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논의를 해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예정론은 아직까지도 논의되어지고 있는 문제이며, "하나님의 신비"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제까지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문제삼는 사람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들은 예정론이 아닌 운명론을 예정론으로 착각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문제삼아야 할 것은 운명론이어야 했다.

 

운명론과 예정론의 차이를 아는가? 이것을 직접 설명하기 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문제삼는 자들이 어떤 논리를 펼치고 있는가?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예정이 있고, 예정된 자들이 있고, 따라서 예정된 자들만 믿을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예정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논리다! 그들은 항변한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절대주권의 하나님이심도 여전히 사실이다. 예정론을 문제삼는 자들은 이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폭군이라고 항변한다. 왜 그렇게 항변하는가? 왜 절대주권의 하나님은 폭군이라고 그들은 그렇게도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 외치고 또 외치고, 또 외치는가?

 

그들의 설명은 이렇다. 예정론은 결국에는 "인간의 인격과 의지를 억압 또는 속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고 싶어하는 인간들을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지마저도 박탈하시는 그런 예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논리가 예정론의 논리라고 생각되는가, 아니면 운명론의 논리라고 생각되는가?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마저 모두 박탈하고 믿고 싶은데도 못 믿도록 몰아가시고 의지를 박탈하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러한 예정론을 주장하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성화를 강조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운명과도 같은 그런 예정 속에서 진행된다고 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우선 운명론과 예정론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은 잘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자신이 믿지 못하도록 마치 의지마저 박탈하셔서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종종 하나님을 그렇게 묘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되고 듣게 된다. 자신은 의지를 동원하여서 좀 더 구별된 삶을 살고 싶고 경건한 삶을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런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게 속박하심으로 우리가 그런 구별된 삶을 살 수 없다고 핑계를 댄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에 대한 속박을 풀어 주시기 까지는 잘 믿기는 글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묶어 두시고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두실까? 

 

여기에는 아주 묘한 문제가 깔려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예정론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책임의 문제가 예정론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만드셨다. 그렇다면, 죄인이어도 불신자이어도 의지가 있는 인간이지, 의지가 없는 인간일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불신자도 부분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선,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서의 선과는 다르다. 아무튼, 우리의 결론은 인간이 의지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예정론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만을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 분명, 예정론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 그러나, 그 예정론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정론을 다루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성을 분명히 해야 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부분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예정론을 떠올리면, 하나님의 주권과 결부시키면서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그러한 이유로 예정론이 잘못이라고 반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정론을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것이 우선적으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알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성도)의 책임에 관해 함께 고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보인다. 

 

어째서, 예정론을 떠올리면 꼭 주권적인 하나님을 폭군 같은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그들은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베푸신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기 위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주신 하나님이시며, 성도의 책임을 마땅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성삼위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왜곡되게 오해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성도)의 책임의 관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고, 이 관계를 알지 못하면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도의 책임의 관계를 푸는 열쇠(전제라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예정론을 올바로 알기 위한 전제이다.

 

성삼위하나님-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성도)의 책임-예정론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온전히 알 수 없다고 전제해야 옳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한한 하나님 앞에 설 때 바람직한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이 한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 모든 교리가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성삼위하나님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도의 책임의 관계, 예정론, 내적인 부르심 또는 성령의 유효한 불가항력적 부르심, 중생, 믿음, 회심, 성화 등등의 이 모든 교리는 함께 다루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출처: 양무리마을/열매

예정론 3: 왜 누군 믿고 누군 믿지 않는거지?

 

이 예정론 시리즈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확고한 기본적이고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진리들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진리들이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경적이요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예정론을 오해하고 조롱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 교리를 온화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 나는 또다른 기본적 진리들의 토대를 마련해 보려 한다. 이 진리들은 예정과 관련하여 그 대상과 의미, 시기와 이유 등 실제적인 주제들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인간의 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등을 알고 있는데도, 왜 누군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누군가는 믿지 않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두개의 반응이 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18, 36)

예수님께서 오천명(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계수한 인원)을 먹이시고 난 후  무리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만 남게 되었다. 예정의 이유를 살펴보면서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과 예정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이야기해 보자.

 

* 믿음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든 신념, 소망을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을 말할 때 복음을 “받는다(receiving)”고 하거나, 좀더 인격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embracing)”고도 표현했다 (도르트신조 1.4항). 이것은 중요한 부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믿음을 어떤 정신훈련이나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천상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받는다”, “영접한다” 등의 말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가? 믿음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 말은 인격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되 그분이 나의 모든 것 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허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다. 요한복음 1:11-12에서 요한은 이렇게 진술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묘사가 자기자신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받고 영접하고 있는가?

 

* 왜 믿음이 필요한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요 3:16), 영생을 얻으며 (v. 16), 구원얻을 수 있기 (v. 17) 때문에 그 믿음은 필수적이다. 바꿔말하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정죄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니, 사실상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우리 머리위에 임하였다 (v. 36).

믿음이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세상에 속한 우리가 죄악의 처지와 그 가운데 행하는 일, 임박한 정죄 등을 위한 치료책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히 11:6),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 믿음의 복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저를” (v. 16), “아들을” (v. 36) 믿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믿음의 복들에 관한 것이다. 복(단수)은 예수님 당신이시고, 복들(복수)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들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정죄와 진노에 대비하여 영생의 복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우리가 정죄와 진노,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받고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즉, 영원한 사망, 혹은 정죄)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아래 찬송가의 가사를 보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떻게 믿음이 하나님의 예정 사역과 연관되는지 설명해 보려 한다 . 다음의 의문을 설정하여 설명을 이어가 보자. 만약, 믿음이란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이는 멸망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을 받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초두에 그리스도를 받는 모든 자, 곧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고 설명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앞서 발생하는 일을 언급하며 심화된 내용을 설명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3). 여기서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요한복음 3:6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난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과 3장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죄성 안에 불신앙의 원인과 잘못이 포함되었음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리 없고,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 야고보는 이렇게 진술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니라” (약 1:13). 불신앙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 (엡 2:1-3). 우리의 본성은 훈련되지 않은 개와 같아서 사납고 통제 불능이며 본능대로 행동한다. 우리는 그렇게 본성과 실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개는 따로 달리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다. 그 개는 그냥 달리고 싶을 달릴 뿐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우리를 예수 안에 믿음을 놓으려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반면, 믿음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당신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살리신다 (엡 2:4). 에베소서 2:8-9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9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누가는 사도행전 13:48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물을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왜 그런가?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받는 선물 같은 것도 아니요, 이 어른들이 저 어른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니다.

 

* 믿음의 영원한 근원

 누구는 믿고 또 누구는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 당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주시는 것을 인하여 찬송하는데 (v. 3), 여기서 그 모든 신령한 복은 예정의 복 (vv. 3-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복 (vv. 7-12),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인치시는 복 (vv. 13-14) 등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v. 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v. 4) 사랑 안에서 예정하시는 복 (v. 5)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 (v. 5)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이라거나 혹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의지에 따른 선택인 것이다.

11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얻은 이들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소유와 그 유익을 우리가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 기업을 물려받았는가? 11절은 계속해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내가 진리와 믿음에 대해 씨름하고 있을 때 말그대로 외면하던 구절 중 하나였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기로 예정하신 까닭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역사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목적하신 바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 강퍅한 마음을 누끄러뜨리시는 하나님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를 고민할 필요성이 없는 것 아닌가?” 이 의문이 바로 일반적인 반론, 혹은 오해이다. 그 답은 영원한 예정을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어떠함에 상관없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당신을 믿게 만드신다.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일시적인 믿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행전 13:48을 기억해 보라. 바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어떻게 이방인들은 때맞춰 영원한 작정으로 믿음을 얻게 되었는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쓰고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 16:14).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기로 루디아를 예정하셨고,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도르트신조가 놀라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 까닭이다. “그 결정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퍅한 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누그려뜨리시는 은혜를 베푸사 믿음을 얻게 하신다.” (1.6항)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영접하는 필수적인 방법인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또한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돌같이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그리고 이것은 그런 역사를 하실 수 있고 기꺼이 행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놀라운 격려가 아닌가?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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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첨부파일 예정론 19 숙명론 자유행동.hwp

 

예정론 19: 제15장 예정론은 숙명론인가?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교의 숙명론을 혼동하는데서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미래의 사건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하는 것 외에는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양자는 운명론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정론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숙명론은 물리적 필연성과 구별 지을 수 없는 마치 큰 강이 나무 조각을 떠내려 보내듯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맹목적이며 무지한 그리고 비인격적이며 무도덕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건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완성되어가고 있는 하나의 통일된 계획 또는 목적을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결정은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한 합리적 결정들이며 그는 “모든 피조물이 지향하는” 하나의 큰 목표를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서, 그 모든 사건들의 존재 목적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둘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숙명론은 궁극적 원인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습니다. 즉 전 우주를 통치하는 것은 무한한 지혜와 사랑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맹목적인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숙명론은 자연의 운행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의 원인을,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보았자 헛수고이며 어린애처럼 불평만 하게 될 미지의 부가항력적인 어떤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정론 안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고스란히 보존이 됩니다. 그러나 숙명론은 의지의 자유 선택 및 결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행동 역시 자연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필연에 속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숙명론의 주장처럼 불가항력적, 비인격적, 추상적 능력이 모든 행동의 원인이라면 자유의지를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책임은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는 인간이 보기에 비인격적, 맹목적인 것 같은 모든 세력들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방편일 뿐, 이 세력들이 인간의 의지까지 장악한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책임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또 숙명론이 진리라면 인간에게는 종교, 사랑, 자비, 성결, 공의, 지혜 등을 추구할 동기가 없어질 테지만 예정론은 오히려 인간에게 이런 덕행들을 사모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결국 숙명론은 인간의 회의와 절망으로 인도하는 반면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주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기계의 작동과 다른 것만큼, 또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함없는 사랑이 인력의 힘과 다른 것만큼이나 예정론과 숙명론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스미스(Smith)는 “예정론은 우리의 생명과 마음이 하나의 수레바퀴와 같은 인정 없는 운명이나 회오리바람 같은 광무하는 우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장중에 달려 있다는 영광스런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고 말합니다.

  칼빈도 예정론을 숙명론이라고 말하는 비난에 대해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는 “운명이란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필연이라는 말의 또 다른 명칭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전혀 자유가 없고 필연이란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분으로 여기는 교훈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정의해 볼 때 예정이란 어떤 속박도 받지 않는 자유자재하신 하나님의 모략이나, 그것으로 모든 인간과 사물들을 제정, 통치하시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부분, 심지어 지극히 적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지혜롭고 공평하게 제정,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일 독자들이 나의 저서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만 한다면 사실 운명이란 모욕적인 용어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꺼려하는 용어임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어거스틴마저도 그 당시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이와 똑같은 극단적인 말로 비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교적 숙명론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관한 지식이 신(神) 자체에 대한 통념만큼이나 이 세상에 방치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사를 연구해 보면 유물론이 바로 숙명론임을 알 수 있으며 범신론 역시 숙명론과 많이 결부된 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숙명론자라면 누구나 다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철저한 숙명론자가 된다면 그는 “만일 내가 오늘 죽을 운명이라면 어차피 죽을 테니까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 또 만일 내가 앞으로 수년간 생존할 운명이라면 어차피 살 테니까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어느 때까지 생존하도록 예정하셨다면 식사를 거절하는 식의 자살적 행위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실 것까지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해밀톤(Hamilton)은 “예정론은 단지 외부적으로만 이교의 숙명론과 비스해 보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냉혹하고 비인격적인 운명의 수중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갈보리에서 죽게 하신 자비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공의롭고, 성결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설사 어떤 일이 잘못 되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황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신중히 검토해 보지 않았거나 이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는 자는 예정론을 숙명론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예정론이 무엇이고 숙명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그런 실수를 범한다면 그것은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우주는 하나의 조직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의도와 목적을 없애버리는 숙명론을 택하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섭리적으로 지배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자유이신 것처럼 인간도 인간본성의 한계 내에서 자유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주장하는 성경적 교리의 예정론을 택하든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정론과 이교적 숙명론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서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양자택일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제16장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행동과 도덕적 책임에 있어서 모순된다?

