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왜 서로 사랑하였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예수님께서 완벽하셨듯이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은 온전한데
복음 자체는 순전(純全)한데
복음이 전파되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혼잡하게(corrupt)하여
변경시켰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For we are not as many, which corrupt the word of God:
but as of sincerity, but as of God,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고린도 후서 2:17]
그가 전한 복음은 불순물이 없는 순전함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였다.

우리가 믿음이라 믿는 고정관념과 전통에는
우리를 성장케 하여 순종하고 우리의 힘이 되었던 헌신의 실체인 ‘믿음’은
믿음이라 믿고 우기던 믿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혼잡케 한
불순물이 있었다.
시대마다 굴절된 신학으로 사상으로 포장된 믿음이 있었고
시대마다 변절된 신앙의 공동체라는 교권을 추구하는 교회가 있었으며
시대마다 신앙을 의식(儀式)화 한 종교가 된 의식이 있었기에
이를 보지 못하면 영적인 장님이 되어 분별력을 잃어버리기에
흔히 말하는 영안의 눈을 뜨려면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고 성령님께서 인도하기를 간청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슴에 도장을 새기듯이 그 사랑으로 인치고
하나님 앞에서 서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하고 실천하는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thou mine eyes, that I may behold wondrous things out of
thy law  시편 119:18]

누구든 복음을 소식을 듣기 전 까지 맹인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더 묵상할수록 눈이 밝아지기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씻으라” 
씻고 밝은 눈이 된 맹인처럼 
불안과 어려움 더하여 절망하는 어두운 시간에 머물더라도 잠시인 것을,
그로 인하여 연단되어 소망을 알게 되고 현실의 소망이 됨을
눈이 밝아지면 보인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기전 하신 말씀처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As long as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요한복음 9:5]
빛으로 오셔서 빛을 보여 주시고 빛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다면
빛이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Ye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that is set on an hill cannot be hid. 마태복음 5:14]
빛의 자녀가 되면
자기 자신의 교만과 자랑의 수치가 밝게 보여서
자신의 믿음의 불순물을 떨쳐버리고
더하여 세상을 분별하여 바라볼 수 있어
세상이 보이는 만큼 분별력이 생기면
세상의 음모론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더하여 고국의 교회와 이민 교회를 바라보면
믿음으로 성(城)을 쌓았던 성은, 굳고 단단하여 견고(堅固)하게 보이였던
성은 무너지고 황폐하여진 모습이 보이면
예레미야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급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예레미야 애가 2:11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3:49]
예레미야의 눈물
그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다면 당신은 아직 눈을 덜 씻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그 물음에 오늘도 여전 하시며
그 대답을 오늘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말씀의 시작은 ‘청함’ 이었고 청함의 선포는 ‘천국’의 선포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을
종말에 이룰 ‘종말론’ 만으로
해석하는 신학자와 선생들이 교회사의 시대마다 수 없이 많았고
지금도 셀 수 없이 수없이 많지만 옳게 보이는가.
이 세상은 단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대 인가?
이 세상과 천국은 인간의 시간의 개념으로는 분명히 분리되었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분리가 아닌 사건일 뿐이며
영원하시고 영원하실 하나님은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시길 위하여 태초에 계획하셨다.
그러기에 창세기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a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가 되게, an holy nation”
거룩한 백성이 되어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그래서 “주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거룩한 뜻이
땅위에 이루어지고 이루려는 공동체가 천국의 모형이라서
순전하고 온전한 나라가 올 때 까지
거룩한 백성이 되게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시기에,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미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자녀이며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대가 아니며
죽음마저도 이 세상 생과 분리가 아니라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 가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연속적인 우리의 사건이며 연속된 영원의 개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Our friend Lazarus sleepeth; but I go,
that I may awake him out of sleep.  요한복음 11:11]
같이 영원히 함께 할  ‘우리 친구’ 라 하셨으며
죽음을 ‘잠들었도다.’ 하셨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라 했다.
복음은 놀라운 것을 보게 하는 힘이며 능력이라서
성령님과 함께 하는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며
권능(power of charity)이라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마음의 중심에 간직하였는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가슴에 박혔는지
그 분량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의 분량만큼이, 믿음의 분량이고
그 분량만큼,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 분량만큼, 보이고, 분별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기에
그 분량만큼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마태복음 11:12]
침노(侵擄)는 개인과 개인의 침노를 의미하지 아니하며
다른 나라를 불법적인 힘을 사용하여 쳐들어간다는 뜻으로
전쟁이라 할 수 있으며 세상을 향한 놀라운 의미로 혁명(revolution)이라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고 권능이며
성령님께서 주시는 공동체의 동력(動力)이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놀라운 소식인 복음을 전해주었고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For if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them also which sleep in Jesus will God bring with him.
데살로니가 전서 4:14]
이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power of charity)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보았으며
하나님 나라, 천국의 모형을 데살로니가에 세웠으며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서로 사랑하여
주위에 소문이 나서 데살로니가와 주위까지 천국의 침노를 당하게 하였기에
세상을 바꾸는 힘과 능력의 복음을 간직한 성도들 이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데살로니가에서 이룬 천국의 모형이었다.

28.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다시 바라보면
히브리인들의 시간의 개념은
성경에서 시간의 개념은
‘사건’으로 한 사건, 사건이 시간의 개념임으로
시간을 사건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성경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개인의 한 사건에 대해서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헤아림의 분별로 바라보면
초급함을 초월하고 더 하여 그리스도인의 본분(本分)을 자각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의 도리로서 슬픔과 고통에서 평안을 주시며 감사의 충만으로
새롭게 힘을 얻고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면 공평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
불공평한 세상이 공평하게 보이고 공정한 마음이 됨은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함께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이, 복음을 받아드린 자의 삶이 신앙의 길이며
그 길이 소망의 길이라 참된 소망은 인내로 연단된 소망이라
자신을 연단하고 범사에 경건을 잃지 않는 자로 평강의 열매를 맺는 자의
‘사건’ 이 복음의 사건이며 이 사건은 이미 창세기에서 시작된 사건이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첫날의 사건은 빛과 어둠을 이라 부르신 사건에 이어
인간의 삶인 땅에 보시기에 좋은 환경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심히 좋아하셨다.
특히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고 그 날에 안식을 하시는
사건이 있었기에 그 후에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그 안식일을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사건이 있었으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2:8]
그 후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7-28]
이 말씀은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걸어가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을 탓하기에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씀이라
율법의 의를 잃어버리고 종교화한 자신들이 만든 올무에 자신이 걸린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겉치레를 비판하시고 지적하시는 반면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으며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심을 밝히신다.
안식이 무엇인가.
이미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이 복되고 거룩함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만 누리는 안식이며
영원히 누릴 안식, 이 안식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셨으며
모세를 만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a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가 되게, an holy nation”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라 하신 말씀은 이다.
여기에 거룩한 백성 =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 = holy nation 이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은 같은 뜻이며
‘안식’ 은 ‘안식일’ 은,
영원한 안식을 향한 하늘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향하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셨을 때, 그 시간,
그 시간 개념의 사건,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신 사건
이 사건의 발로(發露)는 우리의 ‘안식’ 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며    
육신이 되시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거룩한 백성 =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 = holy nation을 보여주신 놀라운 사건이었고
그 사건의 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안식을 체험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을 ‘교회’ 라는 공동체에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그러한가?
안식, 천국,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는 개인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를 부르는
의미의 말이, 절대 절대로, 아니고, 아니며
공동체를 부르는 의미라
‘나’에서 ‘우리’ 로 발전하고 성장한 믿음의 참된 의미 라
각 개인이 하나의 몸의 지체로서 몸을 이루며
그 몸이 교회이며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 되지못하면
교회는,
교회는 지체인 생명을 외면하고 종교 조직화 하여
교회를 건물이라 하고
그 교회의 건물을 성전이라 하면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종교화된 바리새인들의 공동체일 뿐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교회인가?
교회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뾰족한 지붕 그 위의 십자가 그리고 엄숙한 건물과 십자가?
그것은 건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생명인가 조직인가?
왜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되었고
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는가?
이 시대의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 수 없는가?
그 물음과 답은
믿음의 분량만큼의 물음이며 답이다.

시대마다 시대의 흐름의 경향이 사상과 의식이 되었고 이를 쉽게 따르는 버릇과
관습(慣習)으로 전통화 된 믿음은 종교화 하였고
종교화된 굳은 마음의 사상은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시대를 분별할 줄 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의 불순물이 된
시대의 사상을 되짚어 보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아직도 영향에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신앙의 역사를 조명하여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고자는 의도로
글이 다시 시작된다.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상고(相考)하면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That ye put off concerning the former conversation the old man,
which is corrupt according to the deceitful lusts;
And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And that ye put on the new man, which after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에베소서 4:22-24]


...put on the new man,
which after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사
그 사랑으로 오신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절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랑의 사건이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우리 주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의와 진리가 되어
일상이 되고 매일 매일이 새로운 신앙의 사건이 되어
...put on the new man,
낮아진 그리스도 우리 주님 때문에 평안하시고 그 평안을 끼치는 나날이 되기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원하나이다.

27.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앞으로 이어질 복음의 길은
하나님의 사랑, 부르심
그리고 놀라운 계획 ‘공동체’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으로 시간의 개념과 공동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
의 글이 될 것이며 우리가 알았고 알고 있다 우기는 복음의 실체,
그래서 만들어진 믿음의 공동체의 잘못된 전통과 성경의 해석으로
어그러진 복음의 길에서 성경의 복음의 길을 제시하고
아직도 복음의 길에서 자신이 깨어지는 아픔을 넘어 갈등과 괴로움이 있고
그 길을 보여주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불평하면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감사했고 기쁨이 넘쳤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에게 고난이 없다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종교인이며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아니라
믿음은 자기도취의 신념이거나 소신(所信)임을 단정하기에
이를 성경을 통하여 고백하고 주장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Then said one unto him,
Lord, are there few that be saved? And he said unto them,
Strive to enter in at the strait gate: for many, I say unto you,
will seek to enter in, and shall not be able.  누가복음 13:23-24]

교회가 무엇인가
성경은 교회를 무엇이라 하는가?
성경은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수많은 글들이 있고
수많은 선생들이 교회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지만
여기에서는 습관적이고 통상적이 아닌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에는 놀랍게도 많이 그리고 중복되게 복음의 길에서 현재의 삶이 신앙 인
성도의 길을 제시하였고 그때마다 공동체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성령님께서 ‘강림’ 하시어 신약의 믿음의 공동체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교회사에서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이를 이 땅에서 진정한 교회를 이루려는 노력과 시도는 많았으나 이를 알고 실천하려는
성령님의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이었음은,
교회사가 이를 증거하고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사조를 쫓아가는 나약하고 힘없어 복음의 동력을 잃고
종교화된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유명하고 학식이 많은 선생들의 설교와 책등을 듣고
읽어도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성경으로 확신하고 확정하는 자들은 많지 않아
성경을 인용하여 ‘주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 ‘주의 몸 된 교회’ 라든지
수많은 교회의 모임과 형태를 묘사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이라기보다
교회가 만들어진 원인과 이유의 물음의 답이 될지언정 정체성을 설명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 무엇이 부족할까?
고민하고 더하여 몸부림치듯이 자신을 흔들고 간절히 알기를 원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었듯이, 성경보다 시류에 편승하고 영합한 의(義)와 멀어진
의(意)에 얽매인 종교에 세뇌된 콩깍지를 벗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나의 욕심의 죄와 의무에 매달리고 감성에 충실하였던 편협한 신앙의 사고방식이 변하여
성경에 눈을 뜨게 하시면 그리스도 주께서 남기신 발자취가 보이고
발자취에 나의 발을 맞추려는 신앙의 삶이
복음의 길임을 알게 된다.
전에 수 없이 의문을 갖고 있었기에 고민하여 진정 알기를 원하였던 적이 수없이 많았고
그 답을 수없이 찾았고 그 중의 하나의 예가
성령의 강림(Holy Ghost descended)에서 찾게 되었고
인도하심을 감사했던 기억을 떠오르며 글을 쓴다.

신약의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성령님께서 강림하시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Now when all the people were baptized, it came to pass,
that Jesus also being baptized, and praying, the heaven was opened
And the Holy Ghost descended in a bodily shape like a dove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which said, Thou art my beloved Son;
in thee I am well pleased. 누가복음 3:21-22]
성령님께서 강림하시었다.
the Holy Ghost descended.
예수님의 머리 위로.
그리고 하늘로 소리가 있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다.
누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가.
육신이 되시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성경에 더 있었는가?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 사건이 이 글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길로 가고자 몸부림치는 신앙인들에게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나의 간증이라 내가 바라보고 내가 겪고 내가 체험한 간증이라
나의 주장에 앞서,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확증하고 내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고귀하고 위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안에 계신지 확증하니
나의 은혜라
‘나를 사랑하신다’ 는 확신을 믿음으로,
확증을, 구약과 신약을 대조하여 성경 안에서 확증하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감사하였고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소망을 나누고 싶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강림(the LORD descended)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And mount Sinai was altogether on a smoke, because the LORD descended upon it
in fire: and the smoke thereof ascended as the smoke of a furnace, and the whole
mount quaked greatly.
And when the voice of the trumpet sounded long, and waxed louder and louder,
Moses spake, and God answered him by a voice.
출애굽기 19:18-19]
하나님께서 왜 강림하셨을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And ye shall be unto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n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which thou shalt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19:6]
거룩한 백성이 되게, a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가 되게, an holy nation
거룩한 하나의 나라가 되게,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시게 하셨다.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이스라엘 자손을, children of Israel,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자녀 삼으시고 천국의 자녀가 되길 원하셔서, a kingdom of priests,
그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an holy nation, 되길 원하셔서
강림하셔서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강림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듯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기 까지 한 사랑 ‘charity’
그 사랑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우리를 ‘내 사랑하는 아들’ 이 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시는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그 능력으로 받는
권능(power of charity)으로 예수님의 사랑 ‘charity’ 을 간직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 이며 신앙인의 모임이 교회라면,
소망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이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성령님과 함께한 모임이 되고
이 모임은 세상에서 바라보는 ‘사건’ 이 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때, 그 시간이, 오늘로 연결된 시간의 개념의 사건이 되어
오늘 이 자리, 이 순간이 영원이 된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속한 자녀가 된 것이다.

뒤돌아가
모세에게 강림하신 하나님,
그때는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땅을 떠나,
시내 광야에서 장막을 시내 산 앞에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성령님께서 강림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때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백성들이 세례를 받았다.

구약과 신약의 공통된 점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자손과 백성이라는 개인이 아닌 신앙의 공동체 이었다.
이 말은 개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이루지만
개인을 이끄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개인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신앙의 공동체를 구성하여
각 지체로서의 역할의 신앙이 성숙한 신앙이듯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셨기에 이 땅의 공동체인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하늘나라의 시작이라 하늘나라의 모형이며
그 구성원은 포로 된 애굽을 떠난 자이며
세례를 받은 자라 이미 죄를 자복한 자이며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마태복음 3:6]
그런 자들의 믿음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시고 안식을 누릴 공동체의 시작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바리새인들은 때를 물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 하신 말씀은 ‘때’ 와 ‘사건’ 의 시간 개념, 때와 사건이 이루어지는,
그리고 이루어져가는 시간의 한 선상(線上)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그 나라의 ‘때’ 와 ‘사건’ 과 ‘시간’ 과 동일한 선상(線上)에서 말씀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잠을 잔다’ 는 표현으로 말씀하셨고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로 이어져 가는 사건일 뿐이며
그 ‘때’ 그 ‘사건’ 이 오늘이며 미래인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 사건을 알고 있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후서 2:16-17]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이 현실이 되어 데살로니가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26.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찰스 톰슨(Charles Thomson,1729-1824)은 낮선 이름 같으나
그러나 그가 미국 최초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LXX: Septuagint)을 영어로 번역한 톰슨 성경(The Thomson Version)의 저자라면
조금 아는데 도움이 될까 싶다.
그는 아일랜드 Gorteade에서 태어났고 1739년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
그의 아버지는 찰스와 형제들과 함께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으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바다에서 사망하자 무일푼의 소년은 홀로 되어
대장장이로 델라웨어의 뉴캐슬에서 자라나 펜실베이니아의 뉴런던에서 공부하였고
1750년에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에서 라틴어 교사가 되었다가
그 당시 프랑스와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쟁 동안 펜실베이니아 주
소유주인 아메리칸 인디언의 정책을 상담하여 이스턴 조약(1758)을 만들어
장관을 역임하고 영국의 식민지 사업자로 인한 전쟁을 비난했다.

*이스턴 조약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의 미시시피를 경제로 신민지 소유권을 서로 갖겠다는
다툼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여러 인디언 족속과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들을 프랑스의 지지 부족들로 삼았고 영국은 체로키 족으로 만 지지를 받았지만
1758년 체로키 족과 전쟁으로 관계가 깨지자 오하이오 지역의 부족이 프랑스와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키면 그 대가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에서 인디언의 땅의 소유를 인정하겠다는
펜실베이니아 행정부의 협상조약.

그는 반 독 점 파티의 리더니 벤자민 프랭클린과 동맹을 맺고 두 사람은
자유의 필라델피아의 아들(leader of Philadelphia's Sons of Liberty)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1765년 스탬프 법(Stamp Act)원리로 정치적으로 갈라졌다가
그는 독립선언서의 대리인으로 벤자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V)의
다른 서명자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후 대륙회의의 서기가 된 찰스 톰슨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다 서술을 포기하고
훗날 그는
“미래 세대에게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
내가 진실을 말하면 큰 죄를 짓게 된다.
온 세상이 우리의 애국자들과 영웅들을 찬양하게 하라” 말 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좋은 이야기 감이 되어
우리의 애국심을 고취하게 한다." 했다.
그는 애국자라 불리면서 더욱이 성경을 번역을 하고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거짓을 은폐하고 애국심을 부추기는 선동과 기만을
했다는 사실이며 애국이라는 시대의 이념(理念)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
반 신앙적인 행위였다.
그런 행위의 결과는 지난 역사에 수 없이 전쟁을 정당화 하였으며
영웅을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근대에 이루어진 ‘민주국가’라는 개념조차도
국가의 유지인 부의 경제논리와 위정자들의 통치적인 자기 욕망을
가톨릭과 개신교는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합리화 하였고
복음의 전파라는 명분(名分)으로 착취를 정당화한 식민지를 삼았으며
미지의 개척의 수단이 계몽이라는 미명으로 위정자들의 정권유지에 이바지하였고
실질적인 국가라는 현대의 개념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에 절정을 이룬
식민지 착취를 바탕으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죄악의 역사에서 이루어졌고
식민지를 개척이라는 정복자의 논리는 전쟁의 필요 불가결한 자원과 무역의 필요를
가증한 신앙으로 정당화 하였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그리고 미국은 인적 자원인 노예를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충당하는 인신매매의
이면(裏面)에는 선민사상이라는 삐뚤어진 신앙이 변절된 시대의 사상과 문화가
혼합된 시대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세계 1차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를 시기하였기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그 시대의 당연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의 믿음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信念)이 되고
그런 자들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옳은 양, 다수결이 옳은 양, 민주주의의 대의로
착각하면 그런 사회와 국가의 사상과 문화는 종교를 빌미로 정당성을 부여하면
종교가 신념(信念)이 된 환경과 조직의 형태를 이루면서
더 하여 신념으로 무장한 신앙은 이미 믿음도 아니고 자기도취이며
이를 관리나 통치의 수단이 되면 사탄의 하수인과 같은 짓임을
자신도 모르는 도취에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선민사상의 벽에 갇히면 성령님과 단절되어
자기 신념의 믿음이 정의가 된 인간의 역사와 교회사,
그리고 오늘날의 제도화한 체계적인 계급조직과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관료화된 모습은
복음을 가장한 신앙의 무늬만 남은 종교의 모습이라서
이미 복음의 근본을 떠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기에
개신교를 바라보는 반사회적인 인식과 현상을 자초하였고
이를 반기독교적인 당연한 세상적인 시류로 받아드리는 자들과
더 하여 온갖 음모론을 재생상하여 변명을 일삼는 자들이
복음을 막고 있는 현실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 결과라서 이미 복음은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끼리 모임인 교계와 같은 직분 자들만의 모임은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룰 수도 없고 모였다 헤어지고 흩어지는
이산 집단이라
이미 신앙 공동체의 모습도 아니다.

시대마다 정신적인 신앙인의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그 사상의 주류는
반동으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어 발전하고 어둠의 역사로 이어지고
그런 사회에서 이리 저리 수많은 부흥 운동과 프로그램을 따라서
감성을 자극하고 종교적인 신념을 주입한들
근본인 복음의 의를 잃고 세상의 이데올로기(ideology)에 갇혀서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기커녕 이기는 힘을 잃고 영향력을 잃어
자기 위안도 못되는 종교가 될 뿐이다.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받아드렸다는 사람들이 왜 그리 속 좁은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왜 그리도 편협한가.
간단한 진리를 다시보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음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서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 이시라서
세상을 사랑하시여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오셨음은
이스라엘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믿는 자 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모든 인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선민사상이나 이스라엘의 회복의 주장은
복음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한 하는
복음의 능력을 시인하는 것 같으나 부정하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잘못한 성경 해석을 하는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한
교회사의 오류와 요즘의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간단한 진리를 외면한 무지의 결과이다.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허물과 잘못은
우선, 하나님께 잘못이고
그리고 상대에게 잘못이며
그래서 내 잘못이라는 시인(是認)이 믿음의 근본적인 신앙이라 생활이며
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消滅)시킨 자라
성경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Quench not the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5:19]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가슴에 꺼져가는 빛처럼 소멸하지 말고, 억제하지 말고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이끄시는 힘을
자신의 그 무엇으로도, 어떠한 변명이 라더라도 자신으로
성령님의 뜻이 자신의 가슴에 일어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억제하지 말고
소멸하지 말아 자신의 주장이 악이 되지 않게 어떠한 악의 모양도 버리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Prove all things ; hold fast that which is good.
Abstain from all appearance of evil. 데살로니가 전서 5:21-22]
모든 일에 자신을 바라보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인지 증명하고 확신하여 ‘Prove all things’
성령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며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의 확신과 신념이든
그 동기(動機)와 원인을 버려서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하지 않게
악의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기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며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Now we exhort you, brethren, warn then that are unruly,
comfort the feebleminded, support the weak, be patient toward all men.
See that none render evil for evil unto any man; but ever follow that
which is good, both among yourselves, and to all men. 14-15]

게으른 자들을 복음으로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복음의 소식으로 격려하여
힘이 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붙잡아 주며
악을 악으로 갚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지 말며
모두에게 오래 참으며 선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이는 삶의 생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본을 보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고
이를 실천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 시대 우리에게 본을 보인
신앙생활의 모습이었다.

