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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사 성어는 그 때 당시 중국 전역에 퍼졌고,
마침내는 실크 로드를 타고 서역으로까지 전해졌으며
오늘날에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시벌로마 (施罰勞馬)
고대 중국의 당나라 때 일이다.
한 나그네가 어느 더운 여름 날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 농부가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자꾸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하는 광경을 본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나그네는 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농부에게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왜 자꾸만 채찍질을 가하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자고로 말이란 가혹하게 부려야 다른 생각을 먹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남의 말을 놓고 가타부타 언급할 수가 없어 이내 자리를 뜬 나그네는
열심히 일하는 말이 불쌍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긴 탄식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다.
“시벌로마 (施罰勞馬)”
훗날 이 말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어져 주마가편 (走馬加鞭)과
어감은 약간 다르지만 상당히 유사한 의미로 쓰였다 한다.
시벌로마 (施罰勞馬): 열심히 일하는 부하 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 상사에게 흔히 하는 말.
용법: 아랫사람이 노는 꼴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일부 몰상식한
상사의 뒤에 서서 들릴락 말락 하게 읊어 주면 효과적일 것이다.
조온마난색기 (趙溫馬亂色期)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씨에게는 만삭인 부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부인이 말하길
“여보! 어제 밤 꿈에 말한 마리가 온천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는 꿈을 꾸지 않았겠어요.
아마도 우리가 말처럼 활달하고
기운 센 아들을 얻게 될 태몽인 것 같아요.”라고 하였다.
조씨는 심히 기뻐하여 “그것 참 좋은 태몽이구려.
어서 빨리 우리 아들을 보았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사흘 뒤 조씨 부인은 매우 건강한 사내아이를 순산하였고,
조씨는 태몽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온마 (溫馬)’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조온마가 스무 살이 되었다.
조온마는 조씨 부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마을의 처녀란 처녀는 죄다 욕보이는 난봉꾼이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결국 조온마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조온마는 판관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판관이 말했다.
"조온마난색기 (趙溫馬亂色期)"
“조온마는 색기로 인하여 마을을 어지럽혔다.
따라서 거세를 당함이 마땅하다.”
결국 조온마는 거세를 당하였고,
후일 사람들은 경거망동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조온마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조온마난색기’라고 충고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온마난색기 (趙溫馬亂色期)
경거망동한 사람에게 충고할 때 쓰는 말.
이 고사 성어는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경계하라’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다.
족가지마 (足家之馬)
아주 먼 옛날 중국 진나라 시대에,
어느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신체의 일부를 따르는 전통이 있었다.
대대로 귀가 큰 집안은 이 (耳)씨,
화술에 능통한 사람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구 (口)씨 하는 식이었다.
그곳에 수 (手)씨 집안이 있었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손재주가 뛰어난 집안이었다.
이 수씨 집안에는 매우 뛰어난 말 한 필이 있었는데,
이 역시 수씨 집안의 손재주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었다.
어느 날 도적들과의 전쟁에 수씨 집안의 큰아들이
이 말을 타고 나가 큰 공을 세워 진시황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것을 본 앞집의 족(足)씨 집안에서는
“손재주나 우리 집안의 달리기를 잘하는 발 재주나 비슷하니
우리도 말을 한 필 길러 봄이 어떨까.......”하여
말한 필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도적들이 보복을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이를 본 족씨는 아들에게 “어서 빨리 수씨 집안보다 먼저
우리말을 타고 나가거라.”라고 일렀고,
족씨 집안의 장자는 말을 타고 나가다
대문의 위 부분에 머리를 부딪혀 어이없게도 죽고 말았다.
이를 본 족씨는 통곡하며
“내가 진작 분수에 맞는 행동을 했더라면
오늘 의 이 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을.......”하며
큰 아들의 주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
이때부터 세인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족가지마 (足家之馬)"
자기의 주제도 모르고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
족가고인내 (足家苦人內):
옛날 족씨 가문의 큰아들이 집안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비롯된 말.
어주구리(漁走九里)
옛날 한나라 때의 일이다.
어느 연못에 예쁜 잉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서 들어 왔는지 그 연못에 큰 메기 한 마리가 침입하였고
그 메기는 잉어를 보자마자 잡아먹으려고 했다.
잉어는 연못의 이곳 저곳으로 메기를 피해 헤엄을 쳤으나
역부족이었고 도망갈 곳이 없어진 잉어는
초어(漁)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잉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뭍에 오르게 되고,
지느러미를 다리 삼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메기가 못 쫓아오는걸 알게 될 때까지 잉어가 뛰어간 거리는
약 구리 정도이었을까,
아무튼 십리가 좀 안 되는 거리였다.
그때 잉어가 뛰는 걸 보기 시작한 한 농부가
잉어의 뒤를 따랐고 잉어가 멈추었을 때,
그 농부는 이렇게 외쳤다.
“어주구리 (漁走九里)!”
그리고는 힘들어 지친 그 잉어를 잡아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이다.
어주구리 (漁走九里)
능력도 안 되는 이가 센 척하거나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주위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이 고사 성어는 말 할 때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로
약간 톤을 높여 말하면 아주 효과적이다.
선어부비취 (善漁夫非取)
중국 원나라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그는 너무나도 착하고 어질어서
정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항상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 새로운 원님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아주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원님은 부임한 뒤 그 마을에 한 착한 어부가
덕망이 높고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저 어부를 제거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원님은 묘안을 하나 짜내게 되었다.
그 어부의 집합에 몰래 귀한 물건을 가져다 놓고
그 어부가 그 물건을 가져가면 누명을 씌워
그 어부를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그 어부의 집 앞에
쌀 한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그 어부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쌀 가마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님은 두 번째로
최고급 비단을 어부의 집합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원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커다란 금송아지 한 마리를 집합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어부에게는 금송아지 마저 소용이 없었다.
어부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어부의 행동에 화가 난 원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을 했다.
“선어부비취 (善漁夫非取)!”
“착한 어부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구나!”
그 뒤로 어부에게 감명 받은 원님은
그 어부를 자신의 옆에 등용해 덕으로 써
마을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선어부비취 (善漁夫非取)
자신이 뜻한 대로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화가 난 어조로 강하게 발음한다.
이 고사 성어는 그 때 당시 중국 전역에 퍼졌고,
마침내는 실크 로드를 타고 서역으로까지 전해졌으며
오늘날에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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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면 달라붙고 배가 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모여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공통된 마음의 병이다」 이른바 전국 시대라 하여 수십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던 중국 천하가 마침내 일곱 나라로 합쳐지고 있던 때의 일이다, 주(周)나라에 소진(蘇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진은 장의(張儀)와 더불어 귀곡 선생 밑에서 각국의 제후들을 상대로 하는 변설을 공부하고 삼 년 동안 유랑 생활을 했다, 일곱 나라의 왕들을 찾아 다니며 변설을 하고, 자신들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삼 년 동안이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소진의 인물됨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있다면 조(趙)나라 봉양군 조성(趙成)과 같이 그의 인물됨을 시기하여 오히려 해치려고 하는 인물이 있었을 정도였다, 마침내 소진은 가지고 갔던 노자를 다 써버리고 빈 털터리 거지꼴이 되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베틀 위에서 베를 짜고 있던 그의 형수가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 「 흥, 꼴좋으시구려, 삼년 전에는 뭐라도 곧 될 것처럼 집안 살림살이들을 죄다 팔아 떠나시더니, 그래, 뜻은 좀 이루셨소? 」 「 형수님, 제가 지금 몹시 시장하니 우선 밥이나 한 그릇 주시지요」 며칠 동안을 굶었던 소진이 밥 한 그릇을 청하자 형수는 독을 뿜은 목소리로 말했다, 「 흥, 배고픈 줄은 용케도 잘 아시는구려, 우리도 그대가 가산과 집을 다 팔아갔을 때 배가 안 고팠던 줄 알아요? 형수는 끝내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소진은 그 후 일 년 가까이 형수의 눈칫밥을 먹으며 귀곡선생에게서 받은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밤에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자신의 변설에 자신이 서자 소진은 다시 길을 떠났다, 먼저 당시 세력이 제일 강했던 진(秦)나라로 가서 혜문왕을 만나 열심히 유세하기 시작했다, 진나라가 6개국을 병합할 수 있는 비책을 말했지만 원래 타국의 유세객을 좋아하지 않던 진나라 왕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소진은 다시 이번에는 제일 세력이 약한 북쪽의 연(燕)나라로 가서 왕을 만났다, 소진은 진나라를 도와 천하통일을 못할 바에야 6개국을 연합시켜 진나라에 대항하게 하기 위하여 합종책(合從策)을 시도하라고 권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난 연나라 왕은 크게 기뻐하여 소진에게 집과 황금을 하사하고, 그에게 6개국을 연합해 달라는 전권을 위임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소진의 합종책이다, 소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어 6개국이 동맹을 맺게 되었다, 6개국의 왕들은 제각기 소진의 공로를 치하하여 자기 나라의 정승자리와 많은 황금을 주었다, 소진이 연나라로 가기 위해 주나라의 고향집 앞길을 지날 때 그의 화려한 행차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소진이 자기 집 앞에서 행차를 멈추었을 때 형수와 동생들이 나와서 무릎을 꿇고 영접했다, 「소진이 그의 형수에게 말했다 옛날에 형수님은 베틀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더니 오늘은 웬일이시오? 」 그러자 형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대답했다. 「 그때는 그대가 거지였고 지금은 높은 지위와 많은 황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소진은 새삼스레 세상 인심을 탄식했다, 「 같은 인간인데도 부귀하면 친척도 어려워하고 빈천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 「 하물며 남이야 어떠할까, 내가 애당초 논밭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6개국의 정승이 어찌 될 수 있었으리」 소진은 그의 형수와 동생들에게 많은 황금을 나누어 주었다, 이래서 감탄고토( 甘呑苦吐)라 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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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억 달라 상당의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워렌 버펫은 세계 제1의 부자로 꼽히고 있다. 1962년 처음으로 주식당 7.50 달러에 벌크샤이어 하다웨이(Berkshire Hathaway)의 주식을 사기 시작한 그는 현재 그 회사의 회장과 최고 경영자로 그 회사의 A급 주식 한 주의 가치가 11만 9천 달라라고 한다. 성공의 비결을 최근 알리스 슈레더(Alice Schroeder)가 집필한 그의 전기 <The Snowball>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이달의 특집기사의 하나로 소개한다.
첫째 이익은 재투자하라: 처음 돈을 벌게 되면 쓰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이익을 재 투자하도록 하라. 버펫은 일찌감치 이 원리를 터득하였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같이 핀볼머신을 사서 이발소에 설치하였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재투자하여 동네의 여러 가게에 여덟 대의 머신을 설치할 수 있었다. 친구가 사업을 팔려고 하자 그는 그것을 인수하여 계속하해서 주식도 사고 작은 비즈니스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26살에 이미 17만 4천 달러를 모았는데 요즈음의 화폐가치로는 140만 달러에 달하는 액수이다. 작은 것도 모으면 큰 돈이 될 수 있다.
둘째 다른 방법을 선호하라.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에 맞추어서 결정을 하지 말라. 버펫이 1956년 투자자들로부터 10만 달러를 모아 자금관리를 시작했을 때 그는 괘 짜란 소리를 들었다. 그는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지 않고 오마하에서 일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14년 후 결산할 때 가치가 1억 달라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는 다수가 가는 길을 따르는 대신 낮게 평가된 투자처를 찾아 다녔고 그 결과는 해마다 시장의 평균치를 웃도는 수익을 내었다. 버펫에게 평균치란 누구나 낼 소 있는 수익을 말한다. 평균을 넘기 위해서는 세상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자신만의 계산법이 필요하다.
셋째 손가락을 빨지 말라. 어떤 결정을 할 때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수집하고 친구나 ?친척들에게 알아 보고 시한을 반드시 지켜라.? 버핏은 자신이 빨리 결정 내리고 행동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쓸 대 없이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손가락을 빤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비즈니스나 투자에 관한 제안을 하면 그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고 대응한다. 그리고 그는 즉석에서 대답을 제시한다.
