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열망]

이 책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넘어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앞서 신약 성경을 인용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신약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경험하도록 기록되었다.

서신서를 예로 들어 보자. 서신의 수신자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저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 서신서들에는 그와 같은 지식이 가득 차고 넘치지만) 하나님의 더 깊은 임재를 경험하기 원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골 4:12).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딛 1:1).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몬 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8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20절).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당신은 하나님의 더 큰 임재에 목마른가? 그렇다면 그 갈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R.T. 켄달의 '하나님을 열망하다'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방언의 은사에 마음 열기

이것은 오늘날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마다 말씀과 성령 사이에 조용한 이혼이 진행되고 있다. 이혼을 하면 그 부모 슬하 자녀 가운데 어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살고, 어떤 아이들은 아빠와 산다. 이 이혼에서 말씀 사역의 편에 서는 이들은 성경 강해와 복음, 건전한 신학(이신칭의와 하나님의 주권 등)을 마땅히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는 견고한 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성령 사역의 편에 서는 이들은 사도행전과 이적과 기사, 기적,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둘이 연합할 때 폭발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한다. 성령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이 흔히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가 아니었더라면 은사 중지론자들의 가르침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쓸 때가 있다. 은사 중지론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로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고집스럽게도 그 주장을 고수하며 그들의 편견을 신조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오래전에 직접 은사 중지를 결정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아무도 지혜나, 예언, 기적의 은사는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목록에 집어넣으면서 모두가 불편해진 것이다.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은 “그러나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는데, 더 큰 은사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재빨리 “방언은 은사의 목록 중에 가장 저급한 것으로,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덧붙이곤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싶다면 바닥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언의 은사보다 더 큰 오명을 안겨 주는 문제는 없다. 만약 사람들에게서 비난받고 오명을 얻더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

슬프지만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끝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결국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말씀 편에 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성경 주석이나 교리를 찾아서 그 뒤에 숨으려 한다. 여기 해결점이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당신의 교만한 마음에 유일하게 도전하는 성령의 은사다. 여기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신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물론 아니다; 고전 12:30)라는 말씀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먼저 방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하며 너무 서둘러 도망가지 말고, 먼저 그분 앞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기 바란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브루스 메츠거 박사 밑에서 공부했던 한 친구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메츠거는 아마도 21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헬라어 학자일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쓴 것은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뜻이었습니까?“ 그러자 메츠거는 ”물론이지, 바울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맞다“라고 했다. 메츠거는 장로교인이고 아마도 은사 중지론자였을 테지만, 이 사실을 내 친구에게 인정할 정도로 학자적 양심과 객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R.T. 켄달의 '하나님을 열망하다'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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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위 이강석은 1960년 4월28일 경무대 별관에서 생부 이기붕, 생모 박마리아, 누이 이강희, 동생 이강욱을 45구경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본인도 자결했다.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라고 지목되어온 이기붕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시킨 이강석에 의해 죽게된 가족동반 자살극의 모습이다.

박마리아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에서 알게된 이기붕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과 발이  되었다. 차남 이강욱을 양자로  입양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강석을 눈여겨 본 이승만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시인 모윤숙과 중앙대를 설립한 임영신이 남편 이승만과 로멘스가 있다는 풍문에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급거 귀국할 정도로 스트레스에 쌓였던 파란눈은 크리스챤 박마리아를 믿었고 이후 보행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이기붕은 국회의장까지 탄탄대로였다. 
84세의 노(老)대통령에게 그녀는 영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짜파구리 파티만 없었을 뿐.

■제 3대 대통령 선거일은 1956년 5월15일 이었다. 5월 5일 한강 백사장에는 당시 160만 서울 인구 중 삼십 만 인파가 모여들 정도로 민주당 후보 신익희에 열광하였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신익희는 건강을 주의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정읍을 향한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쓰러진다. '목이매인 이별가를 ' 로 시작되는 '비내리는 호남선'의 유래다. 

4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조병옥은 신익희가 사용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 여덟 자 구호를 그대로 재활용했다. 66세 조병옥은 노령의 이승만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도전자가 먼저  쓰러졌다. 위암으로 판명되어 미국으로 급히 이송된 후보자는  60년 2월15일 암이 아닌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시일이 촉박한 대통령선거는 이승만 뿐이었고 2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장면과 자유당의 이기붕이 부통령 자리를 놓고 겨루었다.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 참관인 축출 등 눈에 보이는 off line 의 '아날로그식'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3월15일 개표시작 후, 마산 시민들이 처음  거리에 나섰다. 경찰은 총을 쏘았다.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맞았다. 다음날 경찰은 사망한 김주열을 바다에 던졌다. 4월 11일 이끼 낀 최류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떠올랐다.

전국은 물론 세계가 경악했다. 4월18일 고대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과 경기도 이천 동향 출신의 이정재, 임화수 등 조직깡패들이 학생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이튿날 4월19일 드디어 요원의 불길처럼 혁명은 타올랐고,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었으며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그렇게 가버렸다.

하늘은 김주열을 3.15 부정선거를  해결하는 도구로 썼다. 성난 민심의 함성이 거대한 에너지로 하늘을 향함에 우주는 그 에너지를 상쇄시킬 필요가 있었다.결국 경찰이 철사줄로 묶어 먼 바다에 수장시킨 김주열의 시신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르게 함으로써 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게한 것이다.

■몇몇 통계학자들 눈에 4.15 선거결과는 전혀  이해가 되지않은, 숫자 2의 자승에 0이 20개나 곱해져야하는 그야말로 99.999999...% 의 조작선거로 의심되었다. 더군다나 유시민이 사전에 예측했던 180명의 민주당계 당선자는 단 한명의 오차도 없이 그야말로 100% 였다.

천국을 뜻하는  '바실리아tv'의 '조슈아' 라는 중년남자는 평범한 40대의 자영업자다. IT를 조금 아는 편이고 엑셀은 경험이 풍부했다. 처음에 조작선거라는 의심은 눈꼽만큼도 하지 안했다. 선거 다음 날 신문에 난 투개표 현황 숫자를 보고 덜컥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흘 밤낮을 매달렸다.
서울.경기. 인천 3곳에 통계의 법칙을 무시하고 일정하게 적용되는 0.39 의 비밀을 풀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민주당후보를 당선시키려면 사전선거의 득표율을 얻기위한 조작값이 필요한데 그 수치는 얼마인가였다.

■조슈아는 집근처 학교운동장에서 40여 분간 땀을 뻘뻘 흘리며 죽어라고 뛰었다. 마음이 답답하여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한다. 기진맥진 상태로 지쳐서 주저 앉았을 때 불현듯 뇌리에  영감이 스쳤다. 핸드폰에 '전자개표기 부정투표 시현' 이라는 문자를 입력하자 시현자는 친절하게도 숫자 2와 3, 4, 등 조작값 대입시 달라지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었다.

종로구에 2를 대입하니 20대 선거결과와 유사한 통계가, 서울, 경기,  인천에는 3, 부산에는 4, 대구에는 6을 조작값으로 넣어 조작 전의 사전선거 득표율을 계산하자 종로구처럼 20대와 유사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부족한 수면이 단번에 보충되는 보상이었다.

군소 야당의 비례대표 선거도  알아봐 달라는 댓글이 달려왔다. 지역선거와 달리 야권이 많이 당선된 비례대표는 무시했었는데 보수성향의 기독자유통일당이 예전보다 득표율이 낮은 것을 확인하자 즉시 이틀간을 더 매달렸다. 

호남지역의 조작값이 제로(0)라는 말은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역 선거구에 투입한 2, 3, 4, 5, 6 의 조작값 보다 더 큰 수치의 상위 조작값이 비례대표 사전투표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기독자유통일당은 무려 50% 이상 사전선거득표율이 낮아 당연히 3%이내에 들 수 없었다. 우리공화당은 45%, 새벽당 48% 등도 마찬가지로 3%라는  당선권에서 멀어지게 조작되어 의원탄생은 불임이었다.

■조슈아는 더많은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려 여섯군데의 영향력있는 유튜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오직 한 곳,  하늘은 공병호에게만 마음을 열게 했는지 모른다. 60년 생 공박사는 기꺼이 한참 어린 조슈아의 학생이 되었다. 겸손한 자세로 경청하였고 본인을 비방한 수많은 유튜버들에게 진심으로 함께  하자고 호소하였다.

수학천재 Roy Kim 이 뛰어들었다. 또 한사람 유공자가 나선 것이다. 그가 밝힌 부정선거는,

첫째, 조작선거 핵심부에서 여론조사를 통해 당일 득표수를 예측한  후,
둘째, 당선에 필요한 총득표수를 구하고,
셋째, 정교한 조작함수를 찾아서,
넷째, 목표하는 사전선거득표수를 얻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수학천재는 X를 총 사전득표수로 하고,
Y는 민주당 후보자 당일 득표수, Z는 조작비율, N은 지역구 가중치로 설정해 조작함수 0.3095  를 얻어 '목표사전득표수'를 계산해 내었다.
즉, 목표사전득표수= X - XY/ ZN 자승의 공식을 저들이 사용했다는 것이다.소숫점까지 정확하여 조슈아의 '조작값' 이론을 보정한다.

■3.15 부정선거를 온 국민이 알게하려고 하늘은 김주열을 도구로 쓴 것처럼, 4.15 부정선거에는 공병호, 조슈아, 이봉규, 가로세로 연구회, Roy Kim 등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했다. 민경욱, 김소연도 용기를 냈다. 

조.중. 동 주력 언론 3사와 나머지 종편 방송 기레기들은 숫제 입을 닫고 있다. 혼자는 그토록 똑똑한 정규제, 조갑제, 황장수, 이병태 같은 보수의 얼굴이라고 자처하는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과거의 눈에 보이는 Off Line의 아날로그식이 아니어서 아예 눈을 감고,
시건방진 이준석의 시다바리를 자처한다.

말들은 22세기까지 거침이 없으면서 On Line 디지털은 영 생소하여 투표함 바꿔치기를 눈으로 보지 않는 한 그놈의 막대기하며 QR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다. 드리닥칠 내일의 진실을 그들은 무슨 낯으로 맞이할까?

민주연구원장 양정철은 개표이전부터 사색이 되었다. 10억을 받아먹은 이근형과 박시형 등 연구원들 중에 이근형이 그걸로 퉁치냐며 100억을 더 내놓으라 대들고, 공범자들 중 0.39 절대수치를 63대 36의 암호와 함께 떡밥으로 깔았다는 소리도 떠돈다. 4.15는 머잖아 적나라한 그 모습을 드러낼 터이고  '자유'는 쉽게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2020년 5월 초하루

하늘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헤아립니다.





활성탄은 오염된 물이나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는데 유용합니다. 응급 상황에서 활성탄은 신체에서 위험한 독소와 독  제거 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 숯을 활성화 하기 전에 먼저 나무나 섬유질 식물 재료를 태워서 직접 만든 숯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염화칼슘 또는 레몬 주스와 같은 활성화 화학 물질을 추가하고 활성화 프로세스를 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1. 활성탄 만드는 방법

1. 안전한 지역에 윗 그림과 같이 화덕을 만듭니다. 야외 화덕은 활성탄을 만드는데 가장 쉬운 방법 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 벽난로에서도 가능합니다. 화덕은 나무 토막을 태울 수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합니다.

  • 불을 밝힐 때 안전 예방 조치를 취하고 항상 소화기를 가까이 두십시오.

 

2. 작은 나무 조각을 금속 냄비에 가득 채우십시오. 나무를 사용할 수없는 경우 코코넛 껍질과 같은 밀도가 높고 섬유질이 많은 식물 재료로 대체 할 수 있습니다. 나무 조각이나 식물 재료를 금속 냄비에 넣은 다음 뚜껑으로 덮으십시오.

  • 냄비 뚜껑에는 통풍구가 있어야 하지만 냄비 안쪽으로의 공기 흐름은 이 과정에서 제한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캠프 조리기구 주전자를 사용하면 공기가 스파우트(주둥이)를 통해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 나무 재료는 냄비에 넣기 전에 가능한 건조해야합니다.

 

3. 숯을 만들기 위해 3 ~ 5 시간 동안 화덕에 냄비를 가열 하십시오. 뚜껑이 달린 냄비를 불 위에 거십시오. 나무가 가열되면서 뚜껑의 통풍구에서 연기와 가스가 빠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밀폐된 주전자 안에 있는 탄소(숯)를 제외한 재료에서 모든 것이 태워집니다.

  • 냄비에서 연기나 가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숯 만들기가 끝난 것 같습니다.

 

 

4. 숯이 차가워지면 물로 깨끗하게 세척하십시오. 냄비에 담긴 숯은 잠시 뜨겁게 유지됩니다. 식힐 시간을 충분히 주십시오. 차갑게 식은 탄소를 깨끗한 용기로 옮기고 시원한 물로 헹구어 재와 남은 잔해물을 제거한 다음 물을 빼냅니다.

 

 

 

5. 숯을 갈아주세요. 깨끗한 숯을 절구에 옮기고 방맹이로 갈아서 미세한 가루로 으깨십시오. 또는 내구성이 강한 비닐 봉지에 탄소를 넣고 연한 망치 또는 망치로 미세한 분말로 분쇄 할 수 있습니다.

 

 

 

6. 숯 가루를 완전히 공기에 건조 시키십시오. 비닐 봉지를 사용한 경우 파우더를 깨끗한 그릇에 옮기거나 절구안에서 하루 정도 놓아두면 약 24 시간 안에 분말이 건조하게 마릅니다.

  • 손가락으로 건조 함을 확인하십시오. 사용하기 전에 파우더가 완전히 건조되어야합니다. 

 

2. 숯 활성화

1. 염화칼슘과 물을 1 : 3 비율로 혼합하십시오. 이러한 물질을 혼합 할 때는주의하십시오. 그렇게하면 용액이 매우 뜨거워 질 수 있습니다. 숯을 완전히 덮을 수있는 충분한 솔루션이 필요합니다. 보통 크기의 숯 배치의 경우, 1.3 컵 (310ml)의 물과 혼합된 100g (3.5oz)의 클로라이드(염화물)로 충분합니다.

  • 염화칼슘은 대부분의 철물점, 홈 센터 및 일반 소매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2. 염화칼슘 용액 대신 표백제 또는 레몬 주스를 사용하십시오. 염화칼슘을 찾을 수 없으면 표백제 나 레몬 주스로 대체 할 수 있습니다. 염화칼슘 용액 대신 표백제 1.3 컵 (310 ml) 또는 레몬 주스 1.3 컵 (310 ml)을 사용하십시오. 

 

 

 

3. 염화칼슘 용액과 목탄 분말을 함께 저어줍니다. 마른 숯 가루를 스테인레스 스틸 또는 유리 혼합 용기에 옮깁니다. 염화칼슘 용액 (또는 레몬 주스 또는 표백제)을 가루에 조금씩 넣고 숟가락으로 저어주십시오.

  • 혼합물이 페이스트 적당한 농도에 도달하면 용액 첨가를 중단하십시오.

 

 

4. 그릇을 덮고 숯을 24 시간 동안 그대로 두십시오. 그릇을 덮고 그대로 두십시오. 그 후, 가능한 많은 수분을 용기에서 배출하십시오. 이 시점에서 숯은 젖어야 하지만 포화되지 않아야합니다.

 

 

5. 숯을 3 시간 더 열을 가해 활성화합니다. 숯을 (깨끗한) 금속 냄비에 넣고 불에 다시 넣습니다. 불은 숯이 활성화 되도록 물을 끓일 수있을 정도로 뜨거워야 합니다. 이 온도에서 3 시간 동안 가열하면 숯이 활성화됩니다.

 

 

 

3. 활성탄 사용법

1. 활성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십시오. 활성탄은 공기와 물에서 악취, 박테리아, 오염 물질 및 알레르겐을 제거하는 데 유용합니다. 그것은 냄새, 독소, 박테리아, 오염 물질, 알레르겐 및 화학 물질을 숯 안의 수많은 작은 구멍에 갇히게합니다.

 

 

 

2. 집안의 공기를 정화하십시오. 활성탄을 린넨 시트 나 천에 싸서 필요한 곳에 숯을 넣으십시오. 린넨이 없는 경우 면과 같이 촘촘히 짜서 통기성 직물을 선택하십시오.

  • 세제나 표백제 냄새가 나는 천은 사용하지 마십시오. 숯은 이러한 냄새를 흡수하여 효과를 감소 시킵니다.
  • 공기 정화 기능을 향상 시키려면 Fan을 사용하여 숯에 공기를 불어 넣으십시오. 공기가 숯을 지나갈 때 정화됩니다.

 

 

 

 

3. 주머니로 숯불 워터 필터를 만드십시오. 상점에서 구입 한 정수 필터는 비쌀 수 있지만, 자체 정수 필터를 만들어서 동일한 품질의 필터를 저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세제나 표백 냄새가 나지 않는 깨끗한 주머니에 활성탄을 넣은 후 주머니에 물을 붓습니다.

 

 

 

 

4. 찰흙 숯 얼굴 mask팩을 만드십시오. 작은 혼합 그릇에, 2 스푼 (30 ㎖), 벤토나이트 점토, 조합 1 / 2 활성탄 술 (2.5 mL) 중 1 큰술 (15 ㎖) 심황, 사과 식초 2 스푼 (30 ㎖)을 꿀 1 티스푼 (4.9ml). 그런 다음 매끄럽게 될 때까지 혼합물에 물을 한 번에 조금씩 첨가하십시오.

  • 이 얼굴 mask팩은 독소를 뽑아 내고 모공을 막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 이 얼굴 mask팩에 사용 된 천연 성분은 거의 모든 피부 타입에 안전합니다.

얼굴 mask팩을 두껍게얼굴에 바른 다음 10 후에 씻어냅니다.

 

5. 활성탄으로 위장의 팽만감과 가스를 치료하십시오. 500 밀리그램 (0.02 oz)의 분말 활성탄을 12 액량 온스 (350 ml)의 물에 첨가하십시오. 가스 생성 식사 전 또는 가스 느낌이 나기 시작하면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 혼합물을 마셔야합니다.

  • 당근과 같은 비 산성 주스로 숯을 먹는 것이 평범한 것보다 즐겁습니다. 숯의 효과를 떨어 뜨리는 산성 주스 (오렌지 나 사과 주스 등)를 피하십시오.