2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세일럼(Salem)은
그곳에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미국 침례교의 창시자는 누구라 할 수 없지만 창시자와 같은 사람으로
그를 알게 되면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인 인 개신교의 뿌리를
알 수 있고 그 사회배경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였던 막연한 청교도에 대한 동경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윗세대로 청교도의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숭미하고 한국의,
한국적인 신앙을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통하고 전해 받은 복음을 여과(濾過)하여
호도(糊塗)된 복음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한국적인 신앙적인
순수를 지키려는 신앙인은 소수였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율법주의와 세대주의에 함몰된 교계의 지도자들과 그 이후 메가 처치에 열광하면서
그 원동력을 헌금의 강요와 기복신앙의 복(축복)
그리고 치우친 은사주의의 신기루 같은 현상으로 동력을 삼은 자들과
음모론으로 세상의 현상을 재단하고 신념으로 삼은 자들이 자칭 현대판 선지자가 되어
믿음의 분별을 더 가리고 결국은 수치를 잃어 무너져갔던,
무너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실상과 이민교회들을 바라보면서
작은 눈으로 보고 느낀 사실을 조금씩 쓰려 한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순수한 믿음과 신앙의 열정을 겸비한
젊은이로 영국 성공회 사제이었으며 종교의 자유,
정확히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교분리의 사상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기초가 되었으며 자신의 신앙의 자유의 신념 때문에
청교도 공동체에서 추방 되었고 아메리카 토착민인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가족과 프로비던스(Providence)로 이주 할 수 있었고
인디언들의 인권을 대변하여 성공회와 결탁한 영국 정부와 이들의 허가를 받아 개척한
식민지 정부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항의 하였던, 하나님 안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공평하다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라는
작은 미국 주와 프로비던스가 생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로저 윌리암스 공원(Roger Williams Park)은 유명하며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이 있다.
그는 1631년 보스톤 교회의 목사로 초빙되었으나 보스톤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
관계를 이유로 목사 취임을 거부하고 영국 국교와 분리된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
세운 프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선택했고
2년 후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고 세일럼교회의 목사가 된
윌리암스는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자들을 향해
가톨릭의 잔재가 만연한 영국 국교회와 완전히 절연 하고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며 비판했고 그 후 1635년 보스톤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암스의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서 추방을 요구하였고 마침 보스톤 식민지와 인근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을 하고 있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의 조건으로
윌리암스 추방 요구를 수용하였고
보스톤 청교도 지도자들이 그를 체포하여 런던으로 압송할 것을 알게 된 윌리암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 인디언 부족에 의탁해 지내다
1636년 그와 같은 신앙의 정착민들과 남쪽으로 내려가
그곳을 프로비던스 로 식민지의 이름을 지었으며
그 뜻은 그들을 그곳에 부른 하나님의 계획이라 ‘하나님의 섭리의 땅’ 이라는 뜻이며
로드 아릴랜드 주가 만들어 지는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들 공동체의 사상은 공평과 평등이었다.
그 후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영국의 식민지화 된 청교도의 정치적인 지배를 반대하였고
인디언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강탈을 비난하고 인디언의 땅을 구입하여 정착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그 후 영국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로의 간섭을 반대하였고
청교도의 정교일치를 반대하였던 앤 허치슨(Anne Hutchinson)과 그의 추종자들이
프로비던스로 찾아 왔다.

1638년 매사추세츠에 해안에 식민지가 개척된 후 10년 만에
종교적인 박해와 탄압을 피하여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존 클라크(John Clark)목사와 함께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은 로드 아일랜드에식민지를
개척하기로 하고 1651년쯤에 클라크 목사와 같이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정부의 합법적인 승인을 받고자 했으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정권에 의해
기각되었고 다시 탄원을 계속하다 크롬웰이 실각하고 찰스2세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탄원을 하여 1663년에 합법적인 인가를 받아
합법적인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앙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는 ‘종교의 자유’가 식민지 헌법으로선언되었고
이 헌법은 미국의 다른 주에 주목을 받게 되어 버지니아에서 제한적이나마
침례교 목사의 설교가 허락되었고 버지니아가 로드 아일랜드에 이어
두 번째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에서 국교로 삼을 수 있었지만
믿음을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또 교회사에서 정교일치의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 된다
보았기 때문이다.
초기 미합중국의회에서 국교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종교의 자유를 선언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열띤 논쟁이 있었고 몇 개의 법안이 제출되었고
당연히  영국성공회와 회중교회가 추천되었고
유명한 웅변가 패트릭 헨리가 타협안을 제출하여 영국성공회와 회중교회,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의 4개의 교파를 국교로 허용하자는 안에 모두 동의 하였으니
침례교인들은 이 안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정교일치가 교회사를 통해 타락상을 보였고 특히 성경의 뜻에 위배된다 하여 반대하여
투표를 하기로 하였고
3번의 투표에 통과하여야만 법이 가결되기에 1차 투표에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고
2차 투표도 패트릭 헨리의 능란한 웅변에 설득되어 가결되었고
3차 투표에 앞서 패트릭 헨리가 버지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의회를 떠남으로
3차 투표에 부결되었고 국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개신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정교일치를 피하여
가톨릭과 영국의 성공회 같은 부패를 면할 수 있게 되어 진정한 청교도 정신이
건국의 이념이 되는 초석이 되어 독립국가의 헌법이 되는 길을열어놓은
윌리암스의 신앙의 힘이 컸다.

마찬 가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힘
그 힘이 믿음이었으며 그 믿음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자녀를 삼으신 사랑,
그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 까지 한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 ‘charity’
그리고 이를 증명하시는 성령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에 적용하여 환경과 조건과 현상을 초월하여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는 현재(現在), 이 시간, 이 순간이
영원한 소망의 나라에 연결된 현실이라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이라서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갖는 사랑이라서
사랑의 충만이 성령 충만 이라서
그 사랑은 예수님을 닮은 ‘charity’ 의 사랑이라서
그 사랑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평안을 주시는 성령님의 사랑이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낮아지고 그 만큼 형제자매를 사랑하기에
그 만큼이 믿음의 분량이라서
현실의 불공평과 불만과 피해의식, 그 무엇이 눈가림이라도
빛의 자녀로 빛이 되어 굴절(屈折)하지 않는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공평과 평등 공정과 정의의 빛이 되어
바라보고 이루려는 하나님의 의
공의의 복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갖는 힘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힘, 그 힘이 사랑 이였기에
바울의 이름을 딴, 실라와 디모데의 이름을 딴 교회의 이름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의 이름
데살로니가 교회라 불렀기에
교파도 없고 교권도 없는 모두가 형제자매인 믿음의 공동체,
단지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데살로니가 교회라 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로마서 3:22]

2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신앙이 무엇인가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의 생활로
믿는 자의 근본인 믿음이 가치관이 되어 인생관 과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세계관이 되어 복음의 의가 생활의 기준이 되면
감사와 기쁨의 원천이 신앙인의 힘임을 성령님께서 알게 하시고 인도하시기에
이 땅에서 불의와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의를
행하기에 자연히 세상의 정신적인 문화인 정직과 공평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가 세워지고 사회와 국민의 정신문화의 바탕이 되는 복음의 의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전통이 이어갈 수 있고, 있었을 텐데
그 기지(基地)가 되는 교회와 공동체가 복음의 공동체라는 공동체(共同體)의식이
깃들기 전에 이미 의미를 잃은
이제는 공동체라 부르기에 턱없고 껍데기만 남아서 소리만 시끄러운
빈 수레처럼 알맹이가 없는 겉모양의 종교의식화 된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는  
거의가 성경의 공동체라 하기에 거리가 먼 공동체의 본질이 파산이 난지 오래
되었기에 이제 많은 교회들은 사라지며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이 짧은 시간에 부흥하고 짧은 시간에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수치를 망각한 자들이 허세를 부리는
말 뿐이고 종교적인 의식만 남은 종교인들이 되어, 믿는 자들이 세대와 세대가 끊이어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진정한 신앙인은 남겨 놓겠으나
요란을 떨던 교회는 이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으니
한국교회의 죄로 인한 부패와 그 고리를 누가 끊겠는가.
후세에
교회사에서 한 장을 장식하다 사라지는 한국교회를 후세에 무어라 평가할까.
어떻게 이렇게 무너질 수 가 있나.
누룩처럼 번진 어그러진 복음의 길...
복음이 위안(慰安)도 못되는 진리로 둔갑한 직통계시와
체험 신앙으로 치우친 신유의 요란한 은사 제일주의
전통적인 유교에 파생된 계급 화 된 교회통치와 관리라는 미명(美名)의 신분의
분리로 분리 자들로 넘치고  지배의 수단이 된 무당적인 샤머니즘
복채(卜債)놓고 복(福) 받기 거래(去來)가 된 믿음  
무분별한 성공으로 변절된 부흥운동
목회자의 개인적인 순종으로 변절된 성경공부
감성적인 설교와 찬양으로 분위기에 흔들리는 믿음을 은혜라 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의(正義)가 사라진 복음...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변화 당한 세상적인 세속화된 공동체...
의무와 사명으로 허식(虛飾)화 된 열심과 헌신으로 전도, 선교를 외치지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공의)를 저버린 세속화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
동력을 잃어버렸고
빛의 자녀같이 못하여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여
빛이 없는 곳에 곰팡이가 퍼지듯 번진 복음의 어그러진 수많은 현상들
그 원인의 하나는
무조건적으로 분별없이 미국의 부흥운동과 사조를 받아드려서 신앙의 순결과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원인은
미국의 교회사를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다.

먼저 이 짧은 글은 충분한 원인 규명의 글이 못되겠으나
지난 교회사를 짧게나마 잠깐 잠깐 제시하여 복음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무조건 적인 청교도 찬양을 일삼았던 우리의 윗세대
그리고 오늘날 그런 영향을 받아 숭미 주의 적인  엉터리 청교도 예찬에서 깨어나
지난 미국의 교회사에서 본받을 신앙과 배척할 정교일치의 역사를 알고
메가 처치(대형교회)의 탄생의 배경을 잠시 언급하여
요컨대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의 원인을 나름 제시하고자 한다.

미국 교회 역사의 시작은
변절된 청교도와 대륙의 개척이라는 잘못된 개척 정신(the frontier spirit)과
진정한 청교도 정신을 이어갈려는 세력의 갈등을 넘어
정교일치를 이른 기득권 세력의 핍박과 박해의 역사로 시작되지만
아메리칸 인디언의 파멸(破滅)은
또 하나의 기독교 역사의 수치가 된다.
물론 처음부터 잘못된 동기인 금을 찾아 대륙 발견을 한 콜럼버스의 욕망이 부른
비극이지만 아직도 그의 대륙 발견을 기념하여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가
국경일이 되어 퍼레이드를 하고 학교는 공휴일이 된 미국의 학교를 바라보면서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과 가진 자의 편인지 회의(懷疑)가 들고
분별없는 청교도 예찬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답답함을 넘어 역사의식을 잃은 자들의 괴변이,
왜 믿음을 외치면서 분별력도 없는 믿음을 믿음이라 하고
역사의식이 실종된 복음은 단지 전하는 소식에 머무르고
복음,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 복음의 의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의, 뜻, 공의가 사라진 복음은 어그러진 길이다.

미국 교회의 역사는
1607년 제임스타운 거주민들과 1620년 필그림스(Pilgrims)로 알려진
거주민 이외 집단으로 이민 온 단체는 회중교회(Congregation Church) 교인 인퓨리탄(Puritan)과 장로교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들의 종교법을 제정하여
자신들이 유럽에서 핍박을 피해 신대륙에 이주 하였음에도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에서
기득권세력이 되어 정교일치를 이루었으며 다른 교파나 종교를 핍박하는 가해자가 되었고
재 침례파(세례파)는 가장 큰 피해자 이었다.

세일럼(Salem)은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뜻하며 그 명칭에 반하여 미국 판 마녀재판이 벌어졌던 곳으로
수십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악명 높은 곳이며
작가 너새니 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은 자신의 조상이 마녀사냥의 가해자 인 재판관을 하였기에 역사의 죄를 속죄하듯이 박해를 받아온 약자의 삶을 소설로 쓴 ‘주홍 글씨’를 1850년에 쓴 곳이 세일럼이었고
그 글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 수치의 역사는 미국 국가와 청교도라는
기독교 뿌리를 흔들어 놓은 곳이며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영국에 까지 알려져 보 스 톤 인근 케이 앤은
작은 정착촌을 이루다 보 스 톤이 되었고 이 도시와 경쟁으로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으로 아시아,
인도 등 까지 배를 보내며 부유하게 된 무역상들이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이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 뉴스(Newport News)까지 일어나 한 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유명하였고
1812년 미, 영 독립전쟁으로 상권을 보 스 톤과 뉴욕에 빼앗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작가 너새니 얼 호손은1804년 7월 매사추세츠 세일럼의 청교도 집안에서 선장인 아버지
너새니 얼 호손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메닝 사이에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 뉴잉글랜드 지방은
청교도의 전통이 세워진 곳으로 청교도 전통은
그의 가정의 배경과 함께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고조부인 존이 세일럼의 마녀사냥 때인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들이 일부
주민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거나 고문으로
죽인 사건 때 가혹한 재판관 노릇을 한 것은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생활에 감추어진 내부의식에
인간 내면의 윤리적 관점에서 탁월한 상징적인 수법으로 분석하여
인간의 공통된 죄를 은폐하려는
사회의 위선과 편협을 증오했고 인간적인 만족과 쾌락을 거부하는 금욕적인 신앙과
종교의 위선과 사회의 거짓에 냉혹한 비판에 앞서 그 죄를 나누어지려 했기에
그 곳의 청교도적인 배경과 사상이랄 수도 없는 맹목적인 정신적인
종교적 기질을 탐구하여 자신에게 이미 배여 있는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을 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처럼 마녀는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세일럼에 살고 있던 티투바(Tituba)라는 이름의 혹인 여자 노예와 친하게 지냈던
백인 소녀 몇 명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하는가 하면 개처럼 짖기도 했다.
곧 세일럼에 사는 다른 소녀들도 마법에 걸린 양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체가 계속 때리고 찔렀다고 증언했다.
어떤 때는 들리지도 않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목구멍이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세일럼일대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고 티투바, 세라 굿(Sarah Good),세라오본(Sarah Osborne)이
마녀로 기소됐다.
거의 히스테릭한 지역 분위기에서 특정인을 마녀로 지목하고 연쇄적으로 자백이 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단 마녀 꼬리표를 단 여자가 다른 여자를 마녀라고 지목하면 그 여자 역시 마녀 협의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마녀 폭풍이 세일럼을 넘어 뉴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번지자 총독이 마녀 문제를 다룰
특별재판소를 구성했고 부 총독이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일반 사건과는 성경이 판이해 형사 절차 및 증거 효력 검증의 상당 부분이 무시되거나
완화되었다.
대신 몸에 특별한 흔적이나 표시가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한편 지역 주민이 목격한
환영처럼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이 증거로 채택되었다.
데이비드 코닉(David Konig)을 비롯한 다수의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마녀로 지목되어 실제로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 대부분 그 지역에서 반항적이고
평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재판 과정에 협조적이고 평판이 좋았던 사람들은 마녀 판정을 받았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마녀로 지목된 부인을 변호하던 자일즈 코리(Giles Corey)라는 백인 남자도 마녀로 체포되었다.
그는 끝까지 마녀임을 부인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자백할 때까지 무거운
돌을 가슴 위에 올려놓는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총독 부인도 마녀로 지목되다
맨 처음 마녀로 지목된 흑인 노예 티 투 바는 부두교 신자였다.
부두교는 아프리카에서 카리부 해의 아이티로 팔려온 흑인들이 주로 믿던 종교로 북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를 통해 주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17세기 말 뉴잉글랜드에 카리브 해 출신 흑인 노예가 유입되면서 부두교도가 들어왔다.
철저한 청교도 정신으로 뭉친 뉴잉글랜드에서 부두교 같은 이단 종의 유입과 전파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였다.
게다가 부두교 신자들이 마약을 태우거나 흡입하면서(당시에는 마약이 불법이 아니었다)
환각 상태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주술적 행위를 일삼았다는 점에서,
백인 소녀들이 티투바와 함께 환각제를 복용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헛것이
보였을 수 있다.
미국의 마녀사냥 역시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탓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인 이주민에게 미국은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들어와 힘들게 개척한
터전이 아니던가.
부두교 같은 이질적 요소가 청교도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녀사냥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가치를 더욱 강화하고 유대의 끈을 조이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한 마녀로 지목되어 처형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여자였고, 특히 행실이나 평판이
좋지 않는 이들 이었다는 점을 보아도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녀사냥을 통해 남성 우월주의를 강화하고 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마녀사냥이 마무리된 것은 초기 마녀로 지목된
소녀 중 한 명이 급기야 총독 부인을 마녀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자칫 더 이상 끌다가는 부메랑 효과로 자신들이 당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서둘러
마녀재판을 끝내게 한 동기로 작용했다.
특히 범죄를 일시적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데는 정치적 목적과 이유가 있다.

쿠데타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경우 조직폭력배 일제 단속을 벌여 강력하게
처벌하곤 한다.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누구도 변호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마녀사냥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범죄에 대한 대응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어떤 방식을 취하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는 점은 똑같다.  
-Crime Effect 크라임 이펙트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범죄들 중 에서 -

성경을 읽을 때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고
이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 과 ‘공정’ ‘평등’ 등 이런 정의가 포함된
공의의 하나님의 사랑을 안 수많은 믿음의 앞 세대의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의에 녹아있는 복음의 의, 공평과 평등
그리고 공정 이를 알지 못한다면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벽을 쌓아 하나님의 사랑에 선을 긋는
분리주의자들이 되어 자신이 만든 벽에 갇혀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가고 있으면서 열심과 열정이라는 헌신으로 포장한 종교적인 사상인 의식으로
무장하여 자신과 다른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몇 구절로 선을 긋고 자신의 신념의 신학에 함몰된 자들...
그런 신앙의 길을 보여주며 위험을 경고한 분을 알고 있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
영국 국교를 버리고 영국의 식민지인 보스톤에서
신앙의 자유를 외치면서 청교도인 이라면서 기득권자가 된 신앙의  변절된 자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고 참 된 신앙을 외치며 아메리칸 인디언을 존중했던
그 당시 소수의 신앙인인 로저 윌리엄스 목사는 침례교를 창시하지 않았지만
창시자로 불러지는 진정한 청교도인 로저 윌리엄스
다음 글에 이어진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So being affectionately desirous of you,
we were willing to have imparted unto you,
not the gospel of God only, but also our own souls,
because ye were dear unto us.  데살로니가 전서 2:8]
우리가 간절히 너희를 사모함은
간절한 원하여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됨이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이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영혼과 육체의 목숨까지도
너희를 사랑하여 내 놓을 만큼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서로 사랑함으로 얻는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으로 말미암은 사랑,
그 사랑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서로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성도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기에
‘affectionately’ 로 표현했고
KJV 에는 이곳에 단 한번만 나오는 특이한 단어로
개정개혁은 ‘사모’ 라 표현하였지만 의미는 ‘깊고 깊은 사랑’을 뜻한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대답은 11절에 찾을 수 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As ye know how we exhorted and comforted and charged every one of you,
as a father doth his children,]
너희가 아는 것처럼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대하듯이
어떻게 너희를 위로 하고 용기를 북돋고 힘을 주고 평안을 주기위하여
너희 모두에게 그리 하니.

‘affectionately’ 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과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영생을 있게 하신, 영생을 보여주신 소망의 사랑과
이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를 증명하실 뿐 만 아니라 이제부터 영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함이 되었고
그 사랑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랑하는 자 들이 되었고
이를 받아드린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서로 사랑함으로 바울과 그의 동역 자 들과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늘나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다가올 하늘나라의 모형인 교회가 세워졌다.

그래서 교회란
천국, 하늘나라의 모형이고
사랑이란
그리스도 시며 주 이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Jesus said unto him,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This is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unto it,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마태복음 22:37-40]
마음을 다하고 영혼의 힘을 다하여
목숨 같이
끝임 없이 고동(鼓動)치는 심장과 같이,
심장에 성령님께서 인치 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그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을 닮아서
그 사랑을 가슴에 인 침 받은,
도장을 새기듯 가슴에 각인(刻印)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둘째도 그와 같으니
And the second is like unto it,
둘째도 같은 계명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똑 같은 계명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 사랑을 증명하시며 힘주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똑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며
똑 같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현대의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가?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한 다면 이것이 배도의 길이고
지키려는 노력이 신앙생활이고
지키려는 모양을 경건이라 한다.
그러나 지키려는 노력과 모양도 없으면
그런 종교인들에게 돌아서라는 말씀이라
계명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한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Who by him do believe in God, that raised him up from the dead,
and gave him glory; that your faith and hope might be in God.
Seeing ye have purified your souls in obeying the truth through the Spirit unto unfeigned love of the brethren, see that ye love one another with a pure heart fervently:
베드로 전서 1:21-22]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서를 읽을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그려보곤 했다.
그들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눈에 선해 마치 화판에 수채화를 그리듯
그들의 심정과 그들의 삶의 모습과 그 도시의 환경을 마음에 그려 보던
가을날 늦은 오후 부엌 창가에 서성거리다 바라본 저녁 하늘
뭉게구름 사이로 숨바꼭질 하는 태양과 그 사이로 비추는 햇살
따듯한 햇살과 고요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
떠다니는 구름처럼 몰려가는 바람처럼
마음의 끝자락 격동(激動)의 끝자락 이는 바람처럼
나는 무엇이 서러운 듯이 서성이었다.

지난 젊은 날들은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처럼 꿈처럼
나날이 꿈이었던 그리스도의 꿈을 꾸던 날들
그러다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흩어져 조각이 나
산산이 부셔진 나의 꿈

꿈이 원망이 된 날 또 배반을 했다.
내가 하나님께 배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배신으로 간주 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가슴의 밑바닥 더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
그 바닥에 앙금처럼 원망이 가라앉고
계절마다 꿈틀거리는 원망의 실재(實在)가 믿음이 되여
체념이 소망이 되여
번민이 기쁨인 것을
모든 것을 놓았을 때 자유라
이제, 이제는 머물고 싶어라.

석양이 물드는  
하늘은 어둠이 내리고
밤하늘은 별들이 하나 둘 이윽고 셀 수 없이 온 하늘에 별들이
가득히 보일 때 까지 하늘을 바라본 날은
또 무엇이 서러움처럼 가슴을 아리고 저리게 하는지
그것은 내가 믿고 있는 믿음과 신앙의 일치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현대의 교회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계명이 삶에서 멀어진, 멀어진 거리만큼 종교화된 괴리는
시대마다 변절되어 왔는데 그런데 어쩌라고.
무엇보다도 현실의 무기력한 자신과 세월의 마디마다 식어버린 열중을
어쩌라 하시는지
짜증이 나고 스스로 화가 나
원망의 앙금으로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내게 대들어
‘잠시라도 놔두십시오.’ 마음속에 고함이 일고
한계를 드러낸 바닥의 끝을 체념이라 하는가.

어쩌라고 자꾸 보여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글을 쓰라하시면
어쩌라고요!  

감당치 못 할 은총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수많은 날들을 부정하고 싶은 날
의(義) 로움이 외로움이 된 가당찮은 날
그날도 평안을 주셔서 아무도 없는 집에 나 홀로 하며
용서를 구했고 용서를 받았다 자백하다 독백하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가 떠올라
그날들의 변절을 끄집어 놓고 눈물로 글을 썼었다.
오래전에.


하늘,
뭉게구름 둥실 둥실
떠다니는 구름처럼 꿈처럼
자유로이 떠돌고 싶었던 날들은
나날이 꿈이었지.

비바람 부는 언덕위에서
눈보라 몰아치는 산위에서
꿈을 꾸었지.

나의 꿈이 너를 울리는 꿈이 아니라
내가
네가 어울려
만들어가는 세상다운 꿈
그런 꿈은
고통(苦痛)의 시간과 함께 하는 줄
철이 들어서야 알았지.

그 꿈이 사랑인 것을
중년이 돼서야 알았지
꿈의 실상을 보았지.

사랑이 진리인 것을
진리가 사랑인 것은
어둡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서
괴로움과 절망이란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나서
깨닫기 시작했지.

진리는 사랑을 동반하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한다는.


