 결국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임이 천명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은 바울에 대한 새 관점주의적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저 학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논의의 다양성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주장인 것이다. 성경을 중요시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게 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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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학문적 논의한 것을 보려면 필자가 최근에 써서 출간한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3)을 보십시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이환봉 교수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교는 칭의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뿐 아니라 인간의 협력에 의한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칭의와 성화는 실질적으로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성경 원문의 헬라어“의롭게하다”(dikaio-o, 롬3:28)를 법정적 의미를 지닌“의롭다고 선언하다”로 번역하지 않고 자신들의 불가타 라틴어 성경에서“의롭게 만들다”(justificare)로 잘못 번역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칭의를 단번에 이루어지는 법정에서의 선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편의 선한 행위와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즉 인간 자신을 의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1521년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을 때, 로마서 3:28을 사도 바울의 일관된 주장을 따라“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번역하였다. 루터는 인간의 모든 계략과 지옥의 문에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칭의”(justification)의 신조는“우리가 행위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고 선언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믿음이 그 적절한 직무를 수행할 때, 믿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무엇도 바라보지 아니한다. 믿음은 이같이 말하지 아니한다. 즉 내가 무엇을 행하였는가? 내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가?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웠는가? 믿음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무슨 공로를 세우셨는가?”이는 우리의 구원적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후 1530년 6월 25일 루터의 추종자 멜랑흐톤이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능력과 공로와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칭의의 교리(Article IV: Of Justification)가 구체적으로 고백되었다. 칼빈 역시 칭의론에서“의의 전가”를 주장하면서“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값없는 의를 얻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오시안더(Osiander)가“dikaio-o”를  의롭게 만들다”로 설명한 것을 비판하였다.


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는 개인의 영적 도덕적 진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오직 믿음으로”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을 옷 입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전가(imputation, 전달되어 소유됨)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되기 이전에, 그리고 아직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수단으로 단번에 자신의 의를 우리의 의로 선언하시고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오직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수단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이며, 믿음도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 은혜의 선물(엡2:8-10, 빌1:29)이기에 인간의 믿음이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근거와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개혁자들은“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를 통해 율법폐기론자들처럼 행위는 모두 필요 없다거나 행위는 아무렇게 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간의 선행과 성화의 노력이 구원(칭의)의 근거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다. 선행과 성화는 칭의의 열매와 표시이지 결코 구원의 전제와 수단이 아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실질적 원리로 불리는“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는 구원적 신앙의 조건(수단)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성령의 선물인 신앙은 신학의 내적원리로써 외적원리인 말씀과 더불어 개혁신학을 말씀과 성령 즉 주객관의 균형을 가진 신학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의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에로의 회귀를 막아주는 원리이기도 하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자들이“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 연대”(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 Together, 1994년 3월 29일)라는 공동 성명에서“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동의한다”고 함께 선언하였다. 이 성명서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팩커(J. I. Packer), 빌브라이트(Bill Bright) 등의 유수한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서명하였다. 그러나 유의해야할 점은“오직”(Sola)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로마 카톨릭은 트랜트 종교회의(1547년)가 결정한 바대로“만약 누군가 칭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 어떤 다른 협력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 그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라는 교리적 선언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교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동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례준수와 선한 행위가 구원(칭의)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추가되어 있는 한에서의 동의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통해 주어진 성령 하나님의 주입된 의를 사용하여 스스로 자신을 더욱 의롭게 만들어 주고 자신의 죄를 갚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인간 죄인의 공로가 협력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신인협력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은 루터교 세계연맹(1999년)과 서울 감리교 세
계대회(2006년)를 통해서 자신들의 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제 로마 카톨릭은 개신교의“마지노 라인”(최후 방어선)과도 같은 개혁주의(칼빈주의)를 주적(main enemy)으로 규정하고 특히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구원에 대한 5대 교리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집중 공격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와의 연대를 통한 협공에 진력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오직 믿음으로”의 교리를 참된 복음의 핵심적인 본질로 생
각하여“교회가 일어서고 또는 넘어지는 신앙조항”(articulus cadentis et stantis ecclesiae)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이신칭의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 한 번 더“오직 믿음으로”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확인한다. 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유일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믿는다. 칭의가 우리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적 공로에나 우리 안에 주입된 그리스도의 의와 그 어떤 인간적 제도와 의식에 근거한다는 것을 단호히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용납 받을 수 있다는 그 어떤 근거(종교적 헌신과 윤리적 삶)도 부정한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선포하는 것이지 구원의 하나님께 우리가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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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이 환 봉 개혁주의학술원장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교회개혁의 표어는 이미 “개혁되어진”(reformata)과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reformanda) 교회의 역설적인 두 가지 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불변하는 성경 말씀을 따라 개혁되어졌기 때문에 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개혁교회는 성경 말씀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에 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표준을 따라 모든 악한 타협을 거부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보다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또한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진리 안에서 모든 악한 전통을 극복하기 위해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설적 과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길 즉 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적이 되는 길뿐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변해서 회개해야 하고 또한 너무 변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한다.

 

    1.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떠나 변하였기에 회개해야 한다.

    상황론자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의 현실과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생각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자들이 요구한 개혁의 핵심은 항상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개혁의 표준은 상황이 아니라 성경이었으며 개혁의 태도는 창조가 아니라 회개였다. 즉 교회개혁이란 상황이 요청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와 확립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옛것의 갱신과 재확립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회개의 요청과 더불어 시작하였던 것은 회개 즉 성경적 신앙의 회복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교회개혁도 시대의 요청에 교회가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의 문제 이전에 교회가 성경 말씀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상 오늘 한국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도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어 변화하지 못한 기능적 실패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여 일치하지 못한 존재론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진보적으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너무 진보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웰즈(D. F. Wells)가 그의 책 “No Place for Truth"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성경의 교훈과 명령은 뒷전으로 하고 저급한 현대사상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세상의 학문에 성경의 진리를 위한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경제성장을 위한 시장경제 논리와 마케팅 전략이 교회성장을 위한 성경적 원리와 방법을 대신하는 것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와 구속의 은혜가 심리학이 말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호갈등과 내적 상처로부터의 단순한 심리적 치유와 안정으로 대체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 많은 이단과 은사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대신에 인간의 체험과 감정에 기초한 새로운 계시를 앞세워 혹세무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경적 원리 대신에 수요자 개인의 요구와 필요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의 원리가 오늘날 교회의 예배, 설교, 전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를 떠나 기독교를 다시 개혁자들이 반대했던 그런 철저한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만들어 가는 교회 변질의 현대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아무리 정당하고 시대적인 요청이 제아무리 더높다할지라도 성경 말씀을 제쳐두고서 우리 자신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경제학적 생각과 필요를 따라 우리의 신앙을 재구성할 수 없다. 물질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의 가치와 방식을 따라 은밀히 기획되어진 오늘 교회안의 온갖 인위적인 조작은 결국 교회를 갱신하기 보다는 오히려 훼손해 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상의 영을 따르는 세상의 지혜를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성경 말씀의 표준을 떠나 너무도 변하여 버린 것을 참으로 회개해야한다. 진정한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변하지 않기에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good news)으로서 새로운 소식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오래된 편견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시고 우리의 회개와 변화를 격려하기 위해주신 것이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선지자들은 거듭거듭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재고하도록 도전하였다.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영웅들은 그 시대의 거짓된 요구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를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를 따라 회개와 변화를 앞서 주도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짓된 전통과 일상으로부터 떠나 생각과 삶에 있어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단행하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새로운 백성의 조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그의 역사적 뿌리로부터 잘라내시고 새로운 나라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자신의 과거와의 분명한 단절이었고 약속된 미래를 향한 새로운 헌신과 위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일상에 사로잡힌 삶에서 떠나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향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애굽의 일상의 삶을 그리워하고 다시 포로생활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하였다. 구약의 전 역사에 나타난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자신들의 일상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동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고 하셨다. 예수님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마 15:8-9, 막 7:6-7).

 

  바리새인들은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이라는 사람의 계명 즉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진리로 내세워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많은 인간적인 전통을 만들고 따르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올바른 해석학적 또는 주석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메시야를 한갓 세상의 군왕으로만 오해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과 이해를 책망하여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난날의 교회역사를 통해 때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전통을 반성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되돌아올 것을 거듭 요구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요구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 교회를 청결케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다. 마침내 교회의 신학과 예배와 설교, 그리고 교회생활의 모든 영역이 혁신적으로 새롭게 변할 수 있었다.