넷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거래내용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하라. 항상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흥정이 최상의 상태의 흥정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네가 줄 수 있을 때이다. 버펫은 어렸을 때 힘든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배웠다. 그의 할아버지 어네스트가 눈보라가 휩쓸고 간 다음날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가족들이 경영하던 식품점 주위의 눈을 치우도록 일을 맡겼다. 둘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5시간을 힘들게 일하여 겨우 눈을 치울 수 있었다. 일이 끝났을 때 할아버지는 90센트를 주면서 나누어 가지라고 하였다. 그는 뼈빠지게 일한 대가가 시간당 10전도 안 된다는데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언제나 미리 ?상대가 친구나 친척이라 할지라도- 거래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였다.
다섯째 사소한 경비라도 조심하라. 버펫은 사소한 경비에도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는 매네저들이 운영하는 비즈니스에 투자한다. 한번은 어떤 회사의 주인이 500개 들이 화장지 통을 과연 그 숫자가 다 들었는지 확인하는 것을 보고 그 회사의 주식을 매입한적도 있다. 그는 또 자기 사무실의 벽을 페인트 하면서 길거리에 면한 부분만 칠한 친구를 존경하기도 하였다. 모든 경비를 잘 감시함으로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다.
여섯째 가급적 빚을 지지 말라. 크레딧 카드나 대출 받아 살면서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버펫은 투자를 하거나 집을 사기 위해서도 돈을 빌린 적이 거의 없다. 그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돈을 빌렸는데 빚에 망했다는 사연들을 賈コ?많이 접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는 그의 권고는 채권자와 협상을 통해 가능한 한도 안에서 갚도록 하고 다 갚았을 때에는 조금이라도 저축을 시작하여 투자하라는 것이다.
일곱째는 꾸준히 하라. 집요함과 독창성으로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다. 버펫은 1983년 Nebraska Furniture Mart를 인수하였는데 그 회사의 창업자인 로즈 브럼킨(Rose Blumkin)의 비지니스 방식을 좋아해서였다. 러시아 계 이민자인 그 녀는 전당포에서 시작해서 북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큰 가구점을 이루었다.? 그녀의 전략은 다른데 보다 아주 싸게 파는 것인데 물건을 살 때에는 아주 지독한 흥정가였다. 버펫에게 로즈는 약자에서 승자로 바꾸는 부단한 용기의 화신이었다.
여덟번째 언제 그만 둘지를 알아야 한다. 버펫은 10대 때 경마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경마에 돈을 걸었으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잃은 것을 따볼까 하여 그는 다음 경기에 다시 돈을 걸었다. 이번에도 지자 그는 거의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 왔다. 그는 거의 한 주간의 수입을 다 잃어버렸으므로 기분이 몹시 상했다. 버펫은 이러한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 돈을 잃을 때는 언제 손을 털고 나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초조함 때문에 다시 한번 더해야지 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아홉째 모험을 잘 평가하라. 1955년에 버핏의 아들 하우이(Howie)의 고용주가 가격담합 혐의로 FBI의 조사를 받았다. 버핏은 하우이에게 그 회사에 그대로 있을려면 최악의 경우와 최선의 경우를 다 같이 상상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그의 아들은 그곳에 그냥 있을 때 모험의 확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날 당장 그만두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심할 때 자신에게 “그러면 무엇을?”하고 묻는다면 가능한 결과들을 모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열번째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를 알라. 그의 막대한 부(富)에도 불구하고 버핏은 성공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2006년 그는 전 재산을 자선사업을 위하여 주로 빌 과 메린다 게이트 자선재단에 희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는 자신을 기리는 재단을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 워렌 버핏 이름이 붙은 건물을 짓는 것도 반대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 중에 그들을 기리는 만찬모임을 주선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딴 병동들을 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다고 세상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 나이가 되면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성공여부가 평가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당신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살았느냐를 보여주는 궁극적인 시금석이다.”고 말한다.
(PARADE 2008년 9월 7일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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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질문 받거나 학창시절 고민해 봤을 법한 내용들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런 질문들엔 근거들이 더해져 더욱 날카롭게 우리를 찌른다.
게다가 현대과학은 발달 속도가 너무 빨라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업적과 최근 몇 년 동안의 업적이 맞먹을 정도다. 이런 과학의 발전과 도전 앞에 기독교는 어떤 응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크리스천이자 과학자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26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하나의교회에서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주제로 겨울방학 신학특강을 진행했다.ⓒ뉴스미션
느헤미야 겨울방학 특강으로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26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하나의교회에서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주제로 겨울방학 신학특강을 진행했다.
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로, 그는 밤까지 이어진 강연에서 빅뱅이론과 은하, 별과 별 사이 거리 등 궁금한 우주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설명해 귀를 쫑긋하게 했다.
우종학 교수는 "우리은하에 2천억 개의 별이 존재하고, 우주에는 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 엄청나게 거대한 우주 공간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시간에 따라 더욱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론이다. 이 이론이 나오기 전에 인류 역사 안에서 우주는 항상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 우주가 동적이고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여겨진 게 불과 지난 20세기 였다. 그리고 이것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이제 없다"며 빅뱅이론을 설명했다.
이어서 “그렇지만 과학은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며 “다만 질서 있게 움직인다는 차원에서 우주보다 더 위대한 분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며 기독교인이자 과학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기독교신앙인들이 과학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과 무신론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다르다"고 전제한 뒤 "어떤 기독교인들은 과학이 성경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과학자들의 설명을 거부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바른 자세가 아니다. 전문가로서의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위의 두 질문처럼, 과학 때문에 힘들어하는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취해야 하는 자세에 대해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중심으로 조언했다.
우 교수는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방식(일반계시)이고, 신학은 성경이라는 책을 읽는 방식(특별계시)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계시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우위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을 통해 과학을 읽어내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했다.
과학은 초월적 신의 존재 증명할 수 없다
그러면서 “초월적 신의 존재에 대해 과학이 사실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과학 자체가 유신론 무신론을 증명해 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와 함께 과학과 가장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성경 창세기에 대해서도 입장을 전했다.
우 교수는 “창조의 순서가 기록된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모순된다. 창조의 순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의 방법에 대한 설명도 없다.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설명일 뿐”이라며 “하나님이 창조를 하실 때 어떤 방법으로 창조 하셨는지 인간 빼고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지금 21세기 과학은 누가 무엇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제일 궁금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역할’과 ‘기능’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보면 기능적 이야기가 쭉 나온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을 과학적 입장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멈춰야 한다.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인간의 모든 언어로 담을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이해할 때도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과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내용들을 기독교 신앙의 틀에서 즉 하나님 창조의 틀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말했다.
한편 느헤미야는 우종학 교수의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은 오늘인 27일까지 강연되며, 내달 2일부터 안용성 교수(서울여대 기독교학과)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로마 제국'이 열린다고 전했다.
한연희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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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렌 키에르케골(Soren Kierkegaard):「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킬케고올처럼 많은 별명을 가진 사람도 없다.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우수의 철학자”, “시인”, “문학자”, “신학자”, “실존주의 철학자”, “심층심리 분석학자”, “반 이성주의자”, “선지자”, “성경주석가”, “우울증환자”, “종교적인 천재”, “냉소주의자” 등 많은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이는 별명이 옳은지는 둘째치고라도 이 여러 가지 별명이 주는 언어의 뉘앙스를 통해서 볼 때 킬케고올은 한 가지 범주에 넣을 수 없는 다양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킬케고올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독교 사상가(religious thinker)라고 했다. Soren Kierkegaard, The Point of View, Trans. Walter Lowri(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5-6. 이 말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본다. 그는 싸구려 지식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교수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옅은 감정을 자극해서 열풍을 일으켰던 부흥목사도 아니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42년의 짧은 생애를 한 가지 사명에 아낌없이 바쳤던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한 한 가지 사명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되는가 하는 것을 문제로 삼았으며 당시에 조직화되고 정치와 야합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세상적인 지식으로 기독교인을 오염시켰던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신자들(Christendom)의 왜곡된 신앙 노선을 각성시키고 교정하여 참 신자가 되도록 돕는 데 그의 목적을 두었다.
킬케고올은 기독교를 신학화하거나 이론화시키지 않고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들(사랑, 죄, 믿음, 하나님, 인간)을 열정을 기초한 실존적인 변증법적(pathetic-dialectically)으로 명료화시켜서 이 개념들이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섞이지 않고 원초적인 형태(primitive form)로 이해되게 하고, 이 개념들이 참 신자가 되어가는 데서 효과적으로 재현되도록 돕는 데 그 생애를 바쳤다. Soren Kirekegaard, Soren Kierkegaard's Journal and Papers Vol. I, Trans. Howard Hong and Endna Hong(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7), No. 306. 여기서 원초적인 형태란 성경을 성경대로 삶 가운데서 재현되어져야 성경 말씀이 자기 것으로 되며 동시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진정한 신자가 되어간다고 킬케고올은 말했다.
킬케고올의 저서(20권의 책과 25권의 저널)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킬케고올의 저널은 킬케고올 자신이 20년에 걸쳐서 쓴 일기 수상, 철학적, 신학적 단장 혹은 에세이로써 킬케고올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하나는 익명으로 된 저서요, 다른 하나는 자기 이름으로 출판된 저서이다. 전자는 그 당시 많은 지식을 쌓음으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테리겐차들을 비판하고 각성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킬케고올은 이들의 생각을 터무니 없는 착각(monsterous illusion)이라고 했다. Soren Kierekegaard, The Point of View, 6. 후자는 교화하는 담론(edifying discourse)으로써 진정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투쟁하는 일반 평신도들에게 신앙을 격려케(building up)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익명으로 출판된 저작은 철학적이요 문학적이요 신학적이지만, 교화하는 담론은 성경을 실존적으로 주석했으며 인간의 잠재능력을 각성시킴으로써 진정한 신자가 되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킬케고올의 저작은 익명으로 출판된 저작과 교화 담론이 동시적으로 번갈아 출판되었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자신이 고백한 대로 기독교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킬케고올은 “기독교가 무엇이냐?”(what is Christianity?)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진정한 신자가 되어 가는가?”(how to become an authentic Christian)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what question”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how question”을 통해서 “what”을 명료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킬케고올이 자기 전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되어가는가(becoming responsible Christian)를 철학적, 신학적, 심리적으로 명료하게 분석한 그의 사상을 모르고서는 현대 사상사를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의 한 예로써 두류대학 토마스 오든(Thomas Oden) 교수는 킬케고올의 심리학을 이해하면 프로이드 심리학은 누워서 떡먹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킬케고올의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는 킬케고올의 저서 중에서 기독교 생활윤리를 가장 잘 분석하고 묘사한 저서 중의 하나다. 「사랑의 역사」는 단순히 기독교 윤리를 이론화시킨 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실존적으로 주석함으로써 인간의 사랑과 참 기독교 사랑이 무엇인가를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분석하여 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독자를 각성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사랑이란 이론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동, 즉 사랑의 역사 혹은 실천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책이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사랑의 역사」를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단독자”(single individual)에게 증정했다. 여기서 단독자란 참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과 갈등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말하며 킬케고올은 그들을 위해서 「사랑의 역사」를 저술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속담처럼 참 사랑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인생을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사랑의 역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학적이고 재미없는 책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참 사랑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참 사랑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에겐 「사랑의 역사」는 꿀송이보다도 더 달콤하고 기독교적인 사랑이 이렇게 부드럽고 준엄한가를 새삼 깨닫고 감격과 환희가 넘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랑의 역사」의 순서를 따라서 킬케고올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을 명료화시키는데 중점을 두며 그의 생애도 간단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I. 킬케고올의 생애
소렌 킬케고올은 1813년 5월 5일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킬케고올의 생애는 아버지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킬케고올의 아버지는 가난에 찌들린 사람으로 유틀란드 반도에서 양치는 소년으로 간신히 끼니를 연명했다. 날씨는 춥고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을 저주할 지경에 이르렀다. 킬케고올은 이렇게 썼다. “어떤 무시무시한 사건, 그는 어린 아이 때에 몹시 괴로움에 시달리고, 굶주리고, 추위에 몸이 마비되어 언덕에 서서 하나님을 저주했다... 이 사내는 여든 두 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이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월터 라우리, 임춘갑 역, 「킬케고올 생애와 사상」(종로서적, 1985), 92. 아버지는 자신 스스로 저주받은 자로서 살아야 하는 운명적인 존재로 여겼지만 그는 12세에 코펜하겐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삼촌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40세에 은퇴를 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남은 사십 평생을 자선을 행하며 회개로 지내게 되었다.