내 인생에 제일 영향을 준 사람은
사람이셨던 예수님 빼놓고 바울이었고 아직도 바울이고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사람이라 성령님의 사람이라
그를 존경하고 있고 그의 모습은 바울이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에게 한 말이 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니 않다 하니 고린도 후서 10:10]
이 구절로 바울이 몸이 약하고 말도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 단정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바울은 편지나 얼굴을 대하고 말하나 같다고 자신을 변호했고
그는 말은 힘이 있었고 더욱이 성령의 사람이라
얼마나 많고 깊은 말의 힘이 있었겠는가.
바울이 가장 많은 성경을 썼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령의 사람, 성령님과 함께 한 사람 바울,
그의 작별의 인사를 들어보면 가슴이 아프다 담대한 말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 이였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으로 지켰으니    
For I am now ready to be offered,
and the time of my departure is at hand,    
I have fought a good fight, I have finished my course,
I have kept the faith:  디모데후서 4:6-7]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전제(붓는 제사, drink offering)의 비유로 발효된 포도주를 희생제물 위에
또는 하나님 앞에 붓는 제사로, 예수님의 피를 포도주에 비유하였기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바울이 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다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피(포도주)를 머리에 붓은,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언약을,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자신에게 부은 전제를
비유로 했을 것이리라,
For I am now ready to be offered.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and the time of my departure is at hand.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길을 마칠 때 까지 믿음을 지켰다 했다.
믿음의 자식이며 동역자이며 친구인 디모데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전해지는 문헌에 의하면
네로는 바울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정죄하는 사형선고를 하여
로마시민은 고문 형으로 할 수 없기에 참수형으로 선고 받고 죽으며
두려움과 불안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소망으로 하늘을 바라보아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았다 전해진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리스도인 이라
성령님의 사람이라
그의 힘은 인간 사울이 아니라
성령 충만 한 바울의 삶으로
옷이 찢어지고 매 맞고 굶주려 목숨을 잃을지언정
밤낮으로 수고와 애를 쓰고 일하며 복음을 전하였기에
그의 핍박에는 소망이 넘쳤고 그의 고통에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임했고
그는 고난에서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았기에
형제를 사랑하여 복음뿐만이 아니라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한 사랑은
서로 사랑하여 얻는 힘,
성령님과 함께한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전해 주었고
그리스도의 사랑 고귀하고 위대한 사랑 ‘charity’ 을 가슴에 간직한 참 제자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본을 보인 위대한 그리스도인 이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
그의 말이 내 가슴에 앙금으로 가라앉았다가
이따금 요동(搖動)을 치면 내 가슴은 전율(戰慄)을 하다 미어진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전제와 같이 내가 부어지고
전제와 같이..
전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2:9]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디모데, 실라를 데살로니가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그들의 수고와 함께한 성령의 역사로 세워졌고 그들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전도를 하기 전,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여
그들이 빌립보로 향하기 이전에 바울은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서
마게도냐(지금의 그리스)의 빌립보로 향하여 빌립보가 유럽 전도의 기지가 되었다.
그들이 빌립보에 이르러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성령님께서 루디아라의 마음을 열어
바울을 말을 따르게 하여 그 집에 머물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의 처소를 찾아 가다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큰 수익을 주는 여종의 주인은
수익이 끝이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관리에게 끌고 가 엄청난 소란을 피운 유대인으로
로마 사람들이 행하지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하여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깊은 옥에 발에 족쇄를 채워 갇히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였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의 터가 흔들리고
문이 다 열리여, 간수는 자다 깨어 옥문들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려 하나,
바울이 소리 질러 우리가 여기에 있다 하니 간수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고 세례를 주었다.
그 밤에 그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음식을 주었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뻐하였지만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도망을 치듯이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시작된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1-2]
그들이 마케도냐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서
항구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데살로니가라는 이름은 BC 315년 알렉산더 대왕 사후 헬라를 다스리던
카산더(Cassander, BC 338-297)가 인접한 도시들을 새로운 도시로 건설하고
그의 아내였던 데살로니가(Thessalonica 알렉산더대왕의 이복누이)
이름을 따서 붙였고 1430년 십자군에 의해 터키의 영토가 되었다 1913년
그리스의 영토가 되어 예전과 같이 아테네에 이어 그리스의 제2의 도시가 되었고
그 당시에는 다수의 유태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곳에 유태인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은 자기가 행하던 대로 세 안식일을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세워진 교회이기에 어느 신학자는 ‘세 안식일’을
여러 달 동안 머물며 세 번의 안식일에 말씀을 전했다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세 안식일’ 이라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주장하지만
어찌되었든 짧은 시간에 세워졌고
데살로니가 서신은 바울이 주 저자로 데살로니가를 떠나 고린도에서 보낸 편지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초신 자들이라서 떠난 후에 염려하고 궁금하여
디모데를 보냈고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지만
문제점도 있었기에 그들의 믿음에 감사하고 재림과 죽음의 문제 등을
설명하고 권고하려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 전서 5장과 후서 3장으로
총 8장의 짧은 서신으로 첫 신약 성경으로 쓰여 졌고
이 짧은 서신이 그리스도인의 교리가 되는 신학적인 요약된 글이라 읽을 때 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고 어떻게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한 서신이 성경이 되게
인도하셨는지 감탄하게 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늘 전도를 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지만 유대교를 배도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강론하였기에 유대인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잡았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복음을 받아 드리는 성과도 있었고
그러나 위급하여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급히 베뢰아로 보냈고 그들은 배척하는 유대인의 회당에 또 들어갔고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베뢰아에서 전하는
줄 알고 거기로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하기에
그 곳의 형제들이 바울을 바다까지 가게 보내고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머물게 되고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고 복음을 전하게 된다.

다시 보면 바울과 디모데 실라를 인도하시 성령님이시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며 핍박을 받을 때 마다 피할 길을 내시는 성령님은
바울 혼자 복음을 전하게 아니하시고 믿음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실라를
함께 일하게 하셨기에 그들의 교제와 복음의 전함에 권능을 주셨음은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 그 곳에, 그들 중에
예수님께서 그들 중간에 계신다 함은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권능을 주신다는 말씀이라
이것이 진정한 교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인 그곳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22]
그곳에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교를 배반한 그들에게
적대적인 유대인 회당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장소로 늘
이용하였고 그들이 핍박 중에도 평안을 누리며
핍박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알기에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복음 15:21]
그들을 긍휼이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 또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6]
그들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일에 쓰임을 받고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져서 세상의 가치관이 복음의 의인
하나님의 공의로 변화되기를 바라기에 특히 데살로니가서는 바울 개인이
아니라 디모데와 실라와 같이 저자로 기록되어 있고(1:1절)
그래서 데살로니가 편지에는 바울을 ‘나’ 라는 일인칭 단수가 아이라
‘우리’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옴은
'불의' 는 동역 자들 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배도(背道)는
사이비나 이단 뿐 만 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는 행위가 불의(不義)이며
그것이 배도이다.

따라서 이곳의 사이버공간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가 아니라
반쪽뿐인 사이버공간에서 자신을 주장하기 위하여 여러 아이디로 댓글을
쓰는 사람들을 오래전부터 보아 왔고 더하여 한 댓글에 여러 아이디의 쪽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것은 교제가 아니라 동기가 미움과 시기라 불의 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교제를 기대 할 수도 없다.

더 하여 영상화면으로 설교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기로는 오래전에 조용기 목사가 시작하더니 분가한 교회에서 따라하고
이제는 어느 뉴욕 뉴저지 교회에서도 영상설교로 예배를 본다.
이 설교자들은 교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라
진정한 예배 자가 아니며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 중보자가 되었기에
늘 ‘축복’ 타령의 설교로 유혹하고 ‘복’을 주는 사람들이라
예배 자가 한분의 성령님처럼 하나가 될 수 도 없어
서로 사랑함으로 교통케 하시는 성령님의 교통이 불통이 되며
따라서 듣는 청중도 예수님의 중보자이심을 부인하는 꼴이라
이들의 예배에 참석하는 자는 맹신자 이거나 광신자라
성령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라 불의한 자이며 배도 자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2]
연약한 우리가 말로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지만
성령님을 거역하면, 성령님이 교통하시는 교제를 막으면
이 세상에서도 성령님께 주시는 권능을 받지 못해, 분별력을 갖추지 못해
경건의 모습을 갖추지 못해 능력을 받지 못하기에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심판을 받는 다는 말씀이다.
생각해 보라.
영상예배라니,
과학이 발달된 미래의 배교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설교자를 눈감아 주는 목사들과 교계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불의한 시대라 아니 할 수 있으며
그들이 진정 교제의 의를 알고 있는지 한심함을 넘어 통탄할 노릇이고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직업이 종교인 인 그리스도의 도를 파는 자들이다.

믿음은
믿음의 교제로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선을 알게 하시고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That the communication of thy faith may become effectual by the acknowledging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in Christ Jesus.  빌레몬서 1:6]
'acknowledge' 로
우리의 믿음의 시인과 고백이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믿음이 자라서 장성한 사람이 되면
그 믿음이 ‘나’를 넘어 ‘우리’를 바라보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가 실현(實現)되는 소망의 실체를 바라보는 능력,
성령님께 인정받고 능력을 받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믿음의 교제에서 받는 능력임을 알아
‘acknowledging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in Christ Jesus’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에 이르는 역사는
acknowledging, 진행 중이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떠나서는,
예수님의 사랑 ‘charity’을 떠나서는
그 거룩한 사랑의 능력(power of charity)을 가질 수 없을 뿐더러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거역하기에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거짓 아이디로 는 교제가 될 수 없고
영상예배라는 불의와 배교에서 떠나라는 말씀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잘것없고 힘없는 작은 자 중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자는 예수님의 제자라
이 세상에서 힘주시고
저 세상에서 기억하신다 말씀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And whosoever shall give to drink unto one of these little ones a cup of cold water
only in the name of a disciple, verily I say unto you,
he shall in no wise lose his reward.  마태복음 10:42]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권하는 권고의 말씀이 아니고
분부이며 명령인 계명이다.
왜 우리에게 꼭 지켜야할 계명으로 주셨을까.
우리를 간절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힘이 나타나시길 바라시기에
능력을 주시기를 원하시기에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계명이면서
우리를 향한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確證)이며 근거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악독한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을 받으시며 돌아가시기 까지 한
고귀하고 간절한 사랑 ‘charity’ 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 가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치시고 새 생명을 얻는 소망을 주셨기에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한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명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안에 함께 거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알게 하시는
믿음으로 믿음을 확정케 하시는 믿음을 더 하시려고 능력을 더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분부인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
증인된 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내신다는 말씀은,
성령님께서 계셔서 권능의 힘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성령님의 권능으로 나타나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교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 완성케 하는
복음의 의(義)가 됨은 이것이 경건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가 완벽한 믿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공의를 행하려는
진리로 진실 되고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형제자매의 몸부림의 모습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으려 하는 간절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실천하는 경건을 바라보아
서로가 서로에게 말씀이 능력이 되는 힘이 되어 지치고 힘든 삶과
곤 한 환경에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아 힘을 얻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알게 되어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게 되며
사랑하는 교제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전도가 되기에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은혜라
우리의 노력과 행위의 공로(功勞)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charity’ 의 사랑으로 거저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인 복음을 전한 사람과 받은 사람을 통하여
교통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기에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Godliness)한 선택(은혜)에 부르심에
부르심의 합당한 응답의 태도와 실천하는 생활이 경건이며
경건은 권능을 받은 자의 능력이고 더 경건하여 더 큰 능력을 받는,
더 큰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가 세상의 역사를 만들어 왔기에
세상의 역사는 복음의 위대한 역사이다.
그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신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시라는 말씀인가.
우리를 조금 해코지하는 사람을 용서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시라
하시는가.
그러니 일상의 교제에서도 상대를 경쟁자 내지 무조건 지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지적해 주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으로 단정하여 본인은 선한데
질투와 시기 때문에 고통을 준다고 피해의식에 절은 사람들이 직분을 갖고 있으니
공동체가 조용한 날이 있겠는가.
외관으로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장로 때문에, 목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음모 때문에, 신천지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병이다.
그런 사람들은 뼈아픈 회개의 기도를 해야 성령님께서 치료해 주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다음절에 예수님께서 설명하셨다.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3-36]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자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진정한 축복을 받았기에
이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받은 우리의 은혜라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의 죄인 된 원수를 사랑함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자녀로서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극진한 사랑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닮고 행하려는 경건으로
그 경건으로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더 큰 능력을 받음으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케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감화 하심으로 우리의 심령을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앙망(仰望)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는 교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된
자의 생활로 마음이 넓어져서,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6:11-12]
속 좁아진 마음에,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화로 지식이 되어
깨끗함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린도후서 6-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는
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라 힘(power)이며 경건이고
경건한 자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원수를 능히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의 능력을 가진 자가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린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But the Comforter, which is the Holy Ghos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sha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all things to your remembrance,
whatsoever I have said unto you.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요한복음 14:26-27]
그리스도 예수님 이름으로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가르침이 가슴에 박혀 잊어버리지 않게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일을 도우시며
세상의 근심과 염려의 순간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가르치시고
이를 위해 다시 오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여
천국의 평안(Peace)을 너희에게 끼치기 위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 평안을 권능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평안을 누리는 권능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주시기에 흔히 말하는 성령 충만 이며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평안 인 히브리어의 ‘샬롬’ 은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주시는 평강이며 평화라서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참 평안이라 사랑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이며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이라 평안의 복음이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And your feet shod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 에베소서 6:15]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자.
우상의 도시 데살로니가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관습과 사회 윤리에서 살아왔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전한 복음을 받아드렸을 때
얼마나 많은 억압과 괴로움을 당하였겠는가.
그리고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선민이라는 유대인의 핍박을 받았을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핍박받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굴복하였는가.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동족에서 고난을 받았지만
그 고난이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이 되었음은
성령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소망의 확신으로 평안을 주셔서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신약교회의 모범적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종교지도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왜 사랑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중에 이 한 구절을 뽑아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축도라 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이 어떻게 축도를 가르치신 말씀인가.
오늘날 사이비들의 설교를 자세히 들어보라
말 머리 마다 ‘사랑’ 과 ‘축복’을 반복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은 단지 무조건 적인 복종의 조건이며 분별을 희석(稀釋)시켜 비판을
차단하는 구실이라서
축복, 축복을 반복 말하지만 그 축복도 종교지도자를 향한 무조건 적인 순종이
축복의 조건이라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의(공의)로
예수님의 사랑인 복음을 알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은혜가 축복이라
이미 받은 구원보다 큰 축복은 없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성경은 하나님의 의(공의)를 우리에게 남긴 기록으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by inspiration of God,
‘inspiration’ 은 영감(靈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보살 핍이라
보이시는 계시이며 가르치는 교시이고
성령님의 우리에 대한 감응이라 우리마음을 변화시키고 인도하시는 감화이고
그리고 숨을 들어 마시는 호흡을 의미하며
‘inspiration’ 이란 단어는 KJV에 이곳과 욥기 32장 8절 두 군데 쓰여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이
But there is a spirit in man:
and the inspiration of the Almighty giveth them understanding]
inspiration of the Almighty, 전능자의 숨결,
태초에 아담에게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신 하나님의 숨결.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숨결을 남겨놓은 책으로
우리가 숨을 쉴 때 마다 하나님의 의(공의)가 생명과 같이 유지하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공의로 교육하기에
is profitable for doctrine 절대적인 말씀이다.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기로 간 자들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생이라는 수많은 목사라는 자들은
성경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자신의 권위를 위한 수단으로 권력으로 교권을 강화하였다.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All the saints salute you.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2-13]

가톨릭은 이 문장을 곡해하여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saints’ 성도를 성인으로 번역하여 그들이 본받을 만큼 훌륭한 교인이 죽으면
성인이라 추대하고 그들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품을 악귀를 쫓는 신성한 물건으로
삼고 또 성인 중 한사람을 수호성인으로 삼고 그 성인들의 영혼과 교통한다는
영매술로 초혼 술을 믿는 근거의 성경구절이 이 구절이다.

개신교는
교파와 거의 상관없이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된 자들로 넘친다.
다음은 어느 교의 헌법으로 목사의 직무 중 1조 헌법이다.
< 1.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고
성도를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과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짧은 문장에 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고... ”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이란 말인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하나님의 대리인들은 한국과 이곳에도 넘친다.

한때 설교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던 곽선희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려면 설교를 잘해야 한다며 행정이나 행사의 탓이 아니라
설교를 잘 못하기에 부흥이 안 된다 했다.
그럴까? 아니다.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듣다 거부감이 들어 그만둔 사람이라
설교의 달인이라니 달인이 다른 뜻이 있는지 몰라도.
그가 축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아니에요. 이건 기도가 아니에요. 축도입니다.
그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풀레이(pray)가 아니고 베네딕션(benediction)이에요.
축복을 선포하는 거예요. 복이 있으라 하는 것이에요.
그걸 고어로서 있을 지어다라고>
미안하지만 ‘benediction’ 이라 단어는
내가 읽는 KJV 에 있지도 않고 ‘지어다, 라는 말은 잘못 번역된
한글성경 개역개정의 오류이며 ‘선포’ 라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선포적인 진리의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던데.

한국 CCM 소개서에는 축도를 이렇게 정의 한다.
< '베네딕션(Benediction)'은 예배순서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 복을 누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시대에 주님께로 돌아올 많은 영혼들이
축복받고 격려 받는 사역을 감당할 사명감을 갖고 붙여진 이름이다.
멤버 모두가 서울예대, 백제예대, 숭실대 출신의 전공자들로써 작곡자를 따로
두지 않고 팀원들이 직접작곡, 작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축복을 노래까지 하며 축복을 구하나 무엇이 진정한 축복이기에,
예배의 시작부터 시작하여 설교의 시작과 끝 그리고 축복기도
축복, 축복... 진정 축복을 받아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이 넘쳐서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복음의 의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대정신을 잃고 복을 받고 누리자는 기복신앙의
축복은 이미 축복이 아니다.

축복기도(Benediction) 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로
가톨릭의 성자 베네딕트에서 유래되었다는 로만 가톨릭의 기록이 있다.
< 가톨릭의 성자 베네딕트는 약 480년경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orcia)에서 태어나서
누르시아의 성자로 불리우며 로마제국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로마 동쪽의 Sabiner 에 3년 동안 은둔하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영적인 스승이 되어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529년에 마지막으로 세운 Monte Cassino 수도원이다.
베네딕트는 Benedict 는 라틴어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온 말로
‘축복받은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인으로 불리는 베네딕트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를 독살하려고
마실 포도주잔에 독약을 넣었는데 이를 모르고 성인은 전과 다름없이 정성을 다해
그 잔에 십자가로 축복하였더니 그때 그 잔이 즉시 박살났다고 한다.>
그는 547년경 몬테카시노에서 죽었으며 8세기 말부터 7월11일에 그를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969년에 가톨릭의 축일(Natalis S Benedicti)로 지정되었으며
베네딕트는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디모데전서 4:1]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을 본받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고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And ye became followers of us, and of the Lord,
having received the word in much affliction,
with joy of the Holy Ghost.
So that ye were ensamples to all that believe
in Macedonia and Achaia. 데살로니가 전서:6-7]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며
그들의 비난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어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
기쁨이 넘치는 능력을 받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그들이 더 큰 권능을 받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더 온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의 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원해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And we beseech you’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애원하노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간절히 기도하노니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믿음이 더 성장하여 더 큼 기쁨을 누리고 더 큰 능력을 받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간청했기에
복음을 전한 자들이나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신 성령님의 권능이 그들을 통하여
기쁜 소식인 복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기쁨으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이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Be perfect, be of good comfort, be of one mind, live in peace;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All the saints salute you.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1-13]
사도바울의 작별인사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의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저서
가슴을 울리고 흔든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끝으로 형제여 잘 지내길’
farewell, Fare you well,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형제여 잘 있기를.
Be perfect, (성령님으로) 온전하며
be of good comfort, (성령님의)위로를 받으며
be of one mind,(한 성령님 같이) 한 마음으로
live in peace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형제들과 함께 하리니.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서로 거룩한 성령님 안에 한 가족으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성령님과 교제로 모든 성도의 문안이, 모두 같은 형제들과 함께
성령님께서 형제들과 함께 하길.
이를 작별의 인사를 한 사도바울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받은 권능으로 말씀을 받은 기쁨이 있었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인 되어 위로를 받으며 평안을 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타난
증인의 삶이기에 그의 작별인사는
세상에서 형제로 또 하늘나라에서 형제로 만날 것을 믿기에
이 세상에서의 죽음마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사랑이
끊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이 구절은 암기하고 연습하여 축도(축복기도)로 사용한다.
축도는 목사가 예배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기도로 이 축도 때
회중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며 축복을 받는 예배의 순서가 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성직자는 하나님과 성도의 중보자가 되어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예복을 입고 축복을 선언하는
개신교에서는 이런 축도가 시작된 것은 중세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많은 개신교에서는 민수기 6:24-26 과 같이 축도로 사용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러나 이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말씀이었기에
현대의 목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과 성도들의 중보자가 아니기에
이 성경구절들을 사용한다면 중보자 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부인하는 이단이 되기에
어느 자들은 고린도후서 13:11-13절을 신약의 유일한
축도의 본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임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고 그 작별의 인사가 세상에서 마지막
인사라 그의 바람의 기도였고 믿음의 확신 이였지 예배를 마치는 축도는 아니었다.
설령 축도라 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있을지어다” 라는  명령인지 분부인지 오만한 말투의 기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자들의 기도를 성령님께서 허락하시겠는가.
더 건방진 자들은 “~있기를 원하노라” 라는 당부의 표현을 쓰고도
그 뜻은 당부가 아니라 기원이라 하니 교만도 이런 교만이 없고
이를 듣는 자들마저 ‘아멘’ 이라 화답할 때에는 귀를 막고 싶다.
그러니 가톨릭의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한 신분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중보기도’ 와 ‘영성’이라는 가톨릭 냄새가 펄펄 나는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무당이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샤머니즘을 교권주의에 접붙인
이 불경하다 못해 도무지 경건을 모양도 없으며 거룩한 체를 하는 종교 지도자와
선생이 넘치고 이를 추종하는 맹신과 광신자들에게
성경은 단지 그들의 복의 욕구를 채워주는 부적(符籍)같이 장식이라
자동차의 사고를 면해주는 신물(神物)과 같이 자동차에 보관하는 책이 아니라면
책꽂이를 채우는 책이 아니라면 어찌 읽지 않고
읽고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 그 뜻과 의미를 자신의 믿음의 고백으로 시인하고
성경으로 이를 확정하는 믿음의 확신이 없으니 이리저리 흔들리고 모임의 분위기에
휩싸여 감성적이 된 대중을 따라 기분의 높낮이가 믿음인양 신앙의 기준이 되면  
사치한 감정을 따라 허울뿐인 신자가 되기에
복음을 뒤로 한 채 구약으로 돌아간 사이비들과 터무니없는 교권(敎權)을
잡은 자들에게 맹종하여 그들과 같이 기복신앙이 되어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여
교회를 오래 다녀 직분을 받았더라도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내리지도 못하는
허식만 남아 겉모양만 직분자인 맥없는 교인으로 남아 부질없는 열심히 있어
경건을 모양은 있는 것 같으나 능력이 없는 교인으로 머문 교인으로 넘치는 교회가
된 오늘날의 현실은 축복에 목멘 공동체가 되어 베풀 움이 사라진
구걸(求乞)의 축복과 자기 자랑만 남은 분수(分數)를 잃어 분별없는
복음이 어그러진 시대라
올바른 복음의 길로 가는 자들이 구박(驅迫)을 받는 시대
이 시대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을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56-57]



16.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고
깨끗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셨고
부르심을 저버리는, 형제자매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무시함 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For God hath not called us unto uncleanness, but unto holiness.
He therefore that despiseth, despiseth not man,
but God, who hath also given unto us his holy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4:7-8]
우리를 부르심은 신성(holiness)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성품
but unto holiness,
부르심은
of God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of places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되도록
of things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기 위하여
성령님과 함께 하시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으로 서로 사랑하게 함이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But as touching brotherly love ye need not that I write unto you:
for ye yourselves are taught of God to love one another.
And indeed ye do it toward all the brethren which are in all Macedonia:
but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And that ye study to be quiet, and to do your own business,
and to work with your own hands, as we commanded you;
That ye may walk honestly toward them that are without,
and that ye may have lack of nothing. 데살로니가 전서 4:9-11]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듯이
서로 사랑했고 더하여 마게도냐 교회 형제들도 사랑하였기에
바울은 그 사랑의 행위를 더욱 하기를 간청했다.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이것이 교제(fellowship)이다.
교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경건’으로
교제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의식이 예배이며
교제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고백적인 생활이고 삶이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예배이다.
그래서 포괄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자하자는
의지와 태도가 표출된 언행이며 감사와 찬양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교제가 예배이며
경건이라
경건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른 지역의 형제자매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경건하여져서
일용할 양식인 말씀과 물질을 나누어 자신과 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교제가
이루어졌음은 서로 사랑하는 교제, 그 교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서로 사랑하는 생활이 삶이 되어
더불어 기도로 간구하고 고백하는 마음의 자세와 실천이 경건이라
이것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여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으로 되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다시 힘을 갖는 공급하시는 힘(power of charity),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다.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입술로 감사와 찬양으로 고백하고 경배하며
생활로 시인하는 삶의 예배가
이를 하나님께 인정받고
성령님으로 허락받은 능력의 힘(power)이 권능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능력이 되고 또 다시 힘을 얻는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힘이
권능 받은 자가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는 힘이라  
세상을 이기고 변하게 하는 힘이고
증인으로 사는 자의 힘의 근원이라서
오늘날 우리가 무기력한 원인의 하나는 진정한 교제를 잃었기 때문이며
이는 진정한 예배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건을 잃은 모습은
무엇을 마시고 먹고 입고 더 챙기고 더 가질까 하는
세속화된 믿음을 가장(假裝)한 기복신앙으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안락(安樂)을 먼저 구하여 자신의 만족의 기쁨과 도취를 믿음의 결과인양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 모든 일에 만사형통(萬事亨通)을 바라는 신앙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 경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hold the truth in unrighteousness;
Because that which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th shewed it unto them.  로마서 1:18-19]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와 공의롭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밝히셨으니
하나님을 그들을 익히 알고 그들에게 진노를, 벌을 심판을 보이셨다는 뜻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며 경건하지 않아서 공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28-32]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돌아서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경건하지 못한 모든 언행이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 이므로 악을 도모하는 자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의미는,
이미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 아니라서
생명이 붙어 있어 능력을 자랑하며 유명한 사람이 되어 부자와 같이 화려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며,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옳다 한다는 의미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믿음을 확정하고 확증하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믿음 안에 있다면 일상생활에서 교회에서 생활로 자신을 시험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 ‘charity’
그 고귀한 사랑으로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상대했는지
그 위대한 사랑으로 위대한 넓은 마음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대했는지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는지 자신을 확증하고, 증명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타락한 사람이다.