 

    개혁자들은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보수적이었지만, 반면에 성경에서 떠난 인간적 전통들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는 매우 급진적이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교회개혁의 자세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건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도 개혁자들처럼 현대사상의 거짓된 요구에 직면하여 오직 성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파수해야하고 또한 전통사상의 편협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오직 성경을 따라 날로 새롭게 개혁해 가야 한다. 오직 성경에 순종하기 위해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언제나 변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항상 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거짓된 세상의 새로운 요구에 타협하지도 않고 동시에 변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 있는 개혁자의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오직 성경으로의 삶 즉 철저한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개혁의 시대적 사명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과 충족한 근거임을 새롭게 다짐하며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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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반드시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한다 / 존 프레스톤

출처: 청교도의길 http://blog.daum.net/kds2012/73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보내신다.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삶으로 응답하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예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기 때문이다(마12:30). 여러분이 하나님의 원수처럼 사는 자는 아닐 것이다. 어떤 악의 길을 활개 치며 다니는 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그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판명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여러분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그러나 여러분을 대적하는 원수로서 임하실 것이다. 여러분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그에 반하여,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을 구해 주실 분으로 소망하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대적하는 가장 장인한 원수로 드러나실 것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시2:12). 그 아들께서는 계시록 1장에서 보여 주듯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분’이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분노하시어 여러분을 밟아 가루로 만드실 수도 있다. 그분은 지극히 외적인 여러분을 치시기 위하여 임하실 것이다.

 

또한 이것을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주(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이 땅에 정사를 어깨에 짊어지신 왕으로 임하셨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여러분은 그분이 세상에 임하실 때 맡으신 직무의 일부분, 아니 임하신 목적의 절반을 망각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영과 지위를 지니신 분이시며, 이 두 분은 모두 죄를 향하여 같은 태도를 나타내신다. 그분을 바르게 인식하라.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이며,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왕께서는 모든 통치를 홀로 책임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온 땅의 교회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시며, 또 그렇게 다루어야만 하는 사실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미지근했기 때문이요, 첫사랑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심판을 프랑스에서 시행하실 수 없는가? 영국에서는 안 되는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그 자리에서 제하여 버리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셔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노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대우는 우리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증거요,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들을 향하여 분노를 품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들을 향해서 가장 빠르게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심판은 반드시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벧전4:1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목하신다. 지금 유럽을 바라보시듯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집의 현재 상태를 바라보시며, 심판을 시작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사용하셔서 자기 교회들을 징계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3:2). 가장 신속하고 자주 그렇게 하신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행하시는 것보다 더 심하게 징계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교회는 물 아래로 지날지라도 다시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사43:2).

 

- 존 프레스톤, 『황금홀』, pp 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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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
개혁신학포럼, ‘교황 방한과 가톨릭교회’ 주제 좌담회②

 

 

 

 

개혁신학포럼(대표 김향주 박사) 주최 ’교황 방한과 가톨릭교회를 논한다’는 주제로 좌담회가 최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2층 민들레영토 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이날 좌담회는 기독교사상연구원(원장 최덕성 박사)과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등이 함께했다.
좌담회는 사회자 최더함 박사(아리엘교회)가 던진 질문을 서창원 박사(총신대 교수)와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가 따로 또는 같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Q4. 개신교에 대한 염증? 지도자들의 책임?
(지난주에 이어서)
서 박사는 “일반 시민들에 있어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보이는 장점은, 교황을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라며 “반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가장 잘 부각시켜야 할 개신교회는 교황 대신 ‘담임목사 교회’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교회의 보편성을 훼손시켰다”고 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우리 개신교회가 그리스도의 수장권을 확실히 드러내고 교회의 보편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교황의 방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을 다시 부각시킨다면, 개신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최 박사는 “종교개혁의 선배들은 ‘교회의 우두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고 했고, 그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말씀대로 살려 노력한 모습들이 신앙고백서들에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Q5. 가톨릭 교리의 문제점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문제점들도 언급했다. 서창원 박사는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수장권 자체를 부정하는 집단이라는 측면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상실한, 간단히 말해 ‘주님의 교회’가 아닌 ‘교황 교회’”라며 “종합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우상숭배 집단’”이라고 했다. 서 박사는 “물론 가톨릭은 마리아 숭배 사상의 경우 ‘마리아에게 청원하고 기도할 뿐, 그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을 통해야 하는가”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누구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을 부정하는 처사로, 교황과 교회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 모습 자체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교황 교회’”라고 했다.
또 외경을 둔 점, 십계명에서 우상숭배를 금하는 ‘제2계명’을 빼 버린 점 등을 꼬집으면서 “가톨릭은 ‘개신교의 주장을 다 믿고, 우리는 더 믿는다’는 입장이지만, 성경은 기록된 말씀에서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고 하셨다”며 “주님 말씀에서 더 첨가하거나 본인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면 빼는 모습은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덕성 박사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다원주의를 추종하는 진보 개신교를 제외한 ‘역사적 개신교회’의 교리 간 차이가,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켜 인정할 정도인가 아니면 순교의 각오로 거부하고 투쟁할 정도인가”라며 “그 차이는 후자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학자라면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영적 작업에 답을 줘야 한다”며 “이에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 것은 직무태만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고 했다.
최 박사는 또 “가톨릭 구원론의 결론은 ‘예수 없이도 구원 받는다’, 즉 예수를 꼭 믿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하지 않는 만인보편구원주의”라고 했다. 
서 박사는 “이를 반박하는 가톨릭 신부의 글을 읽었는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 은혜를 붙들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며 “드릴 때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 일어나는 미사(Mass)도,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파손시키고 우리 자신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Q6. 가톨릭과 개신교는 하나 될 수 있는가?
‘가톨릭 내에도 개신교처럼 교파가 있는가? 신학은 같은가?’ 하는 질문에 최덕성 박사는 “교파보다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나 예수회 등 단(order)이 있는데, 모두 교황의 통제 아래 있다”며 “신학이나 생각이 모두 같지 않아도, 교황이 거부하면 수용되지 않는 것이 가톨릭의 현실”이라고 했다.
서창원 박사는 “개신교 내에 너무 탈신학화 또는 비성경적 가르침이 많이 침투한 모습 때문에, 가톨릭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며 “조폐공사에서 위조지폐를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위조지폐의 특성을 말하는 대신 진짜 지폐의 특성만 열심히 가르친다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개혁의 소중한 유산들을 되찾고 성경의 가르침만을 분명하게 증거하다 보면, 성도들이 가톨릭의 허구성과 거짓된 부분들을 자연스럽게 분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최덕성 박사는 ‘교황무오(류)설’에 대해 “역사는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인 동시에 교회의 실패의 역사로, 수많은 교황들이 잘못을 저질러 온 것이 사실”이라며 “그래서 2000년, 교황이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2천년간 저지른 범죄를 참회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것만 봐도 교황은 결코 무오할 수 없다”고 했다.
최 박사는 “그런데도 교황이라는 신성불가침 영역을 만들어 놓고, 교회나 공의회가 동의를 구할 필요조차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러한 교리를 포기함으로써 복음적 개신교회와 일치할 생각이 없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로마가톨릭이 그 심대한 여러 교리들을 포기하고, 역사적 근거나 합리적 설명이 되지 않는 모든 부분들을 포기하며, 성경적 고백과 교리들을 받아들인다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서 박사는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받았다.

Q7. 로마가톨릭교회와 대화를 해야 하는가?
최덕성 박사는 “선교 접촉점도 얻고 공동선을 함께하는 차원에서, 가톨릭은 물론 타종교와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통일 문제, 기아 구호 문제 등은 종교인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협력할 수 있다”며 “그러나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자꾸 대화하다 보면 비슷해지고 저항력을 상실하며 진리가 무엇인지 희석되고 퇴색되는 면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서창원 박사는 “가톨릭이 계속해서 대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것일 뿐, 결코 개신교회에게 맞추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최 박사도 “그들과의 대화에 있어 종착역은 교황좌 밑으로 개신교가 귀정되는 것”이라고 거들었다.
서 박사는 “가톨릭 내에도 ‘교회’의 모습이 남아있지만, 핵심 진리에서 많이 이탈돼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그래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가톨릭을 ‘바벨론의 창녀이자 적그리스도’로, 미사를 ‘사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으로 표현했다. 핵심적 겉모습만 비슷하고 내용이 싹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최덕성 박사는 “저는 이 기회에 한국교회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 나라 운동은 떠들고 과시하고 조직체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등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고, 밀가루 서 말 속에 있는 ‘누룩’처럼 소리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열어 보면 ‘이것이 복음이구나’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며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법으로 왕성하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교황 방한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이 여러분이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 생명의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지, 그 복음에 자신의 삶을 바칠 신앙적 각오를 하고 있는지 다짐하는 기회로 삼길 바란다”고 말했다. / 끝

△ 교황이 한국에 오기 이틀 전 좌담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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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마르투스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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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요즘도 교계에는 방언과 관련하여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방언논쟁은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방언은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민감한 사안이다. 이럴 때 신약성경은 방언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제시하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천사의 방언과 사람의 방언이다(고전 13:1). 천사의 방언(글로사)은 사도 바울 자신이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고후 12:4)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의 몫으로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람의 말은 순수한 외국어와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없이 외국어란 문법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한 언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 말과 히브리 말(디아렉토스)을 했다( 21:40). 그는 당연히 로마 말을 할 줄 알았을 것이며, 이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말 가운데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글로사)는 타의적 방언과 자의적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타의적 방언은 오순절 날 초대교회에 발생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언어이다( 2:4). 그런데 타의적 방언은 말함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고, 들음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제자들이 여러 지방 사람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말했다( 2:6)는 표현과 여러 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 들었다( 2:8)는 표현 때문에 모두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이해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법이 있는 방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을 통역한다는 것은 문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10; 14:13,26-28).