킬케고올의 아버지는 재혼한 사람으로 첫 아내가 죽자 흔치않게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과 재혼해서 자녀들을 낳았는데 이렇게하여 킬케고올은 7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킬케고올의 형제 중의 첫째는 아버지가 재혼한 지 넉 달 만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속도위반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이 나중에 킬케고올의 인생 여정에서 큰 지진으로 기록된다.
킬케고올의 형제 자매들은 34살이 채 되지 못하여 죽었다. 그래서 실제로 자기 형과 자기만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축복하시고 많은 형제 자매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자기 아버지의 속도위반과 유틀란드 반도에서 양치는 시절에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아버지를 경멸하고 용서받지 못할 더럽고 죄많은 자로 여겼으며, 자기 형제 자매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킬케고올은 코펜하겐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아이러니의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레지나 올센이라는 여인에게 반해서 약혼까지 하게 되었으나 곧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 조건과 우울증 때문에 레지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신의 마음속을 도려낼 정도의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다. 생각 끝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레지나와 그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혼을 파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킬케고올의 인생에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지만 결국 결혼 상대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데도 결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로 생각했다. 따라서 킬케고올은 파혼을 선언했다. 처음에 레지나는 죽어 버리겠다고 했지만, 얼마 가지 아니하여 프리쯔 실레겔과 결혼하여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 레지나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킬케고올은 일생 동안 오직 레지나 한 사람만 사랑했으며, 죽기 전 유언에서 자신은 약혼도 결혼으로 생각한다면서 남은 모든 재산을 레지나가 원한다면 그녀에게 줄 것을 부탁했다.
킬케고올은 1835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자기 인생을 쏟아 부을 한 가지를 찾고자 몸부림쳤다. 그는 그것에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기를 희망했다. 그의 긴 일기를 인용한다.
실제적인 상황은 내가 앞선 여러 페이지에서 제시하려고 한 바와 같았다. 그와는 반대로 이제 내가 나 자신의 생애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얻어보려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나는 달리 생각한다……. 나는 당시, 다른 학부에 입학하여, 내 역량을 다른 목표로 지향시킴으로써 상당한 안정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나는 어느 정도 불안을 쫓아버리는데 성공한 듯이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냉수를 마신 후의 열병처럼 되돌아 오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냉수를 마신다는 것은 열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거의 치명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나 자신의 마음속에 뚜렷이 아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인식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인식이 모든 행동보다 앞서야 한다는 사실만은 예외이다. 내가 어떤 사명을 걸머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내게 진리가 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위하여 언제라도 죽고 살 수 있는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비록 내가 철학적인 여러 체계를 다 연구하고,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그것들을 비평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내가 (헤겔처럼) 국가론을 전개할 수가 있고 또 비록 내가 허다한 출처에서 얻은 개개의 누더기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거나,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그 속에서 다시 살 수 없고, 내가 다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움켜쥐고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내가 그리스도의 의의(意義)를 해설할 수 있고, 허다한 낱낱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만일 그것이 나 자신에게만 내 생애에 대하여 참으로 깊은 의의를 가지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리가 싸늘하게 벌거숭이로 내 앞에 서서 그것을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개의치 않고, 믿음직한 헌신보다는 오히려 불안한 전율을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물론 나 자신이 이성의 지상명령을 인식하고, 사람들이 그것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때 그것은 생생하게 내 속에서 체험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이, 마치 아프리카의 사막이 물을 갈망하듯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완전한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 단순한 인격의 생활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인격의 생활을 지닌 채,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도 부르는 그 무엇에나, 또는 일언이폐지하고 내 자신의 것이 아닌 그 무엇에다 내 사상의 발전의 터전을 장만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그것을 통하여 내가 신적인 본질 속에서 자라났고 또 비록 전체 세계가 무너질 망정 내가 고집해 마지않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뿌리와 연결된 그 무엇에다, 나는 내 실존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게 결핍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향하여 나는 노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내적인 행동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면이지 인식된 여러 사실의 덩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된 여러 사실이란 저절로 생기지만 우발적 집합체로서는, 혹은 체계도 없고 또 모든 광선이 한데 모이는 초점도 없는 마구 늘어선 개개의 사물의 줄로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나 역시 그런 초점을 모색하였다. 나는 한없이 깊은 환락의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심연에서도 닻을 내리고 머물 곳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나는 하나의 향락이 다음의 향락과 손을 잡으려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나는 이것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거짓된 열광을 느꼈다. 나는 또 권태를 느꼈고, 이에 따르는 마음의 분열을 느꼈다. 나는 지식의 열매를 맛보았고, 가끔 그 향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 향락은 다만 인식하는 순간 뿐이었고, 내 속에 아무런 깊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혜의 잔에서 마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속에 빠진 듯이 보 였다. 월터 라우리, 「키르케고르 생애와 사상」, 106-8에서 재인용.
긴 인용문에서 킬케고올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이념이 없는 것이었으며 그 이념에 자신의 인생을 걸 수 있기를 원했다. 킬케고올은 기독교에서 자신의 인생의 방향과 사명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에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쳤다.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854년 킬케고올이 생을 마치기 얼마 전에 아버지와 자신이 존경하던 뮌스터 감독이 죽자 마트센이 영결사를 했다. 마트센은 당시 헤겔철학의 대가였으며 코펜하겐 대학의 유명한 조직신학자였다. 그가 영결사에서 고 뮌스터 감독을 칭하여 “‘그 대체할 수 없는’ 감독은 언사와 직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행실과 진리에 있어서도 진정한 증인이고 또 그는 사도 시대로부터 계속되어 온 증인의 ‘거룩한 쇠사슬’”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윗책, 311-12에서 재인용. 킬케고올은 진리의 증인이라는 말에 몹시 배가 아팠다. 왜냐하면 가장 안이하게 국립교회에서 감독으로 산 그 사람을 진리의 증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신약의 핵심을 무시하는 언사라고 했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공격문을 신문에 실었으며 그 파장은 엄청나게 컸다. 당시에 국가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교황을 비판하는 것과 같아서 국가교회 목사들로부터 단호한 비판을 받았다. 그 와중에 킬케고올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결국 죽었다. 복음의 진실을 떠나 국가에서 거저주는 봉급으로 아무런 도전도 없이 무기력하게 윤기오른 국가교회를 비판했기 때문에 죽어서 장례식도 교회에서 치르지 못하고 자기 형 피터 킬케고올이 설교하고 신학생들로 둘러쌓인 조촐한 장례를 치렀다. 결국 킬케고올은 신약성경에 기초한 진리의 증인으로서 인생을 살다가 42세의 짧은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킬케고올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자였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킬케고올은 42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이웃을 진실한 신자로 변모시키는 것에 일생을 바치고 이것을 위해서 자신의 피와 땀과 생명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이든 잠자는 자의 영혼을 일깨워서 참 신자로 살도록 깨우치고 도전한다. 이것이 그의 작품의 유일성이다. 그의 사상은 현대 철학, 신학, 문학,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II.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거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이론화시키는 강론이나 논문이 아닌 기독교 사랑의 역사(works)에 관한 숙고(deliberation)이다. 숙고라는 말은 사랑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랑에 대해서 다 알아버렸다는 교만한 마음으로는 숙고라는 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고라는 언어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몸부림과 깊은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의 역사」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역사에 대한 숙고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한 숙고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고찰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elskon)과 기독교적인 사랑(kjerlighed)을 변증법적으로 분석하고 명료화시킨다. 여기서 변증법이란 사변적인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깨우쳐서 자신 스스로 사랑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설득하여 깨달은 대로 실천하도록 도전한다. 그러므로 킬케고올의 저서를 읽기 위해서는 알고자 하는 관심과 그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역사」는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한 성찰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아는 것처럼 기독교적인 사랑도 그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 열매를 통해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역사」에서 킬케고올은 사랑은 이론이 아니며, 실천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의 역사를 명료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켜 도전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도록 도와서 열매 맺는, 그리고 열매처럼 달고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 데 있다. 이것이 킬케고올 저서의 진수이다.
「사랑의 역사」는 2부로 되어 있다. 제 1부는 마태복음 22: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주석이다. 제 2부는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의 주석이다. 여기서 주석이란 현대 성경신학자들이 하는 그러한 주석(편집사, 양식사, 문학적, 역사적 주석방법)의 방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개념 분석을 통하여 실존적 의미를 숙고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언어의 사용을 살펴봄으로써 사랑의 문법을 제시한 킬케고올은 언어의 분석을 시도한 사상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인용하는 번역판 「사랑의 역사」는 임춘갑 교수가 번역하고 종로서적에서 출판한 상ㆍ·하권을 사용하며 괄호안의 페이지는 이 책의 페이지를 의미한다.
킬케고올은 주께서 말씀하신 첫 계명,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 계명이 둘째 계명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쪽 문을 열지 않고는 다른 쪽 문을 열 수 없는 두 문과 같다고 킬케고올은 비유하였다.Soren Kierekgaard, Works of Love, Howard V. Hong and Edna H. Hong(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487.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만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상이 바로 킬케고올이 둘째 계명만을 주석한 이유이다.
1. 제 1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a) 그대 사랑 “하라”(You shall love)
그대 사랑 “하라”에서 주 엑센트는 하라에 주어져 있다. 영어로 본다면 “You shall love.”에서 shall에 주 엑센트가 주어져 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언어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랑은 의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사랑은 의무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사랑이 의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의례껏 세상적인 관점에선 사랑은 자신에게서 생기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서 지시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계명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말이 의무가 되지 않을 때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을 네 몸처럼 사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킬케고올 자신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그대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이 의무일 때만, 오로지 그 때만이 사랑은 영원히 모든 변화에 대하여 안전하고 사랑은 영원히 축복된 독립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랑은 영원히 행복하게 절망에 대하여 안전하다”(Only when it is a duty to love, only then is love eternally secured against every change, eternally made free in blessed independence, eternally and happily secured against despair., 47). 그렇다. 사랑이 의무일 때만이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이 나약한 인간의 야속성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랑이 의무가 될 때 비로소 소유적이 아니고 상호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서로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사랑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의무일 때만이 네 이웃이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b)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You shall love the Neighbor)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에서 주 엑센트는 “이웃”에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란, 곧 우리의 이웃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더욱 더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이웃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는 그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일이 의무가 아니라면, 그 때는 이웃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만, 오로지 편애의 이기적인 것이 근절되고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It is in fact Christian love that discovers and knows that the neighbor exists and, what is the same thing, that every one is the neighbor. If it were not a duty to love, the concept ‘neighbor’ would not exist either; but only when one loves the neighbor, only then is the selfishness in preferential love rooted out and the equality of the eternal preserved., 73). 그렇다. 이웃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우리의 이웃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다. 종족과 문화의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는 것이다. 발견하고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발견되어지고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의무가 아니라면 이웃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인간은 이기적인가! 언젠가 “밤으로 가는 쇼”에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가 나와서 북한으로부터 탈출기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감동을 받은 것이 있다. 일본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는데 뒤에서 북한의 비밀 경호원이 보고 있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대사관 문을 향하는 마지막 관문에 신상옥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최은희씨를 툭 치고 들어갔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것이 부부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는 언제나 켕긴다고 최은희씨는 말했다. 그렇다. 인간이란 이토록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서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자기 부인은 기독교의 본질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면 우리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 그의 제자가 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편애(preferential love)는 자기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결핍된 무엇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웃으로의 사랑이 아니라 결국 자기에로의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 편애에 찌들린 인생들에게 이웃이 존재케 하고, 그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이 필수적이다(88). 자기 부정을 할 때 이웃이 존재하게 되며 진정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가 된다.
c)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You shall love your neighbor)
여기서 주된 엑센트는 “그대”라는 말에 있다. 사랑이 의무라면 그것을 실행해야 할 사람은 모든 사람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라는 말이 제시하듯 사랑은 공동책임적인 성향을 띤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책임을 수반한다. 책임이 없는 사랑은 불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한다. 우리는 늘상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원하며 기도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변적이거나 지나친 궤변이 아니다. 하나님, 그 분의 촉점으로 보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것이 진정 하나님을 속 깊이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하는 신자의 성숙도는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에서 “그대”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의 말씀으로 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린 아이나 젊은이의 특성은 ‘나는...나는...나는...’이라고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의 표지와 영원한 사람의 헌사는, 이 나가 그대나 당신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의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욕구다. 영원한 분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길 이 그대를 향하여 ‘그대 해야만 한다, 그대 해야만 한다. 그대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젊음은 온 세상에서 유일한 나로 존재하기를 열렬히 원한다. 성숙은 이 그대를 자신에게 하는 말로 이해하려 애쓰는데 있다. 그대 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오오, 나의 독자여, 내가 하는 말은 그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영원한 분은 나를 향해 ‘그대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147-48).