 

I. 인간의 자유행동 문제

 

  이제 우리가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만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란 자신의 이성적 결정으로 행동하는 지성적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모든 인간의 생애와 자연계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들의 실제적인 과정을 필연적으로 확정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행동은 강요가 아닌 자신의 희망과 성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행위의 성격이 우연적이며 불확실한 것이라면 예정과 자유행위는 분명 모순될 것입니다.

  만물을 생기게 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위대한 힘의 존재를 믿는 철학자는 무한한 의지의 지배 아래서 유한한 의지가 어디에 나타날 수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 어려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는 데 있지 않고, 이 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무한히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죄인인 피조자의 자유 위에 두는 조화에 있습니다. 모든 사건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그 사건 속에 있는 인간의 자유도 예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사건과 마찬가지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하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며, 그 안에는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반응하는 수많은 자유행위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주권 하에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정식으로 설명을 해 주시지 않았고, 우리 역시 우리의 유한한 지식으로는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들은 인간의 생각과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행위자의 행위를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 속에 포함시키는데 대해 전혀 곤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사람들도 인간의 자유를 분명히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장래 일어날 모든 일을 자주적으로 불변하도록 미리 작정하셨다.”고 말한 후에 “비록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근원이 되시거나, 지음 받은 피조물의 자유를 억제하시거나, 제2 원인이 발생할 자유나 가능성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신다.”고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그 개인의 행동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현되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건축을 하는 경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건축가는 먼저 설계도를 작성한 다음 일꾼들을 고용해서 공사를 진행합니다. 이 일꾼들은 모두 자유로 일합니다. 어떤 종류의 강요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노임 또는 노동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여 그 공사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축가가 계획한 것을 자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완성해 놓습니다. 이 때 건축가의 의지는 그 건축 공사의 중요 의지(또는 일차적 원인)가 되고, 고용인들의 의지는 이차적 의지(또는 이차적 원인)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자유나 책임을 침해하는 일이 없이 그들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무한하신 강도(强度)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의 의지는 일차적 원이이요 인간의 의지는 이차적 원인으로 이 양자는 완전한 조화 속에서 일을 합니다.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원리는 그것이 “피지배자의 동의”에 입각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론 하나님을 절대적 지배자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신자의 동의를 무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감화를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받으며 주권자의 뜻을 행하기를 일생일대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II. 이 반론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인간의 자유행위력과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예정을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예지를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미래에 생길 어떤 사건을 예지하셨다면 그것은 예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이 자유행위력과 모순된다면 예지 역시 자유행위력과 모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하면서 예정교리는 버리고 예지교리는 계속 지지하고 있으니 참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요? 유니테리안파(16세기의 이단 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와 유니테리언파(Unitarians)'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는 비복음적이면서도 이 점에 있어서는 알미니안파보다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가지(可知: 알 수 있는 것)적인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자유 행위는 불확실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신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유행위자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이 때 자유행동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로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예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겉옷을 제비뽑은 것,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 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기자들은 어떠한 자유행위도 하나님이 예지하신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유다나 베드로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제자들은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평한 재판관이 뇌물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과 수전노가 금괴를 단단히 붙잡고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압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예지가 아들의 행위상의 자유를 손상시킨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한 지식의 소유자인 인간도 타인의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언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예지하시지 못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의 확실성은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자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이 예상치도 않았던 방면으로 마구 나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예지란 말은 사실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지란 미래의 행위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확실한 것을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혀 불확실한 사건을 확정적인 일처럼 예지하신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모든 사건은 확정적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예지하지 못한다고 말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교리와 예지교리는 서면 같이 서고 넘어지면 같이 넘어지는 상호수반적인 교리입니다.

 

III. 확실성은 자유행동과 일치한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확정적이었다는 말은 그 사람의 행위가 강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원했다면 그는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않고 그가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은 행하는 능력과 기회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적 영향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결정되지만 강요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있고 종종 달리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유다와 그의 공범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남겨졌고, 그 사악한 성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비난했으나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행동했다고 선포하였습니다(행 2:23). 그들이 하려고만 했다면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고 달리 행동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행했으며 그것은 또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확실성과 자유행위력은 서로 일치합니다.

  확실성과 자유행위력의 일치를 증명해 주는 또 다른 논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의 자유를 갖고 있지만 종종 어떤 기존 조건 아래서 행동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며 그 구출 행위는 예언적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그 일을 행할 때는 전혀 자유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 행위자이지만 언제나 공의롭게 하십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구원 얻은 성도들도 자유행위자이지만 결코 범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영원토록 천국에 있으리라는 보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악마나 타락한 인간은 비록 자유행위자이지만 범죄할 것입니다. 부친은 그의 아들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아들의 행동을 미리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들은 자유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부친이 아들을 의사로 만들 계획이라면 그는 아들에게 그 길을 따르도록 격려하고, 그 방면의 책들을 읽게 하며, 그 방면의 학교에 다니게 하는 등 아들의 마음을 그 방면으로 유도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그러나 훨씬 더 무한한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로 행하면서도 확정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건의 발생을 확정시킬 뿐입니다. 행동의 확실성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작정이 동시에 행동자의 자유도 결정하는 것입니다.

 

IV. 인간의 자연적 의지는 악에 예속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어떤 외적 강요에 의해 그의 선택의 자유나 책임을 간섭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락 상태에 있는 인간이 갖는 자유란 ‘노예적 자유’에 불과합니다. 그는 죄의 포로가 되어 자진해서 사탄을 좇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길 능력도 의향도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자유’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유 의지’라는 말보다 ‘자기 의지’라는 말이 타락 이후의 인간 상태를 표현하는 데는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실로 스스로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실수라고 해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 그는 천사와 같이 임의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악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물론 루터가 가르친 교의입니다. “노예적 의지”라는 그의 저서에서 루터는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강요도 받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영원부터 뜻하시고 인간이 꼭 행할 것을 예지하신 것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지는 반드시 성취되고 그의 예지는 확실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나 인간의 의지는 무슨 일이든 남에게 강요되어 행하지는 않는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지에 지배되어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는 확실불변하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또 “만일 자유의지가 그 자유를 상실하자 곧 죄악의 포로가 되어 어떤 선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 자유의지란 말은 사실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말로서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의지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후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영원불변하시고 무오하신 의지로서 만물을 예견하시고 의도하시고 행하시는 것이지 결코 있을 수 있는 가능성만 가지고 어떤 일을 예지하시는 것이 아님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가변적이요 우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거나, 심지어 우리가 우발적으로 행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되어 필연적이요 불변적으로 행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불가항력적이어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하나님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요 그의 예지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는 만일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할 수도 없을 일을 행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들의 힘으로는 전혀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이 마른 자는 손을 펴라는 명령을 받았고(막 3:5), 병자는 일어나 그의 침상을 가지고 걸으라는 명령을 받았고(막 2:11), 죽은 나사로는 일어나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요 11:43,44). 그리고 인간은 믿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등의 성구를 볼 때 인간이 자초한 도덕적 무능력 때문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V.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갈 의지를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적 감정, 외적 환경, 습관, 욕망, 동기 등을 다스리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정하십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측량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는 이 감화가 어떻게 역사하여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실질적인 것이며, 이 둘은 완전한 조화 속에서 함께 역사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했으나 즉시 그 명령을 한 이유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빌 2:12,13)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역시 “주의 권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라고 말함으로써 똑같은 원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종류에 따라 각기 특성을 부여받았으니 저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모든 행동은 이미 창조 당시에 예선적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는 공통적 행동을 가졌으니 이 행동은 이미 그들이 창조될 때 받은 것으로 예선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소와 말도 역시 그들이 행할 동작의 형태가 예정되었고 식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은 네 발로 걷거나 말처럼 소리를 지르도록 예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외부에서 결정된 행동은 자유행동이 아니지만 내부에서 자기 이성으로 결정한 행동은 자유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렇게 인간의 내부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하나님의 작정 곧 예정 속에는 모든 인간이 자유행위자가 될 것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환경이나 외부적 영향 아래에서 어떤 욕망과 습관에 따라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것과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자신의 이성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할 대상도 일정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작의 원인을 알고 다스리시며 또 그 행동이 어떻게 진전될 것을 아시나니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정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징키우스는 인간은 자유행위자라고 말한 후에 “인간은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작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떠한 강요도 의식하지 않으며 마치 어떠한 지배도 받지 않는 독립자인 양, 자기가 완전히 자기의 주인인 양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덧붙임으로써 이 개념을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루터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저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작정이나 정하신 바를 성취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강요에 못 견뎌서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원리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성령을 통하여 그들 안에 역사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의욕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없는데 하나님은 그의 선민에게만 이런 의욕을 주십니다. 이때 선민의 자유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친구를 권하여 같이 산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 얻은 자와 구원 얻지 못한 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 H. 존슨(H. Johnson)의 비유를 보면 “이백 명의 범죄가 투옥되어 있다고 하자. 나는 그들의 석방을 위해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공의가 만족되고, 법의 정당성이 입증된 죄수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옥문 빗장이 벗겨지고 그들의 절대적 사면이 약속되어 모든 죄수에게는 그들이 곧 자유인으로 출옥할 수 있다는 확약을 주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이 때 내가 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 나의 수고를 헛수고로 돌려 보내지 않으려고 이백 명 중 백오십 명을 개인적으로 방문으로 그들에게 힘과 정성을 다해 출옥할 것을 권면한다고 하자. 이것이 바로 선택이다. 이럴 경우 내가 그 남아 있는 오십 명을 옥중에 가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 나의 수고는 여전히 충분하고, 옥문 빗장은 여전히 벗겨져 있으며, 옥사의 대문도 여전히 열려 있으므로 걸어 나오기만 하면 그들의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옥중에 있는 자들 역시 자기들이 원하기만 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내가 옥중에 남아 있는 오십 명을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알미니안파는 종종 인간은 본래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덕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악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펠라기안의 교의를 그대로 고수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거룩한 천사의 선함, 영화된 성도의 선함 심지어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까지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덕을 선택함에 있어서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하늘나라와 같은 상태에서는 덕이란 칭찬할만한 선(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이 인간의지를 고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힘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선악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금수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지의 극치는 아닙니다. 그래서 모즐리(Mozley)는 “의지의 초고로 완전한 상태는 필연의 상태이다. 선택의 능력은 순전한 의지의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요 결함이다. 의지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증거는 의지가 선악을 앞에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니가?”라고 말합니다. 현세에서는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는 하는 은혜가 한결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한 자라도 누누이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내세에게서는 은혜가 한결같이 부어진다든지 아니면 완전히 거두어지든지 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선을 결단하든가 아니면 악을 결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력과 인간의 행동력이 연합하여 한 행위를 산출하게 되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방법을 고찰해 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의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부분은 인간의 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성경 전체가 그 모든 부분에서, 즉 표현 양식에서든 교훈의 실질에서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해밀튼(Hamilton)은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각 성경 기자를 기계처럼 사용하셨다거나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을 받아 적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배하시어 그들이 기록한 것이 진실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기록으로 주시고자 한 바로 그 진리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지혜, 언어 및 표현 양식을 사용하게 하시되 그들이 기록할 때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오류로부터 지켜주시어 하나님이 모든 세대에 걸쳐 그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한 바로 그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우발적인 일”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기는 사건이 정확한 예지의 객체가 되거나 사전준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모순입니다. 그 일의 성격상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톱레이디(Toplady)의 말처럼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그가 운명의 연신을 예배하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든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든, 사실상 섭리의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쫓아내는 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실 수 없다면 그는 수많은 인간의 자의적 행동결과에 대해 항상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니 얼마나 분주하실 것입니까? 만일 인간이 실제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회심시키시기 위해 마치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하듯 여러 개의 안을 마음에 품고 가서 제일 안(第 一案)이 실패하면 제이 안, 제삼 안을, 이런 식으로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자유행위자의 행위가 전혀 불확실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미래를 예지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날마다 접하게 되는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수없이 많이 놀라면서 그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비합리적이며 비성경적인 견해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부인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신다는 것과 인간적 견지에서는 아무리 불확실하게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확실하고 부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견대는 그 타당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자신을 제한하사 인간의 미래 행동 중 어떤 것은 알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론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이론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의 악행을 눈감아주는 부모의 어리석은 행동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든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서든 제한을 받으신다면 그 하나님은 유한한 하나님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죄인을 회심시키려고 열심히 분투하시지만 그들의 자유행동력을 무시하지 않는 한도에서 권면할 뿐이며 그 이상은 행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파의 이론은 마치 영원히 서로 투쟁하는(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길 수 없으므로) 선과 악의 두 원리가 있다고 말한 옛 페르시아 인(바사제국)들의 세계관과 그 의미하는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그 통치권과 통치력을 박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피조자를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권 밖에 두는 것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피조자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지와 목적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셈이 됩니다. 이 이론은 또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죄를 범할 수도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전복되고 사탄과 악한 천사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게 되어 마침내 온 세계가 악으로 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VI. 의지가 결정되는 방법