 

자의적 방언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기도자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내용을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만 사용하는 기도 말을 만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 기도자는 기도할 내용이 산더미처럼 많은 데 마음은 바쁘고 시간이 부족할 때 앞뒤 말들이나 가운데 말들을 생략하고 압축해서 자신만의 특유한 어법으로 기도할 수 있다. 이런 자의적 방언에는 문법이 없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조어이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을 가리켜 구태여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억지이다. 그것은 기도를 돕는 데 어느 정도 유익하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굳이 제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방언에 관해서 논의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방식보다도 내용과 목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라면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며( 2:11), 그 목적은 자기를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교회를 건설적으로 만들며(고전 14:5) 심지어 불신자에게도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전 14:22). 이런 내용과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은사를 주시지만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혜로시기 때문에 함부로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 모든 은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두 속성은 사람이 감지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헬라어로 글로사는 혀를 가리키며디아렉토스는 말을 가리킨다


   조병수 교수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 신학박사(Dr. theol.)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

 

 

성화는 누구의 사역인가? 성화의 모형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성화가 하나님의 사역이며, 또한 그의 백성의 책임이라는 점을 숙지하였다.

...

성경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성화의 주체이시라고 교훈한다. 성화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공히 담당하신다고 묘사되었다.

...

삼위의 두번째 분이신 그리스도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성화의 주체자로 계시되었다.

...

성령 하나님 역시 우리 성화의 주체가 되신다.

...

성화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결국 성화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는 역시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한다. 고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고전1:2)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후7:1)고 권면한다. 앞에 있는 구절에서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고 언급된 위대한 계약은 이미 상세하게 구현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의식을 가진다. 그 백성인 우리들은 진심으로 죄와 투쟁해서 승리해야 한다. 여기 "온전히"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에피텔룬은 명사 텔로스(끝 또는 목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 낱말의 뜻은 "점진적으로 정해진 목적에 도달한다"이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여기서는 명백하게 신자들의 의무로 묘사되었다. 즉 성도들은 정해진 목적에 이르도록 분투 노력해야 한다.

...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거룩하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여기서 성화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추구해야 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성화는 근본적으로 우리 내부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J.C 라일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성화는...모든 신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일 신자들이 거룩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는가? 만일 성도들이 성화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닌가? 성도들에게 은혜와 새 마음 그리고 새로운 본성을 주신 하나님은 만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서 모든 관용을 거두실 것이다.(J.C. Ryle)

 

성화에 대한 이 두가지 관점은 다음의 주목할 만한 구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항상 복종하여...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2:12~13).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했기 때문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향한 복음의 적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명령은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계속 "이루라"고 요구한다. "이루라"고 번역된 단어는 어떤 사본에서 일반적으로 농부가 땅에서 경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구원을 계속적으로 경작하라"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 신자들은 그들이 이미 받은 구원을 계속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고, 모든 활동 속에서 분명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달리 표현해서 12절은  거룩하게 살아야될 책임이 신자들에게 있다고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3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구원의 완성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놀라웁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성화의 전체적 과정을 주관하신다. 즉 하나님은 기쁘신 뜻을 가지시고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신다.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노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누군가 주장했듯이(Berkhof.) 성화는 성도의 협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성화의 어떤 부분을 맡아 수행한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존 머레이는 그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하기 때문에 중지하지 않으시며, 또 하나님이 역사하기 ?문에 우리의 노력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 관계는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부분을 담당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부분을 담당하는 것처럼 엄밀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노력한다. 그러나 그 관계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John Murray.)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화란 성도의 노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노력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강력한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327~3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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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교리와 개교회주의|황대우 글방
apeldoornh | 조회 140 |추천 0 |2008.10.25. 21:36 http://cafe.daum.net/C.N.B./Qf1s/16 

 

*이 글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 "라는 제목으로 개혁주의학술원(고신대) 홈피에 칼럼으로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그래서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너무나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더더욱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수천당”이란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 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는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란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그것은 전도전략의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었고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 알을 낳았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부흥이란 황금 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말 개교회의 외적 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과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방법일까?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을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는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 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 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고 반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국밥이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의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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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예수에 관한 복된 소식이고 그 예수를 다시 압축해서 요약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복음서의 내용을 잘 살펴보라.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일주일 전부터 부활하기까지의 내용이 대부분 반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악센트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시절이나 공생애 기간의 사역조차 그의 수난과 부활을 전하기 위한 무대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전했고 받았고 알고 붙잡고 있는 복음을 다시 상기하도록 진술하고 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단 두 가지로 정의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전할 기독교의 압축 파일은 바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와 관련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부활의 사건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제 명확히 알아야 한다.

 

침체된 직장생활의 위기를 돌파해내는 힘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부활을 왜 믿는가?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이 실연의 상처를 받았을 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부활을 왜 믿는가? 실직했을 때에도 부활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의 모습이 똑같다면 그가 믿는 부활이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도 문제에 답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아의 문제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자신의 일상사에만 함몰된 채 자신의 위기에 전혀 발언하지 못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은혜받지 못하면 기독교는 달리 은혜 받을 곳이 없다. 나의 위기와 난관과 시련의 문제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이 발언하지 못한다면 그런 기독교는 믿지 말라. 부활의 능력은 우리 문제는 작게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커 보이게 만든다. 아무리 셀프 토크로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부르짖어봐야 소용이 없다. 은혜 받고자 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깊이 침잠하라. 기독교의 은혜의 저수지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십자가 부활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 우리가 그 메시지를 듣고 배우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금 당신의 교회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교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기를 성도의 손에 쥐어주지 않은 셈이 된다. 부활의 종교라는 기독교란 무엇인지,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교인들에게 그 핵심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취해본 적도 없이, 교회는 여가선용으로 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영어회화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영화회화를 가르쳐주지 않고 꽃꽂이를 가르치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학원에 계속 다니겠는가? 거세게 항의하고 환불까지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회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안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어회화학원에서 영어를 안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매주 교회에서 자기계발이나 성공학에 대해 듣는 데 익숙해졌다. 어떻게 하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지 교회에서 부지런히 듣고 배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야 우리에게 현실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붙는다.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인생에 베터리가 되어 돌아간다. 그것이 없으면 말짱 소용없는 일이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 그러는데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기독교의 앙꼬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도외시하고는 어디에서도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6,57).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긴 시점부터 바울은 곧 미래의 부활에서 현재의 부활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그분이 우리에게 현재 이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비로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우리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사망의 세력, 죄의 세력을 이긴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김의 질서에 참여한 사람이다. 장래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이긴다. 최고 강자 사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기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다 부활시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세력을 이긴 힘을,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베풀어주셔서 우리도 같이 그리스도의 이김에 동참하게 하시고 현실 생활에서 이김을 맛보게 하신다. 현실에서는 물론, 종국에, 그리스도 재림 때 완전히 이길 것이다.

 

- 김응국, 부활, pp 5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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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ㄹ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나라, 과연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매특허 낸 듯이 사용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활동, 윤리적 실천, 이상사회 건설 등 비종말론적이고 세상적인 무엇으로 이해한다. 지난 해 부산에서 선포된 WCC의 새로운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2012)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상적 세상 만들기 활동을 똑 같은 것으로 여긴다.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 하다.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죽음의 독이 한국교회에 깊숙이 침투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설교자들의 메시지, 신학자들의 대화, 교회일치운동 선언문, 기독언론 보도문 등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최대의 가치이다. 그러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필자가 신학 초년생 때 쓴 것이다. 당시의 한국교회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미래에 도래할 신국으로 인식하는 것이 지배적이엇다. 이 글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체적을 조망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enjoy)하는” 삶(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제1)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원제: 천국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천국(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다. 천국은 기독신자의 소망이며 현실이다. 성경 전체에 깔려있는 주제이다. 특히 신약성경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사역과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천국이었다. 이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기독교 안에서 늘 있어왔다. 근래에 서구신학계는 이 문제를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시키고 있다.

