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유한 부부가 외동딸과 살고 있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저택에 동화나라 같은 침실, 멋진 음식과 예쁜 옷,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아들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동딸은 부모에게 예쁜 남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졸랐지만 그게 조른다고 되는 일인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고아원에서 남자아이 하나 데려오는 게 어떻겠니?”
딸은 기뻤습니다. “그래요, 아빠."
딸은 그 날부터 남동생에게 줄 옷이랑, 구두랑, 장남감이랑, 온갖 선물들을 준비하고
아빠가 동생을 데려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데리고 오신 사내아이를 본 순간 딸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들창코에다 주근깨가 얼굴을 덮은 못생긴 아이였습니다. 딸은 사놓았던 선물들도 내팽개치고 제 방에 들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며칠이고 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속상한 딸은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빤 어디 가서 저런 못생긴 아이를 데려오셨어요? 도로 갖다 주고 예쁜 아이로 바꾸어 와요, 네?"

그 때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 아빠가 널 사랑하는 걸 믿니?"
딸은 대답했습니다.
“네, 아빠, 믿고말고요.”
아버지는 다시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넌 이 아빠가 좋은 사람이란 것도 믿니? 가슴속에 사랑이 있고, 그래서 또 널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딸은 대답했습니다.
"네, 알아요. 전 아빠가 절 사랑하시는 것도,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란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 저 아인 너무너무 맘에 안 들어요, 아빠."

아버지는 딸의 어깨를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얘야, 사람은 백화점의 물건처럼 고르거나, 또 바꿀 수는 더군다나 없는 거란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너, 우리가족 모두가 고르지도 바꾸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니?”
아빠의 이 말씀에 딸은 크게 깨닫고 그 사내아이를 남동생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였답니다.

나는 어떤가요?
나는 이 세상에 골라져서 태어났나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
넉넉하고도 푸르른 하늘과 차별 없이 비추이는 햇빛을 누리면서,
혹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다른 생명들을 싫어하고 미워한 적은 없었는지요?
혹시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소중한 사람을 바꾸거나 무르고 싶어 한 적은 없었나요?
나는 그 사랑을 받으면서 남은 사랑하지 못 하는 속 좁은 사람은 혹 아닌가요?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차별 없이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마태복음 5:3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믿는 자마다 차별 없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로마서 10:12).
예수님은 택정(擇定)한 사람만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생명은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부요합니다.

글 쓰기 편하게 "목사"란 칭호는 생략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정이철에게 묻는다. 답변 바란다.


1. 정이철목사는 미국 미시간 디트로이트 앤아버장로교회를 하는 동안 CRC 교단의 개척기금을 받아 썻다. 맞나? 틀리나?

 

2. 그러다가 CRC 교단을 탈퇴하였다. KAPC에 가입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가입을 안 하였기에 무소속 교단이다. 맞나? 틀리나? 
이에 대해 분명히 답하길 바란다.

 

3. 정이철은 최근 예장합동 "서울 남노회 소속"이고, 예장 합동에 소속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국 영주권(혹은 시민권)을 가진 정이철이가 어떻게 예장합동이며?,

합동 남노회 소속이라고 말 할수 있는 지, 거기에 대한 근거를 밝히기 바란다.


4. 예장합동은 미국에 살며 목회하는 정이철목사를 예장합동소속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이철이가 한번 밝혀 보라.


5. 예장합동은 "두날개"를 옹호한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정이철의 견해는 무엇인가?


6. 정이철은 지금까지 두날개에 이단성이 있다고 비판/비난하여 왔다.
그렇다면 예장합동 소속이라는 정이철은 무엇인가?  교단에 역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정이철의 입장은 무엇인지 밝혀라.

 

7. 예장합동 서울 남노회 소속이라는 정이철은 앞으로도 두날개를 공격할 수 있는가? 없는가?

솔직한 답변을 기대한다.

 

8. 두날개를 공격한 정이철의 친구들은 예장합동 소속인 림헌원, 이창모, 조덕영, 등이다.

그렇다면 합동은 교단 방침에 역행한 정이철과 함께 노는 림/이/조 에 대해선 어찌 할 것인지 알고 싶다.

정이철이가 한 번 대표로 답해 보기 바란다.   
 
9. 정이철은 두날개를 적극 공격하는 자이다. 반대자이다. 지금 정이철의 엡사이트가 그것을 증명한다.  
반면 합동이대위 위원장이 된 진00 목사는 두날개를 옹호하는 합동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목적을 따라 정치적으로 합할 수 있는 지? 알고 싶다. 답변하기 바란다
.


10. 예장합동은 밖에서(해외) 개인적으로 문제를 만든 목사를 적극 옹호, 비호해 주는지?  알고 싶다.

교단 없는 무소속 목사가 합동소속이라고 말만 하면 무조건 법적으로도 옹호/보호해 주는 지? 알고 싶다.

이에 대한 Regulation이 합동 교단 법에 있는지 알고 싶다

합동소속이라는 정이철이가 그 법적 Regulation을 찾아 밝혀주길 바란다.  


정이철에게 부탁 사항:

두날개에 이단성이 있다고 하였으면 끝까지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하길 바란다.

개인의 소욕을 따라 진목연을 배신/배반하였듯이, 두날개를 옹호하는 쪽으로 회귀하지 

말길 바란다. 

나이의 굳은 심지 끝까지 지키기 바란다. 의리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싸나이가 되길 바란다. 

성경에서 배신과 배반의 화신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팔아 먹은 가롯유다가 아닌가 !!  

 

은퇴 목사: 김한길

바른믿음 정이철목사 ‘미남 한인총회의 명예훼손 주범은’

기사에 대한 이재위목사 반론

필자는 바른믿음 정이철대표가 2016년 12월 31일에 승인한 ‘미남 한인총회의 명예훼손 주범은’ 이라는 기사에 대한 내용에 대해 반론 하려고 합니다. 독자들께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바른믿음 측 주장:

남침례 대책위 이재위 위원장이 얼마 전에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일들을 보냈다.

“이번 검증 과정 가운데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는 남침례 대책위에 관계한 불법 이메일과 교단과 개인의 신뢰훼손에 관한 명예훼손, 한 개인의 목사의 명예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초상권 침훼를 범했습니다.”

“앞으로 본 대책위는 한국과 미국에 민법을 통해 객관적인 방법으로 사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다른 이의 제기가 있다면 저나 대책위에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시고 앞으로는 본 대책위 담당 변호사나 법정에서 하시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김성로 목사를 위해 나섰다면 그 방법에서도 본이 되어야 하고, 특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성경은 결코 신자들끼리 세상 법정에 가서 싸우는 일을 강력하게 책망하였다. 그런데 이재위 목사는 김성로 목사가 전하는 올바른 복음을 위해, 그것도 미주 남침례교 한인교회 총회(이후 '미남 한인총회')라는 공 교단의 이름을 대표하며 그 일을 한다면서 ‘담당 변호사’, ‘명예훼손’, ‘초상권 침해’, ‘불법 이메일’, ‘한국과 미국의 민법’ ... 이런 소리를 밥 먹듯이 계속 반복하였다. 세상 사람들의 '공갈', '협박'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이재위목사 반론: 

정이철목사의 특징은 신학적 토론보다 개인적으로 나눈 이메일을 왜곡 편집하여 필자가 자신에게 법적 문제로 협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사실이 근거하지 않은 추측과 상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예전에 모 이단연구단체 이00대표와 신학적 토론을 할 때도 사적으로 나눈 이메일을 전후 사정을 생략하고 자신을 협박했다고 주장하고 또 이단연구단체들이 모여 사적인 대화를 녹음하여 유포했던 전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없는 못된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참고로 그것을 녹음한 목사도 개념이 없는 한심한 목사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길 바라며 미국 법정에서 허락없이 녹음하여 제시해도 법적 증거로 채택이 되지 않고 혹 유포하는 것은 불법행위라는 것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리고 정이철목사는 자신이 행한 불법적인 일에 대해 개인적인 사과는 전혀 없고 변명만 하고 있는 자세를 볼 때 목회자로서 윤리와 도덕의 개념을 상실한 것 같아서 일반 사회에서는 어떤 윤리적인 개념을 갖고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취지로 필자는 안내해 주는 것이다.  정이철목사가 주장하는 배상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정목사는 성경은 신자들끼리 세상 법정에 가서 싸우는 일을 강력하게 책망하였다. 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세상법정에서 정이철목사와 싸울 일이 없다. 정이철목사가 전혀 윤리적 개념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기 때문에 세상 법정을 통해 윤리와 도덕 개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잘 배우길 바란다.

그리고 정이철목사는 필자와 같은 신자라고 주장하는데 필자를 부활교 이단으로 정죄하고 바른믿음 사이트 첫 게시판에 ‘이단옹호. 추종’이라는 제목과 함께  필자와 교회이름을 게시하지 않았는가? 언제 부터 정목사는 필자를 같은 신자라고 생각했는가? 만약 정목사가 필자를 같은 신자라고 생각했다면 필자를 이단옹호, 추종자라고 취급하는 것이 같은 신자의 상식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는가? 정목사께서 불법행위로 문제를 야기해 놓고 이제 와서 같은 신자끼리 세상법정에 가는 것을 성경은 강력히 책망했다고 한다면 본인은 왜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불법행위를 행하는가? 목사로써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성경을 읽어 보지 못했는가? 잘  아실거라 믿고 성경구절은 제시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필자를 이단옹호, 추종자 라고 바른믿음 게시판에 올렸는데 춘천한00교회는 이미 기독교한국침례회와 남침례한인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성이 없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면 교단의 검증을 존중하길 바라며 필자를 이단옹호, 추종자라고 한 게시판에 있는 내용을 삭제해 주기를 정식으로 요청한다.

 

바른믿음 측 주장:

남침례 대책위는 예장 합동 목회자인 정이철 목사(서울 남노회), 이창모 목사(경서노회), 림헌원 목사(용천노회)가 자기 교단에 대한 명예훼손을 이유로 민법으로 고소하여 배상금을 받아내겠다고는 공갈을 지금까지 수 없이 했다. 그러면 정이철 목사, 이창모 목사, 림헌원 목가 해 온 일이 옳고 법적인 하자가 없음에도 미남 한인총회의 이름으로 계속 이런 시비를 하는 것은 이 세 목회자가 소속한 예장 합동에 대한 모욕이고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이재위목사반론:

정목사는 필자가 민법으로 고소하여 배상금을 받아내겠다고 공갈을 지금 까지 수 없이 했다고 하는데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필자가 언제 배상금을 받아 내겠다고 했는가? 필자는 세상 법정이 어떤 윤리적 개념을 갖고 있는지 보여 주겠다고 했고 앞으로 필자에게 말하지  말고 변호사와 법정에서 변명하라고 안내해 준 것이다. 그리고 정목사는 자신들의 행위가 법적인 하자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그래서 더욱 법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이다. 본인들이 잘못한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들이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부재이며 감각 상실이라는 판단이 들기 때문에 세상 법정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르쳐 주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세 분 목사님께 명예훼손을 했다면 얼마든지 법적으로 대응하길 바란다. 그리고 여기서 예장 합동에 대한 모욕이고 명예훼손이라고 했는데 자신들이 불법적인 일을 행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왜 예장합동에 명예훼손인지 모든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길 바란다. 오히려 예장합동에 수치라고 생각된다. 여전히 정목사는 자신의 불법행위를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 되며 이번 기회를 통해 정확하게 목회자로써 윤리와 도덕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으로 알게 되길 바란다. 참고로 이창모목사는 명예훼손과는 관계가 없고 신학적 주장에 대해 제기한 것이다. 

 

바른믿음 측 주장:

이재위 목사 등이 주장하는 논리는 같은 침례교 소속 김성로 목사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와 동일한 논리로 예장 합동이 이제 나설 수 있음을 왜 모를까? 누가 보아도 이단성이 농후한 김성로 목사를 비호하기 위해 예장 합동에 소속한 건전한 목사들을 협박하고 음해하는 남침례 대책위와 총회장 반기열 목사를 '이단옹호' 및 '이단추종 집단'으로 합동 이대위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왜 생각하지 못할까?

 

이재위목사 반론: 

김성로목사를 보호하는 이유는 이단성이 없는 목사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보호하는 것이다. 합동이대위가 그런 명분으로 남침례대책위와 총회장님을 이단추종 집단으로 규정하는 그런 비상식적인 단체가 아니라고 믿는다. 기독교한국침례회와 남침례교가 김성로목사가 이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 타 교단에서 검증하는지 미국에서 목회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되지만 자신들의 시간과 경비를 드려서 검증을 해 주겠다고 하니 지나친 사랑인지? 간섭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겠다.

 

바른믿음 측 주장:

불과 800여개 교회들로 구성된 교단이 소속 목회자도 아닌 한국의 김성로 목사를 위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면, 12,000 교회들로 구성된 한국 최대 장로교단이 소속 목회자 3인을 보호하기 위해 꼭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치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재위목사 반론: 

불과 800여개 교회와 12,000여개의 교단간에 대결구도로 계속 주장하는데 본 대책위는 합동교단과 대결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정목사는 계속적으로 합동과 남침례의 대결구도를 통해 교단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불법적인 일을 시작한 것은 정이철목사가 시작하지 않았는가?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단성이 없는 목사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은 정이철목사 쪽이다. 그래서 같은 교단에서 검증을 한 것이고 검증 과정 가운데 정이철목사의 주장 가운데 신학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질문을 제기 했고 토론을 한 것이다. 토론 과정에서 정이철목사가 교단의 명예를 훼손하는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윤리적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반성의 기미가 없기 때문에 세상의 윤리개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본인들이 떳떳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은가? 필자가 거짓과 왜곡된 사실을 가지고 협박한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필자는 세 목사가 합동교단의 명예를 실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른믿음 측 주장:

정이철 목사가 소속한 예장 합동 서울 남노회(?)에서 정이철 목사에 대해 근거없는 음해를 지속하는 감리교 소속 평신도 이단연구가 이인규 씨의 신학사상을 조사하여 달라고 이미 예장 합동 이대위에 긴급청원서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계속 남침례 대책위와 반기열 총회장이 예장 합동 소속 정이철, 이창모, 림헌원 목사에 대해 근거없는 협박을 지속하면, 그리고 이미 자행한 범죄를 사과하지 않으면 반기열 목사와 남침례 대책위 소속 목회자들에게 합동 교단차원에서 동일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그 전에 먼저 주로 예장 합동 목회자들(연구위원)과 신학자들(신학자문)로 구성된 '바른믿음 수호 신학위원회'에서 그 일을 신속하게 진행하여 결과를 발표하고, 합동 이대위와 여러 건전한 교단의 이대위에 자료를 제출할 수 있다. 

 

이재위목사 반론:

평이협 이00대표를 합동 이대위에 긴급청원서를 보냈다고 하는데 과연 25년간 이단연구를 하고 검증된 이대표를 과연 합동이대위에서 조사를 할지 의문이며 근거없는 음해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제시하길 바란다. 그리고 대책위에서 정목사에게 근거 없는 협박을 지속한다고 했는데 무슨 협박을 했다고 하는가? 명예훼손을 하면 당연히 법적으로 하겠다는 것이 무슨 협박인가? 그리고 합동교단차원에서 동일하게 대응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정이철목사와 추종하는 몇명의 목사들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법정을 통해 정목사가 행한 불법행위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들이 행한 불법행위에 대한 문제 인식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바른믿음수호신학위원회’가 언제 창설됐고 한국에서 검증이 된 단체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에 대한 신학검증에 대해 이단성이 있다면 조사해서 가르쳐 주길 바란다. 만약 필자에게 어떤 이단성이 있다면 검토해서 수정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이해하는 이단연구단체의 원래 취지는 이단으로 매장해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부족하고 실수한 부분이 있다면 지도하여 바르게 목회 할 수 있도록 살리고 섬기는 곳이 이단연구단체의 원래 취지로 알고 있다. 그러데 바른믿음 수호신학위원회가 하려는 목적은 자칭 자신들을 음해한다고 생각하여 상대방을 보복하려고 하는 생명을 죽이는 문제 단체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바른믿음 측 주장: 

지금까지 첨예한 신학논쟁을 여러번 보았으나, 이렇게 건전하고 성경적인 미남 한인총회의 이름을 이용하면서 이단성있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처음본다. 또한 교단의 이름으로 매일 여차하면 고소, 법적책임, 담당 변호사 ... 등을 운운하면서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이전에 보지 못했다. 

 

이재위목사반론: 

필자는 처음부터 인격적인 모독은 삼가하고 신학적 토론을 주장했지만 바른믿음 측에서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신학적 토론 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비난, 무시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필자가 제기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누가 지저분하고 비 인격적인 행위를 했는지는 지금까지 토론을 본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바른믿음 측에서 인격모독, 명예훼손에 대한 행위를 안했다면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 할 이유도 없고 서로 복잡하게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른믿음 측 주장:

과연 누가 미남 한인총회의 명예를 훼손했는가? 정말 자기 교단의 이름에 먹칠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남침례 대책위(위원장 이재위 목사)와 반기열 총회장이다. 바로 이들이 미남 한인총회의 명예를 가장 심각하게 훼손한 주범들이다. 왜냐하면 불의하고 비성경인 방법으로 이단성있는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려고 교단의 이름을 부적법하게 이용하는 농단을 벌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에게 시정잡배들도 잘 하지 않는 협박을 미남 한인총회의 이름으로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위목사반론: 

교단 먹칠한 사람은 대책위가 아니고 정이철목사 쪽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그리고 정이철목사는 합동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현재는 합동교단 소속의 목사가 아닌것으로 알고 있다. 김성로목사가 성경적으로 이단성이 없다고 한기침, 남침례는 발표했다.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 한 목사에 대한 이단성이 있다면 아직 검증되지 않았을 때는 이단성이 있다거나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고 해야지 자기가 뭐라고 사악한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태도가 바른 목사의 태도인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시장잡배들도 잘 하지 않은 협박을 한다고 했는데 정이철목사 쪽에서 불법행위를 하고 이것에 대한 문제인식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판단을 하겠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누가 시장잡배인지는 법정에서 분별할 것이다. 결과가 궁금하셔도 조금만 기다려 주길 바란다.

 

바른믿음 측 주장: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저속한 방식으로 미남 한인총회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은 나이 어린 이재위 목사이다. 그는 미남 한인총회의 '이대위 위원장'(?) 등의 여러 모호한 직함들을 사용하면서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에게 다섯가지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 교단의 총회에 상정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내용 그 자체가 이재위 목사 자신을 이단으로 공표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미남 한인총회의 뜻있는 목사님들이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사람을 내세워서 교단에 수치를 끼치는 것인가?"라고 한탄하였다.

 

이재위목사반론: 

여기서 나이 얘기가  왜 나오는가? 바른믿음 측은 걸핏하면 신학적 토론에서 목사안수를 언제 받았는지? 나이 따지고 있는데 바른믿음 측에서 제기할 부분이 아니다. 참고로 미남침례교단 총 디렉터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다. 필자 보다 어린 목사지만 남침례교단 목사들은 그의 리더쉽과 권위를 존중한다. 그리고 필자가 형편없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제시하길 바란다. 본 총회장님을 비롯하여 대책위의 위원들은 침례교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며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학적으로 실력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며 최소한 그 분들은 필자를 형편없는 목사로 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교단에 수치를 끼치고 있다고 한탄한 목사들의 실명을 분명히 밝히기 바란다. 그런 주장을 하는 목사들이 자신 있다면 뒤에서 말하지 말고 떳떳하게 앞에서 반론하고  왜 필자가 형편없는 목사인지 얘기 해야 필자도 부족한 부분을 반성 할 것이 아닌가? 또 필자의 이단성을 지적하는데 무엇이 이단성이 있는지 가르쳐 주길 바란다.

 

바른믿음 측 주장:

이재위 위원장이 미남 한인총회의 이대위 위원장이라면 그에 맞는 신학적인 역량으로 교단의 위상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그 동안의 행적을 보면 이재위 목사에게서 신학적 무게감은 전혀 나타나지 못했다. 대신 여차하면 "법적책임을 물을 것이다", "법적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이런 소리를 교단의 이름이 들어가는 공고문이라는 것을 통하여 수 없이 남발하였다. 그래서 미남 한인총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정이철 목사를 상대할 깜량도 안되는 인물을 내세워서 미남 한인총회에 수치를 초래했다"며 부끄러워하였다.

 

이재위목사반론:

정이철목사의 신학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이철목사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검증해 본 결과 신학적 수준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자의적, 주관적 해석들 이라는 것을 지적했고 필자는 5개의 반박문을 통해 정이철목사의 신학과 자의적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 했지만 어떠한 신학적인 반론을 받지 못했다. 또 법적 책임을 물겠다는 것은 그 만큼 정이철목사가 법적으로 문제을 많이 야기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법정에서 어떤 불법을 행했는지는 밝혀 질 것이며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정이철목사를 상대할 깜량도 안되는 인물인지는 알아서 판단하기를 바라고 필자는 거기에 관심 없고 필자가 제기한 반론에 답변하기를 기대한다.

 

바른믿음 측 주장:

이재위 목사가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는 자기 사진에 대한 초상권 침해와 법적책임 협박도 참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이미 <기독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있는 자기 사진들 중 하나를 <바른믿음>에서 썼다고 설명했는데 (설령 자신에게 좀 언짢은 느낌이 들었을지라도) 자꾸 그것을 들먹이며 법적책임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 교단의 이대위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이런 지저분한 싸움을 벌이는 것 그 자체가 교단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이재위목사반론: 

초상권침훼는 어떤 동기로 올렸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의 목사 안수식 사진을 올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데 정이철목사가 필자의 안수식 사진을 올린 동기는 남침례 대책위원장이 2014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신참목사인 것을 강조하여 무시하기 위한 동기이며 필자의 사진만 게시되었다면 이해 하지만 필자의 아내와 침례교 목사님들 사진까지 게제하는 것은 불법행위이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제기된 내용이 이단성에 관한 내용이였고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들이었기 때문이다. 미 남침례교 정이철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이라는 왜곡된 기사를 통해 남침례교가 정이철목사를 표적삼아 긴급이대위를 결성했다는 왜곡된 주장과 함께 필자가 보낸 이메일을 편집하여 필자와 남침례가 무례한 교단으로 비춰지도록 왜곡 기사를 쓴 것이다. 필자는 두번의 개인적인 이메일을 통해 바른믿음 측에 사진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고 결국 법적으로 하겠다고 하닌까 그때서야 사진을 내리지 않았는가? 목사로써 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잘못 했다면 필자에게 개인적인 이메일을 통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인식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기 때문에 세상법정은 어떤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있는지 가르쳐 주기 위한 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신학토론 과정에서 정이철목사가 부활을 몰라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있다. 라는 주장을 필자가 실수로 ‘부활이 없어도’ 라고 주장했다고 필자를 왜곡,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온갖 비방을 해서 필자가 정이철목사께 공고문과  이메일을 통해 개인적으로 정중히 사과했다. 

그런데 부활이 없어도와 부활을 몰라도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인간의 구원에 있어 부활을 모르고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이며 십자가와 부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부활을 몰라도 성령을 통해서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반구속적 이단사상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에 대해 권위있는 신학적 근거와 논리로 답변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을 아직 까지 듣지 못했다.

 

바른믿음 측 주장:

이재위 목사가 미남 한인총회의 긴급이대위 또는 남침례 대책위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이단성있는 김성로 목사를 보호하고, 반대로 이단성있는 김성로 목사를 물리치려는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려는 사명(?)을 부여받은 '돌격장수'로 나셨다면, 마당히 그 위상에 어울리는 신학적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 신학논리는 전무하고, 기껏 자기 사진에 대한 ‘초상권 침해’, '교단에 대한 명예훼손', '임원들의 실명을 거론하는 명예훼손'... 이런 말이나 계속 들먹이면서 거액의 배상금을 운운하고 있으니, 이 보다는 더 큰 망신을 미남 한인총회에 끼치는 수치를 또 어디에서 볼 수가 있을까?

                    

이재위목사반론: 

다시 말하는데 김성로목사는 이단성이 없고 건강하게 목회하는 목회자로 한국침례교에서도 인정했고 대책위에서도 이단성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여전히 교단의 검증을 존중하지 않고 여전히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정이철목사는 교단에 대한 기본적 존중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정이철목사를 이단으로 몰려는 것이 아니라 정목사가 주장하는 신학적 주장이 이단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답변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설득력 있는 답변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가 제기한 5개의 반론글에 대해 아직도 답변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신학적으로 반론할 가치가 없다는 등에 대한 변명은 하지 말고 정목사 입장에서 필자의 주장이 신학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도 대책위에서 문제를 제기 했다면 성실히 답변하는 것이 바른 인격을 소유한 목회자의 기본 자세가 아닌가? 필자가 제기한 5개의 반론글에 대해 이제라도 답변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필자는 거액의 배상금에 대해 운운한 적이 없다. 필자가 배상금에 운운한 내용이 있는 증거 자료가 있다면 제시하길 바란다. 정목사의 특징이 상대방에 주장에 대해 왜곡 편집, 와전, 거짓 등이 주 특기인 것 같다. 그런 못된 버릇은 고치시길 정중히 권면드린다.

 

바른믿음 측 주장:

정이철목사 주장 배후에서 이 모든 일들을 꾸미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김한길 목사의 치졸함과 유치스러움에 대해서도 이제 사람들이 너무도 실망하고 있다. 미남 한인총회의 이름으로 <국민일보> 광고 페이지 두 면을 구입하여 이단성있는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고, 정이철 목사에 대해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의 이단시비와 협박문을 실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한 교단이 한 목회자를 법적으로 고소한다고, 그리고 전혀 신학적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내용으로 한 목회자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국민일보>의 거대한 광고지면을 두 면이나 사서 발표하였다. 이것 자체가 미남 한인총회의 수치이고, 공 교단의 이름을 도용하여 정이철 목사의 목회활동과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왜 자신들은 모를까? 자신들이 늘 좋아하는 것처럼, 정이철 목사와 예장 합동이 법적으로 대응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일까?

 

이재위목사반론: 

배후에 김00목사가 일을 꾸민다고 주장하는데 건강이 좋지 못하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정이철목사를 잡으려고 일을 꾸밀 이유도 없고 필자는 김한길목사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고 이번 사건을 통해 같은 대책위원으로 연락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목회하는 입장에서 김00목사의 하수인도 아니고 그 분의 말을 듣고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이철목사가 비 신학적이고 왜곡 편집을 통해 김성로목사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고 보지 못해서 신학적 토론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 정이철목사는 미남침례 한인총회가 국민일보에 김성로목사를 옹호하여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의 이단시비와 협박문을 실었다고 주장한다.

정목사는 남침례 성명서가 무엇이 말도 안되는 내용이고 이단시비이며 협박문인지 근거를 가지고 논박하길 바란다. 정목사의 글의 특징은 팩트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 글의 특징이다. 남침례 성명서가 어떤 내용에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이단시비를 했고 협박하고 있는지 설득력있는 반론을 하기 바란다.

만약 남침례 성명서가 정목사의 주장처럼 상대 측에 대한 협박과 비 신학적인 말도 안되는 내용이있다면 사과하고 수정하도록 하겠다. 정이철목사에게 정식으로 요청한다. 남침례 반박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반론하기를 바란다.  

