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
종말론 2016. 2. 9. 20:07[개혁주의 종말론]
안토니 후크마 / 류호준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제1부 시작된 종말론
“종말론”이란 영어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eschatos와 logos)가 합쳐져서 되었다. 이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개인에 관한 문제들에 관해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육체의 죽음, 영혼불멸성, 중간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대부활, 최후의 심판, 최후의 상태 등이다.
성경적 종말론에는 신자의 현재적 상태와 아울러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적” 면도 포함된다. “시작된 종말”과 “미래의 종말”을 포함한다. 여기서 “실현된 종말론”이란 용어보다 “시작된 종말론”이란 표현을 더 적합하게 생각한다. “시작된 종말”이란 의미는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
제1장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관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계시의 연관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종말론이란 성경 중 어느 한부분이나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과 같은 책들에서만 종말론이 발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종말론이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기를 구약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구약의 저자들이 현재 우리들이 “마래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주제들-죽은 후의 생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에 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살펴볼 때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벨하우젠 학파는 종말론이란 바벨론 포로 후기 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학계의 방향은 종말론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이 인식되고 있다. 많은 수의 학자들이 구속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낳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이 가장 비참해진 상황 속에서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 길만이 삶의 기반인 것을 인식할 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굳게 지키시고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굳어지고 있다고 고백하게 될 때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새롭게 창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의 특징이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인 것이다. (pp. 14-15.)
구약에 나타난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에 관해 살펴보자. 창세기 3장 전반부에 기록된 인류 타락기사는 장차 구속자가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3:15에는 여인의 후손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장차 오실 이 구속자는 창세기 22:38(참조. 26:4; 28:34)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지칭되고 있다. 더욱이 창세기 49:10은 구체적으로 이 구속자가 유다의 지파로부터 나올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속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7:14에 장차 오실 구속자를 특별히 임마누엘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다.
장차 오실 구속자는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실 것이라는 생각과 아울러 이사야서에서는 그 구속자가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의 종”이란 개념은 자주 이사야서에 나타나는데 그 종이란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때로는 장차 오실 구속자를 가리키고 있다. 구약이 장차 오실 구속자를 묘사했던 또 하나의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다. 구속자 대망사상은 인자란 용어를 통해 다니엘 7:13~14에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의 종말론적 개관을 표현해 주는 또 다른 계시적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약의 종말론적 성향을 “새 언약” 개념도 강조한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유대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범죄들을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 예레미야의 외침과 예언은 주로 저주와 심판의 선언이었으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을 것임을 잊지 않았다.
구약에 암시되고 있는 많은 종말론적 개념들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암울한 예언들 속에서도 구원에 관한 예언들도 속속히 선포되었다. 선지자들은 회복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회복이란 정결케 되고 의롭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아마 선지자들이 가졌던 윤리적 관심의 가장 중요한 결과란 종말론적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믿고 정결케 된 남은 자라는 선지자들의 확신이었다.
요엘의 구절들을 보면 “주의 날”이란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다. 주의 날이란 개념이 종종 암울한 어두움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만들곤 하지만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좀더 밝은 면을 보여주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저자들이 예언했던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였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구약의 예언자 들이 말했던 많은 예언들이 아직도 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Ifin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yet completed)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출생사건은 이사야 선지서에 나타난 한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신약성경을 살펴볼 때 우리는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이미 역사 속에 성취되었던 승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대한 교회 의 경험 위에 근거를 둔 소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G. Ladd)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 왜냐하면 승리를 결정지워 주는 전쟁이 이미 일어났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O. Cullmann)
그러하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종말론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 관찰 결과를 종합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구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 둘째, 구약의 저자들이 한 개의 운동으로 묘사했던 바가 이제는 두 개의 국면으로 보여진다(현세대와 미래의 세대). 셋째, 이 두 개의 종말론적 국면간의 관계성은, 현세대의 축복들은 장차 올 더 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점으로 설명되어진다.
제3장 역사의 의미
헨드리쿠스 벌코프는 “우리의 세대는 전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 인류 장래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뜻과 희망대로 되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에 거스려 나가는 우리의 행로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존재의 의미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에 관한 환한 빛을 찾으려는 울부짖음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의미에 관한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한 울부짖음이다”라고 했다.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중요한 특성들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역사는 하나님의 여러 목적들을 이루는 작업이다.
진리는 종종 곤경에 처할 때도 있으며 반면에 악이 융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역사적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아낸다는 것 은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종종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고 있다고 주장되어야 한다.
② 하나님은 역사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신다. 이것은 그가 인간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이 항상 유지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들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인간들의 악한 일들까지도 조정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에 대한 좋은 한 예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이다. 신약에 나타난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최상의 예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므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일도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핵심이 되었으며 인류에 대한 축복의 최상의 원천이 되었다.
③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쿨만은 역사에 대한 구약의 이해와 신약의 이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역사의 중심점이 미래로부터 과거로 옮겨졌다는 것이라고 한다. 신약 시대의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 중심점이며 그러므로 신자는 역사의 중심점과 역사의 최정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점이라는 사실은 이 중심적 사건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의 모든 것 위에 그것의 특징적인 도장을 찍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이기셨으며 다시 한 번 세상을 그와 화목케 하셨다(고후 5:19).
④ 새로운 세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 세대는 정말로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새 세대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새 세대의 존재를 파기할 수는 없다.
히틀러가 노르웨이를 점령했었다. 1945년에 노르웨이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만일 나찌 정권하에 억눌려 있는 몇몇 작은 마을들이 너무도 북쪽 산중에 처해 있어서 몇 주 동안 해방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동안의 그 마을 사람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마을의 거주민들은 노르웨이의 자유로운 새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아직도 나찌 점령 하의 옛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그 일에 무지해서 악의 세력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된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나 정확히 말하자면 해방과 구원의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못한 지역에 살던 노르웨이의 몇몇 마을의 주민들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AD 속에 살면서도 BC 속에 사는 것처럼 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⑤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 가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역사가 마지막 결정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역사의 이러한 정점에는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아는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심판의 날,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사건들이 포함되고 있다.