그럼 현대의 교회와 비교하여
데살로니가 성도 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을까?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서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고
말씀과 물질을 나누고 연약한 지체를 도움으로
자신들의 믿음이 더 굳세게 되어 형제의 우애를 더 곤고히 하고
우상을 버림은 물론 다른 지역의 성도를 까지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이 소문이나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비교하면 어떨까?
예수님 이후로
한국교회 만큼 수많은 종류의 예배와 더하여 새벽예배
이렇게 많은 종류의 예배를 드리던 때가 있었던가.
수많은 부흥집회와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은 어떻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헌금의 종류는 어떻고.
아마 타락의 대명사인 중세 교회도 한국교회만큼 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한국교회 만큼 많은 헌금의 종류도 없었고
부흥회와 허다한 운동과 프로그램 등
헌신과 열정이 대단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왜
열심과 열성이 두 번째라면 서러울 한국교회가 이처럼 망가졌을까.
교회는 싸움박질 하는 장소로 오래전에 인식되었고
교인이 정직하다는 말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교회의 모든 직분은 교회 밖 세상과 교회 안에서도 더 이상 존경해야할
대상에서 멀어졌고 존경은커녕 존중과 관계도 없어
교회가 거대하고 화려해진 만큼 그 만큼 초라해 보인다.
왜 그럴까?
시대가 변했다고?
문화가 다르다고?
진리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고 그렇지 않다면 진리가 아니기에,
예수님도 그 당시의 문화와 전통을 권력자를 존중하셨다 는 주장의
변명을 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그리스도는 주 시요,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시자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어찌 한 시대의 위정자와 문화와 전통으로 예수님을 구속(拘束)하여
자신의 설익은 지식에 가두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어그러진 모양이라
능력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능력을 부정하는 자들이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자신의 명예와 대중적인 명성으로 진리를
가로막을 자들이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종당에 그럴 자들이다.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령님의 경건으로,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 죄인이 된다.
경건(Godliness),
하나님을 선택(Godliness)할지
자신을 선태(unrighteousness)할지
세상을 선택(ungodliness)할지
선택은,
이제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 죄인이 되느냐 아니냐의 선택의
기로(岐路)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선택을 은혜(Grace)라 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태도와 삶의 응답을 경건이라 하고
그 선택을 또 기회(Second chance)라 고백하면
은혜(Second chance)가 된다.

1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으로의 삶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삶이라
이미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생활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아는 사실이
복음이 전파되는 전도가 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제자인 줄 알리라
A new commandment I give unto you, That ye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By this shall all men know that ye are my disciples,
if ye have love one to another. 요한복음  13:34-35]

예수님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사랑의 핵심인 새 계명으로 주셨다.
계명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그리스도의 도(道)라
증인의 길이며 복음의 길이라
하나님의 의(공의)가, 복음의 참 의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치관, 인생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가.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면
서로 사랑해야 하고, 사랑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로 사는 힘,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순결한 힘(power of charity)을
성령님을 통하여 서로 사랑함으로 받는 힘,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받는 고귀하고 순결한 힘을 성령님을 통하여 공급받는
거룩한 사랑을 다시 기억하고 다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영혼을 흔들어 주심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서 매일의 일상에서 생활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이
다시 깨끗하고 청결한 영혼이 되기를,
일상의 생활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오길 바라시기에,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를 사랑을 의지하고 실천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샘솟는 물처럼 다시 힘을 주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생활의 단련과 연습이 ‘경건’ 이며
경건을 통하여 온전한 성령님의 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아야 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함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함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졌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공의)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경건의 생활을 실천하지 못하는 일상의 생활은
힘을 얻지도 못하여 죄에 대하여 무력해지며 죄에 대한 방어를 할 수 없기에
반복된 생활을 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교제’ 는
우선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는 제자로,
그러다 죄를 짓더라도 성령님의 인도로 죄에 대한 회개로,
하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
그 힘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이며
교제를 위하여 받는 능력 또한 은사이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는 말씀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권능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고
은사를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고
그러기에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고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말씀이고
그러기에 이 시대는 사랑을 잃은 시대라 무기력하여
무엇을 구하고자 울고불고 부르짖더라도 응답 없는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의를 떠난 구함이 된다.

우리의 일상은
내적인 교만의 탐욕과 외적인 상황의 시험의 삶으로
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도전에 부딪치고 이를 극복 하냐는 성패(成敗)는
일상생활의 도전이라 경건의 훈련이며 단련이며 연단이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
급한 현대인의 조급함은 인내를 필요하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아는 장성한 자는
경건의 경험과 훈련으로 연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며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But strong meat belongeth to them that are of full age,
even those who by reason of use have their senses exercised to discern both good and evil.  히브리서 5:14]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잠시 흔들리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각인된
성령의 인치 심으로 세상의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유혹을 이기고
희망을 넘어 죽음의 저편 소망을 바라보는 자 이다.
그러나 경건을 떠나서는 승한 것 같으나 패한 자이고  
권능을 받지 못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교제’는 말뿐인, 능력이 없는, 힘
없는 교인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가 되어 험담하고 시험을 주고받는
해를 끼치는 일상이 되어 서로가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상처뿐인 관계가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전통과 신학과 교리로 무장한 ‘거룩’ 이라는 예배와 의식으로
포장된 믿음이라는 세속화된 축복인 세상의 성공과 출세
행복의 성취라는 사탄의 달콤한 거짓에 속아 왔고
그 전통에 접붙인 믿음의 행위가 종교의식 화한 오늘날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내놓고 생명을 바꾼 생명의 역사인 복음을 직시하지
못하여 서로가 서로의 허물만 본다.

우리가 서로 사랑 하는가?
말로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라 하면서
한 몸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는가?
지체끼리 서로 상하 우위를 가리고 끼리끼리 어울려서 갈라지는
교회의 조직은 전혀 성경적인 모임이 아니고
아이러니하게 잘못된 조직의 구조가 형성하게 만든 장본인들은
교계와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는,
신앙을, 신앙인을 공장의 제품을 만들 듯
규격(規格)과 격식에 맞추고 규정을 만들어 종교적인 전통에 적(籍)을 둔
종교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의 전통은 부패한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개혁을 언급하면서 부패한 가톨릭같이 되었고
시초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사두개인을 들 수 있고 이들은 유래는
불의한 제사장들을 들 수 있음은
제사장들과 같이 예루살렘의 권력가들과 결탁하여 귀족과 같은 지배 계층이 되어
산헤드린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세력을 유지하였던 세상의 권력과 영광으로
헛된 믿음을 종교의식으로 가장하고 정당화 한 전통을 정통(正統)화하여
하나님의 의를 팔아먹은 종교인들이라
모두가 합심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무리들은 종교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 이었고
오늘날 복음의 길에서 어그러진 길의 세속화한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의
건물에서 화려한 가운을 입고 거룩한 척 하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똑 같이 세상의 부를 갈망하기에
그런 자들과 세상의 부의 축적에 목멘 부자들에게 그들에게 변화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4]

신앙은 믿음에 생명을 둔 생활이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낮아짐의 겸손에 두기에
믿는 자라도 완벽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기에 자랑의 교만을 버리고
완벽하신 예수님을 닮으려다 지치면 긍휼을 구하며 낮은 데 처하는 믿음의 자세를
갖아야 하는데 믿음이라는 순수함에 벗어나 교만하여 저서
자신의 믿음과 지식에 술이 취하듯 취(醉)하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자신의 권위를 더하면 특별히 선택된 자로 망상(妄想)하여 과대망상이 되면
몽롱한 혼돈에서 몽상(夢想)에 빠지고 종교적인 몽상가(夢想家)된다.
이런 자들은 종교개혁의 개혁 기념일을 꼬박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종교개혁의 동기와 원인, 내용, 가치 등을 거창스레 떠벌리지만
본인은 종교 개혁자들이 사제에서 목사로 바뀐 호칭도 모르고
가톨릭의 사제의 복장인 로만칼라를 입고 개혁을 말하며 거드름을 부린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교만은 만 악의 뿌리이다.
높아 질려는 교만은
하나님과 동등해 질려는 타락한 천사,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교만은 우상숭배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이사야 2:11-12]
교만한 자, 자신을 뽐내는 자,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에게
낮아지는 비천에 처하는 심판이 임하기전에 교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에
로만칼라나 가운을 착복한 위선자들에게
이곳에서 수 없이 충고를 했고 이제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가 특별한 신분을 드려내려고 복장으로 신분을 표출하는가.
예수님도 제자들도 사도바울도 아무도 특별한 예복이나 남 다른 복장을
하지 않았고 이 성직자의 복장이 중요한 건 구약의 제사장과 왕의 예복이
예수님의 복음 이후에 다 사라진 것은 복음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
만민은 공평하신 하나님 안에서 공평하고 평등한 같은 생명이라
생명을 위한 생명의 법이 복음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의 완성이며
거룩하신 사랑을 본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가 자녀로 같은 신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가로막는
높아 질려는 신분으로 구별된 성직자의 복장은
평신도라는 기이한 차별을 만들었음은
중세의 귀족과 평민을 나누듯
‘성직자’ 라는 신분이나 호칭이 이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진 자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며
자기 신앙의 자기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표시의 복장이다.

그러니 담임 목사라면 얼마나 명예로운 직분인데 당회장이라니
집사는 어떻고 장로는 어떠한가.
집사는 집사이지 서리집사 안수집사는 무슨 직분이고
안수집사는 안수 받았다고 자기들 끼리 모임을 갖고 더 하여 안수집사의
회비인지 헌금인지 알 수 없는 돈을 내는 일은 무엇인지 돈, 돈 이다.
하긴 돈 없으면 장로 되기 힘든 교회가 많으니
교인을 붙잡기 위한 직분, 신분처럼 갈라놓고 평생 직분이 이름처럼 서로
부르는 호칭, 이건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한 직분이기에 직분에 걸맞은 성경의 지식으로 인생관과
교회관, 세상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직분자라면서
교회의 지도자라면서, 신학자라면서
성경적인 체계화된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여 직분에 매여 직분이 계급이 되어
분쟁의 원인이 됨을 수 없이 보고 듣는다.
왜 그럴까.
대체적으로 직분에 상관없이 성경을 읽지 않아 복음의 본 뜻을 모른다.
열심히 있어서 교회에서 숫한 예배와 수많은 종류의 헌금을 하면서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성경을 제대로 강해하고 설교 못하는 목사들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
예문과 예화로 설교시간을 허비한다.
읽더라도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눈에 보기 좋게 맞추고
자신의 높이에 성경을 두기에 자기 의에 빠져서
믿음이라는 신앙의 생활이 자신의 환경과 인적 교류도 초월하지 못하여
자신이 만든 자신의 벽에 갇혀 자신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기호(嗜好)에 맞는 성경의 구절과 장과 권으로 성경을 재단(裁斷)하고
남을 재단하기에 자신의 도취에 취하고
더하여 감성의 높낮이에 좌우되는 믿음이 되어 믿음의 실상과 멀어지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전통과 관습과 습관과 버릇으로
스스로 굳어진 믿음은
세상의 사상과 철학과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려
성경을 읽고 신학을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에 눈이 먼 장님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구실로 변명을 찾으면
성령님의 인도로 받지 못하여
눈에 보기 좋은 전통의 구습(舊習)을 따르는 답습(踏襲)을 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지고 끊어지면
말과 글로는 정통(正統)신학, 정통교단, 정통교회 라 자부하지만
스스로 만든 자신의 믿음의 우월감 위에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사이비가 되면
그렇게 굳어진 마음과 영혼에 찔림이 없어
관료화된 종교인이 되어 입에 머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찾는다.
이런 지도자들 따르면
감성적 분위기와 자기 복음의 자기도취에 취한 광신자와
진리와 거짓을 혼동하여 자기변명의 구실로 삼은 맹신자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수치(羞恥)를 잃은 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직분을 받지 말거나
직분을 받았더라도 쉼이 필요한 자 이거늘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은 목회자는 광신과 맹신자를 선호(選好)하여
직분을 주고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자신마저 맹신과 광신의 한통속이 되어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살피듯이 살피다 높은 자리에 거 한다.
높은데 거하는 자들이여
내려오라.
[바위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레미야 49:16]

지체(肢體)는 다르나 직분(職分)은 같으며
직분은 다르나 지체는 같으며
모두가 성도라는 진정한 직분은 같다.
내려가야 한다.
낮아 저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같이
낮아짐의 교훈을 되새길 세대가 우리의 세대이다.
실천하여 지도자인 목사부터 은퇴 후 자기가 임명한 서리집사의 직분으로
내려가면 성도가 서로 더 교통(交通)하고
그런 목사가 많을수록 교회와 교회가 더 교통할 수 도 있다.
그럴 수도 없다면 직분을 남용하지 말 것을
소명(召命)이라는 잘못된 소명과 더불어
남용한 직분이 한국교회의 지난날과 오늘날의 병폐임을 모르는가.
하나님의 종이라 면서 상전(上典)이 되어 주인이 된 종들,
챙길 돈은 이 명목 저 구실로 다 챙겼으면서 무엇을 섬겼다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지,
잘된 건 모두 자기 탓으로 믿고, 잘못된 건 모두 남 탓으로 믿는
자신의 믿음의 능력과 망상에 빠진 과대망상증 환자들,
돌아가자.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숭고하고 고귀한 길을 따라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charity’ 의 길로 가서 사랑을 본받자.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고 말씀하셨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고 더해서 고함과 폭력이 오가고도 모자라
세상의 법정에 위임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리고 원수같이 외면하고 딴 살림을 차리듯
교회를 세우는 일들은 다반사인 시대라
그리스도 인 으로 수치를 잃고
서로 책임을 미루고 전가하는 모임의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이럴 진데 교회 밖에서는 어떻겠는가?
교계의 모임은 어떻고...
복음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도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심는 일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인 다 운 정신적인 문화를 만들고 조직이 조직의
유지를 위한 안일한 관리자로 관료화 되지 않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개혁하고 다음 세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본이 되는 계승적인 문화로 발전하고
끝임 없이 변화하는 개혁적인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현대의 교계는 그런 원동력을 잃었다.
원인이 무엇인가?
신앙이 관습과 관행으로 굳어진 종교화된 조직, 조직의 유지를 위한 조직,
관료화가 된 조직이 되었기에 개혁되어야 할 신앙이 제도화 되어 겉모습만
교회고 교인인 현상은 변화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내가 사랑한 것 같이
생명을 버리기 까지 하시며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한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하나의 사랑인, 생명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안에 함께 거하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e are the branches: He that abideth in me,
and I in him, the same bringeth forth much fruit:
for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요한복음 15:5]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포도가지인 우리가 함께 거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랑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듯
He that abideth in me,
예수님께서 성령님 안에 계시듯,
and I in him.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 ‘charity’ 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의, 공의를 이 땅에 이루는 하나님의 뜻이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성령님을 통하여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우리 삶을 공급하시기에
그 공급하시는 힘을 받은 권능(power of charity)으로
‘열매를 많이 맺나니
he same bringeth forth much fruit’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열매를 많이 맺나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라 법이 없느니라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longsuffering, gentleness, goodness,
faith, Meekness, temperance: against such there is no law.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성령의 열매, 성령님의 권능은 사랑으로 시작함은
포도나무 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내가 사랑으로 붙어 있고
다른 가지인 형제자매도 사랑으로 붙어 있기에 한 포도나무에 같이 붙어있는
사랑이 생명이기 때문이고
이것을 다른 비유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에,
성령의 권능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하고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우리의 화답이자 대답적인 삶이므로 산 예배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 성령 안에 거한자의 열매이며
이 권능으로 맺은 이 열매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
이 법, 성령의 법을 금지할 법이 없고 이 사랑의 법을 지키지 아니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25-26]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야 하기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for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예수님을 떠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서는 성령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우리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교제는 물질을 나누고 형제자매의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고 서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는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헛된 높아지려는 직분에서 내려와서 낮아지고 겸손하여 생활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되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모범을 보이고
헛된 명예적인 직분 때문에, 헛된 권위로 서로 상처를 주는 받는 일로
마음에 분을 쌓은 행위를 하지 말고,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과 사건은
성령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으로 살려면
그리스도의 사랑(power of charity)에 거하여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의 생활로  
연습과 훈련이 ‘경건’ 이다.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주께서 사랑한 것 같이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믿음의 한계와 환경적인 원인 등으로 할 수 없지만
경건으로, 조금씩 습관이 되어 버릇이 되듯이 더 많이 더 크게 사랑을 할 수 있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시며 도우신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는 삶
그 능력을 취하는 연습, 경건을 참 모습을 성령님께서 원하셔서
이 무기력한 시대, 우리를 찾으신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And the Lord direct your hearts into the love of God,
and into the patient waiting for Christ.  데살로니가후서 3:5]

1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신약 권능의 대표적인 권능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e shall receive power.
after that the Holy Ghost is come upon you:
and ye shall be witnesses unto me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aea, ane in Samaria,
and unto the uttermost part of the earth.  사도행전 1:8]
이 구절은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
잘못 해석한 사이비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고
호도 된 해석으로 이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고 가르쳐 올바른 복음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공의의 개념을 저해(沮害)하여,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관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릇된 전도, 선교라는 개념을 가르친 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란 주장에
대다수가 맹종하여 반사회적인 정서를 만들게 자초한 일들은
복음의 정의에 대한 무지였고 아직도 이런 개념과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국교회와 해외 교회는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곡해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도, 선교만이 증인이 되는 길 인양 가르치고 배웠기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도 못하였으면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하지 못하면서
신학을 가르치고 배운 자들의 가르침이 온전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의(正意)에 대한 정의(精義) 조차 판단하지 못하여 분별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무지하여
‘공의’를 제대로 설명할 사람이 제대로 없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러니 아무 때나 하나님의 뜻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주장하고
선교제일주의에 빠져서 선교에 모든 역량을 써야 한다면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과 간절한 기도도 없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면서
끝없이 여러 선교지의 자랑으로 이를 교인들에게 자부심으로 심어주었고
언제부터인지 단기선교의 유행의 열풍이 불어
단기선교가 현지 선교사와 교제와 교통 속에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단기선교라는 선교의 거창한 명칭으로 적선과 봉사가 믿음의 척도가 되어
교회의 구걸걸이가 되었고 어느 목사는 선교를 자신을 위한 욕심의 유익으로
비자금을 만들고 선교는 자신의 사적인 여행이 되었으면서
선교 비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지원자나 후원자 명단까지 발표하며 독촉한다.
선교는 선교지의 장기적인 계획으로 언어와 문화 등을 미리 습득하여
지혜롭고 효율적인, 조직의 역량을 판단하여 조직적으로 중단 없는
넉넉한 인적 물적 지원을 미리 기획하고
단기선교는 현지 선교사의 지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어느 목사들과 장로들은 은퇴 후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지로 간된다.
미리 장기간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하여도 미흡한 환경에 육체도 거둥하기 힘들 때까지
기다려서 은퇴하고선 가서 무엇을 한다는 건가.
그리니 교회에 손을 내밀어 생활비로 사용하고 명분은 선교이니 거룩한
변명거리가 될지 모르나 은퇴목사라는 명예의 타이틀도 버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그릇된 명분에 뭔 효율적인 선교가 되겠는가.
선교지 는 늙은 몸이 쉼을 얻는 휴양지인가 도피처 인가.
하기야 어느 사람들은 짧은 기간 선교지에 다녀와서 선교사, 목사, 뭔 모임의 장 등
마치 자신의 경력에 이력 거리를 만드는 이력서를 자랑하니,
현실을 바라보자.
교회는 내부적으로 잘못된 신앙관으로 세상의 질타의 대상이 된지 오래라
전도는 진전이 없고 남은 교인들마저 순수함을 잃은 교회를 떠나 교인은 줄었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하겠다는 전도는
교회가 걸림돌이 된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주체인 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압박을 당하고
이제 교회는 세상과 등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더 고립되어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마치 현대교회는 근본의 바탕이 잘못 지어진 집 같다.
견고한 지반(地盤)에 터를 잡지 못하고 기초마저 튼튼하지 못한 집이  
얼마나 유지 되겠는가.
그러니 조그만 일에도 교회가 흔들리고 작은 사건에 교회가 날아갈 듯 하고
목사의 말 한마디에 교회가 이편저편으로 나누어져 모두 하나님 편이라
고함과 폭력이 난무하니 싸움이 소문이나 으레 교회는 싸우는 장소로
오래전에 세상에 인식되었고
목사의 부정으로 교회가 갈라지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으니
허약하다 못해 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이제 병들어 신음하는 교회가 되었고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기이한 상황을,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믿음의 단절된 이 현상을,
믿음을, 다음세대에 유산으로 남겨야 하는데
세대와 세대가 단절된 이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눈뜬 맹인이고
세상의 비난이 들리지 않는 다면
당신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난청자 이고
그리고도 지도자라면, 당신은 믿는 자를 가장한 종교인이고
분별력이 애초에 없는 삯꾼일 뿐이다.
보라,
총체적으로 부패한 한국과 해외 교회와 단체의 모습을.
조금의 믿음이 있다면 조금의 신앙의 양심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믿음의 작은 눈이 라도 바라보라.
이제 근본으로 돌아갈 때다.
이제 늦으면 유럽교회처럼 교회가 사라지고 미국교회처럼 노인만 남고
교회 건물은 세상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다 이 마저 사라진다.
화려한 대형교회의 건물?
화려하고 거대한 만큼 교제를 막는 큰 콘크리트 덩어리 일 뿐이며
그 안에서 군중 속에 안정(安定)을 찾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며 가고 있다.
그리고도 대형교회라 선교를 위하여 거금의 선교비를 만든다는 말은
맘몬 니즘에 절은 자의 변명이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을 막고
교회와 교회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을 막은 대형교회의 모순을
외면한 자의 변명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근본의 하나님의 의,
의를 알려면 공의(righteousness)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는, 공의는, 복음에 나타나서,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졌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 공의를 알고 깨닫는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믿음이 되며
오르지 의인,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이며,
오르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를 지켜야 할,
정의롭고 진실하고 공평하고 평등한 삶으로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과 상식을 초월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문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의 문화를 세우는 일,
정직하고 정의로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문화는
한국교회에서 이제 거의 다 사라졌기에
믿음, 믿음, 믿음하면서 믿음이 변절하여 종교 의식화 하였고
종교적인 자기 위안(慰安)도 못되면서 버릇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다.
대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란 말인가.
전도가, 선교만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었나?