남침례 성명서가 정이철 목사의 목회활동과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왜 자신들은 모를까? 라고 주장했는데 남침례 성명서는 어떤 왜곡 과장이 없이 팩트를 가지고 발표한 것이다. 만약 정이철목사에 대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지적해 주길 바란다. 언제든지 정중히 사과하고 수정해 줄 용의가 있다. 본 대책위가 발표한 정이철목사에 대한 내용은 정확한 사실과 증거를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제시할 수 있다. 정목사의 목회 활동과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 되었다면 본 대책위의 책임이 아니라 정목사가 잘못한 행위가 밝혀 진 것인데 왜 이것이 정목사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생각하는가?

본 대책위의 성명서가 명예훼손이라면 증거를 가지고 반론하길 바란다. 그리고 정이철목사의 착각처럼 예장합동이 어떤 근거로 대응할 지는 모르겠지만 예장합동이 정이철목사의 농단에 쉽게 빠져들 무지한 교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일보 광고는 남침례 대책위에서 발표한 것이 아니며 한마음교회나 한마음교회 성도들, 또는 김성로목사 개인이 발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침례 성명서를 교회나 단체에서 발표하고 싶다면 내용을 바꾸지 않는 조건으로 허용하고 있고 만약 정이철목사가 남침례 성명서를 발표하고 싶다면 본 대책위는 내용을 바꾸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할 것이다. 정이철목사에게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통해 성명서에 대한 내용은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더이상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참고로 약 일년동안 사악한 이단이라고 공격받은 한마음교회 입장에서 국민일보를 통해 성명서를 발표한 것에 대해 바른믿음 측에서 관여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 바른믿음 측에서 성명서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있다면  어디 신문사에 냈고 광고비가 얼마들었는지 신경쓸 사안이 아니고 남침례성명서 내용에 대한 신학적인 부분과 사실에 대한 왜곡이 있다면 이의를 언제든지 제기 하길 바란다.

 

바른믿음 측 주장:

신학논쟁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사소한 것으로 법적시비를 일으키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이단들의 특징이다. 바로 그런 특징이 미남 한인총회의 이름을 이용하여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 이단성을 감추고 반대로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을 한국 교회에 알린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려는 남침례 대책위 사람들에게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정말 미남 한인총회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사람들은 <국민일보> 전면 광고와 다른 여러 신문들을 통해 비성경적이고 거짖된 내용을 말하면서 이단성있는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고, 반대로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을 드러낸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를 공격한 반기열 총회장과 이재위 목사와 김한길 목사 등의 남침례 대책위 사람들이다.

 

이재위목사반론:

신학논쟁을 감당할 수 없어서 법적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이철목사는 자신이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문제 인식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의 윤리와 도덕 기준이 무엇인지 확인시켜 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부터 인격적인 모독을 하지 말고 신학적 토론을 하자고 제의 했지만 정이철목사는 필자의 목사 안수문제, 김성로목사에게 거액의 헌금을 받은 교단이 정이철목사를 이단으로 몰고 있다는 근거없는 교단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을 타 교단 목사들에게 이메일로 유포하고 한국에 저명한 신학자에게 얘기하여 그 신학자가 모 세미나에서 남침례 한인총회가 정이철목사를 이단으로 몰고 있다는 발언을 하고 그 발언에 대해 영상을 편집하여 유트브를 통해 유포한 단체가 정이철목사가 시무하는 앤아버반석교회라고 조사를 통해 밝혀 졌다. 그리고 교단 총회장 불법선거가 있었다는 근거없는 주장 등을 문제 삼아 교단의 명예를 훼손하고 필자의 설교를 편집하여 이단성이 있다는 주장과 함께 유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신학적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반론을  무시하고 공격하지 않았는가? 신학적인 토론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회개는 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모습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문제인식이 없는 부끄러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바른믿음 측 주장:

특히 반기열 목사는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생각하고 빨리 신앙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교단의 총회장이 되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들을 섬기기 위해 총회장이 되겠다고 나선 목회자가 하나님을 기만하고 교회들과 총회를 기만하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최악의 교단농단이다. 하나님과 교회들을 속이는 부정한 방법으로 총회장이 된 후에 총회 산하의 교회들 앞에서 떳떳하게 총회장 행세를 하면서 축하 영상메시지를 보내기도 하는 반기열 목사의 모습을 보았다.

 

이재위목사반론: 

반기열총회장님 입장에서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한 개교회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공격 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것을  무시한다면 총회장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개 교회와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총회장님의 결단과 태도에 필자는 존경을 표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총회장님의 신앙이 회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정이철목사와 그 측근들이 바른 신앙이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총회장이 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데 정확한 증거와 증인을 제시하길 바라며 만약 제시하지 못할 때는 남침례 한인총회 총회장님과 남침례 총회를 모욕하는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아직 정이철목사는 명예훼손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자의적인 생각과 근거없는 말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함부로 말하는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할 것이며 앞으로 이런 못된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한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도 협박이라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바른믿음 측 주장:

과연 누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미남 한인총회를 뒤에 숨어서 농단하고 아름다운 교단의 명예를 훼손하였는가?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고, 정이철 목사에게 법적책임을 묻겠다고 매일 떠들고 협박하는 남침례 대책위야 말로 지금 건전한 교단 예장 합동에 소속한 정이철 목사와 이창모 목사, 림헌원 목에게 협박하고 장래를 목회를 훼방하고, 목회자의 생명인 명예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를 저지르는 범법자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재위목사반론:

필자와 신학적 토론에서는 정이철목사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 이단성이 있다고 필자는 주장했지만 남침례 성명서에는 앞으로 더 신중하게 조사할 사안이라고 발표했다. 즉 남침례 성명서는  정이철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다. 성명서를 잘 정독하길 바란다. 그리고 법적문제는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다. 본인이 법적으로 떳떳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법정에서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면 기각 될 것이다. 정목사가 지금처럼 당당하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큰 걱정할 부분이 아니며 오히려 대책위에서 입장이 난처해 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있다면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고 만약 본인들의 실수와 문제가 분명하다면 어떻게 해결 해야 할지는 본인들이 잘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본 대책위는 정이철, 이창모, 림헌원목사를 협박과 장래 목회를 훼방했고 목회자의 생명인 명예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라고 주장하는데 남침례 성명서에 협박과 이유없이 명예를 훼손한 내용이 있다면 증거를 가지고 반론하기를 바란다. 

오히려 바른믿음측에서 주장한 것 처럼  목회자의 명예가 생명 같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이 침례교단에서도  이단성이 없고 건강한 교회이며 한마음교회를 직접적으로 깊이 연구한 신학박사들과 목회자들이 초대교회 신앙을 회복하는 교회라고 칭찬하고 또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 박형용박사께서도 세미나를 통해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칭찬까지 하시고 타 이단 연구단체에서도 이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도 약 일 년동안 김성로목사와 춘천한마음교회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남침례 대책위 이름으로 검증에 참여한 위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한 바른믿음 측에서  오히려 김성로목사와 대책위 임원들에게 명예를 훼손하고 목회를 방해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명예가 소중하듯 타인의 명예도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바른믿음 측 태도는 진리를 수호한다는 목적으로 목회자들로서 기본 기독교 윤리부재와 기본 상식을 벗어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철저히 자신들이 주인된 신앙의 모습임을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보게 된다.

다시 한번 바른믿음 측에 요청한다. 근거없는 주장이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에 대해서 정이철목사의 입장만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라고  앞으로 근거없는 소설쓰지 말고 남침례에서 발표한 성명서에 대한 신학적 문제나 사실 왜곡에 대한 내용이 혹시 있다면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논박하길 바란다. 언제든지 신학적 토론은 환영한다. 그리고 필자가 정이철목사가 주장한 내용에 대한 필자의 5개의 반론글에 대해 재 반론을 해 주길 간곡히 부탁 드린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3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반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신학적 토론은 정이철목사의 요구가 아니라 필자가 먼저 요구했던 것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2017년 1월 2일

이재위 목사 올림

이재위  ksbcameric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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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① 김성로 목사 조사보고서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총회장 반기열 목사)는 총회장 직속 긴급대책위를 두어 1년여 논란이 된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주장을 조사 검증했다. 다음은 대책위가 발표한 내용이다.



미주 남침례회, 춘천 김성로 목사 & 앤아버 정이철 목사에 대한 신학 검증 보고서
- 정이철 목사 신학검증에는 바른믿음측 림헌원 목사 이창모 목사 검증을 포함 -


Ⅰ. 검증의 동기와 이유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디트로이트 앤아버반석장로교회)는 약 일(1) 년간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1) 십자가를 폄훼하고 2) 하늘성소에서 두번 제사(이중제사)를 주장한다는 명목으로 '사악한 이단. '부활교 이단' 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남침례교단 목회자들과 성도들 가운데에도 김성로 목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미주 남침례교 총회장 반기열 목사는 교단 차원에서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할 필요성을 인지하여 총회장 직속 긴급대책위를 두어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주장에 대해 각각 공히 살펴보며 검증토록 하였습니다.

본 대책위는 정이철 목사의 주장과 김성로 목사의 양쪽 주장을 공히 살폈습니다. 김성로 목사에 대해서는 정이철 목사 측에서 주장한 약 70편의 글과 동영상들을 살폈고, 춘천한마음교회에서 발간한 모든 양육교재와 김성로 목사의 책, 설교, 동영상, 기독교방송 C-채널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 김성로 목사의 입장 발표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양쪽 자료를 근거로 하여 면밀한 객관적 조사를 하였기에,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는 이에 대한 검증 연구 결과를 밝힙니다.

II. 김성로 목사 검증의 세부사항

십자가 폄훼와 무시 문제: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를 폄훼하고 무시한다고 하는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의 주장에 대해서는 김성로 목사의 예전 부흥회설교와 최근 설교 (대전 늘사랑교회, 자운교회, 송촌장로교회 등등)들을 분석했습니다.

김성로 목사의 핵심주장은 십자가의 속죄의 원리보다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즉 역사적 부활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성자 하나님)이심을  확증하고, 부활로 확증된 믿음을 통해 십자가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쓸데없는 십자가', "우상처럼 십자가를 붙잡지 말라"는 표현을 바른믿음측 정이철 목사는 이를 오해하여 십자가를 폄훼하고 무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설교자의 전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 편집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김성로 목사가 실제로 십자가를 폄훼하고 무시했다면 부활복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한 600명의 목회자들이 김성로 목사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상식적인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성로 목사는 부활을 강조할 때 설교의 서두 부분에 자신이 절대 십자가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음도 확인했습니다. 김성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누가 죽은 십자가인가?'를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김성로 목사가 부활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부활을 통해 기독론관점으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으로 판단됩니다.

'피' 그리고 '십자가' 문제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사도행전 칼럼을 통해 십자가의 피와 부활의 관계를 통해, 왜 부활을 먼저 증거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김성로 목사의 견해:  '피'그리고 '십자가' 사건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피인가?' 와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는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며, 그 피 또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증하였을 때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피'(성자 하나님의 피) (행 20:28)인 것이다. 이렇게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예수의 보혈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와 보혈이 어떤 것인지가 재 조명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한 이유인 것이다."(김성로 목사 사도행전 칼럼에서 발췌)

김성로 목사의 설교 중에 십자가에 초점이 아닌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에 십자가와 부활을 이원화 시키고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본 대책위는 김성로 목사의 설교의 의도를 확인해 본 결과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 양면 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이지만, 기능론적 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의 인성과 속죄를 통한 공의와 사랑을 증거하는 반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모든 약속의 확증, 또 신자의 종말론적 부활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이원화가 아닌 기능론적 관점에서 부활을 설명하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순위가 아닌 변증학적 관점에서 전달의 순서를 강조하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성로 목사의 설교에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들었을때는 충분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앞으로 김성로 목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에 대해서는 신중히 말씀할 것을 조언하였고 김성로 목사는 겸허히 본 대책위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의 특성상 한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며, 김성로 목사께 드리는 권면은 먼저 청중들에게 설교자가 전달하려는 관점과 개념을 충분히 설명한 후에 본론을 제시한다면 언어 전달의 왜곡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김성로 목사는 부활이 강조된다고 해서 십자가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활을 통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성자 하나님)을 확증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활을 구원론적 관점이 아닌 기독론적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침례교 대책위는 김성로 목사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장은 표현에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복음적인 설교라고 판단됩니다. 결국 서로간의 가치기준 (Frame of reference)의 차이로 생겨난 커뮤니케이션 왜곡현상의 결과 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김성로 목사의 신학적 문제와 수정사항

하늘성소 이중제사 문제

바른믿음측은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의 속죄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활하여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이중제사'를 주장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자료들을 검토해보니 김성로 목사는 "이중제사"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중제사'(Double Sacrifice)라는 개념은 신학적 개념에서 찾아 볼 수 없고, 기독교  이단 역사속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속죄론적 관점에서 부활하셔서 지상에서처럼 동일하게 제사를 드렸다는 개념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중제사에 대한 개념을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본 대책위는 '이중제사'를 주장한 정이철 목사측에 이중제사의 신학적 개념을 먼저 정의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현재까지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책위의 견해는 정이철 목사가 김성로 목사의 하늘성소 문제를 꼬투리 잡아 창작한 개념이라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정이철 목사의 주장도 어느 부분은 바른 지적을 하였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바른믿음 측이 제기한 이중제사에 대한 김성로 목사의 입장은 십자가의 죽음과 하늘성소의 제사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니며,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며, 동일한 사건으로 '단번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막상 설교에서는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하여 하늘성소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함으로서 두(2) 번 제사를 말한 것처럼 오해를 줄 수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즉 동시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부활 후에 하늘성소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잘못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정이철 목사는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고, 정이철 목사가 어느 부분은 바르게 지적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번제사(히 9:28)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단연구전문단체인 기이협에서 질문을 제기하였고 김성로 목사는 잘못된 표현임을 시인하였고, 성경해석에서 시간적인 착각을 하였다고 인정하였습니다. 또 "부활 후에 하늘성소에 들어가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표현도 바른 신학적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김성로 목사의 입장을 확인해 본 결과 "김성로 목사는 기이협을 통해 속죄와 구속의 신학적인 개념을 혼동하여 생겨난 표현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였고, 2016년 4월 11일 이후 기독교이단대책협회(기이협)과 박형용 교수님의 제언을 받아들여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 로 수정한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신학적 잘못에 대하여 4번의 과정을 거쳐 인정하고 고쳤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 2015년 5월부터 부분적으로 수정하였고, 2) 2016년 1월 교재에서 수정하였고, 3) 2016년 4월에 이단연구단체인 기이협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그것을 인정하고 모든 교재와 책을 이미 수정하였음을 모두 확인하였고, 4) 2016년 10월 26일 춘천한마음교회 4차 답변서를 통해 기침 및 8교단 이대위원장들에게 보내는 김성로 목사의 신학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모든 증거자료는 침례신문사와 기이협 등등 여러 공식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결국 정이철 목사 측에서 주장하는 십자가 폄훼 발언은 김성로 목사의 투박한 표현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성로 목사의 전체적인 설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왜곡된 편집을 통한 주장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는 하늘성소에 들어가 속죄를 이루었다는 잘못된 신학적 표현은 겸손히 잘못을 인정하였고 수정하였기 때문에 본 대책위는 이단성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현재 정이철 목사와  김성로 목사의 상반된 신학적 주장

현재까지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와 김성로 목사의 신학적 견해의 가장 큰 차이는 정이철 목사는 인간의 구속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라고 주장하는 반면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의 구속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속은 성화론적 측면에서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는 입장으로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 양면처럼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기능론적관점에서는 분명히 성격이 다르며,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 정도가 아닌 기독교가 세워진 근간으로  중요한 핵심 교리라는 신학적 입장으로, 본 대책위도 김성로 목사 견해에 동의합니다.

추가적 견해

추가로 김성로 목사의 교회는 믿음을 강조할 때에 역사적 증거, 물증 등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로 생기는 것인데 역사성과 증거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이성주의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일부 교회에 믿음을 강조할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이성을 활용한 역사성과 증거에 대한 강조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보통 법정에서도 믿음은 증거와 물증이 확실할 때 생겨지는 것처럼 오히려 기독교가 확실한 역사성과 증거 위에 세워진 종교임을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너무 이성주의로 빠지는 것은 위험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와 말씀이 균형있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참고로 본 대책위가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김성로 목사는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매일 새벽예배를 두(2) 시간씩 드리는 것으로 제 삼자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춘천한마음교회 교육 자료들

춘천한마음교회가 부활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령을 무시하고 다른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본 대책위는 한마음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제자훈련 교재들을 확인했습니다. 한마음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제자훈련 책자 1권은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2권은 십자가에 대한 이중적 측면(죄사함과 옛사람의 죽음)으로 연합과 동행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4권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즉 기독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재 내용들을 보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입장들이 기록되고 있고 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린 문제, 복음에 있어서 십자가의 속죄와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문제, 특히 4권을 보면 삼위일체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로 하나님이 되었다고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증거로 인한 믿음뿐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믿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변증적 관점과 기독론 관점에서 강조하고 속죄와 구속의 완성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부활사건의 중요성과 십자가의 사랑, 죄사함, 성화의 삶, 기독론, 삼위일체, 성령론, 제자론, 교회론, 그리스도인의 사명등을 설명하는 책자들을 통해 기본적인 신학적 교리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한마음교회 신학의 특징적인 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구속사역을 이루셨다는 것을 중요한 핵심으로 생각하여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참고로 대책위에서 김성로 목사의 영상설교는 보통 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하는 부흥회 설교의 특징상 주일설교를 확인하지 않고는 김성로 목사의 전체적인 신학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본 대책위는 한마음교회 성도들이 새벽, 주일말씀을 듣고 기록한 18편의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말씀 간증문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간증문 내용들은 부활, 죄사함, 사명, 고난, 삼위일체, 십자가의 사랑, 전도자의 삶의 태도, 하나님과 동행, 죄와의 싸움, 기도, 성령의 사역등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확인되었고 자신의 삶속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가운데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하는 진솔한 고백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춘천한마음교회의  큰 특징중에 하나가 전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간증을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김성로 목사는 설교가 목회자의 일방적인 선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듣고 성도들이 무엇을 깨닫게 됐고, 그 말씀이 어떻게 삶에 적용됐는지를 기록하여 예배 시간에 나눔으로 성도의 영적 상태, 성장 과정, 영적 진보, 받은 말씀, 삶의 문제, 기도 제목, 영적 싸움 등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간증을 통해 목회자와 성도들, 성도와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으로 '소통'하여 하나되게 하는 효과적인 목양적 방법중에 하나라고 사료되며 한 주에 약 900편의 간증이 올라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본 대책위는 춘천한마음교회를 연구하면 할수록 평범한 교회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간증의 특징

기독교 방송 C-채널을 통해 약 680명의 간증은 마약중독자, 무당, 알콜중독자, 동성애자, 이단에 빠진 사람, 게임중독, 무신론자, 우울증환자 등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중독자들의 간증과 많은 신도들이 복음으로 변화된 간증 영상 50편 이상을 무작위로 선별해서 확인했습니다. 먼저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의 특징은 믿음에 대한 큰 확신과 기쁨이 있고 어두운 과거에서 변화되었다는 것, 또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동일한 내용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자신이 주인되어 살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변했고 최고의 삶의 목적이 자신의 일터에서 변화된 자신의 삶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출석하게 된 경위를 보면 변화된 친구, 직장동료, 형제, 가족의 모습을 보고 교회를 왔다고 하는 고백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한 자매님은 부활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자신의 동성애를 회개하고, 해방되었다는 눈물로 증거하는 간증영상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한마음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Lord)이며 하나님이라는 것과 특히 부활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됨으로 신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활교' 라는 오해도 받을 수 있다는 평가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단성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제자 삼고 전도하는 열정은 배울점이 많다고 분석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정이철 목사측에서 문제 삼는 용어들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측에서 김성로 목사가 비성경적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으로  1)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2) 하나님의 피, 3)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것, 4) 부활복음, 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표현, 6)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 7) 부활의 증인, 8) 요나의 표적, 9) 전능하신 분이 오셨다 가셨다, 10) 십자가 죽음에 머물게 하는 신앙, 11) 사도행전에서 서신서로 뛰어 넘었다는 표현, 이러한 문장들과 몇 가지 성경해석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반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기 때문에 충분한 설명이나 배경지식이 없이 들었을 때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의 칼럼, 한마음제자훈련시리즈, 반론 글을 통해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들은 수정하였고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일부 주장은 오히려 정이철 목사측에 신학적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 게시판에 올려진 남침례교 대책위의 연구자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성로 목사 검증에 대한 결론과 평가

본 남침례대책위는 김성로 목사가 부활을 설명하는 과정 속에 신학적 문제가 분명 있었지만 이단연구단체의 조언을 받아 인정하고 수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이철 목사가 주장하는 김성로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부정하였다, 혹은 "부활교 이단", "안식일교 같다"고 비방하는 내용들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검증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특히 '안식교의 조사심판'과 같다는 주장은 반론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 강조는 이단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침례교의 신앙은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 구원론의 본질입니다. '침례'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영향을 받은 타 교회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혹시나 부활메세지만이 최고라고 주장하거나 다른 교회와 연약한 성도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발언은 조심해야 할 것이며 이점은 김성로 목사께서 특별히 교육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면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강조했지만, '부활'을 강조하지 못한 한국의 영향력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고백처럼 김성로 목사를 통해 부활의 가치를 일깨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여러 교회에서 부활을 강조하게 되자, 성도들이 그 신앙에 변화와 성숙이 나타남으로서 바람직한 교회의 부흥으로 연결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한국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주고 있음을 타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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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② 정이철 목사 조사보고서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총회장 반기열 목사)는 총회장 직속 긴급대책위를 두어 1년여 논란이 된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주장을 조사 검증했다. 다음은 대책위가 발표한 내용이다.



미주 남침례회, 춘천 김성로 목사 & 앤아버 정이철 목사에 대한 신학 검증 보고서
- 정이철 목사 신학검증에는 바른믿음측 림헌원 목사 이창모 목사 검증을 포함 -


Ⅲ. 정이철 목사(림헌원 목사, 이창모 목사)에 대한 신학검증 및 세부사항

정이철 목사의 신학적 문제들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측에서 김성로 목사의 신학적 문제 제기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논증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이철 목사 측의 기독교 구원론에 있어서 신학적 오해와 문제가 있는 주장들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 부활을 몰라도 성령의 은혜로 십자가만 믿어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 2) 십자가 죽음만으로 구속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는 주장, 3)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라는 주장 4)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제8조 기독론을 훼손한 발언, 즉 예수님의 시체가 썪었다, 3일 동안 만큼은 부패했다는 주장, 5)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의 피의 완전한 속죄의 혜택을 받았다는 주장, 6) 부활의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재창조물로 주장, 7) 마귀도 하나님의종, 오바마도 하나님의종, 김정일도 하나님의종, 정이철도 하나님의종이라고 주장한 것, 8) 예수는 이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한마음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를 주인(Lord)으로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 9) 정이철 목사의 youtube 동영상 설교에 나타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성소에서 피를 뿌렸다"는 발언은 오히려 정이철 목사가 문제 제기한 이중제사를 주장하는 것으로 발견됩니다. 10) 부활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만한 증거가 아니라 때가 되면 성령의 은혜로 믿어지는 것이란 주장과 함께 요 4장, 요 20:29 절의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성경해석 등등은 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기 발견된 자료들은 결코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매도하기 위한 조사가 아님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 중에 실수로 한 발언인지, 신학의 관점이 다른 것인지, 바른믿음측 신학인지에 대한 반론을 성경신학, 조직신학, 권위있는 학술적 근거를 통해 변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후에 자세한 주장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공식적인 이메일을 통해 공개적으로 반론을 받고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른믿음측 정이철 목사의 비도덕적 문제와 대책

춘천 김성로 목사와 검증 관계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이단이란 용어 사용은 정통 교단의 총회에서 나온 결의가 있을 때에만 이단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성이란 용어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다고 판단될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규 정통 교단에서 이단이란 판정이 나오기 전에는 이단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지, 함부로 이단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믿음측 정이철 목사는 상대방을 향해 이단이란 용어와 인격적 비난을 남발하였습니다. 특히 명예와 신뢰를 중요시 하는 종교단체의 특성에 따라 심각한 명예훼손에 해당됩니다.                                                                                                    
아직 이단으로 규명되거나 확정되지도 않은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1) 사악한 이단, 2) 교묘한 이단, 3)  부활교 이단, 4) 김성로 목사의 부활구원론은 이단사상, 5)  김성로, 이00 '부활교' 이단들. 6) 김성로 목사의 부활교, 7)  김성로 부활교,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았으면, 8) 큰 영적 사기꾼 9) 김성로가 약속한 내용도 부활교 사상, 10) 담임목사 김성로 씨의 부활교 이단사상, 11) 십가가 부러뜨리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구원론 12) 김성로 목사와 몇몇 분을 부활교 이단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이철 목사는 함부로 이단이란 용어를 구사하고 상대방의 말을 과장하여 표현하였고 인격적인 욕설을 남발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이철 목사의 용어사용은 바르지 않습니다.

정이철 목사의 언어의 유희들

정이철 목사가 구사한 언어의 유희들로는 1)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큰 영적 사기꾼",  2) 신앙간증하는 이옥매 할머니를 가리켜 "영혼의 낚시꾼". 3) 십자가와 부활을 나누고 차등하는 김성로 집단, 4) 김성로가 전하는 것은 영혼 죽이는 '파멸의 복음', 5) 부활복음은 '다른복음', 6)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 대적자, 7) 김성로의 신부활론, 8)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김성로씨" 9) 한기침의 정회원인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신학적 근거없이 안식일교 같다고 한 것, 등등에 대한 이러한 정이철 목사의 언어의 유희는 아직 이단검증도 안된 상태에서 한 교회를 담임하는 김성로 목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상대방에 대한 오해로 인해 신뢰성을 잃게 하는 심각한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대해 본 남침례대책위는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림헌원목사, 이창모목사에게 이에 관련된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과 김성로담임목사, 대책위 관계자들, 그리고 기이협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명예훼손에 관련된 모든 내용에 대한 삭제를 요청합니다. 만약 설득력있는 사과문과 그에 따른 조치가 없을 시에는 바른믿음측에 심각한 문제인식의 부재로 판단하고, 본 대책위는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바른믿음측은 본 대책위의 요구가 불합리한 처사나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언론사와 목회자는 상대방의 신학적인 문제가 발견될 때는 언제든 비평할 수 있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 남침례대책위가 지적하는 것은 문제제기에 있어 반드시 합당한 표현을 사용해야 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남침례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인 요청이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 대해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표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

그것은 이것입니다. 정이철 목사의 억지 주장 "정이철 목사를 손 댈 수 없으므로 미국에 있는 남침례교 한인총회에서 정이철 목사를 손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한국 쪽에서 제의하여 "미 남침례교 정이철 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이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가 남침례교단에 없었습니다. 공히 살펴보기 위한 목적의 긴급대책위는 구성했으나 정이철 목사를 향한 긴급이대위 결성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이철 목사는 1) 한국의 누가? 2) 언제? 3) 남침례교단 누구에게? 4) 손 보라는 말을 하였는지를? 5) 사실에 근거하여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단성을 논함에 있어서 그런 억지 주장은 있어선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글을 본 독자들과 교계 관련자들은 남침례교단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이것은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종교단체에 대한 신뢰훼손에 관한 명백한 명예훼손(Defamation)입니다.