현세대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로이 시작하셨다면, 그가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한 선교 지상명령을 주셨다면(마 28:19-20), 교회가 해야 할 위대한 사역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신약의 신자들은 마지막 날들 속에서 살고 있으나 마지막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다가올 세대의 능력들”을 향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죄와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자유스럽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성령의 첫 열매를 갖고 있지만 그는 그의 최종적 구속을 기다리면서 내면적으로는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두 줄기의 발전이 있다. 방금 기술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래로 세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과 나란히 병행하여 악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을 우리가 동시에 볼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예수님께서 사단의 자식을 상징하는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계속 알곡과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에 마침내 가라지가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 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사단의 왕국이 최후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라 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 두 줄기의 발전, 즉 하나님의 왕국의 줄기와 사단의 왕국의 줄기를 늘 인식해야 할 것이지만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왕국이 사단의 왕국을 지배하며 압제하고 마침내 정복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적 판단들은 모두 잠정적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그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모든 역사적 판단들은 상대적이며 시험적이고 잠정적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또한-그 사건이 선과 악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면-악이 지배적이다, 선이 지배적이다라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물의 끝이 오기 전까지는 어떠한 역사의 현상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흑백논리로 설명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여러 층의 회색들로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p. 60)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셨다고 믿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물의 궁극적 결과는 악이 아니라 선이며,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은 결과적으로 실현될 것이며 “비록 악이 종종 강해 보이나 하나님이 이미 지배자”이시라는 것이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뿐만 아니라 연속 상태도 존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뿐 아니라 연속 상태가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연속과 연속이 있다면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좀더 완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노력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그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학과 문화의 열매들이 새 땅에서도 역시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죄에 대한 우리의 싸움들, 우리의 선교사역, 그리스도인 문화를 세우려는 우리의 시도 등은 이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도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제4장 하나님의 왕국
우리가 부록에 나타난 역사적인 개관 속에서 보게 되겠지만 최초에 하나님의 왕국은 종말론적 논쟁 가운데서 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리출(Ritschl), 하르낙(Harnack), 그리고 도드(C. H. Dodd)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봐이스(Weiss), 슈바이처 (Schweitzer) 그리고 몰트만(Mo1tmann)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다른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적으로, 또 다른 의미에서는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왕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관되어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들과 비유들과 가르치심과 전파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왕국의 중심적 의미를 찾는 데 있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왕국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realm)이나 영토(territory)를 상정하는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통치(reign)나 지배(rule)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가장 널리 수납되고 있는 의견은 왕국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영토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배냐 통치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역사 속에서 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왕국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요,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심을 통하여, 특히 비유를 통하여 이 반석 위에 지은 자와 같고 반면에 그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의 집 을 모래 위에 지은 자와 같아서 그것의 무너짐이 심하게 된다(마 7:24-27). 혼인잔치의 초대를 받아들인 자들은 즐기며 행복하게 되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죽음을 당하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져진다(마 22:3-14).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이 대부분 왕국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로부터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 21:43). 하나님의 왕국의 근본적 목적은 그 단어 자체의 충만한 의미로 볼 때,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의 구원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징조들인가? 이런 징조들 중 하나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심이다. 사단의 떨어짐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기적들의 일어남이다. 천국 임재의 또 다른 표정은 복음의 전파이다. 죄사함의 부여이다. 구약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사함은 다가올 메시야 시대의 축복들 중의 하나였다(참조. 사 33:24; 렘 3l:34; 미 7:38-20; 슥 13:1).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이라고 나타난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라고 가르쳤다(고전 4:19-20; 롬 14:3). 그러나 왕국의 미래적 측면을 말하고 있는 바울의 구절들이 있다(딤후 4:18; 엡 5:5; 15:50).
헤르만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예수님은 구약예언의 성취로서의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사실에 많은 강조를 하고 있으나 그의 사역 말기에 예수님은 왕국의 미래적 도래에 관해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리덜보스는 왕국의 미래적 면과 현재적 면들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어떤 의미를 가져 다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 구속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단지 어떤 개인의 구원만을 의미하거나 심지어 어떤 선택된 무리들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절정을 이루게 될 전우주의 완전한 갱신이다.
제5장 성령과 종말론
구약은 말하기를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7-36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 부여한 중요성은 성령 강림 사건이 말세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위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주실 분으로 구약은 말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 모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게르할더스 보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은 그가 성령의 사역의 우주적 보편성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모든 각 개인 안에 지금 거주하고 있고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윤리적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과 신자들의 양자됨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로마서 8:3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거하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다.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는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알려 주신다.
신약 시대에 목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가축에 인을 찍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구별을 지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상은 동시에 종말론적인 암시들을 던져주고 있다. 성령을 인으로서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 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들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사람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격들인 사람들의 친교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복음전파도 교육도 목회적 돌봄도 모든 훈련도 항상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긴장은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계속되는 긴장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투쟁은 현재의 생활 전영역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자화상(self-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소유했으며 동시에 아직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완성되지 못한 새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비록 긴장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성장으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은 새로운 자아는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어가고 있는 자아이다.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 긴장과 관련되어 있다.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는 완전히 불연속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생각해 왔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평가하는 것이 못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구속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가 만드신 것들을 파괴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로부터 깨끗게 하사 완전케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땅이 영광스럽게 새로워진 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상급과 기쁨의 언어로 신약이 묘사하고 있는 연속성이 있다(참조. 고전 3:34; 마 25:21,23).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중생치 못한 자들이 만든 산물들을 경시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완전한 기독교 문화가 달성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단지 완성에 가까이 가려 하는 추구의 땀일 뿐이다.
다가올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지만 다가올 세계의 영광이 현 세계의 영광보다 훨씬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 승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간절한 소망 중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런 왕국으로 들어가시며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하셨던 선한 일들을 완성하시게 될 시기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제2부 미래 종말론
미래 종말론은 미래에 있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다룬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단, 죄, 죽음에 대하여 과거에 이미 결정적 승리를 얻으셨기 때문에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시작된 구속적 과정의 완성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될 것은 이 마지막 날들에 발생하고 있는 것의 완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111)
제7장 육체의 죽음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 보자.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는가?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몇몇 기독교의 스승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인 수도승인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지도자가 된 펠라기우스의 제자 젤레스티우스(Celes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 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 시대의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은 셀레스티우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 칼 바르트도 사람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죽음의 심판이란 측면과 자연적 죽음의 측면을 구별하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본다.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왜 성경은 철저하게 죄와 죽음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가? 만일 죽음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요 죽음이 자연적 귀결이라면 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더욱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 했던 바와 같이 죽음이 인간의 종국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까? 그리고 성경은 왜 신자와 불신자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다. 창세기 2:36~17을 보면,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 데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서로 별도의 분리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듯이 보인다.”고 했다.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즉시 죽었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의 죽음이 이제 피 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죄와 죽음과의 필연적 관계성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쳐 지고 있다. 로마서 5:12에서는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로부터도 구해내셨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 신자는 아직도 죽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스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최후의 적”(고전 15:36)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제8장 영혼 불멸론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말해 왔다.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와 그에 대한 종교적 상대역인 유신론의 시대였던 18세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영혼불멸 개념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때까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심지어 칸트도 실천이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의 선결조건으로서의 영혼불멸 개념을 계속 지지하였던 것이다.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여러 형태로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희랍 등의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다. 플라톤(P1ato, BC 427-347)의 저서들을 통해 철학적 옷을 입었다.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은 두 개의 구별되는 특징적인 본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견해에 있어서 영혼불멸 사상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불멸한 본체로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athanasia와 aphtharsia가 일반적으로 immortality(영혼불멸)로 번역되고 있는데, 신약은 athanasia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에서는 “오직 죽지 아니함을 갖고 있으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ahtanasia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재림 시 일어날 것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위에 인용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다가 변화될 사람이나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에게나 모두 적용되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은 신자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불신자들에 관해서 일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이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신자들이 갖고 있는 소유물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어지게 될 수여물이다. 불멸은 단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 아니라 전인으로서 인간이 갖는 특성이다. 영혼의 불멸을 나타내는 어떠한 시사도 없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다. 몇몇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영혼불멸”이란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하면서 변호해 왔다.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불멸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 벌코프는 “영혼불멸의 사상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상당히 신중하다. 그는 “성경은 많은 말로 영혼불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성경은 이 개념을 신의 계시로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교리를 세워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서로 상반된 견해들이 제시되야 하는가?
