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한국의 자살율이 OECD 30개국 중 1위라고 합니다. 하루에만 35명, 1년에 13,000 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현실로부터의 도피와평안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자살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평온한 것 같아 보이니까 죽으면 평안이요 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죽음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 죽음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요 죄의 대가인 죽음이 어찌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죽음이 평안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죄인이 당하여야 하는 죄의 대가인 죽음의 형벌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요 혹독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죽음의 너머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들이 죽음의 벽을 넘어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종교들은 자기기만과 착각과 오해만을 제공합니다.
힌두교는 브라만(사제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사(평민), 수드라(노예계급)의 윤회를 믿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화장한 다음 갠지스강에 뿌리며 다음의 생에는 보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천상계,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여섯 길을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해탈하여 무(無, Nothing)로 들어가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캐고 싶어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주의 생성기원과 생명의 기원을 알아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물질을 쪼개고 생명체를 연구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결코 창조주의 비밀에 접근하거나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물질세계, 피조세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에서,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우리를 풀어내어 초월적 생명,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고통의 죽음에 갇힌 피조세계, 시공간의 벽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창조주요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피조물의 모습으로 피조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피조세계의 일원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음의 십자가의 고통을 지셨습니다. 죄 없으신 유일한 분, 죽음이 가두어 두고 붙잡아둘 수 없는 오직 한 분이신 그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끔찍한 고통의 죽음을 당하시고 죄와 죽음의 벽, 시간의 벽, 피조세계의 벽을 뚫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벽, 시간의 벽, 피조세계의 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방법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승객이 조종사와 선장을 믿고 비행기와 배를 타듯이 우리는 천국열차 되신 주님을 믿고 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믿는 행동의 표현이 세례의식입니다. 

기독교가 너무 세상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너무나도 세상적 복락과 현세의 삶을 가르치는데 빠져 있습니다. 물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바다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은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이 우리의 현세의 삶에 나타나는 것, 크리스천으로서 상의 소금과 빛 된 삶을 사는 것, 주님의 성품을 닮은 착한 행실, 예배와 찬양과 기도, 주님과의 교제 등,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세상의 삶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거룩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해도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결코 기쁨이 되지 못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현실세계에 갇혀있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 하고 주님을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나라를 회복시킬 왕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변화산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신 주님과 영광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너무나 황홀하여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그 제자들 또한 모세와 엘리야처럼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너머,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세계를 벗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 후에도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셨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끝부분을 보면 주님은 베다니 앞에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수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큰 기쁨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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