 

 

4. 마스크 필터 만들기

1. 플라스틱 2 L (68 fl oz) 병으로 마스크를 만드십시오. 가위를 사용하여 바닥을 2L (68 fl oz) 플라스틱 병에서 자릅니다. 그런 다음 병 한쪽에서 3 인치 (7.3cm) 너비 패널을 제거합니다. 패널은 절단 된 바닥에서 병의 목이 주둥이쪽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하는 지점까지 확장됩니다.

  • 플라스틱을 가위로 자르면 들쭉날쭉해질 수 있습니다. 패딩시 병 가장자리를 따라 의료용 테이프를 사용하십시오.

 

 

2. 알루미늄 캔으로 필터 챔버를 만듭니다. 가위 나 드라이버로 알루미늄 캔 바닥에 호흡 구멍을 뚫습니다. 그런 다음 튼튼한 가위, 주석 자르기 또는 가위로 알루미늄 캔의 상단을 자릅니다.

  • 금속 캔을 절단시 주의하십시오. 종종 손가락을 쉽게 다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덕트 또는 의료용 테이프 층을 날카로운 모서리에 패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활성탄으로 방독면을 장착하십시오. 
캔 바닥에 솜이나 면 층을 삽입하십시오. 목화 위에 활성탄 층을 추가 한 다음, 목탄을 다른 목화 층 위에 끼 웁니다. 캔의 윗면 위에 면을 테이프로 붙인 다음면에 작은 구멍을 냅니다.

알루미늄 캔이나, 특히 얼굴면에 닫는 날카로운 프라스틱의 모서리에 테이프를 붙혀 얼굴이 끓히지 않도록 주의하여 MASK 제작을 끝 내십시요

4. 가스 마스크를 함께 테이프로 묶고 필요할 때 사용하십시오. 2L (68 fl oz) 병의 주둥이를 캔 상단의 구멍에 삽입합니다. 마스크를 완성하기 위해 알루미늄 캔을 2L (68 fl oz) 병에 테이프로 붙입니다. 주둥이를 통해 숨을 쉬면 호흡하는 공기가 캔의 숯으로 여과됩니다.

 

 

커뮤니티 Q & A

  • 질문: 거친 활성탄을 분쇄하지 않고 만들 수 있습니까?

    커뮤니티 답변: 그것은. 그러나, 연삭은 최대 흡수를 위해 표면적을 향상시키고, 또한 흡수 속도를 증가시킬 수있다.

     

  • 질문: 염화칼슘 또는 레몬 주스는 숯에 어떤 역할을합니까? 왜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부분입니까?

    커뮤니티 답변: 그것은 불순물의 숯 표면을 청소하여 100 % 탄소가되도록합니다.

     

  • 질문: 염화칼슘 대신 레몬으로 활성화 할 때 숯을 씻어야합니까?

    예, 베이킹 후 항상 씻으십시오. 레몬이 들어 가지 않도록 강한 소금 용액을 사용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강한 산, 염기 또는 소금을 사용하고 2-3 배 세척 한 다음 구울 수 있습니다.

     

  • 질문: 숯으로 치료할 수있는 질병이 있습니까?

    커뮤니티 답변: 아니요, 숯은 질병을 치료하지는 않지만 팽만감과 가스를 치료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질문: 염화칼슘 대신 칼라 만시 주스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커뮤니티 답변: 그것은 충분히 강한 산인지 염기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리트머스 스트립을 꽤 싸게 구입하여 테스트 할 수 있습니다.

     

  • 질문: 벽난로에서 사용한 후에는 일반 숯이 활성화됩니까?

    커뮤니티 답변: 아니요, 레몬 주스와 설명의 다른 단계가 필요합니다. 2 부, 1-5 단계를 읽으십시오.

     

  • 질문: 재탄이 될 때까지 활엽수를 태워야합니까?

    커뮤니티 답변: 재가 아닌 숯을 만들어야합니다. 숯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무에 닿는 불꽃이 없어야합니다

     

  • 질문: 이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크기의 주전자를 사용해야합니까?

    커뮤니티 답변: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숯에 얼마나 많은 나무를 사용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끝은 젖었을 때 갈기 쉬우므로 나머지 단계를 계속하기 전에 갈아서 말리십시오.

     

  • 질문: 활성탄은 소화관 문제를 치료합니까?

    커뮤니티 답변: 아닙니다. 그것은 약이 아닌 여과기로 사용됩니다. 필터링 만 가능합니다.

     

  • 질문: 활성탄은 어떤 종류의 독에도 좋은가요?

    커뮤니티 답변: 연구에 따르면 독소와 싸우는 것이 유익하지만 뱀 물린과 같은 심각한 중독의 경우 병원에 가십시오.

경고

  • 숯을 구울 때 불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화재가 발생하거나 온도가 너무 낮아지면 숯이 구워지지 않습니다.

  • 염화칼슘과 같은 화학 물질을 잘못 취급하거나 사용하면 위험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화학 물질 레이블에 나열된 안전 절차를 따르십시오.

필요한 것

  • 금속 포트 (및 통풍구가있는 뚜껑)
  • 목재 (또는 코코넛 껍질과 같은 섬유질 식물 재료)
  • 컨테이너 (깨끗한 그릇 또는 양동이와 같은)
  • 절구와 방망이 (또는 튼튼한 비닐 봉투 및 연성 망치)
  • 염화칼슘 (또는 레몬 주스 또는 표백제)
  • 스테인리스 스틸 또는 유리 믹싱 보울
  • 숟가락
  • 린넨 시트 또는 천 (또는 촘촘히 짜서 통기성 직물)
  • 깨끗한 주머니
  • 가위
  • 플라스틱 2L (68 fl oz) 병
  • 의료용 테이프
  • 알루미늄 캔
  • 활성탄

 

출처: https://www.wikihow.com/Make-Activated-Charcoal

 

 

참조: 마스크의 모든것: 

집에서 만들수있는 더좋은 보호장비
https://youtu.be/OcMye5QdMXI

 

 

아마존에서 구입 가능한 얼굴 보호 장비

 

 

 

Laminating Sheet으로 제작한 Face Shield

 

Laminating Sheet으로 제작한 Face Shield

한국교회의 성장이 어느 때부터인가 정지, 또는 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보고다. 이와 함께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견도 많다. 숭실대 한국기독교 문화연구소(소장 김영한)는 그 원인에 대해서 '목회철학의 빈곤'을 손꼽았다. 그리고 그의 근본적 대책으로 '하나님 중심의 목회로 돌아가는 것'이라 지적했다. 이번 제 4회 전국 목회자 신학세미나는 지난 2월 26일부터 5일간 숭실대학교에서 '하나님 중심의 목회와 한국교회의 갱신'이란 주제로 열렸다.

'하나님 중심의 목회'란 하나님이 목회의 중심에 계시고 목회자는 그 하나님의 사역에 보조한다는 뜻이며, '한국교회의 갱신'이란 목회자의 갱신, 교인들의 자기 갱신, 종교 왕국이 아닌 하나님의 왕국 지향, 세속 한 가운데 서있는 하나님의 집의 역할, 말씀과 성령의 충만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되는 교회로의 지향을 뜻한다는 것이다. 본 세미나는 점차 높아져 가는 교육 수준에 부응하기 위한 목회자에게, 그리고 문화가 있는 교회, 사회의식이 있는 교회로의 발돋움을 갈구하는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주>

  Ⅰ. 서 언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우리는 말을 통하여 그 사람의 지식 정도, 교양, 품성 등을 알 수 있다. 즉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이 그대로 노출되는 말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항상 바른 말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품을 반영하는 것과 동시에 말을 통해서 우리의 인품이, 인격이 형성된다. 바른 말, 선한 말만 하려고 애쓸 때 우리의 성품은 바르고 선하게 되며 비속하고 악한 말을 즐겨 쓸 때 우리의 인격은 고상해 질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항상 바른 말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며 그 말씀을 준행하려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다. 말씀이 중심이 되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언어는 보다 바르고 선하고 깨끗해야 한다. 성도들의 언어는 보다 고상해야 하며 경망스럽거나 비속해서는 안된다. 성도들은 바르고 선하고 깨끗하고 고상한 말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과 신앙을 향상시켜야 하며 또 다른 사람에게도 덕을 끼쳐야 한다. 행여 바르지 못한, 경망스럽고 비속한 말을 함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까지 덕이 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선교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교회 안의 누구보다도 더욱 바르고 선하고 깨끗하고 고상한 말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힘있게 전할 수 있으며 아울러 성도들의 언어도 바로 지도할 수가 있다.

  오늘날 설교자를 비롯하여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술어의 오용 
   
  많은 술어들이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쓰이거나 아예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일례로 '예배보다'라는 술어에 대하여 생각해 보련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아직도 '예배보다'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禮拜)의 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절'이다.  그 의미를 확대하여 교회에서는 지금 우리가 아는 대로 여러 가지 순서를 진행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행위 그 자체를 예배라 부르고 있다. 순서가 좀 다채롭기는 하지만 이 예배의 근본 정신은 웃어른에게 머리를 숙이는 '절' 바로 그것이다.

  국어에서 '예배'란 절을 의미하는 명사다. 국어 어휘에는 한자(漢字) 두 자로 만들어 진 한자어가 많은데, 이것들은 거의가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 '예배'도 그 중의 하나다.

  한자어로 된 명사를 동사로 만드는 방법은 이들 명사에 접사 '-하다'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부-하다, 운동-하다, 숙제-하다, 노동-하다, 전쟁-하다, 수영-하다…' 등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들 동사는 각각 '-하다'를 붙이기 전의 명사인 공부, 운동, 숙제, 노동, 전쟁, 수영 등의 내용을 행위화한다. 물론 한자어가 아닌 '일, 말, 노름, 살림' 등의 명사도 '-하다'를 붙여 동사로 만들어 이들 내용 자체를 행위화한다.

 '-하다'를 붙이는 것보다는 일반적이 아니지만 '보다'를 명사에 붙여 동사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하다'를 붙이는 경우와 달라진다.  일례로 '축구하다'와 '축구보다'를 들어보면 '축구하다'는 주체(주어)가 축구를 하는 것인데 반하여, '축구보다'는 주체가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즉 제3자가 축구하는 것을 본다는 의미가 된다. '영화보다', '굿보다', '연극보다', '야구보다' 등이 모두 같은 성격을 띠는 동사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예배-하다'는 예배 즉 '절'을 한다는 의미의 동사가 성립되어 교회 안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용어가 되지만 '예배보다'는 남이 예배드리는 것을 구경한다는 의미가 되고 말기 때문에 우리가 쓸 수 있는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은유적 표현법이 되고 만 '소변보다', '대변보다', '뒤보다', '장보다'와 같은 어휘들을 감안한다해도 역시 '예배보다'는 안쓰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것을 굳이 은유법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예배보다'가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예배드리는 것이 볼만한 구경거리로 등장했던 이른 시기에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사용한 것이 그 발단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초기의 번역 성경들에서는 '예배보다'는 안 쓰였으며 오히려 '절하다'와 '예배하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샹이 이산에 절?였거니와 오직 쥬는 맛당히 절할 곳이 예루살임에 잇다?니(1887. 예수셩교젼셔, 요안 4:20).
  너희가 아밤의게 절?미(1887. 예슈셩교젼셔, 요안 4:21).
  우리 죠샹은 이 산에셔 례?엿거니와 너희 말은 례 곳시 예루살렘에 잇다 ?더이다(1900. 신약젼셔, 요 4:20).   
  아버지 례?지 아니 ?리라(1900. 신약젼셔, 요 4:21).

   예수셩교젼셔 는 1887년 만주에서 선교하던 스코트랜드 선교사 로쓰 목사가 봉천에서 한국인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 이성하 등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 낸 신약전서인데 이 성경에는 '예배드리다'가 '절하다'(절?다)로 나타난다.

  1900년에 나온  신약젼셔 는 성서번역자회에서 1897년부터 신약의 낱권들을 번역해 내다가 1900년에 가서 이들을 함께 묶어 간행한 성경인데 이 성경에서는 위에 보인 바와 같이 '예배드리다'가 '예배하다'(례?다)로 나타난다. 이  신약젼셔 는 수정을 거듭하여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개역성경의 저본이 되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개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배하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개역성경, 요 4:20).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개역성경, 요 4:21).

  성경에 이처럼 '예배보다'는 전연 나타나지 않고 '예배하다'가 전적으로 쓰이고 있음은 결국 '예배보다'는 적합한 용어가 될 수 없음에 비하여 '예배하다'가 적절한 용어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기본적으로 '절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예배하다'는 의미론적으로나 국어 조어법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요즈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예배하다' 대신에 '예배드리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이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겠다.

  '예배드리다'는 '예배하다'의 겸양적 표현이다. '말하다'의 겸양어는 '밀씀드리다'이며 '절하다'는 '절(을)드리다', '청하다'는 '청(을)드리다', '경배하다'는 '경배(를)드리다', '질문하다'는 '질문(을)드리다' 등으로 겸양어를 만들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예배하다'의 겸양어 '예배드리다'가 가능하다.

  또한 이 '예배드리다'는 예배가 나의 몸과 마음 즉 나의 모든 것을 정성껏 하나님께 묶어 바친다는 경건과 봉헌의 의미가 한층 부각되면서 그에 적절한 말 '드리다'가 자연스럽게 쓰이게 된 것이다.  '기도하다'가 '기도드리다'로도 많이 쓰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77년에 나온  공동 번역성서  나 또 최근에 나왔던  표준새번역 성경전서 에서도 이 '예배드리다'가 '예배하다'와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공동번역성서 요 4:22, 24).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표준새번역 성경전서, 요 4:22, 24).

  예배의 대상이 분명히 하나님일 경우에는 '예배드리다'를 쓰고 그 외의 경우에는 '예배하다"를 쓴  공동번역성서 에 더 많은 공감이 간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용어로는 '예배보다'는 적합하지 않고 '예배하다'는 어법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자가 없는 말이며, '예배드리다'는 아무런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예배하다'가 가지고 있는 내용 외에 경건과 봉헌의 의미가 더 포함되어 있으며 아울러 겸양을 표현하는 바람직한 용어다.

  이 '예배보다' 외에 다음과 같은 많은 술어들이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다.
축복
당신
주여, 하나님이시여
아멘
기도하였습니다
대표 기도
형제, 자매
철야 기도
사회자
영혼의 아버지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아들
내 양(내 새끼)
주의 종
전야제
목양실
당회장 목사
할렐루야

유태교적 용어(선지 학교, 제사, 제단…)
개(폐)회 찬송
우리 성도님들이
      축원합니다
      …

   2. 불쾌한 어감

  설교자가 서는 강단은 거룩한 곳이다.  이 강단에는 고상하고 깨끗한 것들이 올라가는 곳이다. 몸도 마음도 꺠끗하여야 하고 옷 매무새도 단정해야만 한다. 아울러 강단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깨끗하며 고상한 말이어야 한다. 행여 고상하지 못한 말이나 비속어가 마구 쓰여지면 안된다.  이런 것들로는 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기 어렵다. 이들은 설교자 자신은 물론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눈쌀을 찌푸리게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유념하여야 한다.

 1) 반말투
  설교자가 단 위에서 다음과 같은 반말투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도를 열심히 하자구."
  "죽기는 왜 죽어?"
  "이래 가지고는 안돼."
  이와 유사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어미가 끊긴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면 천국에 못 감(니다)"
  "더욱 열심히 해야 함(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함(니다)"
  성직자를 지칭하거나 호칭할 때 '-님'을 붙이지 않으면 안된다.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구역장(님)
   권사(님)   권찰(님)
   집사(님)   선생(님)
 
  물론 사람을 지칭하거나 호칭하지 않고 성직 그 자체를 가리킬 경우에는 '-님'을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딤전 3:2-4).
   '집사들은 단정하고…깨끗한 양심에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8-9).
   '장로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당회에 보고한다.'(장로회 헌법 정치 39조)

 2) 비속어, 은어
  비속어나 은어도 강단에 올라갈 것은 못된다. 하나님 말씀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새 발의 피, 엽전,  쇠푼, 엿 장수 맘대로, 웃기시네, 아구통 돌린다,      초친다, 기름친다, 부티 난다, 끝내준다, 줄탄다, 때빼고 광낸다, 작살낸다, 뿔났다, 쌔빈다
   아더메치유, 골 비었다, 왕초,
   식충이, 도레미탕, 꼬시다,
   김샌다, 눈깔, 토낀다, 놀고 있네,
   악바리, 호박꽃, 밥순이 묵사발 만든다,
   꼽사리 낀다, 초친다, 민주주의, 바가지, 제비,
   대갈통, 눈깔, 뺨때기, 뺨사대기,
   귀싸대기,
   빵깐, 잘났어 정말,

 3) 욕도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설교자의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
   짜식, 놈, 새끼, 이년,
   우라질 년, 염병할 년, 벼락을 맞을 놈,
   육실할 년, 썩을 놈, 빌어먹을 년,
   병신같은 놈, 빙충맞은 놈, 지랄하고 있네, 되질 년

 4) 농담도 거룩한 단상에는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

   3. 지방 방언의 남용

  설교자도 공공 집회에서의 화자(話者)임에 틀림없다.  공공집회의 화자는 가급적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언어학적으로 방언은 방언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언이 특히 표준어와 아주 틀린 방언어휘들이 큰 도시 교회의 설교자 입에서 마구 구사된다면 말씀 전파에 득이 되지 못한다.  우선 어휘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말씀의 의미전달이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다.