1)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은 “영혼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 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해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적용된 일이 없다.
2)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 때문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영혼은 육체보다 더 높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갖고 있고 파괴될 수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신성한 본체라고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 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다. 인간속에는 피조되지 않은 영혼이란 없다.
3)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애매케 하는 혹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하는 식의 “영혼불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며 경고하고 있다.
4) 인간의 미래에 관해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이란 영혼이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성경은 육체도 영혼만큼 실질적이다. 육체가 영혼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대해서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육체를 떠나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신자들의 미래적 축복은 그들의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 아니라 최상의 풍요한 상태로서의 육체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불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영혼이 불멸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은 성경의 강조점을 올바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강조점에 반대적 사상을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제9장 중간상태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시대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죽음과 부활사이의 기간 동안에 인간의 영혼들은 구원의 완성이나 파멸의 절정을 기다리면서 안식을 취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견해가 계속 가르쳐져 왔으며 특히 연옥에 관한 교리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칼빈은 루터보다 이 중간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반대하면서도 중간상태의 교리는 계속 지지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교인들(Anabaptists)은, 영혼들은 단순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칼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간상태란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 축복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대 이후로 중간상태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져 왔으며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 반영되고 있다.
구약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올”이라고 불리우는 죽음의 영역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 래드는 “스올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 방법이다”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올은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하는데 상징적으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스올은 때때로 무덤이라고 번역되어진다. 루이스 벌코프는 스올이 종종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서 형벌의 장소 혹은 지옥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런 해석을 뒷 받침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는 구절들은 별로 설득력이 있는 구절들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약의 가르침을 보완하고 확장하고 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은 인간은 사망시에 멸절되지 않고 음부(하데스)나 락원 또는 아브라함의 가슴이라고 불리는 축복의 장소 중 어느 한 곳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데스는 스올의 70인경의 번역이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음부(하데스)의 의미는 구약에서 의 음부(스올)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 스올의 개념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다. 중간기 동안의 랍비 문헌들이나 몇몇 묵시문학적 작품들에는 지하세계에서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사이에는 공간적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몇 신구약 중간 시대의 작품들 속에는 하데스(음부)란 단어는 지하세계에서 불경건한 영혼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데스”란 단어의 신약성경의 사용은 어느 정도 이런 개념의 발전의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을 지칭하고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인 사도행전 2:27,31에서 이 의미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하데스)에 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그가(그리스도) 음부(하데스)에 버림되지 않았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였다.” 이 구절에서 하데스(음부)는 시편 16:30에 나타난 스올에 해당하는 헬라어다. 단지 죽은자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즉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영역에 버림받지 않았으며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았다. 하데스란 단어가 단지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중간상태 속에서의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로서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1) 인간은 사후에 완전히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간다. 2) “죽은 자들의 영역” 속에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사망이 목자가 될 것이며, 사망의 돌봄 아래 그들은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신약은 불경건한 자들이 죽은 후와 부활 전 사망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영역에 내버림을 당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자신들이 스올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경건한 자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불경건한 자들의 상황이 어떠할 것인가에 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2:9은 중간상태 기간 동안에 불경건한 자들이 어떤 상태 제 놓여 있게 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불의한 자를 계속되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NIV).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 동안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1) 우편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낙원이란 단어(고후 12:4; 계 2:7)를 보자. 고린도후서 12:4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환상 중에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낙원은 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7에서는 하나님의 낙원 속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여기서도 낙원은 중간상태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종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그가 바로 그날 하늘의 무한한 축복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그의 왕국에 들어가게 될 때인 그의 재림 시에 그가 강도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히려 그날, 즉 그가 죽는 날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게 되는가에 관하여 간단하나마 설명해 주고 있다. 영혼이 잠잔다는 사상은 여기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중간상태에 관한 두번째 중요한 구절은 빌립보서 1:21-23이다. 사후에서는 영혼이 수면을 취하거나 혼이 전혀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간상태에 관한 세번째 중요한 구절은 고후 5:6-8이다. “중간상태”와 “부활육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모두”의 관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비록 부활이란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두 개의 국면으로 나눠지지만 신자의 미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러한 양쪽의 국면들은 모두 하늘의 영광이라는 경험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상태의 교리는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벌카우워가 지적하듯이 신자는 미래에 관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그러므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준다. 고린도후서 5:6-8이 보여주는 표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재의 삶은 실제로는 남과는 떨어져 있는 일종의 순례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다.
제10장 재림의 기대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며, 이러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도시 전체를 두루 다니며 복음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복음전도 여행이 끝마치기 전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며 종말론적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자들이 전도사역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것이 첫번째 “재림의 지연”이며, 예수께서는 그가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예수님은 이 경우에 마저도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착각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덜 진보적인 최근의 어떤 신학자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조속한 재림을 예언함에 있어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오스카 쿨만이 이 그룹에 속한다. 그는 재림이 가까왔다는 초대교회의 기대는 “그 전망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결정적인 전쟁이 이미 발발했다는 확신이 일단 있게 되면 그 전쟁은 그 전쟁의 종식 날짜를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과 같은 비유로 설명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자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일은,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될 제자들의 미래적 활동들에 관계된 교훈들과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 역사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된 일이 있는 예언적 원근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으로 이 구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과 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논의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구절들”은 주님 당시의 사람들의 생애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재림은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에 일어 날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경성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그의 재림의 징조들을 제시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재림을 위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또한 이런 징조들에 대해서도 정신차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깨어 경성한다는 것은 준비함을 의미한다. 즉 항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 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래드는 ‘주의하라’(watch)는 단어는 ‘...을 찾는다, 기다린다’ 는 뜻이 아니라 깨어 있다’ 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의 불확실성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사상에는 어떠한 변천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는 그는 곧 다가올, 지연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즉 너무나도 빨리 올 재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것이다. 후기 서신들에서는 그가 이러한 기대를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그 재림을 대비한 철저한 준비의 중요성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기를 희망했다고 말하는 것과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의 죽음 이전에 일어나리라고 가르쳤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추정하려는 어떠한 흔적이 전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명심해야 한다.”(리덜보스)
바울도 비록 재림의 때는 불확실하지만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늦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약 구절이 하나 있는데 베드로후서 3:3-4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본문은 재림의 지연에 관해 말하는 자들이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드로의 답변이 전하고자 하는 중심사상은 하나님은 마치 그가 그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늦추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매우 사려깊게 죄인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좀더 잘 나타내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재림을 늦춤으로써 회개와 개종의 여지를 남겨두셨고 이는 어떠한 자라도 멸망케 되기를 그가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재림에 대한 우리의 대망은 여러 변에서 우리의 삶의 질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우리 주님이 미래에 나타나신다는 사실은 디모데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만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에 대해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다(눅 12:41-48).