 

우리 한국 기독인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죽은 다음에 가는 저 세상으로 이해해 버리는 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토착화된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 도교 등 이방 종교 영향권 안에서 성장하면서, 특히 윤회사상을 가진 불교의 열반, 극락 관념 등의 영향으로, 천국을 마치 저 세상으로, 그것도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와 관계되는 다음 세상으로만 인식하여 다른 종교가 말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이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신비적 경향이 강한 교회들과 세대주의자들은 지나친 종말론을 앞세워 타계주의 또는 염세주의적 신앙에 빠진다. 현실을 저주, 무시하고, 오직 내세 또는 저 천국만 바라는 나머지 현실에 주어진 책임과 축복을 도외시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글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중심으로, 성경이 천국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천국 이해에 대한 역사적 고찰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더 잘 하기 위해서는 천국관의 역사적 고찰이 매우 필요하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잘 표현했으나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슈바이처, 리츨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천국의 미래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너무 현재성만을 강조한다. 천국을 사회적, 윤리적, 비종말론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비롯된 그릇된 종파들은 지상천국의 실현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신학자 칼 바르트는 천국을 비역사적, 비시간적, 찰나적인 것으로 본다. 도드는 실현된 종말론에 기초를 두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변증법적 시간의 긴장관계로 설명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점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으면서도 이 보다는 인간의 사변적 철학적 사상을 딛고 서서 그 위에 하나님 말씀을 끌어 들인다. 여기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태도는 비평적 취급이 빈약한 상태이고, 종말론적 사상이 농후하여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다.

 

2.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신국, Kingdom of God)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에 4, 마가복음에 4, 누가복음에 32, 요한복음에 2, 사도행전에 6, 바울서신에 8, 요한계시록에 1번 나타난다. 하늘나라(천국, Kingdom of Heaven)는 마태복음에 33, 요한복음에 1, 히브리서에 11번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습관을 따라, 마태는 하늘나라(천국)라고 하였다. 이 두 표현은 결국 같다. 그리스도의 나라도 동일한 의미이다.

 

천국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면, 우선 나라’(Kingdom)의 의미를 살펴봐야 하겠다. 나라는 본래 한 왕이 그 권위를 시행하는 영역(a realm)이. 요즈음의 영연방(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왕으로 원수를 삼은 국가 또는 왕국 또는 지배(dominion),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첫째로 왕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백성과 신하 각료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를 가지고는 성경이 말하는 천국의 올바른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나라에 대한 일차적 의미는 왕에 의하여 실행되는 신분, 권위, 주권(sovereignty), 그 주권이 권위를 행사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한 백성이나 각료는 이차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편 103:19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시편 145:11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능력(Power)이다. 다니엘 2:37, 5:26은 왕의 통치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0:15, 누가복음 16:11, 12하나님 나라는 그의 왕직, 그의 통치, 그의 권위를 말한다. 마태복음 6:33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그의 지배를 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시되어질 영역이 없는 지배는 없다. 성경은 천국을 현재 들어갈 영역으로 묘사한다. 마가복음 9:47과 같은 구절은 미래의 천국을 말한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영생과 동일한 측면의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10:23, 14:25, 7:21).

 

이상의 설명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a. 성경의 어떤 구절은 천국을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적 지배(reign, dominion)을 의미한다.

b. 성경의 어떤 구절은 하나님의 복의 지배를 체험하려고 지금 들어갈 수 있는 영역(realm)을 의미한다.

c. 성경의 어떤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 임하는 미래의 한 영역(a future realm)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나 지배 영역의 상태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면 천국을 무엇인가? 성경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결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다만 그 나라에 들어오라는 초청과 요구만 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이 집약하여 생각할 수 있다.

a.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을 받아들이고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b. 그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c.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떻게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아직도 미래에 속하며 여전히 인간의 기도와 인간의 목표이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임하게 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무엇이 아니다.

d. 천국은 예수님과 더불어 임했고 또 와야 했다. 그가 오시기 전의 시간과 오신 이후의 시간은 달랐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통해 천국이 임했음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진 상태 속에 실현될 것이다(6:10).

3. 미래의 천국

천국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과 동반되는 축복을 누리는 권계(權界) 또는 영역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현세에서 완성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자의 부활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와 궁극적 실현은 역사 건너편에 있는 새롭고 바른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다(20, 21, 22). 그곳은 이 세상과는 다른 오는 세상”(12:32)이다. 현세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이다(1:4, 2:1-2, 5:19-27, 고후 4:3-4).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나타나고 구원의 완성과 복의 전개는 내세에 속한다.

그러면 영생이 도래할 세상에 속하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천국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구원도 영생도 얻을 수 없단 말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미래의 천국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건너편에 장소성을 가지고 임할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이 영역이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곳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벌써 임했으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구원과 영생도 이미 주어졌음을 가르친다(2: 1-9).

4. 도래한 천국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영광 중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뿐만 아니라 현재에 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그 나라의 생활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6: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한다. 현세에서 우리가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고 하였다. 맛보는 것은 약속보다 나으며, 현실이며, 경험이다.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하려고 오셨다(1:4). 로마서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이 악한 세대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내적 변화를 체험해야 가능하다. 이는 악한 세대로 들어오는 오고 있는 세대의 능력의 결과이며, 능력 그 자체이다. 이 두 가지 세대가 겹쳐 함께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 구원과 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근본 도리이다.

이 세대는 오는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 두 줄이 겹쳐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도 우리는 천국의 현재적 측면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덜보스(H. Ridderbos)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나오는 때가 찼다는 말은 그 나라가 완성 단계에 들어간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했으나 주님은 때가 찼다고 하였다(4:18,19, 61장 참고).

b.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이 말씀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 곧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지금 다가오는 미래적 측면의 천국 입구에 서서 우리를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은 사치와 안위를 거부하고 금욕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집을 찾아갔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 그의 반대자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할 정도로 먹고 마셨다. 금식에 대한 태도도 유태인과 같지 않았다(9:14-17).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

c.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 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16). 이 말씀에 따르면, 천국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임했으며(과거), 오늘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다(현재).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활동들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11:21). 여기의 임하였다는 완료형이다. 사탄의 통치가 깨어지는 위대한 순간이 도래함과 동시에 천국 도래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4:13, 12:43-45, 8:29, 1:24, 5:7, 4:34, 8:28-31, 10:18, 19 등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그 나라의 권세와 그 나라의 현재적 임함을 증거한다(4:23, 11:12, 15, 13:6). 특히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그 나라의 구원이 최고 절정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 메시지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것은 미래에 도래할 천국 뿐 아니라 더욱 이미 임하여 존재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와 산상보훈의 교훈들은 천국과 천국 백성들의 새로운 지침이다. 이것들을 미래적인 무엇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크게 강조한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우리가 미래의 어느 날 완전히 주어질 구원을 현재에 이미 소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선물이다(12:32, 21:43, 10:12, 25:34). 기독신자의 구원은 미래에 이뤄질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라고 함은 기독인이 현재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5:24)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신학자 박윤선 교수는 위 성경본문을 신자가 현세에서 부터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라고 주석한다. 요한복음 5:24사망에서 생으로 옮겼느니라옮겼다3인칭 단수 완료형으로 기술되어 있다. 옮겨져서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표현되었다. 이 점에 유의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라는 가르침의 너희 안에 있다”(in the midst of you, among you),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 자신의 오심은 곧 천국, 하나님 나라의 도래(coming)라는 뜻이다.

맺음말

성경이 말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저 세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천국은 임했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심판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은 임할 것이다. 천국은 3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저쪽에 있으며 장소성이 있는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현세에서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고 체험하며 승리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현재의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는 세대의 능력이 이 악한 세대에 들어와 겹쳐져 있는 상태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임재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지금도 예수가 구원자라고 하는 복음을 믿는 자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옮겨진다. 그 백성이 되어 버린다. 천국은 임하였다. 그러나 그 완성은 미래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역사하며 확장된다. (이 때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천국은 이 세상이 보기에는 매우 미미하고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 나라는 강력한 권력으로 임하지 않는다. 복음전도와 자기희생과 봉사를 통해 임한다.

천국은 임했고, 임하고 있고, 임할 것이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한다. 날마다 기쁨과 희망을 가지며 승리생활을 한다. 타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저 세상만을 추구하는 생활과 사고방식을 버린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과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 장래의 희망과 함께 성도의 생애와 기쁨을 더 좋아한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글은 다음의 책들에서 도움을 얻었음을 밝혀둔다. Herman Ridderbos, Coming of the Kingdom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2); Eldon G.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 (Grand Rapids: Eerdmans, 1959); 박윤선, <성경주석: 공관복음> (부산: 영음사, 1960).


원제: 천국이란 무엇인가?