  다음과 같은 어휘들을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방언으로 구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엌(정지, 부섭…)       여우(여시,여깽이…)
   분침(푼침)              경황없다(경없다)
   갈비(가리)              궁상떨다(궁떨다)
   휴지(수지)              낙인 찍다(낙치다. 낙하다)
   무(무수)                마구잡이(막잡이)

   뱀(배암)                수두룩하다(수둑하다)
   벽돌(벽)                구들장(방돌)
   모이(모)                까막눈(맹눈)
   멸치(메리치, 며루치)     마른 빨래(건 빨래)
   아내(안해)               성냥(화곽)
   고린내(코린내)           잎담배(잎초)
   구린내(쿠린내)            잔돈(잔전)
   망가뜨리다(망그뜨리다)    푼돈(푼전)

   수삼(무삼)                더부룩하다(듬부룩하다)        
   윤달(군달)                귀뜀(귀틤)
   고구마(찰감자)            광주리(광우리)
   국물(멀국)                 솔개(소리개)
   옹골차다(공골하다)         까다롭다(까탈스럽다)
   우두커니(우두머니)         담배꽁초(담배꼬투리)
   잠투정(잠투세, 잠주정)      등나무(등침)
   떡보(떡충이)               똑딱간추(딸꼭단추)
   먼발치(먼발치기)

     4. 외래어의 남용            

  세계 어느 언어든지 외래어가 없는 언어는 없다. 외래어는 문화의 접촉으로 인하여 자연히 발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언어든지 외래어가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같지 않다. 외래어를 신중을 기하면서 받아들이는 나라도 있고 무분별하게 마구 받아들이는 나라도 있다. 전자는 어떤 의미에서 주체성이 강한 나라들이며 후자는 그것이 비교적 약한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자성할 바가 많다.

  고유어와 외래어의 경계가 때로는 불분명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우리 고유어가 있는데도 이를 쓰지 않고 도리어 외래어를 무작정 선호한다면 이것은 큰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설교자는 이에 관하여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1) 고유어
다음과 같은 고유어를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한 이를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

솔다1: 부레풀이나 콘크리트 등이 말라서 단단히 굳어지다. 
솔다2: 시끄러운 소리나 귀찮은 말을 많이 들어서 귀가 아프게 되다. 
솔다3: 넓이가 좁다. 폭이 좁다. 
숫구멍: 갓난 아이의 정수리가 아직 굳지 아니하여 숨쉴때마다 발딱발딱 뛰는 곳, 숨구멍, 정문
어섯1: 사물의 한 부분에 지나지 못한 정도
어섯2: 완전하게 다 되지 못하는 정도

엄장: 겉모양이 드러나게 어울리는 큰 덩치
엉너리: 남의 호기심을 사기 위하여 어벌쩡하게 서두르는 것
에다: 예리한 연장으로 도려낸다
에움길: 굽은 길
여: 물 속에 잠겨 잇는 바위, 암초
여우볕: 비 오는 날 잠깐 났다가 숨어버리는 볕
열없다: 조금 부끄럽다.  성질이 묽고 째이지 못하다.  담이 크지 못하고 겁이 많다. 
옭다1: 칭칭 잡아 매다.
옭다2: 올가미를 씌우다.
옭다3: 꾀를 써서 남을 걸려들게 하다.

욱이다: 안쪽으로 욱게하다. (욱다: 안쪽으로 우그러지다.)
웃비: 아직 우기에 좍좍 내리다가 그친 비
웃자라다: 식물의 줄기나 잎이 쓸데없이 길고 연약하게 자라다. 
이드거니: 한동안 뜨음하여 분량이 좀 많게
자드락: 나지막한 산기슭의 경사진 땅
자발없다: 참을성이 없고 행동이 경솔하다. 
재빼기: 재의 꼭대기
조살하다: 노인의 얼굴이 깨긋하고 조촐하다. 
좌뜨다: 생각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줄목: 어떤 일에 관계되어 나가는 요긴한 목

진티: 일이 잘못되어 가는 빌미
짝귀: 짝짝이로 생긴 귀
참살: 건강하게 포동포동 찐 살
채발: 볼이 좁고 길쭉하여 맵시있게 생긴 발
태가다: 질그릇이나 놋그릇에 깨진 금이 나다.  
테밖: 한통속에 들지 못한 그 밖.
핫어미: 남편이 있는 여자, 유부녀
허방: 음푹 패어 빠지기 쉬운 땅
희붐하다: 새벽의 밝은 빛이 조금 희다.

2)한자어
한자 외래어는 해방 직후 '우리것'을 아끼려는 국민 의식의 발로로 인하여 그런대로 다소 정리가 되고 있다. 8·15 이후 미군정청 문교부에서 국민학교용 교과서에서 한자어를 고유어로 대친시킨 예를 몇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a. 피부(皮膚)- 살갗
 성대(聲帶)- 목청
 주위(周圍)- 둘레
 육지(陸地)- 뭍
 운모(雲母)- 돌비늘
 견치(犬齒)- 송곳니
 저변(底邊)- 밑변
 도표(圖表)- 그림표

 익모(翊毛)- 깃털
 조류(鳥類)- 날짐승
 암염(岩鹽)- 돌소금
 사구(砂丘)- 모래언덕
 석영(石英)- 차돌
 해구(海狗)- 물개
 어류(魚類)- 물고기

b. 회전축(回轉軸)- 돌대
 음색(音色)- 소리맵시
 회전(回轉)- 맴돌이
 화성암(火成岩)- 불에 탄 바위
 암실(暗室)- 굴방
 단체생활(團體生活)- 모듬사리
 범위(範圍)- 얼안
 소화액(消化液)- 삭임물
 생물(生物)- 산 것
 무생물(無生物)- 안 산것

3) 일본어
일본 외래어의 경우도 해방 이후 당시 '우리 것'을 아끼려는 생각으로 인하여 많이 정리가 되고 있다. 1950년 2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에서 '우리말 도로 찾기'에 제시된 고유어로 대치되어 널리 쓰이게 된 용례 몇 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앗사리― 산듯이, 깨끗이, 말끔이
기지― 감
오시이레― 반침
시아게― 마무리, 마무르기, 끝손질

벤또― 도시락
오뎅― 꼬치전골
간즈메― 통조림
사까다찌― 곤두서기, 물구나무서기
덴뿌라― 튀김
스시― 초밥
소바― 모밀국수
스리― 소매치기

4) 서구 외래어 
서구 외래어는 마구 늘어가고 있으며 요즈음에는 특히 상표명, 상품명들이 간판으로, 인쇄물로 정말 미친 듯이 판을 치고 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외래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글자 그대로 외국어라 할 만한 것들도 너무 많다. 외래어란 이미 언중에게 일반화된 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엔트리, 아트센터, 인스티튜트, 마담봉줄, 디자이너부띠, 롯데월드, 갤러리아, 그랜드, 메디컬센터, 인터모드, 브랜드, 스튜어갤럭시, 데코프라자, 리즈콜렉션, 마담엘레강스, 뉴코아, 유니보끄, 아로나민골드, 해태마트, 화니, 시뇨라, 카타리나, 선워드, 애시드린, 루이상뜨, 마르조, 셔틀버스, 롯데슈퍼, 인터내셔날, 실린더, 파위, 그래픽, 체인, 뉴미디어, 저널, 코칭스태프, 바겐세일, 스넥코너, 신드롬….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심지어는 한글도 표시하지 않고 영자로만 표기한 상호, 상품명도 부지기수다.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외래어가 남용되는 원인은 외국산이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심리와 관계가 있으며 일차적으로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식인에 의해 도입되며 상류지향 심리 때문에 일반 서민에게도 쉽게 보급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말에 대한 인식부족과 함께 언어사대주의 사상이 잠재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5) 그릇된 발음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의미전달은 그만큼 효과적이 아니다.  특히 자음에 있어서 공연히 경음으로 발음하는 단어들이 상당히 있는데 이는 재고를 요한다. 
1) 자음의 경음화
a. 까죽(가죽), 깜다(감다), 깨구리(개구리), 꼬삐(고삐), 꼬소하다(고소하다), 꼬추(고추), 뚜꺼비(두꺼비), 뿌시다(부시다), 쏘나기(소나기), 쏘금(소금), 짠디(잔디), 쪼각달(조각달), 쭐다(줄다),

 교꽈서(교과서), 말또(말도), 맘때로(맘대로), 일뜰이(일들이), 김빱(김밥), 실빠람(실바람), 삧(빛), 삐추다(비추다), 방뻠(방범)
b. 믿씁니다, 예쓔, 불쌍히, 역쌰, 할 쓔 있다.

2) 모음의 발음(ㅐ:ㅔ, CWV, CJV)
모음가운데 'ㅐ'와 'ㅔ'의 발음이 애매하며 아울러 이중모음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수(예수)   내(네)
개(게)       때(떼)          배(베)
재(죄)       해개(회개)      기한(귀한)
달갈(달걀)   빰(뺨)          학고, 핵교(학교)
구칙(규칙)   포(표)          펜지(편지)
배락(벼락)   벵(병)          가자(과자)
대지(돼지)   헌하다(훤하다)  강주리(광주리)
하로(화로)   호자(효자)      오번에(요번에)
가실(과실)   헉탕물(흙탕물)  정거(증거)

3) 장단음
장음과 단음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a. 산토끼, 발, 벌, 눈
 밤, 병, 장, 섬
 업다(업다, 없다), 공
 
 b. 오(五), 병(病), 공, 범,
   운(運), 명(命), 돈, 섬,
  무기, 교육, 선물, 동물,
  시민, 묘지, 영생, 면접

4) 억양, 강약
어색할 정도의 억양을 고쳐야 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주시옵소서
계속적으로 억양을 높임

5) 잘못 발음하는 한자어
이것은 부주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한자를 잘못 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국어 실력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의 국어 실력은 성도들로 하여금 무의식 중에 그의 성경 지식과도 연관을 짓게 되기 때문에 말씀 전파의 효과는 그만큼 반감된다. 
흔히 잘못 발음하는 한자어를 몇개 예로 들어본다. 괄호 안의 것이 맞는 발음이다.

간사지(干潟地, 간석지), 갱장(更張, 경장), 갱질(更迭, 경질), 각란(攪亂, 교란), 구공(口腔, 구강), 구독점(句讀點, 구두점), 동착(撞着, 당착), 동찰(洞察, 통찰), 산포(撒布, 살포), 성략(省略, 생략), 연멸(湮滅, 인멸), 점청(點睛, 점정), 탐익(眈溺, 탐닉), 풍비(風靡, 풍미), 홍문(肛門, 항문), 행오(行伍, 항오), 취각(嗅覺, 후각)

6. 비문법적 문장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구사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게 되어지다.
고맙고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여
사(赦)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하나님

III  결언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힘있게 전파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말로 전파함에 있어서 말씀이 바르게, 힘있게 전파되기 위해서 말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보다 말씀이 잘 전파될 수 있도록 보다 말을 잘 구사해야 한다.

말씀을 담을 수 있는 말은 곧 바르고 선하고 깨끗하고 고상한 말이다.  말에는 말씀을 담을 수 없는 잘못된, 비속한 말들도 있다. 설교자가 단상에서 술어의 오용 또는 불쾌한 어감을 자아내는 말을 한다든지, 방언적 색채가 너무 두드러지는 말을 한다든지,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마구 남용한다든지, 표준발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특이한 발음으로 어휘를 구사한다든지, 비문법적 문장을 엮어내리든지 한자의 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엉뚱한 단어를 구사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들은 말에 대한 관심, 즉 주어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져야 한다. 자신이 구사하는 말 속에 말씀이 잘 담겨질 수 있도록 우리 말을 연구하며 이를 실천하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설교자가 단상에 오를 때는 몸과 마음, 자세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서는 안된다. 이들을 잘 다듬고 준비한 후 단상에 올라야 한다. 아울러 그는 말씀을 담는 말을 잘 준비하고 잘 다듬어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단상에 올라야 한다.  최상의 것으로 준비한 말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은 힘있게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태영 교수/ 숭실대 국문과

(월간 <교회와신앙> 199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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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구성과 요약

 시편의 구성

 

시편의 구성은 모세오경의 구성과 비슷한 유형을 갖추었습니다.

그 주제와 내용에 따라 총 다섯 권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각 책의 주제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제1권은 창세기에 대응하며, 주로 나타나는 내용은 인간에 대한 것.

제2권은 출애굽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

제3권은 레위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성전에 관한 것.

제4권은 민수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방황과 불안에 관한 것.

제5권은 신명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

  

구분

제1권

(1~41편)

제2권

(42~72편)

제3권

(73~89편)

제4권

(90~106편)

제5권

(107~150편)

저자

거의 다윗

다윗,고라

아삽,고라

미상

다윗

편집자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에스라

느헤미야

편집

시기

B.C.

1020~970

B.C.

970~610

B.C.

970~610

B.C.

430년까지

B.C.

430년까지

시 편 수

41편

31편

17편

17편

44편

내용요약

예배의 노래

국가적

중대사 찬양

국가적

중대사 찬양

찬양의 축가

찬양의 축가

오경

관련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관련

제목

인간과 창조

구속받음

예배와 성소

광야의 방랑

성경과 찬양

중심

사상

타락과 회복

구속

거룩(성소)

땅(방황)

하나님의

말씀


 

 

시편의 요약

 

시편의 배경

유다인들이 처음에 시편을 부른 이름은 ‘기도(트필롯)’였다. 그러다 후대에 가서는 ‘찬양(트힐림)’ 또는 ‘찬양의 책’이라 불렀다. 구약성서에서 찬양하라는 동사(hll)의 2/3 이상이 시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도와 찬양은 시편의 두 측면이다. 그리스어 성서는 시편이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그리스어 psallo)” 것이라 하여 ‘프살모이(psalmoi, 찬미가)’라 불렀다. 시편의 영어 이름(psalms)도 여기서 연유하였다. 우리 말 성서 이름 ‘시편’은 시모음집이라는 뜻의 중국어 성서 이름 ‘시편(詩篇)’을 딴 것이다.


저자

시편 이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노래는 적지 않아요. 이런 노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었기 때문에, 원작가를 밝히기가 쉽지 않아요. 시편에도 첫머리에 다윗, 아삽, 코라의 후손, 모세 등의 작품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들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시편은 사실상 하나님 백성 전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다윗은 음악을 즐기고 시와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자연스럽게 시편의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저작 시기

시편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었어요. 아마도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황금시기인 기원전 10세기와 가장 어려웠던 시대인 바빌론 포로기 전후에 생겨났을 거에요. 이런저런 시들이 한데 모아져 현재와 비슷한 꼴로 형성된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여겨져요. 그때 모세오경을 모방해서 시편을 다섯 권(시편 1-41; 42-72; 73-89; 90-106; 107-150)으로 나누었을 거에요.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가리켜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책과 시편들”(루가 24,44)이라 했어요. 즉 시편은 그 때까지도 완결되지 못한 성문서를 대표하는 성서로 꼽힌 것이지요.


저작 배경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고 어려운 처지에서는 구원을 탄원해 왔기 때문이죠. 비단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하나님 백성 전체가 드리는 전례에서도 시편은 중요한다. 시편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응답의 성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오경 전체가 하느님이 하신 큰일을 전하고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면, 시편은 하나님의 그 일과 말씀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응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하신 큰일들을 체험한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당신 백성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시편 19,14)라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시편을 읽는 방법

시편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 나아가 신약성서를 포괄하는 성서 전체의 맥락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시편 한 구절, 또는 한 편을 이해하려면 시편 전체의 흐름과 함께 성서가 대변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맥락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훼는 나의 목자”(시편 23,1)란 구절만 보더라도, ‘야훼’라는 하나님 이름이 성서에서 드러내는 깊은 뜻과 그에 대한 다양한 신앙고백이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또 ‘목자’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양이라는 고백과 함께, 목축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생활양식은 물론 거기서 비롯된 목자와 양의 실질적 관계, 이 관계를 유비시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관계를 가리켰던 다른 성서 표현 등이 다 담겨 있지요.


시편의 분류와 감상

시편은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크게 찬양시, 탄원시, 감사시, 그밖의 시로 나뉩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몇 가지로 나눠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1. 찬양시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기리고 찬양하는 시편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유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나열한 다음,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짧은 축복문 및 기도문으로 마무리하는 꼴로 짜여 있습니다. 대개 시편 8; 19; 29; 33; 67; 95-100; 103-106; 111; 113-114; 134; 136; 145-150편 등을 찬양시로 봅니다. 일례로 시편 8편을 감상하겠습니다.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시편 저자는 왜 하나님을 찬양합니까?(8,3-6) 시의 첫머리와 끝머리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기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너무나 크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업적은 창조사업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창조 업적이 시인의 입을 빌어 다시금 묘사됩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 창조의 중심에 놓으시고 뭇 만물을 돌보게 하셨는지, 시인은 다만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래부터 그럴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빌어 예수님을 노래합니다(히브 2,6-9). 이 시편에 나오는 인간상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던 것이죠. 여하튼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새삼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가득이나 생태계의 위기를 느끼는 이 시대에, 이 짧은 시편의 울림은 크게 번져 갑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노래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2편)


2. 탄원시

박해를 받거나 죽음이나 질병 같은 심각한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하는 내용이지요. 시인은 먼저 자신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뒤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합니다. 이어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러한 탄원은 한 개인이 드리기도 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와 예루살렘의 파괴 같은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유형이 시편에서 가장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탄원시는 시편 3; 5; 22; 25; 28; 44; 60; 74; 78-80; 83; 85; 90; 94; 102; 123; 137편 등입니다. 한 예로 시편 22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릅니까?(22,19)  이 시편은 울부짖음으로 시작합니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중반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구원자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마감됩니다. 지금 “뼈 마디마디 드러나 셀 수 있는” 처지에 빠진 이 시인이 겪고 있는 곤경과 어려움은 몹시 심각합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시인은 끝끝내 하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구원을 맡겨 드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감사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행위의 위대함을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입니다. 시작은 찬양시와 비슷한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나열하면서 하느님께 영원히 찬미를 드리겠다는 약속과 지속적인 신뢰심을 표현한 다음,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공동체에 권유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끝맺고 있어요. 감사시에도 부분적으로는 탄원과 찬양의 내용이 들어 있어요.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어울려 다니거든요. 대표적인 감사시인 시편 18; 30; 32; 34; 40; 66; 92; 116; 118; 124; 129; 138편 등에서 18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 18편)

*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른 열한 가지 표현을 찾아보십시오(18,1-2. 28).

시인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이 베푸신 구원행위를 나열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원수의 손에서”(3,17절), “거센 물 속에서 건져 주시고”(16절), “어깨를 펴게 해 주시고”(19절), “상을 내리시고”(20절), “붙들어 주시고”(26절), “적대자들 위에 높여 주셨습니다”(48절). 그렇기에 시인은 “그 고마움을 어찌 만민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으리이까?”(49절)하며 토로합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하늘을 밀어 제치시는”(9절) 자연의 주재자이시고, “옳게 살았다고 상을 내리시는”(20절)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시인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인간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뿐이시며(31절), “한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마음으로 위해 주신다”(25절)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사무엘 하권 22장에서 다윗의 노래로 나올 만큼 오래 된 노래입니다.