마태복음 25:3l-46에 묘사된 최후심판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재림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계속적인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엣 것들을 추구 하는 최선의 길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위한 일에 분주해야 하는 것이다.
제11장 시대의 징조들
말세에 일어날 징조들의 적절한 기능은 무엇인가?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의 중심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이 통치하시며 그의 목적들을 이루고 계신다. 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질책하셨다. 이런 징조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을 것을 권고하신다. 시대의 징조들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의 본질은 경성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그리고 우리는 재림이 시간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하지 말고 상황적으로 임박해 있다고 해야 한다. 재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끊임없는 기대와 준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제12장 특별한 징조들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모든 나라에 복음이 선포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환난 배도 적그리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우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시대의 징조 중의 첫번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일이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며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백성들에게 언약으로서 주실 뿐만 아니라 열방(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삼으신다고 하였고(42:6)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40:5).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이 징조가 완전히 성취될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시다고 우리는 먼저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두번째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시대의 징조로는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을 계속적으로 전파하는 일은 위에서 다루었던 시대의 징조의 한 단면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도 분명히 모든 민족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5-26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의 의미에 관해 성경성경학 자들 간에는 의견이 너무도 분분하다. 크게 세 종류의 해석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그 충분한 수가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 국가가 전체 단위로서 (그렇다고 반드시 이스라엘 국민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②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 모든 선택받은 자들 속에는 전인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의 선택자들을 포함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뜻은 단지 육체적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선택받은 무리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시기 역시 역사의 종말이나 예수님의 재림 바로 직전에만 일어나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③ 유대인들 중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견해와 일치하고 있는 점은 “온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이 역사적으로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역사가 흐르는 전 (全) 기간 동안 구원받게 될 선택자의 충만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점이다.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후크마는 세번째 견해를 택한다.
바울이 이방인의 충만 혹은 “충만한 숫자”라고 말한 참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이방인들의 전체적 숫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보여지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끝 무렵 어느 기간 동안 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계속되는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할 것인가? 칼빈은 이 문구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들의 선택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열한 번 나타나는데 11:36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열 번의 경우에,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이방인과 구별되는 유대인만을 가리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모여진 후에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대규모적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있을 것으로 로마서 11:26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단지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세 대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1) 이 마지막 이스라엘 민족의 세대들은 지구상에 살아왔던 유대인 전체 숫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 그 일부분의 이스라엘을 “온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2) 본문은 “그때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이상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때에라는 의미를 가 진 헬라어 tote나 epeita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후토스”(houto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시간적 연속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방법이나 양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 의미는 “그리하여”(so)다. “이런 방식으로”(in this way)이다.
환언 하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에(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인가? 이미 11장의 초반부에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째로, 많은 이스라엘인들의 불신앙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에 들어오게 되고 둘째로, 이방인들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계속될 것이다. 로마서 11:26의 온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 중 선택받은 무리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전적으로 역사의 끝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에 발생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좀더 역사를 소급해서 올라가자면 아브라함의 부르심 사건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족속 중 선택받은 전체 수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은 11:5에서 말하고 있는 선택받은 남은 자와는 다르며 역사의 전체 흐름 동안에 있게 될 모든 남은 자들의 총합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우선적으로 논하고 있는 중심 사상은,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계셨지만 이제 와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다루고 계시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법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방인의 충만 혹은 충만한 숫자가 모여지는 일은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 역사의 끝날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반항하는 시대의 또 다른 정조는 “배도”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0-1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면 종말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울의 “불법의 사람”과 요한의 “적그리스도”는 동일시할 수 있다. 불법의 사람은 큰 반역 혹은 큰 배도사건 후에 나타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일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어느 것도 대적할 것이며 경배받는 그 무엇도 반대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자기의 대의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그를 막는 것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제일 안전할 것이 다. 그러나 바울이 막는 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 묘사되고 있는 사람이 충만히 나타낸 바 되어야만 비로소 이 막는 자(것)가 제거될 것이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완전히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다
제13장 재림의 본질
재림이 하나인 단일 한 사건인가 아니면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가? 전(前)환난기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을 말하는데, 이 두 단계 사이에는 칠 년이라는 첫 단계가 있어 이를 휴거 혹은 전환난기 휴거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두번째 단계는 그의 돌아오심이라 불리운다.
후크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나타내기 위해 신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로부터 두 단계 재림이론을 세울 수는 없다. epiphaneia란 단어는 딤전 6:14에서 전환난기론자들이 말하는 소위 휴거사건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apiphaneia)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 불법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강림하게 나타나심으로(epiphaneia) 폐하시리라”(ASV). 그러므로 이상의 세 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전환난기론자들의 이러한 구별에 어떠한 근거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대환난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은 교회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땅에서부터 들림을 받을 것이라고 가리키지 않는다.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약 구절마저도 전환난기 휴거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구절이 분명하게 전하여 주고 있는 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그때에 살아 있던 모든 신자들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참조. 고전 15:5I-52). 그때에 이 두 그룹의 무리들은 연합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은 공중에서의 이러한 만남 후에 주님께서는 그의 방향을 바꾸사 그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자들과 변화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런 말을 결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과 함께 오심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오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전환난기론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단계를 “그의 성도들을 위한 오심”(휴거)과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심”(귀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두 단계 재림설을 주장한 어떠한 학설도 대환난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쏟아짐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인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실 때 영광 중에 그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골 3:4). 영광스런 정복자, 만유의 심판자, 온 창조 세계의 구속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리스도는 다시 올 것이다(계 19:36).
제14장 천년기에 관한 주요한 견해들
무천년기설(amillennialism)
무천년론(무천년기설)이란 용어 자체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무천년기설이라고 하면 마치 무천년론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천년기도 믿지 않거나 또는 천년기적 통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3-6을 무시하거나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가지 모두 올바른 정의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문자적으로 일천 년 동안 지상 통치기간이 있을 것을 무천년론자들이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무천년론이란 용어는 무천년론자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용어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이 아담스(Jay E. Adams)는 무천년주의라는 용어는 “실현된 천년기론”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천년주의자들”(amillennialists)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가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실현과정 중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천년론자들은 요한계시록 20:4-6에 언급된 천년기를 이미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첫 세 절 속에 언급 되어 있는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끝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천상적 천년기 통치 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무천년론자들은 미래의 영화롭고 완전한 왕국이 장차 올 새 삶의 새 땅 위에 건설될 것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은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심으로써 지금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이미 쟁취하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악의 왕국은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현세대에서 많은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시작된 종말론) 또한 최종적 상태 시에 시작될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결정적 미래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도 바라보고 있다(미래적 종말론).