요약하면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양심의 문제가 아닌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생활이다.
d) 사랑은 율법의 완성(Love is the fulfilling of the law. 롬10:13)
사랑은 무엇인가? 율법의 완성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 연약하고 죄악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율법은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셨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입는 삶 속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171).
세상 사람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하나님과 사람(사람-하나님-사람) 사이의 관계이고, 즉 하나님이 중간 규정(中間 規定/middle term)으로 들어 있는 관계라고 가르친다”(175).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서로를 홀리는(속이는) 사랑의 환상에 불과하다(175).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돕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75). 여기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남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참 사랑에는 희생과 아픔이 있는 것이며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e) 사랑은 양심의 문제(love is a matter of conscience./ 딤전1:5)
사랑은 양심의 문제이다. 사랑은 양심의 문제라는 말은 딤전 1:5에서 온 말씀이다. 만일 계명의 목적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양심의 문제라는 말은 사랑은 “충동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또 감정의 문제도 아닐 뿐더러 지적인 타산의 문제도 아니다”라는 말이다(234). 인간의 사랑을 느낌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안다. 느낌이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점이기는 하나 느낌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은 무엇에 끌리는 그러한 것 또한 아니다. 이런 것은 다 상대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계산해서 이익이 있으면 사랑하는 그러한 타산적이거나 실용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특성은 세속적인 사랑에서 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충동(drive)에서 생기는 사랑은 에로스적이며, 성향(inclination)에서 생기는 것은 우정이다(234).
그러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이란 선한 양심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신뢰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뢰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신뢰를 배울 수 있으며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신뢰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신뢰가 없으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며 믿을 수 없다. 때문에 일시적이고 계산적이고 충동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f)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요일4:20)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과중한 요구가 아니라 지금 눈으로 보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이다. 그렇다면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그 대상에서 사랑할 수 있는 점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할 만한 점은 좋은 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말한다. 사랑할 대상의 반응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 변할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아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사랑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사랑의 정수이다. 킬케고올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서 우리가 논급하려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우리들이 특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의무라고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한다면 우리의 과업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졌거나 선택된 대상에서 사랑할 만한 점을 찾고, 비록 상대가 어떻게 변한다해도 그 상대를 계속 사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다(260).
g)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우리의 의무(롬13:8/our duty to remain in love's debt to one another)
사랑이 의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의 빚을 져야 한다.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사랑은 일방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 된다. 그러한 사랑은 얼마 가지 못하여 깨지고 만다.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 빚을 지는 사랑에는 상대를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비교할 때 하나님 앞에서 상호성과 동등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사람은 다음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사랑의 빚을 진 채로 머무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의무일 경우에는 사랑이 결코 자기 자신에 구애되거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비교하거나 자기 자신을 자신이 수행한 행적과 비교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자나 깨나 영원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291).
서로 빚을 지는 사랑은 공상이 아니라 우리가 헤쳐가야 할 현실이며 삶이다. “서로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의무일 진데 빚을 진다는 것은, 어떤 공상적인 표현이나 어떤 사랑의 망상이 아니라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의무의 울타리 안에 있는 행위 속에서 행위의 운동으로 나타나고, 또 그럼으로 해서 무한한 빚 속에서 계속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으로 머문다”(305).
이 세상에서 빚을 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괴로운 부담감에 마음에 초조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생을 즐겁게 하고 감동을 주는 빚이 있다. 그것은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이다. 이 삶 속에서 우리는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며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2. 제 2 부: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의 주석
a)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덕을 세운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a metaphorical expression!)이다. “세운다”는 말은 어떤 것을 터전에서부터 위로 올려서 구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6).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바로 이 전제에 의거하여 상대방에 깃들고 있는 사랑을 터전으로부터 쌓아 올려서 세우는 것이다(단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안에서 사랑이 터전으로써 현존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한에 있어서 이다)”(16). 따라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찾아서 그것을 격려하여 인생을 세우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이다.
b)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 그러면서도 결코 속지 않는다(고전13:7)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신앙의 힘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을 믿을 수 있으랴!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한 가지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무한한 개념에 의하면, 속인다는 것은 단적으로 사랑을 잘라 버리는 것, 사랑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경지에까지 몰고가는 것, 사랑 그 자체에 깃들인 축복까지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7). 사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지만 결코 속지 않는 것이다.
c)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결코 창피당하지 않는다(고전13:7)
희망이란 미래의 가능성과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항상 희망한다는 것과 같다(65). 사랑은 영원하다. 영원성이 시간 속에서 언급될 때에 영원성은 가능성이거나 미래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현재는 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의심할 때마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은 결국 과거와 미래의 접촉점인 순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희망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희망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희망하는 것은 순간순간 기대하는 것이다. 기대만이 가능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어떻게 변화될지 모른다. 어떤 사람도 좋은 면으로든 나쁜 면으로든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만큼 결코 매정스럽게 사람을 저버리거나, 그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 왜냐하면 가장 타락한 탕자마저도 여전히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일찍이 그대의 벗이었으나 지금은 가장 격분한 원수가 된 사람마저도 다시금 그대의 벗이 될 가능성이 있고, 일찍이 그다지도 높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사람마저도 다시금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랑도 다시금 불타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어떤 사람도 결코 저버리지 말고, 최후의 순간까지 저버리지 말라. 결코 절망하지 말라. 아니다. 모든 것을 희망하라!(73-74)
그렇다. 사랑은 절망의 늪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상상을 초월한 힘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 자는 누구나 창피를 당하지 않게 한다.
d)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구치 않는다(고전13:5)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의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제한적인 것이고 그는 자기 이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치 않는다. 왜 그런가?
첫째, “사랑은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서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것과 네 것이란 ‘자신의 것’에 대한 상대적인 규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일 ‘내 것’과 ‘네 것’이 없다면 ‘자신의 것’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것’이 없다면 실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하다”(90-91).
둘째,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특성을 고집하여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각 사람을 그들의 특성에 따라서 사랑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그의 특성’은 바로 ‘그만이 갖고 있는 것’이라고 수용해 준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들의 것’을 사랑한다”(98).
셋째,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을 주되 그 선물이 마치 원래 받는 사람의 소유물인 듯이 보이게끔 주기 때문이다”(104).
참 사랑은 모든 인간을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희생과 아픔이 따른다.
e)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준다(눅7:47)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 “왜냐하면 사랑은 죄를 찾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이 찾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덮어주는 것을 의미한다”(110). 죄를 들춰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준다. “왜냐하면 사랑은 피치 못해 보거나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을 오랜 침묵과 관대한 해석과 끝없는 용서로 덮어주기 때문이다”(128). 상대방의 비밀을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어떤 비밀은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 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결코 망각되어 사그라지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 남을 위한 값진 희생이 망각되어 버린다면 누가 관연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사랑의 액체 속에서 자신을 녹여 버리는 사람, 멈출 수 없는 사랑 속에서 남의 고난과 불행과 손실에 눈을 감아 망각의 늪에 던져버리는 사람, 그리고 남을 보살펴 주느라고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런 사람은 결코 망각되는 일이 없다. 그런 그를 생각해 주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117).
f) 사랑은 언제까지나 존속한다(고전13:13)
이 세상에는 언제까지나 존속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가변적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소멸해버린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이젠 흔적만 남아 있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면 그 흔적마저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계속해서 존속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의 행위이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 소중히 남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보여준 사랑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 사랑은 죽음으로써 증명한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사랑이다(150). 영원한 사랑은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얻어진다.
콜린 맥컬로우는 그 고귀한 사랑을 가시에 찔려 죽어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가시나무새에 비유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소리보다도 그 새의 울음소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둥지를 떠나 하늘을 나는 그 순간부터 날카롭고 뽀족한 가시를 찾아 헤매고 그 가시를 찾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는다.
가시 나무새는 가시에 가슴을 찔려 피를 흘리는 아픔의 고통을 초월하면서 이 세상의 그 어느 새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온 세상은 침묵하며 그 아름다운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하늘나라의 신 까지도 미소를 짓는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처절한 고통을 치뤄야만 얻을 수 있기에…
전설의 새, 가시나무새는 우리 모두의 실상이다. 콜린 맥컬로우, 「가시나무 새」, 이종두 역(고려 문학사, 1994), 서시.
가시나무 새는 우리의 실상이다. 그러나 인간과 가시나무 새와 다른 점은 새는 가시에 찔린 그 순간에도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노래를 부르며 죽어가지만 인간은 가시에 찔리면 죽는 것을 알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g) 비록 아무 것도 줄 수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도, 자애(mercifulness)는 곧 사랑의 행위이다
자애심은 사랑의 행위라고 말한다. 자애심은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이기에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도 선을 배풀고자 하는 심정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자애심의 발로이다. 자애심이 없는 자선이나 선행은 결코 순수한 선행이나 자선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킬케고올은 돈을 쓸 때는 항상 자애심을 품고 하라고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돈에서 악취가 난다고 했다(179). 선한 사마리아인의 아름다운 행동이나 헌금함에다 두 렙돈을 넣은 과부의 이야기는 자애로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무엇을 바라고 자애를 베풀었던 것이 아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애를 베푼 것 뿐이다.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도 돈을 아끼느라 그렇게 인색하게 조금 넣은 것은 아니다. 지극한 가난 중에서 최선을 다해 아니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그렇게 한 것이다. 비록 두 렙돈 밖에 안 넣었어도 부자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우리 주님은 칭찬하셨다(눅21:1-4). 자기의 전 재산을 넣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과부는 가진 것이 적었어도 자애로운 사랑을 베푼 것이다. 여기에 자애로운 행기로운 사랑이 있다. 자애스러운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자세이며 기도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h) 패배한 사람을 얻는 화해적인 사랑의 승리(엡6:13)
패배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화해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화해적인 싸움이라니 무슨 말인가?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싸움은 대단히 어려운 싸움이다. 패배자는 굴욕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굴욕감을 습관처럼 몸에 베인 사람에게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며 그를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패배한 자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이것이 굴욕을 방지하는 첫째 조건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은 패배한 사람을 눈여겨본다. 이것이 둘째 조건이다”(210). 패배자를 눈여겨보는 자세는 패배자가 용서를 초조한 마음으로 모색하는 동안에 사랑하는 자는 패배한 자를 품는 너그러운 사랑을 모색하는 것이다. 마침내 용서는 용서를 비는 자의 간청을 단념하게 만듦으로써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를 얻는다.
i) 사랑은 죽은 자를 기억한다.
삶이 인간의 한 부분이듯이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처럼 강하게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인생의 여정에서 혼미에 빠질 때 “모든 길이 합치는” 죽음을 음미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문이 된다(213).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죽으면 사랑도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가 않다. “죽은 자를 위하여 소리를 내지 않고 통곡하라, 그는 고이 쉬고 있으니까”(시락서21:12). 소리내지 않고 통곡하는 것이야말로 산자로서 죽은 자를 가장 진실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사랑의 행위는 가장 “비이기적인 사랑의 행위이다”(219). 인간의 사랑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자기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이해관계(relationship based on the interest)에서 사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비이기적인 사랑이다.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순수성을 잴 수 있을 것이다.
j) 사랑은 사랑을 찬양한다.
사랑이 사랑을 찬양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다시말해 “자기부정을 통하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237). 자기부정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진정 사랑을 찬양하는 심오한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4:8). 사랑이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구속주를 향한 자기부정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마땅하다. 그래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찬양하는 그 사랑의 행위는 외면적으로 사심없는 희생을 통해서 삶에서 우러나와야 하며(245),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여 자신을 무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대여! 자기부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찾아내는 희생적인 것이다”(258).
III. 정리
킬케고올에 의하면 신자의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생활이다. 주를 따르는 것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이 필수적이다. 주를 따르는 생활은 진리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살아 꿈틀거리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증인이 되는 것은 희생과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생활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다.