복되어라,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편)


4. 그 밖의 시편들

 

(1) 지혜시·교훈시

시의 주요 내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사는 길을 일러주는 시편들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 곧 토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면 주님의 굄을 받지만, 그 말씀을 어기고 듣지 않으면 멸망에 이른다는 교훈을 심어 주지요. 대표적인 시편은 1; 9-10; 14; 19; 37; 73; 112; 119; 127-128; 133편 등이지요.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시편 1편)

* 시인은 의인을 무엇에 비유합니까?(1,3)

1편은 지혜시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시편 전체의 서시(序詩)이기도 해요.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이 시는 행복으로 가는 길과 멸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온갖 애를 다 쓰지만, 누구나 행복하진 않죠. 또 참된 행복이 무언지도 아리송하구요.

1편이 보여주는 행복한 사람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2절)입니다. 여기서 법은 토라(율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 곧 성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지요. 되새기는 일 역시 머리 속으로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고백하는 일이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에 젖어 사는 이들은 날마다 도처에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게 되죠. 그런 사람은 늘 싱싱하게 살며 제 철 따라 열매를 맺게 되어요. 반면에 아무리 부와 명예를 누려도 악인의 길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이”(1,4) 아무 소득 없는 멸망의 길이라고 일러 주어요. 마치 이 시편은 격렬한 일생을 마치고 인생의 황혼에서 던져주는 한 선배 그리스도인의 충고이자 유언 같지 않으셔요?


(2) 왕도시(王道詩)

이스라엘의 왕이 지녀야 할 덕과 해야 할 바를 알려 주며, 아울러 당신이 세우신 그 왕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았지요.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부은 자’였는데, 포로기 이후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다시 올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야로 이해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들은 메시야 시편이라고도 불려요. 주요 시편은 2; 20-21; 45; 72; 89; 101; 110; 132; 144, 1-11 편 등이지요. 너는 내 아들(시편 2편)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는 절대주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버리려는 헛일을 꾸미는가 묻습니다(1절).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좇을 때만이 통치자의 권한은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가소로움과 분노를 다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시편은 사도행전 4,25-26과 13,33에 인용되었죠.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외에도 시편은 하나님의 현존장소인 예루살렘을 기리는 시온시(46; 48; 76; 84; 87; 122편),순례시(121편), 전례시 등으로 나뉘어 진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최근에 내공이 제법 높은 무당과 댓글로 의견을 나눈적이 있었다

무녀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높은 신기를 자랑하였다

- 성당에서 찬송가 부르다가 강한 신기가 내려 왼쪽으로 세번 돌면서 /몸으로 신령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무당이 되었다

- 산에서 밤 11시 30분부터 새벽 3시까지 천신기도를 하는데 신령이 잠을 거의 안재운다

- 신령이 금식기도 시키고 수행을 시키는데 나는 죽은 사람과 통신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수행을 많이 해서 영이 맑아져야 신기가 강해진다

<신령 : 한국 민속신앙에서 섬기는 미신의 대상으로 천지신령 또는 천지신명이라고 한다>

- 나는 천지신명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하늘님)께서 도와주신다

- 목사도 스님도 매매나 이사할 때 점사(무당이 점을 치는 행위)보러 온다

- 천지신명이 돈을 벌게 해 주신다

- 조상귀신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무당과 주로 토론한 내용은

① 무당이 섬기는 신령의 정체가 무엇이냐?

돌아다니는 조상귀신은 없으며 신령은 귀신의 영이다

귀신을 섬기면 그 영혼이 죽어서 어디로 가겠느냐? 질문했고

​→ 무당은 말하기를 "지옥은 인간 마음이나 생각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도 그래서 자아를 깨우치고 스스로 번뇌에서 벗어나라! 한거다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하시니 함부로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② 무당님의 그 열심만은 인정해 주고 싶다

그런데 귀신을 달래고 기도해서 영력을 얻으시는데 그 영이 어둠의 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는가?
당장의 유익이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

우리는 더러운 귀신의 영이 아니라 거룩한 성령을 섬긴다

​→ ​나는 귀신도 보이고 죽은 영혼과 소통도 한다

목사,신부,스님들은 그렇게 못한다, 그들은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영이 맑고 영력이 높은 무당은 신령이 잠도 못자게 하고 기도를 많이 시킨다 

 

③ 아무 영이나 믿으면 안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주를 떠다니다가 환생한다고 하는데 그럼 우주가 생기기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조상귀신과 접신하는 것은 다 귀신들이 속이는 것이다
무당님은 살아생전에 돈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표인듯 한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죽은 이후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돈 좀 벌고 지옥에 들어가면 무슨 유익이냐?

회개하고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영발을 자랑하는 무당과의 대화를 통해 무당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무당도 신기를 높이기 위해 저렇기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맑은 영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구나

소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당이나 스님들의 참선, 수도사를 떠오르게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수행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득도하고 공력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제안하였다

무당도 하루에 3~4시간을 기도하는데 목사님들은?

진짜 무당과 목사님이 대결하면 영적싸움에서 지는 것은 아닐지...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원인을 묻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다

무당의 하는 일 중에 천국이나 극락을 안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현생에서 복 받는 것이며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짜증을 낸다

만약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곳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는 조상신을 잘 섬기는 것이다

다분히 불교적인 속성과 잘 어울리며 불상을 차려 놓기도 하지만 기독교적 요소는 배제된다


그리고 무당들이 기도에 정진하는 이유는 접신이 잘되어 점사가 영험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무당은 하루에 12시간씩 기도하기도 하는데 선호하는 기도장소는 유명한 산들이다

결론적으로 무당은 신령(더러운 귀신,사탄)에게 기도하는 것이고 기독교인은 성령(거룩한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다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과 무당의 차이는 무엇일까?

귀신들린 사람이 더러운 귀신의 피해자라면 무당은 귀신의 조력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신의 영을 받은 무당도 저렇게 자랑하는데 우리는 성령을 조롱하는 자들도 있다

신접한 사울의 사례

 성경에도 무당(엔돌의 신접한 여인, 영매자)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라오게 한 적이 있었다(삼상 28장)

무당이 불러 올린 영이 실제 사무엘의 영인지, 강신술에 의한 사탄의 영인지는 불확실하다(그의 영이 땅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은 이전에 율법을 주시면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고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9:31)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본문은 이해하기 힘든 난제에 속한다

현대의 신자들 중에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만약 무당을 찾아간다면 자신을 더럽히는 가증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엔돌의 접신 사례처럼 접신한 영의 말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하더라도 더러운 영과 교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를 들어 조상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다 저주를 받거나 재앙이 임하면 누가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지만 현생에서는 그들도 복을 받으며 형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 결과가 갈라지는 것은 사후에 심판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사울처럼 하나님께서 금지시킨 방식을 찾아가는 행위는 결국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게 만든다

기독교인이 점을 보는 행위는 제사와 마찬가지로 귀신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acoloje/221450230761



제법 규모가 있는 예배음악사역팀의 경우에는 찬양인도자와 뮤직 디렉터가 따로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 소 교회의 경우 찬양인도가 뮤직 디렉터의 역할을 함께 감당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취지에 따라 이번 글은 예배음악사역팀의 연습에서 실전까지의 과정을 순서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였습니다.

1. 찬양인도자의 역할

우선 찬양인도자의 역할은 교회가 지향하는 예배음악사역의 역할과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아트 오브 워십에서 그레그 시어는 예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요. 말씀과 성찬을 중심으로 하는 의식적 예배, 주로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주제 중심적 예배, 찬양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경험적 예배로 구분합니다. 여러분의 보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예배의 유형에 따른 찬양인도자의 기능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여러 예배의 요소가 이미 혼합(Blend)되어 다양한 형태의 예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찬양인도자와 각각의 교회의 특성과 필요에 맞는 방식으로 찬양인도의 방식을 선택하면 됩니다. 위의 표를 보면서 나만의 스타일과 교회에 맞는 가장 적절한 찬양 인도법을 한 번 떠올려보시면 어떨까요? 

다음으로는 연습에서 리허설까지 찬양인도자가 준비해야 할 몇 가지 주요한 사항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준비

1) 보컬

찬양인도자에게 보컬로서의 역량은 필수입니다. 다만 굳이 가수처럼 노래를 아주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안정감은 최소한 필요합니다. 찬양인도자가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아도취에만 빠져 노래하고 있다면 예배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직히 단 몇 페이지의 글로 노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는 우선 노래를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핵심 요소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다뤄보기로 하겠습니다. 

① 말하듯이 노래하기

노래를 가르칠 때 말할 때의 소리와 노래할 때의 소리가 너무 다른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보통 처음 노래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평소 말할 때와는 다르게 좀 더 멋지게 꾸며 노래하는 것이 더 잘하게 들릴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은 거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과 어깨뿐만 아니라 배에도 과도한 힘을 주게 되죠. 
노래를 잘 하고 싶은 지나친 욕심은 자칫 노래를 망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사는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 가장 멋진 노래인 것처럼,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이 노래를 가장 잘 들리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세요.

② 호흡 훈련

노래를 부를 때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훈련은 호흡입니다. 호흡을 고르고 길게 들이쉬고 내쉬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 목소리가 떨리거나 혹은 음이 불안하거나 끝마무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선 다음의 그림을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호흡을 먼저 코로 깊이 들이쉴 때 어깨와 가슴이 들리지 않고 코에서부터 광대뼈 살짝 위쪽으로 숨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입과 코 안, 광대뼈, 미간 사이와 관자놀이 부분처럼 머릿속에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곳은 발성에서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그곳을 지나가는 느낌으로 머리를 뒤쪽으로 살짝 돌아내려와 성대(후두)와 척추를 타고 꼬리뼈까지 숨이 깊이 내려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위의 그림처럼 몸을 옆에서 보게 되면 커다란 물음표 모양의 곡선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이 곡선은 발성을 할 때도 굉장히 중요한 길입니다. 

그렇게 할 때 특히 옆구리 뒤쪽과 배꼽 아래 단전을 살짝 내밀어서 도너츠 모양을 만들어보세요. 숨을 들이쉴 때 배를 자연스럽게 내밀고, 숨을 내뱉을 때 내밀었던 배를 살짝 버티면서 풍선처럼 바람을 간직하다가 조금씩 내보낸다는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숨을 고르고 길게 내거나, 짧게 스타카토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는 연습은 소리를 고르게 힘있게 만들어 노래가 안정적으로 들리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③ 힘 빼기

노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선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특히 몸통의 상체부분인 명치 위에서부터 아래턱까지의 부분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게 되면 고음이 잘 안 올라가거나 목에 힘을 많이 주게 되어 쉽게 목이 쉬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특히 아래턱과 목, 혀 부분이 경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명치나 가슴 쪽에 통증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곳에 힘을 빼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첫 번째로 실이 머리의 정수리 부분에서부터 천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실에 내 몸이 지탱하고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렇게 힘을 최대한 뺀 채로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어봅니다. 그러면서 입을 열어 ‘아’하고 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편안하게 소리를 계속 내봅니다.   

두 번째로 입술떨기인데요. 입술을 가볍게 다문 채로 살짝 입 속에 바람을 불어 떱니다. 그렇게 저음에서부터 고음까지 ‘부르르’하고 오토바이 소리를 내면서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흉내내봅니다. 그렇게 하면 특히 턱과 입술 쪽에 들어가 있는 불필요한 힘이 많이 빠집니다. 

세 번째로 나무젓가락 두 개를 준비합니다. 쪼개지 않은 채로 각각의 나무젓가락 손잡이 부분을 양쪽 어금니 안에 넣어 세운 채로 물어봅니다. 그렇게 턱을 고정한 채로 글을 또박또박 읽는 연습을 해보세요. 턱에 들어가 있는 불필요한 힘을 뺄 수 있습니다. 

④ 발성

발성은 노래 연습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요.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몸의 울리는 부분이 다릅니다. 저음일 때엔 가슴이 울리고, 음이 올라갈수록 위쪽으로 울림이 올라가서 고음일 때는 머리 위쪽이 울려야 합니다.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흉성, 입과 코 중간 정도를 울리는 소리를 중성, 머리를 울리는 소리를 두성이라고 합니다. 한 곡의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이 세 가지의 소리를 음의 높낮이에 따라 모두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리를 앞으로 크게 뽑아내려고 하다보면 저음일 때 소리를 지나치게 누르거나 고음일 때 지나치게 소리를 힘을 주면서 쥐어짜게 됩니다. 아까 설명 드렸던 것처럼 몸  옆으로 그려지는 커다란 물음표 모양의 호흡의 길을 상상해볼까요? 그 길을 따라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 발성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⑤ 워밍업

찬양인도를 하다보면 처음엔 목이 잘 풀리지 않았다가 중간 정도 지나서야 노래가 오히려 더 나오고 목이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찬양인도 전에 제대로 워밍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래하기 전에는 반드시 30분 정도 워밍업을 해줘야 합니다. 그것은 목을 잘 관리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방법은 아까 설명을 드린 호흡과 힘 빼기, 발성 훈련 등을 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찬양을 많이 부르는 것은 단순히 기능으로서의 준비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최고의 준비입니다. 반복적으로 찬양을 부르면서 메시지를 묵상하게 될 때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2) 멘트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실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갑자기 특별순서를 맡아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리나케 노래를 한 곡 골랐는데 문제는 멘트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멘트를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인사말만 대충 하자 싶어 준비되지 않은 채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래의 간주가 생각보다 꽤 길었던 거였습니다. 간주가 나오는 동안 가만히 서 있기 민망한지라 예상에 없던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꺼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간주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데도 멘트가 마무리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이 급해지니 저 자신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 꼬여버렸습니다. 결국 노래가 다시 시작되기 직전에 저는 이렇게 멘트를 급히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부분은 여러분이 알아서 생각하시고~ 오~(노래 가사)”

저는 그 이후로 단 한 두 문장을 멘트 해야 할 때도 항상 메모해서 외운 뒤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한 동안 그 사건은 저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멘트를 열심히 준비하게 되었고, 그런 습관은 저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멘트를 철저히 준비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긴급 상황이 생겨도 그에 대한 적절한 메시지를 마음속으로 빠르게 정리하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됩니다. 

멘트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도입부에서는 원래 준비한 메시지와 현장의 분위기를 함께 연결해서 30초 이내로 하나의 스토리를 빠르고 짧게 만들어 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멘트는 곡과 관련된 간결한 내용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가사를 많이 불러주는 식의 멘트는 회중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니 곡의 순서나 분위기 전환을 위한 정도의 역할로 절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멘트는 설교가 아니라 찬양으로 들어가거나 나가게 하고 다시 기도로 들어가게 하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구체적인 음악 연습은 앞부분에서 이미 다룬 앙상블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3. 리허설 

1) 반드시 모니터를 준비하세요.

연습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 리허설을 잘 이끄는 것도 찬양인도자에게는 중요한 임무입니다. 가장 먼저 모니터 스피커와 영상을 체크해야 합니다. 잘 듣고 잘 보는 것이 좋은 인도와 연주를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특히 모니터스피커는 반드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니터스피커 없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거울 없이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팀과 회중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장비는 바로 모니터스피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리더의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세요.

무대에서 이끌어가는 책임자가 없다면 그곳은 신호등이 없는 도로와도 같습니다. 혹시 따로 무대감독이나 연출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찬양인도자가 그 역할을 맡아 전체적인 진행을 해야 합니다. 찬양인도자의 진행에 따라 엔지니어가 음향을 체크하고, 밴드 리허설이 전체적으로 조절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인도자는 리허설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전체 순서가 어떻게 진행될 지를 미리 계산해야 합니다. 
자칫 한 파트에서만 시간이 많이 허비되어 결국 전체적인 체크가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배가 시작되지 않도록 우선순위를 잘 세워 리허설을 이끌어야 합니다. 

특별히 싱어들은 항상 자신이 예배 시에 가장 잘 눈에 띄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리더가 멘트를 할 때는 리더를 향해 시선과 마음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리더가 회중을 향해 선포하거나 반응을 요구할 때 싱어들은 리더의 말에 능동적으로 집중하고 반응하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또 기도와 찬양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질 때에는  너무 획일적인 모습보다는 각자가 마치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예배해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싱어나 연주자들은 우리의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또 하나의 예배임을 기억하고 섬김에 임해야 합니다.  

3) 음정은 건반소리에, 리듬은 드럼소리에 맞추세요.

악기 연주자 중에서는 찬양인도자 외에 음악 전체를 이끄는 밴드 마스터가 필요합니다. 어떤 악기가 꼭 밴드 마스터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다만 음정에 관한 부분은 건반이 주로 맡고, 리듬은 드럼이 주로 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중간에 음정을 튜닝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 기타나 다른 멜로디 악기의 음정은 건반에 맞추고, 리듬은 드럼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악기팀은 특히 연주할 때 서로 혼란이 왔을 때 이런 기준에 맞춰 빨리 제자리를 찾아 연주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악기 연주자들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가능하면 입으로 함께 찬양을 부르며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적인 기술에만 함몰되지 않고 메시지를 묵상하면서 예배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4) 한 번의 녹음은 열 번의 연습과도 같습니다.

요즘엔 굳이 좋은 음향기기를 따로 구입하지 않더라도 노트북이나 핸드폰 등으로도 간단히 녹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녹음은 특별히 리허설과 예배실황 이렇게 두 번 정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녹음을 통해 연주나 사운드 상태를 더 정확히 체크하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녹음은 팀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5) 마이크 사용은 어떻게 할까요?