정이철 목사의 거짓 이메일 유포와 초상권침해, 이에 대한 조치

조사과정에서 정이철 목사는 "남침례교단이 김성로 목사에게 거액을 받고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조작하려고 했다는 허위사실을 다수의 목사들에게 이메일(email)로 유포함으로서" 남침례교단과 총회장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였고, 또한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목사는 본 대책위 위원장목사의 짧은 목회경력을 비판하며 '미 남침례교 정이철 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 이라는 왜곡된 기사제목과 위원장가족(아내)과 침례교목사들이 나오는 사진과 함께 게시함으로 "개인명예훼손과 초상권침해"를 하였습니다.(참고: 목사 안수받던날의사진)

무엇보다도 명예와 신뢰를 중요시 하는 종교단체와 직임(목사)의 특성을 무시한 점에 대해서 남침례대책위는 여러번의 공고문을 통해 충분히 사과와 입장표명할 시간적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목사는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문제인식과 기독교 윤리의식에 대한 부재로 인해 목회자로서 책임감 있는 입장표명의 자세가 없음을 확인한 바, 남침례교단안에 이런 사례의 법안이 있지 않은 이유로 신학적 토론과는 별도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미국과 한국 법정에 위임하여 윤리문제의 심각성과 책임소재를 규명하여 앞으로 교계 안에 이런 비슷한 사례들이 나오지 않도록 예방차원을 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바른믿음측은 남침례교단이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만들기 위해 김성로 목사로 부터 거액(big money)을 받았다는 설득력있는 증거자료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제기는 본 대책위 담당변호사와 법정(미국/한국)에 제기하기 바라며, 모든 조사과정은 객관적인 팩트(fact)를 근거로 투명성있게 공개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님들, 여러 목회자와 신학교수님들, 이단연구사역전문가님들!!  본 남침례대책위가 이런 무거운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감정과 불순한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을 떠나 상식적으로 이런 행위는 심각한 불법행위라는 것을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림헌원목사, 이창모목사 측에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며 앞으로 교계안에 기독교 윤리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심사숙고 끝에 내린 정말 가슴아픈 결정입니다. 앞으로  교회 공동체는 사랑과 공의와 신뢰, 그리고 마땅한 사회적 법적 책임도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김성로 목사는 2016년 11월 26일 한기침(한국기독교침례교단)에서 내린 결론과 동일하게 이단성이 없습니다. 십자가 무시나 폄훼가 없었고, 바른믿음측이 제기한 이중제사문제는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였지만, 기이협을 통해 이미 고쳤기 때문입니다. 부활강조는 십자가와 더불어 모든 교회에 필요한 것이며 더욱 강조하고 발전시켜야 할 귀중한 복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교회인 한마음침례교회와 미주 남침례교는 부활메시지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내용을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논쟁이나 주장을 함부로 하는 것을 삼가해 주시길 바라며, 미남침례총회가 내린 결정을 존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6년 미남침례총회가 추구하는 교단의 가치는 "성경적 신학을 기반으로 기독교 복음의 진리수호" 입니다. 앞으로도 남침례는 기독교 성경적 진리수호를 위해 앞장설 것을 약속 드립니다. 이번 검증을 위해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교계 성도님들, 목회자 여러분, 그리고 이단 연구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각 가정에 더욱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검증 발표문에 궁금증이나 이의가 있다면 자료들을 충분히 정독하신 후에 남침례 대책위 공식이메일(email)로 본인의 교회(기관), 소속, 성함, 직책을 밝혀 주시면 성실한 답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이의제기는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리고 모든 토론은 사정에 따라 공개될 수 있음도 알려 드립니다.

남침례 대책위 공식 이메일 주소: ksbcamerica@gmail.com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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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앤아버반석장로교회)의 이단적 주정, 이단성 12 가지,

글 쓰게 편하게 '목사'란 칭호는 생략합니다



정이철 목사의 이단적 주장, 성경에 위배된 주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정이철은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의 피의 완전한 속죄의 혜택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단적 주장임을 지적 당하자 정이철/이창모는 반론글에서 침례받으시는 예수님, 인간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속죄의 피를 드림에 비교하여 예수님이 속죄의 혜택을 받았다고 정당화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정이철/이창모의 궤변은 침례 받는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이다.

또한 죄있는 인간대제사장과 영원한 대제장이신 예수님의 차이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이다.

그리고 정이철/이창모의 말을 그대로 본다면 예수님도 하늘성소에서 피뿌림에 해당되기에, 성경의 단 한번 제사에 위배되는것이다. 한 번이 아닌 2번제사를 주장하는 정이철.이창모의 꼴이 된 것이다.  



2. 정이철은 "예수님의 시체가 썪었다,  부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서 성경말씀에 위배되었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도 위배되었다. 주석서 메튜헨리 주석에도 위배된 궤설을 주장하는 정이철/이창모 목사. 장로교 교단과 개혁주의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웨스트민스터신조를 중요시 여긴다. 이를 어긴 정이철/이창모 목사는 무엇인가?

또한 정이철/이창모의 이런 주장을 좋다고 하고선 Naver에 퍼나른 림헌원 목사는 무엇인가?!!


 

3. 정이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재창조물"이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정이철/이창모는 예수님을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 전락시켜 버렸다. 마치 여호와증인들(파수대 Watch Tower)처럼 예수님은 피조물이라고 한 꼴이 된 것이다. (히브리서 1장과 요한복음 1장 위배)



4. 정이철은 "마귀도 하나님의 종, 오바마도 하나님의 종, 김정일도 하나님의 종, 정이철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면 북한 김정일이가 나쁜짓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들인가? 사탄 마귀가 한 모든 나쁜일도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이 된다. 이는 마치 사탄의 악한 일을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는 변명 합리화를 시켜버린 정이철이다. 이 것 역시 이단 김기동 베레아들 처럼(최바울 포함) 하나님이 시켜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5. 정이철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십자가 죽음만을 믿으면 구속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도바울의 구원관은 로마서10:8-10절이다.  십자가 + 부활이다. 이 것도 모르는 정이철 목사이다.

평신도 한완상 (2) 장로는 교회에 부활이 없다고 하였고, 이어녕 장로 역시 교회에서 부활을 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면 환완상 장로, 이어령 장로들도 이단인가?!! 사도 바울도 이단인가? 부활을 강조했던 신약 사도행전은 외경인가? 1세기 부활을 외쳤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단인가??



6. 정이철은 대제사장(인간 대제사장)이 하늘성소에 가서 피를 뿌렸다고 주장한다.

이 것은 2번 피뿌림= 2번 제사 주장에 해당된다. 

또한 인간 대제사장이 어떻게 하늘성소에 간단 말인가? 이처럼 궤설을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다.




7. 정이철은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하늘성소에서 자신의 피를 뿌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정이철도 에수님의 2번 피뿌림을 주장한 것이 된다. 정이철은 이처럼 자기의 유툽 동영상 설교에서 주장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주장하면 자기는 갠찬고?, 김성로 목사가 실수한 것을 꼬투리 잡아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1년 내내 떠들고 에장합동과 예장합신에 김성로 목사를 조사하라는 상정안을 올린 것이다. 

흠.... 예장합동과 합신은 정이철/이창모/림헌원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8. 정이철은 "짐승의 수인 666을 베리칩으로 가르치며, 음모론을 가르치는 노우호목사의 교회에 가서는 세미나를 한다. 

개혁주의, 개혁신학, 바른믿음, 바른신앙을 외치는 정이철 목사가 성경에 위배된 것을 주장하는 노우호목사와 교류함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9. "울법=복음"이다고 주장하는 노우호 목사를 절대로 비판 안 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

왜 인가? 한국 노우호 목사의 교회에 가서 세미나를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부활의 복음으로 부흥한 김성로 목사를 시샘하여 비난과 비판만 일 삼는다. 거의 일년 동안.

또한 한국 유명한 목사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예: 이찬수 목사, 한경직 목사).

자기 생각과 다르면 시비를 걸면서 비난 한다. 자기의 들보는 생각지도 않고, 보지를 못 한다. 



10. 정이철은 거짓말을 잘 한다.

정이철이가 미주 목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성로목사의 교회에 2000명 참석자가 자신의 글로 인해 68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였다. 그런 거짓말을 이메일로 보낸 것이다.

즉 자기가 글을 잘 쓰기에 그렇고, 자기를 과시하고 김성로 목사를 음해하는 것이다.



11. 정이철은 진목연이 해체되지도 않았는데도, 해체되었다는 거짓말을 진목연 동역자들에게 하였다.

나중에 그 것이 문제가 되자, 자기가 차 운전중이라서 그런 말을 했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면 1명이 아닌 여러 진목연 목사에게 해체됬단 말을 하였는데, 그 때 마다 차 운전중이라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참으로 욱기는 정이철 목사. 이런 말을 정이철 목사가 진목연 대변인으로서 한국 개혁인터콥공청회에 다녀온 후에 하였단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때 있었던 "의혹"에 대해 더욱 의구심을 갖게 된다. 




12. 정이철은 김성로목사의 "사명"이란 동영상(youtube)을 완전 왜곡하여 김성로목사를 이단으로 몰아갔다.

그 동영상을 자세히 들어보면 김성로목사는 "종교개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개혁"이란 말은 하였다.

그런데 정이철 목사는 개혁이란 말을 종교개혁으로 둔갑시켜 글을 썻고, 김성로목사가 마치 종교개혁을

하려는 의도의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건 완적 왜곡 조작 허위인 것입니다. 

또한 그 동영상을 자세히 들어보면, 완전 정이철의 나름대로 글을 쓴 것임을 알게 된다. 김성로 목사가 말한 것과는 완전 다르게 하여, 나쁜 쪽으로 몰아간 것이다.  



결론:

이상 12가지를 볼 때에 정이철 목사에겐 이단성이 농후하다. 성경을 위배한 이단적 요소가 많다.

(정이철에 동조하는 이창모/ 림헌원 목사 포함 하여서 이다. )

더불어 정이철 목사는 사단/마귀/이단들의 특성처럼 거짓말도 잘 한다.

따라서 정이철 목사가 말한 "영혼의 낚시꾼"은 누구인가? 

춘천 이옥매 할머니와 김성로목사가 아니고, 바로 정이철 목사가 "영혼의 낚시꾼"인 것이다. 


김한길 목사

미 남침례한인총회 

논문: "베레아 신학 주장하는 인터콥 최바울 대표"(12월 2010년)


관련글 보기:

"정이철 목사의 이단적 주장에 대하여"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0

(이재위 목사, 아틀란타 뉴에덴침례교회) 


바른믿음 편집자인 장로교 정이철목사는 한국 침례교단에 소속되어 목회하는 김성로목사의 부활론에 대해 사악한 이단이며 종교 장사꾼이며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자라고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 침례교와 미남침례교단은 목회자 세미나에 김성로목사를 강사로 초청할 만큼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복음을 지지하고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이단 감별단체인 합신이대위평이협기이협에서도 김성로목사의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김성로목사의 부활복음을 지지하고 있으며 한마음침례교회에서 주최한 제 4회 부활복음 목회자 세미나에서 박형룡박사(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현 한국개혁주의연대 회장께서도 “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 너무 잘하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한국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의 속죄구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부활에 대해선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김성로목사님께서는 부활을 강조한다고 하는데 너무 너무 좋게 생각했다.”고 강의했다.

즉 본 교단과 이단 감별단체들과 신학박사들도 김성로목사에 대한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했고 춘천한마음교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필자도 김성로목사의 설교와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초대교회 사도들이 증거했던 복음하나로 승부하는 교회라는 것에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런데 유독 정이철목사는 김성로목사를 십자가를 가리는 사악한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다이에 대한 정이철목사의 주장이다.

김성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속죄를 성취하였고 부활로 확증하였다고 한다그의 말은 표면적으로 맞는 말 같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매우 위험한 사상이 흐르고 있음이 보인다우리는 부활이 없었으면 십자가의 속죄가 온전해지지 못했다는 그의 부활교 사상이 교묘하게 드리워졌음을 간파해야 한다만일 김성로씨가 정말 부활교 이단사상을 깨닫고 버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속죄가 완전하였고하나님이 100% 만족하게 받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부활이 십자가의 '속죄를 확증하였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속죄가 100% 완전하여 자동적으로 부활이 따라서 일어났다는 말과 유사해 보인다김성로 씨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이단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이런 모호한 표현 속에 김성로의 거짓된 부활교 사상이 뱀처럼 교묘하게 감추어졌있다는 것은 바로 그 다음의 문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반된 견해들이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 견해는 첫째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론에 대한 정이철목사의 커뮤니케이션의 왜곡현상으로 인한 ‘곡해임을 보게 된다커뮤니케이션 왜곡현상이란 전달자가 의도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수신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가치기준” (Frame of reference)의 차이로 인해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데 오는 현상을 말한다. 

둘째정이철목사의 커뮤니케이션 왜곡현상의 원인은 부활론구원론과 성령론의 대한  신학적 부재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반대 한다면 이것은 명백한 이단이며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자랑임에 틀림없다.

먼저 정이철목사는 김성로 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부활이 주는 의미를 편협적 시각에서 바라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정이철목사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는데 왜 부활을 강조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 정이철목사의 주장이다..

먼저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은 나사로 부활의 개념이 아닌 완전히 죽고 완전히 살아나 다시 죽지 않고 승천하셨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부활의 국어사전적 개념도 부활은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즉 부활이라는 개념안에 십자가에 죽으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로목사께서 주장하시는 부활의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활로 확증함으로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의 은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즉 부활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확증하고 부활로 확증된 믿음을 통해 십자가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즉 십자가의 속죄의 원리보다 먼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신약성경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했지만 정작 제자들은 죽음앞에 도망가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떠났던 것을 보게 된다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직접 표적이 된 부활(죽으시고 살아남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심으로 제자들이 무엇을 증거해야 할지가 분명해 진 것을 보게 된다.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서의 기록목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을 통해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복되도다”( 20:29)라고 말씀한다우리는 사도들 처럼 예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다그렇다면 보지 않고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성경은 마가복음 16장을 통해 본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16:14) 그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었다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믿을 수 있다고 증거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삼분의 일을 기록한 사도바울은 제자들 처럼 , 기적죽으심부활의 순서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재발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김성로목사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먼저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래서 십자가에 머무는 신앙에서 부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하지만 정이철목사는 ‘부활을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를 믿을 수 있는 증거에 관점이 아닌 종말론적 구원의 관점으로 보다보니 부활을 십자가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정이철목사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정이철목사는 김성로목사가 부활이 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객관적인 믿을 만한 증거로 주장하는데 있어 성령의 사역을 부활로 대치했다고 주장한다이런 주장은 정이철목사의 심각한 성령론의 신학적 부재라는 것을 보게 된다성령의 사역은 반드시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 성령이 하시는 구체적인 사역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5:32) 정확한 표현은 성령도 그 증인이다” 라는 표현이 정확하다사도들도 부활의 증인이지만 성령도 부활의 증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김성로목사는 부활의 증인들은 반드시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아무리 역사적 부활로 믿음을 확증했지만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생명걸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이철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속죄가 완전하였고하나님이 100% 만족하게 받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하며 십자가에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는데 왜 부활을 강조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가리고 있다는 정이철목사의 주장은 편협적 부활론과 구원론의 신학적 부재임을 나타낸다.

인간의 완전한 구원에 있어 반드시 수반 되어야 할 것이 있다그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조건이 합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구원은 이 두가지 조건이 충족될때 비로서 완전한 구속이라고 말씀 할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셨다.

하지만 인간들이 믿음으로 화합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다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식에게 집을 유산으로 주었는데 정작 집문서가 없다면  현재 살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면  그 집은 완전히 내 집이라고 객관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것과 같다아버지는 자식에게 반드시 집과 함께 집문서를 자식에게 주어야 완전한 상속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도 마찬가지이다구원은 반드시 믿음을 통해서만이 받을 수 있다정이철목사의 주장처럼 만약 기독교의 믿음이 부활의 증거 없이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속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믿었다고 가정했을 때 제자들이 생명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객관적으로 증거할 수 있겠는가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의 증거 없이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4)

즉 십자가는 인간의 속죄에 대한 완전한 선포라면 부활은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구속의 객관적인 완전한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인격적(지정의믿음위에 성령은 내주하여 생명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열정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10:1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죽으심과 살아나심)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 진 사실이 아니라 창세전 부터 계획하시고 약 1400년의 역사를 통해 예언하시고 완성하신 창조주가 직접 표적이 되어 이루신 지상 최고의 사건이다.

즉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의 완전한 구속의 조건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이루신 기묘자모사이신 영존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을 보여 주는 지상 최고의 사건임에 틀림없다이 두 가지가 선포될 때 완전한 구속이라고 정의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이철목사의 주장은 김성로목사의 부활론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의 왜곡현상으로 인한 곡해이며 편협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부활론성령론구원론은 결국 정목사의  신학적 부재로 인한 결과임을 보게 된다.

위대한 십자가의 신학자 사도바울은 부활의 증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이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행전 25:19)

“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 26:22-23)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4:25)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10:9)

유명한 부활 사건 연구가 게리 하버마스박사는 부활이야말로 시작부터 초대 교회사 선포한 중심 메시지였다고 말한다왜냐하면 부활이 증거될때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십자가가 자랑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재위 목사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날마다 클릭수가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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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른믿음 정이철목사의 김성로목사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다 (이재위 목사)



정이철목사님께서는 편협적인 시각을 버리시고 김성로목사께서 왜 부활을 강조하는지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변화가 왜 일어나는지 겸손한 자세로 배우기를 바랍니다확실한 믿음은 확실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천지 창조보다 더 큰  창조주가 표적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부활을 통해 입증하신 놀라운 사실 앞에 전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정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성도님들 중에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 있는 성도들의 간증이 있다면 보고 싶습니다.  미 남침례교는 김성로 목사에 대한 자료를 모두 검토한 결과 아무런 이단성이 없고 고쳐야 할 부분인 하늘성소이중제사에 대한 언어적 표현의 문제는 이미 시정했습니다그러므로 침례교단인 김성로 목사에 대해 타 교단 목사가 더이상 관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잘못된 열심은 최악을 낳는다는 것을 권면드리고 싶습니다.

애틀랜타 뉴에덴교회

  이재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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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목사 사진.jpg

(김한길 목사)




양국주 선교사의 “순교가 말처럼 쉽더냐?"를 읽고서

       

요즘 한국 교계는 참으로 어수선하다. 목사들의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가 터지더니만 동성애 문제가 불어졌고, 거기에 더하여 이단들을 사면해주겠다는 교단까지 나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할 지를 모를 지경이다. 물론 주(Lord)께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하겠지만 참으로 답답하고 어지럽다.

이러한 때에 열방을 섬기는 선교사 양국주 대표께서 발표한 글이 내 시선을 사로 잡았다. 왜냐하면 예장통합에서 추진하고 있는 이단사면 대상자(11) 가운데는 인터콥(최바울 대표)도 끼어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터콥과의 인연이 깊은 것 같다. 6년 전 인터콥이 어떤 단체인가를 살펴 볼때 최바울 형제는 인터콥에서 용퇴하라(2009.03.17.)는 양국주 선교사의 글이 눈에 띄었다. 그 글을 통해 인터콥의 정체성 가운데는 이단성 외에도 교회와의 문제와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몇일 전 양 선교사가 발표한 또 다른 글을 통해 인터콥에 대한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주님 보다도 아내를 더 사랑하는 목사 이야기

 

양 선교사의 글 서두에 S 목사 이야기가 나온다. 필자는 인터콥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 S 목사가 왜 인터콥에 개입했는가를 알수가 없었다. 목사이자 신학대학 학장인 그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 따라 인터콥 후원회장과 인터콥 지도위원장이 되었나? 인터콥의 신학사상이 베레아 김기동의 사상이란 것을 알고있다는데 왜 그럴까? 하나의 미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양 선교사의 글을 보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아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인터콥에 빠졌기에 할 수 없이 인터콥을 하게 되었고, 인터콥 책임자까지 되었다 니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이러면 되는 것일까? 더우기 인터콥은 베레아 이단사상인 데 말이다.

 

(Lord)께선 베레아 이단사상을 싫어하신다. 그러하기에 한국 7개 교단과 1개 기관은 인터콥에 대해 이단규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S목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를 사랑하기에 주님이 싫어하시는 인터콥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주님의 말씀이 생각 난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마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21장 그리고 창세기 22장은 보여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어떤 사본에는, '아버지나' 아래에 '아내나'가 있음)(10:29)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22:1-3, 12-17)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하는 아내가 인터콥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아내보다는 주님의 편에 설 것이다. 아내를 인터콥에서 구출해 낼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이 이단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식과 결별하는 한이 있을 지라도 주님의 편에 설 것이다, 이삭을 버리면서라도 복음의 편에 설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계의 문제가 무엇인가? 지도자(Leader) 문제이다. 지도자가 성경 말씀대로만 산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단사설이 아닌 주님의 편, 복음진리의 편에 과감히 서는 지도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해 본다.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거리를 배회하는 인터콥 선교방식

 

두번째로 언급된 것은 인터콥의 선교방식이었다. S목사의 아내가 중동지역에 단기선교를 가서 길거리 전도를 하고 있을때 현지 경찰들이 다가와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고 묻었다. 이때 너희 나라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한 칭찬을 해주기 위함이다이라는 거짓말을 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필자는 인터콥의 선교방식을 모른다. 그러나 Youtube를 보니 초기엔 많은 숫자가 중동거리를 걸어다님을 보았고 그러다가 말썽이 일고 문제가 되자 소수단위로 바뀐 것을 보았다. 즉 군대의 일(1)개 소대 단위처럼 작은 숫자 몇 명이 거리를 걸어가며 배회하는 것이다. 그 것이 인터콥의 선교라는 것이다. 이번에 양 선교사의 글을 보니 확실히 인터콥의 선교방식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이런 인터콥의 선교방식에 의문을 품는다. 왜냐하면 전도/선교는 그런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선교란 복음의 열정을 가진 한 사람이 주께 헌신되어 해외에 나가 거주하면서 복음을 모르는 한 사람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영접한 후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까지 꾸준히 키우며 섬기며 양성하는 것이 제자양성이다. 이것이 전도이고 선교이지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전도하여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안다. 그런데 낯설은 이역만리 중동 땅, 중아아시아를 걸어다니며 선교한단 것이 말이 되는가? 인터콥은 이런 것을 선교라고 하는 것 같다. 선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중동구경 관찰팀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것이 훨씬 더 정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순교의 기회를 상실한 인터콥 선교팀

 

인터콥의 슬로건 가운데 하나는 순교이다. 특히 중동이나 중앙아시아로 땅밟기 위해 나가는 팀은 순교를 외친다. 옆에서 구경하는 청년이나 사람들은 순교를 외치는 저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 양 선교사의 글을 보니 그들은 그렇게도 자랑하던 순교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길거리를 가다가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한 것 같다. 그랬더니 현지 경찰이 다가 와 뭘 하고 있는거냐?고 물었다. 복된 소식 복음을 전했다고 답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런 정직한 답변이 아닌 둘러쳐 거짓말을 한 것이다. 너희 나라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한 칭찬을 해주기 위함이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은 살렸는지 모르겠으나 순교의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저들이 그토록 원했던 순교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양국주 선교사는 순교가 말처럼 쉽더냐?"라고 지적한 것이었다.

 

크리스천은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십계명에 위배된다. 일전에 얼핏 들은 말인 데, 중동이나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땅밟기 선교팀에겐 위기 상황 시에 대처할 답변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행여라도 거짓말이 들어 있는 요령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령이 아닌 모든 것을 정직하게 말하고 답변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심을 가르친다면 좋겠다.

 

샘물교회 인질 사건에 대한 언급

 

양 선교사는 과거에 있었던 샘물교회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07년 아프간에서 샘물교회 사건이 터졌지만 한국교회가 선교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고 일하는지 아십니까? 겉으로 드러난 샘물교회 인질사건에는 마자리에 샤리프에서 일하는 인터콥 사역지를 방문하는 일과 인터콥과 연관된 아프간 사역자들의 인도로 빚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마자리 샤리프에서 일하는 인터콥 사역지를 방문하는 일과 인터콥과 연관된 아프간 사역자들의 인도로 빚어진 일이라고 함으로서 샘물교회 사건의 배후에는 인터콥이 깊이 관여되었단 것을 밝히고 있다.

 

샘물교회 인질사건이 발생했을 대에 초미의 관심은 인터콥의 개입여부였다. 그때 인터콥측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1) 손석희 아나운서와 인터콥 최바울 대표와의 대화에서 처음엔 인터콥 관여가 없었다고 하였으나 계속 추궁된 손석희 아나운서의 질문 앞에 개입되었음이 드러났다. (2) 샘물교회팀의 한 자매가 샘물교회의 교인이요 동시에 인터콥 멤버였음이 드러나 인터콥의 개입은 확실해졌고, (3) 교계중진들 조차도 인터콥 개입이 있었음을 인정하고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9/2007). (4) 이번에 밝힌 양 선교사의 글로 인해 인터콥의 개입은 확실해진 것 같다.(9/2016)   "사건에는 마자리에 샤리프에서 일하는 인터콥 사역지를 방문하는 일과 인터콥과 연관된 아프간 사역자들의 인도로 빚어진 일.

 

필자가 볼 때 인터콥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거짓말이다. 거짓말 습성을 좀 버렸으면 좋겠다. 거짓말의 반대는 정직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정직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오직 거룩하고 깨끗하게 생활하는 사람만이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남들의 눈에 띄게 겉으로만 신을 충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옳지 못하고 자신을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큰 거짓을 행하는 것이고 신에게 그릇 봉사하는 것이다.     

                                    

9 10 2016

 

In Christ

 

김한길 목사 (은퇴)

마 남침례 한인 총회

2

 

통합 채.jpg


 



통합교단 소속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교회 성도인 칸타빌레님이 예장통합에 告하는 글)


백주 대낮에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채영남이라는 총회장과 사면위, 이대위가 이단으로 규정된 몇몇 단체를 풀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을 호구로 알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습니까?

또한 복음을 알고 이단의 폐해를 안다면 어떻게 교활하게 이단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까? 이번일을 심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통합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게으르게 대처하고 복음에 충실하지 않은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함부로 이단을 해제하는것 아닙니까?

바보로 알고 장님으로 여기니까 이런 행동을 하는것 아닙니까?


우리들이 무엇때문에 크리스찬입니까, 우리의 정체성이 분명한 크리스찬이라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입니다.


지난번에는 한기총이 그러더니 이제는 통합측에 이런 자들이 들어와서 분열을 일으키는군요. 그리고는 그 책임을 적반하장으로 이단을 거절하는 건전한 성도들에게 화목을 깨는 악한자라고 몰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신앙을 관두세요. 그런게 신앙이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헛 죽으셨습니다.

이단들의 말을 듣고 이단해제하는 이런 사람들이 사면위라니 또 이런 사람들이 통합의 핵심층에 있다니! 그들의 말만 듣고 해제 할거면 연구는 왜 하냐고 묻고 싶습니다. 회개도 없이 수정도 없이 확인도 없이 이단해제를 한다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중을 논하고 윗자리에 있는데 소경의 인도를 받겠습니까?

12일 담화문은 뻔합니다. 다락방이나 박윤식을 영입했던 사람들의 논리를 답습할것입니다. 사과? 사과를 들먹이려면 해제를 취소해야하는데 그러지 않는것은 역풍을 최소화하려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이단문제가 아무렇게나 되어지는 문젭니까?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것이고 이단적요소가 해소 되었을 때 풀어야하는 일이지 화목이니 용서니 듣기좋은 말이나 행동으로 해제할 일이 아니라는것은 식견 있는 분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제 친구 험담을 좀 하겠습니다.