그러므로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복음이 모든 나라들에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완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들은 재림 전에 한 명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이 극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한 한 사건이지 결코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부활사건 후에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신자들은 변화받은 몸이 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때에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은 구름 속에 이끌리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이 모든 신자들의 “휴거”(들림)가 있은 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마치고 최후의 심판을 시작하시게 된 다. 이 심판 후에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고 신자들은 새 하늘 과 새 땅의 축복들을 영원히 즐기게 될 것이다.
후천년기설(postmillenniaIism)
후천년론자들이 무천년론자들과 세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1) 후천년론자들은 천년기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적 왕위를 가지고 가현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2) 그들은 천년기가 전적으로 천 년 동안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3) 그들은 천년기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생각한다.
후천년기설에 의하면 지구상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으로써 현세대는 점차적으로 천년기 세대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후천년론자들은 로마서 11 :25~26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이 유대인의 정치적 왕국이 회복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유대인 민족이 대규모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후천년기에서 반대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관한 일반적 후천년론적 해석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 강화문은 예루살렘 멸망과 이 세상 끝날에 일어날 사건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강화문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 그의 백성들이 받게 될 환난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동시에, 이 세상 시작부터 전무후무했던 대환난이 있을 것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관한 한 바울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배도(반역)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결코 그날(주의 날 혹은 재림)이 이르지 아니하리라”(3절).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건들, 즉 데살로니가후서에 기록된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을 과거의 일들로만 처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치 못하다.
2) 요한계시록 20:1-6은 후천년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20:1-6은 현재의 세대 동안에 신자들의 영흔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지 결코 미래의 황금시대를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미래적 황금 시대가 있다는 후천년론자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간에 있는, 이 세상 역사 속의 계속적인 긴장 상태를 올바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역사적 전천년기설(historic premillenmalmm)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이 전천년적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후에 최종의 상태가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전천년기설에 의하면 몇 가지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발생해야만 한다: 온 민족들의 복음화, 대환난, 대반역과 배도하는 일의 발생, 한 개인적 적그리스도의 출현 등이다. 교회는 이 최후의 환난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이에 죽은 신자들은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변화받아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 두 그룹의 신자들은 하늘에 들어 올려 주님을 공중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중에서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땅으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에, 적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강포한 통치가 끝장날 것이다. 바로 이 시기나 이 시기 직전에 살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믿게 되며 또한 구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개종은 이 세상을 위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기에 대한 반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요한계시록 20장은 그리스도 재림 후에 지상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을 결정적으로 증거하지 못한다. 요한계시록 20:3-6이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무천년론적 입장은 어거스틴(Augustine) 이후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관한 무천년론적 해석을 좀더 발전시켜 변호하고 있는 장이 제16장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4는 그러한 지상적 천년기 통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증거자료도 주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들 중 어느 곳에서도, 최종상태 전에 천년기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3)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아직 죄와 사망이 존재하는 땅으로 온다는 것은 그들의 영화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하게 된다. 중간기 상태 동안 하늘의 영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신자들이 죄와 사망 이 아직도 왕노릇하고 있는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4)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상적 천년기 통치는 신약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사이에 제3의 세대가 있을 것이라고 어느 복음서도 사도행전에서도 서신들도 말하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학설이다. 비록 전천년기설 자체는 2세기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오긴 했지만 교회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두 개의 별도의 백성들로 엄격하게 구별하는 교리를 지닌 세대주의라고 불리는 이 신학적 체계는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i, I800~1882)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
세대주의적 사고를 결정짓는 두 개의 기본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근본적이고 계속적인 구별이다.
2) 세대주의자들은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 개의 특별한 “시대”들로 나누어 취급한다. 구약성경은 미래의 어느 시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고대로부터의 언약 백성들이 주체가 될 지상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 속들을 담고 있다. 비록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에 관한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언약의 핵심적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물로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언약에서도 약속이 주어졌는데 곧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다윗의 보좌 위에 영원히 앉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린다는 약속이다.
3)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첫 단계는 소위 휴거(들림)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발생하게 된다. 바로 휴거에 있어서 전(前)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과 역사적 전천년기론과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즉 역사적 전천년기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시대의 징조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반면에, 전자인 전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자들은 이 시대의 징조들이 그리스도 재림의 첫 단계가 발생한 후에 성취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환난기 세대주의자들은 소위 임박한(imminent) 혹은 항시 올지도 모르는(any-moment)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휴거 때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이 땅에까지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만 오신다고 본다. 그때 구약성도들을 제외한 모든 참 신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영화롭게 된 다음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휴거된다. 즉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교회라고 불리는 이 신자들의 무리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칠 년 동안 어린양의 혼인 잔치 예식을 축하하게 된다.
제15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비판
1) 세대주의는 성경 계시의 근본적 통일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 세대주의 체계가 노출하고 있는 최대의 난점은 구속역사의 다양한 기간들 간의 차이점들이 그 역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제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만일 누구라도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통일성을 공평하게 취급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시기(세대)들 사이의 심한 차이와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종합적, 영원적 구속사역의 진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적대감 내지는 분리의 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제거되었다(엡 2:14~15)는 사실을 신약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아직까지도 천년왕국 시기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까? 왜 그때에 (천년왕국 시) 유대 인들이 더 호의적인 지위를 얻고 이방인들보다도 더 높아지게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들의 답변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세대주의적 틀의 요청 때문에 신약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제거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바로 신약성경 가르침 그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점이다.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 사이의 비연속성의 원리가 점진적 계시의 원칙을 묵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원리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항상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경우 그것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구약의 약속들이 있기 때문에, 이 약속들은 아직도 미래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온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서 있는 언덕들 중의 하나를 구약에서는 종종 의미하고 있다. 신약은 이 용어들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여기서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용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일군의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요한 사도가 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은” “새 예루살렘”은 유대인 신자만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도 큰 포괄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 교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없단 말인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미래가 이방인 신자들의 미래와 분리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미래는 동시에 이방인들이 소망하는 미래이기도하다. 즉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궁극적 영화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일천 년 동안 계속되어질 팔레스틴 지방에서의 정치적 왕국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영화롭게 새로워진 땅에서 함께 공유하고 나누게 될 영원한 축복 상태라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구약은 장차 미래의 지상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위대한 구절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미래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곤 한다. 사실상 구약은 이러한 천년통치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천년기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종종 해석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결정체인 새 땅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 성경은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여러 구약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이스라엘의 본토 회복에 관한 구약 예언들이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로운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대주의자들과 서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영화로운 미래의 세계가 단지 천년기 에만 국한되는 것으로서는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한 상태로 계속된다고 주장한. 이 영화로운 미래는 이스라엘인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받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언들을 일천 년 동안 팔레스틴 지방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주의적 민족주의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5)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뒷받침을 결여하고 있다.