킬케고올에 말하길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이론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다. 여기서 사랑이 행동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사랑에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은 정의를 내리거나 사랑에 대한 고전을 읽는다고 할찌라도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킬케고올은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숙고를 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역사 혹은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이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숙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보고 회개하고 기독교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전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 덧입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부드러우면서도 준엄한 자세로 우리를 가르치신다. 공의와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자기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은 느낌(feeling), 충동(drive)의 에로스적인 사랑이며, 친구의 사랑은 편애(preferential love)라고 말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다. 결국 뒤집어 보면 자기 이해에 기초한 제한적 사랑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사랑을 자기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모르고서야 인간은 진정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일4:7). 그래서 참 사랑은 내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덧입어서 그것이 삶으로 표현될 때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역사」는 킬케고올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토록 기독교의 사랑이 부드러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임춘갑 교수(「사랑의 역사」의 번역자,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고백처럼 기독교 사랑은 부드러우면서도 준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없다. 이러한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 누가 쓸 수 있겠는가? 킬케고올은 약혼녀 레지나(종교적인 이유로 파혼)를 일생 동안 사랑했다. 그는 일생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유언에서 약혼도 결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 레지나를 일생 동안 사랑했다. 따라서 킬케고올만이 「사랑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고 본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사람이라야 한다. 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을 그때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요일3:19). 이런 점에서 「사랑의 역사」는 아무나 읽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사랑의 역사」가 읽기에 어려운 것은 사랑이라는 언어 자체에 있지 않고 기독교 사랑을 실천한 삶이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이여! 이것이 킬케고올이 가르치는 기독교 사랑의 문법(grammar)이기 때문이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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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도 리더가 되는 법 (0) | 2013.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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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헨리크 센케비치) (0) | 2013.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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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쏘렌 키에르케골(Soren Kierkegaard) (0) | 2013.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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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헨리크 센케비치) (0) | 2013.06.25 |
관점, 계획, 실행, 구조, 경영, 개선- (0) | 2013.06.07 |
알아두면 좋은 신학용어(Theological Terms)
1. 신학사조
liberalism(자유주의), neoorthodoxy(신정통주의), fundamentalism(근본주의),
neoevangelism(신복음중의), evangelism(복음주의), conservatism(보수주의),
progressivism(진보주의), puritanism(청교도주의), radicalism(급진주의),
calvinism(칼빈주의), new theology(신 신학)
2. 신학체계
biblical theology(성서신학), historical theology(역사신학),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 pratical theology(실천신학)
homiletics(설교학), liturgics(예배학), pastoral theology(목회학),
pastoral counceling(목회상담), missiology(선교학), church growth(교회성장학),
church administration(교회행정학), Christian education(기독교교육),
theology of ministry(교역학)
3. 조직신학의 구성
prolegomena(서론), the doctrine of God(신론), christology(기독론), soteriology(구원론)
pneumatology(성령론), anthropology(인간론), ecclesiology(교회론), eschatology(종말론),
4. 조직신학 각 분야의 논쟁점
kerygmatic theology(선포적 신학), apologetic theology(변증적 신학), dogmatics(교의학),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 transcendence(초월), immanence(내재),
deus absconditus deus revelatus(숨겨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vere deus vere homo(참 하나님 참 인간), divinity(신성), humanity(인간성),
filioque(그리고 아들), simul justus et peccator(의인인 동시에 죄인),
visible church(보이는 교회), invisible church(보이지 않는 교회),
futuristic eschatology(미래적 종말론), realized eschatology(실현된 종말론),
inaugurated eschatology(시작된 종말론)
5. 계시론
natural theology(자연신학), revealed theology(계시신학),
the knowledge of God(신인식), natural revelation(자연계시),
supernatural revelation(초자연계시), common revelation(일반계시),
special revelation(특수계시), analogia entis(존재유비), analogia fidei(신앙유비),
analogia relationis(관계유비)
6. 신앙과 이성의 관계
credo quia absurdum(Tretullian, 비합리적이기때문에 내가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Augustinus, 알기 위해서 믿는다.),
si non credideritis, non permanebitis
(사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 굳게 서지 못하리라.),
fides quaerens intellectum(Anselm,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
intellectus quaerens fidem(Thomas, 이해는 신앙을 추구한다.),
finitum non capax infinitum(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
7. 교파
the Roman Catholic(천주교), the Greek Orthodox Church(그리이스 정교회),
Jesuit(예수회), the Lutheran Church(루터교), the Episcopal Church(성공회),
the Reformed Church(개혁교회), the Methodist Church(감리교),
the Congregational Church(회중교회), the Holiness Church(성결교),
Quaker(퀘이커), Salvatioa Army(구세군), Church of Christ(그리스도교),
Pentacostal Church(오순절교회), Mormonism(모르몬교),
Seventh Day Adventists(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8. 현대신학
libaration theology(해방신학), black theology(흑인신학), feminine theology(여성신학),
political theology(정치신학), minjung theology(민중신학),
secularization theology(세속화신학), theology of hope(희망의 신학),
process theology(과정신학), the death of God theology(사신신학),
narrative theology(이야기신학), postmodern theology(탈근대주의 신학), pluralism(다원주의),
fundamenmtalism(근본주의)
9. 성경관련
apocalypse(계시), apocalyptic literature(apocalyptic, 계시), apocrypha(외경),
pseudoepigrapha(위경), canon(정경)
10. 성서의 영감
mechanical inspiration(기계적 영감), dynamic inspiration(역동적 영감),
organic inspiration(유기적 영감), partial inspiration(부분영감),
plenary inspiration(완전영감), thought inspiration(사상영감),
verval inspiration(축자영감), inerrancy(무오성), infallacy(신빙성),
testimonium spiriti santi internum(Calvin, 성령의 내적 증거)
11. 성경해석
exgesis(석의), eisgesis, exposition(주해), commentary(주석),
interpretation(해석), hermeneutics(해석학)
12. 성서비평
biblical interpretation(성서비평), higher criticism(고등비평), historical criticism(역사비평),
literary criticism(document criticism, 문서비평), form Criticism(양식비평),
tradition history(전승사), redaction criticism(편집비평),
reader's response criticism(독자반응비평), narrative criticism(서사비평, 이야기비평),
structural criticism(구조비평), lower criticism(저등비평), textual criticism(본문비평),
demythologization(비신화화)
13. 하나님 명칭
Elohim(하나님), Adonai(주), El Shadai(전능하신 주), Yahweh(야웨),
Theos(하나님), Kyrios(주),
14. 신존재증명
the rational proof of the existence of God, ontological argument(존재론적 증명),
cosmological argument(우주론적 증명), teleological argument(목적론적 증명),
anthropological argument(인간론적 증명), moral argument(도덕적 증명)
15.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nature(본성), attribute(속성), communicable attributes(공유적 속성),
incommunicable attributes(비공유적 속성), omniscience(전지),
omnipotence(전능), omnipresence(전재), aseity(자존성), actus purus(순수행동),
tremendum et fascinum(두려움과 매혹됨)
16. 신정론
theodicy(신정론), theocracy(신정론), the deficiency of good(선의 결핍)
17. 이외용어
imago dei(하나님의 형상), semen religionis(종교의 씨), the point of contact(접촉점)
18. 하나님의 섭리
providence(섭리), preservation(보존), concurrence(협력),
government(통치, sovereignity: 주권)
19. 세계의 기원
dualism(이원론), the emation theory(유출설), creationism(창조설),
the theory of form(조성설)
20. 사단관련
devil(마귀), demon(귀신), Satan(사탄), the Evil(악한 자)
21. 삼위일체 이단
dynamic monarchianism(역동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양태론적 군주신론, Sabelianism, subordinate monarchianism), tritheism(삼신론), socinianism(소찌니아니즘), uniterianism(유니테리아니즘),
antitrinitarianism(반삼위일체론), binitarianism(이위일체론), patripassianism(성부수난설)
22. 삼위일체론 용어
substance(본질), person(위격), una substantia(한 본질),
tres personae(세 위격), ousia(본질), hypostasis(위격), prosopon(위격), physis(본질).
essential trinity(본질적 삼위일체론, internal trinity),
economic trinity(경륜적 삼위일체론), generation(생성), filiation(아들됨),
procession(발출), vestigia trinitatis(삼위일체의 흔적), homoousios(동일본질),
modus entis(존재 양태, the mode of being),
communicatio essentiae(본질교류), communicatio idiomatum(속성교류),
communicatio operationum(이행교류)
23. 2세기 이단
gnosticism(영지주의), Judaism(유대주의), Marcionism(akfmtldhswndml)
Montanism(몬타니즘)
24. 신론
monotheism(유일신론), henotheism(단일신론), polytheism(다신론)
deism(이신론), pantheism(범신론), paentheism(범재신론), theism(유신론), atheism(무신론),
scepticism(회의주의), agnostics(불가지론)
25. 기독론이단
adoptionism(양자론), ebionism(에비오니즘),
subordinationism(종속론, Arianism), monothelitism(단의지론),
monophysitism(단성론, eutychianism), docetism(가현설), Appolinarianism(삼이설),
Nestorianism(네스토리우스주의, moral conjuction 도덕적 접속)
26. 역사적 예수의 문제
historical jesus(역사적 예수), kerygmatic Christ(선포적 그리스도),
proclaimer(선포자), proclaimee(선포된 자), kerygma (선포)
27. 성육신
incarnation(성육신), ho logos sarx egeneto(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kenosis(비하)
28. 그리스도의 삼중직
munus triplex(threefold offices, 삼중직), prophet(선지자), priest(제사장), king(왕)
29. 속죄론
atonement(속죄), ransom theory(속전설, Irenaeus), satisfaction theory(만족설, Anselm),
moral influence theory(도덕감화설, Abelard), penal satisfaction theory(형벌만족설, Calvin),
government theory(통치설, Grotius)
30. 인간론 논쟁
recapitulation theory(복원교리), Augustinianism(아우구스티누스주의),
Pelagianism(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반펠라기우스주의), Calvinism(칼빈주의),
Arminianism(아르미니우스주의), synergism(신인협동설), monoenergism(단독사역설),
libertas(자유), libero arbitrium(자유 선택), meirtum(merit, 공적),
summum bonum(최고선)
31. 칼빈주의 5대 강령
total depravity(전적 타락), unconditional predestination(무조건적 예정),
limited salvation(제한적 구원), irresistable grace(불가항력적 은총),
perseverance of saints(성도의 견인)
32. 영혼의 기원
preexistentianism(선재설), traducianism(유전설, 루터/서방교회)
creationism(창조설, 칼빈/동방교회)
33. 예정론
decree(작정), double predestination(이중예정설), election(선택),
reprobation(유기), preterition(간과), inflalapsarianism(타락 후 예정설),
supralapsarianism(타락 전 예정설), foreknowledge(예지), foreordination(예정)
34. 원죄론
original sin(원죄), original righteousness(원의), indircet transmission(간접 전가),
direct transmission(직접 전가), realistic view(실재설), covenant theory(계약설)
35. 인간의 구성
trichotomy(삼분설), dichotomy(이분설), body(몸, soma), soul(혼, nephesh, psyche),
spirit(영, ruach, pneuma), flesh(육, sarx), mind(정신, nous, dianonia),
heart(마음, leb, kardia), passion(열정), emotion(정서), intellect(지성), will(의지),
intention(의도), disposition(성향), reason(이성), understanding(오성)
36. 구원의 순서
ordo salutis(구원의 순서), prevenient grace(선행적 은총), communion(하나됨),
calling(소명, 부르심, vocation), regeneration(중생, 거듭남), conversion(회심),
repentence(회개), faith(신앙), justification(칭의), sanctification(성화),
the perseverance of saints, glorification(영화),
justitia infusa(의화, infusion of righyeousness),
justitia imputatio(의인, imputation of righteousness)
37. 개혁5대모토
sola fide(오직 믿음), sola scriptura(오직 성서), sola gratia(오직 은총),
soli deo gloria(오직 주께 영광)
38. 의인화
anthropomorphism(신인동형론), anthropopaticism(안트로포파티시즘)
39. 계약설
covent theology(계약신학), covenant of work(행위계약),
covenant of grace(은혜언약), covenant of redemption(속죄언약), dispensationalism(세대론)
40. 교회의 특징
one(ecumenical), holy, catholic, apostolic/ 교회의 임무: koinonia(교제),
didake(교육), kerygma(선포), diakonia(봉사)
41. 성례전
sacrament(성례), transubstantiationism(화체설), consubstantiationism(공재설),
theory of symbol(상징설), baptism(세례), eucharist(성찬, Lord's supper),
the anointing ofthe sick(병자성사), matrimony(혼인성사), confirm!!ation(견진성사),
confession(고백성사), ordination(신품성사)
42. 천년왕국론
premillenialism(전천년설), postmillenialism(후천년설), amillenialism(무천년설),
advent(재림, the second coming)
43. 사후세계
the intermediate state(중간상태), sheol(스올), hades(하데스), geenna(게헨나),
purgatory(연옥), limbo(고성소), psychopannychy(영혼혼수설)
44. 시간
Heilsgeschichte(구속사, sacred history), Geschichte/Historie, kairos(카이로스),
chronos(크로노스)
45. 설화신학 등
sags(사화), myth(신화), parable(비유), allegory(우화), narrative(이야기), talk(이야기),
story(설화)
[출처] 알아두면 좋은 신학용어(Theological Terms)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2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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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 헨드릭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전략적 사고는 마치 샤워하는 것과 같아서, 당신은 반드시 지속해야만 한다." 많은 교회들이 장단기 목표들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속적인 진행과정의 부재로, 쉽게 정체되거나, 예전에 했던 방법대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략적 가동 계획들은 미션과 비전과 핵심 전략들을 명확하게 해 줄뿐 아니라, 올바른 조직구조를 만들어 주고, 우선적인 실행시작을 통해 전략적 가동 계획들의 당위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죠. 전략적 사고의 진행과정은 원의 모양처럼 계속적으로 이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Fast Company(J. Crew)의 5월호 내용에서 Dani......... 전체 내용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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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의 침몰 음모; 그들은 왜? (0) | 2013.04.17 |
조선시대 연인들의 데이트
인적이 끊긴 밤길.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달빛아래 밀어를 나눈다. 남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내용이다. 화제(畵題)는 "깊은 달밤 3경에 두 사람의 마음 그들만이 알리라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 兩人知)" 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쓰개치마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다. 엄숙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여성들의 밤길은 보장됐다
조선 시대 풍속화의 대가 신윤복의(월하정인)에는 넓은 갓에 중치막을 입고 있는 사내와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초승달 아래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 人心事 兩人知)'는 글귀가 은밀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가만, 삼경이라고 하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가리키는데 통금 시간이 있던 조선 시대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한 걸까?