최덕성, 高神大學報 29(1977): 37-43

 

출처: 리포트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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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 프란시스 쉐퍼

 

 

우리 세대는 굶주려 있다. 사랑에, 미에, 의미에, 항구적인 도덕과 법에 굶주려 있다. “죽음의 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풍성한 위로자에 대한 가지시 않는 갈증이 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 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애1;16).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은 위로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만족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의 의의를 잊었기 때문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복음주의와 정통신앙권 안에서는 사람의 목적을 말할 때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 가운데 첫 번째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해한 성경 교훈의 뜻은 완전히 바뀐다. 성결대로 충실히 대답하려면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하고 완전하게 인용해야 한다. 이 후반부 답이 인생에 대한 관점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사명을 절실히 수행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 관련된다.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고, 그분에게 채우심을 받고, 그로써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느 방관자에게도 기독교가 염세 교리를 믿는다고 결론 짓도록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시는 하나님, 친히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환경이 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종속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궁극적이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세와 내세에서 우리 인격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에 채움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 파괴적인 지성주의가 존재하긴 하나, 이것이 말하는 지식이란 참된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전인이 채움을 받아야 한다. 즉, 사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살 수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나지만 이들에게서 기독교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삶의 기쁨을 보지 못한다.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전인이 채움을 받아 가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진정한 채움으로 향하는 길에서 등을 돌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 옛 유대인들은 탈기독교 세계를 사는 현대인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상들을 찾아갔으나, 그래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문화를 건축하였다. 물론 그들의 신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물질주의를 전부로 삼고 모든 모든 것을 질량, 에너지, 운동으로 축소시킨 우주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우리 세대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에게로 갔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그리고 그 이후 민족들도 거짓된 신들에게로 갔으나, 그들은 우리 세대만큼 진리에서 멀리 떠나 있지는 않았다. 결론으로 다음 사실을 이해하자. 인격적인 위로자만이 인격적 존재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존재하시는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 즉 유대-기독교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만이 이 일을 넉넉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충분한 위로자이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애1:18). 히브리 성경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입”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인생의 진정한 해답,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는 명제적 계시- 에 반역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레미야 때의 시대 상황이나 탈기독교 세계의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외면했다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 아래 놓여 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도 거기서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그분과 분리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우리 역시 충분한 위로자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도덕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애1:19). 탈기독교 세계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해야 한다. 이 문화가 성경적인 종교개혁 사상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그 진리를 외면해 왔으므로 다시 진리로 돌아서는 일이 없이는 도시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게 될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문화를 다루고 계시기 때문에 할 말은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하는 오직 한 자기밖에 없었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러했고, 오늘 우리 시대가 또한 그러하다.

 

어떤 죽음인가? 인적이 끊긴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죽음이다. 인격성이 자취를 감췄다. 비슷하게 무섭고 소름끼치는 고독을 그린 호퍼 같은 미국 화가들이 생각난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토대로 교회와 문화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시의 죽음은 점차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우리 문화가 기독교라는 기반을 내동댕이 친 뒤에도 예전처럼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충족시킬 수 있는 분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분에게 등을 돌렸으므로, 여러분의 도시에는, 여러분의 문화에는 죽음이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에 기초하여 역사 안에 들어와 일하셨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일하신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그냥 군사나 경제상의 이유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심판하셨다. 우리 세대도 똑같이 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 교리들을 긍정하는 것을 뜻하지만, 아울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역사의 실재들에 관해 보여오신 교훈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이어야 한다. 이 관점을 갖고 있다면 싸구려 해결책들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8-25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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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교수로서의 바빙크는 어느 학교에서도 빛날 학문적 선생이었다. 박학하였고, 독서량은 엄청났지만, 잰체하지 않는 화법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를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며, 터놓고 표현하였다. 성급하지 않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해결책을 알게 되면, 스스럼없이 이를 알렸다.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는 위장 해결책을 항상 경계하였다.

논리학을 철저하게 공부했기 때문에알지 못하고서는 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인의 의미도 잘 알았다. 교의학자로서 그는 개혁신학이 칼빈신학과 동일하다는 자세로 캄펀과 암스테르담에서 사역하였다.

단순히 칼빈에게로의 회귀는 아니며, 그 이후의 발전을 고려하면서 비판도 하고,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1750년부터 경직되기 시작하던 개혁신학을 그는 이런 자세로 활성화하였다. 레이던에서 철학도 공부했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의 고유성과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독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성과 감정을 충족시키는 '계시 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칼빈처럼 개혁파 사상 뿐 아니라, 개혁파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름다움의 감동을 봉쇄하는 경건주의적 폐쇄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 기술 분야의 위대한 발견과 유익한 발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재세례파를 거부하는 칼빈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연구와 교수에 지장을 받지 않는 한, 교육과 사회 문제, 교회와 국가의관계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전국을 여행하였다. 이 모든 사역의 기초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다.
바빙크는 반대자에 대해서는 항상 포용성을 가지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대의 기라성과 같은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사상가들을 존경하였다. 이들보다 어려운 시기에 칼빈주의의 기치를 올린 흐룬을 더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캄펀과 같은 소도시에서 활동하였으나, 그는 폭넓은 공교회적 정신을 지녔다. 이런 자세는, 그가 1888년 12월 18일에 행한 특강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서 이미 잘 나타난다.

“복음은 개인 뿐 아니라, 인류 전체, 가정과 사회와 국가, 예술과 학문,전 우주, 바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창조물을 향한 복음이다. 신앙이 받은 약속은 세상을 이김이다.

이 신앙은 보편적이어서 때와 장소, 어느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신앙은 모든 상황에 적합하며, 본연적인 삶의 모든 형편과 연관되고, 모든 시대에 합당하며, 유익하며, 모든 환경에 적당하다.

오직 죄에만 대항하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정화되는 것 외에는 어느 것과도 충돌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은혜의 균형 있는 관계를 제시하면서, 분리측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분리주의의 흔적을 경고하였다.
이처럼 온건한 바빙크였으나,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에 있어서는 카이퍼와 큰 상처를 입었다. 카이퍼와도 갈등 관계에 빠졌고, 옛 분리측 인사들과도 등을 지고 말았다.

개혁파원리를 확고하게 따랐던 그가 이 과정에서 그 원리를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그는 교회 정치의 현실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파원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도 들어있는데, 교회정치는 종종 이 진리를 철저하게 체험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죄와 은혜, 죄과와 사죄, 중생과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이런 표현은 온건한 바빙크가 가장 신랄하게 표현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분리와 합동이라는 교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기가 바뀌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는 시대에 살면서, 신앙으로 헤쳐나간 바빙크가 임종시에 한 말은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다: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소용이 있는가.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출처:
보혈의피 | 2013.09.30. 10:08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2632 

지방교회 주장에 대하여 읽다보면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선생님께서 오시안더의 주장에대하여 분개하고, 몇장에 걸쳐 반박하여 나가시는데, 오시안더의 주장들이 오늘날의 지방교회 주장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기독교 강요에서 오시안더에 관한 내용  일부를 발취하였사오니 오시안더의 주장들이 지방교회 주장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지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는 괴물을 소개하여 칭의의 교리를 깊은 안개로 휩싸이게 만들어서 경건한 사람들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고 있으므로 다른 문제들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이 정신 나간 몽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의 사색은 순전히 허망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성경에서 여러가지 증거들을 수집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시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와 하나임을 증명하는데, 사실 이점은 증거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연합의 끈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속이고 마는 것이다. 그가 당면한 모든 난제들을 우리는 쉽게 해결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은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다 주입시키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마니교(Manìchaeìsm)의 사고와 유사한 사고를 형성시키고 여기에 자기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허구를 붙여 놓았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 본성의 원형을 입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결하게 다루기를 원하므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살피기로 하겠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이 원리를 잘못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사요 의의 근원이 시요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다른 곳으로 미루어야 할 내용을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도 독자들께서는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오시안더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견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희생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어진 의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풍성 모두를 주입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그렇게 열렬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삼위(三位)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시안더가 그 사실을 아주 심하게 왜곡시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거하심의 방식을 생각했어야 옳았올 것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니( 2: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신성의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어야 옳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올 별도로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단순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올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본질의 혼합을 주장한다. 곧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시키셔서 - 우리를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실에 대해서도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라나고 그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들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혼합되지 않고서는 그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그는 아버지와 성령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즉 우리가 중보자의 은혜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그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하게 혹은 안전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본질 속에서 우리와 연합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에 그의 본질을 접속시키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시는데 이는 그가 사람으로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그 신성의 본질이 우리 속에 주입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고만 말하고 그쳤더라면, 그의 몽상과도 같은 그릇된 사상이 덜 해를 끼쳤올 것이고 그 오류로 인하여 그런 큰 논쟁이 일어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시안더가 제시하는 이 원리는 마치 오징어와도 같아서 검고 탁한 피를 내뿜어 그 많은 꼬리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유일하게 충만한 확신올 주는 그 의를 빼앗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강력하게 배격해야 마땅할 것이다.

 개혁주의마을/


조엘 비키예비 은총에 대해

 

 

    “대부분의 20세기 학자들은 중생을 위한 예비 은총(preparatory grace)이 청교도가 종교개혁 은총론을 인간 중심적인 율법주의 사상과 거래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여겨 폐기처분했다.”고 비키는 진단한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아끼지 않은 학자들도 몇몇 있다.”고 한다.

 

    1. ‘예비 은총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책과 위험과 속수무책 상태를 확신하게 하도록 하나님이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청교도는 확신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하고 죄인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훈계하는 것에 대한 방대한 논의를 생산했다. 즉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고 은혜의 수단들을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읽기, 설교듣기, 묵상, 기도, 영적인 교제 등등을 강조했다.