 마이크를 손에 쥘 때는 항상 위쪽에 동그란 헤드를 쥐지 않고 가운데 부분을 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마이크와 입과의 거리가 중요합니다. 마이크를 입에서 너무 멀리 떨어뜨리면 고음 부분만 얇고 소리는 작게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 대면 저음만 크게 들리고 소리는 둔탁하고 크게 들리게 됩니다. 마이크를 입에서 살짝만 떨어뜨려 4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모두가 같이 마이크를 공용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마이크에 구취가 심하게 베여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각자의 마이크를 정하거나 살균이나 탈취제 등을 사용하는 센스가 필요하겠죠? 
그리고 마이크 케이블은 아무렇게나 감아놓으면 거기서 문제가 생겨 사운드에 잡음이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항상 깔끔하게 케이블을 감아서 관리하는 것이 잡음이 없는 사운드를 유지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4. 최종 리허설 진행 순서

1) 무대 동선과 자리, 마이크 번호와 자리 점검

예배음악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하는 곳은 단지 교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이기도 하며, 또한 예배음악사역 팀에게 있어 예배는 잘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을 위한 공연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격적인 음향 체크가 들어가기 전에 무대로의 출입을 위한 동선을 체크해서 등장과 퇴장 시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섬김이들의 명단이 나오면 각자의 자리를 미리 체크해서 차질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고 마이크 번호는 꼭 마킹을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리허설이 끝난 후에 싱어들이 자신의 마이크를 서로 헛갈리게 두고 퇴장하게 되면, 나중에 케이블이 뒤엉키거나 다른 마이크를 들고 노래해서 힘들게 한 리허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무대 세팅을 미리 그려놓고 리허설을 진행합니다. 

2) 리더 마이크 점검

사운드 테스트가 시작되면 엔지니어는 가장 먼저 전체 스피커를 체크하기 위해 좋은 음질의 음악을 틀어서 최선의 사운드 EQ를 조절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리더 마이크를 먼저 테스트해서 찬양인도자가 전체적으로 리허설 진행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합니다.   

3) 악기 점검

악기를 테스트할 때는 보통 “드럼(킥→스네어→하이햇→전체리듬) → 베이스 → 건반 → 기타 → 나머지 악기”의 순으로 하게 됩니다. 
만일 음향 어시스턴트가 있다면 무대에서 함께 체크하면서 음향 엔지니어와 무대 위의 맴버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중간 역할을 해줍니다. 하지만 메인 엔지니어만 있는 경우엔 각자 자신의 악기에 대한 피드백을 할 때엔 최대한 엔지니어에게 정중히 표현하거나, 찬양인도자와 보컬 디렉터와 악기 디렉터가 의견을 취합해서 소통의 혼선이 없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인 사운드에 대해서 피드백을 하고 싶을 때엔 사전에 미리 엔지니어에게 정중히 동의를 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중으로 나가는 스피커 사운드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엔지니어에게 있기 때문에, 엔지니어와 사전 동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드백을 할 경우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에서의 모니터링은 전적으로 음악팀에게 결정 권한이 있기 때문에 엔지니어는 음악팀의 모니터 피드백과 요청에 최대한 수용하고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껄끄러운 관계 중에 하나가 바로 엔지니어와 예배음악사역 팀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이해를 전제로 사전에 소통의 질서를 지혜롭게 세우는 것이 엔지니어와 음악팀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4) 싱어 점검 

악기가 끝나면 싱어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리허설이 진행될 때 싱어는 반드시 실제 예배 때에 부르는 목소리의 크기로 노래를 부르면서 음향을 체크해야 합니다. 부끄러워서 목소리를 작은 소리로 내면서 음향체크를 했다가 실제 예배 중간에 갑자기 고조되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게 될 때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다른 파트의 멤버들도 당황하게 됩니다. 
제대로 소리를 내어야 개인의 목소리가 저음이 많은 편이지, 날카로운 편인지 등의 성향이 미리 파악되서 엔지니어가 여러 상황에 즉각 대처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체 파트의 소리를 각자 맞춘 후에는 악기와 싱어의 전체 소리의 균형을 잡고, 혹시나 잡음이 생기는 곳이 없는지를 세세하게 체크합니다. 

5) 연습

가끔씩 어떤 팀은 무대 리허설 때에 전체 곡을 다 연습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전에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음악 연습은 반드시 음향 리허설 전에 어느 정도 다 마무리가 된 상태로 무대에 올라와야 합니다. 음향 리허설은 말 그대로 전체 음향을 체크하고 나서 전체 콘티의 주요 부분들만 따로 선별해서 간단히 연습하며 최종적인 소리를 다듬는 작업입니다.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서로 가진 악보가 혹시나 틀린 부분은 없이 다 준비되었는지 가사, 코드, 리듬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곡이 시작되는 Intro(전주)에서 Verse로, 그리고 Verse에서 Chorus로 넘어가는 연결 부분의 코드 진행이나 Fill in(드럼이나 다른 악기들이 특별히 꾸며 넣어 연주하는 부분)을 체크합니다. 또한 곡 안에서 Key Up(한 키를 올려 부르는 것)과 같이 변화되는 부분을 맞추어 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정확히 코드와 리듬을 연주해야 할 섹션 부분도 마지막으로 맞추면서 다음 곡으로 연결될 때 미리 편곡된 코드나 리듬을 점검합니다.  

실제 예배를 진행하는 도중에 팀원들과 소통할 때 사용하는 수신호나 사인에 대해 숙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Verse는 손가락 하나로, Chorus는 손가락 두 개, 브릿지는 손가락 네 개, 마무리는 주먹을 쥐고, 곡이 넘어갈 땐 손바닥을 가볍게 뒤집는 식으로 수신호를 주고받아도 좋습니다. 물론 적절한 멘트로 곡의 순서를 팀원들에게 알려도 됩니다. 
그렇게 연습이 마무리되면 리더는 연습을 마무리하는 전 후로 전체 곡의 순서나 느낌을 다시 한 번 팀원들에게 설명해주고,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한 후에 사역을 위한 기도로 리허설을 마무리합니다. 
리허설은 예배 시작 전에 너무 급하게 마치지 않도록 시작 시간 전에 여유를 두고 마무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

리허설을 아무리 잘 준비해도 예배 중에는 한두 가지 이상 크고 작은 실수가 항상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대다수의 팀원들은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틀리지 않기 위해 많은 긴장을 하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찬양인도자는 그런 팀원들의 마음을 미리 이해하고 전체 팀원이 너무 경직되지 않도록 적절한 편안함을 가질 수 있게 배려해야 합니다. 기술적인 이야기보다는 예배의 마인드와 격려와 응원의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로서 팀원들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음악은 생각하는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익혀진 대로 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충분히 연습한 이후라면 염려보다는 몸의 기억에 맡긴다는 열린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단언컨대 연습한 것 이상으로 음악을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음악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보면 오히려 음악을 하는 데 방해요소가 되어서 음악에 지나치게 힘을 주게 되거나 몸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경직되게 만듭니다. 
연습한 만큼 음악이 나오면 감사한 것입니다. 혹시 연습한 만큼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보완할 부분이 있으니 그저 그 숙제를 다음에 잘 풀면 됩니다. 
음악은 대결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조금 더 나은 오늘의 음악을 잘 연주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음악을 더 건강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출처: http://www.mytwel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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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이렇게 simple하고 쉼게 설명하는 강의는 처음입니다.
우선 재미있기에 소개합니다.. 이해가 안 가면 갈 때까지 다시 보며 생각하라고 강사가 조언해 주는군요. 드디어 이해가 가면 치매 발병시기 10년 연장 효과 !!

2/2



전도서 성경퀴즈

번호

문 제

정 답

1

1

전도서의 지은이는 누구인가?

솔로몬

2

전도자는 해 아래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가?

새로운 것

3

전도자는 지혜가 많으면 ( )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 )을 더하느니라 고 말했다

번뇌, 근심

4

전도자가 깨들은 것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

2

5

전도자는 웃음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미친짓이다.

6

전도자는 지혜가 무엇보다 뛰어나나고 하였는가?

우매(우둔함)

7

전도자는 자신이 사는 것을 왜 미워 한다고 하였는가?

하는 일들이 괴롭고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8

전도자는 사람이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의 결과를 무엇이라고 했는가?

슬픔

9

이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

3

10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의 만사에는 다 무엇이 있다고 했는가?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아름답게 하시고 사람에게는 무엇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는가?

영원

12

전도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선을 행하는 것

13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에 더하거나 덜할 수 없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14

전도자는 재판하는 곳이나 정의를 행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다고 하였는가?

15

전도자는 사람의 혼과 짐승의 혼이 각각 어디로 간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람-, 짐승-

16

전도자는 사람이 이것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기일에 즐거워하는 것

4

17

사람이 갖는 모든 수고와 재주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받게 되는가?

시기

18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수고해서 더 큰 상을 얻기 때문에

5

19

우매한 사람이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

가까이 말씀을 듣는 것

20

하나님께 서원하였을 때에는 갚기를 어찌해야 하는가?

더디게 하면 안된다.

5

21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은?

서원하지 않는 것

22

꿈이 많거나 말이 많아지면 어떤 일이 많아지는가?

헛된 일

23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을 만족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어떤 것을 만족 못하는가?

소득

24

노동자들은 항상 잠을 달게 자는데 비해서 부자는 무엇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가?

부요함

6

25

백 명의 자녀가 있고 장수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얻지 못하면 낙태된 자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영혼이 행복하지 못하면

26

사람이 천년을 산다하더라도 무엇을 갖지 못하면 낙태된 자와 같게 되는가?

행복을 맛보지 못하면

27

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보다 나은가?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

7

28

전도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어느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가?

잔칫집

29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우매자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혼인집

30

우매한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지혜자의 무엇을 듣는게 낫다고 말하고 있는가?

책망

31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뇌물

32


출처: http://www.holynet.or.kr/bbs/board.php?bo_table=file_1&wr_id=2485&&#c_2488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아시아 지역에 국한되었다

다소를 중심으로 인근의 밤빌리아,길리기아 지역이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서구지역(그리스,메카도니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마케도니아, 고린도, 데살로니가, 겐그레아, 아가야, 빌립보교회, 로마교회가 세워졌다

이방인 사도답게 바울은 아시아와 서방교회의 개척자가 되었다




<서구 초대교회들>


1. 로마 교회

 

로마서를 기록하기 30년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는 읽을거리가 많았지만 무명의 저자가 쓴 로마서를 주목하는 대중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로마서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자리잡아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만으로도 바울의 상급과 비중은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중심교리인 구원, 칭의, 성화 문제를 심도있게 저술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거룩한 삶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했다


특히 로마서에 소개되는 하나님의 의(義)는 농축된 의미를 가진 신학개념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교리에 권위를 부여했다

의(義)는 영어의 의미로 <Righteousness, Justice) 개인의 도덕적 올바름, 개인적 윤리와 관련된 개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언약관계를 성실하게 행할때 죄로 억눌린 자들을 옹호하여 의롭다 평가하는 구원의 폭넓은 의미를 담고있다

따라서 칭의는 율법의 행위(율법조항과 할례)와 무관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다


세상법에서도 범죄하면 법정에서 사형,징역,벌금형 같은 선고를 받아 속죄를 한다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개념은 어디에나 있다

하나님의 옛언약에 따르면 범죄한 사람은 지옥에서 형을 치루어야 한다

그런데 새언약(복음)은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해서 속죄를 대신 치루게 했다

단지 죄를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속죄되는 복음은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 칭한 것이다


2. 마케도니아 교회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기록은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온다

마케도냐 교회와 아가야 교회가 특별히 거액의 연보를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15:26)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8:20)

이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특별히 마케도냐 교회는 부자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환련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 처한 상태였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8:1~2)

그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아마도 이런 서구의 초대교회 전통이 훗날 미국교회에서도 가난한 국가에게 후원을 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도 전쟁 직후 미국교회로부터  재정적, 물자 후원, 병원이나 학교설립 등의 지원을 받았다


3. 고린도 교회


분쟁이 많았던 고린도교회 때문에 바울은 심오한 교리들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마케도니아 교회보다 먼저 연보를 시작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고후9:2)

고린도교회가 연보를 시작하였다는 소식은 다른 교회들에게 분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바울은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마무리 지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노니" (고후9:4~5)


4. 빌립보 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기쁘게 만든 교회였다

바울이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선교를 떠날때 두 번이나 선교비를 후원하였다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때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후원금을 전달하였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후원금에 대한 감사편지였다

교회의 재정은 이렇게 선교비로 흘러나가야 한다



5.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미래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서신에 특별히 휴거와 휴거의 시기, 부활의 순서에 대한 기록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편지를 쓰자 이번에는 강림이 가깝다고 오해하여 두번째 편지를 쓰면서 강림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을 언급하였다

일하지 않고 게으른 자들과 빈둥거리는 신자들을 위해 주님과 동행하는 성결의 삶을 요청하였다



6. 겐그레아 교회


겐그리아 교회는 가이오가 자신의 집을 교회당으로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시작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롬16:23)

겐그레아 교회에는 바울의 보호자였던 뵈뵈도(롬16:1) 교회의 일원이었고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서원의 표시로 머리를 깍았다(행18:18)



7. 아가야 교회


아가야교회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마게도냐 교회가 연보를 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롬15:26)

아가야에서 처음 믿은 사람은 스데바나의 집으로 그도 바울의 후원자였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고전16:15)




<아시아 교회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외에도 아시아(터키, 수리아 지역)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1.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회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바울의 교리와 권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옛방식(율법조항, 할례)을 다시 소개하며 신자들을 미혹했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직과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른교훈(옛방식)에 미혹된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자신을 변증하기 위해 베드로의 외식을 언급한 것은 옥의 티에 속한다



2. 골로새 교회


당시 로마에 있었던 바울에게 에바브라가 찾아와 골로새 교회의 사정을 알림으로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마호메트,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같은 역사의 중요한 성인들과 동급 취급한다

그러나 예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성령으로 잉태하지도 않았고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고 부활하지도 않았다

골로새 교인들 중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 예수를 많은 영적존재들과 같은 위치에 두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천사를 숭배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그들 삶의 중심으로 돌려 놓으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가장 먼저 존재한 만물의 으뜸이요, 창조에 참여했으며 죄의 권세를 멸하고 영광의 소망이 되신 유일성에서 차별화되었음을 강조하였다



3. 디모데전후서(에베소 교회)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이자 복음의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 거주하며 바울의 로마 1차 투옥시 함께 투옥되었고 석방후에는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 시무했다

바울은 감독, 집사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지 편지로 지도하였다

지도자는 말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으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신중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가정을 천국으로 만든 신자이어야 한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13번째 마지막 서신으로 67년에 기록하였고 68년에 베드로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지막에 소개한 인물 중 리노는 바울이 순교한 후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12년간 봉직하였다



<​교회의  사명>

계시록의 일곱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바울 서신의 수신자 교회들도 다양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도자의 문제, 트러블메이커들, 쉽게 미혹에 빠지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믿음에 여정에서 파선한 두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딤전1:18)가 있으며 세상으로 돌아가 배교한 데마도 있다(딤후4:10)

최고의 상급에 이른 신자들도 있다

지금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돈을 좋아하며 성공한 목회자는 제왕처럼 행동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다

교회의 재정은 선교와 구제,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데 흘러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보고 어떻게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것인지 교훈을 받아야 한다

바울과 베드로는 항상 우리의 본향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으로 보고 살았다

땅에서의 삶은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하늘의 본향이 영원하고 실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림자와 실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신자들을 얻어 도와주고 격려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출처: acoloje

서설입니다만,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인간 저자가 말하고자 한 의미, 나아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에 충실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기록된 원문을 능숙하게 읽고 독해한다고 해서 원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알았다고 단정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겸손히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지만 인간의 해석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원어성경을 모국어성경 읽듯이 읽을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학자들이라고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일반 독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원문에 가까운 번역본 성경을 구해서 읽고자 하는 것이지요.

필자는 원문 읽기에 있어서는 어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본문과 씨름하며 바른 의미를 알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왕상 13장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어보면, KJV는 지나친 문자적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RSV는 좀 덜합니다. NASB는 덜 문자적이면서 현대인이 읽기에 좋게 번역을 한 성경입니다. NIV는 역동적인 대응번역을 해서 그런지, 의미는 통할지 몰라도 원문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13장 1절에서 "보라!"라는 감탄사가 NIV에만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구성상 반드시 나타내야 할 13:25에서도 "보라"를 빼먹고 있습니다.(원문에서는 두 곳 다 '보라'로 문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했다고 의미를 바르게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설픈 사역(私譯)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구하고자 할 때 오류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좋은 번역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우리 한글 개역이나 개정판에서는 25절에 나오는 "보라"가 빠져 있습니다. 바른 의미를 도출하는데 있어서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 됩니다. 이상(以上)은 참고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에게 속임을 당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늙은 선자자가 참 선지자인가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게 됩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흐름과 왕국들에 대해 기술한 사무엘서에서부터 차근히 읽어내려오다보면 이 늙은 선지자가 선지자이긴 한데 본분을 잃은 선지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20-23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가 선지자 직임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늙은 선지자는 삯꾼과도 같은 선지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한 자란 말이지요.

한 때는 선지자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아래서는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왕국이 분열되고 악한 여로보암이 등장하자 선지자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일반 백성 중 하나처럼 되어버리고말았음을 본문은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여로보암의 악행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집'이라고 일찌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하나님의 집에 우상을 세우다니요!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자신의 등 뒤로 버린 악한 자가 였습니다(14:9). 이 악한 왕 여로보암 앞에서 그 늙은 선지자는 오직 목숨을 보존하기에 급급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로서는 방관도 무서운 직무유기인데 동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금송아지 우상 제단에 분향하는 여로보암에게로 보냅니다. 왕의 위세에 눌려서 자기는 늙었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안 했을지라도 자기 아들들은 보냈습니다. 묵인 동조의 작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참 선지자는 언제나 율법으로(당시 여로암시대에는 율법이 유일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일깨우고 왕일지라도 율법을 어기면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해야 함이 마땅한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이 자는 짖지 못하는 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책망은커녕 왕이 제단에 분향하려 왔다고 해서 아들들을 보내다니요! 선지자의 이런 침묵과 방관, 방조, (대리인을 내세웠을지라도) 우상의 제단에 참예함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앞에서 선지자가 아님을 확연히 드러내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백성들이야 선지자도 그러는 마당에 오죽 우상을 섬겼겠습니까. 뭇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늙은 선자자의 말과 행동거지를 통해 우리는 타락한 선지자의 면모를 더욱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 앞에서 제단을 향해 외치면서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왕이 회유하자(자기 왕국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칩니다. 그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13장 전반부(1-10)를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상을 싫어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노를 격발케 하는 행위가 우상숭배임을 말해 줍니다. 제단을 의인화 해서 제단을 향해 외친 그 말씀은 바로 여로보암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13장의 전반부(1-10)의 광경을 목도한 자들은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입니다.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11절-개정). 이에 대한 그 선지자의 반응은 하나님의 사람을 추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선지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바로 반복해서 드러나는 기록입니다. 8절에서,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절에서도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또 15절에서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계속 16절에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절에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8절에도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19절,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  22절, "...너더러 '떡도 마시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마지막으로 23절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리고,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서 하나님의 사람을 태워 보냅니다.