또한 이 구절은
사이비 세대주의자들, 대체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인용하는 근거의 구절로
잘못된 예수님의 재림과 선교관을 퍼트린 구절로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부인이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복음 이전의 구약으로 돌아가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권능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전 세계의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만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된다.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은 단념할 수 없으신 편애를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나라가 없어지고 민족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만 선택된, 일부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다시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씀도 아니고
‘uttermost part of the earth’ 최대한 넓게 복음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 다는 말씀은
이 권능 ‘power’ 는 누구나 받지만 모두 같은 ‘power’ 가 아니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약하고 강한 능력이고
power 의 분량이, 믿음의 분량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양과 비례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8-2]
분부한 모든 걸 가르치고 행하라 시는 말씀은 명령이다.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구약의 대표적인 권능인 이사야 33:13-16절 과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포함된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받은, 세상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권세
그 권세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으시라는 말씀은,
그 권세로, 성령님께 받은 권세로 세례를 베푸는,
성령님이 세례를 베푸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름은 히브리어 ‘쉠 shem’ 으로 사람이나 사물 등 다른 것과 구별하는
표시로 세상과 구별된, 모든 우상과 구별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과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거룩하신 성령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이름’ 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죄로 죽고 다시 새 명명을 얻은 자가
부르심에 합당히 응한 자가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거룩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옛사람을 죄를 죽이는 회개의 상징임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 죄를,
성령님이 임하시면 불같이 태워버리는 권능을 받기에,
성령님의 권능을 받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음은,
권능은 증인이 되기 위한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의 시작이라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한 부르심을 받은 자의 능력이다.
그럼 이제 권능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한 말을 보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행전 3:7]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지만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 have give I the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천한 나사렛에서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진리를 전하여 주시고 삶의 길을
보여주신 구세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 ‘charity’ 의 이름,
그리고 부활하신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베드로의 가슴에 간직한 사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으로 가슴에 새겨진 사랑의
힘(power of charity)으로 베드로의 생명과 같은 이름,
그 이름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1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전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When he shall come to be glorified in his saints,
and to be admired in all them that believe
(because our testimony among you was believed) in that day.
Wherefore also we pray always for you,
that our God would count you worthy of this calling,
and fulfil all the good pleasure of his goodness,
and the work of faith with power:
That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may be glorified in you,
and ye in him, according to the grace of our God
and the Lord Jesus Christ.  데살로니가 후서 1:10-12]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존귀한 분으로 여김을 받으리니,
이는 이미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복음의 증인으로
가슴에 간직한 복음의 증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들이 믿는 믿음으로 믿어졌음은
모든 선을 기뻐함은
fulfil all the good pleasure of his goodness,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선하심으로 기쁨이 됨은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our God would count you worthy of this calling
성도로 합당한 자로 여기심은,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심은
the work of faith with power,
성령님의 권능으로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 졌기에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이 늘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은
주 예수님의 영광이 너희가운데 은혜가 되고
너희 안에 주가 계셔서 너희에게 영광이 되고
주께서 너희에게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교제가
성령님의 진실과 진리의 권능으로, 권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하신 이름으로
은혜로, 평강으로, 영광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되어
권능을 받고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power of charity)으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 주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졌기에
성령님의 진실하신 진리의 권능으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몸이 되는,
바울 파도, 실루아노 파도, 디모데 파도 없는
교회가 위치한 데살로니가 지역에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
데살로니가 성도의 모임, 연합된 한 몸을 이룬 지역 교회가 세워졌다.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 권능을
구약의 대표적인 권능을
이사야는 이사야 33:13-16에 이렇게 증언하였고
이 시대의 우리에게 남기었다.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Hear, ye that are far off, what I have done;
and, ye that are near,
acknowledge my might.
The sinners in Zion are afraid; fearfulness hath surprised the hypocrites.
Who among us shall dwell with the devouring fire?
who among us shall dwell with everlasting burnings?
He that walketh righteously, and speaketh uprightly;
he that despiseth the gain of oppressions,
that shaketh his hans from holding of bribes,
that stoppeth his ears from hearing of blood,
and shutteth his eyes from seeing evil;
he shall dwell on high: his place of defence shall be the munitions of rocks:
bread shall be given him; his waters shall be sure.]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너희 가까이 있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였는지 들으라,
acknowledge my might.
시온의 백성이라는 선민들이 경건(godless)하지 아니하여 죄인이 되어
두렵고 떨며 하나님을 멀리한 거짓을 행하는 위선자가 되어
우리 중에 누가 영원히 맹렬히 타는 불에 영원히 거하겠는가.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He that walketh righteously.
공의의 하나님의 공의로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이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래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빛같이 사는 자.
그런 자는 견고한 바위가 요새가 되며,
his place of defence shall be the munitions of rocks,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라)
양식을 공급하고,
bread shall be given him
(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물을 주시리니,
his waters shall be sure
(성령님께서 성령을 부으리니)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주시리니
너 그리스도의 안(power of charity)에 거하는 자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였는지 들으라,
acknowledge my might.
하나님께 인정받고 허락받은 그리스도의 감사의 능력을 간직한
성령의 힘(power)을 받은 자여,
acknowledge my might.
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여
너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여
너는 높은 곳에 거하리라.
너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는 곳에 있는 자여
너 하나님의 부르심에 가까이 있는 자여,
ye that are near.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에서 멀어진 자여,
ye that are far off.
하나님의 공의로 도무지 행하지 않는 자여,
마음이 굳어져 종교인이 되어
이제 마음이 화석(化石)같이 굳어진 죄인들아,
영원이 타오르는 불에 거하리라.
너희는 거짓말을 일삼는 자이며
억압하여 얻은 제물을 경멸하지 않은 자이며
손을 내밀어 뇌물을 움켜진 자이며
귀를 막고 고통의 소리를 듣지 않는 자이며
눈을 뜨고 악을 보는 자이라
낮은 곳에 비천하게 처하리니
견고한 바위도 요새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은 그의 요새가 되지 못하며)
양식은 끊어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도 읽어도 그는 깨닫지 못하며)
물을 마셔도 마셔도 끝없이 갈증을 내리니
(성령님은 진리를 거슬리는 그에게 떠나서)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훼방하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도대체 알지 못하는 자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였는지, 자기 의의 자랑과 욕심에 하나님의 권능까지
삯으로 팔아먹은 자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여,
들을 귀가 없어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여,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돌아오라
어찌 공의(righteousness)와 불의(unrighteousness)가 함께 할 수 있으며
거짓과 진실이 함께한 진리가 있을 수 있을 소냐.

만일 죄를 자백하면
스스로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면,
성령님은 미쁘시고 의로 우시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요한일서 1:9-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Hear, ye that are far off, what I have done.
데살로니가 교회에 행한 것을 들으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 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1:8-10]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다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For our rejoicing is this, the testimony of our conscience,
that in simplicity and godly sincerity, not with fleshly wisdom,
but by the grace of God, we have had our conversation in the world,
and more abundantly to you-ward.
For we write none other things unto you, than what ye read
or acknowledge; and I trust ye shall acknowledge even to the end;
As also ye have acknowledged us in part, that we are your rejoicing,
even as ye also are our's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고린도후서  1:12-14]
이를 상고하는 마음으로 해석하면,
간단히 단순히 있는 그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사로이 육체의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과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본받은 자녀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믿음의 양심으로 증언하는 일은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다.
(믿음의 양심, 성령님의 증언을, 바울을 통하여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도인 복음이 기쁜 소식이기에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울에게도 기쁨이고 자랑이 된 것은
성령님과 함께한 증언이라, 권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말은 분명하게 너희가 읽고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니(성령의 인도로)
주 예수의 날(세상 심판의 날)까지 네가 너희를 인정하고
너희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며
우리가 너희의 기쁨이고 자랑이 되리라.
(복음이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는 감사의 능력, 권능)
이 권능은 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같은 자녀로서의 성령의 감동감화
(感動感化)라 감격된 말이, 마음속의 영혼을 움직이는 운동력 있는
권능(power of charity)의 말이 되었다.
나의 형제여!
my brethren!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
Finally, my brethren,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에베소서 6:10]
강하여 지고 그의 힘을 얻는,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성령의 권능으로
in the power of his might.
그것이 권능이다.
그 권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이를 증명 증표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그래서
너를 위해서 나를 내어주는 사랑
너는 나의 기쁨이고 나의 자랑이 되며
나는 너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my brethren!
나의 형제자매여!
power of charity!

수직적인 계급의식이나 조직적인 상하 복명의 세상의 전통과 체제와
사회의 관습과 관행과 문화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띠로 하나 되는
‘사랑의 띠’ 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진정한 교제를 맺어주신 성령님의 역사가 권능이기에
권능을 받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사랑 'charity' 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Rei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Charity never faileth: but whether there be prophecies, they shall fail;
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 whether there be knowledge,
it shall vanish away.  고린도전서 13:6-8]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 ‘charity’을
그 거룩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불의, 불법. 죄악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터, 이 땅의 하나님의 의(공의)는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이미 성령님의 인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한 터에서,
불법의 자리에서, 죄악 된 마음에 떠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 그 거룩한 사랑 ‘charity’ 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여정은 예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께로 갈수가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갈라디아서 5:24]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육체의 탐심을 따르는 비방과 거짓을 십자가에 못 박은 길이라,
이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길로 간 사람들의 화려한 말이나 글이나
어떠한 주장도 진실이 될 수 없고 더욱이 진리가 아니기에
그러한 자들의 능력은, 어둠의 세력과 결탁한 권세의 어그러진 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Charity never faileth.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 ‘Charity’는 언제까지 항상 함께 한다.
세상 끝날 까지,
the day of the Lord Jesus,
그래서 사랑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Amen. 마태복음 28:20]
보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lo, I am with you always,
세상 끝 날 까지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재림하셨고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님이
세상 끝 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어느 이들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한 구절을 떼어놓고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성령은 소멸하지 말라 하여 성경을 곡해하고
더 하여 자기 의로 가장한 탐욕을 드러낸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Quench not the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5:19]
정확히 이 구절은 성령의 소멸이 아니라
성령의 억제적인 제한을 의미한다.
‘Quench’ 는 사무엘하 21:17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쟁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quench not the light of Israel'
'quench' 는 등불을 끄거나 억제하는 의미로 쓰였지
사라지고 없어지는 ‘소멸’ 아니다.
이사야 42:1-3를 보면 더 확실하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Behold my servant, whom I uphold; mine elect.
in whom my soul delighteth;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to Gentiles.
He shall not cry, nor lift up, nor cause his voice to be heard in the street.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
이사야가 예수님을 예언한 장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영(성령)을 주었은즉,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때에 성령이 임하였고
그 후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은 후에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우리도 성령을 받고
우리의 육적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권능이 임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상한 우리의 몸과 영혼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정의와 심판을 시행하시기에,
우리가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등불처럼
우리에게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억제하고 제한하지 않게 하시려고,
진실로, 진리를 알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을 일삼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 못하시기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구절의 해석은 잘못되었고 이는 성경의 앞과 뒤 문장으로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무지이고
이 구절로 사이비들과 부흥사들은 교인을 겁주고 호통 치는 구절로 인용하여
무조건 적인 교회의 충성으로 광신자를 양성하고
그리고 무조건 적인 담임 목사의 순종을 강요하여 맹신자를 만들어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았고 이런 무지와 선동에 속거나 믿음의 분별력을 잃어서
자기 위안을 방도(方道)로 삼으면,
감성적 분위기의 예배로 좌지우지된 감성을 따라 자기도취에 취하면,
수치심을 잃어버려서 도무지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면,
성경은 자기주장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이 어그러진 길로 간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결국, 자기들 자신이 세상적인 윤리와 도의의 수준에도 못 미침을
세상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 합리화 하여 자신의 의의 올무에 걸려 남을 탓한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4-24]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권능은 복음의 능력이고  
[이는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5]
복음의 능력이 권능이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고난뿐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삯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말씀하시고 본을 보여주신 삶이
우리를 위한 거룩한 사랑 ‘charity’ 이며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인 공의가
이 땅에 이룬 성취이며
이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증거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
성령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이라 사랑이시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시는 전능자시라.

성경을 읽으면서 왜 말씀이 운동력을 잃어 영혼의 은총이 못되어
육체를 움직이는 힘이 못되어 무기력한 삶이 되었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 구구한 변명이 일상화 되어 복음의 능력을 감하고
이도 모자라 어그러진 길로 향해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는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순결하고 위대한 사랑을
가슴의 중심, 영혼의 한 가운데 온전히 간직하지 못한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이라
성령님의 권능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받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진 까닭일진데
조금이라도 신앙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자신에게 물어보라.
거짓을 일삼고 거짓 증언하고 비방과 욕설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의 믿음을
믿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을 방관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라 착각한다면
당신은 맹신자 거나 광신자 아니면 사이비 다.
어찌 진리가 거짓과 함께 하고
그리스도와 바알이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믿는 자 라면서, 지도자라면서 자신의 의로 보여주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의 이 시대
눈과 귀를 막고 싶다.
단언하건데 그런 그리스도교는 없다!
설령 실수가 있고 잠시 눈이 욕심에 가리고 귀가 얇아졌던들
다시 그리스도의 자리로 오면 될 것을 무수한 말은 변명거리 일 뿐이다.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으로.

다시 권능을 되새겨 보면
하나님은
창조주(Creator)이시며
제한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이시며
하나님은 권능 자(權能 者, Mighty One)이시다.
그분은 이제 성령님으로 오셔서
매일 매일, 순간마다 우리의 영혼을 노크하시고 우리가 진실로 진리의 길에서
다시 순수한 믿음을 잊지 않게 잃지 않게 말씀 하신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 이다.
God hath spoken once; twice have I heard this;
that power belongeth unto God.
Also unto thee, O Lord, belongeth mercy;
for thou renderest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ork  시편 62:11-12]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이시라 우리의 부활이신 권능 자 시라
권능을 주시려고 성령님을 보내셨고 이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 하신다.
이제 우리의 죄를 돌이키고 죄악에 젖었던 흔적을 지우게
정직한 성령님을 따라서 구원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죄에서 자유를 갖자.

권능은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깨끗한 사랑, 복음에 동참한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이고 구약으로 돌아가서 권능에 대하여 알아보면
구약에서 성령의 표현은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 등 수없이 많으나
성령 ‘holy Spirit’의 표현은
시편 51:11 과 이사야 63:10-11 뿐이다.
이 두 군데에서 성령의 뜻하심을 살펴보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 이다.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Cast me not away from thy presence;
and take not thy holy spirit from me.
Restore unto me the joy of thy salvation;
and uphold me with thy free spirit.
Then will I teach transgressors thy ways;
and sinners shall be converted unto thee  시편 51:9-13]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여 일상의 생활에서 죄를 지어 죄의 흔적이
남아있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주의 길로 돌아온다면,
우리의 죄를 흰 눈처럼 흰 양털처럼 깨 끗게 하시는 죄 사함을 받으려면,
정직한 진실한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고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잘못을 용서하기를 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지의 결정이,
Create in me a clean heart,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러한 굳은 의지의 결정으로 회개를,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성령님은 우리를 정직한 진실한 진리의 길로 안내하시고
Restore unto me the joy of thy salvation;
구원의 즐거움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죄를 죄로 시인하지 못한 회개 없는 버릇과 일상의 습관은
이미 성령님의 능력이 떠나간 상태라
take not thy holy spirit from me,
그 길은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종당에는 어둠의 길이라 이미 심판이 임했다.
그래서 다시 복음의 길, 주의 길로 돌아온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이미 알고
있기에 죄 사함의 경험으로 단련된 시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믿음이 굳어져서 주의 도,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가르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알아도 잘못된 어그러진 길로 간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이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권능(power of charity)이다.

이사야 63:10-11를 보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But they rebelled, and vexed his holy Spirit;
therefore he was turned to be their enemy and he fought against them.
Then he remembered the days of old, Moses, and his people, saying,
Where is he that brought them up out of the sea with the shepherd of his flock?
where is he that put his holy Spirit within him?]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rebelled)하여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고
그가, 하나님이 돌이켜 그들의 대적으로 그들을 치셨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며 말하길
백성과 목자의 양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어디계시냐?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백성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넣어주신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이를 이 시대로 바꾸면,
너희가 복음의 어그러진 길(against light)로 가서
너희가 반역(against God)하여 성령님을 염려하게 하였으므로
너희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고
너희가 예전에 받은 구원을 기쁨을 잊었고
너희에게 성령님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을 잃고
너희가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하는 도다.    

무엇이 성령님의 권능을 제한하는가?
이 시대, 우리가 왜 이렇게 무력할까?

성령 ‘holy Spirit’의 표현을
시편 51:11 과 이사야 63:10-11에서 성령의 뜻하심을 살펴보았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한마디로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거짓과 불법에 거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길에서 돌아오길 바라시기에 반 복음적인 어그러진 복음의 길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는데 어느 이들은 이 간단한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능력을 얄팍한 성경의 지식으로 포장하여
무지한 선동을 하는 자 들이 많다.
자신의 허탈한 신학을 진리인양 무장하고 도취하여 허풍을 친다.
어느 이는 성령의 불을 받으라 한다.
어느 이는 성령을 받으라 하고,
도대체 성령님을 명령하는 부흥사와 목사들은 누구인가?
그런 자들에게 믿음마저 세뇌되어 혼미한 정신에 무엇을 구한단 말인가?
그러니 세상의 음모론이 사실인양 이리 저리 흔들리고
극단적인 종말론과 신비론과 음모론에 영혼을 빼앗겨 버리고
조급한 믿음에 평안까지 빼앗겨 버리면
자신이 만든 자신의 허황된 믿음의 벽에 갇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신비주의, 세대주의 등에 멍들은 사이비들과 휩싸이거나 동조하고
예루살렘까지 전도가 되어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자는,
무리들이나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은  
늘 666, 베리 칩, 가톨릭의 종교통합, 음녀론, 후리 메이슨 등 음모론과
극단적인 종말론을 겸하여 천국 간증,
바울도 꺼리였던 천국의 간증까지 곁들여 증명하려 하고
혼미한 흑암의 길이 진리의 길로 둔갑하여
자신들의 믿음의 무지를 이단과 사이비등 배교를 핑계로
툭하면 신천지 탓이고 이단 탓이고 온갖 마귀, 귀신 탓으로
이제는 정치 사회의 사상적인 이데오르기 탓으로
자신들의 몽롱한 믿음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거짓과 탐욕을 진리로 빙자하여
스스로 사이비임을 증명한다.
왜 그럴까?
두려워 말고 염려 말고 조급해 하지 말자.
하나님은 전능자 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고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였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 ‘charity’ 을 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예수님의 사랑을 증명하시는 권능 자 이시며
권능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시길 간절히 바라시고 학수고대(鶴首苦待)하시며
진리로 인도하신다.
이제 무엇을 걱정하는가?
귀신인가 사탄인가?
믿음은 분별력이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은 믿음에서 역사하시기에
혼미한 사이비들의 주장에 물든 영혼의 소유자들이 무슨 분별력이 있겠는가.
그 때는, 재림의 때는 만들어진 때,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그 때는 하나님 이외는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무지함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혼미한 영혼을 자랑하는 자들
그런 자들은 뭔 신기한 진리의 길을 발견한 듯하나 그런 자들의 이면에는
자기 자랑의 진리의 독점, 욕심이 둔갑한 진리를 사실인양 퍼트리고 주장하고
강요하여 겁을 주는 일은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사이비들이기에
사악한 마음에 구하여도 악한 마음에 함께 하실 성령님이 아니시거늘
성령님을 명령하는 패악하고 사악한 자들은
자기의 악에 걸리어 그 죄의 줄에 매여서
미련해져서 성경의 훈계를 혼미하게 주장하여 사이비가 되었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어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잠언 5:22-23]

하나님이시면서 낮고 낮아지셔서 인간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 ‘charity’를 간직한 믿음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인도 하시는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고 본이 되었듯,
이 시대 이 곳에서도 성령님은 똑같이 원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흔드신다.

너희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where is he that put his holy Spirit within him?
하나님이 이제 어디계시냐?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 후서 2:13]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뒤돌아보고 들어가면서.
어릴 적부터 성경을 배워가면서
부모님 특히 아버지께 성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에서 설교와 수많은 사람들의 성경 풀이와 간증을 들으면서
자라 청년이 되면서 고민한 주제가 ‘성령’ 이다.
그 당시 은사를 받아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특히 방언을 못하면 버림받은 신자로 취급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기복신앙을 향한 어그러진 길로 대형교회를 꿈꾸는  
그 유행의 시작은 미국의 대형교회(메가 처치)의 영향을 받았고
그 밑바닥에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 부흥사들의 복음주의를 앞세운
보여 주기 식 사람모우기가 자신의 영향력 과시와 은사로
잘못된 은사 주의와 이렇든 저렇든 복음이 전해진다는  
세 과시는 이미 순수한 복음을 떠나 어그러진 길을 향하였고
그 이전에 이미 잘못된 청교도 운동의 원인은 아직도 잘 아려져 있지 않다.
나의 청년시절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은사제일 주의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면서
미국의 것은 모두가 좋다는 맹목적인 숭미 주의와 와전(訛傳)된
청교도의 덫에 걸려 무분별한 온갖 잡동사니 프로그램과 신학, 책 등이 한국교회의
부흥이란 이름으로, 선교란 명목으로 부패를 부추겼음을
미국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부패해가는 교회의 변절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시간 성경을 읽고 성경 학습 책을 구입하여 공부를 하고
수많은 유명한 목사의 설교 집과 간증과 성경강해와 주석서를 읽고
또 유명한 부흥사의 부흥집회에도 참석했고
더 성경을 읽기 위하여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첫 번째로 깔아놓은 프로그램이
성경이었고 그 후 인터넷이 연결되었을 때, 또 수많은 설교자의 설교와 강해서,
유명한 신학자와 신학 책, 교리 등 온갖 책을 다운 받아 읽었고
강연 등 동영상을 보고서도 ‘성령’을 알고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성령’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다시 아침마다 성경읽기를 시작하여
속독을 하면 약6개월에 한번, 늦어지면 1년에 한번
더 정독하면 대략 1년 반,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읽었을 때
구약과 신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성령’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나름 지론(至論)이 생겼을 때
청년시절 거부하였던 거대한 부흥으로 둔갑한 은사주의의 물결을
보고 겪었던 부흥을 빙자한 잘못된 ‘성령 론’ 이라는 부패의 거대한 물결에서
반항하였던 시절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확신한 신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체감하여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도장을 새기듯
가슴에 각인(刻印, carving a seal)된 사랑 'charity' 으로
인치시고 (sealed)보호하시고
성령님이 주시는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나를 인침(sealed me)이고
우리를 인침(sealed us)이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의 끈으로 하나를 묶는,
그 끈이 순결한 사랑이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으로
소망의 끈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 모습의 손과 발과 온몸과 영혼이 되어
소망의 도구로 쓰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경륜으로 하나가 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크고 깊고 위대한 사랑,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눈이 밝아지듯이
이는 엠마오로 가는 슬픈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으로
눈이 밝아진 두 제자처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 24:31]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19-21]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According to my earnest expectation and my hope,
진실한 믿음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제 같이 인침(sealed us)을 받고 그 사랑 'charity' 의 눈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능력,
그 실마리가 권능(power of charity)이다.
이 ‘권능’ 은 지금까지 알아왔던 의미의 일반적이고 통속(通俗)적인
개념(槪念 fundamental concept)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고 별난 주장이 아닌,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본 나름의 풀이를, 나누고 싶어 글을 쓰고 있고
아주 커다란 은사를 생각하고 은사주의에 치우쳐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생소하고 낯선 성경풀이가 될지 모르겠다.
본인부터 이런 성경의 풀이를 들어보지 못했고 이런 글을 처음 쓰니까
그냥 한 신앙인의 격고 배운 고백으로 참고 하였으면 한다.
그러나 ‘권능’을 이해하면 사도들의 사도행전을 이해하기 쉽고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되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능력이 되어 간다는
본인의 고백이고,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랑이나 혼자 진리를 독점했다는 우월의식은
조금도 없음을 밝히며, 이로 인해 성경을 읽으면서 참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진리, 특히 ‘권능’을 간증하며 설명하려고
지금까지 쓰고 있고 쓴 세 가지의 글은 다시 소개하면

*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주제는 ‘하나님’
부제는 ‘공의’ 로 하나님의 의(義)

*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주제는 ‘주 예수’
부제는 ‘그리스도’ 로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

*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주제는 ‘성령’
부제는 ‘권능, 으로 진리의 권능

이 세 가지 주제의 글로 하나님 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성품과 진리를
쓸려 했는데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는 처한 환경 상 더 깊게 쓰질 못했고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은 20편 정도를 쓸려고 했는데 일상의 사정으로 6편으로
줄려 쓰다 보니 아쉬움도 많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은 두 편에서 못다 쓴 글을 보안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려 하며
우리의 능력,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와 능력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급받는 힘
성령의 전으로서 권능으로
자신의 비굴한 신앙이 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을 닮아 가고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여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가 일상의 속박에서 자유로, 은혜로,
더하여 평강을, 능력을, 권능을 받기를,
진리의 영, 성령님이 늘 함께 하길, 간절함으로 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일서 5:5-8]
세상을 이기는 믿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즉 성령이 임한 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는다는 의미로
권능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인 복음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 된 삶,
하나님의 높고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인 하나님의 의 인 공의로
살며 행하길, 인도하시고 증명하시는 능력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진리의 인치 심이라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 이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진리를 배우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읽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석과 신학 책, 강해서는 참고서 일 뿐,
성경의 같은 장, 구절이라도 우리의 이해와 인도하시는 성령님께서는
각자의 처지와 환경이 다르듯 다른 의미의 뜻으로 진리를 인도하시만
성경의 범위에 벗어나지 않으신다.
그리고 왜 우리에게는 권능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변화 당하여 세속적인 유행과 사상을 쫓고
복음을 얘기하면서도 복음의 능력을 잃어서
어그러진 길로 향하고 있는지,
시간상 이곳의 지면상 길게 쓰지 못하여 짧은 글들이 되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도하며 쓴다.