 

  인간은 이성적 행위자이므로 그의 독자적 행위에는 틀림없이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의지는 반드시 최강의 동기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만일 의지가 약한 동기에 의해 결정을 내린다거나 아무런 동기도 없이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원인 없어도 결과가 생길 수 있자는 말만큼이나 모순된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음을 양심이 가르쳐주며, 또 우리가 어떤 일을 해 놓고 난 후에는 그보다 더 강한 다른 동기가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는 그다지 강한지 않은 동기나 잘못된 판단에 따라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기라 할지라도 그 행위를 산출해 낼 만큼은 강한 것입니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다른 한쪽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기 싫은 일을 선택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때의 동기는 매우 약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일을 선택하는 이유는 어떤 다른 세력이 그 동기에 인력(引力)을 가하기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픈 이를 기꺼이 뽑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아파서 정말 뽑아버려야겠다는 더 강력한 이유가 첨가되기 전에는 그 이를 뽑아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어떤 일을 결정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산에 거주할 것을 선택한 자가 동시에 서울에 거주할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인간의 결의는 그의 천성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욕구, 성향, 기호, 지식 및 성격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자도 아니요, 정신 및 물질의 법칙으로부터 독립한 자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상에 진술된 모든 것의 영향 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가장 강한 성향 및 동기가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는 대로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그 당시에 우리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호소한 것들이 곧 우리의 의지를 결정하게 한 것들입니다. 핫지 박사는 “의지는 어떤 필연적 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기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마음의 선행(先行)적 상태 즉 심중의 가장 강한 동기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그의 결의가 그의 마음을 의식적(자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자유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행위가 자신의 이성과 마음에 따라 결정, 지배된다는 의미에서만 자유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의한 바가 그의 성격을 근거로 해서 혹은 그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의 결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보고 그의 성격이 선하다든지 혹은 악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느니라.(마 15:18)”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거나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나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무의 질(質)대로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요, 그 나무의 질이 열매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인간의 행동이 그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가 변론을 일삼기 위해 인간의 의지는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인간의 의지는 인간 성격의 산물이요 표현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나 살인자가 될 어떤 일을 결의한다고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를 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그를 대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결의는 오성(悟性), 원리, 감정 등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내려지지 않는 결의라면 그것은 어리석은 결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결정한 후에 의지가 선악 간에 어느 쪽도 결정하지 않은 무결정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인간에게는 동료 인간을 신임할 근거가 없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의지가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자유를 갖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외부의 법칙과는 상관없이 무법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상황 아래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의는 인간성의 표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내세에 선한 자들은 영구히 선하고 악한 자들은 영구히 악하리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만일 인간의 자유행위력이 필연적으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천국의 성도들도 다시 범죄하여 타락한 천사들처럼 지옥으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선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상의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의지를 고집하거나 투쟁하는 일이 없으며 훨씬 수월한 물리적 법칙 아래 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이나 동기를 계속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내세에서도 역시 사악한 것이 영구적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감화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고칠 수 없는 그 완악함으로 더욱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히 악의, 사악, 증오의 성향을 갖게 되어 완전히 ‘악’의 신민이 되고 맙니다. 또 만일 자유의지 이론이 옳다고 한다면 사후의 회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지옥에 들어간 자 중에서 어떤 자가 그 고통을 겪어보고 나서 자기의 과오를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설마 현세에서의 경미한 형벌도 인간을 죄로부터 돌이키는 효력이 있는데 설마 지옥에서의 준렬한 형벌에 그런 효력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추측합니다. 추측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인간의지는 그의 성질과 주어진 유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칼빈주의의 원리만이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아무도 이것을 건설 수 없다는 즉 구원 얻은 자와 멸망자의 상태는 영구적이라고 단정한 성경의 결론과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지 결정의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큰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과시하는 자유를 좀 더 상세히 검토해보면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된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계의 법칙, 자신의 특수 환경, 습관, 과거에 받은 교육, 사회적 관습, 처벌 또는 비난에 대한 공포, 현존하는 욕망, 야심 등 이 모든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어느 순간에든지 인간은 그의 과거가 만들어 놓은 그인 것입니다. 즉 인간은 역사적 산물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기 성질의 지배 아래 행동하고 또 그 행동을 그의 마음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피조자에게 가능한 자유”를 가질 뿐입니다. 이외의 어떤 자유도 그것은 무질서를 산출해 낼 뿐입니다.

사람은 금붕어가 든 어항을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붕어 자신은 자유로우며 어항 속에서 마음대로 헤엄쳐 다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무 조각이나 돌조각 또는 금속조각을 육안으로 보면 그것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자나 원자 및 전자를 볼 수 있는 강력 확대경을 통해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 권내에서 빙빙 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정과 자유행동력은 큰 성전을 떠받들고 있는 두 기둥인데, 이 둘은 인간의 시력이 미치지 않는 구름 위에서나 서로 만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두 평행선뿐이고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 않는 저편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이 둘은 서로 합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는 이 둘을 서로 결합시킬 수도, 결합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데, 알미니안파가 어떻게 이 둘을 서로 교차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건을 일으키는 절대적 결정권이 인간의 수중에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용인한다면 그 자유의지는 신적 자유의지가 되어 인간이 하나님(즉 제1 원인, 행동의 원천)처럼 되어 자유의지의 수효만큼 반신반인(半神半人)이 많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이러한 독립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유물론적 철학자나 형이상학적 철학자들도 칼빈주의가 부인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 ‘자유의지’를 부인합니다. 그들은 모든 결과에는 그 결과에 상당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추론합니다. 따라서 의지의 행위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동기란 외부의 법칙과 사물이 인간 심성에 반사된 것을 의미하므로 의지의 행위가 동기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곧 자유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VII. 성경의 증거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완전히 조화되어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 통치자요 제1 원인이신 반면 인간은 그의 성질의 제한 속에서 자유행위자요 제2 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인간에게 시키고자 계획하신 일을 인간이 자유로 임의적으로 행하도록 인간의 사고와 의지를 지배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상호 협력한 전형적인 실례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에 의해 후에 총리가 되 기근 때 식량을 공급하는 큰 사역을 감당했던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의 형들은 자기들이 자유로 그런 행동을 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에 요셉과 상봉했을 때에 자기들의 죄를 자인한 것입니다(창 42:21, 45:3). 그러나 신앙을 갖고 있는 요셉은 그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말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 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형제들은 그 악한 본성대로 동생을 이방의 노예로 팔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한 인연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즉, 그들의 계획적인 악이 선으로 변하였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감소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행위는 지극히 부당한 것이었으나 사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나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롬 9:17, 출 9:16, 10:1-2)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을 제어하심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 족속들이 그 땅을 엿보지 못하도록 제어해주셨고(출 34:24),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스 1:1-3). 또 성경에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는니라.”(잠 21: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수월하게 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범인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사야 10:5-15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완전한 조화 속에서 서로 일하고 있는 현저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화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그의 뜻은 이같이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ㅅ아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는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이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음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과 일반이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성구에 대하여 라이스(Rice)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성구의 명확한 의미는 첫째, 앗수르 왕이 비록 교만하고 불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치 사람 손에 들린 도끼나 톱이나 막대기처럼 하나님이 유대인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요, 둘째 앗수르왕은 자신의 자유를 조금도 손상치 않고 자의로 활약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행했다는 말은 본문에 없고 단지 자기 야심을 이루려고 했다는 말만 있으니 곧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라고 했다. 셋째, 하나님이 비록 악한 왕의 행위를 이용하여 결국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신다 할지라도 그 왕의 악행은 그 행위대로 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 앗수르 왕을 사용하셨다. 그런 다음 앗수르 왕의 완악한 계획을 벌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여 그들의 자유행위력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그의 계획을 수행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수행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 아니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라면 누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르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행 13:27-29)

십자가 사건만 예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따르는 여러 사건들도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군인들이 제비뽑은 일시 22:18, 요 19:24),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신 포도주를 드린 일(시 69:21; 마 27:34; 요 19:29), 백성들이 예수를 조롱한 일(심 22:6-8; 마 27:39), 예수를 강도와 함께 매단 것(사 53:12, 마 27:38), 죽은 예수의 뼈를 꺾지 않은 것(시 34:20; 요 19:36), 창으로 찌른 것(슥 12:10, 요 19:34-37) 등이 있고,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운명해 가는 예수를 향하여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저들은 아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서를 읽어보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결부된 모든 일들은 사사건건 다 예언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들은 발생하기 전 수세기 동안 구약 예언서에서 자세히 예언된 것이므로 영원 전부터 예정되고 확정되었음이 분명하며, 예정된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통해 성취되었고, 또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룬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임의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행 13:27,29, 3:17). 만일 역사상 최악의 사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계획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보다 적은 사건들도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 있으며, 그것은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잠 16: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렘 10:23-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출 12: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스 6:22-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스 7:6-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에스라)니라.

사 44:28-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계 17:17-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삼상 2:25-그들(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왕상 12:11,15-네 부친(솔로몬)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르호보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왕이 이 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삼하 17:14-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니라.

출처: 행함과 믿음/Chukang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제롬 장키우스(Jerome Zancius 1516 - 1590)의 절대예정론 소고

 

1. 절대 예정 회심과 구원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세 가지 중 하나인데

1. 반드시 홀로 우리들 만에 의해서,

2. 혹은 우리들과 하나님이 함께 함을 통해서 아니면

3.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만 시행되어야 하고 또 효력이 발생되어야 한다.

 

펠라기우스파는 처음 것에 찬성한다.

알미니우스파는 두 번째 것에 찬성한다.

참된 신자들은 마지막 것에 찬성한다.

 

예정을 부인하라. 숭배할만한 신격의 완전성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정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예정은 전파되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파에 맞서 쟁론하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가 모든 인간들에게 다 똑같이 제공된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제공된 은혜와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권한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조건 없이 주시는 칭의의 교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조건 없이 예정하셨다는 점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후자가 전자에 대한 원인과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엡1:5,6)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혹은 구원을 받게 될 자들은 그들이 선한 일을 단 하나도 이루어 놓기 이전에 [이미] 제정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결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을 얻는다.

