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들은 카톨릭 교회에서 ‘환영받아야 한다(welcomed)’는 언급을 하였다.


그는 예수님은 결코 트랜스젠더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가 사제로서 주교로서 그리고 지금은 교황으로서 동성애자들을 위해 사역해왔음을 밝혔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로 왔을 때, 예수님은 결코 ‘너는 동성애자이니 떠나가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던 환영을 받고, 교제와 이해와 통합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교황을 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가 카톨릭 교회에서 사역하는 기간 내내 동성애자를 위해 일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들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이런 상태로(동성애자로)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은 결코 ‘네가 동성애자이니 떠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스페인에서 여자에서 남자로 성전환을 한 뒤 여자와 결혼을 한 남자가 그가 성전환을 한 사실을 편지를 통해 밝혔을 때 “나는 그들을 받아주었고, 그들은 행복해했다.”라고 말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이 사람이 성전환을 하는 동안 그와 함께 해주었던 주교를 칭송하였고, 반대로 길에서 이 사람을 만나자 “너는 지옥에 가게 될 거야('You'll go to hell)”라고 소리쳤던 이 사람의 담당 교구 사제를 비판하였다.


기사원문 >> Pope Francis says transsexuals and homosexuals should be 'welcomed' and embraced by the Catholic Church



* LGBT 문제에 있어서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위험한 줄타기를 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제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들은 카톨릭 교회 안에서 ‘환영받아야 한다(welcomed)’”는 언급을 함으로, 그 동안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카톨릭 교회를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가뜩이나 바벨론 종교와 연합되어 배도의 길을 가고 있는 카톨릭 교회가 이제는 전 세계에 동성애를 합법화시키고, 확산시키는 전초기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고전 6:9, KJV 흠정역)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프란치스코는 “너는 지옥에 가게 될거야('You'll go to hell)”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Vatican Radio)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아가 된 것 같은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Our Lady of Sorrows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Casa Santa Marta에서 열린 미사 중에 언급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 계시던 당시, 성 요한과 몇 몇 여자들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리아를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이 여자가 바로 이 범죄자의 엄마야! 이 여자가 바로 이 반역자의 엄마야!(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카톨릭에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니 마리아를 우상화하기 위해 성경까지도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역자주)”


“마리아는 이 이야기들을 들었고 끔찍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또 그녀가 존경하는(?) 고위 관료와 성직자들이 그녀를 배려해서 "그 수치스런 자리(십자가 밑)에서 내려오라"는 권면을 들었지만,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낳은 아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교황님은 또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요 14:18)이라 약속하셨는데, 십자가에서 그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예수의 어머니(마리아)가 곧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계십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그녀(마리아)는 우리가 고통 받는 순간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변호해주십니다.” 

 

기사원문 >> Pope Francis: Mary is our Mother, who defends us

 

 

* 마리아를 숭배하는 예수회 출신의 첫 번째 교황 프란치스코의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소름끼칠 정도로 신성모독적임을 알 수 있다.



바벨론 종교의 여신 세미라미스와 그 아들 담무스의 이야기가  이집트로 넘어가선 이시스와 호루스의 이야기로  로마 카톨릭으로 넘어가선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로 그 형태만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예수회가 전파한 마리아 숭배의 뿌리가 바로 바벨론의 여신 세미라미스(이쉬타르)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리아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어머니 하나님’으로 언급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요 14:18)는 말씀을 마리아에게 적용시킴으로 마리아를 성령 하나님과 동일한 중보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성경 왜곡의 백미는 마리아가 십자가 밑에서 들었다는 말들에 관한 프란치스코의 언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느 성경에 사람들이 마리아를 향해 “이 여자가 바로 이 범죄자의 엄마야! 이 여자가 바로 이 반역자의 엄마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며, 이 모습을 측은히 여긴 관료들이 마리아에게 “그 수치스런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온단 말인가?

 

마리아 숭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진리의 기준인 성경 자체도 왜곡하는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신부(교회)라는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신 마리아(세미라미스)를 숭배하는 이교 집단이요,  요한계시록 17장이 경고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계 17:6)고 기록하고 있다.   장차 음녀 바벨론인 로마 카톨릭이 종교통합과 마리아 숭배를 거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히 핍박하여 그 피에 취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 말씀인 것이다.

 

마리아 숭배를 통해 음녀 바벨론을 일깨우고 있는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유념해야 한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카톨릭의 본질 - 마귀의 간계 / 마틴 로이드 존스




 ‘마귀의 간계’를 주제로 한 시리즈 설교 중 하나인 본 설교에서 20세기의 영적 거장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 카톨릭 시스템의 간교함을 조목조목 잘 보여 준다. 특별히 그는 구원에 대한 천주교 가르침이 성경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첨가시킨 것으로서 사람의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파고 들어와 파멸을 가져옴을 보여 준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성경적 천주교 분석은 과연 우리가 새로운 태도로 로마 카톨릭 주의를 포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행한 대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대적해야 하는지 잘 보여 준다.(Evangelical Press, 136 Rosendale Road, London, SE21 8LG, England)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6:11-12).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이제 크리스천 지성인들은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회의가 개최됩니다. 또 이 같은 일을 기뻐하는 자들은 이제 우리 즉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어떤 측면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크리스천 정신을 놀랍게 구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 같은 움직임 때문에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앞날을 내다볼 때 이 문제가 긴급한 문제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추세가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우리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될 일들을 예상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비 카톨릭 국가인 우리나라 - 영국 - 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다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주시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항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로마 카톨릭 주의에 항거하는 일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실질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프로테스트들의 부정적인 항거 노력은 별 효과가 없음이 기정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로마 카톨릭 주의가 확산된 원인은 자기가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무지함과 무기력함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시간을 들여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으로 인해 저는 이 문제 곧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간계’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었습니까? 먼저 저는 오늘 개개인에 관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카톨릭 신자이면서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 신자이면서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여 드리고자 하는 바는 카톨릭 교도로서 크리스천인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 때문에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체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구원받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개인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치적 측면이 매우 중요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 체제의 역사적 증거 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그 체제가 스스로를 정치 세력이라 주장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정치적 측면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일반 성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이 관여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영적인 측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며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I. 로마 카톨릭 체제


  자,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로마 카톨릭 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는 기독교의 믿음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이므로 저는 주저하지 않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보통 배교를 가리켜 ‘기독교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어떤 이들은 “글쎄요, 지금 당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칭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교 체제요, 배교 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를 분명히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해서 배교 체제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에 무언가를 첨가하고 거기서 이탈하여 배교 체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마귀의 온갖 간교함이 들어오며 마귀의 간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정통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통성에는 전혀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에 앉아 계심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에 관한 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적으로 정통입니다.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이런 점에서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입장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보더라도 그들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혜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런 면에서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위와 같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아 마땅한 첨가물’ 즉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그들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는 그 체제의 거짓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교리는 그럴듯한 위조품이며 성경이 기록한 대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다름 아닌 계시록의 음녀입니다.


  참으로 이 문제는 지극히 교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간교함’ 즉 마귀의 간계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간교함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 체제의 간교함은 너무나도 커서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이런 사례를 여러 번 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도가 이혼한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일부 고매한 카톨릭 교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반문하곤 합니다.


  글쎄요. 사실 그들은 이런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결코 참된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해명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궤변 체계가 이러하며 고도의 논법이 이러하므로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오는 문제들을 다 대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실제로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 나라 - 영국 - 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미국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남미의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즉시 그것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비슷한 조건의 국가들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독일이나 기타 그와 비슷한 국가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곧장 그 체제가 국가마다 서로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것이 동일한 로마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모두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얼마든지 자기의 색깔과 모습과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는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장시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으며 여러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기를 변장하는 데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 - 영국 - 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주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또 비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미신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천주교가 관용을 베풀고 기꺼이 의견을 들어 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친근한 모습을 취하지만 다른 후진국에서는 아주 인내하지 못하며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체제이며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시스템이라는 저 거대한 교회와 체제는 온갖 간교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갖 불의의 속임수 가운데서 마귀의 간계를 온 천하에 드러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와 같은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즉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예언의 말씀이 이것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이것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부상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기관은 이미 세상의 권력을 장악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계시록 13장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 계시록 17장에서는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로 제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체제는 늘 이러했으며 지금도 이러하고 앞으로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실제로 이 체제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성취해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회 내로 몰래 기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회 전체를 실질적으로 독점했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이 체제가 천천히 간교하게 기독교회 속으로 기어 들어와 자기 방식대로 일하면서 기독교 세계를 장악했고 그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세상 권력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II.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대 오류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과연 어떤 일을 행했을까요? 이 문제를 적절히 다루자면 최소한 몇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설교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 저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여 주는 몇몇 중요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제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했는가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만큼 크게 정죄를 받는 행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새긴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에게 형상들에게 경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동상과 조형물과 초상화를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큰 천주교 성당에 가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사도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여러분이 그 동상의 발가락을 자세히 보면 그 발가락 중 하나가 달아서 매끈매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희생물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과 동상과 유물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과 뼛조각과 그가 사용하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특별한 장소에 두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우상숭배입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체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들 가운데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분명하게 “카톨릭 교회 밖에서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구원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 사이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스스로에게 그와 같은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 같은 주장을 찾아볼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로마 카톨릭 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자기만이 진리를 묘사하고 진리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모든 신자의 보편적 제사장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령님의 조명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들은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바르게 말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 성경의 종결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계시가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에다 그런 계시들을 첨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덧붙인 전통(전승 혹은 유전)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취해온 기만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들을 자기들의 전통에 첨가시켜 왔으며 바로 여기에 이 체제의 간교함이 놓여 있습니다.


  결국 로마 카톨릭 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전체주의가 요구하는 그런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우리가 믿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교회는 자기가 우리의 영혼과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 준 대로 그리고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주의는 획일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시스템은 공산주의가 자기 백성의 혼과 자유를 유린하는 것처럼, 군국주의의 히틀러가 자신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속한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실로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전체주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권위를 가진 존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보여 주는 두 번째 증거 혹은 이 문제로 인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로마 교황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입니다. 교황은 보통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일컬어집니다. 그들은 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면서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영적 직계 후손이며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위권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 즉 성부(Holy Father)라 부르며 극도의 신성 모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아버지는 단 한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 없으므로 땅 위에 있는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말라.” 이들은 이 같은 명백한 말씀을 어기면서 교황을 ‘성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추기경 회의에서 “권위 있게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1870년에 교황 무오설을 교리로 규정하기 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법적으로 그렇게 규정되었기에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교황의 선언은 그리스도 그분처럼 절대무오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이 보다시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이 말씀하듯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 밑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바칠 수 없는 경의와 흠모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제사장 체계’ 즉 ‘만인 제사장 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즉 사제들(priest)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직 수임을 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다 제사장 왕국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제사장(사제)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교회에서 성직 수임을 받은 이 사람들만이 사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제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지닌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례 받는 물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 사제가 세례 때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제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과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종종 화체설이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제가 주는 빵이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빵의 겉모습과 색깔은 그대로지만 그 본질은 변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화체의 기적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성사(혹은 성례전)에 관한 교리로 이어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지만 저는 이 중에서 특별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두 성사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합니다. 사제가 물과 빵과 포도즙에 기적을 일으키면 그로 인해 이것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되며 이런 기적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것을 가리켜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세례 성사에 적용하자면 물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뿌리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혹은 천주교 성찬식의 경우 신도가 빵을 취하여 먹으면 - 주의 만찬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즙은 일반 성도들이 마시지 못하게 합니다 - 그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이며 간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천주교회가 첨가한 것으로서 신약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곧 신도들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사제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들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면죄를 선언하고 죄들의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자들 곧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성경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는 서로에게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결코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로마 카톨릭 체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왔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분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가서 고백합니다.


  이제 네 번째의 드러난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터무니없는 궤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의 마리아 숭배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으며 우리 모두가 일차적으로 그녀에게 찾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성당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 상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사람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가 있으시므로 너무 엄격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를 설명하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무서운 분이시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직접 다가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리아가 거기 있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며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中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성모 마리아가 우리 영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점진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무엇인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그들은 주후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정식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무염시태‘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신 것처럼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그들은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곧 마리아가 일반 사람처럼 죽어 묻힌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 예수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 주고 그녀를 부각시키며 결국 그리스도를 시야에서 가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에 이어 ‘성인’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가르침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자, 그들의 가르침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삶을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공덕’을 획득하여 쌓아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넘치도록 공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나 내가 공덕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고 간청해서 그들이 보유한 여분의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여분의 공덕을 나누는 일’이라 하는데 이것은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에게 공덕이 부족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자기들의 공덕의 여분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은 공덕이 성인들에 의해 추가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이단 교리를 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그분의 성육신, 처녀 탄생 및 기타 다른 정통 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첨가를 통해 마귀의 간계가 들어옵니다. 언뜻 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옳은 것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다 너무나도 잘못된 것들을 첨가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옳은 것 중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간계입니다.