6) 교회는 괄호에 해당하는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첫째로,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구약은 결코 교회를 예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7) 그리스도가 다신 오신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에도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세대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휴거가 그리스도 재림의 최종적 단계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십사만 사천 명)와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칠년 환난기 동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오직 중생한 사람들만이 천년기가 시작 되는 때에 이 땅에서 살고 있을 것이지만, 이런 사람들의 수많은 후손들이 천년기 동안에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교회(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가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또한 구원 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8)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천년기는 요한계시록 20:4-6에서 묘사하는 천년기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신자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는다. 라이리는 이스라엘의 지상적 목적은 천년기 동안에 유대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인데 그때 그들은 부활되지 않은 육체들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년기 동안에 부활한 성도들이 하는 역할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천년기 동안 공중 위에 떠 있게 될 새로운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천년기 시대는 부활하지 못한 사람들, 즉 그때까지 자연 육체들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관계하고 있다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4절)은 이런 사람들에 관해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생긴다. 세대주의자들의 천년기에 대한 이해는, 가장 중요한 이 구절(계 20:4~6)에 대한 그들이 주장하는 문자적 해석에 마저도 기반을 두고 있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년기의 목적은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지상적 왕국을 세우는 일이며 이 왕국에서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적 왕위에 앉아 개종한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천년기의 목적이라면, 요한계시록 20:4-6이 유대인에 대해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팔레스틴 땅에 관해서 예루살렘에 관해서 등등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이상하다.
제16장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
후크마는 본 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묘사된 천년기에 관한 “무천년론적 견해”를 상세히 전개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후크마는 윌리암 핸드릭슨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란 방법을 따른다.
l) 이 해석 방법에 따르면 계시록은 일곱 단원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각 단원들은 서로 평행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시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하여 진술한다. 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천년 통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주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요한계시록 20~22장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단원들 중 마지막 단원에 속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재림 후에 되어질 것에 관해 서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20:3은 다시 한 번 신약 시대의 시작기로 돌아가게 한다. 옥에서 다시 놓임을 받아 나라들을 속여 모이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러 모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결박 되어 있을 동안에는 가능치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세대 기간 중에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뜻은, 첫째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는 것이고, 둘째는 그는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모두 함께 모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 시대에 교회는 심하게 핍박받았다는 사실은 이 환상이 가져다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우리는 깊이 간직하게 될 것이다.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동료 신자들 중 많은 숫자가 죽음을 맛보았고 그중 어떤 이들은 잔인하게 처형되어 순교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죽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영흔들이 살아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는 것은 무한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요한이 지금 지상적 천년기 왕국을 묘사하고 있다는 흔적을 이 구절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6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이 축복받은 상태에 대한 이유가 본 구절에 제시되어 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만일 여기서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면, 그들은 “다시 사망이 없는” 장차 올 세상의 완전하고 충만한 희락을 이미 향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 사망이 그들을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하더라고 말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천 년 전기간 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이며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것이다. 비록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될 기간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육체의 부활이 있은 후에 이러한 죽은 신자들은 그들이 지금하고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며 그리스도와 왕노릇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에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육체를 입고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속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론적 해석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국을 지상적으로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의 사이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며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단이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 없도록 이 현세대 기간 중에 결박되어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17장 육체의 부활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인의 인간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헬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약하고 방해물이다. 죽음 시에 육체는 소멸하게 되나 영혼은 계속 살아 남게 되며 육체 부활이란 꿈도 못꾸는 일이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육체없이 완전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육체가 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 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독특한 기독교 교리인 것이다.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약간의 힌트는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미래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정법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부패가 없음, 약함이 없음, 불명예스러움이 없음, 죽음과 눈물과 곡함과 울음과 교통이 없다(고전 15:42-43; 계 21:4).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바울이 어디선가 한 말이 여기에 잘 적용될 것 같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제18장 최후심판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미 현세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3:18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또한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도 말하고 있다. 이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심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심판의 뚜렷한 중요 목적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 최후심판 때까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은 감추어진 바 되었으나 이제 그 운명이 나타난 바 되었다. 신앙을 가졌었는지 그렇지 못했었는지, 어떤 행위를 했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행위들이 펼쳐질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통해 자기의 은혜를, 자기 원수들을 정죄하는 일을 통해서는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핵심이 되는 것은 개인의 운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 두 번째 목적은 각 사람이 받게 될 보상과 형벌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도의 다소는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최후의 심판 때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3) 세 번째 목적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제 각 사람에게 그들이 영원토록 지내야 할 장소를 정해주신다. 새 땅이든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든 말이다.
최후심판은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인가? “심판날”(마 11:22), “그 날”(마 7:22; 살후 1:10; 딤후 1:12), “진노의 날”(롬 2:5)에서 “날”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종종 긴 시간을 의미하곤 한다. 그러나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듯, 심판의 날이 새 세계의 첫 천 년 동안 지속된 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나타났다면 모든 신자들도 이 속에 포함되었음에 틀림없다. 신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후서 5:10에서도 “우리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무엇이 심판될 것인가? 이 현재의 삶 동안에 이루어졌던 모든 일이다. 심판의 날은 우리가 내뱉었던 말들도 다 심판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계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의해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만을 갖고 있었던 자들은 그들이 구약성경에 반응한 정도에 따라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도록 경고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인 평강, 행복, 구원을 추구하도록 권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난 계시들을 전혀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빛 아래서 판단받게 될 것이다.
로마서 2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풍성한 계시를 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마음속에 쓰여진 율법의 사역”에 대해 그들이 취한 반응에 근거하여 판단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그들이 받지 못한 계시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었던 빛에 근거해서 판단받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많은 책임들을 갖게 될 것이요 적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적은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이 당하게 될 고통에도 “등급”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2:47-48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 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풍성한 빛을 받은 자들에게 관해서, 즉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으로 옷입었느냐이다. 사람의 영원한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왜 성경은 그렇게도 끊임없이 최후심판은 행위들에 따라 판단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지 결단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최후의 심판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집행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신앙과 행위간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신앙은 행위들 속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야 하며 행위들은 참 신앙의 증거들이다. 요한 칼빈이 잘 요약했듯이, “의롭다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믿음은 혼자서가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실질적으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증거로 나타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만일 믿음이 참이라면 그곳에는 행위가 있을 것이며,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참이 아닌 것이다.