* ‘권능’ 은
권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권능 자’ 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권능을 받는다면 하나님과 같은 권력이 생기는가?
아니면 예수님 같은 능력이 생기는 건가?
아니다.
그렇게 권능(power)이라고 착각한 숫한 유명한 목사, 부흥사들이
어둠의 길로 갔고 하나님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authorized)는
기도원 원장, 목사, 부흥사 들이 이단이 되었고
더 하여 하나님의 대리인, 대언 자, 선지자, 예언자등과
예수님의 직통 제자, 계시자, 대리 자 등이 된 자 들이 진정한 능력자임을 과시하다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는데
사실 권능을 정확히 표현한 단어가 없다.
어느 신학자는 권(power) 능(authorized)이라 하고
많은 성경은 권능=power 로 사용하지만
권능(authorized)을 부여 받은 대행의 능력과 힘이라 하면 옳지 않다.
또 그것은(authorized) 어떤 권력기관이나 당국자, 국가의 권력으로 표현하였지
하나님을 어떻게 그런 권력과 비교 할 수 있는가.
권능은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얻어지는 능력이기에
권능 =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이라 할 수 있고
본인은 본인의 좀 더 세밀하고 자세한 의미로,
권능=power of charity 라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power of charit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성경에 없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다.
구약에도 ‘Holy Spirit’ 는 표현이 있고
권능은 확실히 성령님으로 받는 힘과 능력이고(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구나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간직한 사람만 받기에
(power of charity),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가장 가까운 표현이다 는
본인의 주장이다.
왜냐 하면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와 예언자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령님을 증언하였고,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과 오실 성령님을 증언하신 분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언하셨지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심이 중심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의 증인이 되었고
증인이 됨이 고귀한 사랑의 증명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
권능=power of charity 이다.
이는 권능 자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받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시기에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의 생활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듯이 공의의 생활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고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기에 권능을 받는 과정(過程)이 있다.
순서(順序)가 있기에
‘권능’ 의 더 자세한 뜻의
우리의 믿음의 시인은, 고백이
'acknowledge' 로
인정받고 허락받은 감사의 능력, 힘(power)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이 권능을 받았다했고
권능은 믿음으로 얻어 지기에
믿음의 분별력처럼 권능도 분별력 있는 힘(power)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나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공부하면서 생각도 많아
끝없이 늘어나는 영혼의 울림을 글로 써야 할 과제가 많아
때로는 누가 내 생각을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심정도 됨은
일을 하면서 써야 하기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
왜 이런 일을 시작하였는지 작은 후회감도 들고
무엇보다 자신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냐는 물음,
이것이 제일 감당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자신을 성경의 거울로 바라보는 시간이 되어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임을 시인하며 자신에게 자문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는
시간이라 우선 자신에게 유익하여 계속 쓰고 있지만,
생각을 신앙의 내면의 사상을 글로 표출하기란, 더욱이 분명한 신앙의 글로
명백히 표현하고 쓰기란, 때로는 표현의 한계로 잠시 중단하기도 하고
가능한 신학적인 용어를 피하고, 단순한 낱말의 수효의 한계로 인한 전달의 한계
그리고 빈약한 성경의 풀이로, 누군가 내 선생이 되었으면
이 글을 쓰면서도 바울과 같은 선생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바울의 반만이라도 닮은 선생이 있다면
내 스승으로 모시고 즐거워하겠다.
현실은 스승을 찾기가 힘들다.
한 때 스승으로 존경하였던 분들이 실망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었던 분들도 있다.
돌아보면 그런 분들의 어그러진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또 내게 실망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나.
현실은, 믿음의 현실인 신앙은
허공을 치는 사상이 아니며 헛것을 잡으려는 공허가 아니기에
구체적인 현실의 현상과 문제를 나름 성경으로 바라본 자신의 고백을
하면서 누군가 나를 넘어선 믿음의 사람이 나를 밟고 넘어서더라도
더 온전한 성경을 풀이한, 이 시대를 향한 외침의 글을 보고 싶다.
그래서 이글은 나의 고백이지 이 글이 완벽한 글이 아니며
신앙인의 길을 제시하는 것뿐이라 진정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혀서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로 만족하기에
이 글이 누구를 빗대어 비난하고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 이야기 일 뿐이고
오늘날 복음의 적용과 어르러진 복음의 길에서
이를 알지 못하는, 잘못됨을 알면서도 자기 의로 변절된 복음의 의(義)로
배교의 길로 들어섰고
이를 정확히 알리는 자가 드물 으니
나름 성경을 읽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오늘날의 현실의 현상을 바라보며
복음의 길, 복음을 받은 자의 길을 제시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과 동역 자들의 영혼의 심정을 그려보면서
바울이 진실한 권면이 오늘날 진리가 되어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고,
바울 같은 지도자가
그리운 시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권면은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For our exhortation was not of deceit,
nor of uncleanness, nor in guile:
But as we were allowed of God to be put in trust with the gospel,
even so we speak; not as pleasing men,
but God, which trieth our hearts
데살로니가 전서 2:3-4]

바울은 얼마나 순수하고 순전한 마음이 되었는지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속임수로 권면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이익이나 자신의 명성으로 세상의 사리의 변명으로
권면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을 감찰 하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마음의 중심에 계셔서 마음을 음직이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감찰로서
하나님께 옳게 여김을 받아
복음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기에 허락받은 자로
복음을 위탁받은 자로,
사람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성령으로)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 인 교회에 이해할 수 있도록 권하고(성령으로)
격려하며(성령으로)
힘을 얻고(성령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인 복음의 능력으로 수고와 애를 쓰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사례비를 생활비를 받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며
복음을 위탁받은 자로
복음을 전하였기에 이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온전한 복음을 전하였기에
바울의 복음은 ‘권능’ 으로 되었다.
이 권능이 짧은 3주의 방문 기간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다.
이 권능은, 복음의 능력이라
복음의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은사와 같이 함께 하기에
이는 성령님의 임재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Who hath also sealed us,
and given the earnest of the Spirit in our hearts.  고린도 후서 1:22]
인치시고, sealed us
인치시고, 무엇으로?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으로, 인침을 받고,
보증으로, 증거로,
우리의 마음에
진심의 성령을 주셨으며
진실의 성령을 주셨으며
정직의 성령을 주셨으며
우리의 영혼에 진리의 성령을 주셨음은
하나님의 임재( God's presence)로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기에
성령의 내주(來住)없는,
진리의 앎이나 깨달음, 은사는 모두 거짓이고
성령 충만, 성령의 열매는 거짓이기에
그리스도 사랑의 흔적,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모든 은사와 은사라는 방언을 다 가짜이다.
그 흔적이 성령의 인치심이기에, 성령은 진리의 영 이시기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리고 권능을 받고, 그래서 권능을 받으면
모든 거짓 은사와 은사 자, 거짓과 거짓 선생을 분별하고
분별력이 생기여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상이, 능력이,
권능이다.
그래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권능을 받고
데살로니가로 가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이심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하며
아울러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돌아가심과 부활을,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의 증인이 되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권능으로.

다시 위의 구절을 보자.
-권능의 인정과 허락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But as we were allowed of God tod be put in trust with the gospel,
-권능의 감사와 능력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함이라
not as pleasing men, but God, which trieth our hearts,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신학의 학식과 자기 자랑의 사사로운 이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기와 명성으로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은 강대상만큼 높아짐이 아니라
화려한 강대상만큼 화려한 말의 현혹(眩惑)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 참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높이려 함이, 바울과 동역 자들의 마음의 중심(our hearts)에
우러나는 기쁨이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바울과 동역 자들이 전한 복음은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even so we speak,
위탁받은, 그 말을 함으로, speak, 어떻게 our hearts 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심장으로, 가슴에 박힌 복음을.
요즘 같이 사이비들의
위탁받은 위탁자가 아니라, 대언 자가 아니라,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말이,
심장에 박힌 사랑의 말이,
권능이 되었다.
성령님이 주시는 힘으로(the power of the Holy Spirit)받은
고귀하고 순결하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로
권능(power of charity)을 받았다.
바울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소서 3:10-12]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은 짧은 3주간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설립된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감을 감사하면서 다시 방문하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는 온전한 믿음으로
더 성장하길 바라며 데살로니가를 썼고
데살로니가 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Paul, and Silvanus, and Timotheus,
un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which is in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 Grace be un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1]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였던 것은 ‘은혜’ 와 ‘평강’ 이었고
바울이 모든 교회에 보낸 편지는 ‘은혜’ 와 ‘평강’이라는 동일한 문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은혜(Grace) 와 평강(peace)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un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which is in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그 때문에 ‘은혜’ 와 ‘평강’ 이 있다.
이는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시인하고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은혜와 평강의 삶,
그래서 바울과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고
이제는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이 은혜와 평강임을 시인하며 강조하고 있다.
다시 상기하면
한글성경을 KJV는 더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1절을 보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하며
은혜와 평강을 기원 한다 는 구절이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 ==>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으로 발전해 있다.
하나님 아버지, God the Father
하나님 우리 아버지, God our Father 로 발전했고
하나님 아버지 ==>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은혜와 평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개인의 삶이 성장된 믿음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로,
여기의 '나‘에서 ‘우리’로 변하고 성장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름이
‘교회, 라는 구원을 받은 믿음의 공동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은혜로 이루어졌고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평강으로 이루어 졌다는
그러기에 이를 수없이 되풀이 하여 편지에 쓰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는,
그들의 고백과 삶으로의 시인은,
먼저 그들의 신앙 고백 후에,
먼저 그들의 가슴 한 복판
마음의 중심에
끝임 없이 피를 공급하는 심장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흔적을 남긴 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성령님의 증거로 흔적으로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임하여
그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공의)가 나타나서
이를 전해 받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은혜와 평강이 되었고
자랑거리로 소문이 났음은 변화하였음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지역에 만들어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의 길에서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기를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은혜와 평강이 떠나지 않기를 기원했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받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가 되는 한 가족이 되었으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으며
이를 믿음으로 증명하시고 보증하시고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한 몸을 이루었기에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부르심의 단서(但書)이며 조건이라,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that love God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자들
to them who are th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그런 자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의미이지,
무조건 적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는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엉터리 설교와 주장도 아니고
간증도 아니며 기복적인 고백을 요구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니다.
이는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현하는 생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은혜로
복음을 받은 자로, 은혜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성령님의 평강을 받은 자로
평강을 누리는 자의 신앙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아들
곧 주 예수 우리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9]
그리하여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의(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이 자리에서,
부르시고 또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시고, 더하여 지도자가 되기를 부르시고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리라  :30]
공의의 하나님의 아들로 의롭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의롭게 이 땅에 살다가
영화로운 영광에 참여하는 그래서 영화롭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하고 누구에게나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공평히 대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 그러다 지치고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강을
잃어버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리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6-27]

교회는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은혜와 평강을 고백하는 자 들의 모임이 예배이다.
그래서 은혜로 평강을
이를 이사야는 그리스도 우리 주를 평강의 왕이라 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주 이신가?
그분은 당신의 평강의 왕이신가?
진실로 그런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난 자
이유야 어찌되었든 은혜와 평강의 부르심에서 멀어진 자
사이비가 된 자, 신앙이 위안뿐인 종교가 된 자, 밥벌이가 된 자
밥벌이로 노력도 하지 않는 삯꾼이 된 자
무늬만 교인이고 무늬만 지도자인 자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길을 떠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온전히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안목의 정욕에 매여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 이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멸망은 마침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18-19]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복음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1:4-5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기에 이를 은혜라 하면서
은혜, 은혜, 구호처럼 외치고 노래하면서
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지
말로만 복음의 능력이라 하지만 무엇이 능력인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바라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가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고, 어떻게 그들의 믿음이 되어 믿음의 일꾼으로
믿음의 행위로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인내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이 은혜의 소식 복음은,
소식인 말로 전하였지만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린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과 함께 간절히, 간절히
간절하여서 목숨까지 내놓은 간절함으로 전 한 바울이 하나가 되어
듣고 전하는 능력이 된 것은, 능력의 말씀이 된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기에
바울과 동역 자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이 같은 형제가 되었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포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이를 배워서 능력이
되어 본이 되었으면 한다.

이 구절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주된 고백이 아닐까 한다.
이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대략 A. D50-51 년으로 추정되며 바울이 2차전도 여행 중
데살로니가에 머문 약 3주간에 설립된 교회이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17:1-2]
세 안식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들이 세운 교회라
아직 영적으로 어린 데살로니가교회는 외적으로 유대인의 박해와
내적으로 옛 생활의 유혹이 있었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면서
디모데를 베뢰아에서 데살로니가로 파송하였고
나중에 디모데로 들은 기쁜 소식으로 바울은 감사하였지만
아직 재림의 문제와 도덕적인 문제 등으로 또 박해와 시험에 대하여
도와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고린도에서 썼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이 어려운 환난 중에서 말씀을 받아 삶이 변하여
그들의 믿음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고
마침내  각 지방에 믿음의 소문이 퍼져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6-8]
바울과 동역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머문 짧은 시간에
구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증거하며 증인이 되었고
또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2:8]
바울과 동역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뿐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했음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교회이고
이를 본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는 자의 본을 보여줌으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어떻게 짧은 3주 만에 복음을 받아드린 데살로니가 교회도 묘하지만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가게 된 하나님의 섭리도 묘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소동이 일어나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2:2]
고난과 능욕을 당하며 데살로니가로 갔으나
거기에서도 유대인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는데도 복음을 전했다.
그것도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울이라 핍박이 많았는데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더 놀라운 일은 유대인 회당이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복음의 발판이 되었고
세계복음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핍박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도 없고
핍박이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중 이방인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인 바울의 시각에서 보면 이방교회이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이 바라본 바로도 이방교회이지만
이방교회가 설립된 것도
유대교와 다른 이방 종교의 박해를 받으며
교회로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유지 되었고 본이 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라
이는 하나님의 계획인 경륜으로 되었음이 틀림없다면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방교회 보셨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공평 공정하신 분이시라 이스라엘과 분리하여 이방교회라
하지 않으셨음은,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소식이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bond nor free,
there is neither male nor female: for ye are all one in Christ Jesus.
갈라디아서 3:27-28]
그리스도의 복음의 옷을 입으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금의 이스라엘인이나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이며
더욱이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와 이방의 벽이 헐렸고,
왜 예수님은 성전을 헐 우신다 하셨고 성전을 헐 으셨나?
아직도 성전이 건물인가?
하기야 교회건물을 성전이라 하는 자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지가 아닐뿐더러
더 이상 그들만이 선택된 민족이 아니고 그들도 복음을 전할 족속인 뿐인데
무엇으로 그들과 이방인을 나누는가?

어느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였기에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는 대체신학을 주장하고
우리의 교회를 ‘이방인 교회’ 라 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예루살렘 제삼 성전의 완성이라 주장하고
일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를 박해한
지난 과거의 역사의 일을 사죄하여야 한다 주장하고
그런 세대주의 무리에 속한 목사가 동성결혼을 반대로
교단을 탈퇴한다 하여 영웅 취급을 받는 일을,
그가 교계갱신과 발전을 위한 토론에서 의견을 내놓고 무엇인가 변화를 바라는
이곳의 기사를 보면서
또 성경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Thus saith the LORD unto this people,
Thus have they loved to wander, they have not refrained their feet,
therefore the LORD doth not accept them;
he will now remember their iniquity, and visit their sins.
예레미야 14:10]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아주 오래전 친구 딸의 세례를 참석했다.
맨해튼에 위치한 프랑스 성당에서 세례를 한다하여
대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의 신자라
거절하였더니 증인이라도 되어 달라 하여
유럽식 가톨릭 세례를 어떻게 받는지도 궁금하여 참여 하겠다 하였고
성당에 도착하였더니 프랑스 인 신부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면서
아버지가 가슴에 안은 금발의 딸과 아버지를 위하여 서서 기도를 하기에  
같이 기도를 하였지만 나는 아버지와 딸과 신부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저들이 주님을 올바로 따르게 하여주십시오.
딸은 이제 세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삶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사 온전한 신앙인이 되게 이끌어 주십시오.’
신부는 기도를 마치고 아이에게 손에 물을 젖서 머리와 온몸에 뿌리고
주문을 하듯 세례의 교리를 알아들을 수 없이 빠르게 중얼거리듯 울프고
한 쪽 벽면으로가 옆 사진과 조각의 장식으로 이동하여 그렇게 하고
아마 20여 번을 자리를 옮기고 또 옮기고 성당 벽면을 한 바퀴 돌아
기도하고 손끝으로 물을 뿌리고, 아이는 손끝의 물이 얼굴에 닿을 때 마다 울고불고
두 시간을 그렇게 하였고, 지루하다 못해 내게는 고역스러운 세례를 마치고
세례 만찬으로 프랑스 식당에 가서 신부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은  기억이
아직 생생한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식이 격식이 되고 전통이 되어
종교화가 되어 화석(化石)되었는지, 안타깝고 슬프고 답답하다.
그러면 가톨릭만 그럴까.
아니다. 개신교도 이미 종교의식에 젖어있고
그 의식을 예수님은 외식이라 하셨고
이는 인간의 내적인 경건을, 외적인 틀에 맞춘 권위라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거룩' 이라는 의식으로 치장하면 이미 탐욕의 길에서 조직을,
신앙이 행위를 위한 욕심의 의로 변절되면, 계급적인 조직의 종교가 되고
이에 신앙심을 덧칠하면 이미 종교 조직이 되어
한 몸을 이루하는 교회는 한 몸이 아닌 조직을 위한 조직 유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를 시대의 사조로 받아 드리는 무리가 되면
종교의식의 껍데기만 남은 종교인이 된다.
생각해 보라.
현대의 종교인이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이 간절히 원하셨던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우리를 사랑했던 그 고귀한 사랑으로 새로운 변화를 바라셨던
제자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이었을까?
형제가 자매가 모인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몸을 이루는 형태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며
조직이 직분이 되어버린 모습일까?
직분이 조직이 되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고
모두 모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세상과 구별된 성도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도로 바꿀 사명이 있는데
어찌 오늘날의 교회의 조직에, 생명의 존귀함을 잃었는가?
어찌 교회 건물을 위해, 온 몸의 힘을 빼고 있는 힘마저 탈진하여 소진한
헌신(獻身)을 강요하는가?
이런 생명을 경시한 비천한 문화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
요한이 말한 생명의 부활(resurrection of life, 요한복음 5:29)로
나오는 삶을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된 믿음의 공동체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란 말인가?
누가 그렇게 존귀한 공동체의 주인 노릇을 하는가?
누가 그런 권위를 주었으며 성경 어디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일이
있었던가?
그 변절된 사도의 권위가 복음을 능력을 감소시켰고
사도의 권위가 더 권위를 더하여 권력이 될수록 부패하였던
교회사를 기억하는가?
기름을 부었다는 선별된 선민 화 된 집단은 복음을 권력의 도구로 삼았고
권력 착취의 수단으로 삼고 세상 권력자의 권력화가 되어 신분을 나누고
평민과 농민 노동자의 착취자가 되어 수탈(收奪)하고  
권력유지를 위하여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으로
고문(拷問)의 방법으로 온갖 고문 도구를 만들어 낸 세상 고문의 역사는
지난 유럽과 미국의 교회사임을 아는가?