  3. 이제 저는 세 번째 오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저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함과 충분함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첫 번째 예로 그들이 칭의(Justification)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칭의는 교회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시금석이며 프로테스탄트를 존재하게 만든 원인으로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칭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따금씩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곤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칭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 주의가 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로마 카톨릭 주의는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주의가 전 세계 많은 국가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죄성을 지닌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을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자신의 칭의를 위해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반면에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으며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아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 즉 똥과 같고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사람의 의에도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궁극적으로 사람이 세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고 여러분 안에 의가 주입되어 여러분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원죄가 말소되며 동시에 이 같은 긍정적인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로마 교회는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지 않고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위험한 이단 교리라고 비난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체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이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과연 이런 체제 하에서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사제가 베푸는 세례를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체제 안에서는 모든 일에서 교회와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은 그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으며 반드시 중간에 낀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중재자가 있으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이처럼 그들은 중대한 칭의 교리에서 거짓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천의 생활 문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강조하기보다 의식과 의례를 준수하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체제 속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을 강조하거나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의 규율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키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 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해야 하며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사제를 찾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미사를 통해 죄가 덮어졌고 여러분은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므로 이제 계속해서 여러분의 길을 가도 됩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 즉 아주 간단한 삶 대신에 여러분은 의식과 의례와 절기를 준수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또 다른 심각한 오류는 이들이 구원의 확신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당신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이 세상 삶에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반박하는 내용이며 이것은 어느 면에서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마귀의 것을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실 마귀 외에는 비범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 만한 존재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가 말소되고 여러분은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세례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덮어 준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사역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죄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반드시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의 종말을 맞게 되면 세례 이후에 지은 죄 문제로 인해 지옥 정죄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때 과연 그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아무 문제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만이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하면서 사제에게 특이한 고백을 하게 되고 그러면 궁극적으로 면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문제를 거의 다 풀어 주었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연옥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죄 즉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씻어 버리기 위해 우리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땅에 남아 있는 우리의 친척들이 우리를 위해 돈을 지불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온갖 면죄부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촛불과 그들이 지불한 돈을 소유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내면 낼수록 연옥에서 이러한 죄들이 더 빨리 처리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속히 옮겨갈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 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추가 계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한 마디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에 의해 그분의 공덕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배교 집단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III. 결론


  이 모든 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갇혀 있으며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은 우리가 종종 ‘대륙의 일요일’이라는 생활 방식에 젖어들게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만 하면 그 날의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 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체제를 따르면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이렇게 되다 해도 그리 놀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로부터 그리하지 말라는 호소를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가 일러 준 대로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교회에게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며 궁극적으로 교회가 그들의 영혼을 돌봅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마침내 그들은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잔인한 핍박을 가해 왔으며 사실 이런 핍박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렸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기회만 주어지면 어느 곳에서나 그런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시간만 낭비했을까요? 과연 우리가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할까요? 다른 방향에서 로마 카톨릭 주의를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기뻐해야만 할까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다 같이 크리스천으로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기뻐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직면해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에 대해 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위조지폐와 같이 기독교를 위조한 체제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바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자주색 옷을 입은 여자’이며 가장 끔찍한 속임수의 극치를 이룬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 체제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무신론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결코 편견을 지닌 열성분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해 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루터의 눈이 열렸고 칼빈의 눈이 열렸으며 낙스의 눈이 열렸고 모든 개혁자들의 눈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열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성경 속에서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이 체제를 저주하며 그것에게 경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목숨을 내걸고 일어서서 이 체제와 맞서 항거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 괴물 체제가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성경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체계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성경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진리를 위해 용감히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로 접근하려는 갖가지 시도를 기뻐한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시도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Smithfield) 근처도 가지 말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서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브래드포드와 나머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 주의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화해의 시도를 수용한다면 여러분은 이 프로테스탄트 선구자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했어. 그들은 실수를 범했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 화해론자들의 그럴듯한 논쟁에 말려들지 말기 바랍니다.


  천주교 문제가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된 것은 무선 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대중 매체에 이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매우 예의가 있고 친절하며 훌륭하고 무척이나 융통성 있게 보입니다. 그들은 종종 우리 프로테스탄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렇게 천주교의 외양을 극구 칭찬하면서 금방이라도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끼를 따먹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은 과거만 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목사님은 20세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가 가장 큰 교만을 부리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거만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체제가 변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우리는 절대무오하며 교황은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결코 실수를 할 수 없다.”고 이미 굳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주의의 핵심 주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체제는 자기가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동일합니다. 혹시 변한 것이 있다면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실로 이 체제는 16세기에 자기가 가르쳤던 것들에다 교황의 절대무오성 같은 교리들을 추가시켰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위조품이요, 가짜 교회이며 가장 저질의 매춘부요, 세상에서 가장 마귀적인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거절하고 정죄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기독교뿐입니다. 듣기 좋게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기독교는 단 1초도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숫자만 불려 줄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집회를 하면서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천주교회로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위조품 교회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뿐입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 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도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신학자였으며 칼빈도 그러했고 개혁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진리의 체계를 제시하고 상세히 가르쳐 줄 때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타격을 받고 그 체제 전체가 뒤흔들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의 카톨릭/프로테스탄트 교류 및 화해 상황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법 중 이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여러분의 책임은 실로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거짓된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은 거짓 체제에 속아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러분과 저의 책임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똑바로 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으며 성령님의 복을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께서 강력한 부흥과 함께 우리에게 임하실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오직 이 같이 강력한 부흥만이 이 가증한 체제 곧 자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 부르는 저 큰 음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현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깨워 주옵소서.

아멘.

출처: 물과피와성령/새언약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로마 교황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외로운 투쟁에 나섰다. 교황청 내부의 뿌리 깊은 비리를 들춰내려 하자 반대파 추기경들과 고위 관리들이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황이 파악한 비리의 핵심은 복자(福者)나 성인(聖人) 추존 시 거래되는 엄청난 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 교황청 고위 관리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비리의 실체는 세상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의 역대 교황 어느 누구도 부패 규모를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폭로한 사람도 없었기에 갖가지 유형의 스캔들은 그간 묻혀 왔다. 그러나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집사였던 파올로 가브리엘에 의해 하나둘 폭로되기 시작했다. 2012년 교황청 기밀문서가 처음 유출됐고, 이 사건으로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에서 사임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같은 사실을 이탈리아 현지 언론이 세상에 알렸고, 교황청은 파올로 가브리엘 집사를 교회법에 따라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청 내부의 뿌리 깊은 비리를 들춰내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이 반대파들의 반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비리를 밝혀내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암살 위협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AP연합뉴스

교황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성인을 추존하면서 오가는 헌금의 행방이 문제가 됐다. 통상 성인 1인을 추존하는 데 75만유로(약 10억원)가량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서류가 교황청에 남아있지 않았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었던 30여 년 동안 교황청은 1338명의 복자와 482명의 성인을 추존했다. 단순 계산해도 조 단위의 엄청난 돈이 교황청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교황청은 ‘돈 많은 이들을 성인으로 찍어내는 공장’이라는 세간의 눈총을 받아왔다. 2014년엔 관련 은행계좌가 기록된 비밀 서류가 교황청 금고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교황청 소유 부동산도 어떤 기준으로 임대되고 기부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청 소속 사업 기구인 바티칸은행이 마피아의 돈세탁에 연루됐다는 뉴스도 나왔다. 전 세계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으는 ‘베드로 성금’의 상당 부분이 교황청의 적자 해소에 쓰인다는 소문도 있다.

교황청 내부 성범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제가 미성년자들을 성폭행한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바티칸 고위 관리와 줄을 댄 ‘동성애 로비단체’는 공공연히 활개를 치고 있다. 교황청 고위 성직자에게 맞춤형 성매매를 알선하고 그 대가로 안정적인 일자리와 알선료를 받고 있다는 것. 교황청은 이를 폭로한 이탈리아 언론인 잔루이지 누치(Gianluigi Nuzzi)와 에밀리아노 피티팔디(Emiliano Fittipaldi)에 대해 ‘정보 및 문서 유출’ 혐의로 기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같은 비리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다. 교황은 비밀리에 심복 관리들로 직속 감사단을 구성해 부패 고리 파악에 나섰다. 특별 기관을 만들고 기득권 세력의 은행 계좌를 동결시켰다. 특히 시복·시성 관련 돈줄을 차단하기 위해 ‘바티칸 최초’로 외부 회계감사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교황의 일련의 개혁 조치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시작됐다. 현재 교황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과 프리메이슨(비밀조직)으로부터 수차례 암살 협박을 받고 있다. 일부 반대파 추기경들은 교황을 비난하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개혁에 나선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언론들은 “ 프란치스코 교황의 도전에 바티칸의 미래, 나아가 가톨릭 교회 전체의 미래가 달려있다”면서 교황의 부패와의 전쟁을 주시하고 있다. 또 “개혁파 교황이 조만간 이들을 들춰내 단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교황 선출 이후 동성애, 낙태, 타종교, 구원의 문제에 관해 2,000년 동안 지켜온 카톨릭의 전통 가치관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서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또 다시 “교회가 성소수자에 사과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카톨릭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간보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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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한 뒤, 여론의 공격을 받으면 곧 바로 교황청 대변인을 통해 “본뜻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해 온 교황이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 지 궁금하다.


카톨릭에서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진리의 수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발언을 통해 예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교회가 성소수자에 사과해야”는 발언을 통해 동성애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죄라 명시한 성경 말씀(고전 6:9,10)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요, ‘진리의 수호자’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명칭 보다는 ‘적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명칭이, ‘진리의 수호자’라는 명칭보다는 ‘진리의 파괴자’라는 명칭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장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의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우리 카톨릭 신자 뿐 아니라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속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동성애자이고 그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찾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중들에게 '진리의 수호자'라기보다는

'동성애의 수호자'로 비춰지고 있다.


*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파격적인 언행은 성경을 유일한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개신교인의 관점에서 뿐 아니라, 그 동안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켜왔던 카톨릭의 입장에서도 이미 용납할 범주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는 보수적인 카톨릭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를 우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마지막 때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예수회 출신으로 최초의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가 결국 카톨릭 교회와 온 세상을 배도와 멸망으로 이끌 ‘거짓 선지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부디 이제라도 이런 교황과 카톨릭 교회의 현실을 깨닫고 성경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음녀 바벨론의 길을 가고 있는 카톨릭 교회에서 빠져 나와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교회를 찾아보시길 권면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요한계시록 8장 4절).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 유영 기자] 최근 가톨릭 교회가 사제의 잇따른 아동 성추행 파문으로 논란이 심화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리옹의 한 교회 사제 베르나르 프레이나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간 교회 합창단 아동 단원을 성추행한 사건이 폭로됐다. 더불어 지난 4월 1일에는 리옹의 다른 사제가 10대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검찰이 수사를 개시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 주교회의는 "옛날 사건을 포함한 모든 사건을 낱낱이 밝히겠다"며, 12일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담화 발표 수준에 그치는 약속이 아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프랑스 전국 모든 교구에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 신고를 접수하는 조직이다. 더불어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이 이끄는 독립위원회도 설치해 사건을 조사하기로 했다.

필리프 바르바랭 추기경이 어떠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할지는 미지수다. 프레이나 신부에게 성추행당한 피해자들은 교구 대주교인 추기경 등을 성범죄 은폐 혐의로 고발했다. 교회 고위 관계자들이 프레이나 사제가 저지른 성추행 사실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경찰은 추기경이 집무하는 리옹 대교구 본부를 지난달 30일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는 필리프 바르바랭 추기경의 사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바르발랭 추기령. 교구 신부에게 성추행당한 피해자들이 2002년부터 리옹 교구 대주교로 있던 추기경 등 교회 고위 관계자들이 성추행 사실을 알고도 이를 은폐했다며, 추기경을 검찰에 고발했다. 프랑스 총리는 인터뷰에서 추기경의 사임을 종용하기도 했다.

바르바랭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은폐 혐의를 부인했다. 

"프레이나 신부의 행동을 안 것은 2007∼2008년의 일이다. 나는 일부 사제가 저지른 악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제들이 어린이들을 성추행한 일을 사과한다. 그러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시기, 나는 교구에서 책임질 위치가 아니었다."

교황청은 추기경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교황청은 "추기경이 책임지고 이 문제에 대처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성추행 피해자들은 교황청의 반응에 반발했다. 피해자들은 바르바랭 추기경이 성범죄를 은폐했다는 의혹을 풀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면담을 신청했다. 

한편, 리옹 교구는 "지난 2014년 성추행 피해자에게 첫 진술을 들었다. 지난해 5월 프레이나 신부가 성직에서 떠나도록 한 교황청 권고에 따랐다"고 밝혔다.

미국 가톨릭 교회, 돈으로 해결한 증거 드러나

가톨릭 교회 사제의 성범죄 고발은 프랑스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가톨릭 교회 사제들의 성 추문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 지난 3월, 펜실베이니아 주 검찰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사제 안토니 크리스시텔리, 로버트 디아베르사, 길레스 시넬리 등을 아동복지법 위반 및 범죄 은닉 혐의로 기소했다.

세 명의 수도사는 같은 수도회에 있는 스테판 베이커 사제가 저지른 성폭력을 감쌌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스테판 사제는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 아동 80여 명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자행했다. 기소된 수도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베이커 사제의 성범죄는 한 곳에서 저질러진 것이 아니다. 1990년대까지 오하이오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베이커 사제는 체육 지도를 명목으로 학생들을 불러내 성폭행했다. 당시 책임자였던 시넬리 수도사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다른 고등학교로 전출시켰다. 