상급(rewards)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상급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급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터 위에 사람이 어떤 재료들로 집을 지어 나가느냐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장차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상급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예수님도 종종 상급들에 관해 말씀하신 일이 있다(마 5:11~12; 6:19~21; 녹 6:35; 막 9:41; 마 25:33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못박아 말씀 하시기를, 그러한 상급들은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미래의 상급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여 어떤 음악기구를 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자. 그렇다면 그의 음악을 즐기는 능력 역시 크게 증가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커질수록 지금과 미래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축복들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용량 역시 커질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마음의 모두를 바치는 사람을 절반 정도의 마음만을 바치는 사람보다 더 큰 주님의 기쁨 알게 된다. 하늘에서만 그런 기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보장해 주고 있지 않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심판의 날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1) 세상의 역사는 무의미한 원형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운동이다.
2) 구원과 영원한 축복 상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각 개인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최후심판의 날은 최종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3)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 모든 각 개인들이 도덕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4)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와 역사 속의 그의 구속사역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한다. 즉, 그날은 모든 악에 대한 최종의 결정적 정복의 날이며 죽임을 당 하신 어린양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날이다. 심판의 날은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서 세상 끝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드러낼 것이다.
제19장 영원한 형벌
오늘날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를 부정하는 두 가지 형태의 주장들이 있는데, 하나는 보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전멸주의이다. 보편주의자들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전멸주의의 교리는 인간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은 불멸성을 탈취당하게 되고 완전히 전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건적 불멸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사람은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신자들은 은혜의 선물로서 불멸성을 받게 되고 사후에 축복상태 속에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형태의 완전 소멸론은 모두 악한 자의 소멸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영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16세기 중엽 의 소시니안파(the Socinians)들도 불신자들은 결국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제칠일 안식교와 여호와 증인들은 소멸이란 악한 자, 사단, 귀신들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다. 지옥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다양한 표상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취한다면, 이러한 표상들은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지옥이 동시에 암흑도 되고 불도 될 수 있단 말인가? 표상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상징들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자 모두가 유다가 당한 고통들을 겪어야만 하지는 않는다. 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들이 받아야 할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끝으로 지옥의 장소성에 관해 말해 본다면, 중세기에는 일반적으료 생각하기를 하늘은 지구 위의 저 공중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며 지옥은 그 아래 어느 곳, 아마도 지구의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 천문학을 알고 있는 20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재 우주체계에는 위도 아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만일 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제20장 새로운 땅
새 땅이란 현재의 땅과는 전혀 다른 땅인가 아니면 현재의 땅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3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전우주를 지칭하는 성경적 표현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우주는 완전히 소멸되고 현재의 우주와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우주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되 오직 새롭게 되고 정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루터교 신학자들은 전자를 택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마태복음 24:29, 베드로후서 3:32에 호소하고 있다. 분명히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들이 현재의 땅이 파괴될 때 발생할 것인데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은 죄와 불완전으로 오염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음에 열거할 4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보다 우주가 새롭게 된다는 의견을 받아 들인다. 첫째, 베드로후서 3:33과 요한계시록 21:1을 살펴볼 때, 새 우주의 참신 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neos가 아니라 kainos임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neos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 것이라는 뜻인데 반해 kainos의 뜻은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uranon kainon kai gan kainan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이란 의미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 소멸이론보다도 갱신이론을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는 로마서 8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에 근거를 둔다. 창조의 세계가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20-21절). 바울의 요점은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세번째 이유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양자간에는 엄연히 연속성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러한 유추적 방법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놀랍게도 새롭게 변한 현재의 땅이다.
갱신이론을 받아들이는 네번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키셔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히 소멸하시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단은 이러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단의 결정적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 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때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들어갈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세상이다. 구속의 장면이 펼쳐질 장소는 바로 이 삼림들, 이 들판들, 이 도시들, 저 거리들, 이 사람들 속에서이다. 비록 현재는 전쟁터와 같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의 때를 향해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나 그때에는 이상의 모든 장소와 배경들은 승리의 들판이요 추수의 밭들이며 그 밭들에 눈물로 뿌려졌던 씨앗들이 영원한 곡식단들이 되어 창고에 들여질 것이다.”(에드워드 투르네이)
새 땅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65:37-25와 66:22-23, 베드로후서 3:33; 요한계시록 21:3-4 등이다. 베드로의 관점을 보면, 비록 현재의 땅이 다 “타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새 하늘을 창조하실 터이니 우리는 이를 소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 하늘은 악과 불의는 모두 제거되고 의로움만이 존재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 중에서 새 땅에 관해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21:1-4일 것이다. kainos(새로운)라는 단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상에서 요한이 본 세계는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절에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땅 위에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곳이 바로 하늘이기에, 장차 올 영원한 삶의 영역에는 현재처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며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마치 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새 하늘에서도 계속해서 살 것이니 새 땅은 새 하늘에 대한 포괄적 대명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은 은혜 언약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 약속이라 할 수 있다(참조. 창 17:7; 출 19:5-6; 렘 31:33; 겔 34:30; 고후 6:16; 히 8:30; 벧전 2:9-10).
그러므로 새 땅에 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를,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이 세상 속에서 낙관적으로 살게끔 한다. 비록 악이 이 세상에 횡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한한 안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충만하게 노출시키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노력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현재의 봉사를 통해서 새 땅의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이미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들이 번역되기도 하며 많은 종족과 나라들이 복음화되기도 하며 신자들이 새롭게 되고 문화가 변혁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위해 현재 이곳에서 행해진 일들이 장차 영원세계에서 그 충만한 진가의 빛을 발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역사가 끝날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다.
부록: 종말론에 관한 최근의 경향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 속에서 발견되는 강조점들이 눈에 띄게 변천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하나였던 알브레흐트 리츨은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이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리츨적 이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우리는 아돌프 본 하르낙을 들 수 있다. 하르낙은 예수님은 종교와 도덕을 아주 훌륭히 결합시켰으므로 종교는 도덕의 영혼으로, 도덕은 종교의 육체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성 등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그는 단정한다.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예수님의 상과 하나님의 왕국의 이해에 대항하여 지난 19세기 말엽에 강렬한 반항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리츨의 사위인 요하네스 봐이스는 하나님의 왕국에 리츨의 학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진화론적이고 비종말론적 사고경향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비난했다. 봐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왕국에 대한 봐이스의 견해는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 동의되고 확대되었다. 봐이스와 함께 슈바이처가 행한 위대한 신학적 봉사란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모범자나 윤리의 선생으로 그리려 했던 구식의 예수님 상을 철저하게 깨뜨렸다는데 있다. 슈바이처는 그의 초기 저서에서 개진되었던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를 계속해서 견지하면서도 바울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종말의 현재 속으로의 돌입을 인정하는 견해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봐이스와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 아니라 미래적이었지만(임박한 미래) 도드에게 있어서는 이 왕국은 이미 도래했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미래 종말론의 대부분은 유대 묵시문학의 잔영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허구적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도드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진정한 공정을 기했다고 할 수 없다.