 

    2. ‘구원의 믿음의 예비라는 개념에 오해가 없지는 않았다. ‘죄인은 자신의 죄로 죽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어떠한 것도 수행할 수 없는데 어떻게 죄인이 회심을 향하여 준비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특별히 오캄의 영향을 받았던 일부 중세 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에 합당한 보상으로 회심하게 하는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는 일종의 남루한 거래 개념을 주장했다. 즉 이런 인간의 노력은 주님에게 부합한 일치 공로(congruent merit)’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3. 비키는 예비 은총에 대한 청교도적 개념은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공로 은총(meritorious grace)과 다른 것이며 구원에 인간의 공로가 끼어들 여지를 넉넉히 마련한 펠라기안 사상과도 다르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성경적인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라고 정죄한다. 청교도도 그랬다며.

 

    4. 종교개혁 인물들과 청교도가 고수했던 성경적 가르침은 인간의 영적인 무능력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럼에도 일례로 웨스트민스터 문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믿음과 영생에 이르는 회개의 중요한 전조요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통한 죄 인식에 이르도록 하시는 수단인 성령의 일반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웨민 고백서는 돌이키지 않은 죄인들이 믿음 없이 은혜의 수단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음에도 그 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태만함은 더욱 죄악된 것이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진술한다.

 

   5. 실제로 많은 청교도가 회심을 위한 준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잃어버린 죄인들이 돌이킬 것을 기대하며 은혜의 수단들 사용을 그들에게 권하였기 때문에 준비주의(preparationism)’ 같은 거북한 호칭도 뒤따랐다. 물론 준비 개념을 과도하게 발전시켜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없지는 않았단다. 비키는 이를 청교도 사상의 계승이 아니라 퇴락의 단면이라고 꼬집는다.

 

   6. 비키는 구원의 믿음을 위한 예비 은총 개념에 대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인물들과 청교도 사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청교도 내에서도 교리의 디테일에 있어서는 상이성이 발견된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만 죄인들을 중생케 하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회심이 죄에 대한 확신과 말씀에 대한 경청의 과정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예비주의 주창자는 청교도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 옹호자라 역설한다.

 

    7. 비키가 생각하는 예비 은총개념의 긍정적인 측면들은 이렇다. 1) 청교도 예비론은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를 지원하고, 2) 철저한 개혁주의 개념이며, 3) 성령의 일반 사역을 강조하고, 4) 죄인들과 율법을 연결하려 하지 율법주의 사상을 두둔하진 않으며, 5) 중생의 신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비로운 그대로 열어두며, 6) 하나님을 창조자와 구세주로 경외하며, 7) 그리스도 예수의 충분성을 보이고, 8) 성경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개념이다.

 

    8. 질의응답 시간에 예비 은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에 대해 여쭈었다. 사용하지 않아도 별 탈 없었을 텐데라는 추정에 근거해서 말이다. 이때 비키는 화란 개혁주의 진영과 청교도 진영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즉 죄책감 직전--깊은 죄책감--회심--신자의 길 등으로 구분할 때에 화란은 죄책감 직전을 중생의 시점으로 보았지만 청교도는 깊은 죄책감 직후의 회심을 중생 확인할 수 있는 시점으로 강조했다 한다. 당연히 회심 이전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총이 없었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비 은총이 인간 편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이어서 회심 이전에도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와 역사 강조를 철회하지 않을 수 있었단다.

 

   9. “청교도 내에서 혹시 예비 은총사용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공격까지 한 청교도가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없단다...!!! 멀러의 많은 멘트에는 논쟁적인 내용이 없었고 책의 건설적인 조언들로 충만했다. 비키는 꼼꼼하게 받아 적으시는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취하셨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멀러가 비키를 소개하는 서두에 동료(colleague)라는 호칭을 썼는데 비키는 멀러가 자신의 멘토(mentor)인데 동료는 과분한 것이라며 유쾌한 거절로 응수했다. 그것도 멋졌었다! 오늘 발표된 논문은 분량 면에서 여름에 나올 책의 폭력적인 요약이라 했다. 내년 여름에 청교도 신학의 주목받지 못한, 때때로 가려진 부위를 조명하는 서적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하나 생겼다.

 

Friday, December 7, 2012

 

출처: http://paul-prodeo.blogspot.kr/2012/12/blog-post_7541.html

 

 

 

    위 글 마지막 문장에 언급된 책이 출판됐나 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책에 연중론 수장께서 순중론/연중론 논쟁을 끝내게 할 책이라며 연중론의 희망을 거는 김치국물을 먼저 마시고 계시는 겁니다. “조엘 비키는 연중론자다.” 하고 싶으신 거지요.

 

   

 

 

    그런데 연중론자들이 연중론자라고 주장한 신학자들 가운데 연중론자로 제대로 밝혀냈던 신학자가 단 한 분이라도 있었던가요? 오히려 이른바 순중론자들이, 연중론자들이 연중론자로 주장한 신학자들 여러 사람을 이른바 순중론자로 밝혀냈지요.

 

    “위 조엘 비키 예비 은혜에 대한 글을 독해할 때, 조엘 비키는 연중론자가 아닙니다.” 저 역시 조엘 비키 새로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연중론자들 독해력 문제, 즉 난독증을 생각하면서 김치국물 먼저 마시는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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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풀핏| 원글보기

세상적 위로가 주는 과도한 기쁨에 대한 지침(크리스토퍼 러브)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주는 과도한 기쁨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세상에서 주시는 외면적 편안함들에 대해서 즐길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는 사실이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도서 3:4). 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라"(전도서7:14) 그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명기12:7) 이러한 결론은 슬프고 우울한 크리스챤들, 다시말하면 세상적 편안함의 풍요를 누리지만, 결코 ...기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는 기뻐해도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이란 것이 세상적 즐거움을 뿌리채 뽑거나 멸절시키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조절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당신의 기쁨의 싹을 흔들어 뿌리채 뽑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싹을 잘 다듬어 주어서 과도하고 호사스러움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며, 그러함으로써 당신의 기쁨이 그 적절하고 어울릴만한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경건은 멸절이 아니라 기쁨의 조절에 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기쁨을 절감시키기 보다는 더욱 증대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결론을 가져야 한다. 경건한 사람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즐거움은 때때로 악인의 세속적 즐거움에 비한다면 보다 내적인 슬픔과 영적인 아픔과 혼합되어 있다. 마치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잠언14:13)라고 말한 것과 같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들이 외면적으로 치장하지 말고 내면에 치장하라고 말한다.(고후5:12) 악인의 즐거움은 단지 외면적인 것이며, 실제가 아니다. 그들이 가장 기뻐하고 환희에 차 있을 때라도 그들의 내면은 양심의 가책과 온갖 복잡함이 마음에 가득하다. 악인의 즐거움은 마치 경건한 자의 슬픔과 같다. 악인의 기쁨이 단지 겉보기에 머물며 진실이 아닌 것처럼, 경건한 자의 슬픔은 사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단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것이다.(고후6:10)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언10:22)

악인은 작은 한가지 사건에도 세속적 기쁨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건한 자의 기쁨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말하자면, 여기 이 세상에서 갖게되는 외면적인 세속적 기쁨은 아합이 온 왕국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지 못해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아주 작은 일이 악인의 기쁨을 반전시키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쁨은 마치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전도서 7:6) 소리와 같다. 그들은 잠시 소란을 피우고 불타는 것 같을 뿐이다. 하지만 곧 식어 없어질 것이다. 벨사살이 금술잔으로 폭음을 하고 있었을 때, 그 잔치의 중간에 한 손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는 순간 일순간 그의 기쁨은 사라졌고 그의 머리는 힘을 잃었다.(다니엘5)

당신이 세속의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합법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몇가지 즐기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특별히 대여섯가지 항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자신의 죄를 즐겨서는 안된다.
당신이 범한 죄들은 결코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악인들은 그들의 범죄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 "너는 악한 짓을 하고 기뻐하는구나"(-쉬운성경,예레미야11:15).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하기를 "행악하기를 기뻐하며"(잠언2:14), 시편에서도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시편52:1,3). 하나님은 우리가 죄악을 기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2. 남의 죄를 즐겨서도 안된다.
다른 사람들의 죄악도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즐거움으로 허락받지 못했다. 사랑에 대해서 고린도전서13:6에 보면 "불의(iniquity:불법,사악)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을 향한 사랑이란 그 사람의 죄를 기쁨으로 삼지않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반대인 그의 정직한 행위를 기뻐하는 것이다. 로마서 1:30-32에 보면 "악인과 동일한 행위를 하는 자들"만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자들도 정죄를 받고 있다. 즉, 언약의 배약자들, 무자비한 자들,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들, 능욕하는 자들, 교만하고 자랑하며 악을 발명하는 자들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뿐 아니라 그런 것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자들도 정죄를 받습니다.(역자주-한글개역판에는 그들을 "옳다고 하는 자"라고 표현되어 있다. KJV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자"로 표현되어 있음) 이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편119:136). 베드로는 말합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2:7-8)

3. 비이성적인 피조물들의 죄에 대한 처벌에 대해 기뻐해서는 안된다.

