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트루스 포럼 시국 대자보 >>


위선의 괴물, 성적폐 좌파 진보세력의 민낯이 드러나다.
- 충격과 경악의 미투사태를 지켜보며

한때 대선후보까지 올랐던 유망한 젊은 진보 정치인, 노벨문학상 후보자이자 문통령의 절친이었던 시인, ‘이 사람 통하지 않으면 연극에 설수 없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연극계의 대부, 각종 유럽 영화제의 상을 휩쓸던 예술영화 감독, 모니터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대중의 살뜰한 사랑을 받던 국민배우들, 세월호와 촛불탄핵에 앞장서온 천주교 사제... 실체는 상습적 강간 및 성폭행범이었다.

1. 소위 운동권 진보 세력이라고 하는 이들의 도덕 윤리적 아노미 현상

대선후보에 까지 올랐던 미전향 주사파 정치인과 DJ, 노무현 등 진보정권때 유명세를 타며 밀월관계를 보였던 시인, 촛불시위때 불려다니며 앞장서서 정치인의 도덕성을 비판했던 연극 예술인 등이 도덕적으로 더 고상하고 예술적으로 더 우월한 듯 ‘사회정의, 인권, 민주주의, 평등, 독재타도’ 라는 화려한 구호를 외쳤지만 정작 무대 뒤에서의 이들의 삶은 너무나 이중적이며 추악했다.


타인에게는 적폐 청산 재벌해체 독재권력타도 등을 운운하며 청렴과 사회정의를 주창했지만 그들이 과연 그러한 자격이 있었을까? 화려한 정치선동의 집회 현장 뒤에서는 그런 정의로운 구호로 얻어낸 권력을 원동력 삼아 끊임없이 또 다른 약자의 영혼을 착취하는 모순을 보였다.


적폐를 청산하자 했던 그들이 사실상 성적폐였고, 독재권력을 타도하자는 그들이 자신들 앞의 약자에게 무소불위의 독재적 권력을 휘둘렀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소위 운동권 진보세력들의 이중성이 역겹다. 자신들 내부의 윤리적 모순과 성적폐부터 청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의 정의의 사도인양 시위의 선두에 섰지만 사실 애초부터 그들 내부의 도덕률과 원칙, 정의의 기준이란 없었던 것이며 결국 피 튀기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 결국 대중이 놀아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배신감마저 든다.


겉으로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면서 스스로의 도덕 윤리적 추악함은 합리화하는 좌파 진보세력의 도덕적 분열상태를 반영한다. 기존 사회의 성관념과 성의식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하더니 이제 그들 내면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윤리와 도덕성까지 해체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좌파 진보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젠더의식을 해체시키고 나면 그렇게 마음대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워도 양심이 조금 덜 찔리는 것일까?


2. 전체주의적, 집단주의적 사고의 마지막 종착지


2016년 서울대 인류학과 연구자의 ‘개인을 넘어서는 그 자리- 의례로서의 연극과 자아의 재구성’이라는 논문에서 관찰한 밀양연극촌은 실험적 공산주의 독재 사회였다.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는 집단주의적 특성”, “우리가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공동체”로 묘사되는 밀양연극촌이라는 폐쇄적 공간속에서 개인은 집단주의를 극도로 내면화해간다.


이윤택은 이들의 정신적인 추앙의 대상이었고 연극으로 먹고 살려고 하는 이들의 생계까지도 책임져야했던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복종과 굴종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것으로 그 부당함을 알면서도 단원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다.


이러한 밀양연극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생계를 보장하고 의존하기 위해, 또 공동체를 우선으로 하는 위계질서를 만들기 위해 개인의 다양성과 의사를 말살하는 사회주의적 분위기를 연상케한다. 개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자유롭게 개성을 발현하는 사회가 아닌 특정 정치인과 정권을 내세워 생계를 보장받고 의존하려는 오늘날의 사회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


모두가 촛불들기를 강요받는 분위기 속에서 이를 거부하는 순간, ‘적폐세력’ㆍ’박사모’로 몰아가고 모두가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평등이며 모두가 같은 임금을 받는 것만을 공평하다고 여기는 집단주의적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다.


“내가 자유를 포기했으니 너도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이 공동체가 살 수 있다” 하는 거짓된 종용이 드러난 사건이고 그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우리 사회를 볼때도 심히 우려스럽다.


3. 사상과 혁명의 달성을 위해서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이중성


일본 위안부에 대해서 끊임없이 분노와 비난을 퍼붓는 그들이지만 사실상 그들 운동권 내부에 오랫동안 위안부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운동권 시절에 혁명에 기여하느라 고달픈 운동권 남학생들의 위안부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고려대 하숙집 누님의 이야기가 찌라시처럼 내려오는 가운데 이 끔찍한 소문이 단지 차라리 괴담이였기를 바란다.


2010년대 민노총에서 발생한 여성노조원들에 대한 간부들의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태도는 여전히 모순적이다.


사회혁명의 대의를 위해 희생을 참으라거나, 위기에 처한 조직을 위해서 보위하기 위해 덮어야 한다거나 혹은 반대세력이나 프락치의 음해로 치부해버리는 음모론 등이 대세였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여성성을 과감히 버리고 여성으로서의 수치와 모욕 등은 잊고 무성화 되어 살라는 오랜 종용이 있었다.


여성으로서의 성적 수치감은 버리고 그냥 우리의 욕망을 채우라는 것이 사회혁명을 앞당기는 길이라는 논리가 그들이 말하는 젠더 해체였을까? 


너희가 하면 기득권의 적폐고 혁명을 하는 우리가 하면 ‘대의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혹은 이러한 ‘성문제들이 외부세력의 음해다’라고 주장하는 치졸한 논리오류와 비겁한 변명들이 그들 가운데 만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운동권 좌파 진보세력의 도덕적 아노미 상태는 당연히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좇아가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삶의 도덕률과 윤리규범은 쉽게 버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혁명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희생을 강요하며 허구적 공산주의 사상의 태생적 한계일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용어에 숨지 마라. 아름다운 구호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불쌍한 여성과 약자들을 착취하지 말아라. 혁명을 운운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


진보 사회주의 세력이 추구하는 부조리와 도덕적 정신분열의 상태, 그것부터 치유해야 한다.


2018. 03. 15


SNU TRUTH FORUM

사범대 박사과정 16 김보라(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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