[경국대전]에는 '궁궐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뜰 때 열며 도성 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정'은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오후 10시에 종각의 대종을 28번 치는 것이고, '파루'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전 4시에 북이나 종을 33번 치는 것을 말한다.
불과 20여 년 전, 자정 통금 사이렌에 맞춰 줄행랑 치던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사람들도 종이 28번 울리면 일단 집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를 어길 땐 다음 날 곤장을 맞았는데, 시간대별로 곤장 수가 달랐다. 삼경은 곤장 30대를 맞는 가장 무거운 벌이 내려지는 시간이었으니[월하정인]의 두 주인공은 배짱이 꽤나 두둑 했나 보다.
물론 질병, 출산 등 부득이한 일이 잇는 경우에는 예외였다. 특히 성균관 유생들은 밤늦게 제사를 지내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왕에게 상소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통금 특혜자였다.
효종은 '성균관에 하사한다'는 글귀가 새겨진 은잔은 유생들에게 나눠주었고, 그것은 일종의 통행증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영조 때 성균관의 한 유생이 통금을 어겼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유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하자 영조는 즉시 포도대장을 엄벌했다.
성균관 유생도 아니고 부득이한 일이 없더라도 통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정월대보름'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그렇다면 [월하정인]의 두 남녀가 만난 날은 이 두 날 중에 하루였을까?
조선의 통금제도가 조금씩 느슨해지면서 언제부터인지 낮에 외출하기 힘든 양반댁 여인들이 밤에 외출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나라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해ㅆ고 때론 밤나들이 하는 여인들을 적극 보호하기까지 했다.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할 공간이 없던 조선 시대.
사랑 앞에서만은 법도 넓은 아량을 베푼 듯하다. --출처.신윤복 그림 해설 월하정인에서
조선시대의 금지된 사랑 궁녀
궁의 궁녀의 경우는 제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과도 사랑을 나눌수 없다.
궁녀라는 것이 제왕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평생 소원은 단 한번이라도 승은을 입는 것이다. 승은을 입을 꽃다운 나이가 지나버리면 여인은 스스로 꽃을 단념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는 꽃을 단념하는 것은 가을이 이슥하여 홀로 기다린다는 것이리 하여 이여인은 궁내에서 최고직인 상궁에 오르는 것이 다음 목표가 된다.
간혹, 재정등 여러 이유로 제왕은 궁녀의 수를 줄여 자신의 부덕함을 면죄 받으려 하는 예사가 있었는데 . 이때 궁녀를 출궁시키는데, 출궁 조치를 당한 궁녀는 평생 시집을 갈수가 없다. 이유는 궁에 들어가 나이 15세가 되면 모든 궁녀는 관례를 치르는데 이 관례는 단순한 관례의 의미가 아닌 제왕과의 혼례의 의미다. 그래서 신랑 없이 신부가 혼례를 치르는 경우이다. 출궁 조치를 당하는 궁녀는 대부분 15세 이상되었거나 나이가 많은 궁녀들이 그 대상이 된다
따라서 여성은 재가를 할수 없는 조선의 법에 따라 궁녀는 출궁해서도 결혼을 할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시-거세된 내시는 궁안에서의 제왕과 왕녀.왕비등등의 내밀한 사사 심부름을 하는 건택된 남자들이다 이들 또한남녀접근이 금지되었다 *궁녀와 내시는 각각 관계의 직위-벼슬을 내린다
양반
신분을 넘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양반의 여자들은 천민이나 노비들과 사랑을 할수 없었다.
이들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깨는 것으로 양반 부녀자와 사랑을 나눈 노비 남자나 천민 남자들은 법에 의해 강력히 다스려져 사랑을 할수가 없었다.
양반의 유부녀
이들은 삼종 지도를 행해야 한다.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아들을 따르고 따라서 유부녀는 남편 이외에 어떤 남자와도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남편이 죽으면 정절하며 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아들이 없더라도 정절을 지키는 것이 의무였고 하나의 여자의 범절이라고 했다
양반 남자의 경우
남자 양반의 경우는 폭이 상당히 넓다.
물론 양반 가문의 아녀자와 결혼을 하지만 축첩제가 용인되어 첩으로 양반이 아닌 계급의 어떤 여자와도 사랑을 나누고 첩으로 둘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로 서자, 서얼들이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난다. 양반 남자는 부인이 죽고 상을 치른 후에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규수=처녀와 재혼할 수가 있었으나 양반 여자의 경우는 한번 결혼하여 일부 종사 하여야하고 남편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여도 재혼할 수가 없다.
동성 동본의 사랑
동성 동본간의 사랑 역시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로 예로 정착된 혈통과 가문을 중히 여긴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고대나 중대 즉 고려초기까지 근친혼이 행해지고 신라나 고려 왕실만 해도 며느리가 시아버지랑, 또는 누나랑, 또는 시동생간, 등의 근친혼이 이루어 졌으나 주정자 학문이 들어온 후기부터 고려 정종 12년(1046)에 근친 혼을 금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이르러 유교 학문이 국시가 된 이후로는 경국대전(조선의 헌법과 같은 것)等으로 동성동본간의 결혼을 금지했다.
적자와 서자와의 사랑
적자는 정혼한 부부사이에 난 자식, 서자는 첩에서 나온 자식으로, 서자 출신의 남자와 적자 출신의 여자는 결혼을 할 수 가 없었다.
양민 천민을 제외한 계층
양민과 역적의 자손과는 결코 결혼할 수 없다.
역적의 후손은 당시 법에의하여 관아의 노비로삼아일하게하였다 노비는 대대로 세습하였는데, 일정한 나라에 대한 공로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란에 공을 세운다거나 특이한 일로 나라에서 노비를 면해주고 평민으로 복귀해주기도 하였다. 이들이 양민과 결혼해서 불순한 씨앗을 과거 시험이 허용되는 양민으로 편입시킬 수 가 없다는 당시 기존 계층인 양반들의 관념과 유교때문이다.
황진이가 정을 주고 사랑하자고 한 사람이소세양이라면 홀로연모하며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이 서화담이다 장안의 화제인물 황진이가 남 모르게 연모한 사람 오직 정신적인 순수한 사랑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던 인물은 花潭 徐敬德(1489~1546) 당대의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마저도 파계破戒시켰던 황진이로서 마음만 먹으면 정복하지 못할 사내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만 아무리 유혹해도 미동도 하지 않던 산림처사山林處士 서화담徐花潭에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고결한 인품에 감복하여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가슴 속에 이는 불길을 억누르느라고 힘겨워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다음 시조에서 엿볼 수 있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너는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쫓아다니다가 남우일까 하노라
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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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의 침몰 음모 : 그들은 왜?
영국 화이트스타사(社)가 1911년에 건조한 대형 호화여객선. 그리스신화의 타이탄 신족의 이름을 따와 타아타닉으로 이름을 정했다함. 총톤수 46,328t. 길이 259.08m 넓이 28.19m. 높이 19.66m. 1911년에 제작되었다.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기관이다.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kn이며, 당시에는 4만t급 이상의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4월 10일에 영국 사우샘프턴항(港)에서 뉴욕을 향해 2224명의 승객·승무원을 태우고 처녀항해로 출발했다.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 셰르부르에서 승객을 더 태운 후에 뉴욕으로 가기 전에 아일랜드에 잠깐 정박했다. 1912년 4월 14일 저녁 11시 40분에 뉴펀들랜드의 그랜드 뱅크스남쪽 150㎞ 난바다를 22kn(시속 약 40.7㎞)로 항해하던 중 해역에서 부류 빙산과 충돌하고 -
수면아래에 길이 90m 가량의 틈이 생겨, 16개의 방수구획 가운데 앞부분 5구획이 침수되어 15일 오전 2시 20분에 침몰하였다. 그런데 구명정 수용인원은 모두 1178명 밖에 되지 않아-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이 차가운 해수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었고-700명 정도가 목숨을 건졌다. 이 참사 결과 1913년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런던에서 열려 오늘날과 같이 배의 안전시설을 충실히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 4월 15일에 북대서양에서 일어난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타이타닉 호는 절대 침몰하지 않는 배>로 더 유명해졌다. 사고가 일어나기 12시간 전에 타이타닉 호의 항로에 큰 빙산이 있다는 소식을 다른 배가 무전을 통해 타이타닉 호에 알렸지만 - 웬일인지 아량곳하지 않았다.
1985년에 미국-프랑스 탐사팀이 비디오카메라가 달린 잠수정을 이용해 침몰 위치를 알아냈는데- 타이타닉 호는 가라앉기 전에 이미 두 동강이 상태로 뱃머리와 배의 뒷부분이 반대 방향으로 약 600미터 떨어진 해저에 있었다.
▣ 가장 훌륭한 예수회의 음모 ▣
여러분은 아직도 미 헐리우드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 카프리오가 나온 블록버스터 영화 타이타닉을 기억하는가? 잉글랜드에서 미국으로 가는 그 선상 여행동안 로맨스와 러브 스토리가 있었을까? 글쎄, 그것은 결코 실화가 아니다. 실화라해도, 아마도 단지 실화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읽게될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로서, 타이타닉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크루즈 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여러분이 이제부터 읽게될 정보는 결코 음모 이론이 아니고, 오히려 월드 히스토리라는 책에 잘-기록된 사실이다. 지난 2백년 역사상 가장 커다란 비극들은 예수회에게로 그 흔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예수회가 계획을 세웠고 이행하였던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관하여 증명할 것이며,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지를 보일 것이다.
1830년대 초기 이후로, 미국은 중앙 은행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예수회는 미국 내에 또 다른 중앙은행을 원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자기들의 수많은 전쟁들과 전 세계적으로 은밀히 다른 음모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돈을 끌어올 수 있는 바닥 없는 금고를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1910년, 7명의 남자들이 연방준비은행(FRB)이라고 부르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죠지아해 연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제킬섬에 모였다. 여기에는 록펠러 금융제국을 대표하는 두 사람 넬슨 알드리히와 프랭크 밴더립이 있었고, J.P. 모건 社를 대표하는 헨리 데이비슨과 챨스 노튼, 그리고 벤자민 스트롱이 모였으며, 유럽의 금융 황제인 로스 차일드家를 대표하는 폴 워버그가 모였다. 우리는 이미 로스 차일드家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교황청 예수회를 위해 일하는 금융 대리인들임을 알고 있다.