내적인 구원의 사역은 값없이 공로 없이 오직 은혜만 하나님은 지금도, 또한 전에도 항상, 지극히 완전하게 지혜로우시므로 그가 모르고 계시거나 하나님의 아심을 피하여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아신바 되었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당신께서 영원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거나 예지하지 않으셨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고 계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알지 않으실 것이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된다.”(히4:13)

그가 미래에 될 일도 예지하고 계신 것은 무슨 일이건 반드시, 또한 의심할 바 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정하심을 성취하는 것이기는 해도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흔쾌히 행하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의 결과로서 비롯되며 또한 전자를 기초로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허락 없이는 인간도 악마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허락하신다는 것은 적어도 막지는 않으신다는 것과 같으며 ‘막지 않으심’은 확실히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처럼 타락할 것으로 뜻하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죄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인 것과 드러난 것으로 정당하게 구별된다. 왕이 이스라엘을 가도록 해서는 안 되었던 것,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는 안 되었던 것(창 22:12),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되었던 것 (마26:34)등은 바로 하나님의 감추인 의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정죄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 대한 구원과, 그와 반대로 택하시지 않은 자들에 대한 정죄에 대해 변치 않는 작정을 하신다)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10)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23:13, 14)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흡니와 비느하스가 자신들의 사악함을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며(삼상 2:25), 헤스본 왕 시혼이 모세가 사자를 보내 평화의 말로 이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의 마음을 걍팍케 하셨기 때문이다(신 2:26, 30).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눈은 감기시고, 또 어떤 이들의 마음은 걍팍하게 하시는 일들이 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눈멀고 마음이 완고해지기를 허락하시며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고의로 막으시는 것이다(사 6:9, 요12:39, 4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업신여기시지 않으며, 또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를 준행하지 않고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도 없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주입해 넣으신 그 어떤 악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본성이 갖는 악과 그들 자신의 의지가 갖는 사악함으로 인한 부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려고 자신에게로 초청하지는 않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은혜로운 감화를 주셔서 흔쾌히 하나님께 나오도록 해주시는 모든 개인은 조만간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구원을 받으며,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를 무시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타내신 바 된 의지를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했고, 숨은 의지는 단호하고 절대적이며, 결과를 내는 데에 있어 어떤 방해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의지란 하나님 자신의 뜻하심을 말하며, 결과적으로 그 의지는 전능하여 좌절될 수 없다. 절대 주권적 의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건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타내신 의지에 반하여 많은 일들을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극히 위대하며 그의 진리는 불가침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자신이 예지하신 경로를 따라 이끌어 가신다. ”피조물의 어떠한 자유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를 저항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이를 막으려는 뜻을 품을 수도 그 결정을 헛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힘을 이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에 있어 첫째이며 최고의 원인이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단 4:35) (시135:6) (마10:29)

“유효하게 하심이 되든, 혹은 허락하심이 되든 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심이 아니고는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터, 반드시 견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의지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거나 하나님 없이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 (눅12:32)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3)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8)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롬(9:15, 18)

각 사람이 모두 다 구원받도록 작정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작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단 한 영혼도 결단코 잃어버린바 될 수 없었을 것이며(누가 그의 뜻을 거스릴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 가운데서 몇을 다시 말해서 모든 나라와 혈족과 언어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은혜로 택하신 자들 전부를 다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작정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은 이상, 그들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도록 창조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개인마다 다 구원 얻도록 의도하지 않으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지정하심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계획적으로 피를 흘리신 것이며 그 보혈은 오직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며 즉각적 관련이 있다는 결과가 된다. 그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위해 죽으시도록 그의 아들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바 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 오직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고 중보하심이 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그들을 택하셨다)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즉, 다른 이들은 제외시키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바 된 저들은 (의롭다 하심과 구속하심의 정도가 꼭 같다) 정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특권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로만 분명히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만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자주적이며 자의적인 허락을 죄에 대해 내리신다고 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그 죄를 짓도록 강요하시거나 강제적 필연성을 부과하지는 않으신다. 절대로 하나님을 도덕적 죄의 창조자라고 칭할 수 없다.

죄에 대해 의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적인 거룩함과 청렴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행하는 일 뿐 아니라 심어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들까지 모든 만사가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르는 것임이 판명된다. 같은 곳에서 덧붙여 말하기를 “우연이나 운명 따위는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우리의 전적인 신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정론의 교리에 철저히 정통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방법은 없다. 시편 135:6, 마태복음 10:29, 잠언 16:1, 마태복음 26:54, 누가복음 22:22, 사도행전 4:28, 에베소서 1:11, 이사야 46:10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것이 아니고는 지금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으신다. 우리 대신 도덕법에 순종하시고 그 법의 저주와 형벌에 대해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보증과 대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는 우리 모두는 결단코 하나님의 미움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죄에 대해 처벌당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직 우리가 영원 전부터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됨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절대적 의지는 불변하고도 전능하므로 우리는 택하심을 입은 각 사람의 구원이 절대로 변함없이 확실하며, 그 의지는 좌절 될 수도 무효화 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의도하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의심할 바 없이 꼭 보증할 것이라는 데서 귀결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본질적으로 불변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명백히 불완전한 분이실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변한다는 것은 더 낫거나 혹은 못하게 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좋게 변하실 수 없다. 만일 변하실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에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좋지는 못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더 못하게 변하실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말3: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욥23:13) ”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겔24:14)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민23:19, 삼상 15:29, 욥23:13, 겔24:14, 롬11:29, 딤후 2:13)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서게 하려 하사(롬 9:11)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서술어로 쓰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정 혹은 애정으로서의 사랑을 소유하셨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서는 그런 뜻으로 쓰이겠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해 그런 의미로 생각되어 쓰인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갖는 순전함과 완전함과 독립성을 완전히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속성으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 즉 자기 백성을 해방하시고 복 주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의지, 목적, 결심을 뜻한다. 그들이 행한 어떠한 선한 업적도 이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 용어는 하나님께 ‘만족, 즐거움, 허가를 의미한다.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택하신 자들조차도 그들 자체로서 고려해 볼 때에는 그들이 죄를 범하였으며 더러워진 죄인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을 사랑하실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의에 함께 참예한 자들이 되었으므로 아주 영원 전부터 그 사랑의 대상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워한다는 말이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되어 나타날 때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않을 것이며 영생에 관계되어 있는 저 은혜들을 조금도 입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뜻한다.

그래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주 영원 전부터 그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하나님 자신 속에서 참으로 작정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쾌하게 여기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를 처벌하시고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낸다. 내세에서 그들에게 임하는 비참한 고통은 다만 필연적인 결과이며 실제적인 집행일뿐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일부를 선택하시는 바, 영원하고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이고 각별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어 세상으로부터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분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요 15:19- 그 선택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고도 효능있게 제자들을 회개치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르셨고 또 회심하도록 위에서부터 그들을 촉구하셨다.

외적인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반드시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다수가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버림을 받는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등등의 말씀으로 설명하시는 것과 같다(마13:20) 13:11.40,41;24:30,31(택하신 자들)

그리고 사도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라고 하신다. 그 이유?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2:19)

선택에는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나 혹은 국가생활 속에서 어느 특별한 지위나 임기를 채우도록 한시적으로 지명하시는 것도 있다

유다가 사도로 선택받았으며 (요6:70)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택하심을 입은 것이다.(삼상 10:24)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영광에로 선택해 주셨으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영원히 누락시키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바 저들로 불법함의 분량을 채우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의 범죄함에 대하여 공의로운 형벌을 받게 하시는 것.

예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할 때

(1)하나님께서 아주 영원 전부터 자신께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또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이 두 가지 모두를 알고 계신바, 모든 행위들에 대하여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혹은 자연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것들에게로 확장된다. 대상이 되는 하나님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의미에서 오직 그들만을 아시며 또한 미리 아신다고 한다. ‘미리 제정하다’ ‘미리 결정하다 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대상이 된다. 이성적 존재이든 비이성적 존재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그 예정의 영향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존재들은 어떤 것이든지, 가장 높은 천사들로부터 가장 하찮은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가장 하찮은 파충류에서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 까지 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특별하신 섭리의 대상들인 것이다. 교부들은 이 예정이라는 단어를 천사들이나 인간들에 대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언급할 때에만 사용하고 있으며 자기 백성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심과 지명하심에 관련되는 한 부문을 의미하고 있다.

예정을 택하신 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으로 그러면 예정의 정의는 영원하고 무조건적이며 특별하고도 파기할 수 없는 신적인 의지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마24:2,312) (행 13:48) (롬 8:30) (엡 1:4,5) (딤후1:9) (엡1:5,6)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면(롬11:5,6)

유기에 대해서(1)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사망으로 예정하심이 있다.(고후4:3) 정하신 것이라(벧전2:8)-1:2,9 (벧후2:12)-1:10;3:9

(택함 받은 모든 자)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유4)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계17:8) (마25:46)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의지와 작정과 예지를 부인하는 자는 암시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하나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작정으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작정으로 정하심이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리 계획하심이 없이 무엇인가를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명백한 비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로 타락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증명한다

(세 가지 중 하나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원하셨거나 혹은 원하지 않으셨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함을 내키지 않게 여기셨다면 어떻게 아담이 타락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겠는가? 피조물인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인간이 더 강하거나 사탄이 더 지혜롭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하나님께 매우 기뻐하시는 바였더라면, 저 유혹하는 자가 낙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셨을 수도 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천사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오직 선만을 결정하며 악으로는 치우칠 수 없는 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듯이 인간도 그렇게 창조하셨을 수도 혹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은혜와 힘이 죄의 모든 유혹에 대해 저항하기에 실질적으로 효능이 있도록 하셨을 수가 있지 않을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된 것이 아니며, 혹은 참새도 “너희 천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처럼 가장 하찮고 시시한 것들도 하나님의 작정이 있는데,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우수한 걸작인 사람은 그 얼마나 더 하겠으며, 누구보다도 그 사람 아담은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가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 받은 그 당시에, 그는 하나님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이었던 자가 아니며, 천사들보다는 아주 조금 열등할 뿐인 자가 아니었던가! 또 그 자신의 복지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복지 역시 그의 견인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유기

(2)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이 다 구원으로 택하심을 입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인류의 각 개인 모두를 다 구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단 12:2, 마25:46, 요5:29) “멸하기로 준비된”것이며 “악한 날에 적당하게”하신 것이라는 점 더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마 20:16)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진”(롬 11:7) 그 적은 무리(눅 12: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마13:1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5) 하나님이(우리를)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우리)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살 전 5:9)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려(벧 전 2:9) 하신 자들이며, 히12:23자들이다. “생명책에 있으며(빌4:3) 하늘에 기록된(눅10:20) 히12:23)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능력으로 지으신 별들과 및 다른 생명 없는 피조물들을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하는 것만큼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에 모순 되는 말이다.

선택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이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보다 가깝고 특별한 의미에서 아신다(딤후 2:19)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33:17,19-롬9:15,30-32;출32:22) 너를 알았고(렘1:5) (눅10:20;12:7) (요13:18) (요10:4,14,26,27) (딤후2:19)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변경할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1) 하나님의 작정은 불확실하고 좌절될 수 있고 불명확하며 결과적으로 전혀 작정이 못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동요하고 막연하며 자칫 실망시키기 쉬운 것이 될 것이다. (사46:9,10) (롬 11:29) (요13:2) (롬 9:22) (유4) (살전2:12)

영광에 이르게 하는 분이 누구인가? (살전1:4 롬8:30,31,33,38)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신 자(롬1:28) “어떤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미움은 불변하며 바뀔 수 없다”

영생에로 제정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 속에 어떤 예견된 가치가 있어 그러한 제정을 입은 것도 아니며, 어떤 선한 공덕으로 인함도 아니고 믿음과 회개와 거룩함은 영생 그 자체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믿음은 선택의 열매? 믿게 하기 위해서 선택함인가, 믿는 자를 선택함인가?) (빌1:29) (행 5:31) (행 11:18) (롬 9:11) (요15;16) (요일4:10, 19) (막 13:20, 롬9:17, 엡1:4, 살전5:9, 살후2:13)

우리가 거룩해지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엡 1:4)?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해서,미리 정하셨다.(롬1:29)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신 자들은 아낌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사랑을 받았고(호14:4), 선택을 받고(롬 11:5,6), 믿음은 택하심으로 인해 맺는 열매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믿음은 선택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믿음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영생에로 제정하심을 입는 자들은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또 오직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영생을 누리도록 제정된다(살전5:9)

택하심 그 자체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임을 주의하자. 또 그 생명을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수단들 즉, 회개와 믿음과 거룩하게 함과 끝까지 성도들 안에 함께하는 인내(견인)도 예정된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엡1:4) (엡2:10) (살전 1:4, 5:9, 4:3)

지정하신 이것 역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벧전 1:2)

왜 택하셨는가? (거룩은 누구의 역사로 가능한가?)

원래 정죄함의 선고를 받는 것에서 면제된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복음을 듣도록 이끄심을 받으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하도록 만들어 주심과 또 비록 어느 때든지 곁길로 갈지라도 다시 회복되게 하심과 바로잡아 주심을 받는 것이다.