베이커 사제는 전출된 학교에서도 아이들을 성폭행했다. 담당자였던 디아베르사 수도사는 같은 중대 범죄가 일어났는데도, 그를 청소년 연수 프로그램으로 보내는 등 학생들이 성폭행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하게 했다. 베이커 수도사는 연수 프로그램에서도 성폭행을 저질렀다.

펜실베니아 주 캐슬린 케인 법무장관이 알투 존스 타운 교구의 성적 학대를 다룬 보고서를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50여 명의 사제가 80여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고, 가톨릭 교회가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조직적으로 은폐했던 사실이 검찰 조사로 들어났다.

이에 앞서 펜실베이니아 검찰은 가톨릭 교회가 은폐한 다른 성폭행 사건을 조사했다. 검찰 조사로 알투나-조지타운 교구에서 일어난 사건에는 50명에 이르는 사제가 40여 년간 아동 수백 명에게 중대한 성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교구 담당자였던 조지프 애더멕 주교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한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범죄 은폐 사실은 교구 비밀 문건이 폭로되면서 드러났다. 가톨릭 교회가 돈으로 사건을 무마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애더멕 주교는 '애무'는 1만~2만 5000달러, '구강성교'는 2만 5000~7만 5000달러, '강간'은 5만~17만 5000달러 등 구체적으로 배상 금액표를 작성해 관리했다. 문제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처벌받는 가해자가 없다는 것이다. 가해자 대부분이 사망했거나 공소시효가 지난 탓이다. 

호주 추기경, 사건 은폐한 혐의로 청문회 참석

가톨릭 교회의 조직적 은폐는 호주에서도 논란이다. 호주에서는 특별 조사위원회가 진상규명과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 빅토리아주 밸러랫에서 사제들이 아동 성추행 사건과 1980년대 신부가 두 여아를 성폭행한 사건 등으로 호주 가톨릭 교회도 성범죄 관련 혐의가 계속 일었다. 더불어 교회 지도자들이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에도 시달려야 했다.

지난 2월 29일, 호주의 조지 펠 추기경이 조사위원회 청문회에 영상으로 참가해 증언했다. 그동안 조사위원회가 연 청문회에 참가한 가톨릭 교회 인사 중 가장 고위 사제였다. 현재 바티칸에서 재정담당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펠 추기경은 "교회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지만, 본인의 은폐 의혹에는 답하지 않았다. 

호주의 펠 추기경. 현재 바티칸에서 재정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호주 아동 성 학대 조사위원회가 진상 규명을 위해 연 청문회 증인으로 참석했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영상으로 증언했다. 그는 주교 시절 담당 교구에서 일어난 사제의 성범죄를 은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1980년대 사제에게 성폭행당한 두 자매의 가족은 지금도 어려움 속에 지내고 있다. 한 명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식이 장애와 자해 등으로 반응하다, 지난 2008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26세에 사망했다. 다른 한 여성은 성년이 되어서도 당시 기억을 떨치지 못해 폭음했고, 1999년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정신과 신체 모두 24시간 보호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유영  neovocalist@gmail.com

톨릭은 지금도 ‘면죄부’가 옳다고 주장한다


과연 면죄부를 사면 죽은 조상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이 있나?

 


 1. 가톨릭의 대사(大赦)와 면죄부의 근거


중세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은 ‘면죄부’(免罪符)였다. 일종의 헌금증서인 면죄부를 사면 산 사람의 죄와 죽은 사람의 죄를 경감받거나 면제 받을 수 있는가?


가톨릭교회에는 신자가 사제(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이나, 또는 죽은 자의 죄에 대한 형벌을 경감받거나 면죄받을 수 있다는 교리가 있다. 이것을 가톨릭에서는 대사(大赦, Indulgence)라고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471조, “교회에서 대사에 대한 교리나 관습은 고해성사의 효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을 경감 또는 면죄해 주는 것인데, 교회는 그 권위로 그리스도와 성현들의 만족한 보물(Treasury)을 나누어주고 적용한다. 대사는 죄로 인해 받게 될 일시적 형벌을 부분적으로 면죄하거나 전부 면죄하느냐에 따라서 부분 대사와 전체 대사로 양분된다. 대사는 신실한 사람이나 죽은 사람에게 모두 적용된다.”


제1479조, “정화 중에 있는 죽은 신자들도 성도들과 같은 지혜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한 다른 도움과 더불어, 그들의 죄들로 인한 일시적 형벌들을 면하게 되는 대사로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제1498조, “신자들은 대사로서 자신들과 또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죄의 결과인 일시적 형벌을 면죄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을 위한 역사적 면죄부 판매사건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324년 네로 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할 필요가 제기되어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가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건축된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1506년 4월 18일 ‘대 성 베드로성당’을 기공했다. 그러나 건축비가 엄청나게 소요되므로 건축기금을 충당키 위한 수단으로 면죄부 제작과 판매포고령을 선포하고 즉시 실행에 들어갔다.


이 성당은 당시의 유명한 건축설계사 브라만테(Brammante)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그리고 라파엘(Raphael) 등이 고용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2세는 1513년 2월 21일 열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은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기금을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면죄부를 사면 죽은 조상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현혹하였다.


당시 면죄부 판매 책임자는 수도사 요한 테젤(Johann Tetzel)이었다. 테젤은 “지금은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권세를 받은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이 자리에서 곧 사함을 받을 것이요, 회개의 필요 없이 현재 살아 있는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나 또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이 표를 사면 그 돈이 헌금 궤 속에 철렁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곧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선전했다.


면죄부란 일종의 헌금증서이다. 사제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면죄부라는 증서를 지참하면 어떤 성당, 어느 신부에게 가서라도 고해성사를 할 수 있고, 또 면죄부를 소지한 신자에게는 사죄권이 제한없이 주어진 것이다. 일부 사제들은 면죄부를 판매하므로 그 이익을 챙기고, 사치와 호화 를 하는 한편, 일반 신자들은 저들의 사기행각에 빠져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3. 면죄부에 관한 논쟁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발전


16세기 종교개혁은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비화되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이 시무하던 성당의 신자들이 면죄부를 사 가지고 와서 고해성사를 받으려 할 때 경고하고 교훈하며 되돌려 보냈다. 신자들은 면죄부를 들고 판매처로 돌아가 루터 신부의 말을 전하며 대금반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테젤은 대노하여 광장에 불을 피워 놓고 ‘이 면죄부를 반대하는 모든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하라는 교황의 명령을 받았다’고 협박하며 내쫓았다.


이에 루터는 과연 면죄부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를 논쟁해 보자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부르그 교회당 문에 내붙였다. 이것이 중세 종교개혁의 서막이었다. 이는 1517년 10월 31일의 사건이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1563년 트렌트공의회 제25회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면죄의 권세를 부여한 이래, 교회는 면죄의 권세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가장 오랜 때에도 이 권세를 사용했고, 교회에 전달했다. 성 대회(Synod)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면죄부의 사용을 가르치고 명한다... 공의회는 면죄부가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나, 또는 교회에 면죄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을 정죄한다’고 선언했다.



4. 비평


가톨릭은 지금도 연옥설과 면죄부가 옳다고 주장하며 시행하고 있다. 가톨릭은 면죄부의 정당성의 근거로 출애굽기 32:30-32, 욥기 1:15, 고린도후서 12:15, 갈라디아서 6:2, 디모데후서 4:6 등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출 32:30-32,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金神0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어 버리시옵소서.”


가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성인들이 하늘에 쌓아놓은 ‘교회의 보고’ 또는 ‘공로의 보고’라고 하며, 면죄에 필요할 때 그 공로의 보고를 끌어다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천국에 사람의 공로를 보관하는 창고란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은 모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기를 자청하였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받으신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모세의 생명을 취하시지 않으셨으며, 모세의 이름을 기록된 책에서 제하여 버리시지도 않으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소위 ‘공로의 보고’(Treasury of Merit)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무서운 죄이다(요 19:30,  히1:3, 2:14-15).



출처: 교회연합신문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황은 무지한 것인가? 거짓말 하는 것인가?


2013년 프란시스 교황은 미사 중

2000년간의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는 충격적인 얘기를 한다.


그것은 바로

"무신론자도 착한 삶을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신문에 따르면 카톨릭 신자들도

교리에 반하는 그 주장에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에 반대되는 주장이다.
교황은 다시 한번 충격적인 발표를 하는데,

이는 빅뱅과 진화론이 성경과 상충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어리석은 발언이

 


Salk Institute in California에서 일하는 스페인 과학자가 Scientific American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간의 세포를 동물의 몸 속에 결합시키는 자신의 최첨단의 연구를 개인적으로 축복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명한 줄기 세포 연구가인 Juan Carlos Izpisua Belmonte는 인간의 세포를 돼지, 양, 소와 같은 가축의 몸속에 넣어 배양시키는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간의 줄기 세포를 주사기를 통해 동물의 초기단계 배아에 결합한 뒤, 대리동물의 몸속에서 길러내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연구이다.


“스페인은 보수적인 카톨릭 국가입니다. 그래서 교황의 의견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교황께서는 저에게 친절한 어투로 ‘yes(괜찮습니다)’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 그분은 지금의 교황님을 의미합니다.  바티칸이 이 연구를 지원하고 있으며, 인류를 도울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그냥 (연구를 위해) 돼지를 죽이는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Belmonte는 Scientific American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티칸의 과학청인 The Pontifical Academy of Sciences는 현재 이 사실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는 이 메일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있다.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배아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입장임에도, 위의 사안에 대해선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과 동물의 키메라”에 대한 연구를 지지하는 바티칸의 입장은 지난 9월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 키메라 연구에 대한 지원을 금지한 미국 보건청(U.S.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입장보다 훨씬 급진적인 것이다.


기사원문 >> Pope Francis Said to Bless Human-Animal Chimeras 



* 동성애, 낙태, 구원론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부인하는 파격적인 언행을 보여주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제 인간과 동물의 세포를 결합한 ‘키메라 연구’를 지지한다(축복한다)는 또 다른 파격적인 언급을 통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의도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쏟아놓고는 한 발 빠지는,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해왔던 교황이 이번에도 “키메라 연구를 축복한다.”는 논쟁이 될 만한 발언을 한 뒤, 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는 언론의 요구에 침묵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롯의 때’의 특징이 동성애라면, 네피림으로 상징되는 ‘노아의 때’의 특징은 이종 간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하이브리드 인간의 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글 >> 창세기 6장에 숨겨진 비밀


노아의 때에는 타락천사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변종인간(네피림)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현대는 최첨단의 생물학 연구가 21세기판 ‘변종(하이브리드) 인간’의 탄생을 주도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세포를 결합한 ‘키메라’의 출현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롯의 때’를 앞당기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제는 “키메라 연구를 축복한다”는 발언을 통해 ‘노아의 때’를 앞당기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 세포를 결합하는 연구는 결국 현대판 네피림(변종인간)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교황 "종교마다 하나님 만나는 길 달라… 종교 관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Photo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일(현지시간) 공개한 동영상을 통해 종교간 화합을 호소하는 한편 모든 종교인들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 함께 대화하고 일하자고 요청하면서 기도를 부탁하고 나섰다.


그러나 종교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길이 다르다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발언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또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동영상에는 불교 여승, 유대교 랍비, 무슬림 지도자, 그리고 가톨릭 신부가 등장한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을 만나고 기도했던 지난 발자취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인이라고 말한다"면서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 불교 여승인 린첸 칸드로(Rinchen Kandro)가 등장해 "나는 붓다(석가모니)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어서 유대교 랍비인 대니얼 골드먼(Daniel Goldman)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가톨릭 신부인 기예르모 마르코(Guillermo Marc?)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슬림 지도자인 오마르 아보우드(Omar Abboud)는 "나는 알라를 믿는다"고 한다. 다시 등장한 교황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낀다"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말한다.


이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종교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신의 자녀라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 "붓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알라를 믿는다"고 했던 네 명의 종교인들은 각각 "나는 사랑을 믿는다"고 말한다.


교황은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달 나의 기도 요청을 퍼트려주기를 바란다"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진지한 대화가 평화와 정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영상은 끝난다.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교황 "종교마다 하나님 만나는 길 달라… 종교 관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Photo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일(현지시간) 공개한 동영상을 통해 종교간 화합을 호소하는 한편 모든 종교인들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 함께 대화하고 일하자고 요청하면서 기도를 부탁하고 나섰다.


그러나 종교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길이 다르다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발언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또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동영상에는 불교 여승, 유대교 랍비, 무슬림 지도자, 그리고 가톨릭 신부가 등장한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을 만나고 기도했던 지난 발자취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인이라고 말한다"면서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 불교 여승인 린첸 칸드로(Rinchen Kandro)가 등장해 "나는 붓다(석가모니)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어서 유대교 랍비인 대니얼 골드먼(Daniel Goldman)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가톨릭 신부인 기예르모 마르코(Guillermo Marcó)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슬림 지도자인 오마르 아보우드(Omar Abboud)는 "나는 알라를 믿는다"고 한다. 다시 등장한 교황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낀다"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말한다.


이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종교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신의 자녀라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 "붓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알라를 믿는다"고 했던 네 명의 종교인들은 각각 "나는 사랑을 믿는다"고 말한다.