단순히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 곳(벧엘)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함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결코 벧엘에서는 먹고 마셔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우상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우상에 참예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신신당부하신 말씀인 그 명령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인가를 반복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우성을 섬기는 것을 눈뜨고는 보지 못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심판을 경고하신 그 벧엘의 제단과 제단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속아서 우상의 제단에 참여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나서는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엄중한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노회하고 교활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아는 자입니다. 속여서라도 그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먹고 마시도록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속임은 단순한 속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부추긴 속임입니다. 직설적인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입니다. 남왕국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려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는 실로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말씀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코자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여 악에 빠지게 하고 그 결과를 주목하여 보고자 한 악한 자였습니다. 그 결과 여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한 자였습니다. 제단을 향해 외친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로 난 것인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남의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하는 것으로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한 어리석은 선지자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육신의 목숨 보존에 있어서는 뗄래야뗄 수 없는 일입니다. 먹고 마셔야 하는 원초적인 문제가 이토록 빈번하게 기록된 이유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되 주 안에서 먹고 마셔야 할 자들입니다.


뒤에 나오는 그 선지자의 일련의 행동들이 호의적으로 비춰짐으로 해서 우리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는 타락한 그 선지자의 교묘한 거짓을 드러내주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분별이 요구되는지를 밝혀줍니다.

벧엘의 그 선지자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습니다. 선지자의 입에 말씀을 한 번 넣어주셨다고, 이 전에 선지자 노릇했다고 그 선지자가 지금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참 선지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이 심판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같지만 실은 그렇게 만든, 다시말해 범죄케 한 늙은 선지자에게도 해당되는 심판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의로 살인한 자가 받는 심판의 말씀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입니다.

속여서 그 곳에서 먹고 마시게 한 후 그를 나귀에 태워 보냅니다. 앞에서 먹고 마시게 한 것이 대접이 아니라 심판을 부른 것이 듯 나귀를 태워서 보내는 행동도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시던 그 명령을 어기도록 한 것이지요. 왜 냐구요? 그가 사자에게 물려죽어 버려진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이었습니다.

그래서 25절은 "보라"로 시작합니다. 늙은 선지자가 타던 그 나귀는 나귀 타기에 서툰 그 하나님의 사람을 태우고 유다에서 벧엘로 나 있는 길(하나님의 사람이 왔던 바로 그 길)로, 평소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고 늙은 선지자도 다니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번에 돌아가던 길은 상수리나무가 있는 한적한 산길이었음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여러분은 이것을 그 선지자의 호의로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더하여 늙은 선지자는 최소한 두 필 이상의 '탈 수 있는 나귀'를 가진 넉넉한 집안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목사의 집에 차가 두 대 이상 있는 꼴이지요.

25절 이하에 보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 사실을 알고 시신을 거두러 갑니다. 거두러 가는 목적이 단순히 슬퍼하며 장사지내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속이는 거짓말에 속아 벧엘에서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좀 더 깊이 말하자면 우상의 집에서 먹고 마신 죄에 대해 엄중한 심판으로 갚으신 사실을 목도한 그 선지자는 처음 13장 서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해 외친 그 말씀이 반드시 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묘실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죽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한 것이지요. 뼈가 제단 위에서 태워지는 그 심판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조상의 묘실에 들지 못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의 묘실에 들지 못 한다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분리된다는 말이요, 또한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한데도 우상의 제단이 있는 벧엘에 뼈가 묻힌다고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믿음 좋은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 갈 수 는 없는 일입니다. 사후의 명예까지도 생각하는 늙은 선지자이지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어떤 행동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벧엘에서 나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데만 치중하다보면 전후 문맥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놓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삽화처럼 기록된 이야기는 좀 더 넓은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어김없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여로보암이 우상숭배를 버리도록 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이 일을 보고도(알고도) 계속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면서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고 악행을 자행하고 있음을 13장 말미(33-34)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지금은 비록 악한 왕일지라도,그 전에 하나님은 그에게 먼저 선한 약속을 11장 38절에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끝내 돌이키지 아니한 여로보암은 평행구절인 역대하 13장 20절에서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유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심판을 자초했는가를 역사를 통해 교훈하고자 기록한 말씀입니다. 포로생활 가운데서 자신들과 그들 조상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회복을 구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정경 가운데 한 권의 책으로서 열왕기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열왕기 중 오늘 본문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구속사의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알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그 어떤 배역과 훼방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그림자로 해서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약속하신 구원자의 오심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구약의 예언과 그 성취의 기록인 복음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십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임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하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셧습니다.(딤후3:15-17)

오늘 강해의 본문으로 삼은 왕상 13장은 큰 줄기의 교훈뿐만 아니라 작은 지류의 몰소리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구속사적 언약적 성경읽기와 하나님 나라 관(觀)으로 성경 읽기도 좋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좀 더 풍성한 적용을 해서 우리 삶이 영적으로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일 것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성경을 가까이 하셔서 이 혼탁한 시대에 거짓 교훈에 빠지지 않고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더하여 벧엘은, 마침내 기름부음 받으신 산돌(Living Stone)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그 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집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거처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시는 여로분이야말로 진정 복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다시말해 자기 목숨 보존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죽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지라! 아멘!

*누지문서 님의 글에 댓글로 달려고 했지만 너무 길어서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좀 더 풍성한 적용을 할 수 있음에도 약(略)한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출처: 아멘넷, 글/지혜자 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미연방대법관에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판사인 브렛 캐버너(Brett Kavanaugh, 53)를 지명하였습니다. 그가 상원법사위와 상원본회에서 인준이 확정되면 대통령이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캐버너를 대법관으로 지명한 것은 대법관직에서 30년간 일하다가 지난 7월 31일 은퇴한 앤서니 매클로드 케네디(Anthony McLeod Kennedy, 1936년 7월 23일 ~ )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지금 미국의 연방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모두 9명입니다. 케네디의 은퇴로 8명인 대법관은 공화당 쪽 4명, 민주당 쪽 4명이데, 브렛 캐버너가 임명되면 5대 4로 공화당 쪽이 우세하게 됩니다. 미국의 대법관은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워싱턴 정계는 물론 온 미국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될 때 개표문제로 시비가 생겼을 때 연방대법원이 부시의 당선을 확정하기도 했고, 동성 결혼 합법화를 결정한 것도, 낙태를 허용한 것도 연방대법원 판사들입니다. 중요한 국가 정책의 타당성 여부에 시비가 있을 때 최종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연방대법원 판사들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130여 명의 법관을 보수적인 인물로 교체하였고, 자기 임기 동안에 2-3명의 대법원 판사를 보수적인 인물로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동안 진보 정치와 언론이 주도하여 만들어 놓았던 결정들이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당과 주류 언론과 선출되지 않은 정치 실세들인 소위 딥 스테이트가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든 브렛 캐버너의 연방대법원 진출을 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브렛 캐버너를 연방대법원 판사로 지명하자 그가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대학 심리학 교수인 크리스틴 포드입니다. 그녀는 35년 전 열다섯 살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 하우스 파티에서 자기보다 두 살 위인 캐버너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캐버너는 즉각 전혀 사실이 아닌 거짓말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포드가 그 파티에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 한 다른 세 명도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브렛 캐버너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케버너와 예일대 동창인 데보라 라미레즈(53)입니다. 그녀는 예일대 기숙사에서 있었던 한 파티에서 캐버너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캐버너가 성 폭력을 저질렀다는 세 건의 폭로가 더 있지만 신빈성이 매우 희박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상원법사위 청문회를 앞두고 지명자가 부적절하다는 폭로가 하나같이 성 문제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상원법사위 청문회에는 크리스틴 포드 한 사람만 증인으로 나와서 증언하였습니다. 포드는 성 폭력을 당할 뻔 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고 그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매우 힘들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일을 사실이라고 확증할 만한 진술은 없었습니다. 포드가 성 폭행을 당할 뻔 했다는 주장은 증인도 증거도 제시할 수 없는 청문회 증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드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드의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정황들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일단 미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유래 없는 정치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공화당이지만, 공화당 안에서 볼 때 트럼프는 굴러들어 온 돌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한 사람이 작고한 존 맥케인 의원입니다. 그 외에 공화당 안에 트럼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대통령 직무를 시작하면서 민주당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속한 공화당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기가 임명한 법무부 장관, 법무부 부장관, 그리고 뮬러 특검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미국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입니다. 트럼프는 정말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결사적으로 반 트럼프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과 주류 언론들과 딥 스테이트들의 집요하고 무차별적인 압박과 공격에 혼자서 싸우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반 트럼프 세력들은 탄핵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대체 트럼프가 무엇을 얼마나 크게 잘못하였기에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탄핵을 하려는 것일까요? 트럼프를 대통령에서 끌어 내리려는 이들은 트럼프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트럼프의 정책 때문에 기득권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미국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모든 개인과 집단들이 반 트럼프 진영을 형성하여 연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도덕군자도 아니고 혁명가도 개혁가도 아닙니다. 인품이 훌륭한 것도 아니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즈니스를 하여 성공한 욕심 많은 사업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지만 다른 사업가들보다 더 불법을 많이 행한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트럼프를 오해하거나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쉬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으로서 좀 더 진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그를 생각이 깊지 못하고 경박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약자와 약한 나라에 대한 배려가 없고 정적들과 타협할 줄 모르는 저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것에는 지지를 보내지만 지나치게 미국 우선주의로 나아가는 것도 불편합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소시민적인 사람들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저개발 국가들을 위하고 약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적 욕심만을 채워왔던 나쁜 자들의 검은 거래를 끊어 놓고 있습니다. WTO, 환경론, 소수자 보호, 동성애지지, 다문화주의, 개방적 이민 정책, 보편 복지 등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 진정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 세우는 자들이 뒤로는 부정축재를 일삼아왔습니다. 트럼프를 물고 늘어지는 이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민주당 안에 그런 사람들이 많고, 공화당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고, 대부분의 주류 언론들이 그렇고, 환경운동 하는 이들, 소수자 및 동성애 지지자들, 글로벌 기업가들, 문화 예술계, 대학 강단들, 문화 상대주의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는 이들이 사실은 소외 자가 아니라 기득권층입니다. 그와 같은 기득권 층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미국은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그 기득권층이 잡고 있는 줄을 끊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래 미국에서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결사항쟁 같은 반 트럼프 세력이 일어나 연대하여 트럼프 죽이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온갖 대의명분을 앞세우며 트럼프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만 그것은 개혁운동 같은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집착이고 발버둥입니다. 트럼프가 드러나게 나쁜 일을 한 것이 없는데도 반 트럼프 운동이 이렇게 집요한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브렛 캐버너가 성 폭행을 하려 했다는 고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자 트럼프 대통령은 캐버너를 위로하며 나도 그런 모함을 받아오고 있다며 동병상련을 토로하였습니다. 정치계의 싸움을 보면 정적에게 뚜렷한 혐의를 찾을 수 없을 때 어김없이 이용되는 단골 메뉴가 성추행이나 막말 발언 같은 것입니다. 그런 주장은 증인이나 증거가 없어도 내가 당했다고 하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언론이 떠들어 대면 일반인들은 허상을 사실로 믿게 됩니다.

 

그동안 민주당과 주류 언론이 주동이 되어 벌인 반 트럼프 폭로 사건들을 보면 트럼프는 그야말로 바람둥이에 허풍쟁이, 인종주의자, 막말 등을 해 온 저질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반 트럼프 진영에서 제기한 온갖 더럽고 추잡한 스캔들들은 거의 조작되고 왜곡되거나 과장된 거짓임이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러시아 스캔들입니다. 그 스캔들을 조작하는데 민주당전국위원회, 힐러리 클린턴 선거본부, 클린턴 재단, 법무부, FBI, CIA, 퓨전 GPS가 관여하였습니다. 트럼프 선거본부를 도청하도록 법무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출된 문건이 소위 러시아 스캔들의 핵심인 ‘트럼프의 도시에’인데, 퓨전 GPS가 민주당전국위원회와 헐러리 선거본부로부터 부탁을 받고 만든 것입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클린턴 선거운동본부는 이 문건을 만든 대가로 퓨전 GPS에 1,200만 달러를 지불했고 이 가운데 일부는 그 가짜 문건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국인 스틸에게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미국에서 선거에서 자기 경쟁자의 뒷조사를 하는 행위(Opposition research)는 합법이지만 외국인에게 금전을 지불하고 정보를 취득하는 행위는 불법입니다.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가짜 러시아 스캔들에 관련된 모든 수사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하자 워싱턴 정계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이 공개되면 워싱턴은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 현직 고위공직자가 조사를 받고 감옥을 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 수사자료 공개를 보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한 일부 언론은 꼬리를 내리고 그동안 러시아 스캔들은 단 한 명의 증인도 단 하나의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논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 번에 대법관 지명자인 캐버너의 성폭행 의혹이 제기 된 것입니다. 트럼프 죽이기 가짜 폭로 사건을 연달아 내놓던 주류 언론들이 이 번에는 캐버너 죽이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다면 대법원 판사로 보수 성향의 법관이 들어가는 것이라도 막아보겠다는 속셈입니다. 캐버너가 부적격자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가 보수 성향이라는 것이 부적격의 이유라고 하는 것 같아 여간 불쾌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 기독교 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 미국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란 본래 그런 거야.’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보주의자들과 기득권층이 red line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들에게는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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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나 영어 듣기평가를 하다 보면 성우가 읽어주는 것처럼 사람이 읽어주는 소리를 녹음해야 할 때가 있다. 요즘은 아파트 관리실에서 방송을 하거나 공공기관에서 방송을 할때도 자주 사용하는 글을 읽어주는 기능이다.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어도 구글번역을 이용하면 쉽게 원하는 문장을 읽어주는 소리를 화일로 만들수 있다. 특히 구글번역을 사용하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다양한 국가의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어서 활용도가 높다.

1. 크롬으로 구글 번역에 접속한다.
크롬을 이용하여 https://translate.google.co.kr/ 사이트에 접속한다

2. 크롬에서 개발자 모드(F12)를 실행한다.
. 크롬이 실행된 상태에서 단축키 F12 를 누르면 개발자 모드가 나타난다.
. 개발자 모드에서 Network - Filter - Media 를 선택한다.



3. 구글번역에 원하는 문장을 적어 넣고 읽게 한다.
 
. 원하는 문장을 입력하고 아래 스피커모양 아이콘을 눌러 목소리를 듣는다
 
. 우측 개발자 모드에 방금 읽은 문장 이름이 나타났는지 확인한다.



4. 개발자 모드에서 url 주소를 알아내고 저장한다.

. 이름을 선택하고 마우스 오른쪽을 눌러 Open in new tap 메뉴를 선택한다.



. 새로운 탭이 열리면서 플레이 창이 나타나면 플레이를 눌러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우측끝 점3개를 눌러 다운로드 하면 목소리 화일을 내려받을 수 있다.

 

. 목소리 화일은 확장자 mp3 화일로 내려 받아 진다. 만약 mp3 화일로 받아지지 않으면 아래 사이트에 가서 mp3 파일로 바꾸면 된다.

 

5. 소리화일을 mp3 화일로 변환하는 방법
 
. https://online-audio-converter.com/ko/ 사이트에 가서 다운로드 받은 소리 화일을 올린 후 원하는 확장자(mp3) 형태로 다운로드 받는다.


. 이제 ppt나 동영상등 필요한 곳에 넣어 사용하면 된다


검토 메뉴에서, 소리내어 읽기 기능 활용하기 


영어 사전의 예문을 입력하여서, 


우리말 음성, 영어 네이티브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말 문장 입력하고, 엔터 치고, 

영어 입력을 해서, 

검투 메뉴에서, 소리내어 읽기 기능을 사용하면, 

우리말은 우리말 대로 들을 수 있고, 

엔터를 쳤기 때문에, 

영어 부분은 영어 네이티브로 영어 문장 읽어주기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때, 만약, 

한글 문장 다음에 , Shift + Enter 했다면, 

영어 부분을 한국 사람이 영어 발음으로 읽어주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며, 


한글 문장 다음에, Enter 를 했다면,

영어 부분을 미국 네이티브 음성으로 영어 읽어주기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59번째 예언: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여 천년(천년왕국)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상에 내려 온 구원받은 백성들이 천년동안 왕과 제사장 같이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6절 말씀)"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60번째 예언: 천년왕국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던 구원받은 백성들을 마지막 시험을 하십니다, 천년동안 왕과 제사장과 같은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옥(무저갱)에서 잠시 놓인 사단이로 성도들에게 불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장7절 말씀)"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사단이의 마지막 발악을 능히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승리한 알곡과 같은 성도들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 천국에 입성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구원받고 왕 노릇하는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옥(무저갱)에서 잠시놓인 사단이의 불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를 배반하는 자들은 마지막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쭉정이로 분류되어 유황 지옥불에 던저져 영원히 불태움을 당할 것입니다. 모든 예언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모든 예언이 속해 있습니다. 예언에 집중하지 마시고 세상(지구)을 두 손에 올려 놓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자이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미리 구원받기로 예지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물 위로 걷던 목사, 악어밥 돼?




기독교를 빙자한 가짜뉴스가 떠돌아 서구 언론계가 웅성대고 있다. 

"목사가 물 위로 걸으려다 악어밥이 됐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국제 언론들이 앞다퉈 다뤘다가 뒤늦게 망신을 당하는 사태가 지난 5월 중순 벌어졌다. 내용인즉 짐바브웨의 한 목회자가 예수님처럼 물 위로 걸으려고 시도했다가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 


한 예로, '지오비츠'(GB)라는 인터넷방송은 단신 속보(速報)에서 "알려진 대로(reportedly)"를 전제로 몰려드는 악어떼의 동영상까지 곁들여 진지하게 이렇게 보도했다. 즉, 짐바브웨 화이트리버 음푸말랑가에 있는 말기성도교회(SOLD)의 '조너턴 음테트와' 목사는 교우들에게 오늘날에도 가능한 성경적인 이적을 입증해 보여주려고 악어가 들끓는 '악어강'에서 실제로 약 30미터 정도 물 위로 전진하다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중 교인들 눈앞에서 세 마리의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 


이 교회의 은코시 집사는 "악어들은 목사님을 불과 2분만에 끝냈다"며 "그 분의 샌들과 속옷만 달랑 남아 물 위에 떴다"고 말했단다. 30분 후 ER24 구급대의 응급차량이 현장에 도착했으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고 이 기사는 끝맺었다. 은코시는 한 술 더 떠 "우리 교우들은 아직도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목사님은 한 주 내내 금식하고 기도했기 때문이다"라고까지 말을 얹었단다. 