뉴욕에서 목회를 하는 송병기 목사는 제 대학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함께 누란지교를 나누던 친구사이입니다, 그가 어느 해부터인가 인터콥의 열성적인 후견인이다 못해 지금은 미주 지역 후원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은 단순한 후원을 떠나 순복음이나 다른 교단과 교계에 인터콥의 지경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인터콥의 정체성에 깊이 좌절하고 이를 드러내면서 그에게 인터콥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도 인터콥과의 결별을 생각하고 있었고 제게 정리하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습니다. 송목사의 부인이 남편보다 더 깊숙이 인터콥에 연결되어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몇 해가 지나더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선교하겠다는데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도와 줘야 하지 않겠나?”로 변했습니다. 선교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요 선교현장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거나 선교에 대해 막연한 감상을 가진 사람들의 통속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부인이 중동지역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길거리 전도를 하고 있는데 현지 경찰들이 다가와서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고 묻길래 너희 나라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한 칭찬을 해주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 저는 “아니 순교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그 좋은 기회를 놓치느냐?”고 했습니다. 바로 이 단체는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선교현장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슬로건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선교단체들과는 차별화되고 마치 택함 받은 선교단체인 것처럼 떠벌려서 선교 순혈주의에 빠진 단체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선교하다가 순교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역하겠다는데 조금도 나무랄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 순교도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제법 덩치가 커지고 먹고 살만해지다보니 현지에서 전도하다 걸리더라도 추방당하는 게 고작입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당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가 무장세력 탈레반에 의해 살해당했다.

2007년 아프간에서 샘물교회 사건이 터졌지만 한국교회가 선교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고 일하는지 아십니까? 겉으로 드러난 샘물교회 인질 사건에는 마자리에 샤리프에서 일하는 인터콥 사역지를 방문하는 일과 인터콥과 연관된 아프간 사역자들의 인도로 빚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샘물교회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 드러나지 않은 치부를 낱낱이 열거하면 한국 선교는 문을 걸어 잠거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2, 제3의 샘물교회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순교란 때로 하나님의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영적 축복이란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말로는 순교를 각오했다고 하면서 막상 반 선교적, 반 순교적 행태를 보이는 선교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데 문제의 실상이 있습니다.

2009년, 중동의 I 국가에서 선교사들이 비밀경찰에 붙들려 간일이 있었습니다. 소위 땅 밟고 기도한다는 공격적인 선교를 하는 단체 소속입니다. 책임자가 붙들려갔고 그 뒤를 이어 같은 선교단체의 멤버들이 줄줄이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풀려날 때에 당시 그 나라에서 동역하던 40여명의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되거나 비자 연장이 허락되지 않는 방식으로 십 수 년간에 걸쳐 이루어 놓았던 사역의 터전을 접고 그 나라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많은 선교사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 나라를 떠나야 했던 이유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다만 그 선교단체 멤버들이 풀려나는 과정에서 현지에 있던 다른 선교사들의 명단을 넘기는 선에서 테이블 밑에서 딜 했다는 루머가 돌았고 추방당한 이들 역시 강하게 어필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뒤, 이미 쫓겨났던 여자 선교사가 한국 법정에서 이름을 개명하고 여권도 새로 발급받아 다시 입국했습니다. 좋게는 그 나라를 향한 선교적 열정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비밀경찰은 이미 그녀의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고 몇 달간에 걸쳐 그가 만나던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모조리 파악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이 일망타진되었습니다. 이름까지 개명해 입국한 그녀를 악질적으로 보고 간첩죄를 적용하면서 고문하기 직전, 중간에서 힘을 쓴 대사관의 수고로 옥살이를 겨우 면했습니다. 정말 순교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결국 그녀가 이루고자 했을 위대한 순교를 현지 대사관이 나서서 방해한 것일까요?

그녀가 풀려나는 과정에서 예전처럼 아무런 딜은 없었을까요? 그나마 남아 있던 몇몇 선교사들이 뿌리 채 뽑히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샘물교회 사건은 우리 선교 역사에 귀중한 아픔과 교훈을 주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기독교 선교 방식에 대한 자성이 요구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무뢰배같은 인상마저 주었습니다.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었던 기독교가 어느새 걱정거리 집단, 말썽꾸러기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는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지만 분별없고 맹목적인 순교는 선교가 추구하는 인간 구원과는 동떨어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됩니다. 가난에 찌든 아프간에서 사는 새들을 보고 이웃나라 우즈벡 새들이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배고픈 아프간 새들은 어디서나 사고뭉치로 왕따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샘물교회 사건으로 수 천만 불에 해당하는 거금을 들여 인질을 빼온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아프간 사람들 눈에는 그야말로 낚시 밥처럼 헐렁한 나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화려한 말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지로 나간다고 할지라도 ‘선교는 순교다!!’라는 말조차 어줍잖게 내뱉으면 안 됩니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나가되 정직함이 뒤 따르지 않는 선교는 실로 두렵기조차 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께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죽음의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요”라며 단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기도를 정직한 기도의 모본으로 삼는 이유일 것입니다.

양국주 대표 /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  newsnjoy@newsnjoy.us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부정하는 정이철 목사의 이단  

 

필자는 일전에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7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이유는 정이철 목사가 조금이라도 성하고 목회에만 전념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자성이 아닌 오히려 궤변만 일삼은 반론이었습니다. 그가 붙인 제목도 가관이었습니다. 정이철을 이단으로 모는 김한길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걸작다운 제목이습니다. 필자는 그 것을 보고서 정이철 목사가 아직도 반성과 자숙은 커녕 오히려 기세 등등함을 보면서 한편으론 안타까웠습니다.  

 

지면이 쨟기에 모두 다룰 수는 없고, 그 가운데 하나인 예수님의 시신은 썩었다 고집하는 정이철 목사와 안창모 목사의 궤변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참고로 그 궤변적 반론은 안창모 목사와 정이철 목사 합작한 것입니다.  

 

필자는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주장 7가지 가운데 2번 항목에서 예수님의 시신은 썪지 않았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과 사도행전의 말씀들 썪지 않았다 말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0 ) 

 

그런데 정이철 목사와 안창모 목사는 반론글에서 아래와 같이 예수님의 시신은 썪었다로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안창모와 정이철의 반론글: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바로 그 앞의 말씀과 대등 접속사로 연결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는 말씀도 당연히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예언을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는 예수님의 영혼이 3일 동안 음부에 버려졌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그의 영혼을 음부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도 예수님의 죽은 시체가 무덤에 있는 동안 썩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몸을 썩음에 영원토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리셨다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행 2:27절의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바르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하심으로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셨지만, 언제까지 음부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삼 일 만에 음부에서 다시 살리시어 이끌어 내셨다. 그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서 삼 일 동안만큼 썩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을 언제까지 썩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완전한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셨다.”(안창모와 정이철 반론글) 

 

 저들의 반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하면서, 대등접속사를 운운하면서,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서 삼 일 동안 만큼 썩었으나”, 3일 동안 만큼은 썩었다고 계속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더니 8/20/2016년에 정이철 목사는 이승구 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으시나 우리와 동일한 피조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후 예수님의 몸이 땅의 무덤에서 잠시 부패의 과정을 겪고 계실 때 …”(정이철의 질문)  

 

정이철 목사는 처럼 여전히 예수님의 몸이 부패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주장합니다. 즉 썪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 신앙의 지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썪지 않았다, 어떤 부패의 과정도 없었다. 3일만큼 부패하지도 않았다 말씀합니다. 이 근거가 바로 시편 16:10, 사도행전2:27, 16:32-37 말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신에는 어떤 부패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편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절)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16:32-37절) 

 

이처럼 성경은 정이철과 안창모의 주장이 틀렸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창모와 정이철 목사는 성경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안된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는 데, 그 궤변 참으로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대로 보아야지 문자대로 보지 않는다?  말세인지라,   영지주의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와 모든 개혁 교회들의 지짐서인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수님의 시신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6/29/2016년 김효성 역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예수님의 시신은 시편의 말씀처럼 어떤 부패의 과정이나 썪었음이 없었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직분을 아주 기꺼이 맡으셨고;186)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율법 아래 처하셨으며187) 그것을 완전히 이루셨고;188) 그의 영혼으로 직접 지극히 슬픈 고통들과189) 그의 몸으로 지극히 아픈 고난들을 견디셨고;190)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죽으셨고;191) 묻히셨으며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으나 썩지는 않으셨다.192) 그는 제 삼일에 고난 받으신 그 동일한 몸으로193)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194) 또한 그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그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195) 중보의 일을 하시고;196) 세상 끝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19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4.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6/29/2016, 김효성 역)  

 

정이철목사와 안창모 목사는 자칭 개혁주의입니다. 바른믿음을 외치면서 개혁주의를 부르짖습니다. 개혁주의 다운 바른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 입니다. 자기들의 견해에 거슬리면 어김없는 비난과 비판을 일 삼습니다.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자칭 개혁주의 정이철과 안창모 목사가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반하는 이단사설을 외치니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근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니다. 개혁주의 장로교에서 가장 중요 여기는 신앙고백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조입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예수 시신인 몸이 결코 썩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볼 때에 정이철 목사 안창모 목사는 장로교도 아니고, 개혁주의 아닙니다. 개혁주의 장로 교단은 속히  이단사설을 주장하는 정이철과 안창모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정이철 목사와 이창모 목사는 개혁주의의 근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4.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6/29/2016, 김효성 역 훼손하였습니다.  

 

 

관련 기사:  

정이철의 이단성: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0  

 

김한길 목사(은퇴) 

 남침례 한인총회 

다섯번째 말씀:   “내가 목 마르다” (Jesus said I am thirsty) (요19:28)

오후 2시가 넘어서 다섯번째 하신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와 물을 쏟으셨기에 예수님은 목이 말랐습니다. 보통 목마름이 아닌 고통스런 목마름 이었습니다. 장장 5시간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고 몸안에 있는 피와 물을 쏟으셨기에 갈증이 심한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로마군병들은 Ozaca 생수가 아닌 신포도주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신포도주를 마시면 기갈이 심해서 더 빨리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말라 하시자 그들은 신포도주를 해융에 적셔 주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은 다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형수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겪는 육신의 목마름, 정신적 목마름, 영적 목마름의 고통까지 다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마름의 고통 뿐만 아니라 채찍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수모와 아픔 고통까지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예수님의 목마름과 고통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와 관련 있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53:3)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53:4)  또한 사도 베드로는 “저가 체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고통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에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의 상처와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이 나음을 얻습니다. 운명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 염세적인 생각이 다 사라집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멜깁슨“은 그 영화(Passionof Crist)를 만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1979년 영화 ‘매드맥스’가 대박이 터지면서 할리우드로 뛰어들었다. 그 시리즈와 또한 ‘리설 웨펀’마저 돈벼락을 쏟아놓던 80년대 말 나의 삶은 안으로 곪아갔다. 술, 마약, 포르노, 노름, 도박  등등 중독 가능한 모든 것에 탐닉했기에 정신적 파산을 맞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내 마음의 아픔과 슬픔과 상처와 죄의식과 고통을 어느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91년 나는 구원의 길을 찿기로 결심했다. 부시 대통령이 성경공부를 통해 변화된 것을 보고 나도 성경공부를 통해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성경을 배우면서 십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의 모든 마음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슬픔과 죄의식이 다 사라지고 치유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좋은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기 위해 예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멜깁슨처럼 곪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정신적인 파신을 당한 분이 계십니까?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십자가에 여러분을 대신하여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멜깁슨처럼 새로운 삶이 전개될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한없는 생수를 공급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사람들은 갈증을 더 하게 하는 신포도주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갈증도 해결해주고 마음에 기쁨을 영원히 누리는 생수를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살이에 시달려 살맛을 잃고 살아가던 수가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7,38)

이 말씀에 대한 증인은 수가성 여인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구세주  영접하고 자신의 살아오면서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고 나니까, 예수님께서 한량없는 기쁨인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동네사람들을 피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기뻐하면서. 사람들을 찿아가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는 000자매입니다. 000자매님은 수가성 여인처럼 인생 살 맛을 잃었고, 내면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 오스틴에서 00자매의  전도를 받아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선 그의 내면에 한없는 생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매주 목마름 없는 샘터에 실리는 “하나님께 띄우는 나의 편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000자매님이 자신의 간증인 제1권의 책을 펴내면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예수 믿었더니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이런 기쁨도 주시는구나!”

그리고 여러분이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대학부 수련회에서 어떤 기쁨을 얻으셨나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기쁨이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날마다 충만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피곤하게 보일지라도 저의 내면엔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사업을 하며 젊은 재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이 아닌, 그때 누려보지 못했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기쁨, 주께서 주시는 생수의 기쁨을 누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을 찿아가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찿아가도 그들이 주는 것은 신포도주인 Wine이나 맥주, 위스키, 쏘주입니다. 부어라 마셔라 밤새도록 마시면서 목마름을 해결해도 그 다음날에 뒷골만 아프고 갈증만 더하고 빨리 죽게 되어있습니다. 간장이 나빠지고 황달이 생겨 온 집안에 기쁨이 아닌 슬픔만 주게 되어있습니다. 세상 친구 찿아가 빨리 죽는 신포도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래 살고, 기쁨도 누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주님이 주시는 생수, 영생수를 마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깨달아야 될 것은 요한복음19: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이 그 정신없는 경황 중에도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려고 어떻게 “내가 목마르다”고 하실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완전히 미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리 심한 고통과 아픔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아주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설의 말이 진리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오히려 인생을 좀 더 의미있고, 보람 차고, 활력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한국 농촌교회를 시무하던 아주 젊은 정00 목사님이 불의의 사고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38세된 이00 사모는 그렇치 않아도 생활이 어려웠는데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편의 장기를 받은 분들이 건강하게 살아주는 게 남편의 뜻을 이어주는 것이며, 당장 교회는 정리해야겠지만 끝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꿋꿋이 일어서는 그 사모님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일어선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전력투구 한다면, 하나님께선 여러분에게 놀라운 영적 힘과 육적 힘을 공급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하는 게 정상이다"

축도, 하나님의 복 선포에 관하여

 

오늘날 개신교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에는 순서와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과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올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의 내용과 순서를 표기한 “주보”가 필요한 데, 이 주보의 순서와 내용은 일개 개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가 그냥 만든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인 예배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올려 드릴 수 있는가?”를 고심하며,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모로 심사숙고 하여 만든 것”입니다.

즉 예배학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보를 사용함은 오늘날 모든 교회의 예배 예전에 하나의 지침과  표준(standard)이 되어온 것으로서, 모든 교회의 하나의 전통이 되어온 것입니다. 이런 전통을 따라 올려 드리는 예배를 가리켜 소위 “Traditional  Worship 혹은 Classic Worship”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배의 순서를 기재한 주보에는 언제나 1) 오르간 전주 2) 예배의 부름 3) 기원(Invocation) 4) 찬양과 경배의 찬송 5) 고백의 기도 6)영광송 7) 목회기도(pastoral prayer, or prayer of intercession) 8) 말씀 봉독 9) 성가대의 찬양 10) 설교 전 기도 11) 설교(preaching), 12) 감사와 응답의 찬송 12) 봉헌 13) 봉헌 기도 14) Benediction (축도,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선포) …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배학 개론)

여기서 위에 열거한 예배의 내용인 1) 부터 14) 까지의 모든 것을 다(all) 다룰 수는 없습니다. “Benediction, 축도”에 대해서만 다룬다면 이에 대한 저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참고로 혹시 저의 부족함이 있다면 양해와 지적을 바랍니다.

축도(Benediction)란 무엇인가?

주보 마지막 순서인 축도(Benediction)는 예배를 집례한 목회자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담임목사의 염원과 바램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가 담임목사의 바램 보다도 더 우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배에 초청하였기에, 이제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차츰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복의 선포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 뿐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일군, 심부름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Benediction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의 선포” 혹은 “복의 선언”이지, 축복을 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 원합니다”가 아닌 “... 있을 지어다” 입니다. 

“… 있을 지어다”가 맞습니다.

주보에 Benediction을 “축도(祝禱)”라고 표기하였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축도(祝禱)”를 한자어 뜻대로 보면 “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Benediction이란 순서를 넣은 예배학자들의 정신과 그 의도를 볼 때, 축도가 아닌 복이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복의 선포”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언”이 맞습니다. 따라서 “축도”란 단어를 쓰지 말고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포”등으로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혹은 여기에 맞는 적합한 용어로 대체해야만 할 것입니다.

 

축도의 유래

이러한 “하나님의 복의 선포, 하나님의 복의 선언”인 Benediction은 성경에 기인합니다.

주보를 만든 예배신학자들은 Benediction의 그 기원을 민수기 6:22-27와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 찾았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다른 서신에서도 찾았습니다.

(참고: 롬 15:13절. 히13:20,21,25절. 유다서 24절. 벧전 5:14절. 요한삼서15절)

구약 성경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아론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시기를 기도가 아닌 “복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는 주체가 아론이 아닌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7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6:22-27절에는 아론 제사장이 복의 선포를 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수기 6:22-2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의 선포를 정확히 이해한 사도 바울은 성 삼위 하나님의 기능을 구약시대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였기에, 성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를 고후13:13절에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참고 문헌: 예배학 개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처럼 아론 제사장과 사도 바울은 “원하노라” 혹은 “있을지어다”는 말로서 “복의 선포(Benediction)”를 했던 것입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며, 담임목사의 위임/허락을 받은 부교역자, 전도사 혹은 장로 집사 평신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1) 믿음이 좋고 2) 성령이 충만하고 3) 주의 일에 헌신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

민수기 6:22-27절을 볼 때,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 선포, 복의 선언)의 창시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에 아론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그대로 순종하여 “원하노라”는 하나님의 복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론 제사장의 복의 선포의 개념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사도 바울 역시 “있을지어다”고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Benediction 이란 “축원 드리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지어다” 혹은 “원하노라”가 맞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 지어다”인 복의 선포/선언이 맞습니다.

Benediction을 할 때, 목사님들이 사도 바울의 선포인 고후13:13절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고후13:13절의 말씀 보다 더 좋은 “복의 선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고후13:13절 말씀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능히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고후 13:13절에는 복을 주시는 주체인 성 삼위 하나님이 들어있고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을 것을 선포하는 강력한 Powerful 메시지  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학 시간에 어느 교수께선 아론 제사장의 선포인 민수기 말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Benediction(축도)가 담임목사의 마지막 폐회인사이기도 하고, 성도들 가정에 복이 있기를 바라는 담임목사의 축도(빌어주는 기도)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Benediction에는 목회자가 아닌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는 더 놀라운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절)  

주보에는 하나님과 성도의 반응이 계속 교차된다

사실, 예배(Worship)는 우리가 올려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부르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예배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보를 만든 신학자들은 주보를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 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가 교차되어 계속 반복되는 모습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낭독, 여기에 대한 성도의 찬양이나 회개기도 등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주의 종이 대신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가 응답하여 예배를 올려 드렸다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무엇인가를 주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부르심에 응답한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선 Benediction을 통해, Benediction을 감당하는 당신의 일꾼(종)인 목회자를 통해, 당신의 복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바로 Benediction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 선언)을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요, 매개체이며,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심부름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도하는 자의 구비 조건

Benediction을 하는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목회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도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마치 자기가 복을 주는 것처럼 하면, Benediction의 정신에 어긋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목사가 들어 앉는 교만과 우를 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배학 책은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목회 현장을 보면 많은 목사들이 복을 선언하고 빌어주는 행위를 상품화 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마저 탈선하는 사례를 본다. 그러나 곧 초라한 인간의 정체는 밝혀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마는 것을 우리는 엄숙히 기억해야 한다.”(예배학 개론)

또 이렇게도 지적합니다. “목사는 여기 저기에서 축도를 남발하는 습관적 태도를 삼가하고, 정중한 Benediction으로서 그 진지성을 지속해야 한다.”(예배학개론)

축도는 예배를 인도한 목회자와 위임 받은 다른 사역자도 가능하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탁 받은 사람들, 그것도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바쳐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는 종들에 의해서만 선포 되어져야 한다.” 또한 “Benediction 을 선언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제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 받고,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목사들”이라고 규정합니다.(예배학개론)

물론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님도 Benediction을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반드시 담임목사의 허락과 승락, 그리고 위임이 있을 때에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님이 출장으로 교회를 비울 때,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이 담임목사를 대신하여 예배를 인도하였을 경우입니다. 이 때 담임목사의 승락/위임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만약 담임목사님의 승락이 없었다면 주기도문이나 기도로 대체해도 될 것입니다.

축도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것

아마도 예배학자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그 근거를 레위기 9:22절에서 찾았을 것입니다.(성경대백과사전)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레위기 9:22)  

그러므로 축도를 행하는 목회자는 아론 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당당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분은 축도를 겸손히 한다고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 “원하옵나이다 혹은 축원합니다”로 마치는 분이 있는 데, 축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르기에 오히려 아론처럼 당당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학개론은 축도(Benediction) 할 때 조심할 2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여 축복하소서”…. 등의 표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 높은 신에게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어달라는 뜻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인식을 계속하면서 거기에 맞는 어휘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Benediction의 끝맺음을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나이다”’고 함은 “하나님이 주실 복을 선언하지 않은 기도이기 때문에 목사는 여기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복을 달라고 호소하는 일반적 기도와 복을 선언하는 목사의 benediction과는 혼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예배학 개론)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Benediction은 단순한 기도라기 보다 하나님이 내려주실 것을 선언하는 Pronounce 행위라는 것이다. (예배학개론)

“축도 (Benediction)의 근본 취지는 결코 오늘의 육적인 삶에 풍요한 물질적 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Benediction 의 참 목적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세상에 나아가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생활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명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한 복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요즈음의 많은 교회들은 “오늘의 위탁(charge)”이라는 순서를 마련하여 새로운 사명의 부여를 강조한 후에 Benediction을 하는 예가 많이 있다”(예배학개론)  

마치면서

따라서 “축도권”이란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축도권”이란 말은 사이비 혹은 무지한 사람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만든 잘못된 용어입니다. 축복권도 마찬가지 입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며, 담임목사의 위임/허락을 받은 부교역자, 전도사 혹은 장로 집사 평신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1) 믿음이 좋고 2) 성령이 충만하고 3) 주의 일에 헌신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축도”란 용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에 적합한 용어를 찾아야만 할 것으로 사료 됩니다. “축도 즉 빌어주는 기도””라고 하였기에 오해와 착각이 많습니다.

예배에 부른 이는 하나님이시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기에, 더불어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바램이 담임목사에게 있기에, 담임목사가 축도(Benediction)를 하는 것이 타당하며, 담임목사의 허락이나 위임을 받은 다른 사역자도 능히 축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담임목사는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서적: 예배학개론(정장복 저. Page 150-152, 1997), 성경대백과사전(정인찬 편)  

김한길 목사 / 미 남침례 한인 총회, 세계 한인 기독교 이단대책 연합회 위원

김한길  josephk999@gmail.com

십자가상의 칠언: 네번째 말씀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못박히신 지 5시간이 지난 오후 2시쯤, 네번째 하신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아람어인 ”라마 사박다니“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 홀로 처한 고독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심한 절망감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아버지여,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반문하며 절규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온 세상이 당신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이신 하나님만큼은 버리지 않으실 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마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하며 반문했습니다.
그러한 반문 앞에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정오 12시부터 갑자기 온 세상이 캄캄해졌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순간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볼 때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버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왜 버리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찍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준비했던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요1장) 이 세상 온 인류의 죄를 예수님이 홀로 다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의 대가를 치룸으로서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죄사함 받도록 하는 하나의 희생양이 될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온 인류를 대신한 죄인이기에 죄인입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인이기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그대로 당하도록 방치했습니다. 그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도록 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맛보도록 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의 절규를 듣고서 그대로 방치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어찌 아들 예수의 절규 앞에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계획했던 인간구원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그 아픔을 참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그대로 방치해 두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처절한 고통과 죽음과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버려둠 속에는 독생자 예수를 희생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이 들어있습니다.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열망과 동시에 아픔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그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멜깁슨”은 그것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영화 속에 하나님의 눈물 한방울로 그것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철저한 공의와 철저한 사랑을 함께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많지만 죄에 대해선 잔인하고 가혹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루도록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도 많다”고 했습니다.(시40:12)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한 인간이 평생에 지은 죄는 자신의 머리털 만큼 많은 20만개는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대머리인 사람은 죄가 없다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양심에 물어보면 죄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요, 미국의 영적각성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인간을 가리켜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Angry God”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은 후에 만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눅12:5)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죄가 없다면 모를까 혹시 하나라도 있다면 죄에 대해 준엄하게 보응하시는 “Angry God”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그토록 처절하게 죽게 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계획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지옥은 빼놓고라도 “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님이 맞으셨던 그 많은 매와 회초리와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형을 우리 각자가 받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찿아온 절망 앞에 갖는 하나의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나를 버리셨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만드셨고, 왜 이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왜 나를 버려두시는가”입니다.

그럴 때 저는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처럼 팍팍 대답을 해주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고, 정말 살아계신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왜 이렇게 하셨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상황을 다 지켜보고 계셨고,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십자가 사건을 통해 당신의 원대한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당신의 보좌 우편으로 올리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천하만민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절규와 신음소리와 고통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당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장 하나님의 그 뜻과 계획을 알기엔 힘이 들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침묵 속엔 우리를 향한 어떤 계획과 뜻이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언젠간 그것들을 아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독생자를 버려서라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자녀일찐데 어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대로 버려두시겠습니까!