교황은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달 나의 기도 요청을 퍼트려주기를 바란다"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진지한 대화가 평화와 정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영상은 끝난다.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철저한 학문적인 검증이나 개혁신앙적 뒷받침을 받는 책은 아닌거 같은데요,

중요한 내용들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특히 칼빈신학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어거스틴에 대한 평가에 관해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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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신화 - 프란시스(프란치스코) & 어거스틴

 


* 이 글은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도서출판 두루마리, 02-2277-8087)에 들어 있는 글이다. 이 글의 프란시스 부분은 "Mission to Catholics International"(P.O. Box 19280, San Diego, CA 92159, USA)에서 발간한 「St. Francis: The Man and The Myth」를 역자가 번역한 것이고, 어거스틴 부분은 구영재 선교사가 지은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도서 출판 안티오크 출간)에서 발췌한 것이다.



성자가 아닌 성도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이다. 먼저 '성자' 혹은 '성인'(Saint)이란 단어로 회칠 당한 '성도'(Saint)란 단어를 생각해 보자.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한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중심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낸 인간 자랑인 것이다. 사탄은 로마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왔다. 그들은 구원의 초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부터 인간들에게 두려고 온갖 술수를 꾸며왔다.


살아있는 죄인인 교황이 성자 추대식이라는 기이한 의식을 통해 죽은 죄인들을 성자로 대량 생산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기이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지막 나팔불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감히 죄인인 한 인간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로마 교황청은 지금까지 2천명이 넘는 성자들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트남 성자를 추대해 주지 않는다고 로마 교황청에 항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너무 많은 성자를 만들지 않았나 하고 자책하는 로마 교황청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날조된 성자들


한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승려)이었다가 진리를 찾아 로마 종교를 떠난 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살아난 중」(The Monk Who Lived Again)이란 책을 펴낸 몬타노 박사는 카톨릭의 도미니칸파 소속의 유능한 작가였다. 그는 어느 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포레스(Porres, 1579-1639)의 전기를 쓰라는 명령을 시달받았다. 그는 남미 페루의 도미니칸파 소속의 포레스를 성자로 추대하기 위한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전기를 써야만 했으나, 한번도 그를 만나 본적이 없었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는 자료를 갖고 또 성자 추대에 필수적인 기적에 관한 자료도 보완해야만 했던 몬타노 박사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포레스의 전기를 꾸며 로마 교황청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포레스는 1962년에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성자로 추대되었다. 순전히 몬타노 박사에 의해 조작된 이 성자는 오늘날 페루의 사회 정의 구현의 수호 성인이 되어있고, 이 날조된 성자는 대영백과사전 안에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Porres, San Martin de,란 참조바람).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예수회 사제들)인 볼란디스트(Bollandists)파들을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3백년이란 세월 동안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볼란디스트파의 우두머리였던 델레하예(1859-1941)는 그의 저서 「성자들의 전설」(The Legends of the Saints)에서 성자들에 관한 전설과 참된 전기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또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학자인 도널드 아트워트는 「성자 사전」(The Avenel Dictionary of Saints)에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 중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많은 부분이 순전히 가공적(꾸며낸)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전설과 전기의 배합물이다" 라고 시인하였다.



프란시스와 신화


이탈리아의 종교사에서 아씨시의 프란시스만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삶은 매우 겸손했고 단순했으므로 카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 모두 그에게 매혹되었다. 확실히 그는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수도승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자랑하는 기사들의 전성기에, 또 카톨릭 교회가 세속화의 절정기에 다다랐던 시기에, 이 보잘 것 없는 수도승은 가난과 단순한 삶과 어떤 신비적인 것을 가르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격동의 시기에 프란시스는 가난을 외치며 단순한 삶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다. 이런 말을 하면 그의 명예가 훼손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프란시스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햐면 큰 욕망과 야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런 욕망을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참으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그는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따라서 자기 아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의 품위에 걸맞는 매우 섬세한 옷과 멋있는 갑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비록 그가 젊어서는 난폭했지만 후일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언젠가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볼 것이오."


성 보나벤튜어(St. Bonaventure)에 따르면, 아씨시에는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마치 예언자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프란시스를 만날 때마다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시스의 발 밑에 펼쳐 놓고 프란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나는 후대에 그가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을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일들은 쉽게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영구히 자리를 잡곤한다. 실제로 프란시스의 전기작가 중 하나는 그가 언제나 모든 것에서 앞서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프란시스의 전기작가인 엥글레베르트(Omer Englebert)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야망이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옷을 재거나 자기 돈으로 먹여 살린 무리들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프란시스로부터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 영적인 것을 기대했다. 그는 프란시스가 귀족의 대열에 낄 것을 소망했다. 사실 영광스럽게 이러한 것을 성취하는 길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1201년에 페루지아는 아씨시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은 거의 10년이나 지속되었다. 1201년 11월에 프란시스는 폰테 산 지오바니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포로로 잡혀 페루지아에서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매우 즐겁게 생활을 했고, 그래서 그의 동료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도대체 당신 미쳤소? 우리가 이렇게 감옥살이를 하는데 농담이나 하고,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데 프란시스의 대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를 생각해 보고, 언젠가 온 세상이 나를 숭배할 것을 생각해 볼 때 어찌 내가 슬퍼할 수 있겠소?"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교황청과 아플리아 지방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기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버지의 돈으로 산 멋있는 갑옷을 입고, 그와 그의 종자는 교황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로마로 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매우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꿈은 프란시스가 야망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날 밤에 프란시스가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셀라노의 토마스는 최소한 그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옷감 파는 가게가 멋있는 무기, 안장 등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또 방에 앉아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신부를 보게 되었다. 프란시스가 영문을 몰라 놀라자, 어떤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 아름다운 여인과 군인들이 모두 다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프란시스는 아마도 이 꿈이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어두움 같은 것이 그를 덮으면서 그가 내린 해석이 틀렸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 그가 스폴레토에서 꿈을 꾸었는데, 그 음성이 다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도대체 이 모습을 하고 어디에 가고 있느냐?" "나는 지금 아플리아에 가서 전쟁에 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주인과 종 중 누구에게서 네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물론 주인에게서 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의지하는 주인을 따르지 않고 왜 종을 따르느냐?"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프란시스는 물어 보았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곳에 가면 네가 할 일을 계시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전쟁터에 가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더 즐거워 보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언젠가 내가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위대한 왕자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마지막 향연을 베풀고 아씨시의 거리를 통과하여 음악 행진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좀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강물같이 넘쳐나는 사랑 속에 빠져들게 되어 황홀감에 젖게 되었고 꼼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고 토마스 사제는 기록한다.


그때부터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되었으며, 급기야 프란시스파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성경기록관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프란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화를 내시며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던 자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으나, 프란시스는 모든 종류의 노여움이 죄라고 생각했고 어떤 폭력이든지 다 증오했다. 심지어 그를 흠모하는 엥글레베르트조차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용감했던 프란시스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방하려 했고, 어떤 새로운 업적을 고안해내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 했으며, 순교자가 되려 했고 끝내는 수난의 표적과 함께 죽고자 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는 것 자체가 극도의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프란시스는 디도서 3:5와는 대조적으로 선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 했으며, 또한 갈보리에서의 예수님의 승리를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스스로 추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글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끝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청하노니,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은 은총으로 더불어 이 편지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귀한 말씀으로 이 편지를 받으라."


크게 되고자 한 프란시스의 야망은 그의 회심 이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크게 되기 위한 방법과 수단만이 달라졌던 것이다. 프란시스는 스스로 기사도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서까지도 자신이 꿈꾸어온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회심 후 몇 년간, 그는 자신을 수장으로 두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기사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자"요, "위대한 왕의 전령"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원탁의 기사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기사들은 각각 부인이 있어야 했으며, 그의 부인은 '가난'이었다. 그는 바로 그것이 자기가 꿈에 본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 밖에서는 그가 포베렐로(가난한 소자) 였지만, 안에서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위대한 기사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란시스의 작품 중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널리 배포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유명한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 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섯 개의 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머지 네 절은 음악에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따라서 카톨릭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절을 아는 곳은 없다. 이 구절만이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카톨릭 교회가 그의 매력적인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프란시스의 작품을 교묘하게 편집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그의 신학이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신학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구원은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오게 된다. 그 예로 평화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구원이란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로마서 4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이 구절은 한 마디로 그의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보상이 은혜로 간주되지 않고, 빚으로 간주되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그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4:4-5)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영감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하신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저주받을 다른 복음을 전했으니, 이는 그가 믿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오직 그 믿음만을 통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었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선한 행위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도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카톨릭 신앙에 매달리자.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신부들을 공경하되 죄인일지도 모를 그 사람들(신부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성직 때문에 그들을 공경하자. 이 신부들만이 제단 위에서 우리 주님의 가장 거룩한 몸과 피를 거룩하게 만들며 그것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 이 구절의 문맥상 우리는 프란시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 즉 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시스를 극구 칭찬하는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은 아마도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다음의 글에는 미사와 신부직에 대한 프란시스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신부에게 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부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니 이는 그의 몸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니라." 프란시스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공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를 드릴 때에 그분에게 연합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력에 의해 우리 스스로를 구원시킬 것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순수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연합된다."


심지어 프란시스는 성체 즉 빵조각을 담고 있는 그릇들이 귀하고 거룩하므로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미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들과 기타 다른 모든 것은 귀한 것으로 존중히 여겨야 한다."


프란시스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관대해야만 하나니, 이는 구제하는 것이 죄로부터 사람의 혼을 깨끗케 만들기 때문이다. 금식에 관해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준수하며 과다하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늘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며 사랑과 긍휼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더불어 이런 행위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선한 행위란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을 감사하는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한 행위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속죄 값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 8-10절에서 먼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적고, 그 뒤에 선한 행위의 삶을 적었던 것이다. "너희가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되었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라."(엡2:8-10)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은혜를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을 때 에야만 비로소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이 점을 깨닫지 못했고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예식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프란시스는 자신이 청빈생활을 주장했으므로 그 당시 카톨릭 교회들의 물질 만능주의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및 권위에는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물론 이 "가난한 소자"는 예언된 대로 전세계의 추앙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아씨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며, 이 사실은 프란시스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을 버리면서까지 유명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연옥의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도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찌꺼기를 청산하지 못한 개혁 교회는 이제 '메시지' 대신에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음으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하에서 자신들의 해석체계를 정립했다.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Christ-Killer)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다인들의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까지도 이것을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시켰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오직 "교회-국가"만이 이를 실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교회의 성서로 불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원제목은「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임)이라는 역사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시킨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왕국을 건설하려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 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 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했으며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만한 논리성을 갖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보다 매우 다르게 미화되어 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베드(Bede, 673-735)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였다.


A.D. 410년, '영원한 도성(?)'으로 간주되어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 교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이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3을 주로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치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이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옛 바빌론의 "도시-국가"(City-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국가"(City-state)였다.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 「하나님의 도성」이 곧 카톨릭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성..."(15권 26), "...하나님의 도성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주해 71:18), "...하나님의 도성이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주해 98:4). 독자께서는 부디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놓은 첫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인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위해 세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였고, 믿음에 관한 영역에 있어서 주교는 기독황제를 판단할 수가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 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카에서의 반란 진압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해(고해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세째로, 암브로스는 교회와 국가간의 긴밀한 결속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인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왕자였다. 로마 제국과 앞으로의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Donatists)파는 그들의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Tyconius)의 지도 아래 흠없고 순수한 교회를 동경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를 흠모하였으나, 도나티스트들을 향하여는 "교회와 국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카톨릭 공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도나티스트들을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317년에 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티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화합 칙령"(Editct of Unity) 아래서 그들을 박해하였다.


파라(F.W.Farrar, 1831-190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맞추어 '이스라엘이 교회'라는 해석을 이끌어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 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권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지해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시되어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투성이였던 교회로 대치시켜버림으로써, 어거스틴은 철저하게 "사탄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란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계시록 2:7이 말씀해주듯이, 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 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왔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를 차곡 차곡 쌓아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서 등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자신들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들이 위조된 것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교회 내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7년 후에는 발라(Lorenzo Valla, 1406-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인 샬르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의 정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해한 성 베르나(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겼다.