22일 현재도 인터넷에 버젓이 남아있는 데일리 포스트의 5월 13일자 기사는 핏물이 어린 강물 위로 왼손을 내밀며 허우적대는 사진을 곁들여 실감나게 보도했다. 여기서도 '은코시 집사'는 "목사님이 바로 지난 주일 믿음에 관한 설교를 하셨댔다"며 "그 분은 오늘 우리에게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불행하게도 물에 빠지셨고 우리들 앞에서 커다란 악어 세 마리에게 먹히셨다"고 진술한 것으로 인용돼 있다. 그럴 듯 하지만 말짱 꾸며낸 거짓이다. 


인디펜던트뉴스, 텔리그라프 등 영국의 일부 유명 언론들은 뒤늦게 진상을 알고 머쓱해졌다. 한국의 J, D일보 등 평소 센세이셔널한 뉴스거리를 찾는 주요 언론들도 이 '뉴스'를 확인 없이 섣불리 보도했다가 허위임이 드러나 상황이 "우습게" 됐다. 아울러 근래 급격히 떠돌며 증가하는 가짜 뉴스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부 유머 사이트는 조기 보도의 실수와 기독교의 이적 문제를 함께 농 삼아 다루기도 했다. 


어메리칸온라인(AOL) 뉴스는 '모두들 가짜뉴스에 홀라당 속아 넘어갔다'는 타이틀로 기사를 냈다. 이 가짜 뉴스를 앞다퉈 '사실'로 보도한 언론은 인디펜던트 외에도 데일리 메일, 유닐래드, 메트로, 익스프레스 등. 뿌리는 나이지리아의 '데일리 포스트'였고 원초는 '헤럴드 짐바브웨'로 밝혀졌다. 그러나 기자들이 원초 스토리를 찾으려니 헤럴드 짐바브웨의 아카이브엔 없었다. 물론 애당초 가짜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해당 목회자가 예수님 흉내를 내려 한 문제 장소의 이름이 '악어강'이어서 "엉? 하필 구태여 악어가 들끓는 강물에서 목사가 왜..." 식의 의혹을 사게 된 데다 지난 2016년 2월 비슷한 (가짜)뉴스로 보도됐음이 재확인됐다. 내셔널뉴스 불러턴(NB) 등이 보도한 이 '기사'는 같은 장소에서 걸으려던 목사가 세 마리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풍자 사이트에 올려진 것이었다. 


'구글링'해보면 해당 언론들의 보도 흔적은 분명 남아있지만, 접속해 보면 이미 입을 씻은 뒤거나 "해당 페이지는 없음"으로 나타난다. 영국의 주요 언론들이 이런 허위 뉴스를 앞다퉈 보도했다는 정황은 사실을 중시하는 현대에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원인은 평소 사실과 진상, 정론을 중시한다고 내세우는 주요 언론조차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이 뉴스가 고도의 상상으로 교묘하게 위장됐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내용물이 기독교와 성경의 이적과 신비 이슈를 빙자하고 더 나아가 목회자 등 기독교 지도층의 "있을 만한" 허점들을 겨냥한 허위라는 것. 가짜 뉴스 중엔 이른 바 '음모설'을 배경으로 한 것도 있어 과연 이번 허위뉴스도 단순히 뉴스판을 폭소나 헛웃음(LOL)을 유발하게 만들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목적인지, 기독교를 해칠 음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곰곰히 생각케 한다. 


오래 전 한국의 K모 목사도 어느 해 여름 장마철 홍수가 난 강물 위를 "걸었다"는 주장을 하고 다닌 적이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썰'에 불과하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사라졌지만 1980년대에 꽤 공공연히 떠돌던 것이었다. '음테타와 목사'가 "100 피트 정도" 걸었다는 주장은 믿음으로 갈릴리 물 위를 걸으려 했지만 두려움으로 물 속에 빠져 들어가다 주님께 간신히 건짐 받은 베드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성경과 기적을 이용한 스토리 위장술이 교묘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웹을 누비는 가짜 뉴스들은 웬만한 사람들은 쉽게 넘어갈 정도로 점점 더 교묘해져가고 급증하고 있다. 또 그런 가짜 뉴스와 그 결과의 스릴을 맛보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맨날 만우절' 현상이다. 얼핏 중대 뉴스로 보이는 어떤 스토리가 어디서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궁극적으로는 과연 무엇이 참이고 허위인지 아리송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말이다. 다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최근 자신과 정권에 관한 '가짜 뉴스'가 판치지만 "필터링을 해야 한다"고 변명 비슷한 해명 및 비난 발언을 한 적이 있음을 폴리티팩트(=정치적 진실)이 전했다. 


사회에 가짜 뉴스가 판치다 보면 진실에 대한 '신뢰마비현상'까지 온다. 늑대가 온다는 거짓 경고를 하며 즐기다가 결국 자신이 늑대에 잡아먹혔다는 이솝 우화 속 목동처럼, 진실이 허황되게 들리고 거짓이 진실처럼 들리는 사회가 돼 간다는 얘기이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김연철 교수(인제대)는 이 예화를 인용하면서 '신뢰가 사라지면 안보도 무너진다'는 경고를 한 바 있다.  


'악어밥이 된 목사'의 가짜 스토리는 성경의 이적들에 관한 현대적 의미성과 신뢰도에도 자칫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성경에 있는 이적들이 마치 현대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흔하다. 그렇다면 성경 속의 과거는 거짓 덩어리이고 현대 사회는 과학적이니 다 진실이라는 것인가? 그런 주장이나 개념은 세상의 헛 뉴스를 쉽게 믿는 언론들만 봐도 가당치 않다.  


이같은 가짜 뉴스들은 인공적 산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을 통한 마귀의 장난이다. 성경에 따르면 마귀는 처음부터 모든 거짓의 아비요 허위의 앞잡이이다(요한복음 8:44). 사탄의 속에는 아예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것으로 말하니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허구를 일삼는 자들은 그의 자녀들인 셈이다. 


구약 창세기 3장을 보면, 마귀는 첫 여자 하와에게 간교하고 그럴 듯한 거짓말로 접근하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 남편까지 믿게 만들었다. 그것이 첫 불순종과 죄악의 발로였고, 그 결과는 오가는 세대의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엄청난 저주였다. 타락천사들도 옛 천사장이었을 당시의 마귀에게 속은 결과물이었다. 


갈수록 절대 진리가 소중히 여겨지고, 성경 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누는 교회, 소박하고 투명한 진실을 말하는 사회가 마냥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할 것을 요구한다(마태복음 5:30). '중간쯤의 진리'라는 것은 없다. 


다른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기독교인들-특히 기독교 지도자-만은 성경의 명령대로 늘 바른 말을 해야겠다. 

그리고 기억해 두자: 성경 속의 모든 말씀은 다 진실되다. 



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1547 [진리와 사랑 (TLT)]/김삼 목사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그 미디어에 부여하는 것 이외에는 윤리적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셜미디어는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도구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잘 사용된다면 그것은 서로 서로를 연결해 주고, 정보도 제공하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너무 자주 그렇듯이,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하루를 망치기도 하고, 심하게는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크리스천이라고 소셜미디어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수로 말미암아 복음의 근거를 해칠 수 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조차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일으키는 실수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의도로 한 것이지만, 좋은 의도라고 모든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1. 입증되지 않은 사실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이라고 자막을 추가하게 하는 특정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 사진, 또는 짧은 영상이나 링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 나르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아야 한다. 전달하지 말고 그냥 지나쳐 버리라. 크리스천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야 하는데, 슬프게도 그것이 우리들에 대한 평판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전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 우쭐거림과 비난
 
종종 청개구리가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사진 위에 쓰여진 밈(meme)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마지막 부분에 “그러나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라고 끝나는 밈들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다. 포스터에 나타나는 우쭐거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3. 들춰내기
 
“무신론자 교수는 자신이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 학생이 이것을 말하기 전까지는” 같은 식으로 태그되어 있는 비디오들. 그러한 것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한다.
 
4. 나는 옳다, 당신은 틀렸다.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에게 어리석다고 느끼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께 오지 않는다. 논쟁과 토론할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소셜미디어는 결코 그러한 곳은 아니다.
 
5. 예수는 나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지만 좋은 크리스천들을 많이 알고 있다. 또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쪽에 있는 선량한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여기는 선량한 크리스천들도 많이 알고 있다.
 
당신이 싫어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크리스천들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렇게 투표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볼 것을 권한다. 그들에게 고함치기보다는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우리 모두 무엇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6. 하나님이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실 거야
 
당신이 지옥이 실제라고 믿는다면, 그것에 대한 비통함을 느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영원한 장소에 대한 비난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불신자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무례하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7. 그냥 말하는 건데...
 
크리스천들이 자주 사용하는 영특한 표현인 “그냥 말하는 건데”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때,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8. 상업적인 도용
 
새로운 제품, 앱 또는 영화가 나올 때마다 그것들에 “하나님” “ 순수” 또는 “믿음” 이라는 크리스천 키워드를 자막으로 사용하여 엉성한 모조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다음 주 설교 시리즈로 최근 코미디 영화의 예술작품을 등에 업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따라하고 싶은 오리지널을 창조하는 힘들지만 필요한 작업을 하도록 하자.
 
9. 당신의 죄는 나의 죄보다 심하다
 
죄는 실제이다. 이것은 처절하게 파괴적이다. 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리우드나 워싱턴의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큰 소리를 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행동은 얼마나 깨끗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좀 더 분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Christianiy Today에서 발췌>

 

- 무분별한 정죄, 건강신학 위해 교수들 비평 나서

 

【 <교회와신앙> 】 정이철 목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와 화제다. 연구를 진행한 교수는 총신대학교의 일곱 학자들(김성태, 이한후, 김지찬, 정승원, 김창훈, 박용규, 이상원). 한국교회와 예장합동측 총신대학교 사태에 대한 왜곡은 물론, 방언에 관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무차별 정죄하는 정 목사의 발언에 대하여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적 성숙을 위한 성찰과 평가가 작성의 이유다. 이 평가서에 대해 독자들이 읽어 바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한 본지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들어가면서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 지난 십수년 동안 자신은 진정한 개혁주의자이며 총신은 잘못된 복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호도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바로 잡고 있다고 직간접으로 표방하여왔다.(*일곱 명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정이철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것은 정이철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고 말하며 학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무차별적으로 근거 없이 방언을 비롯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더 이상 묵인하는 것은 신학교 교수로서 깊은 책임의식과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성숙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서로 읽고 검토하고 보완하여 완성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 총장처럼 겉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예장합동과 총신을 변질된 현대복음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몰아가며 여러 학자들과 목사들을 비판하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정이철이다.(*정이철이 담임하는 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전남 여수 인근에서 출생하여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92년 1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신반포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강도사, 교육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서울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95.10), 목사 안수(97.10)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님의 기쁨교회(2001-2002), 앤아버 한인장로교회 (2002-2004)에서 시무했고, 현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2004-) 담임을 맡고 있다(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주소는 다음과 같다.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 Tel: 734-678-7133). 그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3),「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홈페이지, <http://cantoncrc.com/with_pastor>/ (2018년 4월 17일 접속); 바른믿음 홈페이지, <http://www.good-faith.net/>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이름뿐인 개혁주의를 외치는 김영우 총장을 공공연하게 두둔하며 자신도 김 총장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식의 지지 글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렸다. 총신 사태를 김영우 총장의 정관변경과 사유화 그리고 학사비리 등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신학적 문제로 호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양비론을 내세우며 마치 이 둘이 대립적이어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왜곡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하며 자신들을 치켜세우고 있다. 말뿐인 개혁주의는 이단도 주장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거짓 선지자들과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우리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마7:20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김 총장의 열매가 어떤지는 이미 많이 알려졌고 곧 확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적 근거 없이 단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교조적 착각으로 많은 목사들과 교수들을 비판하여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정이철 목사는 교만과 비방과 분열의 열매를 맺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진단해 본다.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으로, 심지어 이단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정이철이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사고를 가지는 반개혁주의적이고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과 맞지 않은 비성경적인 이단적인 측면도 상당히 많다. 그의 신학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어거스틴, 칼빈, 핫지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해해온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런 후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I. 정이철의 신학 사상에 나타난 비 성경적 이단성
 

1.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의 방언 비판 문제

   

▲ 정이철 목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에서
박영돈 목사의 방언관을 비판했다.(사진은 인터넷 화면 갈무리)

정이철 목사는 소위 <바른믿음>이라는 본인의 사이트에 한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며 고신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박영돈 교수의 방언에 관한 글들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정이철 목사가 주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대상들은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과 목사들이다. 비록 이들 중 누구도 방언을 성경적 특별계시 차원으로 놓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마치 이들이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거나 성경이 특별계시임을 부인하는 자들인 것처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이다. 그가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박영돈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 수록된 글들은 다음과 같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었겠는가?”(154쪽)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173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175쪽)


박영돈 교수는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개혁주의 틀 안에서 건전하고 날카로운 해석과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모두 외국어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으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박영돈 교수는 이러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을 갖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박영돈 교수를 '이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심지어 그는 “박영돈 교수가 감히 이런 주장을 하고서도 편히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명색이 고신의 교수이고 조직신학 학과장인 박영돈 교수가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해댄다.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말이 무엇인가동류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같은 이단의 범주로 그를 평가한다는 말이 아닌가개혁주의 신학자가 개혁주의 틀 안에서 자신의 방언에 대한 입장을 개진한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한 것도 아닌데, 박교수를 이단의 한 부류로 모는 정이철 목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단이라면 그 옷이라도 싫어해서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야 하며 이것이 이웃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왜 유독 정이철 목사만 박영돈 교수를 향해 이단 이론을 답습하고 동승하고 있다고 주장할까? 여기 다른 이유는 없다. 정이철 목사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을 때 사용했던 말이다(갈1:6-9). 여기 다른 복음이란 한 마디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게 되지만 율법의 행위, 곧 할례를 받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떠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 외에 의롭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박영돈 교수가 칭의론을 거부했는가? 그가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했는가? 박영돈 교수가 방언을 계시의 방편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수단으로써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인데, 정이철은 박영돈 교수를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자라고 정죄하였다. 정이철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유대주의자이며 바리새인이다. 요한 칼빈의 멘토요, 종교개혁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거스틴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2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와 직통설교라는 정이철의 주장은 개혁신학 왜곡

정이철 목사는 아래와 같이 방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박영돈교수를 비판한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를 내포하는(특별계시를 보충하는) 계시적인 은사였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보고서 불신앙했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방언이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나타났다. 최초의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삼 천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방언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라고 단정함으로 방언을 직통특별계시로, 이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 설교”라고 단정한다. 심지어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방언을 직통특별계시, 직통설교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지 흥미롭다. 그가 어떤 성경적 근거로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단정적 말투가 영락없이 이단 교주와 비슷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는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구별된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다.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를 말하는 기적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듣는 기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기적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대한 직통계시가 아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도 직통계시는 아니다. 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통계시는 아니다. 물론 바울 서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 받아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통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직통계시는 이단들이 잘 쓰는 용어이다. 개혁주의 성경관은 신구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영감된 말씀임을 주장한다.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 영감이지 직통으로 받아 적는 기계적 영감이 아니다. 혹 정이철 목사는 벧후1:21,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는 말씀을 직통계시라고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에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말씀한다. 베드로후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가 썼지만 베드로 자신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 등이 개입되지 않은 직통계시는 아니다.(*만약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한다면 왜 사도바울은 통역을 요구했을까?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통역하면 그 통역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지 않는가? 통역은 사람의 말이지 않는가? 왜 바울은 방언보다는 통역을 더 중요시 했는가?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면 바울은 자신의 서신보다 더 권위적인 직통계시 앞에 무릎을 꿇고 경청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 방언을 자제하라고 하며 통역 없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며 금했던가? 더욱이 바울은 고전14:19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 한다면 어떻게 일만 마디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보다 낫다는 말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시며 훈계하는 내용을 주로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파당문제, 성찬문제, 음란문제, 의복문제, 부활문제 그리고 은사문제였다. 즉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여러 은사들은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지양해야 할 문제였다.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며 직통설교라면 왜 교회를 위한 목회서신서에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을까? 그것은 바로 방언은 교회가 지양해야 할 일종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정이철 목사는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고린도교회는 헬라 지역에 위치한 교회로서 헬라어가 통용어였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헬라어, 아람어, 심지어 로마 제국 아래에서 라틴어까지 사용되었던 고린도지방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충격 받도록 이방인들의 말로 십자가를 설명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다들 헬라어를 이해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방나라 언어로 십자가를 설명했다고 유대성도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회개를 했을까? 만약 정이철 목사가 말하는 이방인들의 말이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니라면 어떻게 고린도교회의 유대인들이 이해를 하고 회개를 했을까? 혹 정목사는 통역을 했을 것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이 통역없이 방언을 했기에 사도바울은 통역 없으면 하지 말라고 자제 시킨 것이다.) 정 목사는 복음의 내용보다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현상 자체를 보고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워하고 회개를 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것은 복음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순절 때 3,000명이 회개한 것은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심으로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저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그들 가운데 초자연적인 성령의 임재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능력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선지서와 다윗의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메시아이며 부활하신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 영감어린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베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씀을 직통으로 계시해준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께 듣고 배운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고 깨달게 하신 것이다.

 

3.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동일시

정이철 목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의 방언의 기능이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설교하시는 현상이었다. 그 때에는 교회에 설교자가 없었고, 성경도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친히 말씀하시어야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 박영돈 교수가 쓴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왜 초대교회에 설교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가? 무엇보다 바울과 11사도가 있었고 7 집사들도 있었다. 베드로도 설교했고, 11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설교했다. 빌립도 설교를 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교훈을 했다. 방언으로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엡2:20). 방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신사도운동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이단적 발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단회적인 직분이며 그들과 선지자들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외에 다른 터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는 이단임에 분명하다.