종말론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신학자 게르할더스 보스는 1893년부터 1932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보스에 따르면, 신약의 신자들은 이 세대(세상)와 장차 올 세대(세상) 속에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올 세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의미에서 보스는 도드와 입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이라는 장에서 보스는 주장하기를, 신약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론을 형성시킨 것이 종말론이었지 결코 종말론을 형성시킨 것이 구원론이 아니었다고 한다.
종말론에 관한 “구원사” 학파의 대표적 학자 중의 하나인 스위스의 현대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접근방법을 묘사하는 용어로 구원사란 단어를 선호한다. “구원사”란 뜻은 하나님께서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며 이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의 중심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부활이 놓여 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견해이다. 쿨만에게 있어서 성경의 종말론이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 요소와 아울러 이미 성취된 현재적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성경의 종말론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종말론은 교의학에 붙어 있는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체 메시지를 열어젖힐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한 몰트만의 공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가진 견해의 문제점 첫째는, 하나님의 왕국을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만 보는 그의 일방적 강조점에 있다. 몰트만에 대한 두 번째 반대 이유는 그가 계시를 전적으로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있는데 있다. 몰트만에 대한 세 번째 어려움은 그가 미래를 모호하고 단순히 형식적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데 있다.
역사의 최종적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도 미래 속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개혁주의 종말론]을 읽고 나서
안토니 후크마는 “시작된 종말론”(제1부)과 “미래 종말론”(제2부)이라는 큰 맥락에서 개혁주의 종말론을 전개하고, 부록으로 최근 종말론의 흐름을 싣고 있다. 후크마의 책은 “성경주해”에 기초하여 논증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를 믿고 이 성경에 의지하여 신학하는 개혁파 신학도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배우는 시각으로 책의 주제를 몇 개 선정하여 생각한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종말론은 철저히 “성경”에 기초해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겸손하게 순종해야”
후크마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만 종말론 사상을 전개한다. 성경의 계시 아래서만 종말 신앙을 갖도록 강조하면서 성경의 계시 앞에 겸손하게 개인과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논할 것을 권면한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 종말론 신학의 기초로 본다. 그는 제3장, “역사의 의미”에서도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고 한 견해를 인용하며(p. 60) 역사적 사건을 판단할 때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7장, “육체의 죽음”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이나 칼 바르트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 부분에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크마는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성경이 죄와 죽음을 철저하게 연결시키는 부분을 부정하게 된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 나아가 부활신앙을 부정하게 되기에 후크마는 바르트의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성경에서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한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 대해서도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라면서 영혼불멸사상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반대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라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후크마는 “중간상태”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라면서 이는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7장, “육체의 부활”에서도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면서 성경은 다만 약간의 힌트는 주지만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이 부분에 침묵한다고 내세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는가? 아니다. 후크마는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라면서 주님이 이루실 세계에 대해서 오히려 산소망, 건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후크마는 제19장, “영원한 형벌”에서도 지옥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있다고 믿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면서 지옥이 있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처럼 순수한 재림신앙을 방해하는 첫째 세력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후크마는 이들의 견해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종말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사고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사는 존재요 우리 자신의 종말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하고 희망찬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만 계시하셨다. 후크마는 고전 2:9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지만, 놀라운 세계를 상상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다른 교리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종말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건전한 쪽으로 빠져들어간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알려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겸손한 자세를 상실하는 자세다. 이런 면에서, 후크마는 철저한 성경 주해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계시를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 갈수록 혼탁해지는 종말의 세상에서, 역사 앞에 겸손하고 미래의 일에 대해 겸허하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실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이 오늘을 사는 신자의 성경적인 내세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천년기론에서 재림신앙을 강조: “성경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 배격”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천년기론을 네 가지 입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무천년의 입장”에서 전개한다고 밝힌다. 본 책에서 후크마가 무천년기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재림의 기대”와 “현재의 삶”이다. 그는 제10장, “재림의 기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립에 대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했다고 강조한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후크마는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pp. 14-15.)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에게 재림신앙이 없다면, 긴장감도 없어지고 산소망도 없어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되므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후크마는 “재림 신앙”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재림을 믿지 않는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실수를 하여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에게는 원래 종말신앙이 없었는데,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재림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분명히 깨어 경성할 것을 강조하는데, 재림 신앙이 없어지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식어질 뿐만 아니라 긴장감이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면서 이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며 연약한 인간들에게 산소망을 심어준다고 강조한다. 제20장,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라면서 내세에 대한 산소망을 강조한다.
3. “이미”와 “아직”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
후크마는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에서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한다. 그는 제4장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건전한 종말론을 가진 신자는 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후크마는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시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을 거듭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서도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면서 현재에 대한 강조는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의 관계를 “연속성”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한다. 균형잡힌 종말론은 결국 오늘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으로 “일반은총”을 존중하며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오늘과 내일을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은 영원한 왕궁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데 아주 유익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후크마는 이런 긴장 속에서도 기독교인은 “승리”를 확신하는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는 쿨만의 말처럼 재림신앙이 있어야만 승리의 날을 향해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후크마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은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오늘 주어진 삶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4. 전인적인 관점을 강조한 종말론
후크마는 성경은 전인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헬라철학처럼 이원론적인 사고는 결코 성경적인 종말론에 맞지 않다고 본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서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는 부활한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간상태의 교리에서도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되며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라면서 우주의 종말도 “갱신”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한다. 이러한 전인적인 생각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갱신, 문화 창달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책임성을 일으킬 수 있다.
5.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강조
후크마는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한다.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역사의 종말이 임한다. 그는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면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었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후크마가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본 예는 제12장 “특별한 징조들”에서도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지는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 입장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논리를 전개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본토”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는 이스라엘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면서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라고 희망한다.
특히 재림의 때를 알려주는 징조 중에서 “배도”를 강조한다. 후크마는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면서 배도를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을 심각한 배도로 본다.
오늘의 세상과 기독교 현실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너무나 멀리 간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기 보다 돈과 명예와 정욕을 예배 대상으로 삼는다. 예배당에서 예배하지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종말이 없을 것처럼,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들이 늘어간다.
가장 큰 배도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을 윤리 선생 정도로 인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들은, 브라운 교수가 [이단과 정통]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론을 부정하는 이단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다른 견해를 첨가하거나, 예수님 자체를 왜곡하는 일이 늘어가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상황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출처: 비공개까페
물과피와성령
'종말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WCC가 '반이스라엘'의 선봉에 나섰다 (1) | 2016.09.26 |
---|---|
7년 대롼난과 여러 징조들 1.-양항복 목사 (0) | 2016.04.09 |
그리스도의 재림-박일민 교수 (4) | 2015.07.27 |
환난 전 휴거- Perry Stone (2) | 2015.07.09 |
휴거 (6) | 2015.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