택하심을 받는 자들은 단 한명도 멸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로 정하신 자들이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순전하고도 불변하게 작정하신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택하신 자들인 까닭에 그 가운데 아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그들은 예정하심을 입고, 미리 아신바 되고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루터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작정은 확고하고 확실하며 그것으로부터 유래된 필연성 역시 한가지로 확고하게 반드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만일 그 일이 우리 손에 맡겨지게 된다면 구원을 받게 될 자는 겨우 몇 명뿐이거나 아니, 하나도 없게 될 것이며 오히려 사탄이 우리 모두를 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이 확고부동하고 분명한 목적은 그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파기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으므로, 지금은 죄가 아무리 격렬하게 우리의 죽을 몸에 대해 맹위를 떨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에는 죄를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아주 확실히 보장된 소망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우리를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려고”(엡1:4) 따라서 선택된 자는 모두(오직 그들만)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다. 그리고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것과 확실히 구원얻을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6) 믿음은 택하심의 증거, 혹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의 수에 들어있다는 증거, 결과적으로 구원의 증거인 것이다. 이는 그의 양들은 모두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10:28)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들이 생명에로 예정된 것에 대해 지식이나 확신에 도달할 수가 있으며 또 그것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쟁론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영생에로 제정됨을 믿는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따라서 나는 내가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또 영화롭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또 의롭다 하셨다고 신뢰하는 이유를 갖고 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나에 대한 영원한 예정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있고 나에 대한 확실한 영화에 대해서도 내다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자의 양심으로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는 그 직접적인 증거에 대해서 전적을 동의하는 일이 빈번하다(롬 8:16, 갈4:6, 요일5:10)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12:32)는 사실이 변경될 수 없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가 가진 믿음이었다(롬 8:38, 39) 성 바울 역시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성도들 속에서 은혜로운 열매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임을 알았으며(살전1:4,5) 또한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택받았음도 알았던 것이다(엡1:4,5) 이상, 우리는 감히, 또는 절대로, 살아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비록 그가 현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하다 할지라도, 그가 택하심을 얻지 못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가장 악한 죄인일지라도 택하심의 은혜에 속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버리심에 관한 교리로서의 예정론 다른 이들에 대해 거절하심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빼놓지 않고서는 선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한 후손 중에서 얼마를 그들의 죄악 중에 남겨두시기로, 또 그리스도께 관계됨과 그의 은택으로부터 제외시키기로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모든 세대에 걸쳐 인류의 대부분은, 심지어 은혜의 외부적인 수단조차도 결핍된 상태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계시가 주어지는 호의도 입지 못했다. 가장 적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해 특별한 발견을 하도록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단 하나의 민족이었으며 또 우리가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그 백성들에게로 한정하셨다는 것 주님의 부활하신 후가 되기 전까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복음 전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위탁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들과 공동체들이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유익을 결코 갖지 못했었고, 결과적으로 그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에 관해서는 외인들이었던 것이다.

빛을 받지 못한 나라들에서 사는 개인들이 더러는 은혜로 비밀하게 택하심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믿음의 성향이 그들 안에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 일반적으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도달하는 수단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반적인 구원의 수단을 허용하셨을 것이 아닌가?

오늘날에도 지구상에 있는 아주 많은 나라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의 수단을 거절하시고 그들을 총체적 어둠과 불신앙 가운데 가두어 두실 수 있다고 할진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은혜 그 자체로부터 또 은혜와 관련되는 영생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완전함에 모순된다고 생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절대주권의 감독자가 되심을 보면서 말이다. 그 양자 모두가 매우 당연하게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을 끝내 회개치 않음과 불신앙에 남겨두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것이 그렇게 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창세전부터 버리셨다고 확실하게 추측하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마7:23) “영원 전부터 나는 결코 너희를 사랑하지도, 승인하지도 또 내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절대로” 바꾸어 말하면 “나는 너희를 미워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온 인류를 크게 두 계층으로 나누신다. 그 하나를‘세상’이라 부르시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내게 주신 자’라고 하신다. 후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셨다고 하시면서 심지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자신을 사랑하신 것 같이(요 17:23) 영원하게 사랑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도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들을 영원 전부터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대조법의 모든 규칙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일찍부터 미워하셨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로마서9장)라고 하신다. 저 두 쌍둥이 야곱과 에서의 예를 통해 사도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택하심과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거절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실제로 되는 것과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을 유효하도록 허락하신 것이었다.(행4:27,28 마26:23, 24) 우리가 주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 하였느나.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고 말씀하심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열한제자는 은혜로 택하심을 입었으나 유다는 심판으로 택하심을 입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의 피흘리심의 수단이 되는 자로 택하심과 세우심을 입었다. 택하시지 않은 자들을 최후까지 회개치 않음과 죄와 불신앙을 계속해가도록 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사망에 이르도록 공의롭게 지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작정의 결과로서만 행하시며, 또 행하실 것이다.(시135:6, 사46:11, 엡1:9,11)

불의한 자들에 대한 정죄는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만일 형벌의 불이 영원전부터 작정되어 그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 불을 위해 준비된 것, 즉 그 불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요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롬 9장)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며 그밖에 달리 어쩔 수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잠 16:4, 벧전 2:8, 벧후 2:12, 유4, 계13:8 )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미래에 행할 믿음과 선행이 저들을 택하심에 대한 근거가 되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버리심을 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행할 죄가 저들을 버리심에 대한 근거는 아니다. 전자의 선택과 후자의 버림은 순전히, 또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와 기쁘심을 따라 정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심대로 저들을 영적 어둠과 자연적 사망 가운데 남겨두시기로 결정하셨고 또 실제로 남겨두신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로부터 저들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는 없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에 정죄하신다 그들이 생명책에서 탈락, 혹은 비 선택됨이 하나님 편에서 불공정하신 것은 아니다. 버리신 자들에 대한 정죄는 필연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결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비 선택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정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결정하심이 아니고서는 정죄받을 수 없으며,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죄 받음을 작정하시고 결정하신다면 필연적이며 변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 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러한 고집 센 죄인들에 대한 형벌은 공정할 뿐 아니라 그만큼 필연적이기도 하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장)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말씀이다. 타락한 죄인은 자신 스스로 은혜로운 성품을 산출할 수 없고 은혜로운 행위들을 발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출32:22;33:19) 어떤 성인도 그러한 품성들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요2:25;3:3,5;마13:21)

결과적으로 버리신 자들은 타락하고 열매 없는 자들로서 반드시 찍혀 불에 던짐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당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여 결국은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비참해지도록 강요하신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본성이 부패함의 결과로 인해 그들은 자발적으로 치우쳐 죄짓기 쉽게 되는 것이다.

택하신 자들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는 그들을 구원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은혜와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증거하고 알리시는 것이었으며, 비선택자들을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공의, 권세, 절대적 주권, 거룩함과 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장)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멸하기로 준비하신 진노의 그릇, 오래 참으심과 관용하심을 나타내신다. 택하신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예비하셨는데 ‘그 영광의 부요함’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거부된 자들, 남겨진 자들이라 부르고 있다.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부당하신 것은 아니며 또 부당하실 수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기 때문.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일이 아니라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결정하시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영원 전부터 그것을 결정하시고 작정하신다고해서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것일 수 없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토기장이가 한 덩어리의 진흙을 가지고 더러는 귀히 쓸 그릇으로, 또 다른 것들은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부당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가 디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의 뜻대로 처분하심에 대해 부당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버리심의 작정이 폭군적인 것도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 절대불문의 무한권리를 가지신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공의로 처벌하심을 통해 그 권리를 명하시고 나타내신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께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버린 자들에게 대한 작정 안에는 하나님의 그 속성들이 갖는 완전함과 충돌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부를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더더욱 그 속성과 충돌될 수 없다.

또 구원하시는 은혜를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박탈하신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은혜를 주실 의무를 지시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할 의무가 없으신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택하시지 않은 것은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듯이, 같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천사로 만들지 않으신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버릇없이 비난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선택자들의 죄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함을 입었듯이 그렇게 속함을 받지 않았는데, 바로 그 죄 때문에 비 선택자들을 정죄하시는 또 정죄하기로 결정하시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정의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주권적으로 선택에서 탈락되게 하심과 죄에 대해 공의롭게 정죄하심에 관한 작정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어찌 모순이 된다는 말인가? 조금도 모순이 아니다.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지 않고 또 죄를 처벌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실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최후까지 사악한 자들이 만일 정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떤 자들을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잔인한 역할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일단의 극악한 죄인의 무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해서 또 그들에게 법의 선고가 내려져 그들이 처형되게 하였다고 해서 최고 판사를 잔인하다고 고발하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실로 만일 판사가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 동정 베풀기를 기뻐하여 그들의 벌을 경감한다면 우리는 그의 관대함에 갈채를 보낸다. 그의 긍휼은 값없이 베푸시며 또 자의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자에게로 긍휼을 확장하실 수도 있고 혹은 그에게서 긍휼을 박탈하실 수도 있다.

또 만일 우리가 땅에 있는 최고 판사가 가지는 것으로 인정하는 동일한 특권과 자유를 천지를 다스리시는 전지하신 통치자이신 대 주지께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거절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되시는 것도 아니다.

천벌은 사악한 자들에게 채무와 공의와 응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인 반면, 은혜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값없이 공력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천벌을 받는 죄인은 그의 형벌에 대해 자신은 벌 받을 만하지 않다고 우겨댈 수 없으며 또한 성도들도 마치 자신이 상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양 허풍 떨거나 자랑할 수 없다.

어떻게 버리심의 교리가 미래의 심판 교리와 조화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은 전혀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 창조부터 마지막 만물의 완성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목적의 결과로서 그의 택하신 자들 안에서 또 그들에 대하여 자비롭게 역사를 행하시며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묵인하시는 가운데 그들을 강퍅하게 하신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르러 섭리와 은혜의 모든 계약이 끝맺음되면,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좌정하실 것이 확실하다. 택하신 자들의 육체와 영혼을 영광에로 받으시고, 버리신 자들에게는(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어서 행했던 일들 때문이 아니라)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과, 그들의 철저한 불신앙과 그들이 도덕적 의무를 불이행한 것과 반복적으로 범한 그들의 불법함과 범죄함 때문에 심판의 선고를 내리심으로써 그의 영원하신 작정을 공개적으로 공포하시고 엄숙히 비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택하신 자들은 아무도 망할 수 없고 또 버리신 자들은 누구도 구원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의 모든 교훈들과 책망들과 권고들, 혹은 인간 편에서의 기도들이 당연히 소용없고 헛되며 하찮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택하신 자들에 관해서는 이것들이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진리에 관한 지식에 이르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며, 나중에 가서는 그들의 정결한 마음을 각성시켜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세워지도록 교화하고 확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 인간이여 계명은 그대가 무엇을 가져야만 할 것인지 말해줄 것이며, 책망은 그대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고 기도는 그대가 원하는 것들을 누구로부터 받아야만 하는지를 그대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이것들은 버리신 자들에 관해서도 헛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훈과 책망과 권고는 마땅히 그것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적, 외적 행동을 예의범절과 공평과 질서의 규칙에 따라 조정하도록 조심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 그들 스스로 겪을 많은 불편과 사회에 끼칠 손실을 예방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사도들의 모범을 통해 입증하는 바는 절대예정은 설교와 권고 및 그 밖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으며 또 불필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절대예정 조항을 가르치고 주장했다.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처분에 인간들은 스스로는 영적으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자기의 기쁘심을 따라 뜻을 갖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박할 수 없도록 나타내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자신의 청중들이 이성과 양심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역설하기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으며 그러한 존재로서 그들이 가지는 의무에 대해 기억하게 해 주는 일을 빠뜨리지도 않았다.

죄와 위험에 대해 그들에게 구원의 길과 방법을 그들 앞에 제시하고, 우리 구주께서도 분명하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주께로 올수가 없다고 확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성취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것 때문에 그들을 신랄하게 꾸짖는다. 구원은 하고자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고 선언하면서도 상을 얻도록 달음질할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견고한 터, 혹은 주의 작정은 확실하게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말하면서도 지혜가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빈번히 비추어주는 수단이면서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가게 하는 수단이 되고 그들을 은혜 안에서 마지막까지 견인케 되도록 해주는 수단인 것이다. 이것들은 전혀 무익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크게 유용하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성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반드시 책망해야 하며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록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듣고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예정의 교리는 전적으로 발표를 금하여 제쳐둘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학자들과 사변가들만의 탐구대상으로 제한해 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설교강단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출판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정의 진리에 관해서 다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교리를 전파함에는 분별력과 신중함을 갖고 하도록 하라.