이것과 관련해서 퍼킨스는 소와 닭싸움들에 대해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의 결과를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왜 죄인가하면 곰과 개를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죄, 즉 피조물과 피조물사이를 싸움질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불법으로 얻은 물건을 기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주께서 기뻐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시편62:10). 그러므로 주께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하박국1:13-15). 주님께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고리대금과 같은 것으로 잘못 행하여 그들의 가산을 탈취하는 것에 대해 정죄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남에게 사기를 쳐 빼앗은 것에 대해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명성과 헛된 자랑을 하기 위해 세상에서 번창하고, 병원을 세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합법적인 상거래를 통해 기쁨을 얻고 정직한 이득을 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즐기고 누려도 되지만 잘못되게 얻은 것을 즐겨서는 안됩니다. "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잠언20:14).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을 싫어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신명기23:18). 비록 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라도 사악함과 부정으로 취득하였다면 주께서 그것을 혐호하십니다. 주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기뻐함으로 주께 가져 오는 자들을 업신여기십니다. "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미가1:7).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자 크게 낙심하였을 때, 그의 아내는 악한 일을 꾸밈으로써 포도원을 탈취하여, 남편을 상쾌하고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속이고 사기침으로써 얻은 재물을 기뻐하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5.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과 고난을 기뻐해서는 안된다.
이는 주께서 오바댜의 예언 속에서 에돔사람들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오바댜1:12). 그러므로 주께서 세일산과 이두메를 경고하셔서 이스라엘이 곤고할 때 기뻐한 사실을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에스겔35:15) 미가는 그곳 교회에게 말하기를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미가7:8).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언17:5)

6. 당신의 대적이 비참에 빠지고 고통 당할 때 기쁨의 소재로 삼으면 안된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언24:17). 욥은 이 특별한 일에 대해 양심적이어서 이러한 행위를 멀리하였습니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욥기31:29-30) 욥은 이러한 일들을 철저히 부인하였습니다. 당신도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대적의 고통과 고난을 기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실로 만일 당신이 그들을 하나님의 대적이요 교회의 적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의 대적으로서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였습니다.
"주를 미워하는 자를 내가 싫어하며 가장 완전한 미움으로 그들을 미워합니다." 당신의 원수이기에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혹은 당신에게 해를 끼쳤기에 미워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적은 당신이 반드시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멸망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 여섯번째 특별사항의 어느 것도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결론을 가지십시오. 때때로 어떤 때에는 합법적인 것들을 기뻐해서도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공적이며 거룩한 금식과 겸손히 해야할 때에, 신부는 그 방에서 나와야 하며 신랑은 그 침실에서 나와야 합니다. 기쁨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땅이 심판으로 황폐해 지고 피폐해질 때입니다. (이사야 24:8)

세번째, 하나님의 손이 특별한 가족과 사람에게 크게 임하여 크게 애곡해야 할 때. (전도서 7:2)

네번째, 하나님을 배역하고 신앙을 버린 후에, 죄나 어떤 사악한 범죄에 빠질 때, 그런후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합당한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호세아9:1)

개혁주의마을/Grace 님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고신대학원 교수님들의 십일조에 대한 연구 보고서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 한정건, 현유광 -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 크게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비록 신약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게 보이지만(마23:23, 눅11:42),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주장은
전혀 없는 만큼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이 없이 십일조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셋째는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이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도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교회가 필요할 때에는 각자의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는 원리가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 보고서에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십일조의 유래와 그 실례(實例)들을 살피고(I), 그 실례들을 기초로 하여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practices)를 밝히겠다(II). 그리고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율법의
유효성 문제와 함께 다루어 본다(III).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성경적인 헌금관을 제시한다(IV).


I.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유래(由來)

1.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

1) 족장들의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18-20이다. 북부지역 네 왕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의 영접과 축복을 받는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의 관습은 셈족
이외의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종 보이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각주1. C.L. Feinberg, "Ti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제5권, p.756.)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당시의 습관을 좇아서 드렸다고 보아야 할까? 비록 아브라함 이전에 십일조의 관습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500여년 후에 율법이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박윤선 박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로 주고받은 것을 보면, 이 제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각주 2박윤선,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문제,” 『신학정론』 제6권 제1호 (1988, 7), 148)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린 것이었다.
②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적을 완벽하게 격파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드린 헌물이었다. (각주 3. 김영철, “십일조의 성경적의미,”
『신학정론』 제4권 제2호
(1986, 11), 335)

이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의 서원에서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박윤선 박사는, “그것은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계시에 의해 그 가정에서 지켜오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각주 4. 박윤선, 앞의 책)

아브라함의 가정이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대대로 지켜왔는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라고 한 말에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십일조가
자발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여기에서 추가해야 할 십일조의 중요한 원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이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이다.

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

족장 시대에는 십일조가 앞에서 본 것처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각각 한번씩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부과된 의무가 되었다. 모세의 율법에서 보면, 십일조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레위기 27:30-33에 나오는데, 땅의 소산과 소나 양의 십분 일을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허락하신 소산 중 십분의 일을 벌칙까지 부과하시면서 요구하신다.
둘째로, 민수기 18:20-32에 나타난 십일조다. 민수기에서는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의 용도가 부각된다. 하나님은 레위지파
사람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으셨다. 레위지파 사람들 중 제사장들은 제사를 주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 드릴 때에 보조하는
역할과 성막을 간수하는 일에 전념했다. 따라서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나머지 11지파의 사람들이 책임을 졌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 자손에게 주어 그들의 생활을 도우셨다. 민수기 18:26에서는
레위인들의 십일조가 나온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얻은 것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거제로 드려서 제사장 가족들을
공궤한다.

셋째로, 신명기 14:22-29을 보면,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서
먹고 즐기도록 하신다. 또 매 삼년(안식년 후 제3년과 제6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 사용하라고 하신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원리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십일조가 드려지지만, 그후 십일조는 레위 지파를 위해 사용되어지는 수평적인 성격을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에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다.

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침이 마땅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에 상당한 애착을 보이신다. 즉 십일조를 변개할 때에 주어질 벌칙까지도 부과하신다.

②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드려졌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하며
경축(celebration)하는 경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십일조는 생활이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졌다.

3)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십일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그들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도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사사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 길을 찾아 배회하며, 우상까지도 섬기며, 한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삿17:7-10,
18:18-20).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레위인들의 사명의식이 흐려지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에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에 따라, 생활고를 레위지파 사람들 스스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무엘이 십일조를 삼상8:15이하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왕정(王政)이 이루어질 경우 백성들의 소득의 십분의 일이
왕가(王家)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으로 징수될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서 헌금과는 무관하다. 그 후 다윗이나 솔로몬 왕 시대에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윗의 경우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물을 한 사람이다. 역대상
29:14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헌금의 원칙을 천명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모든 것이주께로부터 왔고, 그 중에서 일부를 주께 드리는 것뿐임을 밝혔다.

솔로몬보다 약 200년 후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했던 아모스가 십일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모스
4:4에 나타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면서 겉모양만 남은 십일조를 지적한다. 그 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르러,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하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시행하게 한 사실이
역대하 31장에 나타난다. 히스기야 왕의 십일조와 관련한 조치는, 십일조를 통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스기야 왕 이후 북왕국과 남왕국이 모두 멸망하기까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구약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4) 포로시대와 예루살렘 귀환 후의 십일조

이스라엘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있는 때에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금 십일조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때는 느헤미야와 말라기가 활동했던 시기이다.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 후 그는 예배의식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에
정한대로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한다(느10:38, 12:44 등).

주전 430년경,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었고, 드린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하였다. 이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또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총독에게 하는 것만큼도 하나님께 하지 않는다고 책망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전적
헌신의 표시로서 십일조 특히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깨우치신다(말3장).

여기에서 십일조의 원리를 볼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는 필수적이었으며, 십일조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못하였을 때에 종교가 타락하게 됨을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본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

1)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

예수님은 십일조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바가 없다. 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십일조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셨다(마23:23, 눅11:4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있어서 매우 꼼꼼하게 계산하여 시행했으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눅18:12).

이런 형편에서 주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 곧 사람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함을 깨우치신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헨드릭슨은 이 말씀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계속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주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기까지만 십일조가 유효한 것을
밝힌 것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음으로 십일조에 관한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각주 5 W. Hendriksen, Exposi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Baker, 1973), p. 832)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성경본문에
부정시상(aorist)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3:23에서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시상으로,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시상이 사용되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 쓴다면 “이것도 행하고(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고) 저것도(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 이전에만
국한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 아니다. (각주6은 길어서 아래 미주처리)

마태복음 10:9-15에서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함을 밝히신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자비량할 수도 있지만, 또한 복음 사역의 협력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도 합당하게 보셨다.
심지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약속하시고,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경고하기까지 하신다.

