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 팀 켈러


오늘날 세계적으로 종교의 분열적인 속성을 처리하려는 모든 주요한 노력들의 효용성에 대해 나는 예전부터 변함없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지향하는 목적인만큼 강력하게 지지한다. 1장을 지지하면서 일반적으로 신앙은 마음에 가파른 비탈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비탈은 너무도 쉽게 모두를 억압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확신에 찬 정통 기독교 신앙에는 그 도리를 따르는 이들을 지상에 평화를 전달하는 일꾼으로 만들 풍부한 자원이 가득 들어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내면에 작용해 분열 성향을 설명하고 깨끗이 지워 버릴 힘이 있다.


기독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존중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한다. 예수는 믿지 않는 이들이 저마다 가진 문화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크리스천들의 행동을 대부분 '선하게' 여기리라고 보았다(마 5:16 참조, 벧전 2:21). 크리스천의 가치 구성과 그 어떤 개별적인 문화나 다른 종교들의 가치 구성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당연히 여기신 것이다. 이처럼 중첩되는 영역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선을 행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빚어졌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형상에 관한 교리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이 그릇된 믿음을 가진 이들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에 대한 교리는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정통 기독교 신앙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다고 기르치는 수준보다 사뭇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하게 한다. 이만하면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협력할 충분한 토양이 준비된 셈이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선량함과 슬기로움을 갖추고 있음을 믿게 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상당수는 윤리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산다는 인식을 구성원들에게 심어 준다. 이 시대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들 대다수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선하고 의로운 삶에 힘입어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정반대로 가르친다. 예수는 이만저만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라는 말씀을 하러 오신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처지가 되어 살고 또 죽음으로써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러 오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자신들보다 훨씬 인격적이고 슬기롭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크리스천들은 스스로의 윤리적인 공로나 지혜, 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 덕분에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까닭이다. 대다수 종교와 인생 철학은 신앙적인 성과에 한 인간의 영적인 신분이 달렸다고 추정한다. 그 교리를 좇는 이들로서는 자연스럽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그와 같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흔히 '근본주의'는 폭력으로 이어진다고들 하지만, 지금껏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너나없이 스스로 다른 믿음들보다 우월하다는 근본주의적이고 입증할 수 없는 신앙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정말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근본주의적인 신앙인들이 그 추종자들을 이끌어 의견이 다른 이들의 눈에도 더없이 사랑스럽고 끌어안을 만한 인간들로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배타적일지라도 따르는 이들을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쪽으로 이끄는 일단의 신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초기 크리스천들의 신앙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당시 문화와 비교해 보면 역사의 역설이 드러난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신앙관은 개방적이어서 거의 방임에 가까워 보일 지경이다. 누구나 섬기는 신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관습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리스-로마 세계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계층화되어 있었다. 빈부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이와 달리, 크리스천들은 오직 한 분, 참 하나님이 살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주장했던 이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다양한 민족과 계층 출신들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스캔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스-로마 세계는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크리스천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넉넉하게 베풀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세상일수록 여성들의 지위는 형편없이 낮았다. 여자아기의 영아 사망률이 턱없이 높았고, 강제 결혼이 빈번했으며, 경제적 평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예로부터 존재했던 그 어떤 계급 사회에서보다 더 큰 안전과 평등을 제공했다. 1-2세기 무렵, 도시를 중심으로 끔찍한 역병들이 밸생했을 때, 크리스천들은 시내 곳곳에 있는 병자와 죽어 가는 이들을 보살폈다. 그러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처럼 배타적인 확신 체계가 다른 이들에게 그토록 개방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은 신앙 체계 속에서 헌신적으로 섬기고 너그럽게 베풀며 화해를 이룰 더없이 강력한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현실관, 그 한복판에는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어 간 이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되새기노라면 결국 자신과 완전히 다른 이들을 대하는 전혀 다른 방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적대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질렀던 일들을 눈 질끈 감고 가볍게 넘어갈 순 없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힘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팀켈러의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에서 발췌(54-57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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