틀에 매인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닮는 나날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그의 부활의 신앙은
그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죽기까지 사랑한 형제자매 사랑은
권능을 알지 못하면 그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
권능이 무엇인가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이 지도자라면
믿음으로 바라보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는,
믿는 자라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 이어야
하고 특히 교회의 지도자라면 더욱 그래서 어느 정도 세계역사를 배워서
믿음을 현실의 상황에 대조(對照)하여
시대(時代)의 흐름을 읽고 시대의 신앙 대안을 내놓고
신앙의 길을 제시하여야 하는데 그런 안목(眼目)을 가진 지도자를 볼 수가 없고
그런 글을 볼 수가 없다.
설교는 주장은 창세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예언을 하고
철학과 음악과 심리학과 사회상을 죄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나름, 이 시대를 흐름과 현상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 하지 못한다면
미안하지만 종교로 밥벌이 하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에게 현혹되어
눈이 먼 맹신자이거나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광신자라 종교의 노예라고
‘5.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에서 조선의 신분제도를 언급하면서
종교의 계급 화된 신분 화를 쓰고 싶었지만
차마 노예라는 말을 쓰고 분란을 일으키기 싶지 않아 피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틀고 어그러진 길로 가면
진리의 자유를 잃어 종교의 노예가 된다.
왜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분별의 눈이 없을까?
분별력을 잃었다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다는 증거이고
성령님의 인도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까닭이다.
생각해 보자.
왜 한국과 미주 교회가 하루도 거르지 못하고 온갖 추문으로
떠들썩하고 일상화 되었는지, 언론의 비난을 받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왜 그리 정직하지 못하고
서로 옳다고 서로를 비난할까?
죄의 노예가 된 종교인들...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셨을까?
어떻게 하여야 온전한 교회의 예배모습인가?
화려한 건물의 교회에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묵직한 소리와
성가대의 중세시대적인 군대 같은 복장으로
목사의 설교 제목과 내용에 맞춘 찬송가로 찬양하는
높고 낮은 목소리를 고용(雇傭)한 성가대원의 소리와
평상시 목소리도 아닌 가성의 목소리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고
이에 화답받기를 원하는 제사장처럼 복장을 따로 한 가운을 입은 목사의
빈곤한 성경의 풀이로
예화를 반복 반복하는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헌금 바구니를 이리 저리 돌리며 헌금을 거두고
눈물을 짜는 헌금 송과 피아노 반주의 가사처럼 헌신의 마음을 자아내는
희생된 마음을 원하셨을까?
헌금을 주보에 헌금별로 공포까지 하여 헌금의 금액이 믿음과 축복의 척도가 되었고
음성 좋은 사람만 모인 성가대, 그래서 은혜로운 찬송이라면
눈과 귀를 막고 싶다.
무엇이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대답일까?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몫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가슴에 그리스도를 간직한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면
그 흔적 때문에 가슴을 울려서 나오는 소리의 말, 대답은, 각자의 몫이고
그 흔적이 없어 영혼을 흔들지 못하는, 가슴의 복판을 울려 나오는 대답이
아니라면 이는 성령의 부재(不在)라
그것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도 아니다.
예배의 시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공의)를
성경을 통하여 찾는 시간이며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형제 자매된 모임이라 찬양과 감사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결단의 시간이라
자백하여 복종하려는 자복(自服)의 시간이라
우리의 영육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겠다는 결단의 행위인
진정한 삶의 산제사 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참석한 자로
낮아짐의 시간이라 주께서 높아지셔서 주를 따르는, 능력을 주신 성령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 영혼과 온몸으로 ‘서로 사랑하라’ 는 사랑의 시간이며 모임이라
이를 실천하고 밖의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삶이 진정한 산제사이고 진정한 예배이다.

그러나 어느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여
바울을 본받아 교회를 위하여 애써서 헌신하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으라 는 설교를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이 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아직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면
우리를 대속하여 고난을 받으신 ‘고난’ 이
속죄적인 고난이 남아 있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되면
완전한 복음이 아닌 우리가 남은 고난을 받아야 남은 고난이 완성된다고,
잘못 뀌어진 단추 하나로 인해 옷이 삐뚤어지듯이 잘못된 해석으로
비틀린, 어그러진 복음이 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교회의 일군임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이 헌신하고자 하는 의미로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 는
표현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 표현 했다.
베드로 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
이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며,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본을 보였듯이 주님을 따라오게 하였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벽하나,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몸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은
고난과 환난 심지어 순교도 감수해야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망으로
인내하고 믿음이 행위가 되어 보임으로서 여러 교회에 자랑이 되었고,
그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 후서 1:4-5]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이어서
‘세대주의’ 의 시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로 널리 알려졌고
그는 자신 스스로 성경의 깨달음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성경을 재해석하여 그가 찾은 진리의 주장이기에 그의 교리와 서신 등
오컬트 언어를 사용하였고, 런던에서 아일랜드계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 22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회심한 후 1년 만에 그 직을 사임하고
영국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으나 무력한 신앙과 형식에 매인 예배와 성직제에 회의를 갖고 규례 없는 교회생활 등을 강조한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을 결성하고  특히 성직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형식에 억매이지 않는 예배와 모임을 갖고 이것이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미국의 무디 부흥운동과 근본주의 운동인 예언 연구 부흥집회를 수십 차례 인도하여
세대주의적 강론으로 부흥회를 이끌었기에 그 영향으로
텍사스 달라스 신학교와 LA 탈봇 신학교 등이 있다.
그는 성경 전체를 나눈
(1) 홍수 이전까지의 족장 세대
(2) 노아 세대
(3) 아브라함 세대
(4) 이스라엘 세대
(5) 이방인 세대
(6) 성령세대
(7) 천년왕국세대 등의 7 세대로 구분 한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수많은 우리 아버지 연세의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그 이유는 와전(訛傳)된 청교도 영향으로 문자적인 해석의 왜곡(歪曲)된
근본주의적 신학의 사조인 청교도 신학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천년을 하루 같이’ 해석하여 인류의 역사를 5천년으로 보았고
과학의 발달로 인류학자들인 과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대세 때문인지, 7세대로 구분한 세대주의의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6천년으로 본다.
이런 영향으로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라는, 계급적인 유교와
신의 중재자라는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신분의 분리를 당연시 하는 풍조가 있어서 강대상 주위에 줄을 묶어놓아 그 지역은 신성한 금지 구역이 되었고 목사는 성별(聖別)된 성인이 되어 있었고, 그 후 하나님의 종은 목사만을 호칭하는 신분이 되어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신자와 신분으로 가르는 반 복음적인 분리가 일반화 되었다.

세대주의는
세대마다 구원의 방식이 다르기에 문자적인 단순하고
비 성경적인 종말론은 그릇된 종말론의 온상이 된 것은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한국에서 널리 불리는 존 넬슨 다비의
종말론에 대한 현대적인 형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정점에
있게 만들어 전 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기에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신앙이 한국교회와 해외 한국교회에 널리 퍼졌고
이런 세대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 (70년대 말로 기억하는) 널리 퍼진  
U.N 그리고 EU 유럽연합의 적그리스도 설 및 세계 종교 통폐합
가톨릭의 종교 통폐합 과 교황의 사탄설과 세계 식민지 화 설.
적그리스도 시리아 탄생 설.
그리고 666을 받으면 지옥 간다는 바코드, 컴퓨터, 신용카드, 베리칩 등
666 설 등의 종말론은 세대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이와 달리 세대주의자가 아니면서 극단적인 성경해석으로
이런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조급한 신앙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음모론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음모로 단정하여
음모론이 뿌리 깊어 음모론과 음녀론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한국교계는 얼마나 성경의 깊이가 얇은지,
넉넉한 신앙생활을 잃어버린 반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세대주의가 다 악은 아니나 성경을 구분하여 이해하기 쉽고
도움이 되는 신학적인 주장도 많으나 세대주의가 대체신학이 되면
복음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세대주의자로 스코필드(C. I. Scofield, 1843-1921),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 1972), 조직신학 책을 낸 D. S. Chafer, 무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James M. Gray, J. Dwight Pentcost, John F. Walvoord 등이 세대주의 체계를 이어나갔고
세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교는
무디 성경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 웨스턴보수침례신학교,
필라델피아 성경대학, 달라스 신학교 등이 있고
우리나라는
인터콥의 ‘백투 예루살렘’(BTJ)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
한국 이스라엘성서연구소’(KIBI, 대표 온누리 교회 송만석 장로)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
온누리 교회 치유 사역자 김성진 장로
온누리 교회 손기철 장로 등이 있다.
온누리 교회는 분별없는 신유 및 회복 사역, 경배와 찬양 등은
이미 오래전에 경건의 모습을 잃었고 온누리 교회가 유별난 이유와 원인은
극단적인 복음의 치우친 세대주의와 세속화된 사역과 감성적인 예배는
감성적인 믿음의 자기 도취(陶醉)로 영혼의 부패를 불러들이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이익은 방도가 되었기에 유별난
지도자자들을 배양했고 이는 어그러진 길로 간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지도자들을
닮아 간다고 생각하다 어느 날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김기동 목사 인터뷰
"장경동 목사, '김기동 이단 아니다' 말하고 다닌다"
김기홍, 김지철, 하용조, 최이식 목사 등도 베뢰아교육 받아...베뢰아 출신 총신 교수는
73년 당시 학생인 듯...
“장경동, 하용조, 김지철, 김기홍 목사도 베뢰아 교육에 참여했다”
김기동 목사(성락침례교회, 베뢰아측)가 2일 한기협 주최 간담회에서
나겸일, 김삼환, 윤석전 목사를 자신의 제자라고 밝힌 것과 총신대 교수 중에도
베뢰아 출신이 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밝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김기동 목사로부터 베뢰아 교육을 받았던 인사들이 추가로 확인돼 파문은
쉽게 가라않지 않을 전망이다.
뉴스파워 기사입력: 2006/10/04 기사 중에서
관련 사이트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6955

이 기사를 읽고 여기 저기 찾아보면서 많은 기사를 읽고
해당되는 사람들의 설교도 들어보고 이해 할 수 있었다.
김기동 출신이라니,
신학 노선(?)을 바꾸기는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고
소위 성령님께서 속과 안을 뒤집어 놓아서 삶과 죽음의 선을 넘나들어야
바뀔 수 있을 만큼 힘들음을 알기에
오래 전부터 이들에 갖는 반감과 의문의 정체를 알수있었다.

이리 저리 세속적인 부흥의 물결에 흔들리다 성장의 늪에 빠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한 불쌍한 대한민국과 미주 교회여,
하나님, 긍휼을 내려주소서.

아멘넷의 기사
유대인을 위한 '샬롬 예루살렘, 브루클린 페스티벌'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590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곳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일행이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의 제자와 바울 그리고 그의 동역 자들, 또 예수님이 인도한 수많은 무리들은
모두 이방인들 인가?)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에,
공의에 벗어나는 주장이라
부인이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능력됨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인가?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을 단념할 수 없으신 애착을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부만 선택된,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과업은 두 개의 집을 짓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집(성전)이요, 또 하나는 다윗의 집(유다 왕국)이다.
유대교인은 그 집을 지을 자인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여긴다.
집이 지어져야 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인데,
그 터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그 이슬람 사원이 먼저 무너지고, 그곳에 메시아의 집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정형남 선교사
출처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7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함이라
빌립보서 2:15-16]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이어서
‘세대주의’ 의 시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로 널리 알려졌고
그는 자신 스스로 성경의 깨달음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성경을 재해석하여 그가 찾은 진리의 주장이기에 그의 교리와 서신 등
오컬트 언어를 사용하였고, 런던에서 아일랜드계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 22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회심한 후 1년 만에 그 직을 사임하고
영국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으나 무력한 신앙과 형식에 매인 예배와 성직제에 회의를 갖고 규례 없는 교회생활 등을 강조한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을 결성하고  특히 성직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형식에 억매이지 않는 예배와 모임을 갖고 이것이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미국의 무디 부흥운동과 근본주의 운동인 예언 연구 부흥집회를 수십 차례 인도하여
세대주의적 강론으로 부흥회를 이끌었기에 그 영향으로
텍사스 달라스 신학교와 LA 탈봇 신학교 등이 있다.
그는 성경 전체를 나눈
(1) 홍수 이전까지의 족장 세대
(2) 노아 세대
(3) 아브라함 세대
(4) 이스라엘 세대
(5) 이방인 세대
(6) 성령세대
(7) 천년왕국세대 등의 7 세대로 구분 한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수많은 우리 아버지 연세의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그 이유는 와전(訛傳)된 청교도 영향으로 문자적인 해석의 왜곡(歪曲)된
근본주의적 신학의 사조인 청교도 신학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천년을 하루 같이’ 해석하여 인류의 역사를 5천년으로 보았고
과학의 발달로 인류학자들인 과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대세 때문인지, 7세대로 구분한 세대주의의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6천년으로 본다.
이런 영향으로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라는, 계급적인 유교와
신의 중재자라는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신분의 분리를 당연시 하는 풍조가 있어서 강대상 주위에 줄을 묶어놓아 그 지역은 신성한 금지 구역이 되었고 목사는 성별(聖別)된 성인이 되어 있었고, 그 후 하나님의 종은 목사만을 호칭하는 신분이 되어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신자와 신분으로 가르는 반 복음적인 분리가 일반화 되었다.

세대주의는
세대마다 구원의 방식이 다르기에 문자적인 단순하고
비 성경적인 종말론은 그릇된 종말론의 온상이 된 것은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한국에서 널리 불리는 존 넬슨 다비의
종말론에 대한 현대적인 형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정점에
있게 만들어 전 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기에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신앙이 한국교회와 해외 한국교회에 널리 퍼졌고
이런 세대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 (70년대 말로 기억하는) 널리 퍼진  
U.N 그리고 EU 유럽연합의 적그리스도 설 및 세계 종교 통폐합
가톨릭의 종교 통폐합 과 교황의 사탄설과 세계 식민지 화 설.
적그리스도 시리아 탄생 설.
그리고 666을 받으면 지옥 간다는 바코드, 컴퓨터, 신용카드, 베리칩 등
666 설 등의 종말론은 세대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이와 달리 세대주의자가 아니면서 극단적인 성경해석으로
이런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조급한 신앙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음모론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음모로 단정하여
음모론이 뿌리 깊어 음모론과 음녀론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한국교계는 얼마나 성경의 깊이가 얇은지,
넉넉한 신앙생활을 잃어버린 반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세대주의가 다 악은 아니나 성경을 구분하여 이해하기 쉽고
도움이 되는 신학적인 주장도 많으나 세대주의가 대체신학이 되면
복음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세대주의자로 스코필드(C. I. Scofield, 1843-1921),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 1972), 조직신학 책을 낸 D. S. Chafer, 무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James M. Gray, J. Dwight Pentcost, John F. Walvoord 등이 세대주의 체계를 이어나갔고
세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교는
무디 성경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 웨스턴보수침례신학교,
필라델피아 성경대학, 달라스 신학교 등이 있고
우리나라는
인터콥의 ‘백투 예루살렘’(BTJ)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
한국 이스라엘성서연구소’(KIBI, 대표 온누리 교회 송만석 장로)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
온누리 교회 치유 사역자 김성진 장로
온누리 교회 손기철 장로 등이 있다.
온누리 교회는 분별없는 신유 및 회복 사역, 경배와 찬양 등은
이미 오래전에 경건의 모습을 잃었고 온누리 교회가 유별난 이유와 원인은
극단적인 복음의 치우친 세대주의와 세속화된 사역과 감성적인 예배는
감성적인 믿음의 자기 도취(陶醉)로 영혼의 부패를 불러들이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이익은 방도가 되었기에 유별난
지도자자들을 배양했고 이는 어그러진 길로 간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지도자들을
닮아 간다고 생각하다 어느 날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김기동 목사 인터뷰
"장경동 목사, '김기동 이단 아니다' 말하고 다닌다"
김기홍, 김지철, 하용조, 최이식 목사 등도 베뢰아교육 받아...베뢰아 출신 총신 교수는
73년 당시 학생인 듯...
“장경동, 하용조, 김지철, 김기홍 목사도 베뢰아 교육에 참여했다”
김기동 목사(성락침례교회, 베뢰아측)가 2일 한기협 주최 간담회에서
나겸일, 김삼환, 윤석전 목사를 자신의 제자라고 밝힌 것과 총신대 교수 중에도
베뢰아 출신이 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밝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김기동 목사로부터 베뢰아 교육을 받았던 인사들이 추가로 확인돼 파문은
쉽게 가라않지 않을 전망이다.
뉴스파워 기사입력: 2006/10/04 기사 중에서
관련 사이트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6955

이 기사를 읽고 여기 저기 찾아보면서 많은 기사를 읽고
해당되는 사람들의 설교도 들어보고 이해 할 수 있었다.
김기동 출신이라니,
신학 노선(?)을 바꾸기는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고
소위 성령님께서 속과 안을 뒤집어 놓아서 삶과 죽음의 선을 넘나들어야
바뀔 수 있을 만큼 힘들음을 알기에
오래 전부터 이들에 갖는 반감과 의문의 정체를 알수있었다.

이리 저리 세속적인 부흥의 물결에 흔들리다 성장의 늪에 빠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한 불쌍한 대한민국과 미주 교회여,
하나님, 긍휼을 내려주소서.

아멘넷의 기사
유대인을 위한 '샬롬 예루살렘, 브루클린 페스티벌'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590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곳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일행이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의 제자와 바울 그리고 그의 동역 자들, 또 예수님이 인도한 수많은 무리들은
모두 이방인들 인가?)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에,
공의에 벗어나는 주장이라
부인이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능력됨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인가?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을 단념할 수 없으신 애착을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부만 선택된,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과업은 두 개의 집을 짓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집(성전)이요, 또 하나는 다윗의 집(유다 왕국)이다.
유대교인은 그 집을 지을 자인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여긴다.
집이 지어져야 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인데,
그 터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그 이슬람 사원이 먼저 무너지고, 그곳에 메시아의 집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정형남 선교사
출처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7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함이라
빌립보서 2:15-16]

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들어가면서,
얼마 전 데살로니가 서를 읽는 중
게시판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님의 글 ‘앞서 오신 하나님’을 읽고
짧은 글에 생각이 많아 서성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는 몇 댓글을 읽고
상반된 글의 주장이라 즉각적인 반응은 이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으로 성경을 본 다는가?

성경은 우리가 필요할 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지만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깨달음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더 깊은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 지식을
얻어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자신을 분별하고 믿음을 확정하는 길은
이미 복음을 받은 자로서 은혜의 길이라, 받은 은혜를 나누려 하기에
이 글이 온전하여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글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영광이 되고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는 모두가 되자는 외침이길
간절히 바라기에 성경을 읽고
또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지만 이 글이 완벽한 글이 될 수도 없고  
그러나 완벽한 선이신 주님을 따라서 제자의 길을 가는 신앙의 삶에
이글의 고백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이지
혼자 옳다는 독선은 아니나 읽기에 조금 과한 표현이 있음은
나름 성경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적용한 복음의 바른 길에서
어그러진 길로 향한 사람들과
복음을 맹신적으로 대하고 맹신적인 순종과 헌신 더 하여 광신에 절은
분별과 치우침에 대한 경고로 인함을 밝혀둔다.

지식,
지식에 지식을 더 하여야 하는데 이 지식의 앎을 막아버린 자들과
지식을 비틀어 버린 자들이 배교를 하였고 이런 집단이 사이비가 되어
이단이 됨을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사와 현실에서 수 없이 보는데
이제는 능력이 지식에 있지 않고 무조건 적인 순종과 헌신에 있다고
가르치고 가리키고 강요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고 이런 일들은
이미 지난 역사 속에 수 없이 많았고 지금도 맹신과 광신자를 양성하여
신도를 조종하는 수단으로 삼고
주위의 교회에도 이런 사이비 지도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런 주장이 이곳에서도 수 없이 일어났고 이에 동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없이 믿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망언으로 설교하고 글을 쓰는가.
이 지식에 대하여
지식에 능력이 있지 않고 지식의 순종과 헌신에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옳지 않다.
성경의 지식은 히브리어 빈(bin)으로 분별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의미하고
이는 앎만의 지식이 아니라 분별하고 더 깊게 이해하고 판단하여 실행하는 언행까지 전체적인 총체(總體)이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령인 규례와 법도를 배우고 행하기까지가 지식이고 지혜라 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 4:5-6]
자세히 보면
어디에 앎만이 지식이라 했는가.
더 자세히 보면 ‘기업’ 이라는 단어가 눈을 끈다.
그 당시의 기업으로 차지할 땅이 가나안 땅이 이었다면
가나안 땅에서도 지혜로 지식이 되어 본으로 보이는 백성,
지혜와 지식으로
가나안의 주된 신 ‘엘, 을 비롯한
다산(多産)과 비와 풍요의 신들인 바알과 하다드 신, 엘의 아내 ‘아세라(A serah),
기술의 신‘코타르’  풍요의 여신‘아스타르테’ 재앙과 지옥을 주관하는 ‘레셰프’ 등
이방의 우상을 멀리해야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지 못했고 가나안의 풍요한 생활은 점차 우상을
섬겼기에 하나님은 이방 족속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괴로움을 주고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다.
요즘의 표현으로
신자로 이 땅에 살면서
이곳이 가나안이며, 삶은 터전이 기업이 되어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어
불신자들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삶을 보여주어야 하고
신자들이 모인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 서로 형제와 자매로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하늘나라의 모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가?
믿는 자들끼리도 지식이 없어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본을 보이겠는가?
같이 합심하여도 모자란 시대인데
끼리끼리의 분열된 모임이 무슨 힘이 있겠고 열심을 낸들 자기들끼리의
열심인데 개혁까지 하겠다니 이런 만용이 없다.
목사는 목사 끼리, 은퇴하여도 은퇴목사 끼리
장로는 장로 끼리, 은퇴하여도 장로 끼리
이제 교회 안에서는 안수 집사끼리, 서리 집사를 나누고
높으신 회당 장 같은 당회의 당회장도 있고
중세적인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평신도라니,
패를 나누는 패거리 교회와 교계가 되었다.  
그리고도
‘평신도를 깨우라’
‘복음의 야성을 가지라’
‘교회 중심의 주인 의식을 가지라’
개혁을 외치든 모두 헛소리 일 뿐이다.
진실로 신앙의 작고 조그마한 믿음의 양심이 있다면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바라보자 !
만일, 이 시간 예수님께서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 하실까?
자신에게는 어떻게 말씀 하실까?
이제 글 쓰는 자신은 신앙 양심상, ‘주여!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린 반가움으로 영접하지 못함을 실토하고
평상시 수없이 절박한 순간과 고통의 시간에서도 도저히
‘마라나타 !’ ‘주님 어셔 오시옵소서!’
사실 그런 믿음이 없어 오히려 긍휼을 구하기에
내게는 남들처럼 ‘주님 이제 오시옵소서!’ 하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도 없고
강건하여 준비된 세월을 보내지도 못하여 준비된 오늘 이순간도 부족지만
그래서 그런 투정을 할 수 있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셔서 정의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사랑으로, 심판하실,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고 마음으로 확정하고 확정하였기에
더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은 패거리 모임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끼리 끼리’ 의모임을 좋게 보실까?
성경으로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려할수록
자꾸 자꾸 세례 요한의 외침이 들린다.
‘독사의 자식들아!’
신앙이 종교가 되어 의식에 매인 종교지도자와 종교인들을 향하여
왜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으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외쳤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구조와 조직에 대하여 말은 풍성하고 이론적인 정의에 대하여
늘 듣고 말하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를 교회가 실천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교회의 건물에서 종교의식에 절은 현대의 교회는
전혀 성경이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만족과 위안을 삼는 종교이지
신앙이 아니라서 지도자까지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하니,
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은
어떻게 성경공부를 하였더니 지식에 머물러 성장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목회자들의 헛소리를 셀 수 없이 들었는데
이는 자신의 무력한 진리의 깊이를 모면하려는 변명이며
자신들의 무식을 기피하려는 변명이라 이런 자들은 선생이 되면
안 될 자 들이었다.

신약에서
지식에 대하여 윗글의 신명기와 같은 구절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For to one is given by the Spirit the word of wisdom;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by the same Spirit; 고린도 전서 12:8]
이는 성령의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와 지식을 다른 은사로 보기도 하나 지혜와 지식은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았고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래서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같은 성령으로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지혜와 지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따라서
일하는 직분은 다르나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은 같으며,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서리집사가 직분이 다르나 계급이 아니며
같은 신분으로 다 같은 성도로 직분이 다르며
목사나 세탁소 주인이나 직원이나 다 성도로 자기 삶의 터에서 성도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보여줄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자칭 주의 종이라는 목사도 심판을 비켜 갈수도
없을뿐더러 결국은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종당에는 주님께서 판단함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목사와 교회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옳지 않은데도 오래 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이를 이해 못한 다면, 신학을 했다면서 이런 헛소리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라 지혜가 없는 삯꾼일 뿐이다.
성경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에 해당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계시기에
마땅히 지혜와 지식으로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분이시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지혜의 지식이
복음이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뜻으로 공의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 지식을 알아 감은 입술로 전해지며 입술에 머물지 않고
가슴의 복판, 중심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따라서 머리에 간직하고 손과 발로 온몸으로 행하기까지를
지식이라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입에 두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Wise men lay up knowledge: but the mouth of the foolish is near destruction  잠언 10:14]
믿음에 두어 삶의 생활에 실천하고,
따라서 지식이 행위까지 듯이 참 믿음도 행위까지 포함되며  
행위의 그 공급하는 힘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에 두고
성령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지식과 지혜는 은사이며
우리 모두가 선물로 받은 믿음의 분별이라
믿음이 성장하면 분별력도 성장하게 된다.