예수님은 헌금의 원리에 대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해 가르치신다(눅21:1-4).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돈의 액수의
다소보다는 최선을 다해 드리는 마음이다.

2) 초대교회의 헌금 행태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헌금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쳤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가진 재산을 자원하여 팔아 어려운 자들과 나누어 사용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행 4:32). 이러한 성도들의 행위를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유혹을 받을 만큼
큰 돈을 교회에 바치기로 작심한다(행 5:1). (각주 7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어 벌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고, 성도들이 복음의 사역자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9:6-14). 그는 교회(지도자들)가 가난한 자를 돌볼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갈2:10).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유대지역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도록 권면한다(고후 9장). 연보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하고,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였다(고후 9:7).

여기서 초대교회가 시행한 연보의 원리를 보게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다. 헌금하는 성도는, 심는 자에게 곡식을 수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헌금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즐거이 바치는 자에게 열매를 더 풍성하게 더하시는 분이시다(고후9:10).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연보는 규칙적으로 준비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

연보는 자원해서 할 것이나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은 인정받을 만한 일이다(고후8:3). 하나님은 기쁨으로 헌금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바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다. 이것은 구약의 원리와 일치한다. 단지 신약에서는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율법의 규정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II.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구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곡물이나 과실들, 그리고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한다(레 27:30-32).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도 말한다(말 3:8). 그러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인가? 땅의 전체, 그리고 소득의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시24:1).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를 다 바치기를 명령하시지 않고 십분 일만 바치도록 하셨다. 즉 대표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십일조와 함께 첫 열매도 대표의 원리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하신 것은(롬 11:16) 첫 것이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바치면 제사장은 한
움큼을 취하여 단에서 화제물로 불사르고 그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돌린다. 이때에 바쳐진 한 움큼은 전체를 대표한 것이며, 한
움큼이 바쳐진 것은 전체가 바쳐진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것을 요구하셨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내게 하셨고, 성전 운영에 필요를 위해 십일조를 요구하셨다. 때로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십분 일의 명목으로 요구하셨다(신
14:28). 전체적으로 볼 때에 이스라엘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낸 결과가 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신이 필요할
때면 십분 일의 명목으로 받으셨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언제든지 요구하실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실제 십의 일보다 많이
거두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거두실 때마다 십일조라는 이름을 붙이신 것은 자신의 것을 자신이 받는다는 정당성 때문이었다. 사실 ‘십일조’라는 문자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헌금의 원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하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원리를 규정하였다.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자신의 것을 거두셨다.
그 때에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거두신 것은(실제 어떤 해에는 3/10 가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너무 ‘십일조’라는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음을 꾸짖은 경우에서도 우리는
너무 경직되게 ‘십일조’ 자체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말라기 시대에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므로 레위인들이 그들이 생업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이 타락함으로써 이스라엘 종교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종교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인 십일조를 등한시하는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자신의 것인 십일조를 요구한 것이다.

구약의 원리가 신약에도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하나의 큰 신학적인 문제이다.
혹자는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십일조 포함)을 완성하셨다고 하며, 아직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모독하는 것으로까지 말한다. (각주 8 사두환, 한국교회의 십일조에 대하여,” 『뉴스앤조이』 2001-07-13)

우리는 성경이해에서 가장 큰 원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다르다고 하면 안 된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율법의 실제 적용에서는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즉, 제 칠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있어서, 그 칠 일째(토요일)를 경직되게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안식일의 원리는
변하지 않으면서 신약의 안식일을 더 의미 있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의 사례는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 외에는 없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마 23:23). [헬라원어와 관계된 해석은 미주(尾註) 6번을 참고하라.] 이 부분은 십일조와 관련된 논쟁에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십일조 문제를 율법의 문제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생긴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십일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율법의 문제를
먼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III. 신약 시대의 율법 문제

율법이 신약시대에 폐하여졌느냐 하는 문제는 큰 신학적 논쟁거리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율법이 폐하여진 것으로
말한다(롬10:14; 엡 2;15; 히7:12, 18; 10:9 등). 바울은 신약시대에 율법을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무효화 시키는 것으로 단정한다. 율법의 기능은 참 구원자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가정교사, 혹은 소년감독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율법을 완전히 폐지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율법을
이루려(완성하려) 오셨지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
5:17-20).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고(눅 10:28),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37). 이것은 율법을 폐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신 것이다(눅18:18-22
참조).

사도 바울을 율법을 폐지한 사람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6:1-3에 제5계명을 들어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한
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다. 그가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바울이 모든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꾸짖은 것이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다. 로마서 3:19-20에 의하면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으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화 시킨다. 사람은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3:22).

그러나 바울은 이어서 반문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즉,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구원 받은 자는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을 이루는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성령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는 로마서 8:4
말씀을 제시한다. 고린도후서 3:3은 옛 율법과 달리 이제는 법이 성령에 의해 심비에 쓰였다고 하였다. 율법의 내면화를
말한다.

성령의 역할과 율법의 내면화는 구약의 새언약에서 밝히는 바이다. 예레미야 31:33은 새언약에서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였다”고 말한다. 새언약이 율법을 폐한 것이 결코 아니다. 새언약에서도 율법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율법이 성령에 의해 마음에 기록되는 내면화로 변한다. 에스겔서는 새 시대에 성령이 율법을 마음에 둠으로써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할 것을 거듭 밝힌다.
(겔 11:19-20; 36:26-27). (각주 9새언약 시대의 율법의 문제에 대하여 한정건, “새언약시대의 율법에 대한
고찰"『교수 논문집』제18집 (고신대학교, 1990), pp. 5-30 참조할 것)

율법의 원리는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구약에서 율법은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신약에서도 율법은 결코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순종해야 할 지침이 된다. 신약에서의 율법은 영적이며 내면적이다. 외형적인 그 문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원리가 중요하며,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으로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다.


IV. 오늘에 있어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신약이(특히 바울서신에서), 외형적으로 율법을 좇아가는 율법주의자에 대하여 크게 꾸짖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의 정신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도 밝혔다. 따라서 율법의 문제에서 구약과 신약을 동일시하여 구약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삼가야 하지만, 또한 근본적으로 구약의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신약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성취이며 완성이다. 구약의 원리와 명령은 신약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고, 그
의미가 내면화되고 더 완성적이어야 한다.

구약의 헌금의 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나의 토지(기업)가 하나님의 것이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소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바쳐야 한다. 그 기준이 바로
십일조였다.

구약에서는 제사제도의 유지와 구제 그리고 공동체적 축제를 위해 최소한의 경비를 하나님의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드리게 하셨다.

구약의 원리에 의하면 만약 십의 일을 내지 않으면
① 자신의 소득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리를 망각하는 것이고, ②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 책임유기이다.

이러한 기본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최소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이상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유지하고 복음사역을 활발하게 이루어나가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다. 그렇게 바칠
때에 십일조를 기준으로 헌금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형편이 어렵거나 신앙이 어려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헌금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

이와 더불어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먼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또 하나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십일조를
내도록 하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가지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예배당 건축이나(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축이라면 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행사를 위해 부당하게 헌금을 사용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회 재정이 남아 특별한 명분 없이 이를 저축하거나 땅에 투자하거나 주식 같은 것에 투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복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합당하게 사용할 책임이 있다. 헌금이 구약과 신약 시대에 공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는데, 오늘날 교회는 성도의 십일조로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하고 있는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약시대에도 사도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를 유지하고 이루어나가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며, 그 헌금의 원리는 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아까워하거나
인색하지 않고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칠 때에 십일조를 기준으로 헌금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준열히 책망하셨다. 그들이 그러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키고
백성들을 얽어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다. 또 3:6에서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라고 엄히 명한다.

또 사도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지침으로서 네
가지의 금령을 제시한다(행15장). 그리함으로써 전환기에 처한 성도들에게 도움을 준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주의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함정이다. 그러나 자신과 이웃의 신앙의 증진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침은 유익이 된다.

신약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오해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규모 없이 행해서는 결코
안 된다.
즉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하며 이웃을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의 법에서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십일조는 폐지되었으며, 헌금을 개인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서는 서론에서 제기되었던 세 가지 주장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장은 옳지 않음을 밝힌다.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서는 안 되나, 율법의 원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어 십일조를 헌금생활의 지침(指針,
guideline)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첫째 주장(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십일조의 가르침은 완전히
폐지되었다)은 옳지 않다. 둘째 주장(구약의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성령의 법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잘못 되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는
안된다. 율법을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십일조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율법에 대한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 없이 문자 그대로를 강요하는 것은 옳은 성경관이 아니다.
반대로 신약시대에 율법은 폐지되었으므로 십일조의 원리도 폐지되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십분의 일 이상,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은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함과, 신앙생활의 증진과 건덕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http://jmf.or.kr/jmf/technote/read.cgi?board=right_gs&y_number=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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