카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중세 때에 이미 프란시스칸파는 여우로, 도미니칸파는 늑대로 불렸고,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계속해서 칼멜파 및 어거스틴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12세기의 오토(Otto of Freising, 1114/15-1158, 독일의 주교, 사가, 신학자)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제국의 연장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펼쳐나감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로마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합스부르크(Hapsburg/Habichtsburg/Hawk's Castle)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b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첨가시켜 로마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루터의 개혁(Reformation)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의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욱 더 조직화되었다. 그 결과 교황의 문장(Papal Coat of Arms)이 모든 도시 및 촌락의 중요한 자리에 나붙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의 재능가들을 로마 교회로 끌어들였다.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 모두가 동등한 만인 성직자(제사장, 벧전 2:9,10)임을 확신시켜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된 사상에 뿌리를 둔 반개혁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시킨 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지었다. 이들은 특별한 의장,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 11:4)로 둔갑하여 죄를 사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녀가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적 출세를 위해서 아들까지 낳고 동거중인 그의 내연의 아내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림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로마 교회의 거듭남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재창조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들려주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거듭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 주의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 계급에 절대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른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 교회(One Chruch, the 'catholica')의 통일성으로 삼고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회의 특성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전통'에다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사상"에다 "성물 숭배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말하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그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 즉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온 영혼으로 체험하였으며,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서신서들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이 무려 164회나 기록되었다. 그런데 영생의 심판자 노릇을 해온 카톨릭 교회 안에 안주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온통 "카톨릭 교회"'로 차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사실은 그가 복음을 모방한 거짓 종교에 빠진 채, 침울하고도 우울한 종교적 위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종교성 테두리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였음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는 악의 비참함을 철저히 되씹음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위안을 통해 회한의 자리에 머물었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 3:13,14)는 환희를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카이사르적이고 동시에 어거스틴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안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이고 있는 것인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라는 것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 공회(154301563)가 결정하고 발표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인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어거스틴파에 속하였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현대판 모니카와 어거스틴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 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살아나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 길인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좁은길을 걸으며

로마 천주교가 성모교라는 그 증거들 (2)

 

천주교를 알면 알아 갈수록
이들을 과연 이웃 종교 내지는
기독교의 한 분파라고 받아 들여야 하는가에 깊은 회의가 들며...
로마 천주교가 아니라 로마 성모교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모님께서는
<사제들>이 어떠한 거룩함을 지녀야 할것인가를 보여 주시는 <거울>이 되신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우리가 티없으신 <성모님>께 무슨 부탁을 드리면
성모님께서는
그것을 예수님께 바치시기 전에
그것을 <모든 불순한 것>들로부터 <정화시켜> <깨끗하게> 만드신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

 

<영성체>를 위한 가장 좋은 준비는
<성모님과 함께하는 것>이다(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만약 당신이 마리아와 밀접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 거기에서 당신은 아드님의 성혈로써
당신을 양육하시는 <성모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성 알베르또)

 

성체성사께 대한 신심과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은
단순히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
이 신심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성 필립 네리)

 

"아드님이 왕이시면, 그분을 낳으신 어머니는
마땅히 그리고 참으로 여왕이며 주인으로 간주되신다" (성 아타나시우스)

 

<하느님께 봉사>하는 피조물들의 숫자만큼,
<같은 숫자의 피조물들>이 <마리아께> 봉사한다.
천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통치 하에 있듯이
그들은 또한 <마리아의 통치 하>에 있다(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 "복되신 <동정녀>께서 천주의 <성자>를 당신 모태에 잉태하시고, <낳으셨을 때>,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의 반을 얻으셨으며>,
<이로 인하여> 당신께서는 <자비의 여왕이 되신 것>이다. (성 토마스)

 

"당신께서는 자비의 모후이시고 저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이오니,
저는 당신의 자비가 가장 필요한 자이옵나이다.
오 성모님, 어떻게 당신께서 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수 있겠나이까?"
그러하오니, 오 자비의 모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맡아주소서>. ( 성 보나벤뚜라)

 

왜 마리아는 자비의 모후인가?:
"그것은 우리가 마리아께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께서 원하실 때마다,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느님의 자비의 심연(深淵)을 열어주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마리아께서> 그를 보호하시면 <멸망될 수 없다.>"(성 베르나르도).

 

: "오 거룩하신 동정녀여!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연민이 그토록 크므로
<아무리 크고> <많은 죄>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하나이다." (성 조르쥬)

 

*****

성인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18세기 미친 무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리구오리의 신학은 여전히 천주교회에 남아 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요, <마리아는 자비로운 구세주>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단>이다.
마리아는 모든 은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은총은 마리아를 통해서 온다.

 

아무도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으며>
<우리의 구원>은 <마리아의 손에 달려있다>.

마리아의 명령에 하느님까지 복종한다.

 

마리아는 <전지전능한 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하느님이 단죄하시더라도 <마리아가 원하면> 구원될 수있다"

이것이 천주교, 아니 성모교의 실체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교황의 미국방문으로 보는 카톨릭에 대해 알아야 할 10가지

 

교황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개신교인들에게 카톨릭과 교황의 실체를 알기기위해 필라 목회연구원은 9월 17일(목) 오전 10시 새한교회에서 "교황과 천주교의 실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열었다. 발제자는 필라교협 회장을 역임하고 필라이대위 위원으로 있는 김선훈 목사.

김선훈 목사는 "교황은 기독교의 근거인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 유사 기독교 즉 기독교와는 사실상은 무관한 다른 종교의 대표자임을 알아야 한다. 교황과 가톨릭이 가르치고 주장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성경에 상반된다"고 강조했다.

김선훈 목사는 ①교황 제도의 문제점 ②사제에 대한 잘못된 주장 ③고해 성사의 문제점 ④잘못된 마리아에 대한 사상 ⑤가톨릭의 잘못된 구원론 ⑥가톨릭의 잘못된 예배론 ⑦가톨릭의 잘못된 기도론 ⑧가톨릭의 잘못된 성도론 ⑨십자가 숭배 사상 ⑩교황 제복의 문제점 등 10가지 소주제로 카톨릭과 교황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강사 김선훈 목사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의 미국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방문한다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미 2014년도에 한국 방문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개신교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한국 개신교 신도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가톨릭 교세는 커지고 있기에 개신교는 교황의 방한으로 교세가 더욱 위축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여 교황의 미국 방문을 비판하면 일반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개신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가톨릭의 교황의 엄청난 인기를 시샘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교황과 로마 가톨릭가 가르치는 거짓된 교리들을 용납하고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 미국을 방문함에 있어서 너도 나도 칭송하고, 심지어 그가 온 세상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평화의 왕이라고 추앙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정말 괴롭다. 단언컨대 교황은 기독교의 근거인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 유사 기독교, 즉 기독교와는 사실상은 무관한 다른 종교의 대표자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는 가톨릭(Catholic)를 개신교의 장자교회로 생각을 하며 구교(Old Church)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으나 가톨릭은 사실상 기독교가 아니다. 교황과 가톨릭이 가르치고 주장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성경에 상반된다. 

특별히 미국에 방문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1세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 ‘거룩한 아버지’, ‘최고의 제사장’이라고 공식적으로 호칭한다. 어떻게 죄인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고, 부패하고 타락한 인격과 영혼을 가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으며, 또한 감히 은혜를 구해야 할 죄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해 감당하시는 최고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교황에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성경이 존재하는 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자 이제 가톨릭의 실체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1. 교황 제도의 문제점

로마 가톨릭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인 교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만 다 거짓이다.

⑴ 사도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며, 결혼을 안 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가 주장하는 교황제도의 근거로 예수님의 12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의 직분을 교황이 물려받았다고 주장한다. 베드로 사도가 최초의 로마의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후 후대의 로마 감독들이 그의 직분을 계승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성경에 교황이라는 단어는 없다. 베드로는 결혼을 안 했으며 로마에서 25년 동안 교황으로 있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베드로가 교황이 된 적이 없다. 사도로서 평생을 지냈다. 그는 어부요 결혼을 한 사람이다(마 8:14).

그리고 가톨릭은 마태복음 16:18의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성경의 내용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예수님의 신앙을 교회의 기초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베드로라는 인간을 교회의 기초로 여긴다. 또한 영혼을 구원하는 참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뿐 아니라 교회와 모든 복음전도자들에게 천국 열쇠가 주어진다고 보지 않고 베드로 개인과 그의 직분을 계승하는 로마의 감독들과 교황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체 교회와 12 사도를 대표한다고 불 수 있는 내용이 성경에 없다.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역사적인 증거도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에 로마에 있는 많은 성도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으나 베드로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 감옥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도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없다.

베드로의 사도직은 구원계시인 성경과 신약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단회적인 직분이었다.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설립된 후 사도직은 종결되었다. 최초의 사도들이 사망한 후 사도 직분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계승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2사도를 대표하였던 베드로의 사도직이 후대의 로마 감독들에게 계승되어 현재의 교황에까지 이른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엉터리이다.

⑵ 교황은 절대 잘못이 없다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한다. 교황 무오설은 1869-70년에 개최된 제1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황이며, 교황은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제정함에 있어서 전혀 오류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피우서 10세는 제 1바티칸 종교회의에서 결의한 교황 무오설을 적극 변호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교황의 절대무오성에 도전하면 이단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3장 9절과 10절, 23절에 보면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모두 다 죄인이라고 했다. 죄의 삯으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교황은 잘못도 없다고 하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⑶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을 부를 때에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9개의 호칭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식 호칭은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호칭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타락하였고, 죄와 허물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주어진 정확 무오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한다고 하는 것은 교황이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제정하는 활동을 하는데 있어 오류가 없다는 교리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⑷ 교황을 성스러운 아버지(the Holy Father)라고 한다.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이 교황을 알현할 때에 ‘Holy Father’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검색하면 로마 가톨릭의 교황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설명되고 있다. 성경 어디에 사람을 거룩한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기록되어 있는가. 성스러운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은 성부 하나님뿐이시다. 성경에서 거룩한 아버지로 표현되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요 17:1)라고 호칭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인 교황에게 Holy Father라는 호칭을 사용된다는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⑸ 교황을 최고의 제사장(Pontifex Maximus)이라고 한다. 원래 이 말은 고대 로마에서 신들에게 제사하는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의 사제집단의 수장을 의미하는 호칭, 즉 최고 제사장이라는 뜻이었다. 로마 제국의 기초를 놓은 천재적인 정치인 율리어스 카이사르에게 이 호칭이 사용된 후 모든 로마의 황제들에게 이 호칭이 부여되었다. Pontifex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로마인들이 경배하였던 신들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우상 제사장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Maximus라는 말은 최고(great)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사탄과 사람들 사이를 중매하는 최고의 무당을 뜻하였던 호칭이 지금 로마 가톨릭의 교황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호칭을 사용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죄인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분(중보자, 딤전 2:5)은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다.

2. 사제에 대한 잘못된 주장

⑴ 가톨릭에서는 성도와 구별된 직분으로, 즉 특별 계급으로 그리스도 교회를 위하여 사제들의 교직 정치를 설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복음 전하는 자, 사도, 목사, 집사 제도를 주신 것뿐이다. 사제란 제사장이란 뜻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도가 만인 제사장이다. 특별히 누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님 이름으로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사제를 특별한 사람으로 가르치며 권위를 내 세우고 있다.

⑵ 추기경단 조직도 로마의 다신교의 사제단과 대등하다. 추기경(Cardnal)의 어원이 라틴어 Cardo(돌쩌귀)인데, 이는 야누스 신의 사제들의 명칭이기도 하다. 야누스 신은 문지기 신이라 한다.

3. 고해 성사의 문제점

고해 성사는 바벨론 종교에서 행하던 의식이었다. 바벨론 밀교에 입교하기 위해서는 비밀 고해를 해야 입교할 수 있었다. 이 고해를 통하여 사제가 비밀을 폭로한다고 겁을 주어 신도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만일 고해 성사가 성경적인 것이었다면, 아마 그 제도는 주님이 떠난 후에 바로 초대 교회에서부터 실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해성사 제도는 1215년이 되어서야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라테란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가 1200년 동안 실시해하지 않았던 일을 1200년 후에 갑자기 실시한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죄의 자백과 용서에 대한 문제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사제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에 사제에게 죄를 고해야 한다고 하여 사제의 권위를 높이고 있으나 우리는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고백하면 사해 주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4. 잘못된 마리아에 대한 사상

⑴ 가톨릭은 동정녀 마리아가 죄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요, 신령한 은혜의 조제사요, 새벽별이요, 예수님과 함께 속죄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다. 인간은 모두 죄 가운데서 출생하고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죄인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함을 받지 못하며 지옥에 간다. 오직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는 죄 없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뿐이시다.

⑵ 마리아는 하늘에서 성도의 기도를 듣는다고 가르친다.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요한복음 16장 23- 24절에 하나님께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과 8장 4절에 기도가 향연이 되어 천사의 손에 의해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 보좌 앞에 올라간다고 했다.

⑶ 마리아는 영, 혼, 육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요3 :13).

⑷ 그들은 죽은 부모나 형제, 자녀들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고 예물을 많이 바치면 토요일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천국에 올라간다고 하여 돈을 많이 내도록 한다. 그들이 드리는 미사 중에 하이퍼 둘리아(Hyper Dulia)라는 특수 공경 미사는 마리아에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이 피조 세계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출 20장). 그런데도 가톨릭은 자기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지키고 있다.

⑸ 가톨릭은 마리아에게 기도해야 한다며 기도 묵주인 로사리오라는 묵주 도구가 있다(염주알). 이것도 이교의 풍속이다. 불교의 염주와 마찬가지이다. 회교도 염주를 사용하고 있다. 완전한 로사리오는 성모 기도 53번, 주기도 6번 등을 반복하는데 주기도보다도 마리아에게 하는 기도가 9배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7-13).

(6) 모자 숭배 사상이 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은 기독교의 산물이 아니다. 바벨론의 유물 가운데는 여신 세미라미스가 아들 탐무스를 안고 있는 신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 모습이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도 니므롯 태양신 숭배와 통하여, 이집트에서도 이시스라는 여신과 아들 호루스의 모자 동상이 우상화되었다. 그리고 독일, 스칸디나비아, 에투루리아, 드루이드, 그리스, 수메르, 영국, 중국,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후 이런 전통이 초대교회 시절에 이교도들이 회심도 없이 그냥 세례만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교 풍속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교회가 타협하고, 이교도들의 모자 숭배와 유사한 점을 모방한 것이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이 교리는 A.D. 431년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 채택)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모자숭배를 기독교화 하고 한편 로마 가톨릭회의 양적 부흥과 함께 우상 숭배를 교회제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여 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자 상이다.