모건家는 로칠드家와 우호적인 경쟁자였고, 사교적으로 그들과 친밀해졌다. 모건가의 런던 주재 회사는 잉글랜드 은행에 의해 1857년에 재정 파산으로부터 구원받았는데, 그 잉글랜드 은행에 로칠드가가 거대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 이후로, 모건은 로칠드 금융대리인으로서 봉사하여 왔으며, 한편 전적으로 미국인 ...... 인듯 보이고자 무슨 짓이든 다했다.
그(록펠러)의 이 분야로의 입성은 모건에 의해 환영받지 못했고, 그들은 대립하는 경쟁자가 되었다. 결국, 그들은 합작회사에 참여함으로써 서로의 경쟁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그들은 연방 준비 시스템이라 불리는 일종의 국립 금융 카르텔을 창립하기로 협조하였다.
이 세 개의 금융 패밀리들 즉 로스차일드사, 모건사 그리고 록펠러사 모두는 그들 조직들 속으로 침투된 예수회 때문에 예수회 조직의 명령을 이행한다. 그들은 미국에서 헌법적 자유를 파괴하고 세상의 패권을 교황에게 안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우리가 20세기를 돌아볼 때, 우리는 예수회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일을 잘 수행해왔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미국의 부를 탕진해왔고, 계속해서 미국의 위대한 헌법과 시민자유들을 공격한다. 날마다, 바티칸시에 있는 교황의 권력은 증대되어 간다. 어느 날 그들은 다시 전권을 수중에 넣을 것이다.
타이타닉호의 건조는 1909년에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조선소에서 시작되었다. 벨파스트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안식처였고, 예수회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그 몇 년 후 시작되었다. 타이타닉호는 국제적인 선박회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사가 소유한 선박 함대중 하나였다.
모건사가 금융부문에만 강한 재정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금융 권력도구로서 국유 철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용하여, 그는 국제적 선박 트러스트를 창조하였는데, 영국의 두 회사중 하나인 화이트 스타 라인에 독일의 가장 커다란 두 라인이 추가되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연방준비시스템에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명확하게 표명했던 다수의 극히 부유하고 실력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J. P. 모건은 예수회에 의해 타이타닉호를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물에 빠질 수 없는 배는 예수회의 연방 준비 은행 시스템 마련 안을 반대하는 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죽음의 배로 쓰임 받을 것이었다.
이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연방준비은행의 설립을 봉쇄할 수 있을 것이었고, 그들의 권력과 부는 그들의 손에서 탈취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방법에 의해 파멸되어야만 했는데, 그래서 누구도 그들이 살해당했다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었고, 또한 누구도 예수회를 의심해서도 안 되었다. 타이타닉은 그들의 파괴의 도구였다.
세인들의 의심권에서 교황청과 예수회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신세계로 이민가는 수많은 아일랜드인, 프랑스인 그리고 이태리계 로마 카톨릭교도들이 배에 승선하였다. 그들은 소모품이 될 운명이었다. 미국으로 이민가기를 원했던 벨파스트 출신의 프로테스탄트들 또한 탑승하도록 초대되었다. 심지어 신실하고 선량한 로마 카톨릭 사람들도 예수회에 의해 배반당했다.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던 아일랜드인들, 프랑스인들과 이탈리아계 로마 카톨릭교도들은 대서양의 차가운 물 속에서 죽어갔다.
예수회가 제거하고자 했던 모든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선상 여행에 초대되었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들중 세사람은 벤자민 구겐하임, 이사도르 스트라우스 메이시 백화점 회장, 그리고 아마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존 제이콥 아스토르 였다.
그들의 총 재산은, 그 당시에, 당시의 달러화 가치를 사용하면, 5억달러 이상이었다. 오늘날 화폐의 가치는 거의 110억불에 달한다. 이 부유(浮游)하는 궁전 타이타닉호에 탑승하도록 집요하게 이 세 사람은 설득당했다. 그들이 자기들의 부와 영향력을 행사하여 연방준비은행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계획되어 있는 여러 전쟁들을 방해할 것임을 예수회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파멸되어야 했다.
타이타닉호에 탑승한 부유한 유대인들. 이 사람들은 연방 준비은행의 설립에 반대했다. 이 사람들은 대서양 한가운데서 죽어갔다. 타이타닉이 침몰한 이후에 예수회원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연방준비은행은 예수회에 의해 오랫동안 계획된 대로 잘 굴러가기 시작했다.
존 제이콥 아스토르는 타이타닉에 탑승한 사람들 중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존 제이콥 아스토르는 뉴욕에 소재한 유명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원 소유주였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타이타닉호의 선장이었다. 그는 26년 동안 북대서양 물살을 가르며 여행다녔고, 세계에서 가장 숙련된 북대서양 항로의 전문가였다. 그는 수년동안, 예수회원 J.P. 모건을 위해 일했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세상에서 예수회를 돕는 세속 동조자중 한 명이었다. 이것은 그가 사제가 아니라 그가 짧은 옷을 걸친 예수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회원들이 반드시 사제들일 필요는 없다. 결코 사제가 아닌 자들도 자기들의 직업을 이용해서 그 조직을 위해 일할 수 있다. 누구든 예수회원이 될 수 있고, 그들의 신원은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바다의 선장으로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히 예수회 조직을 위해 봉사했다. 사제가 아닌 일반인 예수회 동조자로서 타이타닉호를 고의로 가라앉히라는 명령을 예수회로부터 받았다.
타이타닉호에 관한 수많은 흥미있는 관점들이 1986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에 의해 만들어진 비디오테이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비디오테이프의 제목은 타이타닉호의 비밀이다.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10일 서든 잉글랜드를 출발할 때, 에드워드 스미스의 예수회 지배자 프랜시스 브라우니 신부는 타이타닉호 갑판에 있었다. 이 사람은 모든 아일랜드를 통틀어 가장 막강한 예수회원이었고, 로마에 있는 예수회 수장에게 즉시 응답하였다. 비디오테이프는 선언한다:
휴가 중이던 사제, 프랜시스 브라우니 신부가 그의 동료 승객들이 찍힌 가슴 아픈 스냅사진들을 찍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영원으로 가는 여행자들이었다. 다음날 타이타닉호는 아일랜드 퀸스타운 해변에 자신의 마지막 정박을 하였다. 여기서 거룻배들은 마지막 승객들을 실어 날랐다;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미국에 있는 새로운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운이 좋은 브라우니 신부는 하선하였다... 브라우니 신부는 멸망의 가장자리에서 포즈를 취한 채 타이타닉의 갑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스미스 선장을 찍었다.
이것이 예수회의 배반의 정점이다. 그 관구장(프랜시스 브라우니 신부)은 타이타닉호 선상에서 그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었고, 예수회원으로서 자신의 서약과 관련하여 그 선장에게 가장 확실하게 브리핑하고, 다음날 아침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브라우니 신부는 마지막 시간에 북대서양 한가운데서 에드워드 스미스가 정확하게 해내야 할 일에 관하여 그와 상의하였다. 예수회 수장은 프랜시스 브라우니(아일랜드 예수회의 관구장)에게 벌어져야할 일을 명령했다; 브라우니는 그후 스미스에게 명령했고, 나머지는 역사가 되었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다음을 믿었다,
즉 예수회 수장(교황)이 예수회 조직의 신이라는 것과, 예수회 수장의 전기적 접촉이 없이는 그들(예수회원들)의 죽은 시신들을 살아서 행동하게 소생시킬 수 없다. 그(예수회 수장)가 말할 때까지, 그들(예수회원)은 마치 뱀처럼 자기들의 겨울 무덤 속에 엎드린 채 생기가 없고 활기가 없다; 그러나 그(예수회 수장)가 명령의 말을 내는 그 순간, 각 멤버들은 즉시 벌떡 일어서서, 그(예수회원)가 어떤 일에 매여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미완으로 내버려둔채, 공격해야할 대상이 누구든지 공격할 준비를 해야하고, 가격할 대상이 어디에 있든지 타격을 가해야 한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타이타닉호를 가라앉히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것이 바로 그가 해야할 일이었다. 자기의 하나님(예수회 수장)의 명령에 의하면, 순진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강탈하고, 모든 추잡한 짓을 일삼는 것이 합법적인데, 왜냐하면 그(교황)가 생명과 사망과 모든 것들의 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지령을 이행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예수회처럼, 어떤 연합 조직이 세상 사람들과 시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3백년동안 불변한 채 본래 그대로 유지되어온 것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며, 그 조직(예수회)은 인류의 운명들에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하여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은 예수회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다; 그리고 예수회 수장의 유일한 의도대로,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 조직(예수회)은 그 분부대로 그 어떠한 범죄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회 조직의 일원이 되려는 각 사람이 선서해야하는 서약을 기억하자:
본인은 마치 어떤 노인의 손에 들린 지팡이처럼 그것을 들고있는 자의 의지에 따라서 거역하지 않고 이리저리 굴려지는 한 작은 십자가처럼, 의지나 지능이 없는 한 죽은 몸으로 내 자신을 간주해야만 한다. 노인은 지팡이를 자기가 필요한대로 사용하고, 지팡이는 최선을 다하여 노인에게 맞춘다.
어떤 사람이 예수회 서약을 할 때,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주인에게 예속된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의지나 지적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조직(예수회)이 그에게 원하는 대로 어떤 범죄든지 행할 것이었다. 에드워드 스미스는 순교를 준비해야 했다. 그 날 밤 타이타닉호의 갑판에서 에드워드 스미스는 자신의 의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서약에 매여있었다.
그 배는 예수회의 원수들을 위해 건조되었다. 바다에서 3일간 항해한 후, 갑판용 안경을 쓰고, 에드워드 스미스는 달도 없는 어둔 밤에 그 근방 거의 80 스퀘어 마일에 달하는 거대한 빙산지대를 뚫고 타이타닉을 22노트 전속력으로 전진시켰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너무나 빠른 항해속도로 인해서 좀 더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최소한 8통의 전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했다.
에드워드 스미스가 어떤 경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는가? 결코 아니다. 그는 26년 동안이나 그 바닷길을 여행해왔다. 그는 그 지역에 빙산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덟통의 경고문이 예수회 서약 아래 있으면서 타이타닉을 파괴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 사람을 결코 멈추게 하지 못했다.
베테랑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에게 타이타닉호의 비극이 일어나던 밤에 속도를 늦추라고 반복해서 경고하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했다. 스미스가 결코 그 경고들을 경청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비상식적인 것이다. 그는 바티칸에 있는 자신의 신으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어떤 것도 그의 항로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백과사전은 바로 스미스의 마지막 시간들의 그 비극적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구명보트들에 사람들을 태워서 내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릴 시간이 되자, 스미스는 망설였고, 그의 조수들 중 하나가 명령을 내려달라고 말하고자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 스미스 선장의 전설적 리더십 기술이 그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상하게 우유부단했고, 평상시 같지 않게 그 비극의 밤에 조심스러웠다. 26년 간의 경험이 있는 전설적 선장을 설명하기에 이러한 단어들이 적합한가? 아니면, 선장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에게 그 배를 빠트리라고 명령을 내린 자신의 주인에게 복종할 것인가를 두고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을 설명하는 단어들인가?
존 제이콥 아스토르의 아내는 구명보트로 올랐고 구조되었으나, 존 제이콥 아스토르는 북대서양의 물 속에서 죽어갔다. 타이타닉호에는 충분한 구명보트가 없었으나, 보트들 중 대부분은 오직 여자들과 아이들만으로 반쯤만 채워져서 내려졌다. 근처의 화물선들이 구조요청에 응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난을 알리는 조명탄으로 하얀 색을 쏘았다. 붉은 색을 쏘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나가는 화물선들에게 있어서 하얀 조명탄은 모든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다는 신호였다.
20세기 가장 커다란 비극중 하나인,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예수회의 탓이다. 결코 가라앉을 수 없는 배, 떠다니는 궁전 타이타닉호는 연방준비은행제도를 반대했던 그 부유한 자들을 위한 무덤으로서 창조되었다. 1912년, 4월까지, 연방준비제도를 반대하는 모든 반대가 제거되었다. 1913년 12월에, 연방준비제도 시스템이 미국에서 실시되었다. 8개월 후, 예수회는 제 1차 대전을 시작하기 위해 연방준비은행을 통해서 충분한 재원을 마련하였다.
