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회복해야할 지도자의 영적자세

교회론 2018. 5. 31. 21:16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대학 신학부 교수이며, 그 대학 성 교회 주임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로마교황 레오10세를 향한 질의서를 그 성당 출입구에 붙임으로 촉발된 개혁의 시작이 어느덧 498주년을 맞이했다.

개혁자들이 외친 핵심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Sola Scriptura’(오직 성령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였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신전의식)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왜곡된 교리와 제도에 대한 성경적 회귀를 외치는 부르짖음이었다.

어떤 면에서 로마교회 안에 존재해있던 사제제도 중심의 계급주의도 하나의 개혁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다양한 직분이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방법과 수단이며, 역할임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었다.

최근 한국교회는 이런 개혁주의 정신이 왜곡된 채 오히려 교회직분이 계급화 되는 현상들을 초래해 어떤 직분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열심히 섬기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 직분을 얻기 위해 교회 안에서도 세상 선거 때나 있을 법한 부도덕한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직분을 교회성장의 도구로 이용해 직분자들을 세움으로 교회의 세를 확장시키려 의도한 면도 적지 않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성장하므로 교회의 다양한 섬김을 위해 그 일을 섬길 사람들을 택하기 위해 직분자를 세웠다.

지금처럼 직분자를 세워 교회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직분자를 많이 세우는 것이 마치 교회의 자랑인 것처럼 되어 버렸으며, 그것이 교회의 교세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직 직분을 맡을 자격이 없음에도 너도나도 모두가 직분을 가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교회에 등록한 후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당연히 서리집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창피하게 생각하며, 또 서리집사가 되어 몇 년 섬기고 나서 당연히 안수집사가 되거나 권사가 되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그 다음에는 시무집사로 얼마간 섬기면 당연히 장로가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시험에 들거나 불평하며 교회를 떠나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교회 직분은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역할을 맡았던지 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교회 직분은 그 다음 직분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결코 아니다. 교회 직분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하나하나가 소중하며 가치 있으며 주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 대한 바른의식이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직분은 계속 계급화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직분 간에 갈등이 생기며,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

실제적으로 교회안에서 직분간의 갈등이 생겨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안에서 직분을 얻기 위해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수단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일은 직분은 역할의 차이라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직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 역할을 맡느냐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맡겨진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많다. 맡겨진 역할이 자신의 욕구에 만족스럽지 못할 때 스스로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 대한 바른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첫째, 직분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가 회복되어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는 직분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보여준다. 직분이란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닌 역할이라는 것이다.

교회안에서의 직분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임을 바로 인식하며, 계급의 차이가 아닌 섬기며 봉사하는 수단이며, 영역의 차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벧전4:10에서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듯이 각자가 맡은 역할대로 섬기면 된다. 직분이 결코 그 사람의 신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직분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해선 않된다. 그 이유는 직분은 맡겨지는 것이지 내가 맡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전12:11에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직분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지는 것임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맡으려고 시도해선 안된다.

내가 억지로 맡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부작용이 생기며 영적 공동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달란트가 주인으로부터 맡겨진 것이지 종들이 자신들이 얼마씩을 원해서 맡겨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맡겨지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약1:17에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고전7:7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기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달란트의 주인이 종이 아니고 주인인 것처럼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직분을 탐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행8:18이하에서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돈으로 이 권능을 사려고 한 사건이 나온다.

이런 일들이 교회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인위적으로 직분을 맡기 위해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크든 적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임을 깊이 인식하며, 직분이 맡겨질 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맡겨지지 않으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직분자는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열처녀의 비유는 직분을 맡은 자가 하나님과 어떤 영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등을 준비하는 영적 관계가 필요하다.

등은 보여지는 외적인 행위로 직분자가 어떤 신앙적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진실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직분자가 바른 예배자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지금 바른 예배가 무너지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예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예배 형태로 변질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감정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예배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직분자는 신앙의 연륜을 가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 바른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다.

동시에 직분자는 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직분자들이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너진지 오래됐다. 과거에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으로 알고 믿음 생활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저 교회 가는 날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분자에게 주일성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는 직분자는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주일에 대한 바른 인식을 회복함으로 직분자 스스로가 주일에 철저하도록 자신을 회복시켜야 한다. 주일을 바로 성수하지 못하는 자는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 다른 날도 하나님의 날이지만, 주일은 더더욱 하나님의 날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바른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

바른 섬김은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다. 롬 12:6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했다. 지신의 분수를 지킬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분수를 넘어서기에 혼란이 생기며 어려움이 생긴다. 분수를 넘을 때 남을 비판하게 되며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며 불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관계를 위한 또다른 하나는 기름을 준비하는 자세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직분자의 진정한 영적 자세는 외적인 행위 내면에 숨겨진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이며 교제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가 바로서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이 관계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지므로 직분자에게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수고가 필요하며,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내적인 깊은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도는 내 요구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셋째, 직분자는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은 눅 9:23에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는 십자가를 지는 자세이다.

많은 직분자들이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신의 직분을 즐기며 누리려는 현상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누군데’하는 생각들이 은연 중 밑바닥에 깔려 있다. 정말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으면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지는 자세의 시작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 주님의 명령에 복종한 후 자신의 무익함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이다.

눅17:10에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했다. 때로 직분자가 자신을 드러내며 나타내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떤 일의 성과가 좋을 때 더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 과감하게 ‘나는 무익한 종’일 뿐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일을 자랑하려 해서는 않된다. 그럼에도 자랑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고전3:21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으며, 고전5:6에선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고 했다. 성경은 인간의 자랑은 허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약4:16에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런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바울이 갈6:14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직분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올바른 직분자의 영적 자세가 회복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바른 직분 의식은 일의 결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무익한 종임을 분명히 고백하며, 오직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도록 사는 것이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일 뿐이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02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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