그러나 바울은 초기에 에베소에 왔을 때 이방 종교와의 화해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들이 섬기던 여신상을 스스로 부수어 버렸던 것이다(행 19: 24~27). 그리고 하나님은 이 우주 어디에도 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가톨릭은 이러한 내용이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십계명의 2계를 삭제하고 그 대신 아홉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정통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상에도 절하지 않는 것이다.

5. 가톨릭의 잘못된 구원론

가톨릭은 구원은 공로가 있는 일이나 공덕으로 얻을 수 있고, 혹은 사제들이나 성례나 마리아나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중재의 수단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은 정말 가톨릭의 큰 배도가 아닐 수가 없다. 어디에 인간의 행위나, 물질(돈)이나, 다른 사람을 통하여 구원이 있다고 성경은 말을 하고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가능하다고 갈라디아서 2장 6절과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말하고 있다.

또 가톨릭에서는 미사 시에 행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어떤 기도를 외우는 것과 염주도(念珠禱)와 연도(連禱)와 9일간의 기도(근행)와 금식과 금요일과 다른 지정한 말에는 생선 외에 다른 고기를 절식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은 사제에게 돈을 바침으로서 특별 사면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먹어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식물은 선하매 기도하고 먹으면 버릴 것이 없다(마 4:10-11)고 했다.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손으로 그리는 성호를 하는데 이것은 은혜의 방법이요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마를 쫓아내며, 은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마4:10-11).

6. 가톨릭의 잘못된 예배론

⑴ 미사=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사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성경 어디에 보아도 미사라고 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미사 때는 약정한 예물을 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죽을 때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요3:16) 바치는 예물로 간다는 성경 구절은 없다. 또한 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불타고 있는 죽은 영들이 휴식을 가지게 하는 행위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연옥도 없고 미사를 함으로 불에서 고생하는 자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한 것은 전혀 없는 낭설이다. 성경은 지옥에 가 있는 자는 오갈 수 없다고 했다(눅 16:19-31).

미사 때에 사제가 매번 성병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갈보리 희생의 반복이 되므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을 하였으며 이 땅에 심판장으로서 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콘스탄틴회의(AD 1414)과 트랜트회의(AD 1545)에서 미사교리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기독교의 예배는 성경 말씀과 찬송, 기도, 성찬 예식으로 성립되었다.

⑵ 잘못된 성례론
① 떡과 잔에 대한 주장=사제가 떡과 잔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의 실체의 피와 영과 살이 신성으로 변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3-25)고 했다.

그리고 성찬식하고 남은 빵을 보관하는 곳이 구약의 지성소와 같다고 한다. 신부들이 축성하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남은 빵이 보관되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하는 곳이라고 한다. 가톨릭은 신자들이 남은 빵이 보관되는 곳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여기고 경배하도록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일이다.

② 세례에 대한 주장=가톨릭에서는 어린이나 어른에게 세례 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물을 이마에 찍으며 머리에 뿌림으로서 신자가 되고 원죄를 씻고 그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고 했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임을 주님께서 직접 확증하셨다(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제 1257항)고 가톨릭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구원은 값없는 선물이며,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세례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카톨릭이 고안해 낸 것이다.

요한복음 1장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은 세례는 모든 죄들을 정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개종자를 하나님의 아들인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며 하나님의 성품의 참예자가 되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며 성령의 전이 된다(제 1265항)고 주장한다.

이런 교리는 많은 성경 구절들과 상반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언했겠는가? 또 빌립보 간수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했다. "그 후에야 그 밤 그 시간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 16:30-33)라고 했다. 그렇다. 그들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는 항상 구원 이후에 이어 나온다. 성경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들을 용서할 수 있으며, 세례와 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죄들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고 한 구절은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죽기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했다. 그가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낙원에 갔다. 왜 그렇는가? 이는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지 세례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인가? 오늘날 세례를 주장하는 개신교인들 중에서도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반대된다. 카톨릭 교리는 그렇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7. 가톨릭의 잘못된 기도론

가톨릭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도 다른 사람에게도 기도드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6절과 요한복음 16장 23- 24절에 하나님께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릴 수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리아도 천국에 간 성도에게도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고 주장하나 모두 잘못된 교리이다. 또한 기도는 기계적으로 되풀이 할 수 있다는 것과 염주와 같이 묵주기도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중언부언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마6-13).

8. 가톨릭의 잘못된 성도론

가톨릭은 교황들이 인정한 사람으로 죽어 하늘에 있는 자만 성도라고 부른다. 가톨릭인들이 죽기까지는 성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고린도후서 1장1절, 빌립보서 1장 1절, 골로새서 1장 2절에 보면 누구나 예수로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거룩한 자 : 구별된 자)라고 부르고 있음을 성경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땅의 사람이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듣지 못한다고 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과 땅에 있는 사람들의 중재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요한복음 2장 1절과 데살로니가 전서 2장 5절에 보면 오직 예수님만 중재자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약 11억 9567만 1천명의(2010년 12월 31일 기준) 교인들에게 잘못되게 가르치고 있다. 둘리아(Dulia) 미사는 성도들에게 하여야 하며, 제일(祭日)들은 성도들의 명예를 위하여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어디에 죽은 자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했는가?(눅 19장10절을 참조). 이 의식은 우상숭배임을 우리들은 쉽게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10장 25절과 26장 8-18절에도 베드로와 바울이 자기들을 숭배하려고 할 때에 나도 사람이라고 하면서 거절한 것을 저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느 학자는 가톨릭의 모든 의식의 75%가 이교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 십자가 숭배 사상

가톨릭은 예배가 아닌 미사를 드리는데 그 때에 십자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제를 본다. 미사 때에 사제는 십자가 표시를 16번, 제단 축복 시에는 30번 정도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고대 종족들이 무늬숭배로 사용하여 왔다. 부적같이 여기며 사용했는데 가톨릭에서 이것을 예배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상징하기 위한 형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상 숭배가 된다고 했다.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부적같이 사용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가 없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 형상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개신교는 촛불을 강대상에 켜 놓는 행위나 태극기를 강단에 장식하는 행위, 화려하게 꾸며 놓아 강단을 미화하는 행위는 성경에 위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려하게 꾸미면서 설교하신 것도 아니요, 화려한 곳에서 설교한 것도 아니다. 자연미가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설교하셨다. 가톨릭에서 제단의 촛대나 화려한 장식 등은 성경에 위배가 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십자가를 예배당에 세우기 시작한 것은 주후 586년부터 이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것을 예배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독교 이전 수세기 전에 십자가는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숭상되고 있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바벨론의 신인 담무즈(Tammuz)의 첫 글자 T 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글자는 바벨론 사람들의 가슴에 다는 호신 패(부적)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형(死刑)형틀로서의 십자가의 유래는 매우 오래 되었다. 먼저 이교도들이 사용해 왔고, 애굽, 앗시리아, 페르샤, 팔레스틴, 카르타고 등지에서 흉악범에 대한 처형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십자가의 모양도 여러 가지이다.

십자가는 가톨릭으로 물밀 듯이 들어온 우상들 중에 하나이다. 로마 카톨릭이 국가 종교적 형태로 발전하게 된 콘스탄틴 황제 때의 일이다. 밀비안 브리지 전투 하루 전날 콘스탄틴은 태양 신에게 기도했을 때 석양 너머로 십자가와 함께 "이 표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는 글씨를 보았다. 그 다음날 십자가를 앞세우고 진군했을 때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유일한 출처는 유세비우스인데, 그는 “역사의 날조자”로 규탄받은 인물로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콘스탄틴 황제는 태양신 미트라의 최고 사제로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미트라의 생일이 12월 25일 인데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한다는 명목하에 예수님 탄생일로 둔갑시켜 크리스마스라는 축제일로 제정하는 경정적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역시 미신적이어서 유품들을 찾아다녔다. 수세기 동안 교황들이 인정한 유품들은 가지각색이다. 십자가에 박혔던 못, 그리스도께서 입을 댄 해면, 예수님께 입혔던 주홍색 겉옷, 가시 면류관, 최후에 만찬 때 쓰던 잔, 마리아의 머리카락(어떤 것은 갈색, 고수머리, 빨간 머리, 검정색 등 종류가 다양하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탔던 어린 나귀의 뼈들. 이런 것들은 부적으로 팔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의 땅과 건물이 거룩하다고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787년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십자가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상징”이었다(갈 3:13). 우리는 분명히 해 둘 것은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또한 아무도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상징으로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이다.  

10. 교황 제복의 문제점

⑴ 교황이 쓰는 모자=가톨릭 교황이 쓰는 물고기 머리 모양의 주교관을 ‘미트라’(mitre:어두관, 입을 벌린 물고기 머리 모양의 모자)라 한다. 이 모자는 물론 교황만 쓰는 것은 아니다. 교황아래 추기경, 주교들도 무슨 행사 때마다 이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 그 모자의 모양은 물고기 머리 형태를 띠고 있다. 또 그 모자에는 라틴어로 'Vicarius Filii Dei'(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하는데 글자를 풀이하면 666이다. 이 모자는 고대 페르시아의 빛과 진리의 신, 즉 태양신 미트라의 모자에서 기원했다. 그러니까 원래 태양신 미트라교의 사제들이 쓰던 미트라 관을 로마 사제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쓰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최고 수장 교황의 어두관은 곧 가톨릭은 성경의 예수님의 교회가 아닌 중세 혼합주의 우상 종교이며 기독교로 가장한 요한계시록의 음녀인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⑵ 우상이나 동상에 교황이 입을 맞추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이교의 풍습이다. ⑶ 교황의 부채도 행렬 시에 대형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역시 이집트 이교의 산물이다. ⑷ 자주 빛과 붉은 빛 옷도 고대 이교의 복장이다. 로마 사제들의 복장이 붉은색이었다. ⑸ 사제들의 검은 예복도 원래는 바알 제사장들의 의복이 검은 색이었다. 스바냐 1장 4절의 그마림이 바로 검은 예복을 입은 바알 제사장이란 뜻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교황, 윤리·도덕보다 파격적 ‘교리 개혁’ 필요”

 

[인터뷰] 「교황 신드롬」 펴낸 최덕성 박사

▲최덕성 박사.


“신학자는 자기 시대에 필요한 신학적 과제에 답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만은 인정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자신의 말처럼, 교계와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 연구해왔다. 2013년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부산총회와 관련해 <신학충돌 Ⅰ: 기독교와 세계교회협의회>와 <신학충돌 Ⅱ: 한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를 잇따라 펴내며 경고했다. 이전에도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일본 기독교의 양심선언>, <종교개혁 전야>, <쌍두마차 시대> 등과 영(英)서 ‘Korean Christianity’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 최 박사는 지난해 종교계 최대 이슈였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열풍’과 관련, 최근 <교황 신드롬: 로마가톨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를 발간했다. 교황 방한에 즈음해 본지에 연재되면서 많은 클릭수를 기록한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시리즈를 비롯, WCC가 추구하는 교회일치운동과 로마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최덕성 박사는 고신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B.A.), 리폼드신학교(M.Div., M.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 등에서 수학한 후 하버드대 객원교수(1997-1998),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 교수(1989-2009) 등을 거쳐 현재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과 브니엘신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최 박사와의 일문일답.


-이번 책을 발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 이후 그야말로 ‘신드롬(syndrome)’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교황 신드롬’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교황과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황 방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봤을 때,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로마가톨릭에 대해 한쪽에서는 ‘적그리스도’나 ‘이단’이라 정죄하고 다른 쪽에서는 ‘형제’라고 하니, 성도들은 혼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에 대해 감정을 섞어 ‘이단’이라며 타도만 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로마가톨릭교회가 무엇인지, 기독교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주장과 근거를 명확히 일치시켜서 한국교회에 분명히 알리고 싶었습니다.