주모자들
브라우니 신부는 아일랜드 지역의 예수회 관구장이었고 베른츠 신부는 예수회 총수장이었다. 이 사람들이 고의로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주모자들이었다. 이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과 제 2차 30년 전쟁(1914-1945) 그리고 순수한 미국인들의 돈과 재원들을 낭비하며 치러지게될 다른 모든 전쟁들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자기들의 오랜 동안 계획의 일환으로 연방준비은행을 창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넬슨 알드리히, 프랭크 밴더립, 록펠러, 헨리 데이비슨, 챨스 노튼, J.P. 모건, 폴 워버그는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배반자들이었고, 미국 국기와 그 헌법의 배반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미국에 연합하는 대신에 로마에 자기들의 시민정신을 팔아버렸다(예수회-바티칸). 록펠러와 로스차일드가는 13-사탄적 일루미나티 혈맹에 속해있다.
일루미나티 조직의 출범
사탄적 비밀 형제단/조직인 일루미나이티는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라는 한 예수회원에 의해 1776년 5월 1일 독일, 바바리아에 있는 잉골슈타트 예수회 대학에서 세워졌다. 브라우니 신부가 찍은 사진 모음집에는 사우스햄튼으로부터 아일랜드까지 타이타닉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찍힌 유일한 타이타닉호 사진들이 실려있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브라우니 신부는 더블린의 밀타운 파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삼촌 로버트(클로이네의 주교)가 그에게 특별한 선물을 보낸 것이 바로 이 기간 동안이었다: 사우스 햄튼으로부터 체어부르그 그리고 이어서 아일랜드, 코코크, 퀸스타운(콥)까지 항해하는 타이타닉 처녀항해의 제1 직항구간 승선권이었다.
배에 승선한 동안, 한 미국인 백만장자가 뉴욕까지 여행할 수 있도록 브라우니 신부의 뱃삯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감사해하면서, 프랭크 예수회 수장은 퀸스타운에 전보를 쳐서 간결하게 말했다. 그 배에서 내려라, 관구장. (옳다! 프랜시스 A. 브라우니 신부는 아일랜드 예수회의 관구장이었고, 그 배에서 내렸는데, 왜냐하면 계획된 대로, 예수회와 그 자신이 타이타닉을 정교하게 가라앉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이 일어난 후, 프랭크 브라우니의 사진들이 전 세계 신문들의 일면에 등장했다. 그는 스미스 선장과 다른 사람이 마르코니 룸 안에서 찍었던 그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렇다, 1912년 4월 15일 - 예수회는 그 유명한 배 타이타닉호를 침몰시켰고, 존 제이콥 아스토르, 벤자민 구겐하임과 이사도르 스트라우스(연방준비은행 창설에 반대하였던 사람들)를 죽였다. 정확하게, 타이타닉이 대서양 한 가운데 가라앉은 지 1년 후,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되었고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과 제 2차 30년 전쟁을 재정지원할 준비가 되었다.
토마스 샤우프에 의하면
존경하는 미국인들이여 여러분의 요청에 따라서, 나는 연방준비은행(FED)에 관해 여러분이 품었던 질문들을 명백하게 밝히고자 노력할 것이다. 나는 연방준비은행을 연구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다음은 거기서 도출된 충격적인 결론들이다:
연방준비은행은 일종의 사유 회사이다. 누가 연방준비중앙 은행들의 실소유주인가? 기밀에 부쳐졌던 비밀, 12개 중앙 은행들의 소유권자가 드러났다:
런던의 로스차일드 은행
함부르그의 워버그 은행
베르린의 로칠드 은행
뉴욕의 레만 형제들
파리의 라자르드 형제들
뉴욕의 쿤 로엡 은행
이태리의 아스라엘 모세 세이프 은행들(시온주의 유대인)
뉴욕의 골드만-삭스
암스테르담의 워버그 은행
뉴욕의 체이스 맨하튼 은행
제발, 월드 히스토리 대로 명심하라. 로스차일드가는 금융가이자 검은 교황청의 예수회 수장 수중에 있는 바티칸 국고(富)의 주 관리인이다. 정직하고 믿을만한 세계의 역사가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연방준비社에 대한 미 하원의원 루이스 맥파덴의 연설(연설 후 독에 의해 죽음)을 들어보자 !
존경하는 의장님, 우리는 세상이 이제껏 알고있는 가장 부패한 조직들 중 하나를 이 나라 안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연방준비이사회와 연방준비은행들(이하 Fed로 호칭)을 말합니다. Fed(연방준비은행)는 이 나라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들을 속이고 국가의 빚을 청산하기에 충분한 돈을 사취했습니다. Fed의 부정과 불법행위들은 국가 부채의 몇 배를 지불하기에 충분한 돈을 낭비하여 왔습니다.
이 사악한 제도는 이 나라 미국의 국민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왔고, 파괴시켜왔으며, 미국 자체를 파산시켜왔고, 실질적으로 우리 정부를 파산시켜왔습니다. 그것은 현행법의 결함을 이용하여, 그리고 Fed의 그 법의 실정(失政)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는 부유한 자본가들의 부패한 관행들을 통해서 이 일들을 행해왔습니다.
Fed이 미국 정부 조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사익과 그들의 외국인 고객들, 즉, 국내외 투기꾼들과 사기꾼들 그리고 부유하고 탐욕스러운 금융 대부업자의 이익을 위해서 이 나라 미국 국민들을 포획하는 사적 독점가들입니다. 이 금융 해적들의 은밀한 선원들 중에는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일 달러를 꺼내기 위해서 한 사람의 목을 벨 수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입법자들을 통제하고자 표를 사기 위해서 이 나라 안으로 돈을 송금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우리를 속여 그들의 과거 악행들을 은폐시키고, 다시 그들의 거대한 범죄의 열차를 가동시키는 것을 허용해줄 새 특권들을 허락해주도록 우리를 속이고자 국제적 선동을 지속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12개 사적 대부 독점가들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금융가들에 의해 기만적이고 불충하게 이 나라 미국 내로 몰래 반입되었고, 우리가 그들에게 보인 친절에 우리 미국 조직들을 몰래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답했습니다.
그 금융가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을 재정지원하는데 미국의 돈을 끌어갔습니다. 그들은 그 전쟁을 돕기 위해서 우리 미국의 돈으로 러시아에 테러왕국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들은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분리된 평화를 선동하였고, 따라서 세계 전쟁에서 동맹국들 사이를 이간시켰습니다.
그들은 뉴욕으로부터 러시아까지 트로츠키의 여행을 재정지원하여서, 그가 러시아 제국의 파괴를 도울 수 있게 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을 도발하고 선동하였고, 대규모의 미국 달러를 스웨덴에 있는 그들의 은행지점들중 하나에 있는 토로츠키의 계좌에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를 통해서 러시아 가정들은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었고 러시아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멀리 멀리 내던져졌습니다. 그들이 미국 가정들을 파괴하고 미국 어린이들을 해산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존경하는 의장님, 이 나라 안에서 금융과 통화 사태와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당파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습니다. 1912년에 국립 통화 연합은, 고 넬슨 W. 앨드리히 상원의원이 의장직을 맡고 있을 때, 한 보고서를 만들었고 국립 준비 연합 법안이라 불리는 사악한 법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법안은 보통 알드리히 법안이라고 불립니다. 알드리히 상원의원은 결코 알드리히 법안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공범자가 아니었다면, 거의 20년 동안 이 나라에 중앙 은행을 세우려고 음모를 세워왔던 유럽 금융가들과 1912년에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써왔고 계속해서 쓰고 있는 자들의 도구였습니다.
우리는 중앙은행을 위한 알드리히의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그때 민주당을 이끌던 사람들은 국민들에게 만일 그들이 권력을 되찾게되면, 그들이 정부의 주권을 쥐고있는 동안에는, 결코 중앙은행을 설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반면에 13개월 후 그 약속은 파기되었고, 윌슨 정부는 콜로넬 하우스의 배후에 있던 그 사악한 월 스트리트 금융가들의 후견 아래 우리 자유 국가 미국에 그 꼭대기로부터 내려다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국왕의 은행”이라는 벌레 먹은 봉건적 조직을 세웠습니다.
Fed(연준)는 우리의 오래되고 독창적인 사업 방식들을 파괴시켰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의 1-名 상업어음을 냉대하였고, 낡아빠진 2-名 어음을 대두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에 현재 드리워진 저주로서, 그것이 통용되는 나라마다 난파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 미국 위에 전제정치를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였는데, 이 나라 헌법의 구성자들은 바로 이 전제정치로부터 우리를 건지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예수회
상기 정보는 필리핀에 있는 CPP-NPA/ NDF의 근본을 파괴시킬 것이다. (한번 그들이 이 어두운 비밀을 알게되면, 그들은 충격으로 자기들의 입을 막을 것이다.) 실제로, 월드 히스토리대로, 예수회는 공산주의에 관한 강령들을 완성시켰던 비밀 실체이다. 공산주의는 파라과이의 예수회 리덕션으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회 조직은 1848년 대영박물관 내부에서 공산주의 강령들에 관하여 칼 막스를 훈련시켰다. 예수회는 거의 30년간 칼 막스를 훈련시켰다. 레닌은 예수회에 의해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바티칸의 비밀 기차를 통해서 레닌을 러시아로 이동시킬 준비를 한 것은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과 히틀러의 나치 독일 기간 동안 바티칸주재 디에고 베르겐 독일 대사였다.
조셉 스탈린은 러시아 그루지아의 티플리스에 있는 종교회 신학교 내부에서 예수회 조직에 의해 훈련을 받았다. 아가기아니안 추기경이 스탈린과 함께 했다. 예수회가 세운 연방준비은행이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을 재정 지원하였다는 미국 하원에서 발표된 맥파덴 하원의원의 연설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맥파덴 하원의원의 폭로로 인해서 그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미하원 내의 그의 동료들로부터 그리고 몇몇 역사가들로부터 맥파덴 하원의원이 독으로 죽었다는 진술이 나왔는데, 예수회의 독배 아닌가? Fed(연준)의 설립은 예수회 조직의 걸작이었다. 타이타닉의 침몰은 예수회 조직의 최고의 음모이다. 주 잘 - 감추어진-암흑의 비밀들, 세계 역사적 사건들이란 주제에 이르면, 몇몇 정직하고 믿을만한 역사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수백만의 사람들, 심지어 가장-고등한 지식인들(대통령들, 수상들, 상원의원들, 하원의원들, 장관들, 사업가들, TV와 라디오 뉴스 지도자들, 방송 관계자들, 연예오락 종사자들, 엘리트들과 유복한 가문들, 대학 교수들, 선생님들, 군인과 정치 관료들, 전문가들 등등)은 이러한 사실들에 무지하다. 세계사에 대한 심오한 지식없는 사람들이 세계사라는 도화지 상의 모든 점들을 잇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바로 이 시간까지, 수백만의 순진한 미국인들이 배반당하여 희생자들이 되고 있다. 그들의 연방준비은행이 사적으로 소유되고, 그 소유자들의 주머니에서 왔다갔다하는 식으로 예수회의 선봉적인 대리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설립되었다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말이다.
1540년 예수회 조직이 태동한 이래로, 바로 이 시간까지, 로마 카톨릭의 예수회 조직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실체이다. 세계사에 대한 심오한 지식은 예수회의 가공할만한 권력을 추적하는 최상의 방법중 하나이다. 심지어 소위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 미국에 예수회는 성공적으로 연방준비은행을 설립시켰다.
그렇다면 제 3세계는 얼마나 더 하겠는가? 또한, 월드 히스토리에 따르면, 아메리카 은행과 록히드 마틴사(항공-우주-방위 업자)도 예수회에 의해 소유된다. 어떠한 정치적 사건이나 환경도 바티칸의 그 내부 참여에 대한 지식없이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중요한 세상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 - 그 안에 바티칸이 중요한 외부나 내부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브로 맨하탄, 영국 역사가, 1960 The Vatican And World Politics.
2011년 9월 8일 목: <광야의 소리>운영자
출처 :비공개/ 글쓴이 : 성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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