지식에 대하여 만큼은 다시 쓰겠지만
지식을 입에 대기만 한 자들을 대하면 더 놀라운 괴설과 괴변으로
복음을 설명하며 복음을 비틀고
복음의 능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복음의 능력을 감소하고
종당에 시인하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의로 부인하고 재물의 욕심으로
온 몸과 온 생활로 부인하는 자들은
한국이나 이민교회에 넘쳐 남은
교회가 세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자들은 버릇같이 ‘주의 영광’을 외치지만
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합리화에 늪에 빠져서 스스로 노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몸을 위하여 매진하는 자들이라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But all these worketh that one and the selfsame Spirit,
dividing to every man severally as he will.]
자신의 뜻을 성경에 과녁에 맞춘
자신의 의지를 호응받기 원하기에 버릇처럼 ‘영광을 돌리자’ 한다.
이 지식은 근본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며
성령님께서 이를 증명하시기에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소망의 지식을
사랑의 지식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 져야 하는데  
어느 이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어둠의 길로 간 사람들은 셀 수도 없고
유명한 목사, 부흥사, 은사로 사도가 되었다는 직통계시 파들 등
그들이 혼란한 교계를 만들었고 이런 자들의 공통점이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교만으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막은 어둠의 세력이라
시각의 보기에 아름다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자들임을 안다면,
간절히 그들의 실상을 알기 원한다.
흔히 원죄라는 죄도 그런 시각으로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the LORD God to grow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fe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9]
시각으로 보면
아름다운 에덴동산 그 동산 가운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그리고 뱀이 있었다.
and evil.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3:5]
이렇게 유혹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shall be as gods,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 knowing good and evil.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 된다는
하나님의 심정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 의 표현은 이미 믿는 성도로서의 처지를 떠난
본분을 망각한 교만하고 오만한 자세이다.
그냥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신앙에서 구하여야 할 것을
앞서간 표현은 성경보다 앞서간 성경의 해석을 하여
과대 해석 하여 어그러진 말로 선동하는, 어그러진 패역의 길로 간 수많은 사람들을
성경이 증거하고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다.
다시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의 받은 자들의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잠언 23:19]


6.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맺으며)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For now we see through a glass, dark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shall I know even as also I am known.]
그 때는 구리 놋으로 거울을 만들었기에
거울의 표면에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지 않았듯이,
이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아 희미하나,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으로 돌아가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안다고 하지만
아직 부분적으로 알아 희미하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의(공의)가 아직 믿음이 온전치 않아 희미하나,
이제, 주께서 나를, 우리를, 온전히 지금의 상태를 아시는 것 같이
그 때에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는
주께서 나를,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된다.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는 이 13장에
사랑이 없으면 = have not charity, 사랑은 ~하지 아니하며. 8번
사랑 = charity, 사랑은 ~ 하며. 7번 나타나 있다.
이는, 사랑, ‘charity’ 은 모든 걸 감싸주는 무조건 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道)로 분별된 사랑을 의미하기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를 믿고 체험하는 신앙의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약속을 믿는 믿음,
이 믿음의 결실은 종당(從當)에 사랑이신 하나님께 돌아가기에  
믿음의 완성은 사랑 ‘charity’ 이다.
소망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 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공의)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charity’ 의 바램이라
소망의 완성은 사랑 ‘charity’ 이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이 이루어낸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의 이 땅에서의 실현이고,
하늘나라에서의 완성이라,
사랑‘charity’ 은 위대하고 영원하기에,
바울은
이토록 위대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체험하고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로 강력하게, 강압적으로 강권(强權,constraineth)하였고
이를 고린도교회 같은 우리 시대, 개인과 교회를 향한 강권으로 받아드려
바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 나를 강권하였고,
마음속에 물밀듯이 일어나는 강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 전서5: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고
그가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 살아나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 으로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후서5:15]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무엇인가?
그 사랑으로,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6편의 글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바울의 심정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강권함은,
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그 사랑‘charity’의 능력이 믿는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고,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검이며, 우리의 평안이며, 우리의 기쁨이라
죽음까지도 유익하기에,
그 사랑 ‘charity’ 의 소식, 복음을 받은 자로, 사랑의 빚 진 자로
그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먼저 자신을 향한 강권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서,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산제사가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자신이 변하고 우리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사랑은, love  
사랑의 하나님, the love of God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사랑을 증명하시는 성령님의 사랑, love 이
우리의 믿음, 소망이 되어 하나님의 의(義)인 복음이 세상에 전도되어
공의의 하나님(righteousness of God) 의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흘러, 공의가 만민의 빛이 되게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이사야 51:4]
그러다 늙어 백발의 면류관이 같이
[백발의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21:3]
그러다 주님을 따라 구하는 생명과 공의의 영광을 얻고,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잠언 21:21]

사랑이란
사랑이신 하나님께(the love of God)
받은 사랑으로(For God so loved the world)
이룬 거룩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본향으로 돌아가는 영광과 생명을 얻는 길이라
사랑이란,
신실한 믿음과 간절한 소망의 증거요, 결과라,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사랑은 영원하다.

이제 사랑이신 하나님과
거룩한 사랑 ‘charity’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
이를 마음의 중심에서 증거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길 구하노라
For this cause I bow my knees unto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Of whom the whole family in heaven and earth is named,
That he would grant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to be strengthened with might by his Spirit in the inner man;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by faith; that ye,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by faith; that ye,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May be able to comprehend with all saint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depth, and height;
And to know the love of Christ, which passeth knowledge,
that ye might be filled with all the fulness of God.
에베소서 3:14-19]

아멘 !

.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짐보 ㆍ 2015-12-28 (월) 10:43 IP: 96.xxx.163    

4.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한 사람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사랑은 꼴사납게 행하지 아니하며,
부적당 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seeketh not her own,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The wife hath not power of her own body, but the husband: and likewise also
the husband hath not power of his own body, but the wife.
고린도전서 7:4]
은 결혼에 대하여 바울이 권하는
아내와 남편인 부부 조차 자기 몸의 주장(유익)을 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
‘Love seeketh not its own.’
사랑은 자기의 것을 찾지 아니한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is not easily provoked,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자는 쉽게 화내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의 사람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thinketh no evil,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 2:8]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having no evil thing to say of you)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은 사람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교회는,
너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실히 그 증거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너희 안에 있는지 확증하고 확인하고
그래서 그 사랑이 없다면 버린 자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다시 언급하면 너는, 너희는, 너희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하였는지
세상 사람처럼, 세상 사람보다, 더 부적당 하고 무례 한지,
자기의 유익과 주장을 구하여 니편 내편 편(便)을 가르고
성을 쉽게 내고 싸움박질 하는지,
그래서 악한지, 시험하여 스스로 증명하여 확증하고,
우리의 허물로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로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사랑 ‘charity’ 가 너희 안에 있는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너희는, 너희 교회는 버림받은 자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한국이나 이곳 교회의 크나큰 실책은
세대와 세대의 신앙의 단절 이다.
기성세대에 집중하여야 교회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고
부모들의 교회출석은 자녀들과 같이 참석하기에,
2세들의 예배와 교육은 전도사나 부 교역자의 몫이었다.
이후 급격한 경제 문화 사회의 충격적인 변화를 교회가 감당할 신앙의 능력이 양성되어 있지 못했고, 잘못된 부흥관과 치우친 은사주의의 맘몬니즘의 폐해, 등은 각종 미디어의 출현으로 이미 폐쇄적인 교회와 교단의 모습이 속속히 알려지게 되었고, 부모세대보다 부차적이고 소홀했던 2세 교육은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을, 신앙의 불신을 가져 왔고, 여러 원인이 있으나 신앙을 다음세대에 무려주어야 할 유산인데 결론은 실패하였고
이제라도 교회다운 교회를 위하여 회개하고 개벽 같은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의 모습은 겉모습만 교회라 종교인의 모습이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제 출산율이 늘더라도 빈 교회가 생길 텐데, 줄어드는 출산율로
노인들만 남은 교회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모두들 무사태평이다.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간직한 모습일까?
젊은이 들은 우리 부모세대에 불신으로 떠나는데,
그들의 눈에 교회는 다투고 싸우는 장소로, 돈 욕심에 눈이 멀었다 하는데.
좀 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랑 charity를 간직했더라면
좀 더, 정직하여 정의롭고, 공정하여 공평하였더라면
좀 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것을
이로서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아 전도가 되었을 것을.
이로서 세상이 좀 더 환 했을 것을.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을 잃어버린 우리시대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없이 유효하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34-35]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낮게 오신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charity, 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 ‘charity, 로 서로 사랑하라 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마음의 중심에 간직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가슴에 박혔는가, 라
그 분량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의 분량만큼이, 믿음의 분량이고
그 분량만큼,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안다.
이 의미는,
이 현실은, 세상에서 질타(叱咤)의 대상이 된 교회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만큼, 그 만큼의 질타가 된다.
이 원인을 모르면 그는 교회 선생의 자격이 없고 더구나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구실은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으로
세상이 악하다는 건, 초 신자, 요즘 같이 교회출석만 얼 만큼 해도 직분이라고 받는
서리집사의 구실 거리를, 교회의 선생이나 지도자의 변명이라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거나
아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약 이다 고?
성경을 보자.
에베소서 2장 1-2절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사랑
‘charity’ 로.
[2.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Wherein in time past y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
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the spirit that now worketh
i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그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으니
불순종한 자녀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권세를 잡은 영을 따랐으나
그러나 이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는 살리셨는데
아직 세상 풍조를 따르고,
세상 사람들의 시류를 따르고 문화를 따라서
불순종한 자녀로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름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길도 아니다.
이제 눈을 떠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8]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도리를 지켜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개혁해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설교는 구원론에 벗어나지 못한다.
10년 전에 설교하였던 내용을 오늘 설교하고 반복 또 반복이다.
왜,
구원받은 자의 언행이나 가치관에 대하여 성경을 풀어서
구체적으로 설교하지 못하는가.
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 을 퇴색시키어
거룩한 능력을 무시하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켰고 변화시키는 역사(work)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역사라 우리 모두는 역사의 일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고백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애 못 박히고
바울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애 못 박혔다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로 말미암아
세상의 풍조로 시류를 따르던 사조를 버렸기에 단절을 선포하며
세상과의 격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
그 거룩한 사랑 ‘charity’을 간직한 사람으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개혁하겠다는 단호한 태도이다.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람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

2.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and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없더라도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고
예언하는 은사로 비밀과 지식을 아는 능력도 있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have not charity, I am nothing.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능력의 비밀과, 지식과 믿음의 존재 가치의 무의미함을 가리킨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and have not charity, it profiteth me nothing.]
사랑이 없으면, have not charity,
아무 유익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그 당시처럼 구제의 제물로 자기 몸을 불살라 우상에게 내 줄지라도
이제 자기의 의로, 또는 정의의 동기로 든 이념이든 자기 생명을 내 줄지라도
'charity'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희생은 아무 유익이 없다.
그래서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6]
거룩은 히브리어의 ‘분리’를 뜻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분리를
뜻하였지만 예수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여
죄로 인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분리’를 허무시고 중보자가 되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켰고
성령님은 이 거룩을 증거하시고 거룩으로 우리를 인도 하신다.
그래서 이제 거룩이란, 예수님의 사랑(charity)으로 죄에서 분리된 새로운 피조물로,
이제 성도로 불리고,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을 우리는 ‘복음’ 이라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 졌기에 하나님의 ‘의’ 라
하고 이 의를 ‘공의의 하나님(righteousness of God)’라 한다.
로마서를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로마서 1:17 절]
하나님의 뜻하시는 봐,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 가 공의이기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은,
기록된 성경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온전한 믿음은,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살라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 임하도록,
빛으로 오신 분을 본받아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인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인도 하는 빛으로,
세상의 정신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되어 세상문화를 정립해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인데,
썩은 소금이 되어 맛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차이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는 이미 자체 정화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리 저리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방향을 잃고 난파된 이유는
복음의 참된 가치관,
삶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상투 적으로, 쉽게, 말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목사의 사당(祠堂)화가 되어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평신도’로 신분을 분리하는 교회는, 그런 교회는
이미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지, 성도라는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성도라는 생명의 존재가치는 교회 유지의 조직이고
재원의 충당 조직일 뿐이다.
보라, 예수님 이전의 성전, 이후 교회의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해 지면
헐리어 사라졌지 이제 까지 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지 보라.
이제 화려한 건물로 이 모양 저 모양의 하늘을 찌르는 교회의 건물은
현대판 바벨탑이다.

(온갖 교회부흥을 위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의 핵심은 ‘순종’ 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순종으로 시작하였든, 처음부터 오류의 프로그램이었든
어찌되었든, 프로그램이 변질되어 교회의 목사를 위한 순종으로 변절됨을 보면서
통탄해 오다, 한 친구로부터 어느 목사의 자랑을 듣고 그 분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 분의 개혁적인 교육에 대하여 듣고, 그분을 알기 전 한국의 다른 모임에서 일찍
'제자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라 그 같은 훈련을 존중했기에, 목사님의 주장된 프로그램
‘제자 훈련’ 의 소식을 듣고 카세트 테임을 구입하여 설교를 들으며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겼지만 제자훈련이 변절되어 감을,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카세트 테임 구입도 끊었고 그 후 기억에서 멀어 후, 후임 목사와 의  분란소식과
이제는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교회의 건축을 한다 는 소식에 일말의 안타까움 마저 버렸다.)

바벨(Balbel)은 히브리어의 ‘혼란’을 의미하나 ‘꼭대기(top)’이나 ‘우두머리’ 라는 뜻으로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께 대적한 반역의 대명사 이다.
이제 건물의 꼭대기에서 우두머리의 상징으로 화려한 가운을 걸친
현대판 바리새인이여.
예수님, 사도들, 그 누군가 종교의식으로 왕같이 제사장같이 화려한 가운을 걸쳤는가,
그것도 세상적인 재판관과 박사의 표시로.
개혁을 주장하면서 가톨릭 신부의 로만 칼라를 화장한 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바울도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탄식했고
바리새인와 헤롯당들도 예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심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 이다  마가복음 12:14]
한국교회의 ‘혼란’이 어디서 왔는가?
예수님은 왜 성전의 꼭대기에서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바벨탑을 지은 인간을 언어로 분리시켜 혼란케 하셨는가?
오늘날도 여전하고, 여전히
높아지려고 건물을 높이고 존재를 가치를 높이려고 신분의 분리를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여,
낮고 낮아져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했다면
낮아진 만큼 성도가 서로 교통했을 것이고
낮아진 만큼 교회와 교회가 교통했을 텐데...
성도라는 아름다운 명칭도 겹다 못해 불의의 삯을 탐하고, 스스로 소명 받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 되어 성도 앞에 성경의 잘못된 해석으로 올무를 놓고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자신의 욕심을 일삼는 음행의 발람의 길로 간 사람도 있고,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여
망령되고 헛된 말로 믿음이 파선되어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들의 말이
악성 종기처럼 퍼져 나감은 [디모데후서 2:14-17]
오늘날도 여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have not charity,
분별력이 파탄 나서 열심은 있으나 유익이 없고
내 모든 것을 내어 줄 지라도 그리스도의 도(道)를 빙자한, 사유(私有)한
그리스도의 도(道) 아무 상관없는 자신의 도(道)라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와 단절된 벨리알의 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 갈라디아서를 루터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 말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charity’ 로 사는 삶,
그런 삶인가...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너무 부끄러워 고개도 들 수 없고,
그렇지 못한 생활이 한스럽고 고통스러워, 그 사랑이 내 마음의 중심을 흔들고
요동(搖動)하여 가슴에 박혔고 또 박히고...
그 사랑을 어찌 말 하랴.


1.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사랑이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인가?
아니면 나를 태워서 너를 살리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인가?
사랑이란,
생각하는 것이 어릴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일방적인 명령이었고
말 하는 것이 어릴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절대적이고 복종인 줄 알았다가
희미하게 보일 만큼 성경을 읽었을 때
그 사랑은 그리스어의 ‘아가페(agape)’를 의미하는 줄 알았지만
이 아가페라는 사랑은 구약의 대부분의 사랑이 이에 해당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완성된 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9:30]

돌아보면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지만 철이 들면서 하나님을 여러 번
부인하였고
첫 번째 부인은 인생의 허무로의 부인이었고
이는 내 인생을 바닥 맨 밑바닥까지 스며들어 근본을 온통 흔들어 삶을 포기까지 하려 했었고
두 번째 부인은 세상에 정의가 있는가?
세 번째 종교는 끝없는 반복의 세뇌(brainwash)라 종당에는 마약과 같은 중독에 빠져
종교 중독증 환자가 되어가는 허상이라 보았다.
여러 번의 부인은 참을 수 없는 만큼 고통스러워 그 때마다 생을 포기하려 했었고
부인을 겪은 후 성경을 죽자 사자 읽었을 때 하나님의 뜻, 공의가 보이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고 수많은 날 성경과 신학 책 등을 읽고 유명하다는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았지만 만족할 만 한 대답은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인 허무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철학책 등 고전을 읽으면서 더 확신하였고
이제 부인을 넘어 논리적인 가치관으로 정립(正立)되어 갈 때, 이 또한 허무 맹랑 임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charity)을 알게 되었을 때
지겹게 쫒아 다니던 허무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 몇 편의 글이나마
아직 부분적으로 아는 하나님의 향한 부족한 고백이
하나님의 의를 더 알아가고 왜 무기력한 신앙의 신자가 되었는지
이 무기력하고 방탄된 우리의 모습에, 나름 길을 제시하고 읽는 분들에게 믿음을
다시 확인하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부족한 글을 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무의미한 고통으로 점점 파멸(破滅)되어 종당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삶을,
인간 삶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낮고 낮아 지셔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어
부활로 우리의 영생을 알게 하셨고 또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의 길을 보여주셨다.
세상에, 어떠한 신이 자신의 피조물과 같이 되고 피조물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는 신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도 없었고 그런 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사랑을, 또 사랑에 목말라 나누고 분리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은
필레오(phileo)의 사랑이라고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사랑을 그렇게도 부른다.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던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
왜, 영광을 받게 하려 하려 함이시라니
무엇을 의도하시고 계획하시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나사로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다.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요한11:36-3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아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
그러나 나사로를 사랑함이 친구의 사랑인 ‘필레오’ 인가?
아니다.
사람들은
‘필레오’ 는 친구의 사랑이라
‘에로스’ 는 남녀의 사랑이라
‘스테르고’ 는 부모와 자녀의 사랑 이라 정의 하지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면 이런 사랑의 분리를 인정할 수 없고
사랑은, 진리가 진리로 한 길 같이, 사랑도 한 길이라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하며, 진리를 떠난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럼 사랑이란 무엇인가?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귀가 닳도록 들었고 입이 닳도록 말했던 사랑이지만
성경의 ‘사랑’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Beloved, let u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th is
born of God, and knoweth God.
He that loveth not knoweth not God; for God is love. 요한일서 4:7-8]

Loved
사랑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요한복음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사랑하셨냐 하면
For God so loved the world
독생자 까지 주셨으며, 누구든지 믿는 자 마다
이 세상에서 곤궁한 자 같으나 믿음으로 넉넉한 자로
이 세상에서 멸망한 자 같으나 하늘나라의 소망을 둔 흥 한 자
죽은 자 같으나 산 자로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하는 자로
언제까지 영생(everlasting life)을 얻게 하려, 영원히 함께 하시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치우침 없이 공평이 사랑하시고
바르시게 공정히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약속, 언약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
또 이를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증거하고 확정하시는 성령님.

the love of God
하나님의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3]
그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약속이라는 언약을 오래전에 주셨다.
이 언약은 이미
창세기 9:
[16.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16.    And the bow shall be in the cloud; and I will look upon it, that I may remember
the everlasting covenant between God and every living creature of all flesh that is upon the earth.
17.    And God said unto Noah, This is the token of the covenant, which I have established between me and all flesh that is upon the earth.]
covenant
창세기 6: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But with thee will I establish my covenant; and thou shalt come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홍수에서 보호하는 방주처럼
멸망의 홍수에서 죽음에서의 두려움과 절망에서
그 언약을 완벽하게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 사랑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사랑을
그 사랑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으로 돌아가시기 까지 하며 이른
그 사랑을, 그 거룩한 사랑을
‘ charity ' 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the love of God’ 로 영어성경은 표현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말 성경에는 ‘사랑’으로 표현 하지만
그 사랑을 영어성경(KJV)에는 ‘ charity ’ 로 표현 한다.
‘charity'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런 사랑(charity)이란 표현이 없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하기에 ‘자비’ ‘관용’ ‘자애’ ‘박애’ 등으로
표현 할 수 있으나
십자가의 사랑을 의미 한다.

그 사랑 ‘charity’ 라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8:1 절에서 시작 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Now as touching things offered unto idols, we know that we all have knowledge.
Knowledge puffeth up, but charity . ]
사랑은 덕을 만든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가 참 은사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덕을 만들고 세우느냐 로 요약된다.
자신과 믿는 이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면 은사가 아니며
은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익을 쫒아 함부로 사용하면 남용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랑이 퇴색하였거나 변질되었기에
은사의 가치는 사라진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 :2]
우상의 제물과 지식을 다 아는 줄 생각하지 말라 !
이 시대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별없어 고린도 교회와 같은 이 혼란하고 타락한 시대,
고린도 교회와 같이, 이 사이비 같이 타락한 이시대의 교회,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거룩한 사랑의 궁핍(窮乏)이며 결여(缺如)이며 빈곤(貧困)이고
그래서 순수한 믿음의 결핍(缺乏)이다.
그 거룩한 사랑 ‘charity’를 잃은 세대여!
그 거룩한 사랑을 망각하여 곤고한 자신이여!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그 사랑 ‘charity’를
가슴의 중심에 간직한 사랑이 없다면,
목사 장로 그 누구라 할지라도 위안의 종교를 가진 교인일 뿐
예수 우리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제자가 아니라 허망한 종교인일 뿐 이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를 알게 된다.
[But if any man love God, the same is known of him. 8:3]
사랑 (love)은  ‘the love of God’  ‘charity’ 가 된다.
이제는 그 charity를, 그 사랑을 겨워하는 시대라 ...
그 숭고한 사랑‘charity’ 은 KJV 성경 신약에 총 24회 중  
고린도 전서 고린도전서 13장에 8번 쓰여 있고
주제도 사랑이라 그래서 13장을, 우리는 사랑의 장이라 부르고 이렇게 시작이 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Though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and have not charity,
I am become as sounding brass, or a tinkling cymbal.
고린도전서 13:1]
그 당시도 요즘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다툼이 있었음이 전해진다.
방언이 은사라는 주장과 그에 반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사탄의 소리로
치부하기도 하였고, 헬라어 같은 모국어가 아니라 외국어라 하기도 했고
은사로 중단되었다는 반대도 있었다.
방언이 은사라면 자신과 신자의 모임인 교회에서 덕을 세워야 하며
방언이 통역되어 소통이 되어야 하지만 그런가?
아무튼 사랑 없는 방언이나
천사의 말 같이 신비하거나 오묘한 인간의 언어라 할지라도,
천사의 말같이 아름다운 언어의 화려한 말솜씨나 설교라 할지라도,
주여! 주여! 목메어 부를 지라도
어둠 속에 빛같이, 맹인에게 빛 같이, 희망으로 인생의 길을 제시 할지라도
유명한 설교자로, 신학자로,
광명의 천사로 올지라도,
나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을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언약의 피로 이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 charity '가 마음의 중심 가슴에 박혀 흔들려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면
(나는, I am become as, 바울이라 할지라도)
구리로 만든 악기라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일 뿐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리만 시끄러울 뿐, 아무런 소통이 없는 소리의 울림일 뿐이라
허공을 치는 말 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는
그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하고
진리는 그 사랑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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