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종말론
종말론 2015. 1. 18. 03:38건전한 종말론1
마지막 때에 대한 교리는 성경 속을 흐르는 진리의 큰 물줄기 가운데 하나를 이룰 정도로 중요하다.
특히 신약 성경에는 '마지막 때'에 대한 언급이 300회 이상 나오는데, 이것은 25절 마다 한 번의 빈도로 기록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신약에서 세상 종말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곳은 하나도 없다.
"믿음이나 예수의 보혈, 심지어 사랑에 관한 말씀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교리이다"라는 성경학자 케논 호이트의 말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면 냉소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독교가 이천년 동안이나 말세를 강조해 왔지만, 아직도 지구는 건재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세상 종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광신자로 몰아 붙이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 이천 년 역사를 돌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믿음이 무시되었던 시대치고 교회가 쇠퇴하거나 부패하지 않는 때는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재림과 종말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생명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리스천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이다.
종말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치고 정신 차려서 신앙 생활 잘해 보려고 하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종말에 대해서 절대 회의적이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옥 한 흠 목사 -
건전한 종말론2
일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크리스천의 태도는 세부류라고 봅니다.
⓵ '무관심파' 입니다. 종말이 '너무 난해하다'고 생각하여 신학자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로삼아 종말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⓶ '경원파' 입니다. 이들은 종말론이 '너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을 떠올리며 잘못될까봐 가능한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읍니다.
⓷ '초관심파' 입니다. 이들은 곧 종말이 임할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 한채 다급하게 종말만 준비하거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시한부 종말론이 되는 것입니다.
(1) 건전한 종말론에 대한 실제적 지침
그러므로 이 시대야 말로 종말론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종말론을 위한 네가지 지침을 제시하고져 합니다.
❶.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성경말씀에 의존 하여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에 개인의 경험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신비한 체험을
결코 신앙이나 교리의 근거로 삼을수 없읍니다.
하지만 종말의 특정 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 근거를 경건한 사람들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에
두고 있읍니다. 이는 명백히 말씀드려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체험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찌라도 주관적 이기에 언제든지 잘못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전한 종말론은 언제든 성경을 유일의 계시로 인정하며 그 어떤 체험보다 성경을
더 강조했읍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주장하면 그것은 단적으로
잘못된것 입니다. (갈1:7~8)
❷. 미래의 예언보다는 신앙 원리를 강조합니다.
성경의 상징적 내용들을 어떤 특정 사건, 또는 인물에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는 건전치
못한 접근 방법입니다.
예를들면 열뿔을 공산주의나 E.C.공동체로 '666'을 히틀러나 키신저 또는 컴퓨터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에는 탁월한 영석(靈釋 = 영적인 해석) 으로 감탄을 자아 냈지만
시대가 지난 오늘날 그것은 잘못된 해석임이 드러났읍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은 자극적인 사건 중심의 예언보다는 언제든 신앙원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❸. 특별한 종말 준비보다는 성실한 삶을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에 관한 메세지가 나올때 마다 강조되는 것은 특정장소로 서의 모임,
일상생활의 포기, 신비한 체험등이 아니라 성실한 삶입니다.
(고전15:51, 살후3:11-12, 딛2:13-14, 벧전4:7-11)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은 협박성의 휴거나 재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철학자인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말중에 유명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찌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노라'
오늘을 성실하게 사는것이 최상의 종말준비인 것입니다.
❹, 재림의 시기 보다는 재림의 준비를 강조합니다.
성경에서는 재림의 징조에 관해서는 알수 있으나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알수도 없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24:36)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행1:7)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살전5:1)
그래서 성경은 종말의 긴박한 의외성 때문에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마25:10) 처럼
또는 해산할 여인(살전5:3) 처럼 평상시에 성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은 재림의 시기보다는 재림의 준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재림의 시기를 특정이로 계시한다는 단체나 개인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단인 것입니다.
(2)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이제 우리는 종말론에 대해서 공연한 오해나 두려움을 떨쳐버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 원리를 근거하여 요한계시록을 읽고 그날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경험보다 성경을, 예언보다는 신앙의 원리를, 특별한 종말 준비보다는 성실한 삶을
그리고 재림의 시기보다는 재림의 준비를 중요시 하면서 종말론을 배워 나간다며는
여러분들은 바로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고생이 되면서도 행복하고 어려우면서도
보람된 하루하루가 될것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런 말을 했읍니다.
'잘 보낸 하루가 평안한 잠을 가져다 주고, 잘보낸 일생이 평안한 죽음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준비된 자세로 주의 재림을 몹시도 기다리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지구 종말론에 대한 자세
지구 종말론이 다분히 서양적,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마야에 끼워 맞추는 일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고유 토속 신앙에서 싹튼 종교에서도 천지 계벽론을 오래전부터
주장 하고 있으며. 기독교에서 분파한 모 종교에서도 말세에 대한 준비하여 구원 권에
임하여야한다는 설교 원문이 무수히 발행된바 있다.
어원의 발생을 두고 볼 때 가설과 진실은 인간이 경험을 하였든지 경험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될 때 말이 성립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이었지만 왜 사람들이 2012년
종말론에 회의적이기 보다 긍정적이었던가.
우리 주위를 살펴 볼 우주 천체 과학적인 측면을 떠나 종교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노아홍수 사건처럼 비가 나리는 사태가 오래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계속해서
말세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인간의 기본도덕 개념이 흐려지어 살인과
성 폭력 행위는 동물보다 잔혹한 짖을 쉼없이 세계곳곳에서 자행되어지고 이제는 무감각
하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한 놈이 범한 그 죄는
온 인류가 범죄 해 나가도록 세포 분열하듯이 타고 번져나가게 되어 있으며 이를 몸으로 인간은
받아드려지게 의식구조가 창조되어 있고 또 자신은 그것보다 더함 짓을 만들어 낸다는것이다.
오늘날 곰곰히 되삭여보면 날마다 죄악의 골은 점점더 깊어져 가고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이 더 살아갈 수 있도록 용서받지 못하며, 이로 인해 종말로 몰아가고 있으며
인간들 자신의 입으로 만들어 내 뱉는 종말론이다. 그리고 그 날과 그 시간은 인간자신들의
스스로 느껴지도록 창조주가 창조하여 둔 것이 아닐까싶다. 세상에 미물인 들쥐도 홍수가
나는 시간을 미리알고 대피한다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종말을 모를 리 없지 않을까?.
종말이 오고 아니 오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종말에 대비한 선한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가 될 때 그 종말은 새로운 질서의 삶을 열어주는 길이 될것이다. 종말이 다가온다면
이는 창조주의 소관이다. 인간이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종말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종말을
대비 한 삶의 자세가 되어 오늘을 잘 못살아가는 자신들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살아가는 자세가
종말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
출처: 개혁주의 마을/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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