그래서 찬송가 작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이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얻노라”

제가 그랬습니다. 아내 잃고, 어머님 마저 3개월 후에 잃고,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 때, 밤마다 저는 하나님께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의 모든 걸 지켜보셨고, 제가 알게 모르게 택사스로 인도하고 계셨고, 신학교에 입학시키셨고, 마침내는 천사도 흠모하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아내도 주셨고, 주님의 이슬 같은 청년들을 키우는 교회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약국하면서 살 때 보다도 훨씬 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제가 신학교 갔다고 해서 여러분도 신학교 가야 되는가 부다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 맡는 가장 최선의 길, The Best Way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직 복음으로 동성애 이길 수 있다(김성로목사 편)


아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한국 춘천 한마음 교회(김성로 목사)의 이야기 입니다. 1) 먼저 김성로 목사의 동성애에 대한 관점을 올렸고, 2) 그 다음에는 실제로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례들을 올렸습니다. 그럼으로서 부활의 복음으로 한국/미국에 닥친 동성애 문제를 극복/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석)
 
1. 김성로 목사의 메시지: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믿음 중의 하나는 “동성애는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는 그 타고난 성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도 동성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의 선천성’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이나 세계관을 과학으로 포장하면 자세한 내용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대중에게도 쉽게 각인되고, 한번 각인된 생각을 교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의 선천성을 입증하는 ‘동성애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연구는 이미 오래 전에 반박되었지만, 사람들의 신념은 아직도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어떤 이에게는 자유를 줄지 몰라도 어떤 이에게는 커다란 절망을 줍니다. 다음은 동성애로 고민하다 우리 교회를 찾게 된 한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재미동포로서 미국 오리건 주에서 3년 연속 최고 골프선수로 선정될 정도로 유능한 골프선수였던 이 자매는 동성애로 인한 고민을 가지고 우리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경기에 나가면 좋아하는 여자 생각에 빠져 집중력을 잃고 결국, 우울증, 강박증으로 정신과 진단까지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합에서 만난 여자와 동성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갈등하던 어느 날, 어떤 과학자가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나는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예배 중에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너무 확실해지면서, 유전자로 인해 동성애자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벽하게 만드셨다는 강한 확신이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동성애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드디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자매와 같이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선천적인 동성애자로 몰아갈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동성애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과 세계관일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동성애 싸움은 생각싸움입니다. 갑자기 여자가 여자를 향해 성적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유전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 생각의 근원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먼저 생각을 넣어주고(요13:2) 나중엔 그 몸을 점령해 버립니다.(요13:27) 그래서 하나님은 잠언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생각과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주인되어 제멋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성애 뿐만 아니라, 소아성애, 다부다처, 근친상간, 동물과의 성교 등등. 그보다 더욱 악한 생각들에 대한 미혹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의 열쇠는 복음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부활이란 놀라운 증거를 주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순간, 그 어떤 생각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되어 살던 삶을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란 사실을 고백하고 모셔 들이는, 이 단순한 복음만으로 동성애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우리의 자녀들을 분명하게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김성로 목사 춘천한마음교회 / 한국교회 동성애대책위원회 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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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활 복음"으로 변화된 간증들, 그 실제 사례 보기  

[ 한마음 간증시리즈 ] 선우정 자매의 자녀 '열정양육' 수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79712

우정이 아닌 애정이었던 동성애의 쾌락에 빠져 -오혜진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34053

[ 한마음 간증시리즈 ] 이상미 자매 TV중독 극복 신앙수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57344

소문난 효자 교장선생님… 제사와 고사도 폐지해 -정연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34149

장애도 춤추게 하는 하늘 언어의 신비로운 능력 -조화영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34132

이 외에 여러 간증 보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

"예장통합 이단 해제 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

미주교계 16개 단체, '이단 해제' 철회 촉구 1차 성명서 발표
 
송금관 기자    기사입력  2016/05/25 [08:12]

지난 5월 중순 한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이하 예장통합)가 이단사이비와 관련한 11개 단체에 대해 자칫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사면신청’과 관련한 기사가 나간 후 한국 교계는 물론 미주의 한인교계도 건전한 기성교회들과 성도들이 겪을 혼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와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을 비롯한 미주 지역의 16개 기독교 단체들이 ‘예장통합의 이단 해제 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번 예장통합의 이단 해체 시도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미주기독교이단대책연구회 회장 한선희 목사는 “통합 측에서 이단 및 이단옹호언론 등을 사면시키게 되면 교계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은 자명한바 이에 대해 세이연과 이단사역단체 및 각 지역교협이나 목사회 등에서 연계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다”며, “시간적 여유가 없어 더 많은 교협이나 목사회 등에서 조인하지 못했으나 사안이 시급한지라 추후 동참하기로 하고 1차 성명서를 발표한다. 각 교회나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흔들림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밝혔다. 
 
한편 예장통합은 지난 1월 100회 총회를 맞아 특별사면 공고를 내고, 그 이후 이단사이비 및 이단언론 등 11개 단체 등이 교단 측에 사면신청을 해왔다. ‘사면’은 ‘죄를 용서해 형벌을 면제 한다’는 의미로, 교단 총회 100회기에 한 해 한시적으로 벌을 면제받을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로 진행 중이다. 사면의 신청 대상자는 독노회가 시작된 1907년 9월 17일부터 지난해 통합 측 제100회 총회 폐회 시까지 각 치리회에서 책벌(제명)을 받은 자와 교단에서 이단사이비로 규정된 자들이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예장통합의 이단 해제 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총회장 채영남 목사) 특별사면위원회(위원장 김규 목사)가 무려 11개나 되는 이단 단체(김풍일, 다락방(류광수), 레마선교회(이명범), 성락교회(김기동), 안식교, 인터콥(최바울), 지방교회, 큰믿음교회(변승우), 평강제일교회(박윤식)) 및 이단 옹호언론(로앤처치, 교회연합신문)에 대해 올해 9월에 개최될 예장통합 101회 총회에 사면을 신청, 이단해제를 해주려 하는 시도에 대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간 통합총회에서 치리했던 이들에 대해 ‘화해와 용서’ 차원에서 총회 100회기를 기해 한시적으로 사면해 주겠다는 교단 내 정서와 취지와는 달리 이단사이비 문제는 해외한인교회들에게까지도 직, 간접적으로 큰 파문을 끼치는 중대 사안입니다. 즉 통합이 설령 그들을 사면한다고 해도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여전히 해외한인교계에 쓴 뿌리로 존재할 것이기에 이에 대한 조치와 납득할만한 바로잡음이 없으면 그들은 통합을 제외한 다른 한국 내 교단들과 해외한인교계에서는 여전히 이단사이비 호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간 이단에 맞서 정통신학을 지키고 바른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함께해왔고 미주한인교계도 한국의 주요 교단의 이단대처를 존중하며 연대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계신 성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한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들 앞에서 엄중하고도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힙니다.
 
1. 예장통합 총회는 사안의 심각성 및 중요성을 바로 깨닫고 즉시 철회할 것을 촉구합니다.

2. 예장통합 총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번 사태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고, 예장통합의 공신력 실추와 혼란을 야기시킨 관련자와 배후세력에 대한 엄단한 조치와 동시에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시길 촉구합니다.

3. 미주 내 한인교회들은 예장통합 총회가 사면을 고려중인 이단 사이비 단체들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이 피해를 입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여 이들을 관찰, 경계할 것을 권면합니다.
 
아무쪼록 위와 같은 우리의 요구사항들이 관철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가 공신력을 회복하고 본연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주후 2016년 5월 24일
 
기독교이단대책협회(대표회장 백남선 목사, 상임회장 박형택 목사)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강신권 목사)
남가주한인목사회(회장 엄규서 목사)
노스캐롤라이나기독교이단사이비대책연구회(회장 조재풍 목사)
달라스교회협의회(회장 김승호 목사)
대뉴욕교회협의회(회장 이종명 목사)
대뉴욕교회협의회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회장 유상열 목사)
미주기독교이단대책연구회(회장 한선희 목사)
빅토밸리한인목사회(회장 우정은 목사)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회장 김순관 목사)
애틀란타한인교회협의회(회장 정윤영 목사)
오클라호마한인교회협의회(회장 정홍기 목사)
중남부 이단대책위원회(사무총장 이태경 장로)
하와이기독교협의회(회장 한익희 목사)
하와이이단대책협의회(회장 김순관 목사)
하와이장로교협의회(회장 김순관 목사)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며, 소통이 불가능한 신
- 이만석 선교사(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

이만석 선교사(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는 최근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이슬람 관련 정보(Q&A)"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꼭 알아야 할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질문과 답변 식으로 10가지로 제시했다.

Q1.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에 대해 "이슬람의 알라는 무함마드가 속해 있던 꾸라이시(Quraish) 종족의 종족신이었으며 달신(Moon god)이었다는 것은 이슬람국가의 국기나 모스크 꼭대기에 달린 초승달을 보면 알 수 있다"면서 "이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라고 주장하는데,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며, 소통이 불가능한 신이며, '라트', '우짜', '마나트'라는 세 딸을 두었던 신(꾸란53:19-23)"이라고 말했다.
또 "아랍인들은 이들을 알라의 딸들로 불러왔으나, 무함마드가 처음으로 그 관계를 단절시키고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 유일신 전능자라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Q2. 이슬람도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경적인 종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만든 종교로,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라고 선을 그었다.
성경의 아브라함과 이슬람의 아브라함에 대해 "이슬람의 아브라함은 성경의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서 "성경의 아브라함은 99세 때부터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꿨던 데라의 아들이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가본 일이 없었으나, 꾸란의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으로 불리던 아자르의 아들이었으며, 이스마엘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아바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또 성경의 예수와 꾸란의 이싸에 대해 "꾸란의 예수는 이싸라고 하는데 이싸는 성경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서 "이싸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으며 부활하지도 않았다(꾸란4:157-8)"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슬람에서) 이싸는 신성이 없고, 이싸는 무슬림이었으며 알라의 종이라고 하며, 이싸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꾸란61:6)"이라고 덧붙였다.
이 선교사는 "이슬람의 꾸란은 성경의 이름을 도용하기는 했지만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영의 계시로 만들어진 경전"이라고 강조했다.

Q3. 꾸란에는 모세5경과 시편과 복음서의 내용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면서 "꾸란에 있다고 주장하는 모세 5경은 십계명이 없으며, 레위기가 전부 빠져 있다"고 했다. 또 "모세5경에 있는 구절들 중 몇 개만 인용되었을 뿐이며 인용된 내용들도 성경과는 매우 다르다"고 덧붙였다.

이 선교사는 "무함마드가 꾸란을 계시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성경과는 계시의 근원이 전혀 다르다"면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는데, 이슬람의 꾸란에 보면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는 저주받은 자(Kafir)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러므로 꾸란을 계시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성령이 아닌 정반대의 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Q4. 이슬람의 테러는 일부 몰지각한 광신자들이 저지르는 것인가요?

이 선교사는 "테러는 불신자들과 싸우라는 알라의 명령이며, 이를 지하드라고 한다"면서 "꾸란에는 '너희는 싸우기 싫어도 싸움은 너희에게 부과된 의무니라(꾸란2:216)',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모두 알라에게 속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꾸란8:39)',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군대와 말)을 동원하여 불신자의 가슴에 공포를 불어 넣어라(꾸란8:60)'고 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유수프 알리(Yusuf Ali)역 영어꾸란에 보면 공포를 불어 넣으라는 부분을 테러를 가하라(Strike terror)고 번역하고 있다"면서 "그러므로 무슬림이 꾸란에 정통하며 꾸란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꾸란대로 하면 테러범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선교사는 "IS(이슬람국가)의 칼리프(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무식한 광신자가 아니라 바그다드 이슬람 신학대학에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은 사람"이라면서 "그는 이슬람 성직자이며 꾸란과 샤리아에 정통한 학자"라고 IS의 최고 지도자인 알 바드다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Q5.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철학 군사 외교 입법 사법 등을 망라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이며 공산주의처럼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답했다.

이어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만들 때 처음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말하며 포교했지만 후에 힘이 생기고 나서는 유예기간을 주었는데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고 알라의 이름으로 명했다(꾸란9:5)"면서 "지금도 이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유럽에서 극장이나 식당에서 무슬림들을 제외하고 무차별 사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Q6. 그래도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보면 평화를 말하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꾸란에 살해명령이 있어도 그것은 그 당시 전쟁 상황에서 한 명령일 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요? 구약 성경에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선교사는 이에 대해 "성경의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이야말로 아말렉의 죄를 명백히 지적하시면서 특정 부족에 국한된 그 당시에만 적용되는 명령이다"면서 "그러나 꾸란의 명령은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불신자(이슬람을 거부하는 자)에 대한 공격을 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꾸란에는 2장256절(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로 대표되는 평화를 말하는 구절도 있고, 9장5절(불신자를 죽이라)로 대표되는 폭력을 말하는 구절도 있지만, 두 구절을 모두 실천할 수는 없다"면서 "그래서 이슬람의 만쑤크(Mansukh:취소) 교리 혹은 나쓰크(Naskh:대체) 교리가 등장하는데, 이 교리에 의하면 꾸란의 두 구절 사이에 내용상 모순이 발생한 경우는 처음 계시는 취소(만쑤크)되고 나중 계시로 대체(나쓰크)된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알라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미 내린 계시를 취소할 수도 있고 더 나은 구절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한다(꾸란2:106)"면서 "소위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취소된 꾸란의 구절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용하면서 속이고 있든지 아니면 자신도 몰라서 속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답했다.

Q7.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여성인권을 탄압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것이 사실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에서는 여성들의 인권을 남성의 절반 정도로 본다"면서 "꾸란에 의하면 여성은 상속도 남성의 절반만 받아야 하며(꾸란4:11) 여성의 법정 증언은 남성의 절반의 효력이 있다(꾸란2:282)"고 꾸란의 구절들을 인용해 이에 대해 설명했다.

계속해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씨뿌리는 밭에 불과하다(꾸란2:223)"면서 이슬람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여성 인권 침해에 대해 지적했다.

이 선교사는 먼저 "이슬람 제2의 경전인 하디스(Hadith)에 보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남자가 자기 아내를 때릴 때 제 3자는 왜 때리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슬람의 율법이 되었다(Abu Dawood Book 11, Number 2142)"고 지적했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는 셈이다.

또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남자가 여자의 몸값(Mehr)을 치르고 사는 개념이며, 한 번 결혼하면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맹세를 하지 않아 언제든지 아내를 바꾸는 것은 알라께서 허락한 남편의 권리(꾸란4:20)"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슬람 율법에 의하면 4명까지 아내를 얻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상식(꾸란4:3)"이라면서 "이슬람의 이혼은 딸락(Talaq)이라고 하는데, 딸락을 구두로 혹은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아내에게 3번만 통보하면 이혼이 성립이 된다(꾸란2:229-230)"고 설명했다. 이슬람의 결혼은 평생의 서약이 아니며, 4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고,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
또 "혹시 여인이 강간을 당했다면 증인 4명이 없으면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꾸란24:4)"면서 강간은 대부분 증인이 없기 때문에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 수치를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의 딸이나 여동생을 살해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고, 이슬람권에서는 매년 평균 약 5000건 이상의 명예살인이 발생하고 있다"고 여성에 대한 강간과 명예살인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 선교사는 "이런 상황에서 여성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Q8. 무슬림들은 할랄 음식만 먹어야 하나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의 율법 중 할랄은 허용된 것을 말하는데,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와집(Wajib)이라고 하고, 금지된 것은 하람(Haram)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할랄 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꾸란에 보면 기독교인들이 먹는 음식은 무슬림들에게도 허용(할랄)되었다고 하고(꾸란5:5), 또한 모르고 먹었든지 혹은 어쩔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는 죄가 아니라고 했다(꾸란6:145)"면서 "그러므로 보통 무슬림들은 할랄에 그다지 예민하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그러나 원리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할랄에 집착한다"면서 "할랄 인증이 없어도 이슬람권에 식료품 수출은 가능했으며, 할랄 인증을 받은 경우 매상이 다소 올랐다는 정도"라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할랄 인증 사업은 세계적으로 무슬림 인구가 급증하자 원리주의 무슬림들이 이슬람 율법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라면서 "이슬람권에도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제과점은 '이 업소는 비무슬림이 운영하는 곳입니다'라는 간판을 붙이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파는 음식은 할랄이 아니라는 표시지만,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 무슬림들도 줄을 서서 사먹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그러므로 할랄은 무슬림들이 먹어도 된다고 허용된 것이지 할랄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정리했다.

Q9. 할랄 규정은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이 규정을 통과하여 인증을 받은 식품은 안전한 식품이며 건강식품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요?

이 선교사는 "할랄 규정이 까다롭다는 것은 이슬람 율법을 지키는 일에 까다로운 것이며 위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할랄 도축방법(Dhabiha)은 비위생적"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승의 목을 칼로 베어 피를 빼기 위해서 산채로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발버둥을 치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일반도축 방법은 전기 충격으로 기절시켜 놓고 잡기 때문에 피가 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할랄규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첫째 도축자가 무슬림이어야 한다.
둘째 짐승이 죽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셋째 목을 자르면서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한다.
넷째, 죽은 고기를 먹지 말라.
다섯째, 피채 먹지 말라.
여섯째, 술을 먹지 말라.
일곱째,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이 선교사는 "이에 따라 알코올이 섞였는지 돼지고기 성분이 섞였는지 또는 음식의 숙성 내지는 발효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알코올 성분이 몇 %나 섞였는지 등을 까다롭게 따진다"면서 "(그러나) 사실 발효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량의 알코올은 오히려 혈액순환을 돕기도 하며, 돼지표피에서 추출하는 젤라틴은 인체에 전혀 무해하여 유엔보건기구에서도 섭취 제한 규정이 없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러므로 이슬람 율법으로 금하는 것은 위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오히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빼기 위해서 목을 잘라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죽는 순간까지 2~5분 동안 극도의 고통과 분노를 느끼면서 죽기 때문에 인체에 해로운 치명적인 독소가 생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것은 절대로 안전한 식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Q10. 할랄 인증비용을 정부가 보상해 주는 것은 소규모 식품업체의 수출을 돕기 위한 것이므로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나요?

이 선교사는 "할랄은 이슬람 율법을 무기로 이용하는 원리주의자들의 돈벌이 수단"이라고 할랄 인증의 목적에 대해 말했다.

계속해서 "원리주의자들의 최종 목적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온 세상을 샤리아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라면서 IS(이슬람국가)나 탈레반, 알카에다, 무자헤딘, 헤즈볼라 등은 유명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그러므로 할랄 인증 비용은 우리 안방을 파괴시킬 폭발물을 구입하는 테러자금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면서 "이를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중소기업을 돕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치는 일을 위해서 국민의 세금을 지출하는 것이기에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기업이 손익계산을 따져보고 투자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이 선교사는 "세계가 이슬람의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교회 지도자들이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면 한국교회 및 대한민국의 안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고 우려하면서 "10가지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이슬람의 개요를 요약했는데, 필독하고 꼭 숙지해서 교회 성도들을 이슬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한 교회에 한 사람 정도는 이슬람의 전문가를 양육해야 할 것"이라면서 한국교회연합회와 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공동운영하는 이슬람선교훈련원(010-8220-5290)을 추천했다.





[자료제공: 한장총 이슬람선교훈련원 및 한교연 이슬람대책 연구원]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말씀: 고전 15:12-13, 고전 15:21, 고전 15:42, 요11:25-26, 요 5:28-29.  

 

요즘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 바둑대국이 많은 화제였습니다. 인간 두뇌가 나은가? 아니면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더 나은가? 알파고는 약 1200대의 컴퓨터가 작동합니다. 1초당 10만 가지의 수를 계산합니다. 어디에 둘 것인가를 지시합니다. 결국 이세돌 9단은 1승4패로 졌습니다. 이 걸 볼  인공지능 컴퓨터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했고,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가 대단합니다. 알파고를 이끈 팀장 데미스하사비스도 대단하고 1승이라도 챙긴 이세돌이 대단 합니다. 

하지만 누가 가장 위대한  아십니까? 알파고의 인공지능을 만든 데미스 하사비스    이세돌을 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더 위대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은 2016년  오늘 새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 함께 하나님 만세, 그리스도의 부활 만세 외칠 수 있 바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슬피우는 상여가 지나가면 언제나 뛰어 나가, 구경을 하면서 인간의 죽음에 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워~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 위에 삶은 닭이 나래칠 때 다시 오랴,    ~  땡그랑 땡~  

한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 하노라,    ~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인간은 죽음 앞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한 번 가  오는  어이 섭지 아니하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과 척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I. 인간은 신비한  

인간은 신비한 존재입니다. 저의 아들 손자가 2살인 데,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벌써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울면서 자기의 의사를 표합니다.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하고, 살아있게 하는 그 생명 자체가 신비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 있는 오장육부가 신비합니다. 머리 속 두뇌가 신비합니다. 온 몸에 퍼진 핏줄,   움직이는 신경계.  것들을 내가 있게 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만든 것도 아닌 데. 그것들이 있단 자체가 신비한 것입니다. 있다가 죽는 것도 신비합니다. 인간은 온통 신비 그 자체입니다.  

 

처럼 신비한 인간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오리라”, 다시 살아날  없을까요? 

한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인간일까요?   

거기에 대한 답(answer)이 2016년  오늘 새벽에 일어났던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 가르쳐 줍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 15:13,21,42) 

 

우리 인간을 만 분은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창`:18) 성부하나님/성자하나님/성령하나님 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6-27)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불멸한 존재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으셨습니다. 그러나 장사한지 3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셨 그러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부활이 우리 인간의 생명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존재임을 입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던 예수를 누가 살렸나요?  

행2:24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메여 있을  없음이라 

성부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요?   

(1) 인간들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없다고 체념하고, 포기합니다. 허무해서 울기만 기에,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예수 리심으로 인간은 반드시 살아나는 부활의 존재, 영생의 존재임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는 일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 15:15-16) 

 

(2) 둘째 이유는 예수를 통한 인류 구원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하나님의 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만 끝났다면 우리의 죄문제, 구원의문제가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죄문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고전 15:17-18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그래서 칼빈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십자가 죽으신 예수 중요하나 부활의 예수  중요시 합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죽으심으로 끝난 패배의 십자가요, 부활이 있기에 승리의 십자가 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승리가 있기에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확정적인 것으로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죽음에 대한 승리,  대한 승리, 사단 세력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확정적인 것입니다.  

 

(3) 셋째 이유는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소망인 영생의 소망 주기 위함이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그래서 일찍이 구약시대에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선지자는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사26:18)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만의 부활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께만 국한된다면, 부활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우리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는 여전히 죽음 가운데 헤메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 지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것이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도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새벽에 모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하며 마음껏 기뻐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여러분도 반드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II.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까요? 

여기  씨가 있습니다. 땅에 묻으면 없어지나요? 풀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달걀이 있습니다. 달걀은 없어지나 거기서 예쁜 형제 병아리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육체인 몸을 땅에 묻으면, 몸이 풀어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땅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아름다운 부활체 몸을 입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인간은 영 +  + , 셋(3)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죽으면 육과 영혼이 분리됩니다. 육은 땅에 묻혀 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혼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 갑니다. 낙원인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그러나 불신자 영혼은 낙원 아 스올(혹은 음부)로 갑니다.  

스올(=음부)은 지옥같은 곳입니다. 스올(혹은 음부)에 갇힌 영혼은 거기서 제약을 받습니다. 지옥 같은 스올(=음부)과 천국같은 낙원은 일종의 영혼들의 대기장소 입니다. 언제까지 대기 하느냐? 재림의 나팔이 불 때까지 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나팔소리  들여오면 하나님 앞에  영혼은 어찌 되나요?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입고 하나의 인간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올에 갇힌 영혼은 재림의 나팔소리가 들려도 거기 계속 갇혀 있습니다. 

그들도 부활하긴 하는 데,  때가 아닌 1000년 후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인 부활체 어떤 것인가요?  

 몸은 고전15:43,44에 기록된 강한몸, 썩지않는몸, 영광의몸, 하늘에속한 신령한 몸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이란  아닙니다.  육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몸, 새로운 육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낙원에 있던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육체의 몸 결합하여 하나의 완벽한 인간으로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부활의 계획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체 가진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부활체는 현재의 지금의 몸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 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5:44)  그러나 죽기 이전의 주체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부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부활체가 어떠 것인 대략 알 수 습니다. 

예수님은 운명하기 이전의 모습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되었기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던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 부활의 예수님을 몰라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잠긴 문을 통과했고, 시공을 초월하여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고, 제자들과 만났고 대화하셨고 음식 잡수셨고, 생선도 잡수셨습니다. 제자들 대화하면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체도 예수님처럼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독특한 eunique 한 점이 있듯이  자의 고유한 특성 그대로  것입니다. 이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  날에 우리가 서로 알아   을까요?   

부활체 가진 우리는 서로 확연히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3:2절에 “그 날이 이르면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그러므로 그 날에 주님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체  다른 특성은 없나요?  

질병이 없습니다. 암에 걸리지 않고, 곰보나 째보도 업고 신체장애자도 없습니다. 성형수술도 필요없는 형용할 수 없는 미인 미남입니다. 주름살도 없 썩거나 죽지도 않습니다. 의사나 보약과 건강보험이 필요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않습니다. 중매장이가 필요 없습니다. 연애로 인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내나 남편 때문에 속 썩힐 필요가 없습니다. 혈연 관계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로 인해 영향 받는 일은 일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15:48-49절에 부활한 몸의 특성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8-49)  

 

 

그래서  신학자 황승룡 박사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종말은 현실화 된다. 죽은 자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의 종말적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종말은 현재화 된다.   사건에서 죄와 악의 권세는 흩어졌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창조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적 행위였다. 하나님의 이 행위(부활)는 죄와 악을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시작하신 징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왕이시고 주님이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니 놀랍지 않습니까?!! 

 

 

A.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이 언제 을까요?    

  부활 둘(2) 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었던 자들의 부활과 영접치 않 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으면서 재림을 보는 자의 부활까지 합쳐 셋(3) 입니다.  

 부활의 시기와 모양이 다릅니다.  

 

(1) 예수를 영접하고 죽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 부활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4:16)   

 

(2) 예수  믿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바로 이뤄질까요?     

재림 나팔이 불어도 믿었던 자들과 함께 부활하지 못합니다. 재림 후로부터 천년이 지난  후인,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끝날 때에 그들은 부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이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때에, 백보좌 심판하는 그 때에 비로소 악인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었던 자들과 불신자의 부활은 서로 다르고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고전15:23-25)  

 

그러니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재림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때 입니까? 아니면 그 때로 부터 1000년 후인 백보좌 심판 때입니까?  것은 살아있을 때인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함을 유념하십시요.  

 

(3) 살아있 체로 재림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보지를 않습니다. 홀연히 부활체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재림의 주님을 만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15:51-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5-17절) 

 

 

B. 그러면 부활  어떻게 될까요?   

 

재림의 주(Lord)는 지금의 땅과 하늘이 아닌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고 친히 통치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참여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을 다스리는 왕노릇 하는 특권을 누립니다. 불신자 천년왕국은  

커녕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4-6절)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안  노릇 하니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노릇 하리라 

 

사도 바울은 고전 15:24-24에 천년왕국을 이렇게 말합니다.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C.  천년(1000년) 지나면 무엇이 있나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인 천년왕국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후엔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 대심판이 있습니다.  인류역사사상 살았던 모든 남녀노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대심판 받습니다.  

대심판 때에 부활한 불신자는 어찌 되나요  인의 모습으로 부활 그들은 영원한 심판인 엄벌, 즉 지옥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천국입니다.  

 

계시록 20: 12-15절을 보십시요.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자나 작은 자나  보좌 앞에  있는데 책들이  있고 /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25:46) 

  불신자들은 영벌 지옥, 믿음의 사람은 천국입니다 

 

 

그러면 영벌인 지옥은 어떤 입니까?   

 9:48-49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지옥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지옥에도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은 죽고만 싶어도 죽지 못합니다. 죽음도 그들을 피해 갑니다. 괴로워 하며 영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Fry 판에 콩을 넣으면 팔딱팔딱 튀듯이 지옥에 간 사람들은 그렇게 팔딱팔딱 튀면서 고통 받으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은 떻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기에 시간 관계상 생합니다. 집에 가셔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 21-22장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백발의 노인된 그의 어머니가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애야 철학이 무엇이냐? 인간연구냐? 인생 사는 지혜냐? 나는 죽고 싶지 않구나, 영원히 살고 싶구나, 영생하는 철학은 없더냐?   

아들은 그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영생하는 철학? 나는 지금 인생 사는 지혜를 공부하고 있는 데 영생철학을 원하시다니"    때부터 그는 영생하는 철학을 찾고자 노력헸습니다. 드디어 성경에서 영생하는 철학, 부활의 진리를 발견하였고, 그 후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부귀영화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는 지혜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영생철학,  부활의 진리를 추구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십시요. 여러분에게 죄용서와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있길 바랍니다.  