제목에 들어간 ‘신드롬’이란, 실체 없는 각자의 소망들이 모여 만들어진 일시적 현상 또는 허상을 말합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신기루(mirage) 같은 것 말입니다. 사막의 모래에 열이 가해져 만들어진 신기루를 물인 줄 알고 마셨다가 죽는 것처럼, 교황의 매력을 보고 따라갔다가 자칫 재앙을 만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로마가톨릭의 부흥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교황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것이 신기루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본지 칼럼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가 높은 클릭수를 기록하는 등 화제였습니다.
“최근에도 교황이 ‘모든 현대판 노예제도에 저항하겠다’고 한 뉴스를 봤습니다. 좋은 의견이지만, 교황의 말이 자칫 ‘자본주의 타도’를 말하는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을 배웠는데, 해방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본주의를 ‘현대판 노예제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도 개선할 점이 있고 절대 선(善)도 아니지만, 그 주장 자체가 근본적으로 해방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 파격적 행보와 도덕적 개혁으로 정체성을 알리고 있지만, 로마가톨릭 역사에서 그 정도의 개혁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교리의 개혁’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순수한 복음으로 교리를 바꾸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신의 파격성을 ‘교리 개혁’에 쏟아, 역사에 길이 남을 교황으로 명성을 얻지 않겠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가 개혁해야 할 교리는 무엇인가요.
“먼저 ‘예수 없이도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보편구원주의입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역사적 기독교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맺은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서 유대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무슬림도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지의 신을 믿거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도요.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둘째로는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교리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고 하고, 예수님 대신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로마가톨릭의 행위에, 마리아도 굉장히 분노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성경적 근거도 없습니다.
셋째로는 ‘교황좌(敎皇座·The See)’를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교회 조직과 법적 권력을 지배하는 교황의 권한을 말하는데, 로마가톨릭은 베드로가 최초로 그 권한을 받고 현 교황이 그것을 계승했다고 여깁니다. 교회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려는 탐욕의 상징으로, 중세 때는 실제로 황제를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넷째로는 ‘교황 무오(류)설’입니다. 교황이 공식 발표한 신앙·교리·도덕 관련 내용이 무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적·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교황은 굉장히 많은 오류를 범했고, 지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회의 과오들을 묶어 100쪽 정도의 참회고백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이 이 교황무오설을 공박하다 교수직을 파면당했는데, 그 주요 내용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교황 신드롬>.
-가톨릭과 기독교가 ‘형제교회’ 관계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황 방한 당시 장신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이 인터뷰에서 이러한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신학이나 교리가 다르다 해서 이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예수 없이도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가진 집단을 형제라 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기독교계의 ‘교황(가톨릭) 짝사랑’이 도를 넘었지만, 정작 가톨릭은 기독교를 형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직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2007년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효한 성례가 없다는 것으로,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인정하는 사제들만 유효한 성례를 집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WCC에 참여한 신학자들이 가톨릭과의 ‘일치와 연합’에 적극적이지만, 가톨릭은 결코 WCC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교황좌 아래 귀정(歸正)시키려 할 것입니다. 부산총회를 통해 WCC가 복음적으로 바뀌리라던 일부 교수들과 목회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WCC 부산총회 후 백서에는 ‘부산 정신’을 계승하자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거미줄이 쳐진 유럽 교회들처럼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없는 기독교, 종교다원주의를 계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특히 WCC 운동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특히 제 책에서는 WCC 전에 나온 ‘WCC 바로 알자’라는 책자가 한국교회를 기만했음을 명료하게 정리해, 후학들이 거짓 증거에 대해 똑바로 알도록 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럼,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단인가요?
“교황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열광적인 반응은, 우리 사회가 종교를 향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게 해 줬습니다. 교황 방한 당시, 손봉호 박사(고신대 석좌교수)가 그를 격찬하며 ‘한국 종교계가 교황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검소하며 겸허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손봉호 박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예수를 본받는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이지, 본받기만 하는 종교는 결코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은 믿음의 열매이지, 그 자체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닙니다.
또 묻고 싶은 것은, 손 박사님께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윤리가 기독교일까요? 윤리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지만, 그 윤리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를 용서받고 중생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는 손봉호 박사님 밑에서 배우기도 했고 40여년간 그분을 지켜봤지만, 그분의 입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먼저이고, 그게 사도의 직무 아닐까요?


교황에게서 복음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가톨릭이 이단이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도리어 묻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을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최덕성 박사는 “이 책으로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일은 마무리하고, 이제 기독교의 핵심인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단순하게 전하는 ‘단순한 기독교 운동’, 즉 ‘사도행전 30장(ACTS 30)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7545

 

개혁주의 마을/Grace

성모의 모유를 사모하는 사람들....

 

앞의 글에서 한약 속에
성모 모유의 성체 기적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이는 개신교의 금 이빨로 바뀌는 뿌리 없는 신학 사상과 달리...
성모 모유에 관한 기적에 대한 사모함은
천주교의 오랜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논문 가운데
성모의 젖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찾아봤지만 찾지를 못하였는데
찾게 되면 인용문을 제시할 것임)

천주교에서 성모의 모유를 직접 먹었던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시토파의 <성인 베르나르>이다.

그는 환시를 통하여 성모를 직접 본 사람이며
성모를 본 정도로 끝나지 않았고
성모가 친히 그에게 모유를 주신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사진 첫 번째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

그 이후로 베르나르는 성모에 관한 박사로 성모에 관한 최고 연구가가 된다.

벧전 2:2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의 대비하여
예수님께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난 것처럼
천주교 신자들 역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성모의 젖을 먹는 장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사진은 두 번째 그림을 확대한 장면인데
모유로 가득찬 매우 탱탱한 성모의 가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주 건강한 많은 젖으로
여러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모 모유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퍼져나가면서
중세 프랑스 샤르트르의 한 주교가
눈 병으로 고생하다가 성모에게 기도하였더니
성모가 친히 나타나셔서
가슴을 젖히고 그녀의 젖을 눈에다가 분사(?)하여
눈에 발라 주시므로 낫았을 뿐 아니라
성모의 젖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성모에 대한 신심이 발달하여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그림 가운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14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흉작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받던 시기로
이때 유행하던 것이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제의 그림인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할 뿐 아니라,
비너스를 비롯한 수 많은 여신들의 벗은 가슴을 통하여
이방 여신들의 세계를 훔쳐봤던 관음증 환자들이
이런 간접 카타르시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모의 가슴과 모유를 통하여 충족하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단들의 행보를 확인하게 된다.성모의 모유를 사모하는 사람들....

앞의 글에서 한약 속에 
성모 모유의 성체 기적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이는 개신교의 금 이빨로 바뀌는 뿌리 없는 신학 사상과 달리
성모 모유에 관한 기적에 대한 사모함은
천주교의 오랜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논문 가운데
성모의 젖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찾아봤지만 찾지를 못하였는데
찾게 되면 인용문을 제시할 것임)

천주교에서 성모의 모유를 직접 먹었던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시토파의 <성인 베르나르>이다.

그는 환시를 통하여 성모를 직접 본 사람이며
성모를 본 정도로 끝나지 않았고
성모가 친히 그에게 모유를 주신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사진 첫 번째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

그 이후로 베르나르는 성모에 관한 박사로 성모에 관한 최고 연구가가 된다.

벧전 2:2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의 대비하여
예수님께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난 것처럼
천주교 신자들 역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성모의 젖을 먹는 장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사진은 두 번째 그림을 확대한 장면인데
모유로 가득찬 매우 탱탱한 성모의 가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주 건강한 많은 젖으로
여러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모 모유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퍼져나가면서
중세 프랑스 샤르트르의 한 주교가 
눈 병으로 고생하다가 성모에게 기도하였더니
성모가 친히 나타나셔서 
가슴을 젖히고 그녀의 젖을 눈에다가 분사(?)하여
눈에 발라 주시므로 낫았을 뿐 아니라
성모의 젖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성모에 대한 신심이 발달하여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그림 가운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14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흉작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받던 시기로 
이때 유행하던 것이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제의 그림인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할 뿐 아니라,
비너스를 비롯한 수 많은 여신들의 벗은 가슴을 통하여
이방 여신들의 세계를 훔쳐봤던 관음증 환자들이
이런 간접 카타르시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모의 가슴과 모유를 통하여 충족하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단들의 행보를 확인하게 된다.

 

종교재판(3)
■ 마녀재판
 
끝까지 자신이 마녀임을 자백하지 않은 마녀는 발가 벗기운체 광장에 끌려나가 만인의 눈요기 꺼리가 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녀행위에 대해 낭독하고 끝이 뽀족한 창위에 올려졌다.
뽀족한 창끝은 먼저 여인의 질을 통과하고 가려린 여인의 몸무게에 의해 서서히 몸을 관통한 다음 입으로 튀어 나왔다.
여인으로써 창날이 몸을 관통하는것보다 더욱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것은 이모든 과정을 동네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진다는 것이며, 시체가 썩을 때까지 광장 귀퉁이에 그 형태로 방치된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마녀"임을 자백할경우 "주님의 은총"이 주어지는데, 이는 옷을 다입고 산채로 불태워지는 은혜로운 특혜를
받는 것이다.
 
 
1. 마녀재판의 시작
 
마녀재판이 절정에 이렇을때는 AD1400년경부터 1600년 말까지이다.
10세기 이전에도 마녀재판은 가끔 있었지만, 교황 요하네스 22세의 교서(1318년 2월 27일자)
"언제, 어디에서라도 마녀재판을 개시하고 계속하고 판결하는 충분하고 완전한 권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는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
 
 
2. 마녀의 정의
 
원래 마녀란 여자의 모습을 한 악마의 총칭이며 저주하여 농작물을 말라죽게 하거나, 인형에 바늘을 찔러 누군가를 죽게 하는
검은 주술사, 또는 주문이나 약초로써 병을 고치고, 농작물의 증산을 위해 비가 오기를 천신께 비는 따위의 일을 하는 흰 주술사,
그리고 원시종교의 양물숭배 등의 비의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여자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교회에서 마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어 악마를 섬기고,
그 대가로 부여되는 마력을 사용하며, 공중을 날아 마녀 집회(사바트)에 참석하여 악마와 교접을 하는 자로,
그 몸뚱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늘 있었다고 전한다
마녀재판으로 처형된 마녀의 약80%는 여자였고, 20%는 남자였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이런 마녀에 대한 살육은 1865년 마지막 마녀가 처형될때까지 지속되었다.
 
 
3. 마녀재판의 목적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1560년에서 1660년이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갈등이 증가하고 악화되면서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을 "Reformation(개혁)"이라고 하지만, 카톨릭에서는 "Deformation(기형 또는 변형)" 이라고 비꼬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마녀사냥은 신교와 구교가 각각 점령한 지역에 대한 배교를 막기위해 공포 정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는 사실이다.
칼뱅을 위주로한 프로테스탄트들의 마녀사냥이 훨씬 지독하고 잔혹했으며, 이는 상대적 약자라 생각하던 그들의 발악이 도를
치나쳤다는것을 알수 있다.
 
 
4. 마녀재판의 희생자수
 
마녀재판으로 희생당한 무고한 시민의 숫자는 줄잡아 900만명을 웃돈다.
그중 약 500만명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몫이였고, 나머진 카톨릭이 자행한 만행이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종교권력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희생양을 삼은 불쌍한 양민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는것이다.
아무리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마녀사냥을 했다지만, 900만명이라는 터무니 없는 희생자 숫자는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당초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종교권력에 빌붙은 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전 유럽을 집단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 규정요금
 
1.네 마리의 말로 사지를 찢게 한다: 5타렐 26알푸스
2.팔다리와 몸을 넷으로 잘라 나눈다:4타렐 0알푸스
5.참수. 화형:5타렐 26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9.산채로 화형:4타렐 0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11.차바퀴에 묶어 생체분쇄:4타렐 0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29.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라내고 그 위에 빨갛게 달군 인두로 구강내를 태운다:5타렐 0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32.익사,물에 뛰어들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살한 죄인의 사체를 이동시켜 구멍을 파고 묻는다:2타렐0알푸스
 
위의 요금표는 마녀사냥꾼들이 터무니 없이 마녀사냥 비용을 받는것에 대해 교회에서 적정요금표를 만들어 배포한것이다.
당연히 재판및 사냥, 처형비용은 압수한 마녀의 재산에서 지급된다.
마녀재판으로 인해 들어오는 이익은 상당했다.
재판은 크게 벌이가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썩어가고 있는 마녀의 유해를 성직자들끼리 서로 빼앗는 일도 일어났다.
몰수재산은 관리의 손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잔인한 도살로 죄 없는 사람 들의 목숨을 빼앗고 새로운 연그물이 사람의 피에서 금은을 만든다"
(코르넬리우스 루스 『요술의 참과 거짓』1592년)
 
 
5. 교회의 참회와 그 진실
 (2) 카톨릭의 참회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2000년 3월 12일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참회의 미사'에서 중세 종교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원정, 유대인 박해 등 2000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를 사상 최초로 공식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카톨릭의 교황이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하는 광경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은 감동 했으며,
대희년(제3천년기)을 맞으면서, 카톨릭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인류에게 참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로 변모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개지랄"을 떨었다.
그동안 쉬쉬하던 불편한 진실을 더 이상 감출수 없어 어쩔수 없이 인정 한것이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는 카톨릭 신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 "의도된 연출"임에는 틀림없다.
 
 
(3) 참회의 진실
 
2004년 6월 15일 교황청 에서 "종교 재판에 관환 국제 심포지움의 기록들" 이라는 제하에 783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자.
 
"이태리 라 시피엔차 교수(역사학) 아우구스티노 보로메오 에 의하면 가장 혹독한 종교재판이 이루어진 스페인의 1540년부터
 1700년 사이에 모두44,674건의 재판이 이루어 졌는데 그중 1.8% 만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중 대부분이 궐석 재판으로
 이루어저서 인형이 대신 처형 되었고 실제로 처형된 사람은 0.1% 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오늘날에도 전해저 오는 인형 화형식은 이때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악명 높은 마녀 사냥에 대해서도 스페인 종교 재판 역사상 총 125,000 건의 재판중 불과 59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탈리아에서 36명, 포루투갈이 4명 입니다.
 이런 수치는 근대 유럽 전역의 시민 법정에서 100,000건의 재판중 50,000 여명이 사형된 시민 법정과 비교하면 종교 법정은
 그 잔혹함이 훨씬 덜한것도 사실 입니다."ㅡㅡㅡ중략 ㅡㅡㅡ
 
그들은 이 보고서에서 중세 종교재판으로 처형된 사람의 숫자를 약 176명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2000년 3월 12일에 있었던, 교황이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한 내용은 카톨릭이 각종 종교재판이라는 만행으로
고작 176명을 죽였다고 인정하면서 "개지랄"을 떤것이다.
더 나아가 이 보고서에서는 이단 심문과 같은 종교재판이 계속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비판의 글이 주어진기도 한다.