즉 설교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그 교리를 전하도록 하라. 복음은 전파되어야 한다. 지상명령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정론의 특징적인 교리 없이는 복음 교리도 그 안에 순수성과 일관성을 갖고 선포될 수가 없다. 선택은 기독교 체계 전체를 관통하여 꿰는 황금 실이다. 예정론은 전체 기독교 체계를 서로 연결하여 유지시키는 묶는 띠로서, 이것이 없다면 그 체계는 일종의 모래 알갱이 체계처럼 언제라도 산산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대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지 전체를 다 전달하여야 한다.

그 메시지의 어떤 부분도 생략해서는 안 되며 오직 그가 대리하는 그 주권자의 생각을 완전히, 남겨두지 않고 다 선언해야 한다. 다수의 타락한 인간들로부터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전혀 낫지 못한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자들을 얼마가 되든 간에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를, 또 얼마나 많이, 선택에서 제외하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선택권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공평의 흔적이 벗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결과였다.

그들이 죽은 후 마지막 날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은 그들이 택하심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택하심을 입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오직 그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범죄함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할 극히 중대한 이유를 갖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아는 지각이 그들로 순종케 하는 가장 강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을 받은자 들은 불평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정당하고 옳기 때문이며 예정론은 이것을 계시를 나타내는 교리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교리이며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회개와 위로와 거룩하게 함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공헌하는 교리이고, 심지어 경건치 않은 자들조차도 핑계치 못하게 만들어 놓는 교리인 것이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회개하였으리라(마11장) “천지의 주재인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 일에 대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부당하다고 고함치며 편파적이라고 비난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영광 가운데 있는 그 자리들은 나의 아버지의 의도하심과 목적하심에 따라 오래 전에 준비되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그 자리에 앉도록 준비된 사람들에게 그 자리들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복음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은 아니며 다만 생명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은혜와 영광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정해진 숫자가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총체적 혹은 궁극적 배교를 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눅6)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

저희가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2:37, 40) 예정 없이 특정한 미리 아심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언과 미리 아심과 예정의 성취를 위해서 이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거의 한 페이지도 빠뜨리지 않고,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택하심과 버리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25절), 즉 그에게 작정된 형벌의 장소로 갔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 예정된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 생명으로 예정된, 운명지어진, 혹은 작정된 자들이다. 사도바울에 관해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그의 서신들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서신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혹은 미리 사랑하신 자들‘이다. 이는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자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 에베소서의 첫 장은 거의 전부가 택하심과 예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

성 유다는 버리신 자들을 가리켜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로 묘사하고 있다.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하나님의 사유재산과 소유물이 되도록 사신 바 된 백성이다(벧전2:8,9)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계17:8) 여기서 ‘진정한 겸손’이란 스스로를 구원할 희망이 없는 자들을 의미, 자신의 구원은 자신이 가진 힘이나 책략, 시도, 자유의지 혹은 행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한분만이 가지신 자유로운 기쁨, 목적, 결정과 및 효능에 의존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겸손해 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들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스스로를 비우고 말하자면 하나님 존전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아져서, 영원한 영광을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요, 회개한 자들이 은혜의 약속에 친숙하게 될 수 있도록 해주고, 하나님께 기도로써 그 약속을 구하도록 해주며, 은혜의 약속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루터-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련되는 것이오. 비록 하나님께서 비교적 적은 수를 구원하시고 상당히 많은 수를 정죄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자비하시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의 의지로 인류 가운데서 그 숫자만큼은 필연적으로 영벌에 처해지도록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공평하시다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이것은 믿음의 가장 고차원적인 수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버리신 자들에 관련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보여주시는 진노와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신성불가침하게 공평하게도 하시며 무한히 자비롭기도 하신 가를 분명히 발견하는 것이 내 능력 안에 있다면 믿음은 (역할이) 거의 없어지거나, 무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므로 믿음이 발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부처도 루터와 의견을 같이하는데 특히 에베소서 1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공연하게 택하심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들에 대해서는 발표를 금할 것이 아니라 주장해야 하고, 또 그것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면 생명으로 예정하시는 복은 모든 축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으로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지정하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의심에 찬 악한 추측들을 하는 것과 불신앙 가운데 남아있는 것에 대항하는 최선의 해독제인 것이다. 이 최고 특권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소망과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미래의 축복됨에 관하여 도대체 무슨 확고하고 편안한 기대를 마음에 품을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은혜로우신 아버지로 또 그리스도를 우리의 변함 없으신 구주로 간주할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여 영원 전부터 확실하게 예지하지 않으시고 또 예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지력은 무한하지 못할 것이고, 유한한 지력을 가진 분이라면 결코 하나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의지 외에 과연 무엇이 예정이겠는가? 대 원인이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때가 이르면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들에 대해 불변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작정들과 하나님의 본질은 일치 하며 그리고 그가 가진 의지가 변하기 쉽고 동요하며 불확실하다면 그 존재는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계획하시는 예정이 없이, 그리고 그 계획을 집행하시는 섭리가 없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전능이 되겠는가? 도대체 자기가 만든 바로 그 피조물들에게 좌절당하고 파기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전능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135)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순전하신 긍휼과 자발적인 은혜로써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제외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마땅하게 정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이 없다면 주권적 긍휼이나 자발적 은혜와 같은 것들은 전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작정 외에, 과연 무엇이 예정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후로는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점을 잘 논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교훈을 얻도록 독실한 경건의 의무에 대해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또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어떻게 하여야 성화를 이룰 수 있는지 가르침을 얻도록 순결함을 공공연하게 권면하고 강화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나아가,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하나님과 자기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불일 듯 하도록 설교 강단에서 박애를 강권해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들을 귀 있는자들은 듣고 영광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에 대해 가지신 예정도 공공연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영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매우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중생한 사람들이 듣고 믿을 수 있게 될 때, 그리고 중생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실제로 그리스도의 택하신 공동체(몸)에 속해 있는 자들로 생각하기에 이르게 될 때, 그 무엇이 그들의 믿음을 이와 같이 확립해주고, 강화해 주고, 확정해 줄 수 있는가?

또한 그러한 신앙이 뻔뻔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는 회심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택하심을 받은 것으로 결론지어도 되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개혁가들은 우리의 39개 조항 가운데 17번째 조항에서 (거의 같은 말을 써서) 바로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과 우리를 택하심에 대한 경건한 생각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완전히 감미롭고 유쾌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크게 확립해주고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오직 성부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성자 하나님께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을 성령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인 것이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부은바 된’(롬 5:5) 자들이 마음에 품는다면 절대로 실망 가운데 끝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과연 어디서 누가 그들을 정죄한단 말인가? 누가, 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것인가?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것이며 “내가 확신하노니, 나는 매우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자신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견고한)터’, 즉 택하심에 따른 그의 작정, 혹은 목적은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예정론이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긍휼을 약동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을 누릴 수 없다. 구별이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베푸시는 복은, 기증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랑의 증거도 아니며, 받는 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놀라움이나 감사를 일으키도록 기대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두 중에서 선택하시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자비롭게 죄와 형벌로부터 분리해 놓으시는 것은 가장 장엄하고 전적으로 무한하게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드러내시는 주권적인 선이었다. 예정론은 강조되어야 한다. 뵈트너는 말하기를 “ 이 교리는 비단 칼빈뿐만 아니라 루터, 쯔빙글리, 멜란히톤, 불링거, 부처 또한 종교개혁에 있어서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가르쳐진 것이다. 그 후 장키우스, 오웬, 화이프필드, 롭 레디, 하지, 댑니 컨닝햄, 스미스, 세드, 워필드, 카이퍼 등이 이교리를 신봉하고 또한 주력하여 이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도록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가 되도록 가르친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구원론적 맥락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점이다. 예정론은 구원론을 가장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된다. 예정론은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론의 핵심이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조직적인 원칙이 될 뿐 아니라 다른 교리적 틀이 세워지는 원칙도 된다. 예정론의 주된 작업은 공로주의를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칭의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교리를 보호하고 강화하는데 있는 것이다. 수많은 신학 서적 중에서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 가장 순결한 성경적 진리를 집약한 책을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칼빈의 성경주석을 꼽는다.

신학상 적인 아르미니우스는 “성경 다음에 가는 서적은 칼빈의 성경주석이니 내 제자들에게 이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라고 권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예정론은 칼빈의 창작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교리를 조직적으로 진술한 것뿐이다. 그는 성경에서 이 교리를 발견한 제일 처음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천년 전에 어거스틴이 이 교리의 요소를 가르쳤고 종교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다 그러하였다. 개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만 주력하다 보니 정작 장로교회로서의 특성과 뿌리를 잊어버리고 비 복음적이고 잡다한 요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도 이렇다 할 만한 비판이나 대안이 없었다. 그 본래적인 신학이나 신앙 노선을 위하여 그 뿌리를 찾아보려고 애쓰지 못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배운 개혁주의는 하나의 교리적인 자기 입장으로 삼았을 뿐 그것이 목회 현장에서는 전혀 무관했다.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신학이라 한다면 그 내용은 예정론에 집중된다. 주권을 믿지 아니하면 예정론을 설명할 수 없다. 예정론을 인간이 볼 때는 모순같이 생각되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모순이 아니다. 항의파가 거부한 칼빈주의 명제들

①하나님은 타락 전에 그리고 인간의 창조 이전에 변경될 수 없는 작정에 의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은 의나 죄, 복종이나 불복종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며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보이시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② 하나님은 타락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첫 조상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공정한 정죄의 관점에서 인류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타락의 결과들을 면제해 주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나이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정죄에 내버려 두도록 정하셨다.

③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④ 성령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피택자들 안에서 사역하셔서 그 결과 그들은 회심과 믿음과 거룩함과 영화를 소유하게 되나, 나머지 사람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초대받을지라도, 구원에 필수적이고 충분한 그 은총은 그들에게 유보된다.

⑤ 이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받은 자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결코 잃을 수 없으나, 끝까지 같은 은총으로 인도받고 보존된다. 항의파는 이 교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도 포함되지 않고 , 비교훈적이며 위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설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정설을 반대하는 학설 중에는 펠라기안의 신인 협력설과 아르미니안의 만인 구원설이 있다.

예정과 예지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예정론에서는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 편에서 잡게하고 예지론에서 인간편에게 주게 된다. 예지론을 택하게 될 때 결과적으로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이 잡게 된다.

아르미니안이란 화란 신학자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자들로서 존 칼빈의 예정론적 교리를 반대하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의 후예들, 감리교회,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등에 소속해 있는 크리스천을 의미한다고 했다. 웨슬리는 예정론을 철저히 거부했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주정하면서 여러 주 또는 여러달 동안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선언할 정도로 완전함을 자랑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 말할 때 만물이 항상 있었고 그분의 눈으로는 영원히 현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분의 지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미래나 과거가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7, 39)라고 하신다. 아르미니안주의는 구원 역사의 반은 하나님의 일이요, 반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신인 협력설) 그러나 칼빈주의는 구원역사 전체가 하나님 일이요, 동시에 또한 전체가 사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성경대로 믿는 주의가 칼빈주의다. 칼빈주의는 사람을 냉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바로 알고 세계를 바로 알므로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인 계시관이요, 성경적인 인생관이요, 성경적인 우주관이며, 성경적인 철학이라고 할수 있다. 죽은 칼빈주의자가 있다. 그것은 교리만 있고 생활은 없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헌신의 열정도 식어버린 박물관의 미라 같은 냉랭한 칼빈주의다. 그 반면 성령님의 타는 불에 점화되어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엘리야같이 주의 일에 열심이 특심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몸부림치는 칼빈주의가 있다.