 

네가 만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리라(롬 10:9) 

김한길 목사님 설교 동영상 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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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인류역사를 바꾼 하나님의 혁명 (기독신문 사설)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시간적 차원과 영원적 차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원적 차원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존재의 신비함이나

우주의 존재와 질서정연한 운행에 대하여

생각해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신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섭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신 사건이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구체적 사건에서 생겨난 종교다.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 그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

33년이라는 크로노스 시간 안에서의 삶,

갈릴리와 유다 및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에서 사역하신 일,

인간으로서의 삶. 이렇게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위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

그의 삶 마지막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치명적 약점은 성경의 정경성과 표현성을 부인하고

이성을 판단의 표준으로 삼는데 있다.

성경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처럼 성경자체에 의하여 해석된다.

이성은 해석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성경을 지배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신앙의 논리가 적용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거나 어떤 교리를 논할 때

반드시 조심할 것은 인간 판단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

성경의 자체 판단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증언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 변경될 수 없는 기독교의 핵심 신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가

예수 부활사건을 목격한 뒤부터 그들의 삶이 변화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지속적 사건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구원자 메시아라는 확신을 알게 되면서 초대교회는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활신앙이 있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믿는 자의 부활을 보증해준다.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아름다운 교회 치장과

예배와 수없는 신학이론의 체계는 모두 다 헛된 것임을 잊지 말자.

부활신앙이 없으면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사가 다 허무한 것이다.

부활은 인류역사를 뒤바꾼

전능자 하나님의 혁명적 변혁의 사건이다.
(펌: 기독신문 사설)    
       

      셀 수 없는 그 사랑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의 은혜 생각하며 하나 둘 별을 세며 도우심을 세어봤네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앞에서 이끄시며 뒤에선 호위하며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어려운 일 당할 때나 슬픈 일 당할 때나 내 곁에 찾아와 나를 위로하신 주님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앞에선 이끄시며 뒤에선 호위하며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행여나 넘어질까 행여나 잘못 갈까 하늘문 여시고 살피시는 주 예수님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 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사막에 길 내시고 바다에 길 내어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캠퍼스에서 만난 예수 (신앙 간증)

신앙간증 / 캠퍼스에서 만난 예수    

어머니 기도와 김요한 목사의 성경지도가 밑걸음
효도차 교회다니다 대학생되어서야 본격적 신앙구축
“하나님 앞에선 죄인... ” 고백후 회개와 감사로 범벅

나는 어려서 부터 교회에 다녔다. 크리스천이신 어머니께서 어린 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예수 믿는 믿음을 넣어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이면 어김없이 유년주일학교에 참석했다. 교회에 안가면 어머님께 혼나니까...
수요저녁예배와 금요저녁예배는 어머님께서 원하시기에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끔 한번씩 따라가곤 하였다. 새벽예배 역시 은근히 어머님이 원하시기에 잠이 일찍 깬 날 새벽엔 효도하는 마음으로 어머님을 따라가곤 하였다.

이런 생활이 유년기부터 고등학교까지 계속 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엔 학습과 세례/침례도 받았다. 왜냐하면 어머님이 좋아하시니까 교회에서 주는 문답지를 받아다가 달달 외워 합격한 것이다. 중등부와 고등부를 다니면서도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는 전혀 몰랐다. 왜 믿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교회란 뭘 하는 곳인지에 대한 분명한 교회관도 없었다. 한 마디로 어머님의 강권에 의해 만들어진 교인이었고, 신앙관이 전혀 정립안된 선데이 크리스천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약학대학에 입학했다. 서클활동에 가입할 때 나는 기독학생회를 선택했다. 어려서 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고, 비록 분명한 신앙관이 없을지라도, 학습과 세례/침례를 받았고 어느덧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기독학생회에 가입한 것이다. 이 때, 나에게 하나의 문제의식이 생겼다. 그것은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내가 성경을 몰라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창피했다. 그래서 성경이 알고 싶어졌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던 대학 1학년 어느 가을이었다. 하나님께선 목사님 한 분을 보내주셨다. 기독학생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목사님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을 가르쳐 주겠다. 나하고 성경을 공부하자. 형제가 다니는 대학교에 대학생 사역을 하러 왔는데, 나와 함께 전도를 하자. 대학을 복음화 시키고 성서한국을 이루고 세계선교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전도가 뭔 지도 모르고 선교도 모른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목사님이 말씀한 “선교와 전도”라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쳐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가!! 약속을 하고 몇일 후 부터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 민수기, 사사기, 에스라, 느헤미야를 배웠다. 요한복음, 마태복음, 베드로전후서와 사도행전과 디모데전서를 배웠다. 이리하여 약 5년간 그 목사님에게서 성경을 배운 것이다.
     
이런 성경공부를 통해 나는 궁금해 하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성령님을 알게 되었다. 교회란 뭔가도 알게 되었고 전도와 선교가 뭔가도 알게 되었다. 열거하자면 참으로 많다. 그러나 몇 가지만 써 본다.

특히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심과 나는 그 분의 피조물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이 세상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옆으로는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고, 만물을 다스리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사명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도 알게 되었다. 이러니 얼마나 좋은가 !! 그토록 궁금해 하던 생의 목적과 존재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일생 동안 추구하며 살아야 할 생의 목표가 뭔가도 알게 되니 참으로 기뻤다.      

또한 예수님이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과 함께 천지창조 사역에 참여하셨던 성자하나님이심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영원부터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시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가!! 원시복음(창3:15)에 지칭된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님이라니 놀라웠다. 야곱이 그 아들 유다에게 예언해주었던 축복의 기도에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 그리스도가 유다의 지파에서 오게 된다는 걸 보니 놀라웠다. 그 메시야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니 참으로 놀라웠다.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도 알게 되니 참으로 좋았다.

이 때 공부했던 창세기는 훗날, 전공인 약학을 버리고 신대원 공부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Report 작성이 쉬웠다. 목회할 때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 후로 부터 약 40년 후에는 어떤 선교단체의 이단성을 발견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통하여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과 인품과 사역에 대해 배웠다. 예수님의 제자양성의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나와 온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했던 여자의 후손,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영원부터 영원토록 존재하는 전능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1) 죄와 죽음과 영생의 문제, 2)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 3) 삶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나의 죄문제를 해결키 위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생명의 은인임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3)일 만에 부활하신 전능의 주님임을 알게 되었다. 부활 승천하심으로 나와 온 인류에게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 있음을 보여주시고, 영생과 천국을 보증해준 분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한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알게 되었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와 온 인류를 구원키 위해 오셨던 구원의 주, 생명의 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인 요한복음 3:16절이 이해가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이런 연고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래서 나의 신앙고백은 이 것이다. 이 것이 나의 신앙관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처럼 신앙이 정립되고, 믿음이 자라갈 무렵인 대학 2년 여름방학 때,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죄인됨과 죄의 고백을 하게 되었고, 나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는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는 내가 죄인됨을 알았으나, 아니 머리로는 알았으나, 진짜 내가 큰 죄인인 것을 처절하게 처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더러운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사건이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였던 말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였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여름방학 때 둘째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가 함께 산에 기도를 하러 가자고 하였다. 누나가 항상 잘 해주었기에, 아니 용돈을 잘 주기에, 말 대접으로 따라 나섯다. 예배를 인도하던 인도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사람들이 숨겨 놓은 죄도 모두 다 알고 계신다. 형제님도 보기엔 법없이 살 사람 같고, 착한 사람 같으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숨겨 놓은 죄도 다 내어 놓고 회개를 해야 한다.”

그 날 따라 그 인도자의 말이 가슴에 박혔고, 찔렀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 내가 어려서부터 지은 모든 죄를 아신다. 내가 숨겨 놓은 은밀한 죄도 모두 아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나의 행위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날 것을 생각하니 괴로웠다. 보기엔 법 없이 살 수 있다는 나에게도 그런 죄가 있다니 괴로웠다. 지나온 나의 죄들을 생각하니 나 자신이 추하고 더러웠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숨겨 놓은 죄를 생각하니 더욱 괴로웠다. 그래서 울었다, 울부짖었다.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빌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바라면서 많이도 울었다.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쨟은 시간이 아닌 오랜 시간 울면서 기도하였다. 내가 지었던 죄 때문에 울었고,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을 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하나님! 더럽고 추한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내가 나를 봐도 싫어요. 숨겨 놓은 은밀한 죄도 용서해주세요. 새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변화시켜 주세요.”    

오랜 시간 기도하였는 데, 그 때 성경공부할 때 배운 요한일서 1:8절 말씀이 생각 났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나의 죄를 모두 자백하면 용서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용서해주세요” 하면서 울었다. 약속의 말씀대로 용서해주실 것을 믿으니 마음이 편해옴을 느꼈다.

그러면서 요한일서 2:1절 말씀도 생각이 났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내가 용서 받도록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용서해주실 것을 생각하니 왠 지 안심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셨던가!! 생각하니 예수님이 나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분인 것이 이 때에 절실히 깨달아지게 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깨닫게 된 것 보다도, 이 때에 더욱 절실히 감동적으로 깨달아진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나의 죄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시다. 은밀한 죄도 고백하면 용서 받게 해주는 분이시다. 죄의식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분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자 하면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고 그 길로 인도해주는 분이다. 나는 그 때에 예수님께 감사하며 평온한 마음을 갖는 가운데 살며시 잠이 들었다.      

잠이 깰 무렵이었던가? 꿈 속에 따스한 아침 햇살이 울창한 숲 사이로 스며 들었다. 그러면서 잠이 깼다. 난 또 다시 기도하였다. 회개기도와 감사의 기도를 함께 하였다. 죄용서를 받게 해주신 십자가의 주님이 참으로 감사하였다. 새롭게 살 것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이런 찬송이 절로 나왔다.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 죄의 짐을 풀어주신 주의 능력 크도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러면서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이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신비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기 까지의 나의 신앙 간증이요, 고백이다. 그래서 내가 늘 즐겨 부르는 찬송은 이 것이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 주 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사랑 / 참기쁨과 확신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

그리고 나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 내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를 그리며 이런 찬송시를 지었다.

1. 갈릴리 바닷가 그 언덕 그 마을
  다니시며 하신 일 너무나 아름다워
  머나 먼 하늘나라 이 땅에 찾아 와
  하늘 비밀 전해준 나의 주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
 나의 주 예수님 영원히 섬기리

2. 그 옛날 베다니 그 옛집 그 곳에
  향유 가득 준비한 마리아 있아오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 사모합니다
  하늘 소망 주셨네 나의 주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
  나의 주 예수님 영원히 섬기리

 
대학시절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셨던 김정일(김요한)목사님께선 지금은 하나님 곁에 계신다. 내가 실제로 체험한 목사님은 언제나 검소하셨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셨다. 온유하셨다. 청년들을 사랑하셨다. 언제나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 설교 준비에 주력하셨다. 성경교재 만드는 데에 몰두하셨고 강의안 쓰는 걸 좋아하셨다. 대학생들을 제자로 키워 해외선교사로 파송하셨고, 목회자로 키웠다. 많은 선교학 논문을 쓰셨다. 학자이셨다. 신학교 교수셨다. 매 주일 강해설교로 파워플한 메시지를 전한 설교가였다. 교인 숫자에 연연치 않으셨다. 예수님처럼 제자양성에 주력하셨다. Campus Ministry에 주력한 대학선교운동가이셨다.

마지막 임종시에 자녀들 보다는 교회 리더들을 불러 교회와 선교를 당부하셨다. 자녀들 보다도 교회와 청년들을 더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선 그의 생애 50년을 대학선교에 귀히 쓰셨고, 귀히 받으셨다. 50여권의 책을 집필한 김 목사님께서 마지막 남긴 저서는 “21세기 희망, 대학생선교 운동”이다.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다루신 책인 데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하였다.

나의 신앙여정을 되돌아보니 믿음의 길로 인도코자 하는 어머님의 노력과 기도가 있었고, 성경을 가르쳐준 목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또한 그 목사님을 만나기 까지 나의 길을 인도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하나 언급하고픈 것은 이 시대에도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셨으면 한다. 성경을 바르게 잘 가르치는 목사님이 있을 때에 한 젊은이가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님들께선 다른 프로그램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Bible Teaching에 주력하고, 설교를 위한 말씀연구에 전력을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바른 행실을 하면 이 시대 교계의 문제가 해결 되리라고 본다.

김한길 목사

이 글은 뉴스앤조이 2010년 12월 16일에 김한길 목사(하이드팍침례교회)가 올린 글입니다. 

얼마 전 교계를 뜨겁게 달군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인터콥 대표인 최바울 선교사다. 봉은사 땅밟기 사건으로 모든 교회가 자숙을 요할 때, 그는 “땅밟기 기도가 왜 잘못된 것이냐 할 수만 있다면 절간에 들어가서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화두를 던지면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필자는 그때 최바울 대표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의 신학 사상이 궁금했고, 그의 신앙 배경이 뭔가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표가 쓴 <세계영적도해>란 책을 꺼내 들었다. 읽으면서 맨 처음에 나오는 제1장 '하나님의사정'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발견한 것이다.

<세계영적도해> 제1장, '하나님의 사정'에 대한 내용 분석
최 대표는 대학 1학년 봄에 처음으로 성경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인임을 설명해주는 원천적인 에덴동산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이었습니다.” (Page 33)

그러다가 그해 여름방학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게 됐지만 에덴동산의 사건은 계속 의혹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교1학년 가을에 창세기 2장을 보면서 그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설한 에덴동산에 갑자기 등장한 인간과 뱀의 모습으로 등장한 사단이 인간에게 다가온 것과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사건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과 사단과 하나님과의 삼각관계에 모종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삼각관계는 세월이 흘러 가장 고귀한 육체의 옷을 입고 오셨던 하나님과도 연결된다. 즉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 (Page34)

그래서 인간과 사단과 하나님과의 바로 그 삼각관계의 구도를 파헤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숨은 의도와 목적을 알 때, 인간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의 이유도 알게 되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가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최 대표는 본 것이다. 그래서 최 대표는 그 부분을 그의 책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마침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과 뱀이 접근해서 아담을 꼬이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고 바라만 보셔야만 했던 것 사이에 깊은 내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Page 34) "에덴의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Page 44)

그러면 최 대표가 이해한 에덴동산의 삼각관계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단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인간과 사단과의 관계를 무엇이라 보았는가?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를 무엇이라 보았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을 보시면서 그대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았는가? 최 대표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과 사단과의 관계를 먼저 설명한다.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 그렇습니다. 이 우주 창조 이전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우주의 왕 하나님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Page 35)

그러면 최 대표가 발견한 하나님의 속사정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은 인간 창조 이전에 영계·영적 세계·하늘에서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이란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반역이며 반역한 사단은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하나님께서 처벌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 대표는 하나님의 사단에 대한 속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사단을 정죄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범죄한 사단을 영원히 저주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덴에서 한 것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대적한 범죄한 천사이고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사단을 고소하였고,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사단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정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Page 39)

이처럼 설명한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을 생각해볼 때, 최 대표가 파헤친 에덴동산 사건의 삼각관계의 구도는 다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사단의 관계에 대한 최 대표의 견해

최 대표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과 사단과의 관계는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원수 관계였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단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키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고, 인간을 만들어 거기에 두시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단이 에덴에 들어와 인간을 유혹하는 것을 허용하며, 그대로 지켜보심으로써 나쁜 짓을 하는 사단을 처벌할 근거와 이유를 마련키 위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에덴동산과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의도'요,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이다.

드디어 사단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에덴동산에 들어와 인간을 유혹한다. 하나님은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고 죄짓게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나 처벌할 근거를 마련키 위해 그대로 지켜보고만 계신다. 마침내 인간은 사단의 유혹으로 죄를 짓는다. 그 후,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 배후의 인물인 사단을 고소하라는 요구를 하신다. “누가 너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Page37, 41)는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에 아담은 죄를 짓게 만든 사단을 고발한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 배후를 설명하라”는 하나님의 지적에 하와는 그 배후로 뱀 즉, 사단을 지목한다. (Page 38) 인간의 고소를 받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여기에 근거하여 사단을 정죄·처벌·저주하신다. 이것이 최 대표가 파헤친 하나님의 속사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단의 관계는 예수님에게로 연결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사단을 멸할 마땅한 이유와 근거를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사단을 정죄하셨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정죄된 사단의 정사와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사단의 머리를 재기불능으로 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Page 46, Page 34)

이렇게 볼 때, 최 대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가장 첫 번째 목적을 인간 구원이 아닌 사단·마귀 멸하는 일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최 대표의 견해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 즉, ‘하나님의 사정론’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선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많은 존재 의미와 목적을 주셨기에, 최 대표의 도구론은 나가도 너무나 빗나간 것이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하나님의도구론'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기에 구원 받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는 사단을 정죄·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 데에 공을 세웠기에, 그것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에, 그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최 대표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 대표는 하나님께서 사단을 처벌·저주하신 후, 인간에게는 처벌·저주치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그에게 있겠지만 죄의 원천적 책임을 묻고 있지는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도 같이 저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저주가 아닌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저주하셨지 아담을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범죄하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로 나오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Page 41)

최 대표는 아마도 대학 1학년 봄에 가졌던 그 궁금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그 의문의 궁금증이 여기서 풀려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풀렸다면 최 대표의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 대적과 사단 박멸”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사정”에 근거해볼 때,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최대의 일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단 대적, 사단 박멸”만이 하나님의 속사정을 풀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최 대표는 “하늘의 전쟁”에 대해서 언급한다. 사단이 있고 영계(영적 세계)가 있음을 언급하면서 하늘에 전쟁이 있음을 언급한다. 영계에 영적 전쟁이 있음을 언급한 후, “대적 마귀”에 대해서 언급한다. “우리는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고 한다. (Page 47)

대적해야만 하는 이유를 사단이 인간을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근본 이유를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에 둔다. 즉,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셔야만 했는가의 그 숨은 의도, 하나님의 사정인 마귀 박멸에 둔다.

그러면서 이 책의 제1장인 '하나님의 사정' 마지막 부분인 “성도의 권세”에서는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 무능한 종교인이나 철학자로 전락하였음을 질타하면서 영적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뉘앙스를 준다. (Page 47-49)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는데 공을 세워 하나님의 속사정을 풀어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단 대적을 위해 일어서라는 것이다. 사단을 대적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대의 일이요, 사명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단 박멸을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은 사단 박멸을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한다.

그래서 최 대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면서 동시에 동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더 품위 있게 표현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Page46, 48)라고 말한다.

이상으로 최 대표의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하나님의 인간 구원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님은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은 사단을 처벌하는 데 쓰이는 하나의 도구이다. 인간은 사단을 대적하고, 대적하기 위해 존재할 때만이 가장 존재 의미가 있고, 거기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사단을 대적할 때만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처벌하시는 일에 일조하고 동역할 때만이 가장 값어치 있는 일생을 살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숨은 사정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사단에게 유혹을 받았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단지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죄에 대한 원천적인 책임은 사단과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에겐 책임이 없다. (Page 41)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단에게 유혹을 받고, 죄짓게 만든 사단을 하나님께 고발하는 공을 세웠기에, 그 공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처벌치 않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도구로 이용된 인간이기에 불쌍히 여기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책임도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이다.

베뢰아 신학과 맞닿아 있는 최바울 대표의 사상

앞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된 최바울 대표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의도'나 '하나님의 사정'이란 개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생소한 신학적 용어는 한국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된 베뢰아한국신학의 김기동 목사(서울 성락교회)에게서 나타난다. 이에 대한 교계의 반응과 견해는 어떨까.

베뢰아한국신학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한기침의 견해를 살펴보자. 기독교한국침례회 보고서(<교회와신앙> 1994. 7월호)는 “88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총회장 유광석 목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인간 창조의 목적은 타락한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며, 그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단을 형벌하려고 만든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p.29 ; 신앙문답정신p.8 ; 마귀론 p.4)

"첫째, 죄짓고 오는 인간에게 상까지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은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위한 사전의 안내자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은 사단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인간은 그가 오실 길을 위해 봉사한 것입니다." (마귀론 p.74 )

김기동 목사가 시무하는 성락교회의 부목사였던 이대규 씨는 김기동 목사의 인간 창조 목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김기동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목적은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만든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사람은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천사의 형상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김기동의 주장은 기독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이며 이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배우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인간 구원만 생각한다면 마치 돼지가 자기를 먹여주는 주인 아주머니를 식모로 생각하고 거름을 치워주는 주인을 머슴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말한다. 아담을 꾀어 사망을 가져오게 했으니 바로 사망 권세자로 합법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를 합법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를 합법적으로 심판하고 형벌하기 위한 것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김기동 목사는 신의 하늘에서의 범죄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죄로 여길 수 없었지만 사탄을 음부에 가두어 놓은 후에 인간과 선악과를 만들어 세워 놓은 후 사탄이 마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사탄을 잡은 유도 장치와 같은 이치로써 사탄을 정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 (생략)

…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실 길로 창조되었으며, 예수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예비한 우편보좌에 들어가기 위하여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체험하기 위하여 죽기 위해서 오셨으며 그의 사망으로 사망 권세자 마귀를 없애기 위해서이다(히 2:14)라고 말한다. … 그는 1988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제1의 목적은 마귀를 진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며, 제2의 목적은 이에 협조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덤으로 구원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89년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제1의 목적이 마귀 진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을 위하여 지으신 신의 우편 보좌를 상속받을 후사로서 오신 것이라고 개정하였다. 이에 교인들 사이에 베뢰아가 변질된 것이라는 반발이 일어나자 김기동 목사는 자신이 이전부터 이에 대해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때 와서 밝힌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위 ‘후사론’을 통해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아들을 위하여 우편보좌를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늘의 우편보좌에 직접 들어갈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종의 형체를 입어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죽음과 부활이란 과정을 경험하시고 우편보좌에 들어갈 것을 작정했다. 이렇게 영원 전에 작정된 길을 가는데 인간은 그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만물은 이러한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며 아담의 죄와는 별개의 것으로써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우편 보좌에 올라갔을 것이다. 구원이란 예수의 걸어가시는 길목에서 그의 이름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일 뿐이다." (http://newsmission.com)

그러면 이러한 최바울 대표와 김기동 목사가 주장하는 인간 창조론과 구원론에 대하여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창조론과 구원론은 무엇인가? 최 대표의 주장과 성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존재 의미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다루는 창세기 1 장과 2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가지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든 에덴동산과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게 하고, 관리케 하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 (창1:25, 창2:15, 창2:19) 또한 인간에게 결혼과 가정을 주시고 에덴동산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 (창2:8-25) 그런 목적과 의도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처음 창조된 인간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것이다. (창1:31)

인간의 존재 의미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값어치가 있고, 거기에 존재 의미가 있다.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적인 존재로 만드셨기에, 그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가장 값어치가 있고, 거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 심히 기뻐하셨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는 일을 하며 살 때, 거기에 가장 참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고, 생의 의미가 있고, 참된 행복이 있는 것이다.(창1:26, 창1:28, 창2:16절)
따라서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사정에 의한 창조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위배된다. 하나님의 근본 창조 목적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용하여 사탄을 처벌키 위해서 인간 창조를 계획했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상기한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존재 의미를 따라 날마다 충실히 살아가는 것,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또한 신비한 하나님의 권능,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온 땅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 행복 그 자체를 누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 등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또한 죄 많은 인간을 구원키 위해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땅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최 대표의 견해처럼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의 대상은 사단이 아닌,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도와 선교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 사단이 아니란 것이고, 사단을 대적하기 위함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사단이 있음을 인정한다. 사단의 유혹을 피해야 하고, 사단의 공격에 뒤로 물러서지 말고 과감하게 대적해야 한다. (벧후5:8, 엡6:11, 약4:7) 그러나 마귀와 사단을 멸하고,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히2:14, 계20:1-3)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기에 사단과 마귀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부지런히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마28:18-20)

배후를 추적하고 고발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

문제가 되는 창세기 3:8-13절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맨 처음 하셨던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이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상실하고 숨어 살아야 하는 인간을 애타게 찾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신의 잘못을 속히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의 표현이다.

두 번째 질문인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3:11)는 질문은 벗었기에 숨었다고 변명한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벗었음을 지적한 일이 없으니 변명과 핑계를 대지 말고,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의 말씀이다. ‘먹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어김으로 죄를 지었구나”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아담은 또 다시 변명을 한다. 하와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 번째 질문을 하신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이 질문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했던 하와의 죄,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 보였기에 먹고 싶었던 하와의 욕망을 솔직히 시인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아담처럼 뱀(사단) 때문이라는 책임 전가의 변명만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어떤 배후를 캐내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변명으로 일관한 아담 부부의 모습에서도 그 배후가 사단임을 고소하려는 흔적이 없단 사실이다. 하와가 뱀(사단) 때문이라고 한 것은 변명과 책임 전가에서 나온 말이지 결코 고소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창세기 3:8-13절까지의 말씀은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려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범죄한 인간이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솔직히 죄를 시인하고 나오는 것보다는 변명과 핑계만을 일삼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고, 범죄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상실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말씀이지, 결코 고발이나 고소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최 대표가 주장한 하나님의 의도, 즉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를 통해 뱀(사단)을 고발 받아 징계하려 했다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곡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바울 대표에게 '인간 도구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최 대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벌과 사단에게 내린 벌이 다르다고 말한다. 인간 타락의 전적인 책임이 사단에게 있기에 사단에겐 저주·처벌을 내렸고, 전적인 책임이 없는 인간에겐 죄의 결과만을 물어 고통을 주셨다고 한다. (Page 41)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벌의 종류를 생각해볼 때, 사단에게 내린 저주보다도 더 심한 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삶의 고통 외에도, 죽음이 왔고, 영생을 상실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죽음도 받았기 때문이다. (창3:16-24)

이럴진대 왜 최 대표는 인간의 벌이 더 가벼운 것이라 말 할 수 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최 대표에게 하나님의 사정, 인간 도구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대로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는 도구로 쓰였고, 사단이 범죄자임을 고발하는 데에 공헌했고,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그대로 방치해야만 했었던 하나님의 공범죄 의식에서 온 생각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범죄를 조장하는 분이고, 인간이 죄를 짓도록 만들기에 나쁜 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범죄에는 하나님의 책임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완벽한 분이시다. 죄를 조장하는 분도 아니시고, 의도적으로 죄 짓게 하는 분이 아니다. 죄 지은 인간 당사자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거듭 찾으시며 죄지은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물으셨고, 그 죄의 대가로 혹독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죽음, 영생 상실, 행복 박탈, 삶의 고통,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됨, 이보다도 더 심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이처럼 혹독한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아닌 죄 지은 당사자에게 그 책임을 직접 물으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 13절에서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속량하셨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신21:23) 이처럼 사도 바울도 우리의 죄의 대가가 저주임을 선포했는데, 사탄만 저주를 받고 인간은 단순히 고통만 받았다고 하는 최 대표의 주장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론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사정에 의한 인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론에도 많은 악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사단을 정죄·처벌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기에, 거기에 도구로 쓰임 받은 인간을 하나님은 구원하여 주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단을 고소하는 데 일조했기에, 그 공로를 봐서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해 주셔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에 따라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에 의한 인간 창조론은 많은 모순을 지니게 되고, 자가당착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를 보고서 구원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또한 죄의 결과만 보고서 구원해주는 분이 아니다.