 

 
1세기경 기독교가 태동하는 순간부터 현재 기독교에 이르기 까지 그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다.
그들이 권력을 가졌을때는 산채로 불태워지거나, 참혹하게 난도질 당하거나,아니면 공포에 떨면서 무조건 복종하거나를
선택할 "자유의지"가 주워졌을 뿐이다.
다소 편향적이것 같은 저의 주장이 과거의 일일뿐이고, 현재는 그렇치 않다고 반론하실분이 계실 것이다.
현재는 그렇치 않다고 생각되어지는것은 단지 그들이 권력을 갖지 못해서 그를뿐 그들의 기본 사상은 전혀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종교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깜도 안돼는 한줌의 권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김홍도"목사는 이런말을 한다.
"이단을 척결하는것은 교회 100개를 세우는것보다 더 중요하다"
"사탄의 권세에 놓여있는 세상과 우리 믿는자들은 끊임없는 전쟁을 해야한다."
만약에 이런자들이 권력을 가진다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기독교는 인류에게 커다란 저주이며, 본질적인 타락이며, 영원한 오점이다. ㅡㅡ중략 ㅡㅡㅡ
 기독교 내에서의 갈등 그 또한 기독교적인 것이다. ㅡㅡ중략 ㅡㅡㅡ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다."   <니체>
 
"성경이란 세상에 일어날 수가 있는 모든 악과 범죄를 타당하게 여긴 책이다"<존 램스버그>
 

 

가져온 곳 : 
블로그 >열두 광주리
|
글쓴이 : 송아지| 원글보기

종말론교수로서 한 마디한다면 동물을 애호하는 것은 좋으나, 죽은 동물이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믿게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무책임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신천신지에 동물계와 식물계가 존재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렇다고 지금 죽은 동물들이 마치 영혼이 있어서 우리 인간들처럼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개혁주의 목회자들 가운데도 이점에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죽은 반려견, 죽은 반려묘에 대해 슬퍼하는 교우들을 위로한답시고 천국가서 볼수 있으니 믿음 생활 잘해라 - 그렇게 권해서야 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동물을 애호하는 것은 좋다. 나는 개고기 안 먹는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영혼을 가졌다고 말할순 없다(

아침에 지나치다 보니 고신대 신약학교수이신 송영목교수님도 이 기사에 대해서 바른 말씀을 하셨더라).

 

그런데......

Pope Francis Confirm‍s Cats Still Going To Hell

December 12, 2014 by  
Filed under Libs & Trads

Pope Francis continues to show he’s not your average pope. During a public appearance this afternoon, Francis attempted to comfort a girl whose cat had died, saying, “One day, we will see our animals again in the eternity of Christ. Paradise is open to all of God’s creatures. All of them except for cats. In that case, little girl, the only way you will see your cat again is if you reject God’s grace and end up in hell.”

The Pope’s comment has reignited a debate on the subject, with the Humane Society saying that if Pope Francis believes animals have souls, then “we ought to seriously consider how we treat them,” a representative said. “We have to admit that all animals, save for cats, panda bears, and sloths are sentient beings, and they mean something to God.”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강만원 > <개혁포럼 시사토론방>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예수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도 되는 것이 아닌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댓글 올리신 분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솔직히 표현했을 뿐이며,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처럼 거리낌 없이 주장했을 것이다.

생각이 서로 다를 뿐, 틀렸다고 감히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답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럴듯한 논리다.

1)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다
2)예수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다
3) 그러므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인간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언뜻 보면 논리의 허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신자들은 주저없이 마리아를 ‘성모’로서 신의 반열에 올린다. 인간적인 공경일 뿐 신적인 경배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그에게 위로를 받고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가톨릭의 신일 수 밖에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독교의 종교적인 위상에 대해서 질문하면 어김없이 공경의 의미로서 ‘성모 마리아님’으로 부른다고 하지만, 공경과 경배는 분명히 다르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에서 보듯이 공경은 세상의 부모에게 해당되는 말인 반면에 경배는 신적인 존재에게 해당된다.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를 대하는 태도는, 내가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 또는 신적 존재이다.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승천했고,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신적인 능력과 권세를 부여 받았는가? 성경에 없는 사실을 교리로 세웠다면 이는 종교적인 주장일 뿐 결코 성경의 진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가 될 수 없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인식하는 신앙은 (일부)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전형적인 신앙관이다. 그러나, 예수가 육신을 지닌 인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런 논리라면, 성부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성모 마리아는 성부 하나님의 아내도 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이신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성삼위의 어머니도 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에게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로서 신성神性을 부여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특별한 영성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 되신 것도 아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육신의 도구였을뿐, 특별한 능력이나 신성 때문에 하나님이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어머니’라는 단어의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분명한 전제가 성립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마리아의 태에서 예수의 육신이 태어났던 것처럼, 예수의 거룩한 신성이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초월적인 신성도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었을 때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라는 말과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형태상 같은 듯 보이지만 하지만 내용상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국 마리아가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존재, 다시말해 ‘성모 하나님’일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신성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여종’의 신분이었던 그녀가 의인이 될 수 있었고, 나아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지 그녀가 본래 거룩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다.

마리아를 굳이 신의 반열에 두려는 가톨릭의 의도는 예수의 거룩한 탄생을 극적으로 미화하려는 종교적 계산 때문이며, 나아가 영지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특별한 관계(?)를 부정하며 인간 예수의 주변에 있었던 유일한 여인으로서 마리아의 위상을 다지려는 의도일 뿐이다.

마리아는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아름다운 여자이다. 또한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서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했고, 예수를 낳았던 그녀의 순종이 없었다면 당연히 예수는 그 때 그 곳에서 ‘나사렛 예수’로 태어나지 못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약혼은 동거만 하지 않을 뿐 혼인과 동일한 법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약혼한 요셉과 관계를 통해서 아기를 잉태한 것이 아니라면 마리아의 임신은 율법에 따라 간음에 해당하며 투석형에 처해지는 중죄이다.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전달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따랐다(눅1:30-38)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그러나, 마리아의 온전한 순종을 말하면서 희생을 무릅쓰고 예수를 낳았던 순종의 여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종교적인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며, 거룩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애써 꾸미고 치장할 때 오히려 본질이 훼손될 뿐이다. 예수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이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거룩한 모습이다.

우리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한다(송영찬 교수)

교회에서 예배의 대상은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최고의 예배 대상은 성 삼위 하나님이 아닌 ‘성모 마리아’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엄격하게 경계하며 반대하는 바이다.

 처음부터 천주교에서 마리아 숭배 사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AD 3세기경에 동로마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神母)라고 부르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이단 교리는 교회의 반대를 받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마리아의 영원 동정성(童貞性)이 대두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 일생을 동정녀로 살았고 다른 죄 있는 자녀들을 생산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역시 당시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다. 터틀리안과 오리겐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도 다른 자녀들을 생산했으며 마리아 역시 한 사람의 죄 있는 인간이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오래 지 않아 마리아의 영원 동정성이 교리로 체계화 되었다. 그것은 AD 387년에 제롬이 ‘영원한 동정녀’라는 책을 통해 주장했다. 그리고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AD 553년 제2차 콘스탄틴회의에서 마리아의 동정성을 선언했다.

 이 거짓 교리를 바탕으로 AD 7세기경에는 마리아 승천설이 주장되었다. 이 거짓 주장은 '마리아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육체가 썩음을 원치 아니하여 그녀를 승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1850년에 마리아 승천설이 선포되었다. 이 마리아 승천설에 근거하여 “성모는 천당에서 모든 천신과 성인의 모후가 되시며 우리의 중보가 되신다'는 마리아 중보설이 가공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마리아의 무원죄설’(Immaculate Conception)이 주장되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원죄와 전연 관계가 없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이다. 즉 마리아는 원죄의 오염을 받지 않는 유일한 인류가 된 것이다.

 이윽고 1954년 10월 11일, 교황 비오 12세는 이러한 주장들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는 마리아를 '하늘 여왕‘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1954년 12월 8일, 교황의 칙령에 의해 마리아 숭배 교리가 천주교의 정식 신조로 인정되었다. 그 이후 매년 5월 31일을 마리아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하늘 여왕’이라는 칭호의 기원은 '시돈 사람의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는 페니키아의 여신 아스도렛을 가리켜서 '하늘 황후' 또는 '하늘의 여신'에서 찾을 수 있다(렘 7:18, 44:17-19, 25). 이로써 천주교는 완전히 우상숭배 집단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하늘 여왕’ 사상은 세속적 우상 숭배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바벨론의 세미라미스, 앗수르의 아스다롯, 애굽의 이시스, 헬라의 아프로디테, 로마의 베누스(비너스) 등이 그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여신 숭배 사상은 인간이 조작해 낸 가장 추악하고도 부도덕한 우상이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임을 분명하게 밝혔다(딤전 2:5). 따라서 예수 외에 마리아가 인류의 중보자라는 주장은 거짓 교리일 따름이다.

 

이에 우리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그 어떤 주의 주장이든 반대하며, 이를 엄히 경계하는 바이다.

 

 

- 기독교개혁신보, 제681호(2014년 10월 25일) 사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황>은 아직도 지상의 하나님인가?(천주교인도 잘 모르는 카톨릭의 무서운 이단성


이 글은 카톨릭이 직접 편찬한 <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많은 내용을 2p정도(사진 제외)로 줄였는데 더 이상은 못 줄이겠다.

어쨌든 한 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1. 교황은 지상의 하나님이며 율법도 바꿀 수 있다

 

• 바티칸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가 1대 교황으로 임명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 없는 억지에 불과하며, 베드로조차도 “이분은......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느니라 (행 4:11)”고 말하며,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또한 성경 전체적으로도, 반석이 인간을 미화하는데 쓰인 경우가 없었다.

 

• 교황은 성경의 율법을 수정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

- “교황은,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의 왕으로서......하나님의 율법을 수정할 수 있고..... ( => Lucius Ferraris, "Papa, art" Prompta Bibliotheca 1782년)

(교황의 공식 칭호에 대한 글)

 

               

 

• 교황의 전용관인 3층 면류관의 의미 : 교황이 천상•지상•지하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의미

- “우리(주: 교황들)은 이 땅 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 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June 20, 1894, The Great Encyclical Letters of Leo XIII , 304 )

 

• 카톨릭은 공식적으로, 교황을 지상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였다.

-“ 교황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 => Lucius Ferraris, "Papa, art" Prompta Bibliotheca 1782년 )  (교황의 공식 칭호에 대한 글)

 

• 중요한 것은, 교황이 1992년에서야 <지동설의 갈릴레오>를 사면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황이 직접 철회하거나 교리책에서 없애지 않는다면, 그 교리는 계속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에 “교황의 결정은 틀릴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을 믿는 까닭이다. 어떤 교리들에 대해서 아무런 철회도 없이 침묵만 지킨다면, 그 교리들은 아직도 살아있다고 봐야 한다.

• (현대인들은 까먹고 있지만) “ 과거 개신교의 종교개혁가들은 한결같이, 계시록의 ‘작은 뿔‘,‘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의 단서를 지닌 ‘짐승’을 교황이라고 지적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 월간 풀빛목회, 강춘오목사 ( 한국 기독언론협회 회장,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 )

 

 

           2. 마리아는 만물의 여왕이다

 

• 교리문답에 나오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 중 몇 가지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 “그녀(마리아)의 중보로 영원한 구원의 선물이 우리에게 미치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969항 )

- “ 그러므로 마리아는, 변호인, 돕는 자, 중보자, 은혜를 베푸는 자의 이름을 가지며 교회 안에서 간구의 대상이 된다. ” ( 교리문답 969항 )

- “ 그녀의 삶이 끝났을 때, 하늘의 영광을 입게 되었고, 주께서 만물의 여왕으로 마리아를 높이셨다. ” ( 교리문답 966항 )

 

• 간단히 말하면 성경은, 마리아가 ”여자 중에 복이 있다”라고만 했지 그녀를 신성시한 부분이 전혀 없다. => 성경은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한다.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 예수시라. (딤전 2:5 ) >

=> 성경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변호인’이라고 한다. < 누가 죄를 지으면.....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예수그리스도시라. ( 요일 2:1 ) >

 

• 카톨릭의 마리아는 바벨론의 세미라미스 등 이교도 여신들과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또한 천주교인들은 존경의 대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기도의 대상이며, 교리문답에는 중보자이며 여왕으로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외에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언급하지 않는다. < 모든 이름 위에.....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 >

      

                    3. 태양신 숭배

        

           

 

                         

                                                        성체숭배행렬

 

태양신 숭배에 대한 공식적인 교리는 없다. 하지만, 성당들 내부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흔적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성체숭배행렬은 가장 태양을 사모하는 행사이다. 특별한 날에는, 태양모양의 <성체안치기>에, 태양모양의 빵을 끼워, 태양 형상의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4. 고해성사

 

카톨릭은 카톨릭의 신부와 교황이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가르친다.  - “주교들과 사제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 ( 교리문답 1461항 )

그러나, 성경은 결단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 <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죄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 막 2:7 ) >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존재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종교는, 그것이 신천지든, 통일교든, 카톨릭이든 다 이단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출처: JESUSwan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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