칼빈주의는 교의를 단순히 지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칼빈주의는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nots)로 화란에서는 베거(Beggars), 영국에서는 청교도(Puritan),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미국에서는 순례자(pilgrim)라고 불려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 중에는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으나 내면적으로는 거의 아르미니안주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복음주의 신학마저 칼빈주의의 색채를 거의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부인되고 인간의 자유와 권위를 앞세우는 인본주의로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장로교회는 이른바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계승한 ‘도르트 총회’의 후신으로 얼마나 거기에 충실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냉랭한 교리만 외우는 것이 아니고 명실 공히 목회의 현장, 설교의 현장, 선교의 현장,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도르트 총회에서 표현된 칼빈주의 사상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칼빈 예정론이 21세기의 앞에 선 오늘의 한국과 세계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도전 세력인 종교 다원주의를 물리치고 신학과 신앙을 사도들의 굳건한 터 위에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임을 알수 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실 때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고 불링거 같은 이는 타락은 정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타락할 것을 예지하신 것뿐이라고 했다.

바빙크는 “타락 전 예정은 개혁파 교회의 입장이 아니고 타락 후 예정이 개혁 교회의 입장이다”라고 했다.

카이퍼는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하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타락 전에 예정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상반되기 때문에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Dik)은 “창세전 예정이 개혁주의의 정통적 고백이기는 하지만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한다고 해도 칼빈의 교훈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떤 편을 택하여야 할 것인가.

고등 칼빈주의, 열정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이 사조는 칼빈의 신학 중에서도 특정한 주체들에 집착하여 강조하는 바, 특히 “타락 전 선택설과 반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요 엄격한 5대 교리주의자요, 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여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약화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이 100%이듯이 인간의 책임도 100%임을 믿는다. 예정론 교리는 적대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귀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들이다.

만일 예정론과 같은 성경적 교리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교리를 부인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21세기 현대에 이르러 종교 다원주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교리를 전면 무효화시키는 반성경적 사상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혜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도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 예정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정의 특별한 효험으로 인내의 은사를 주신다. 이들은 넘어지고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언제까지든지 그렇게 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정되지 못한 자들의 경우는 그와 반대이다. 이 제한된 예정은 타락한 천사의 수만큼 예정한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해명하면서 바울이 딤전 2:4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한 것을 하나님은 선택된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인 줄리안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부인하면서 죄는 본성 혹은 성품 속에 존재하면서 자손들에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의지는 항상 중립적이다. 선악은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 뿐으로 얼마든지 죄를 떨쳐버릴수 있다고 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낙관론적인 인간관을 견지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동방신학의 산물이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 사상의 모체에 해당하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나왔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시”(눅 18:13) 펠라기우스(360-420)는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529년 오렌지대회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였다.

예정론을 기독교 신학에서 심각하게 다룬 최초의 학자는 어거스틴이었으며 개혁 신학은 이를 충실히 인정하며 따르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철저한 예정론자는 멜란히톤이었고 오히려 루터 교회가 예정론을 철저히 다루었다. 물론 칼빈주의도 예정과 선택교리를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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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이 모두 다 예정론자는 아니다. 워필드 박사에 따르면 예정론은 칼빈주의를 결정짓는 중요한 교리도 아니요, 칼빈주의가 발전해 나오는 근원인거나 뿌리에 해당하는 교리가 결코 아니다. 어거스틴은 어떤 사람이 개심할 때 이 개심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누가 너를 구별하느뇨 네가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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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천사가 그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하였고 그들이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으며 또 범죄한 그들에게 장차 당신의 은혜의 선물이 얼마나 풍성하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작정을 하셨다. “그들이 믿은 까닭에 선택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게 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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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쟁은 곧 교회를 보호하고 성도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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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칼빈은 예정론을 설명하고 옹하는데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였는가? 기독교 강요 -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예정론을 주장하게끔 강권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예정론을 입 밖에도 끄집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은 “만일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하게 된다면 전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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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울이 가르치지 않았던 것을 억지로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성령과 바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 그들은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이 편견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예정론을 서술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예정론을 서술하도록 기회를 준다면 이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제거해 버릴양, 인간에게 맞게 이 교리를 변조시키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예정에 관한 모든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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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불경건한 사람은 예정론에 대하여 조롱하고, 비방하고,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만일 예정론과 같은 성경적 교리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교리도 부인하여야만 할 것이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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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의 역사를 말하고자 할 때 예정론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논의되어 왔고 (창세기에서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등), 신약 성경에서 복음서와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 에베소서)등에서 확증된 바 있다.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마루스의 지도아래 도르트대회(성도의 견인 혹은 궁극적 구원/즉,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것)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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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확히 가르치고 있는 바는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선택받은 이유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 이외에는 다른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선택은 순서상 믿음에 앞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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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안주의자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택할 수도 있고 배척할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그런 자유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그런 자유를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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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의 신인 협력설을 칼빈주의는 반대한다. 칼빈은 믿음과 선행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했다. (요6:37-39, 요6:44, 요17:9 , 롬9:20-21, 롬11:33, 창18:10 롬 9:11 롬 9:12-13, 창 25:23) 예정교리를 놓치면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주권을 부정하게 된다. 예정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행동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겸손과 경고를 주는 동시에 성도들에게 자극과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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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성과 자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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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14, 요5:26, 시94:8-9, 롬11:33-34, 단 4:35 시115:3 시33:11 엡1:4, 고전1:26-29, 롬1:17, 행13:48, 엡2:8 엡1:26 사43:21, 시79:13, 요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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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자와 돌트신조와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예정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신학체계의 대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1564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그리고 16세기 신앙고백서인 제1,제2스위스신앙고백, 39조항신앙고백은 예정교리를 신학의 대전제로 삼지 않았다. 예정론은 칼빈 신학사상에서 중심교리나 핵심주제라고는 볼 수 없으나 예정론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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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예정론이 큰 유익을 준다고 말했다.

①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만세전부터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물줄기는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끼는 때가 언제인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더 멀리 만세전부터(영원)이다.

②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릴 수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예정론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만세 전의 주권이라면 우리는 한없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③ 구원에 확신을 준다.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 구원이 어디까지 안전한가? 영원까지 안전하기 때문에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정론은 그 어떤 교리보다도 잘 알게 될 때는 신자에게 그만큼 제일 큰 유익을 주는 성경의 진리가 예정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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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교리의 기본 구조는 성경, 특히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의 최초의 주석은 로마서였는데 이 책에 대한 그의 연구는 ‘기독교 강요’의 예정교리를 정교하게 해주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만일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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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와 교회>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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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20 02:52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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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rome Zanchius (February 2, 1516 ? November 19, 1590) was an Italian Protestant Reformation clergyman and educator.

    He was born Jerome Zanchi in Alzano Lombardo, the son of a nobleman. His father died in the plague of 1528 and his mother died only three years later. At age 15 he entered the monastery of the Augustinian Order of Regular Canons, where he studied Aristotle, languages and divinity. He also attended the lectures on Romans given by Peter Martyr Vermigli, the greatest of the Italian Refor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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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 1551, under growing persecution against the Reformation, he left Italy via Geneva and eventually accepted the professorship of Old Testament at the college of St. Thomas in Strasbourg where he began to teach in 1553 and continued to give excellent instruction for nearly 11 years. In 1563 he left the College and pastored the Italian Protestant congregation in the Grisons in the city of Chiavenna. Finally, in 1567 Prince Frederick III (1515?1576) prevailed upon Zanchius to accept a divinity professorship in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joining Zacharias Ursinus (1534?1583).
  • In the year 1568 he entered on his new duties and in the same year received a doctor's degree. He held this post for 9 years when, at the death of Fredrick III, he chose to take the pastorate of the church at Neustadt an der Haardt. He remained there until his death on November 19, 1590, while on a visit to Heidelberg.

    Zanchius was a voluminous writer whose works include, Confess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Observation on the Divine Attributes. He is perhaps best known for his book 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 which is still in publication today.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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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롬 장키우스(Jerome Zancius 1516 - 1590)의 절대예정론 소고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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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 교리에 관한 진리 / 조엘 비키

베드로 사도는 벧전1:1-2를 통하여 예정에 대한 다섯 가지 주요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1) 죄인들은 성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선택을 받는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는 공의로운 정죄와 저주로부터 누구를 은혜롭게 구원하실 지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으로서의 법령적 미리 아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예정을 비롯한 그분의 주권적 계획과 목적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하나님의 지식은 택한 백성들을 향한 특별하고도 부성적인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지식이다.

 

2) 죄인들은 성경의 성화를 통해 거룩해지지 위하여 선택을 받는다.

택자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죄악적이고도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는 한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수 없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확증한다. 또한 성령께서 성부가 선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이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신다고 말한다. 성화의 사역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택자들로 하여금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거룩을 추구하게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선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펄전,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 받은 자들을 엄선된 사람으로 만든다.” 토마스 왓슨, “성화란,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양들의 귀표이다”

 

3) 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된 그리스도의 사역과 은택을 소유하기 위하여 선택받은 것이다. 피 뿌림을 위하여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즉 많은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 흘리는 피, 새 언약의 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의 열매인 용서의 보혈이 신자들의 영혼에 적용된다.

 

4) 죄인들은 모두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으로 선택을 받는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너희’는 특정하고도 한정적이며 번복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결코 불의하지 않은 강렬한 개인적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선택의 인격적인 특징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1:2,3)라고 말하는 구약성경에서조차 명백하게 드러난다(롬9:13). 하나님의 선택은 따뜻하고 부성적이며 가족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수많은 자녀들을 마치 유일한 자녀처럼 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개수도 다 세시는 분이다. 우리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를 은혜 가운데 선택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8:28).

 

5) 죄인들은 더 크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기 위하여 선택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위대한 비가시적 교회의 한 부분이 되게 하기 위하여 택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혹독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한 관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6) 죄인들은 자신을 향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다.

 

7) 죄인들은 선택이 가져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말미암아 목회적인 영향을 받는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4-143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예정론 1: 얘기를 해야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이제부터 예정론 시리즈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다.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꺼내기에는 그리 인기가 없는 주제이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 하기 알맞은 주제 아닌가? 5세기, 어거스틴은 자신의 편지에예정론은 설교의 유용성을 방해한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누가 그런 방해꾼을 원하는가? 16세기, 칼빈은 설교자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나 천지창조를 설교하는 만큼으로 예정을 설교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파하였다.

우리는 예정론을 이야기하거나 설교해야 하는가? 답은그렇다!”이다. 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없다면 성경도 존재할 없다.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선택을 받았다 ( 12). 이스라엘은 지상 만국 중에서 선택을 받았다 ( 4:37; 7:6-8; 105:6). 포로기 새로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선택을 받았다 ( 41:8-9; 42:1; 43:1-7; 44:1-2; 45:4). 예수님은 예정을 가르치셨다 ( 11:25-27; 13:11-16; 4:11-12; 6:37, 66; 10:26-30; 14:1; 17:6, 9, 벧전 2:5-10). 성경적 교리인 예정론을 우리는 이야기 밖에 없는 것이 .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618년부터 1619 사이, 네덜란드의 도르 트레흐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럽의 신학자, 목회자, 장로 등이 모여 알미니우스 논쟁을 다루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논쟁에 답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계획하심으로 신구약 시대의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들은 신적 선택에 관한 가르침을 선포했고, 성경에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도에 따라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도 가르침을 분별력을 갖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확고히 설파해야 하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필요하게 탐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력 넘치는 당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함이다.” (도르트신조 1.14)

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정을 말하고 설교해야 하는지, 방법론을 위한 기본적 원리들을 살펴보려 한다.

 

분별력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거나 설교할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로마서 9장은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서 구분되어 크리스천 회중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믿는 유대인들은 약속의 자녀들인 반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일 뿐이다 ( 9:3; 6-8). 바울은 이같은 개념을 또다르게 묘사하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바다에 모래 같을지라도 소수의 남은자 무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 9:27).

이것은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 어떤 대상들이 이를 듣는지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강퍅하여 예정론을 비웃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참되게 궁구하는 이들 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믿는 자들의 회중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믿음이 강해져 그와같은 교리의 깊이와 규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또다른 이들은 믿음이 약해져 의심과 걱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차이점들을 지닌 성인들에게 말하는가? 아니면 청중들 속에 어린아이들도 섞여 있는가? 그런 회중들에게 말할 때, 그 속에는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참된 신자들도 있고, 마치 위선자들마냥 믿는 척만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명심하라.