로마서 3:10절 말씀은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선포하고 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John Calvin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완전 타락한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인간은 당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요, 당신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기에 아주 사랑하고 아끼신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누구나 용서하고 구원해주신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구원론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신 것이다. (요3;16, 요일1:9)

이처럼 성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은 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전적인 인간의 죄에 대한 구원이지, 죄에 대한 결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최 대표의 구원론은 성경의 구원론과는 상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최 대표도 죄인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오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고 있다.(Page 41 중간) 그러나 곧 이어지는 부분에서 “전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죄의 결과는 있겠지만, 죄의 원천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으십니다”고 (Page 41) 하였기에, 최 대표의 구원론은 성경에 기초한 구원론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이 짓는 죄에는 자범죄도 있고, 고의적인 죄도 있고, 사단에게 미혹 받아 짓는 죄도 있다. 최 대표의 논리에 의하면 잘 몰라서 지은 죄와 사단에게 유혹 받아 지은 죄에는 원천적인 책임이 없고,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자범죄이던, 고의적인 죄이던, 사단에게 미혹 받아 죄이던 상관없이 인간의 전적인 책임을 묻고 있다.

하나님이 사단을 통해 죄를 짓도록 유도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서 광대무변하시다.(출3:15, 시104:1) 창조주로서 모든 것에 초월하고, 자유하시고, 어느 누구에게도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롬9:19-23)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계4:11)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당신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엡1:11)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직한 분이시다.(신32:4, 창18:25, 삼하23:3)
하나님은 공의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의 공의를 피조물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불과한 사단이 영계에서 행한 반역죄 그 죄 한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사단을 처리키 위한 또 다른 법적 근거를 만들 필요도 없고, 구태여 아담과 하와의 고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는 분이 아니기에(욥34:10, 사6:3, 신32:4, 약1:13)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도록 하였다는 것과 사단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하였다고 주장하는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에는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최 대표가 Page 34에서 언급한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은 가장 고귀한 육체를 입고 인간계에 들어오셨다”고 한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무엇인가? 최 대표의 “하나님의사정론”에 의하면 그 주된 목적은 사단 박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긴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창3:15)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막10:45) 밝히셨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주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흔히 마귀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요한일서 3: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보아도 인간 구원이 먼저이다. 왜냐하면 요일3:8절 말씀은 예수님의 “인간 구원”과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것은 사단·마귀 박멸이 아닌, 마귀들이 사람들을 미혹시켜 죄짓게 하는 일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음과 죄인들을 어둠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age 54-55, Plunner, 호크마종합주석)

요한계시록 19:20절, 20:2절, 20:10절 말씀들을 볼 때에 사단 처벌은 이미 오래 전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 속에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져 있는, 하나님의 결정사항이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가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 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20:10) 따라서 예수님이 이 세상이 오셨던 가장 주된 목적은 “인간 구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의도'인가 최바울 대표 '자신의 의도'인가

이상을 살펴볼 때,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의도”는 교계의 지지를 받지 못함은 물론, 김기동 목사의 베뢰아 신학은 한국 교계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지 오래다. 따라서 김기동 목사의 신학 사상과 유사한 최바울 대표의 “하나님의 의도·하나님의사정론”은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66권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 가운데 창세기는 두말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모든 시작을 알려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목적(창 1:26-28)과 우리를 향한 구원(창3:15)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는 비결(창 3:22-24)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중한 창세기 말씀을 곡해하여 버린다면 그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는 것이다.

최 대표가 쓴 '하나님의 의도'는 이처럼 귀중한 창세기 말씀에서 너무나 빗나갔다. 한마디로 최 대표의 '하나님의 의도'는 성경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본인 '자신의 의도'에 따라 쓴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분석해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구약 없이는 신약이 존립할 수 없다.” 그만큼 창세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장부터 12장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1장, 2장, 3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창세기의 꽃 중의 꽃이다. 아니 신구약 66권 성경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인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부터 3장의 말씀이 무너질 때 우리의 신앙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신앙의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의 의미와 목적도 상실할 수밖에 없고, 살아갈 소망도 잃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선교 단체의 대표라는 신분 때문일 것이다. 인터콥 최 대표의 모토는 “다른 선교단체의 목표는 전도와 양육이라고 한다면, 인터콥은 선교 비전 심는 데에 주력한다”이다. 이 말은 교회 안에 들어와 선교 교육을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 대표의 <세계영적도해> 제1 장 “하나님의 사정”에 나타난 그의 신학 사상을 볼 때 심히 우려된다. 교회는 선교단체를 아끼고 긴밀한 관련을 맺어 성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터콥 대표의 신학사상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의 임무는 성도들을 돌보며 보호하며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된 신학 사상, 비성경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된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교육시키도록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목회자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인터콥이 다른 선교단체들보다도 더욱 교회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선교단체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염려하면서 이 글을 썼다.

김한길 / 하이드팍침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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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가진 천년왕국 사상은 역사적 전천년설
박수암 박사의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하여> ⑨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76
newsdaybox_top.gif 2015년 05월 11일 (월) 09:31:23 박수암 박사 btn_sendmail.gif webmaster@amennews.com newsdaybox_dn.gif

박수암 박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신약학


IX. 천년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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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암 박사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현세의 심판과 교회의 승리” 중 “승리”의 주제를 보여주는 한 주제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천년왕국”을 보여주는 계시록 20:1-6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현된 왕국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21:1-22:5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차원에서 해석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천년왕국”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나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할 그런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을 잠정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년왕국설”(millenarianism)이란 계시록 20;4의 “천년”을 문자적으로(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현세와 내세 사이에 과도적인 중간시대가 있어, 인간의 이상향이(사 11:6-9, 65:18-25, 겔 37:24, 슥 8:12, 14:17-19, 암 9:13)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1천년간 변화된 지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하나의 학설이다.

이 학설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이견이 있다.

1) 무천년설 : 이는 본문의 “천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 시까지의 전 기간을 천년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보는 견해이다(Augustine, Luther, Calvin, A. Kuyper, Lenski, Berkhof, Vos, Warfield 등).

2) 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의 “천년”을 재림 직전 1000년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1000년 기간 동안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교회가 왕성해지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C. H. Hodge, A. H. Strong, Hengstenberg 등).

3) 전천년설 : 이는 “천년”을 문자적이나 상징적으로 보면서,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이끄신다는 것이다(이 견해는 다시 두 종류의 견해로 나누어진다).

① 역사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상 재림 한 번만 있고,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두 번으로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교회는 유대인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환난을 통과하며, 그 환난 후에 주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휴거되며 함께 지상에 내려와 이어 천년왕국이 어떤 변형된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다(Bengel, Godet, Hofmann, Bousett, Charles, Eerdman, Alford, Ellicott, Zahn 등);

② 세대론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비밀 재림하시고, 그 때 신자들은 휴거되어 공중에서 7년간 혼인잔치를 하며, 그동안 지상에 남아 있는 유대인과 불신자는 7년 대 환난을 통과하며, 이 환난을 통해 유대인들은 대규모로 회개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7년 대 환난은 다시 2분 되어, 복음 증거의 전3년 반과 종교박해의 후3년 반으로 나누어진다. 이 7년이 끝나면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 이 견해는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본다(Scofield, Darby, Walvoord, Hal Lindsay, 이상근 등 세대주의 신학자들).

그럼, 이 견해들 중 어느 견해가 가장 옳으며 성경적인가?

1. 관련된 본문들 석의

천년왕국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신약성서에서의 관련된 본문들을 바르게 석의할 필요가 있다.

(1) 계시록 20:1-6

이는 천년왕국설의 근거가 되는 본문으로서,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본문이다. 먼저 1-3절은 사단의 결박과 무저갱에 갇힘이 나와 있다.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2절) 천년동안 마귀는 결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세 시 마귀는 결박되었었다(막 3:27). 그러나 그 결박은 원리적인 것이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 완전한 실현이 이때의 결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있었던 결박으로 보나,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 잡은 용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약시대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는 시대이지, 무저갱에 갇히어 있는 시기가 아니다.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절). 2:26-27(“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3: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4: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 “보좌에 앉은 자들”은 그 다음에 설명이 되어 있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거나, 황제 예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계시록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6:9, 12:17),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었고, 그럼으로 해서 순교하는 자들이었다.

“심판하는 권세”는 사단의 패배로 인해 오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니엘 역시 네 짐승이 망하자 인자 같은 이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음을 보았고, 천사는 이를 성도가 나라를 얻은 것으로 해석했다(단 7:13-14, 22). 성도들은 이 때 짐승과 그 모든 열왕들이 멸망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의 통치권에 함께 참여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성도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을 말씀하셨다(마 19:28. cf. 딤후 2:11-12, 계 5:10).

이는 확실히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가 아닌, 환난을 통과한 천상의 “승리하는 교회”(church triumphant)를 가리킨다.

“살아서”(ἔζησαν). 이는 5절의 ἔζησαν과 더불어, 영적인 부활이나 중생을 가리키지 않고 육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순교까지 하는 성도들이라면 그들은 이미 영적인 부활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천년왕국설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6

이는 천년왕국설의 간접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로, 바울이 부활의 순서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끝내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를 언급한 구절이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까지 세 단계가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은 성도의 부활, 그 다음은 불신자의 부활. 불신자의 부활 시 그리스도는 인류를 심판하시고 인류의 최후의 원수인 사망과 음부를 불못에 던지신다.

여기에 사용된 순서를 알리는 부사 “다음에는”(ἔπειτα)과 “그 후에는”(εἶτα)은 모두가 선후관계(sequence)를 나타내는 시간의 부사이며, “그 다음”(then)을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사이에, 후자는 신자들의 부활과 “나중”(τὸ τέλος)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알린다. “나중”은 현 세대의 끝을 의미하기 보다,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끌어가는 종말론적 대 파국(the close of the great eschatological finale)의 끝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극점(consummation-point)을 가리킨다(G. Vos)1).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자의 부활과 계시록 22: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의 천년이 다 찬 후의 불신자의 부활 사이에는 최소한 천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왕 노릇하시리니.” 이 왕 노릇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기간 동안의 왕 노릇을 가리킬 수 있다(마 19:28, .Weiss, Lietzmann, Bachmann, Meyer 등)2).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인류인 성도들과 더불어 왕 노릇 하시는 천년왕국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이 천년왕국 이후 곡과 마곡의 멸망, 마귀의 멸망, 최후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시고 왕 노릇하는 일을 마치심)이 있게 되고, 영원한 신천신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3) 계시록 20:7-10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천년왕국” 환상 다음에 “곡과 마곡”이 사단과 함께 멸망하는 환상이 나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곡과 마곡의 이야기는 구약 에스겔서 38-39장에 나오는 바, 거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36-37장) 이상적인 성전(40-48장) 사이에 나와 있다. 이 경우,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백성을 최후로 괴롭히는 현세에서의 마지막 세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곡과 마곡의 환상이 계시록에서는 천년왕국 환상과(20:1-6) 신천신지 환상(21:1-22:5) 사이에 나와 있다. 이는 이 천년왕국이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왕국임을 보인다. 그러므로 천년왕국과 신천신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4) 계시록 11:11-12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계시록 11:11-12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교회가 환난을 당한 후 휴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여기 “삼일 반”은3.5일로서, 한 이레의 절반이 되는 수이다. 한 이레는 7일이고, 7의 절반은 완전수의 파열수로서, 불안정하고 짧은 기간을 나타낸다. 이의 배경은 다니엘서 9:27로서, 다니엘은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며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종교박해가 일어나는 기간이란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다니엘의 하루를 1년으로 상징화하여, 한 이레(7일)를 7년으로 보고, 그 절반인 3.5년 즉 42개월, 1260일을 복음 증거의 기간(11:3) 혹은 박해의 기간(12:6)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7년을 문자적으로 보고, 소위 “7년 대환난설”을 주장하며, 이 환난은 휴거 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받는 것으로, 계시록 6장에서 18장까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은 계시록의 원래 의도를 벗어난 것으로, 계시록을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책으로 만드는 잘못이 있다. 성경 어디에도 “7년 대 환난”이란 개념은 발견할 수 없으며, 신약 어디에도 유대인만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다.

다니엘서 9:27의 “절반에”란 부사는 יצִחִ(‘하치’)란 히브리어로서, 이는 “절반에”란 뜻도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안에”(불특정한 시발점)란 뜻도 있어(출 12:29, 24:6, 삿 16:3, 룻 3:8, 삼하 10:4),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국면(asp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260일은 복음증거의 기간도 되지만, 박해의 기간도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약시대가 복음을 증거하는 시대이며 동시에 박해를 받을 시기임을 말씀하셨다(막 13:9-10, 눅 22:36).

그러므로 한 이레, 3일 반, 1260일, 42개월, 한 때 두 때 반 때는 모두 동일한 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로서,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며, 한 이레의 절반은 신약시대에 있을 두 국면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다. 신약시대(“한 이레”)는 한 적그리스도적 왕이 자기의 때로 정했다는 점에서 전체가 환난의 시대요, 복음을 전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전체가 증거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한 후 환난이 온다는 점에서 신약의 절반인 것이다. 신약시대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했던 시대이며, 처음부터 환난을 당했던 시대이다. 그것은 크게 보면 7일간의 환난기간이요, 좀 더 상세히 보면 3.5일 간의 환난기간이다(계 12:6과 12:14 비교).

“그들이.” 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지 않고, 앞에서 말했던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즉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가 고난을 받지, 유대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니.” 교회의 휴거를 가리킨다. 세대론자들은 4:1의 “이리로 올라 오라”를 교회의 휴거로 해석하나, 그것은 요한더러 하는 말이고 교회더러 하는 말이 아니다. 즉 요한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이다(spiritual exaltation). 지상에서 고난당한 교회는 주님의 재림 시 공중으로 휴거를 당할 것이다(살전 4:17). 교회의 휴거는 환난 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난 후에 있는 것이다.

2. 가장 성경적인 견해로서의 역사적 전천년설

이상의 본문 석의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견해라 보게 한다.

(1) 저자의 의도에서 볼 때

요한 계시록은 박해 중에 있는 교회(ecclesia pressa)를 위로.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황제예배 강요를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황제예배를 부추기는 영지주의 이단(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위협 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는 말할 수 없는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슬픔과 낙담과 순교와 타협의 기로에 있었다. 본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이런 저자의 의도(exegesis)에서 볼 때 천년왕국의 약속은 교회에게 소망을 주기에 좋은 약속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난 받는 성도에게 왕 노릇함을 약속하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올바른 견해라고 보여진다.

(2) 계시록의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19:11-21), 짐승 의 멸망(19:17-21), 사단의 결박(20:1-3)을 전(前) 계시로 가지고, 사단의 멸망(20:7-10), 전 인류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20:11-15), 신천신지(21:1-22:5)를 후(後) 계시로 가지면서 그 맨 중앙에 위치하여, 이들 전 후 계시들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부분에 기록된 사건들은 서로 다른 사건들로서, 상호연대적인 선후 관계에 있으며, 그 어느 하나도 한 사건의 다른 표현(변이 : variant)으로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 천년왕국 계시는 인접한 다른 계시들과 더불어 계시록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나선형의 점진적 반복 구조에서 볼 때도, 천지상호작용의 구조에서 볼 때도, 본경과 삽경의 상호교차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교차대구법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천년왕국 계시는 계시록의 제일 마지막 정점에 나와 있다. 이것은 천년왕국이 땅의 사건이 아닌, 하늘의 사건이며, 영혼과 육신의 구원이 함께 아우르지는 사건이며, 구원의 절정으로 인도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를 영적 부활이나(무천년설), 고난과 관계없는 사건이나(세대론적 전천년설), 재림 직전 이 지상에서의 사건으로(후천년설)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3) 경고적 설교문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계시록을 경고적 설교문으로 볼 때, 권면(2-3장)과 이유(4-22장)의 구조 가운데 “이유”를 나타내는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있다. 위의 통일성에서 논한 대로, 이 부분엔 2-3장의 약속들의 성취들이 나와 있다. 그 성취들 가운데 하나가 천년왕국이다. 고난당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려면, 고난당한 교회가 장차 왕 노릇한다는 역사적 전 천년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고(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아모스), 재세시의 예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으며(마 19:28), 부활하신 후에도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말씀하신(계 2:26, 3:21)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기에 합당한 견해이다. 무천년설이나 세대론적 전천년설, 후천년설은 이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다.

(4)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계시록을 주후 1세기 로마제국과 교회와의 투쟁의 시각에서 시대사적으로 해석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은 종국사적으로 해석하는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속하며, 천년왕국을 현세의 영적인 부활로 보는 무천년의 견해는 맞지 않는다.

(5) 관련 본문들 석의에서 볼 때

천년왕국과 관련된 본문들을 석의해본 결과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천년왕국설임을 보여준다. 이 천년왕국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목 베임을 당했거나,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급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대론적인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무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며, 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신천신지와도 다르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며, 문자적 7년 대환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환난이 있는 것이며, 그 신약시대를 계시록은 3일 반, 3년 반(1260일, 42개월), 한 때 두때 반 때로 표현하며, 이 때는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며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때인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가졌던 천년왕국 사상이 역사적 전천년설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 파피아스, 폴리갑과 동시대 교부이었던 져스틴 마터,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의 제자 히폴리투스 등이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확증된다. 그것은 오늘날 릴예(Lilje), 스위트(Swete), 군드리(Gundry), 래드(Ladd), 벡위드(Beckwith), 뵈허(Böcher), 크라프트(Kraft), 비슬레이-머레이(Beasley-Murray), 마운스(Mounce) 월(Wall), 오온(Aune) 등 많은 학자들을 통해 받아드려지고 있다3). 이 사상은 한국교회의 경우 박형용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을 통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무천년설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현세를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로 갇혀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없는 점이 큰 약점이고,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무서운 박해와 환난이 따른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인데, 어떻게 재림 직전 1000년 동안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 갇히어 있으며,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시기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대론적 전천년설은 일곱 교회는 4:1에서 휴거해버리고 고난을 당치 않으며, 6-18장까지는 휴거되지 못한 유대인들이 당할 운명(7년 대환난)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큰 잘못이다. 고난과 위기를 맞이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글이 계시록이라면,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적합한 견해라 보여진다.

과연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와 극렬한 박해에 순교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초기 한국교회의 천년왕국 신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계시록에서 한국교회의 수난을 읽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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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Vos,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 244.
2) J. Weiss, Der erste Korunthian Brief, Göttingen, 1910, 358-359; H. Lietzmann, An die Korinther, Tübingen, 1923, 81-82; P. Bachmann,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d die korinther, Leipzig, 1910; H. A. W. Meyer, Critical and Exegetical Handbook to the Epistle to the Corinthians, II, Edinburgh, 1881-1883, 59-63.
3) H. Lilje, The Last Book of the Bible, Philadelphia, 1957; H. B.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Grand Rapids, 1957; R. H. Gundry, The Church and the Tribulation,, Grand Rapids, 1973; H. Kraft,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Tübingen, 1974.

하나님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십니다
by David Wilkerson | January 7, 2016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들고 어두운 시간 속에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3-7)

여러분은 여기 하나님의 목적이 보이십니까? 고통에 처한 우리를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극심한 고통속에 처한 다른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일 입니다: 달련되 자들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위로해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 더욱 심해질수록,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위로가 더욱더 강력해 진다는 것 입니다.

저희 사역 우편물 수신자 명단에는, 이스라엘과 제시란 소중한 두 형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형제는 100살 이며, 제시는 102 살 입니다. 한 형제는 92세에 은퇴 했으며, 다른 형제는 97세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수년간 저희 설교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이 두분은 혈육이며, 또한 주님안에서 형제 입니다. 두분 다 간증하기를, 일생의 시련을 통해, 그들안에 성령의 기쁨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한 세기의 참사 – 1930년 대의 대공황, 두번의 세계 대전, 무시무시한 가뭄 을 직접 목격해 오셨던 분 들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었던 시련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그들은 전보다 더 웃으며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시간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단 한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을 견뎌낸 그들의 간증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위로 입니다.

펌글 : 글이 좋아 퍼온 글 "David Wilkerson" 목사님의 글

좋은 소식입니다.    
앞으로 일어나야 할일 !!

믿음의 친구들에게 널리 알려주십시요.  

텍사스 주에서는  목회자와 교회의 종교자유를 동성애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단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통과됐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3845/20150624/%ED%85%8D%EC%82%AC%EC%8A%A4-%EC%A3%BC-%EB%AA%A9%ED%9A%8C%EC%9E%90-%EC%A2%85%EA%B5%90%EC%9E%90%EC%9C%A0-%EB%B3%B4%ED%98%B8%EB%B2%95%EC%95%88-%ED%86%B5%EA%B3%BC.htm


ACTION 필수!!

이제는 미국 전역에  텍사스주 처럼 교회와 종교의 자유를 보호받기 위해서는
며칠 전에 카톡으로 보내드린 First Amendment Defense Act (S. 1588, H.R. 2802)-  법안이 통과 되어야 합니다.  
남녀노소, 유학생, 누구나 온라인에 들어가서 10초도 안걸리는 서명해 주셔서 여러분의 자녀, 다음 세대를 지켜주세요!


**서명방법**


아래 링크 누르기


처음 나오는 파란글씨 “Sign the Action Alert!” 누르기

#1 Take Action 편지 밑에,  Your Name 박스속 에 이름만 적기

#2 Sender Information 에 이름, 주소 적어넣기

파란글씨 “Send Message” 누르면  완전 끝 !!!

서명하실 링크: 
http://www.nomblog.com/40449/



**물맷돌 기도운동팀 드림**

문의: 
tvnext.org@gmail.com    (서명을 tvnext 로 보내지 마세요)

댓글
2015.07.04 15:37:58
samuel

성소수자 단체 반대에도 의회 3분의 2 찬성으로 통과 (펌)


법안에 서명하고 있는 그렉 애보트 텍사스 주지사
(Photo : ⓒ텍사스밸류즈액션(Texas Values Action)) 법안에 서명하고 있는 그렉 애보트 텍사스 주지사


텍사스 주에서 목회자와 교회의 종교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통과됐다. 

현지 보수 단체 네트워크 텍사스밸류즈액션(Texas Values Action)은 그렉 애보트(Greg Abbott) 텍사스 주지사가 목회자 보호법안(Pastor Protection Bill) SB2065에 11일 서명함으로써 해당 법안이 텍사스 주의 정식 법이 됐다고 전했다.


텍사스 의회에서 당파를 초월한 높은 지지 속에 통과된 이 법안은 목회자나 교회, 종교 기관들이 신앙 양심과 믿음을 거스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동성결혼을 받아들이거나, 동성결혼식을 위해 시설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강요당하는 일을 막고자 제정됐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과 ACLU, 이퀄리티텍사스(Equality Texas), 텍사스프리덤네트워크(Texas FreedomNetwork) 등 성소수자 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 입법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텍사스 주 상원과 하원 대부분의 의원들이 법안의 필요성에 동의해 3분의 2 가량의 찬성으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법안은 즉각적인 효력을 발생할 수 있게 됐다.


조너선 사엔즈 텍사스밸류즈액션 회장은 이러한 결실에 대해서 "신실하게 종교적 믿음에 따라 행동해 온 목회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영광을 돌린다"며, "텍사스 주는 정부 개입 없이 종교자유의 기반 위에 굳건히 자리잡을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고 말했다.

텍사스흑인성직자네트워크(Texas Black Clergy Network)의 로버트 존스 목사는 법안 통과까지 협력해 온 텍사스 지역 지도자와 단체, 주 의회에 감사를 표하면서, 이 법안이 "우리가 자유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진지한 결의로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고 밝혔다.

스캇 샌포드 텍사스 주 하원의원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정부에 의해 동성결혼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그는 앞서 휴스턴 시에서 목회자들이 동성결혼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시 당국 조사에 설교문을 제출하라는 압력을 받은 사례를 들며, 미국 내에서 신앙 양심에 따라 동성애에 반대하는 일이 범죄 행위로 간주되는 분위기를 비판했다.


그는 "이번 법안은 텍사스 주가 정부에 의해서 국민의 종교자유가 보장되는 장소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준 것이다"며, 애보트 주지사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펌) 기독일보

댓글
2015.07.04 17:33:53
samuel

플로리다서도 목회자 보호 법안 발의... "오바마 5년전만해도 전통결혼 지지"

텍사스주 이어 테네시주도 동성결혼식 주례 반대 목회자 보호법 발의

동성결혼 합법화에 정치권도 반발…교회 보호법 마련 부심

(이상 펌 :기독신문)

인터콥 교류금지 결의…동성결혼도 반대키로
제34차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정기총회서 안건 처리
2015년 06월 18일 (목) 11:05:51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 제34차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가 열려 ‘인터콥 교류금지’를 결의했다. ⓒCKSBCA

인터콥에 대한 ‘교류금지’ 결의가 나왔다. 최근 월간<현대종교>가 ‘인터콥, 과연 변했나’라는 기사로 의문을 제기한 가운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최바울 선교사와 인터콥에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교류금지’ 결의를 한 교단은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CKSBCA)다. CKSBCA는 제34차 정기총회(CKSBCA)를 북가주 산호세 소재 뉴비전교회(담임목사 이진수)에서 6월 15일에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영적 축제’라는 주제로 개회해 신임 총회장으로 김상민 목사를 선출하는 등 임원을 개선하고 회무를 처리하고 있다.

인터콥 문제는 미국 현지 시간으로 17일(수) 오전에 상정되어 ‘교류금지’를 결의했다. 오후에는 인터콥 참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논의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CKSBCA는 ‘동성결혼’에 대해 반대하기로 결의했으며 이번 총회는 18일까지 열린다.

2015 산호세 총회에 참석하시는 목사님들께 올립니다.

2014 버니지아 총회에서 인터콥을 연구 조사한 "인터콥 연구위원회"는 인터콥엔 이단성이 있기에
 교제 자제를 타당함을 결론으로 내렸습니다.
그러나 버지니아 총회는 1년 만 더 연구하면서 인터콥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 지난 1년 동안 인터콥은 변화되었는가? 제가 monitoring 하면서 지켜본 바는 아래와 같습니다.
 (5월/2014 – 5월/28/2015 현재)

인터콥은 2014년 경에도 각 교단의 이대위의 지적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치겠다, 교계인사들을 영입했다, KWMA 인사 강00 목사를 인터콥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또한 "개혁 신학교에 다니며 새롭게 공부하고 있다. 지도교수의 도움을 잘 받고 있다”고 .. 하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변화되었을까요? 잘못된 것을 수정 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인터콥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입니다.
그 근거는 아래 3 가지 자료 입니다.

1. 인터콥, 가계저주론, "지도받고 고치겠다"는 약속 어디로? (뉴스미션 보도)
http://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61865
http://ikccah.org/free_board/15913

 2. 현대와종교 기획특집 인터콥 과연 변했나? (현대종교 6월호/2015년).. 여기에 보면 미신적 땅밟기는 여전합니다..등등.
http://ikccah.org/free_board/15927
http://cafe.naver.com/anyquestion/51507

 3. 인터콥은 전혀 고치지 않았다. 최바울이 출판한 만화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인터콥 (최바울)의 만화책 "시대의표적"을 보면, "시대의 표적"인 예수그리스도는 없고, 이스라엘 유대인 중심이 시대의표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정통복음적인 신학을 부정하고 대체신학으로 보는 견해가 그려져 있고, 시한부종말론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외 여러가지 입니다. 2014년 우리 남침례교단 연구위가 연구조사한 결론 그대로 입니다.
http://ikccah.org/15932
http://cafe.naver.com/anyquestion/51508


그러므로 이번 2015년 산호세 총회에서는 최소한 "인터콥과의 교류금지"를 결의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김한길 목사 올림.
택사스 중서부 지방회
하이드팍침례교회 (Austin  Texas)

김한길 15-05-30 11:54
 
참고:
5/2014 버지니아 총회에서 발표한 인터콥 연구위원회의 Report 보기
http://www.cksbca.net/KCSBCA/bbs/board.php?bo_table=SBCKR_BOARD&wr_id=104&sca=&sfl=&stx=&sst=&sod=&spt=0&page=5


 총회 연구위원회의 "인터콥 연구 보고서"


 본 연구위원회는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제32차 정기총회에서 인터콥 최바울 대표의 신학적 입장을 연구 분석하라는 위임을 받고 지난 일 년간 연구하였습니다. 연구위원들은 최바울 대표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가능하면 선입견 없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검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본 연구위원회의 연구 결과가 그동안 인터콥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된 목회자와 교회를 정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다만 본 연구위원회는 인터콥과 인터콥과 관련된 목회자와 교회가 보다 성서적 신학 위에서 선교를 계속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구 결과를 보고합니다.