 정이철 목사는 계속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단들도 사도행전의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종류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움직여서 하나님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영적인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하늘의 언어’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에 두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는 이런 주장은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시대와 고린도교회 시대는 동시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부터 바울에게서 신학을 배운 사람이고,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동일하게 전파한 사람이다. 바울이 가르친 성령의 은사와 누가가 설명하는 성령의 은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방언의 형식은 반드시 이방인의 언어이고,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경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표적이며, 반대로 믿고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되는 복이 부어졌음이 선포하는 표적이라고 가르쳤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위 문장에 있는 대로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달리 외국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짓 이론을 주장하는 자라고 단죄한다. 칼빈은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했고, 개혁주의 영역에서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동일시하지 않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도 정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구분하는 이들을 이렇게 함부로 거짓된 이론이라고 정죄한다. 정죄를 하지 말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과 같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해석학적, 문헌적, 역사적, 사회적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먼저 제시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교인들을 헛된 환상을 갖게 하고 대외적으로 관심을 끌며 스스로 바른 신학을 세우는 이 시대의 의로운 대선생인 척하는 것은 영락없는 이단 교주의 모습이요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는 거의 동시대에 기록되었고 누가와 바울은 동역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말씀한다. 외국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보다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한 언어이며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국어였다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22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겠는가?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표적(sign)이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 밖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한다면 방언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방언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14:21에서 인용된 사28: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에서 다른 방언은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 언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 본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 28장의 다른 방언, 즉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가 표시하는 즉 표적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라고 한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고전14:21에 이사야 28:11을 인용했다고 해서 고전14장의 방언이 외국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4. 바울의 “다른 복음”(고후 11:3, 4)을 거짓방언으로 곡해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계속 주장한다.

박영돈 교수 등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른 이상한 기도의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에 기도를 위한 방언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영돈 교수처럼 다음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주장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과연 위 말씀이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일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있음이 전제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영'으로는 기도하므로 '마음'으로는 그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바울의 신학일까? 바울이 그런 내용을 가르쳤던 사람이었나?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대체 바울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개월 후에 쓰여진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를 떠난 후 이단들이 고린도에 찾아가서 거짓된 가르침을 베풀었고,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것을 버리고 이단들이 가르친 것을 따라갔다고 심각하게 책망했다. 즉,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고 한탄하면서 책망했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우리는 위 문장에서 정이철이 고린도의 방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그가 사용한 용어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2.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3.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위 정이철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린도교회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 “이상한 거짓 방언”으로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심어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곧 이단들이 고린도교회에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거짓 방언, 이단적인 방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처럼 정이철은 사도행전과는 달리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 있는 내용이나 주장은 다 이단적 행태나 거짓 방언으로 정죄한다.

그 예로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구절이다. 여기 “내가 만일”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이것은 가상적(hypothetical) 표현이지 바울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말씀한다(고전14:18). 따라서 14절 말씀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나 자신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며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자신의 의견을 일단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맞추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어떻게 이 구절을 두고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위적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매우 흥미롭다.(*정이철 목사는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단들의 해석방법이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전하지 말고 통역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방언으로 기도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은 말씀하신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무지하게도 “마음”(νοῦς)을 영과 비슷한 개념의 마음(mind)으로 이해하고 있다. 14:19,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깨달은”이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넣었다. νοῦς를 한글성경은 “깨달은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πέντε λόγους τῷ νοΐ μου 혹은 πέντε λόγους διὰ τοῦ νοός μου 로 되어 있다. “내 마음의 다섯 마디”라는 것이다. 원문의 마음(τῷ νοΐ 혹은 τοῦ νοός)은 영어로 intellect,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영으로 기도해도 나는 지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그 다음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권면이다. 거짓 이단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이철목사 말대로 바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영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여기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해도 그 뜻을 깨닫고 기도해야 하고 방언으로 찬송해도 그 뜻을 깨닫고 찬송해야 한다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철 목사는 특유의 이단 해석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고후 11장에 언급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고린도교회에서 직통계시가 아닌 기도로서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과 단정적으로 연결시킨다. 고후 11장의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고 다른 복음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를 유대 왕국의 회복자로 보는 유대주의자들이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수신자가 같지만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정이철 목사는 이단처럼 이들을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5.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 사이비로 정죄

끝으로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박영돈 교수를 비방한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이라는 박영돈 교수가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을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접 설교하시는 계시적인 은사가 아니었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박영돈 교수의 신앙성장 과정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 형성된 모양이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은 위 글에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단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방언이론,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사이비 신앙”으로 정죄한다. 목사의 탈을 쓰고, 아니 신자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한 신실한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사탄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라고 단죄하였는데 자신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는 정이철 목사가 오히려 마귀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보인다. 사탄이라는 말의 뜻은 대적하는 자, 모함하는 자이다. 방언을 인정함으로 자신과 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거짓의 영으로, 이단으로, 다른 예수를 따르는 자로 모함하고 적을 만드는 정이철 목사는 전형적인 사탄의 자식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깎아내리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의롭다 만드는 그는 영락없는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점점 더 방언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국내 총신과 고신을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교에 재직하는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계시의 방편으로 방언을 인정하는 신학자는 없다. 특별계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방언은 각 지방 언어이지만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기도의 수단으로 보고 방언을 인정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정죄하거나 그런 입장의 신학자들을 반개혁주의 신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개혁주의 안에서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나 칼 매킨타이어 노선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심지어 은사중지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개핀 교수도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개혁주의 안에 이론으로 여기고 다른 견해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그것도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인정한다고 해서 누구도 정이철 목사처럼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방하고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지 않는다.

 

김문제 munjett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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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개 대학생 결의 *

연 11억원을 대준 錢主가 누구냐                                     

 

"경찰은 소리 소문 없이 드루킹을 구속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현 정권 의도를 번번이 훼방 놓는 것처럼 이렇게 '게이트'로 갔다"

 

현 정권은 남북 정상회담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세간에서 정작 궁금해하는 것은 '드루킹 게이트'다.

 

출판사 사무실을 얻어 휴대폰 170여대로 댓글 조작을 해오던 그의 일당에게 연 11억원을 대준 전주(錢主)가 누군지를 알고 싶어 한다. 청와대가 "우리는 피해자"라며 정상회담 쇼로 판을 옮겨보려 해도 바닥 민심은 안 따라갈 것이다. 이 사건이 너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수사 의뢰로 이 사건이 시작됐다는 점부터 묘하다. 그는 '평창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폭주하는 비판 댓글을 보수 진영의 공작으로 본 것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의 추한 얼굴을 드러낼 기회였다. 이틀 뒤 김어준씨가 자신의 공중파 프로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거나 돈이 개입되거나 조직이 동원돼 뒤에서 누군가가 시켜서 혹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이런 일을 한다면 반드시 엄벌에 처해야"라며 가세했다.  
해바라기처럼 정권을 바라보고 있는 경찰 수뇌부는 이런 신호를 금방 해석했을 것이다. 운 좋게도 드루킹의 출판사 사무실 압수 수색 과정에서 변기에 버리려는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수거했고,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현 정권에서 당초 원하던 그림과는 정반대였다. 이럴 때 '제 발등 찍었다'라는 속담이 있다.  
체포된 드루킹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김경수 의원 등과의 관계에 대해 진술을 안 했을 리 없다. 경찰 수뇌부는 고차원적인 정무 판단이 필요했다. 드루킹의 처리 문제를 청와대에 보고했을 것이다.

 

청와대는 그전부터 드루킹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한때는 음지(陰地)의 지원 세력이었지만 이제 골칫거리가 된 드루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김경수 의원이 포함된 청와대 대책 회의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뒤 경찰은 소리 소문 없이 드루킹 등을 구속했고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구속된 지 19일이 지났을 때다. 벌써 유치장에 가 있는 사건을 한겨레신문에서 뒤늦게 알고 보도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현 정권의 의도를 번번이 훼방 놓는 것처럼. 아마 이 신문도 '단순 사건'이 이렇게 '게이트'로 커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판에는 '드루킹' 같은 브로커들이 개입하고 불법 공작의 유혹이 있는 게 현실이다. 또 선거가 끝나면 권력 실세에 매달려 자리를 내놓으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촛불'의 명령으로 탄생했다는 현 정권도 막상 선거 때는 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젠가 깨끗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 했던 넘들이 뉴스 메인 장식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드루킹에게 협박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돼왔지만, 현 정권은 '적폐 청산'의 칼을 휘둘렀고 입에는 늘 공정과 정의를 달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책임질 일에 대해서는 훨씬 더 엄격해야 하지 않는가.

 

이번 브로커 사건이 '게이트'가 된 것은 현 정권에서는 아무도 안 다치고 드루킹만 잡아 보내려는 데서 일이 꼬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건이 공개되자 김경수 의원이나 청와대 비서관들은 아귀를 맞추느라 이랬다저랬다 횡설수설하는 모양새가 됐다. 박근혜 정부를 탄핵시킨 이들은 '시인할 것은 시인해야 한다'는 그때의 교훈을 벌써 까먹은 것이다. 


당초 경찰에게 '원칙대로 수사하라'고 지시했으면 불법 정치 브로커와 연결된 정권 실세 한두 명의 처리에서 조기 매듭지을 수 있었다. 국민을 향해 정상회담 팡파르를 터뜨려야 하는 시점에 와서 이렇게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숙 여사까지 연루돼 정권 전체의 도덕성이 의심받는 상황으로 번지는 것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경찰 전체 조직을 망가뜨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경찰이 과연 권력에서 독립된 수사를 할 수 있을지 상당수 국민이 의문을 갖게 됐다.

 

경찰 수뇌부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책 한 권 출판하지 않는 사무실의 임차료, 댓글 조작에 동원된 20여명의 식대와 경비, 휴대전화 170여대의 비용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범죄 수사의 기본이다.

 

강연료나 그까짓 비누를 팔아서 마련했다는 것을 믿었던 것일까. 연간 11억원 이상 썼다는 돈의 통로를 드루킹 일당이 체포된 뒤로 한 달 넘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사건의 열쇠가 바로 거기에 있고, 지금 세간에서는 온통 이런 얘기만 한다. 경찰이 명예를 되찾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면 정권이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상이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모를 때 그랬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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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大 等 43個 大學 學生들의 記者會見文

 

1. 거짓된 平和는 詐欺(사기)다!

 

平昌올림픽을 利用한 文在寅政權의 親北活動을 糾彈(규탄)한다!

“히틀러”에게 平和를 求乞(구걸)했던 뮌헨協定은 종이조각이 되었고 거짓된 平和는 2次 大戰을 觸發(촉발)했다.

 

全體主義 奴國歌 北韓의 實狀을 外面하고 거짓된 平和를 云云하는 것은 北韓 住民들의 慘酷(참혹)한 人權狀況을 外面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國家安保와 大韓民國 國民의 安全을 抛棄(포기)하는 것이다.

 

유엔安保(안보)理(리) 對北制裁를 無視하고 韓美同盟을 事實上 破壞(파괴)하면서 “平昌올림픽”을 平壤의 宣傳場으로 活用한 文在寅 政權을 納得할 수 없다.特히 北韓의 統一戰線部長 “김영철”을 閉幕式에 招待한 것은 天安艦 將兵들을 다시 한 번 죽이고 遺族들을 凌蔑(능멸)한 것이다. 容納할 수 없다.

 

2. 國際社會는 文在寅 大統領과 大韓民國 民主化 運動의 實狀을 自覺하라!

文在寅 大統領은 民主化 運動家, 人權辯護士로 紹介된다. 하지만 文大統領과 大韓民國의 民主化運動을 純粹(순수)하게 讚揚(찬양)하기 힘든 것은 韓國 民主化 運動 核心에 北韓을 追從하고 大韓民國을 顚覆(전복)하려는 主思派가 있었기 때문이다.

 

大韓民國의 慣用的인 民主主義 시스템 안에서 北韓의 支援을 通해 成長하며 社會 各 分野에 浸透(침투)한 主思派 勢力의 眞實을 國際社會는 自覺해야 한다.이들은 美國을 韓半島 分斷의 元兇, 資本主義와 帝國主義의 앞잡이로 여겼고, 美國의 支援과 協力으로 세워진 大韓民國을 否定하고 大韓民國의 놀라운 成長을 폄하했다.

 

그들이 追求한 民主主義는 北韓을 追從한 人民民主主義였지만 그것이 民主化運動으로 包裝되어 大韓民國을 混亂스럽게 하고 있다. 西獨에서는 “빌리 브란트” 總理의 最側近 輔佐官이 間諜이었고, “베트남”에선 大統領이 될 뻔한 野黨 黨首 “쭝딘쥬”가 間諜이었다. 지금 韓國이 이와 비슷한 狀況은 아닌지 深刻하게 憂慮된다.

 

 3. 文在寅 政府와 政治權은 改憲 論議를 中斷하라!

 

改憲은 政治的 安定과 社會的 統合이 實現되었을 때 進行하는 것이 順理다. 國內的으로 彈劾事件 後 많은 國民들이 旣成 政治權에 憤怒하고 있다. 또한 文在寅政權의 露骨的(노골적)인 親北活動을 深刻하게 憂慮하고 있다. 이런 時點에 改憲을 論議하는 것 自體가 不當하다. 國際的으로도 北核 危險이 最高潮에 다다른 現時點에 無理하게 改憲을 進行해야 할 理由가 없다.

 

오히려 大韓民國의 正體性을 否定하는 勢力이 改憲을 憑藉(빙자)해 事實上의 內亂行爲를 隱密하게 推進할 우려가 있다. 只今은 改憲論議로 國民的 混亂을 加重시킬 것이 아니라 安定的인 國政運營에 集中할 때다. 政府와 政治權은 改憲 論議를 卽刻 中斷하라!

 

 4. 굳건한 韓美同盟을 促求한다!

美國과 韓國은 血盟이다., 美國의 犧牲이 없었다면 只今의 大韓民國은 없다.自由와 眞理를 向한 美國의 犧牲은 高貴하고 헛되지 않았다.韓美同盟을 毁損(훼손)하는 文 政權에 對해 많은 國民들이 憤怒한다. 美國은 韓半島의 自由統一과 北韓 解放을 支持하는 大韓民國의 國民들과 協力을 持續해야 한다. 韓美同盟의 弱化는 美國에도 큰 損失이 될 것이다.

 

特히, 韓美同盟을 弱化시키는 韓美間 進步陣營의 잘못된 連帶가 深刻하게 憂慮된다.美國의 進步陣營은 ‘進步’라는 價値 아래 韓國의 進步陣營과 協力한다.그러나, 韓國의 所謂 進步勢力은 北韓을 追從하고 北韓의 慘酷(참혹)한 人權現實은 外面하면서 美國을 憎惡(증오)하는 者들이 主導하고 있음을 明白히 알아야 한다.

 

이들은 韓國 內에서 反美感情을 刺戟(자극)하며 韓美同盟을 弱化시켜 왔고 美國의 進步陣營을 利用해 美國의 言論과 政界에도 影響을 미치고 있다.美國은 美國을 否定하는 勢力을 돕지 말라! 또한 ‘民族通信’과 같이 미국내에서 北韓을 追從하고 支持하는 勢力에 對해 嚴斷하라!

 

 5. 이제는 北韓을 解放할 때다!

北韓을 解放하라!  韓國戰爭은 韓半島의 半쪽과 韓民族의 折半을 共産主義라는 거짓에 넘겨주고, 地上 最惡의 奴國家를 許諾한 半쪽의 勝利였다.

 

이 半쪽의 勝利가 이제는 北核을 通해 全世界를 威脅하고 있다. 이제는 北韓 땅에도 自由와 眞理를 宣布하고,主體思想에 洗腦되어 1人을 爲한 奴國家로 轉落한 北韓의 住民들을 解放할 때이다. 이것이 國際社會에 對한 人類史의 要請이고, 自由와 眞理의 외침이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이정훈교수의
종교개혁 2강 입니다.

저항할수 없는 은혜,,,,,

대한민국 교회가 깨어나기를

https://youtu.be/t8OnIl1zqkI

‘굿파이트미니스트리’(GoodFightMinistries)의 조 쉬멜(Joe Schimmel) 목사는 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에 ‘교황과 지옥’(Pope and Hell)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칼럼에서 그는 “지옥은 없으며, 악한 영혼은 사후에 사라진다”고 한 것으로 알려진 교황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영원한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강조했다. 다음은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노력해보면 쉽다. 우리 아래에 지옥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우리 위에 오직 하늘만 있다고” (존 레논의 ‘이매진’ 가사 中)



연예인들이나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같은 컬트인들이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일하게 비성경적인 부인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지난 3월 28일, 라레푸블리카의 유지니오 스칼파리 기자와 인터뷰를 가진 교황은 “지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악한 영은 죽음 이후에 단순히 소멸될 뿐”이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많은 가톨릭교회가 이같은 교황의 주장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역사적인 가르침과 반대된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보수 논객으로 유명한 팻 부캐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만약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러한 말을 했다면 이단일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스칼파리 기자가 교황과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강조하면서, 교황이 지옥을 부인했다는 것은 그분의 발언을 성실하게 글로 옮기지 않은 것이라며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지옥이 존재하는가? 지옥은 영원한가? 악한 영혼은 죽음 이후 사라지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붙들어야 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단순히 사라진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한다고 말씀하셨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면, 지옥이 영원한 심판의 장소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계시록 19장에서 환란의 기간을 지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숭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계 19:19~21)


열방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염소로 표현되는 악한 자는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게 된다. 동시에 그리스어로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의로움을 위한 삶의 지속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또한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지속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심판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마음이 움직여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는 잠재적인 수 백만의 영혼들이, 지금 아무런 우려할 게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가? 배역한 세상을 향해 “너희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많이 짓든지 교도소에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도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비양심적인 일이 되겠는가?


하물며 구원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악한 영혼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하지 않고 “이를 갈면서 우는 곳, 바깥 어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벌레도 절대 죽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더 악한 일이 되겠는가?


예수님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3)말씀하셨다. 우리가 모두가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구주로 신뢰하길 바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서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16~21, 36)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1127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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