 

경외감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바울은 로마서 9:20-21에서 경외감을 갖고 예정론을 이야기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이것은 바울이 9장에서 논하는 내용의 절정 부분이다. 그는 옛언약 백성들, 자신의 동료 유대인이 보이는 불신앙을 말하면서 논의를 펼쳐간다 (vv. 1-5). 바울이 언급한 첫번째 반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졌는지의 여부였다 (v. 6). 바울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신 이래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와 진실로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들” (v. 6), 그저 아브라함의 외적인 육신의 자녀인 자들과 아브라함의 약속의 참  자녀들 (vv. 7-8) 사이의 차별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역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문제로 되돌아가 말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v. 11).

그 다음 반론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 반론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v. 14)라고 답한다. 그는 어떤 사색적인 것이 아닌지 성경의 인용을 통해 답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말로 결론을 짓는다 (v. 18).

하지만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v. 19). 이같은 반론이 들리지 않는가? 예정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는 교리이다. 이같은 반론에 바울은 어떤 철학적 답변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이다. 이것이 바울의 답변이다 (vv. 20-21).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신비에 쌓인 주제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 교리를 경외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로마서 9-11을 바울이 어떤 식으로 마감하는지 주목해 보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11:33).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논할 때 항상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 모두를 억제해야하며,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하는 지점에서 말할 때, 우리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놀라움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말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패하셨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다루신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예정은 인간의 지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런 반론들을 저지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v. 20).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토기장이에게 권이 없느냐?” (v. 21). 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는 귀히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그릇” (v. 21) 있으므로,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영화로우시다. 결국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 영화로워지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vv.22-23).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드리기 위한 행위인가? “찬송하리로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1:3-4).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함인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1:6).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차고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 소서 1:12 14절을 통해 번이나 반복하여 송영을 노래한다.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 , 로마서 11 36절로번역 있는 것인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11:36).

 

우리의 안위를 위해....


마지막으로, 예정을 말할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로마서 9장에서 우리와 세계를 위한 어떤 안위를 찾을 있는가?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구속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세계로 되돌아가 논의를 진행해 간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복음을 바로 우리 앞에, 개인의 역사에 정치시킨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9:24).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나 불공평하신 분으로 비난하지 말라.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시는 하나님이라 참소하지 말라. 그분을 믿으라.

하지만, 여전히 반론하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예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정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예정하셔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때 나의(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내 백성”,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신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 9:25-26).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로마서의 순서를 따르라. 먼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고민하라.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한 다음 죄와 싸우라. 8장까지 등장하는 십자가와 고난 아래서 그대는 9, 10, 11장을 통해 미리아심을 배우게 되고, 그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안위가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정론을 말해야 한다. 예정에 대하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위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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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예정론에 대한 오해들


아직도 칼빈의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칼빈에 의해서 예정론이 바르게 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의 신학이 예정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작정과 섭리의 사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칼빈의 신학 사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섭리의 사상이라 할 만 합니다. 칼빈은 1545년의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을 통해 세 가지 차원의 섭리를 논합니다. 첫째, 자연적 질서를 주관하시는 우주적 차원의 일반섭리가 있고, 둘째,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보응하는 특별한 섭리와 셋째,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부르시고 다스리시는 구원을 위한 독특한 섭리가 그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기독교강요> 116~28장에 걸쳐 섭리를 강조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이 하나님의 섭리 중 매우 특별한 섭리에 속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섭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 목적을 향해 보다 멀리 바라볼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떠한 인간이든지간에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속에서 다스려진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116-4, 9)


예정론을 이해하려 할 때 다음 두 가지의 이론과 주장에 대해 명확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운명론(fatalism)입니다. 이는 누군가 결정하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은 채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운이 나쁘다고 하는 우연성의 산물입니다. 이런 사상은 인격적으로 계획을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는 거리가 먼 비인격적인 사상입니다. 비슷한 용어로 숙명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동양철학에서 사람의 미래가 사주팔자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다양성과 복잡 미묘함과 절묘한 조화와 신비를 사주팔자라는 틀에 집어넣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너무 형이하학적인 발상입니다. 둘째, 예정론과 유사한 사상 중 하나가 결정론(determinism)입니다. 이는 인간의 앞날을 사전에 입력된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되어 움직인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상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의 행위들이 행위자 밖에서 주어진 결정된 프로그램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적하시고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죄인의 구원을 위해 죄인으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며 진노와 심판을 거두시기도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예정론을 운명론이나 결정론 혹은 기계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눈을 깜빡이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예정하셨단 말인가?” 이런 오해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사전 지식의 결여로 나타나는 무지입니다. 칼빈주의가 내세우는 예정론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높이시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시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십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나의 자유로움입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의 재량권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나 자유로움을 억압하거나 제약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몇 시에 일어나고 아침에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을지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도록 허용하십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선한 선택에는 보상을 하시고 악한 선택에는 징계와 진노와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기도 합니다. AR.


참고서적: 1. <개혁신학의 전통과 유산>, 김재성 저, 킹덤북스 2. <교리와 신앙>, 칼 트루먼, 지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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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의 예정

1. 하나님의 예정 (불변) - 구원받을 수 있는 예정권
2. 선택된 자 - 성령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3. 구원받지 못한 자 - 자유의지로 복음을 거절한 자.
4. 구원의 예정권 밖으로 나갈 수도 있고 안으로 들어 올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
5. 일단 구원받았던 사람도, 자유의지의 잘 못된 선택으로 구원권 밖으로 상실될 수도 있음.
6. 복음을 거절하고 믿음을 버렸던 자도, 다시 구원을 회복할 수 있음.


칼빈주의적 예정

1. 하나님의 절대 예정 (불변)
영원한 선고(eternal decree)
영원한 구원 보장(eternal security)
2.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 선택 자.
크리스챤이 되는 동시에 영원 구원 보장된 자
3.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된 자 - 버림받은 자(遺棄)
4. 일단 선택된 자기 구원을 상실하는 자유의지는 용납되지 않음.

중요한 것은 칼빈주의가 말하는 구원은 지정의를 통한 중생을 말합니다, 입으로만 말하는 구원파적 구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생한자는 성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정도 작정도 없이 일을 하신다는것은 오히려 말이 안됩니다,
예정은 구원받은후 돌이켜보면 이해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웨슬레는 구원이 취소되는것은 복음을 거절한것으로 보고 있음에 비해서 한동안 문제가 되었던 (이단적이라 결론남)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행위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 칼빈 교리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개혁신학은 온전한 회심으로 구원을 확증받은 자는 주님의 은혜로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연약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5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All that the Father gives me will come to me, and whoever comes to me I will never drive away.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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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4: 예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그리스도인은 예정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예정을 말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 규칙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왜 누구는 예수를 믿는데, 또다른 누구는 예수를 믿지 않는지에 대해 예정론과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경건하고 호의적인 형제나 자매들이 예정론은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교리 같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지 않는가? 혹은 그 교리는 모든 영적 열심을 흡수해 버리는 메마른 스펀지 같다는 말도 하지않는가? 그런 사람들은 예정론이 너무 이지적이고생기 없으며,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예정론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준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며 구령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가 영화로운가? 예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의 말을 통해 그 이유 다섯가지를 알아보자.

 

* 불변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불변성 때문이다. 에베소서, 혹은 다른 어떤 성경에서도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셨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선택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 (도르트신조 1.7)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항상 확고부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의 특징이 바로 불변성이다” ( 6:17-18).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바꾸신다 주장했던 자들은 누구인가? 17세기,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선택을 가르쳤다. 이들 추종자들이 도르트회의에서 어떻게 선택의 교리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일반적이고 명확한 선택이 있는가 하면, 특별하고 불명확한 선택이 있다. 결국 후자의 경우 불완전하고 취소 가능하며 비결정적이고 조건적이거나, 완전하고 취소 불가능하며 결정이고 절대적인 선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이르는 선택이 있고, 구원에 이르는 선택이 있다. 따라서 구원을 위한 결정적 선택이 없을지라도 의로워진 믿음을 얻게 되는 선택도 있는 것이다.” (도르트신조 1항 오류의 거부 2)

우리는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한 약속을 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므로 역시 변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고서 그들이 참된 구원을 받았으나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선택은 그 불변성 때문에 영화로운 것이다.

 

* 영원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영원성 때문이다. 예정은 창조 전에” (1:4) 일어났다. 우리는 투표를 위해 투표소를 찾거나 부재자투표를 하곤 한다. 어떤 일에 참견할 권리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이 있기 전에 오직 하나님만 계셨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창조 전에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으셨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므로 그분의 계획 역시 영원했다.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계획은 은혜로운 계획이었고,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딤후 1:9)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영화로울 뿐만 아니라 영감어린 가르침이다. 영원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특별히 당신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 은혜로움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 이유는 은혜로움 때문이다. 바울은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심에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1:4) 영원한 사랑이다. 우리를 예정하신 원인은 그분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1:5). 때를 맞춰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사랑을 알았고, 그분의 예정하신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 ( 1:5)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 앞서서 그 사랑하시는 자” ( 1:6) 성자를 향한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도르트신조는 이런 이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당신의 의지는 주권적이고 선하며 기뻐함으로 가득한데, 이에 따라 순전한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도르트신조 1.7)

하나님께서 친히 이 영원한 은혜를 시작하시고 수행하시며 목적한 바대로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는 그 주체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택” ( 1:5) 하셨고, “예정” ( 1:5)하셨으며, “그 뜻의 목적대로” ( 1:5) 이루신 사건이다. ‘목적’ (eudokian)이라는 단어는 선하신 기쁨’ (NIV; NKJV), 혹은 온유한 의도’ (NASB)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임의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모세가 신명기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히고 있듯이,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월등히 많아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어떤 이는 선택하시고 다른 이들은 선택하시지 않았는가? 좀더 개인적으로 말해보자면, 왜 하나님은 당신은 선택하시고 당신 외의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당신 안에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 (도르트신조 1.9) 등의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에베소서 1:4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해,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것이다. 에베소서 1:5-6을 다시 읽어보자.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를 예정하심은 당신의 아들들로 삼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에 예정하신 것이 아니란 뜻이다.

한 설교가가 하나님께서 퍼레이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방송중계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위치에서 하나님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당신 앞을 지나는 모든 인간들을 보실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 선택을 행하신다. 에베소서 1장은 이것을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시간이 시작되기 전(before time)에 선택하신 것이며, 시간이 시작된 후(in time)에 그 믿음을 보시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은 진정 영화로운 사역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 중에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찬양이 솟아나오는 것이다. “빚에 억눌린 자에게 이 얼마나 크나큰 은혜인지, 날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도다!”

 

* 명확성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의 송영은 우리에게 복 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 1:4). 불특정한 무리를 언급하지 않고 나와 당신 같은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복 주셨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특정한 어떤 사람들, 믿음과 믿음의 순종으로 믿고 보존되는 사람들’ (도르트신조 1항 오류의 거부 1)이 예정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정의 명확성이란 개인적이라는 뜻이다. 만약 예정이 불명확하고 집단적이라면, 우리 자신들이 예정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들을 명확하게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칼빈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을 저술한 목적을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열정을 북돋으며, 그 감사와 열정을 우리 안에 가득히 채우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 그리스도 중심성

끝으로, 어떤 이유로 선택의 교리는 영화로운가?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우리 개혁파 신자들이 그 지식에 충분히 자라나야 할 영역 중 하나이다. 선택의 교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잊은 채로, 우리는 예정을 너무나 자주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에베소서 1장의 예정, 1-3장의 선택 교리, 4-6의 우리의 삶의 방식 등을 말하기 전에 바울은 그 모든 것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삼았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v. 3)를 찬양하게 되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v. 4)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를 복주셨다” (v. 6)고 말한다.

도르트신조는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유효한 부름심을 통해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과 교제하기로 결정하셨다. , 선택하신 자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 칭하시며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는데, 그 뿐 아니라 성자의 교제 안에서 그들을 강력히 보존해 주신다.” (도르트신조 1.7)

이것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선택의 거울과도 같다는 의미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강력한 사랑에 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의심에 쌓여있다면, 유일한 치료책은 마치 거울을 응시하듯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의 형상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선택받은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택의 교리는 얼마나 영화로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우리는 찬양과 거룩함으로 이 교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렇게 찬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 1:3),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v. 6). 그리고 그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게 된다.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무리로부터 우리는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 (v. 4)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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