연구위원들은 먼저 최바울 대표가 주장하는 문제점을 다른 교단에서 이미 연구 검토한 것을 참조하였고, 최바울 대표가 저술한 책을 참고하여 비교 분석하였습니다. 연구 검토한 자료에 의하면 최바울 대표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이 다음의 12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1. 인간과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과 마귀와의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다는 비 성경적인 주장
2. 성경의 역사를 신들의 전쟁(하나님과 마귀)으로 보는 이원론적인 위험한 사상
3. 삼위일체론에 있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를 주장
4. 왜곡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주장하는데 마치 성부 성육신설처럼 주장
5.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 목적의 왜곡된 비성경적 사상
6. 김기동 사상과 같은 왜곡된 사탄론 주장
7. 왜곡된 타락론과 합법적 마귀 정죄론 주장
8. 비 성경적인 백투예루살렘과 복음의 서진 운동을 주장
9. 왜곡된 종말론과 적그리스도론 주장
10. 비 성경적인 변방신학
11. 자의적인 성경해석과 성경 짜깁기
12. 이단적인 사상인 신사도 운동과 연계 증거가 나타남


 타 교단에서 제시한 문제점들의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들이 제기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최 대표의 저서를 면밀히 검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타 교단에서 제시한 것처럼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정리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사정’에 대한 입장

 에덴 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에 대한 사탄의 유혹에 대해 신들의 전쟁으로 묘사한 후, 최바울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은 반문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사악한 사탄을 상대하십니까? 즉각 사탄을 멸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규범을 지키지 않는 불법자이나 하나님은 당신의 규범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자신이 세워놓으신 규범을 전능자 자신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이해기 힘든 영역이지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규범을 자의로 변개하지 않으시고 지키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불법자이나, 여호와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규범을 지키시며 그러한 적법한 방법을 따라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 336 참조).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에 대항한 마귀를 왜 직접 그 순간 처벌하지 않고 인간이 창조되어 죄를 범한 후에야 마귀를 벌하시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것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사탄과 달리 “규범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사탄을 합법적으로 벌 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필요했고 선악과 사건은 바로 그 하나님의 속 사정을 계시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정’에 대한 최 대표의 생각만큼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한 문제점과 위험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없다. 최 대표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탄을 합법적으로 정죄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 세상이 사탄을 형벌하려고 만든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없는 주장일 뿐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과 세상의 창조의 근본적인 목적을 왜곡하는 심각한 신학적 사상이다. 이것은 그가 베뢰아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증거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성경 이해는 사탄이 없었다면 인간 창조는 필요 없었다는 생각과 그래서 인간 존재가 마치 사탄의 존재에 대한 부수적인 존재처럼 이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생각을 불어넣을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을 천하보다도 더 존귀하게 여기시며 그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2. 세상 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 전쟁으로 보는 이원론적 입장

 최 대표는 세상 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이 대등한 위치에서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영적 전쟁터로 보는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탄은 뱀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침투하였고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와서 신들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이원론적인 사상을 그 어디에서도 지지하지 않으며 전면으로 부정한다. 성경은 우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사탄이 비록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음을 욥기(1장)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이 끝나는 날 그는 그의 죄로 인하여 심판에 처해질 것이 요한계시록에 정해져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과 사탄과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사탄과의 싸움으로 그려져 있다(엡 6:12). 


 3. 삼위일체론에 있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를 주장한다는 입장

 세이연(세계 이단 연구소)에서는 최바울 대표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세계영적도해> 30페이지에 있는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완벽하게 증명하셨습니다”를 직접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물론 이와 유사한 내용들이 같은 책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문제는 그 내용상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은 주제중의 하나로 조심해서 살피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 삼위일체라는 용어 특성상 어느 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세 분으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최바울 대표의 신학적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최바울 대표의 저서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최바울 대표의 표현과 독자의 이해에 있어서 주의를 요하는 문제로 보인다. 왜냐하면 세이연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영적도해>를 보면 마치 최바울 대표가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 한 것처럼 말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의 책 <하나님 나라>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pp. 181-183). (물론 하나님 나라에 나타나는 영과 육체의 연합을 통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영적 전쟁이라는 사상이 성서적인 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최바울 대표는 이인규 권사의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자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자로 양태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코람데오 닷컴에 발표된 글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마태복음 3장에는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세례(침례)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 하나님께서 비둘기처럼 나타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위의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하시고 역사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각자 독립된 인격으로 존재하시고 역사 하신다.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신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또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눅23:46)라고 하신 것은 삼위의 독립되고 자율적인 인격 되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8:26).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은 독립된 인격으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독립된 인격으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가 되시는 가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것으로 신비스러운 영역이다.” (이인규 권사의 왜곡과 곡해에 대한 반박과 반론).

그리고 그는 자신이 니케아신경(325년), 콘스탄티노플신경(381년), 칼세돈신경(451년) 등의 정통기독교 신앙을 따른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코람데오 닷컴에 발표된 글이 진정으로 그의 입장이라면 우리가 이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편 코람데오 닷컴에서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 하나님의 나라 (세계 영적 도해 개정판), 왕의 나라, 왕의 대로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위격적 구분에 대해 적절한 구분을 유지하지 않아 양태론적 표현을 가지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최바울 대표 또한 문제로 지적된 표현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여 더 이상 혼란을 주어서는 안된다.

몇 가지 인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사모하는 120여 명의 육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왕의 대로, 66 참조. [교회사에서 정통 신학자 중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님을  “성도들의 육체 가운데 임하심”으로 표현한 적이 있는가? 최바울은 성자의 성육신도 하나님이 육체를 입은 것으로 성령 강림도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신 것으로 묘사한다. 아래 인용된 왕의 대로, 75 참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영으로 증거하시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이 땅에 오실 때 육체를 입고 오셔서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진 성도들의 육체 가운데 임하셔서 천국 복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영은 육체를 통해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냅니다. 육체가 없는 영은 인간계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귀신들이 인간의 육체를 그렇게 사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에덴에서 사단은 간교한 뱀의 육체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문맥에서 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 보임]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여 죄 없는 자로 이 땅에 보내셨고…”-(왕의 대로, 75 참조)


4. 에덴의 선악과와 왜곡된 타락론

 최 대표의 성경의 심각한 자의적 해석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 에덴의 선악과 사건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창세기 2장 16-17절을 근거로 한 설교 “지식의 나무”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지식의 나무로 보고 인간이 발전시킨 지식과 문명이 음녀의 적그리스도의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살라고 하셨으나 사탄은 지식으로 살라고 도전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다. 그들은 말씀을 거부하고 지식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지식권력으로 말씀의 권세를 무력화하려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따라서 교회사역 및 선교사역에 있어서 영적 대결의 중심에는 말씀이냐? 지식이냐? 바로 이 선택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영적도해>에서는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자유를 원해서 그 멍에를 없애려고 범죄했다”고 주장한다(p. 199). 또한 "사탄은 사람에게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이는 방법으로” (왕의 나라. P.11) 역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고 과학적 지식이 진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이 아니고 과학적인 지식이 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악한 무리들은 단순히 과학만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고 이러한 방법으로 본래의 선악의 개념을 해체시켜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p. 381). 이러한 성경 이해는 그가 얼마나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경 어디에도 선악과가 지식의 열매라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없다. 선악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말씀대신 지식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창조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7-28, 2:16-17)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 그들이 범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선악과를 지식 나무의 열매로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발전시킨 지식과 문명을 음녀의 적그리스도의 도구로 보고 적대시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물론 지식과 문명의 부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도구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런 왜곡된 성경 이해가 깔려있는 것이다. 지식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폐해도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과학과 예술, 그리고 의학 등의 발달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유익을 무시할 수 없다. 몇 몇 가지의 부작용 때문에 이것을 적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라는 최바울 대표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5. 복음의 서진과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이 부분은 연구위원들이 두 가지 다른 이견을 가지고 있다.
1) 최바울 대표의 주장 중에 또 하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복음의 서진’과 ‘백투예루살렘’이다. 이것은 그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속해서 서진하고 있다는 것과 세계의 끝인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백투예루살렘의 마지막 주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라는 주장이다. 복음은 항상 서쪽으로 전진하여왔는데 이제 말세가 되어 복음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있는 모슬렘 국가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마지막 총력을 다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에는 ‘복음의 서진’이나 ‘백투예루살렘”이라는 용어나 그에 관련된 언급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장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을 때 땅끝이 어디인가? 지구가 편편하다고 생각했던 중세시대 전에는 예루살렘 반대편이라고 생각했고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그 끝을 스페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지구가 원형인 경우 예루살렘의 끝은 그 반대편인 스페인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투예루살렘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2) 중국교회에 의한 복음의 서진을 통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는 백투예루살렘 비전은 이사야  49장 11~12절에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다. 이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성경이 아닌 몇 몇 중국 가정 교회 리더들이 개인적인 환상이나 예언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다. 그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다른 민족이나 교회가 아닌 중국 교회의 영적 유산으로 특별히 남겨 두셨다는 것이며 둘째,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다른 민족이나 교회가 아닌 특별히 중국 교회를 말세에 선택하셔서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교회사는 이미 소 아시아와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했던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초대 교회들에 의해 이란, 이라크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졌다. 동방 정교회에 속하는 그들의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교회들을 보존하고 있다. 인도에는 3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존재해 오고 있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를 통하여 중국에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전파되었고 심지어 몽고 지역에도 13세기 - 14세기에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러므로 복음이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성경적 계시가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 견해다. 또한 성경이 쓰여졌던 시대에는 지구를 동그란 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르러야 할 땅끝이 예루사렘이었다고 이해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런 해석은 초기 교부들이나 중세 신학자들과 종교 개혁가들의 글속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연구위원들의 두 가지 다른 이견에도 불구하고 백투예루살렘 운동의 전투적인 선교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운동에서 실행되는 지역 귀신론, 땅밟기 기도, 영적 도해는 비 성경적이며 미신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6. 결론

 최바울 대표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신론, 인간론, 창조론, 죄론에 있어 기독교 정통 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는 주장들이 그의 저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성경해석에 대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신학적 바탕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신학을 경시하는 태도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본 연구위원들은 최바울 대표의 잘못된 신학적 주장을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충분히 입증될 때까지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들은 인터콥이나 최바울 대표와의 교류나 참여를 보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합니다.
 

  인터콥은 변화되었는 가?  

(5/2014  5/28/2015 현재)  

 

인터콥은 2014년 경에도  교단의 이대위의 지적을 받으면 고치겠다,  교계인사들을 영입했다, KWMA 인사를 인터콥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개혁 신학교에 다니며 새롭게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고 있다 .. 등등을 하였다.  

그러면 과연 변화되었을까? 잘못된 것을 수정했는가? 

답은 무엇인가? 인터콥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정답입니다. 아래 자료들을 보시면 알수 있습니다. 

 

1. 인터콥, 가계저주론, "지도받고 고치겠다"는 약속 어디로? (뉴스미션)  

http://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61865 

http://ikccah.org/free_board/15913 

 

 

2. 기획특집 인터콥 과연 변했나? (현대종교 6월호/ 2015년)  

http://ikccah.org/free_board/15927 

http://cafe.naver.com/anyquestion/51507 

 

 

3. 인터콥은 전혀 고치지 않았다. 최바울이 출판한 만화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인터콥 (최바울)의 만화책  

http://ikccah.org/15932

http://cafe.naver.com/anyquestion/51508 

 

 

참고: 인터콥의 위장 포스터 

 http://ikccah.org/free_board/15849 

 

참고 :  현대와종교 2015년6월 특집  

http://www.hdjongkyo.co.kr/html/mod05.html?Hbmode=view&Hbid=13533 

 

  

 

2015년 6월

 

 

 

인터콥, 가계저주론, 천국지옥 간증 변화 약속은 지켜지고 있는가?

 

첨부파일

 

책_하나님의_나라.PNG 2015년6월-커버스토리.pdf 

 

여러 교단으로부터 신학적 문제를 지적받아온 인터콥은 ‘지도받고 수정했다’로 일관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 있는 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가계저주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 예장통합과 예장합신에서 참여금지 결의가 해제된 이윤호 목사는 소소한 수정만 거쳐 같은 사상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여기에 활발한 치유사역은 덤이다. 총회에 서약서까지 제출하고 지도받았다는 구순연 집사는 여전히 천국지옥 간증에 여념이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걸까.

기사 전문 보기 

검색어 : 인터콥, 가계저주론, 천국지옥, 간증, 교단, 하나님의 나라, KWMA, 최바울, 이윤호, 구순연, 가계적속박

 

요한이 가진 천년왕국 사상은 역사적 전천년설
박수암 박사의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하여> ⑨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76
newsdaybox_top.gif 2015년 05월 11일 (월) 09:31:23 박수암 박사 btn_sendmail.gif webmaster@amennews.com newsdaybox_dn.gif

박수암 박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신약학


IX. 천년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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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암 박사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현세의 심판과 교회의 승리” 중 “승리”의 주제를 보여주는 한 주제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천년왕국”을 보여주는 계시록 20:1-6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현된 왕국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21:1-22:5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차원에서 해석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천년왕국”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나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할 그런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을 잠정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년왕국설”(millenarianism)이란 계시록 20;4의 “천년”을 문자적으로(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현세와 내세 사이에 과도적인 중간시대가 있어, 인간의 이상향이(사 11:6-9, 65:18-25, 겔 37:24, 슥 8:12, 14:17-19, 암 9:13)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1천년간 변화된 지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하나의 학설이다.

이 학설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이견이 있다.

1) 무천년설 : 이는 본문의 “천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 시까지의 전 기간을 천년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보는 견해이다(Augustine, Luther, Calvin, A. Kuyper, Lenski, Berkhof, Vos, Warfield 등).

2) 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의 “천년”을 재림 직전 1000년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1000년 기간 동안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교회가 왕성해지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C. H. Hodge, A. H. Strong, Hengstenberg 등).

3) 전천년설 : 이는 “천년”을 문자적이나 상징적으로 보면서,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이끄신다는 것이다(이 견해는 다시 두 종류의 견해로 나누어진다).

① 역사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상 재림 한 번만 있고,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두 번으로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교회는 유대인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환난을 통과하며, 그 환난 후에 주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휴거되며 함께 지상에 내려와 이어 천년왕국이 어떤 변형된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다(Bengel, Godet, Hofmann, Bousett, Charles, Eerdman, Alford, Ellicott, Zahn 등);

② 세대론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비밀 재림하시고, 그 때 신자들은 휴거되어 공중에서 7년간 혼인잔치를 하며, 그동안 지상에 남아 있는 유대인과 불신자는 7년 대 환난을 통과하며, 이 환난을 통해 유대인들은 대규모로 회개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7년 대 환난은 다시 2분 되어, 복음 증거의 전3년 반과 종교박해의 후3년 반으로 나누어진다. 이 7년이 끝나면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 이 견해는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본다(Scofield, Darby, Walvoord, Hal Lindsay, 이상근 등 세대주의 신학자들).

그럼, 이 견해들 중 어느 견해가 가장 옳으며 성경적인가?

1. 관련된 본문들 석의

천년왕국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신약성서에서의 관련된 본문들을 바르게 석의할 필요가 있다.

(1) 계시록 20:1-6

이는 천년왕국설의 근거가 되는 본문으로서,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본문이다. 먼저 1-3절은 사단의 결박과 무저갱에 갇힘이 나와 있다.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2절) 천년동안 마귀는 결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세 시 마귀는 결박되었었다(막 3:27). 그러나 그 결박은 원리적인 것이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 완전한 실현이 이때의 결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있었던 결박으로 보나,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 잡은 용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약시대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는 시대이지, 무저갱에 갇히어 있는 시기가 아니다.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절). 2:26-27(“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3: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4: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 “보좌에 앉은 자들”은 그 다음에 설명이 되어 있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거나, 황제 예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계시록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6:9, 12:17),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었고, 그럼으로 해서 순교하는 자들이었다.

“심판하는 권세”는 사단의 패배로 인해 오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니엘 역시 네 짐승이 망하자 인자 같은 이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음을 보았고, 천사는 이를 성도가 나라를 얻은 것으로 해석했다(단 7:13-14, 22). 성도들은 이 때 짐승과 그 모든 열왕들이 멸망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의 통치권에 함께 참여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성도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을 말씀하셨다(마 19:28. cf. 딤후 2:11-12, 계 5:10).

이는 확실히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가 아닌, 환난을 통과한 천상의 “승리하는 교회”(church triumphant)를 가리킨다.

“살아서”(ἔζησαν). 이는 5절의 ἔζησαν과 더불어, 영적인 부활이나 중생을 가리키지 않고 육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순교까지 하는 성도들이라면 그들은 이미 영적인 부활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천년왕국설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6

이는 천년왕국설의 간접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로, 바울이 부활의 순서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끝내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를 언급한 구절이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까지 세 단계가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은 성도의 부활, 그 다음은 불신자의 부활. 불신자의 부활 시 그리스도는 인류를 심판하시고 인류의 최후의 원수인 사망과 음부를 불못에 던지신다.

여기에 사용된 순서를 알리는 부사 “다음에는”(ἔπειτα)과 “그 후에는”(εἶτα)은 모두가 선후관계(sequence)를 나타내는 시간의 부사이며, “그 다음”(then)을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사이에, 후자는 신자들의 부활과 “나중”(τὸ τέλος)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알린다. “나중”은 현 세대의 끝을 의미하기 보다,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끌어가는 종말론적 대 파국(the close of the great eschatological finale)의 끝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극점(consummation-point)을 가리킨다(G. Vos)1).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자의 부활과 계시록 22: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의 천년이 다 찬 후의 불신자의 부활 사이에는 최소한 천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왕 노릇하시리니.” 이 왕 노릇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기간 동안의 왕 노릇을 가리킬 수 있다(마 19:28, .Weiss, Lietzmann, Bachmann, Meyer 등)2).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인류인 성도들과 더불어 왕 노릇 하시는 천년왕국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이 천년왕국 이후 곡과 마곡의 멸망, 마귀의 멸망, 최후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시고 왕 노릇하는 일을 마치심)이 있게 되고, 영원한 신천신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3) 계시록 20:7-10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천년왕국” 환상 다음에 “곡과 마곡”이 사단과 함께 멸망하는 환상이 나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곡과 마곡의 이야기는 구약 에스겔서 38-39장에 나오는 바, 거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36-37장) 이상적인 성전(40-48장) 사이에 나와 있다. 이 경우,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백성을 최후로 괴롭히는 현세에서의 마지막 세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곡과 마곡의 환상이 계시록에서는 천년왕국 환상과(20:1-6) 신천신지 환상(21:1-22:5) 사이에 나와 있다. 이는 이 천년왕국이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왕국임을 보인다. 그러므로 천년왕국과 신천신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4) 계시록 11:11-12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계시록 11:11-12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교회가 환난을 당한 후 휴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여기 “삼일 반”은3.5일로서, 한 이레의 절반이 되는 수이다. 한 이레는 7일이고, 7의 절반은 완전수의 파열수로서, 불안정하고 짧은 기간을 나타낸다. 이의 배경은 다니엘서 9:27로서, 다니엘은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며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종교박해가 일어나는 기간이란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다니엘의 하루를 1년으로 상징화하여, 한 이레(7일)를 7년으로 보고, 그 절반인 3.5년 즉 42개월, 1260일을 복음 증거의 기간(11:3) 혹은 박해의 기간(12:6)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7년을 문자적으로 보고, 소위 “7년 대환난설”을 주장하며, 이 환난은 휴거 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받는 것으로, 계시록 6장에서 18장까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은 계시록의 원래 의도를 벗어난 것으로, 계시록을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책으로 만드는 잘못이 있다. 성경 어디에도 “7년 대 환난”이란 개념은 발견할 수 없으며, 신약 어디에도 유대인만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다.

다니엘서 9:27의 “절반에”란 부사는 יצִחִ(‘하치’)란 히브리어로서, 이는 “절반에”란 뜻도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안에”(불특정한 시발점)란 뜻도 있어(출 12:29, 24:6, 삿 16:3, 룻 3:8, 삼하 10:4),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국면(asp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260일은 복음증거의 기간도 되지만, 박해의 기간도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약시대가 복음을 증거하는 시대이며 동시에 박해를 받을 시기임을 말씀하셨다(막 13:9-10, 눅 22:36).

그러므로 한 이레, 3일 반, 1260일, 42개월, 한 때 두 때 반 때는 모두 동일한 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로서,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며, 한 이레의 절반은 신약시대에 있을 두 국면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다. 신약시대(“한 이레”)는 한 적그리스도적 왕이 자기의 때로 정했다는 점에서 전체가 환난의 시대요, 복음을 전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전체가 증거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한 후 환난이 온다는 점에서 신약의 절반인 것이다. 신약시대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했던 시대이며, 처음부터 환난을 당했던 시대이다. 그것은 크게 보면 7일간의 환난기간이요, 좀 더 상세히 보면 3.5일 간의 환난기간이다(계 12:6과 12:14 비교).

“그들이.” 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지 않고, 앞에서 말했던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즉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가 고난을 받지, 유대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니.” 교회의 휴거를 가리킨다. 세대론자들은 4:1의 “이리로 올라 오라”를 교회의 휴거로 해석하나, 그것은 요한더러 하는 말이고 교회더러 하는 말이 아니다. 즉 요한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이다(spiritual exaltation). 지상에서 고난당한 교회는 주님의 재림 시 공중으로 휴거를 당할 것이다(살전 4:17). 교회의 휴거는 환난 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난 후에 있는 것이다.

2. 가장 성경적인 견해로서의 역사적 전천년설

이상의 본문 석의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견해라 보게 한다.

(1) 저자의 의도에서 볼 때

요한 계시록은 박해 중에 있는 교회(ecclesia pressa)를 위로.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황제예배 강요를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황제예배를 부추기는 영지주의 이단(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위협 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는 말할 수 없는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슬픔과 낙담과 순교와 타협의 기로에 있었다. 본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이런 저자의 의도(exegesis)에서 볼 때 천년왕국의 약속은 교회에게 소망을 주기에 좋은 약속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난 받는 성도에게 왕 노릇함을 약속하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올바른 견해라고 보여진다.

(2) 계시록의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19:11-21), 짐승 의 멸망(19:17-21), 사단의 결박(20:1-3)을 전(前) 계시로 가지고, 사단의 멸망(20:7-10), 전 인류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20:11-15), 신천신지(21:1-22:5)를 후(後) 계시로 가지면서 그 맨 중앙에 위치하여, 이들 전 후 계시들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부분에 기록된 사건들은 서로 다른 사건들로서, 상호연대적인 선후 관계에 있으며, 그 어느 하나도 한 사건의 다른 표현(변이 : variant)으로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 천년왕국 계시는 인접한 다른 계시들과 더불어 계시록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나선형의 점진적 반복 구조에서 볼 때도, 천지상호작용의 구조에서 볼 때도, 본경과 삽경의 상호교차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교차대구법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천년왕국 계시는 계시록의 제일 마지막 정점에 나와 있다. 이것은 천년왕국이 땅의 사건이 아닌, 하늘의 사건이며, 영혼과 육신의 구원이 함께 아우르지는 사건이며, 구원의 절정으로 인도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를 영적 부활이나(무천년설), 고난과 관계없는 사건이나(세대론적 전천년설), 재림 직전 이 지상에서의 사건으로(후천년설)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3) 경고적 설교문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계시록을 경고적 설교문으로 볼 때, 권면(2-3장)과 이유(4-22장)의 구조 가운데 “이유”를 나타내는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있다. 위의 통일성에서 논한 대로, 이 부분엔 2-3장의 약속들의 성취들이 나와 있다. 그 성취들 가운데 하나가 천년왕국이다. 고난당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려면, 고난당한 교회가 장차 왕 노릇한다는 역사적 전 천년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고(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아모스), 재세시의 예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으며(마 19:28), 부활하신 후에도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말씀하신(계 2:26, 3:21)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기에 합당한 견해이다. 무천년설이나 세대론적 전천년설, 후천년설은 이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다.

(4)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계시록을 주후 1세기 로마제국과 교회와의 투쟁의 시각에서 시대사적으로 해석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은 종국사적으로 해석하는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속하며, 천년왕국을 현세의 영적인 부활로 보는 무천년의 견해는 맞지 않는다.

(5) 관련 본문들 석의에서 볼 때

천년왕국과 관련된 본문들을 석의해본 결과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천년왕국설임을 보여준다. 이 천년왕국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목 베임을 당했거나,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급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대론적인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무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며, 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신천신지와도 다르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며, 문자적 7년 대환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환난이 있는 것이며, 그 신약시대를 계시록은 3일 반, 3년 반(1260일, 42개월), 한 때 두때 반 때로 표현하며, 이 때는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며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때인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가졌던 천년왕국 사상이 역사적 전천년설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 파피아스, 폴리갑과 동시대 교부이었던 져스틴 마터,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의 제자 히폴리투스 등이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확증된다. 그것은 오늘날 릴예(Lilje), 스위트(Swete), 군드리(Gundry), 래드(Ladd), 벡위드(Beckwith), 뵈허(Böcher), 크라프트(Kraft), 비슬레이-머레이(Beasley-Murray), 마운스(Mounce) 월(Wall), 오온(Aune) 등 많은 학자들을 통해 받아드려지고 있다3). 이 사상은 한국교회의 경우 박형용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을 통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무천년설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현세를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로 갇혀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없는 점이 큰 약점이고,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무서운 박해와 환난이 따른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인데, 어떻게 재림 직전 1000년 동안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 갇히어 있으며,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시기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대론적 전천년설은 일곱 교회는 4:1에서 휴거해버리고 고난을 당치 않으며, 6-18장까지는 휴거되지 못한 유대인들이 당할 운명(7년 대환난)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큰 잘못이다. 고난과 위기를 맞이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글이 계시록이라면,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적합한 견해라 보여진다.

과연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와 극렬한 박해에 순교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초기 한국교회의 천년왕국 신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계시록에서 한국교회의 수난을 읽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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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Vos,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 244.
2) J. Weiss, Der erste Korunthian Brief, Göttingen, 1910, 358-359; H. Lietzmann, An die Korinther, Tübingen, 1923, 81-82; P. Bachmann,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d die korinther, Leipzig, 1910; H. A. W. Meyer, Critical and Exegetical Handbook to the Epistle to the Corinthians, II, Edinburgh, 1881-1883, 59-63.
3) H. Lilje, The Last Book of the Bible, Philadelphia, 1957; H. B.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Grand Rapids, 1957; R. H. Gundry, The Church and the Tribulation,, Grand Rapids, 1973; H. Kraft,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Tübinge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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