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대리인으로서의 성령 / 루이스 B. 스미디즈

 

 

주와 성령에 관한 요한 칼빈의 사고 방식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의 특별한 주체성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유익한 예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전제가, 승천하신 주 예수님이 바로 영화롭게 되셨으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었으며 제한되었던 한 인간이신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여기 그리고 신자 안에 존재하시는 분은 바로 인간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참고. 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브루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가 "칼빈주의적 사고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을 떠나셔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 그분은 우리의 실재를 그가 계신 "하나님의 우편"으로부터 분리하는 간격에 의하여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으시다. 예수님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 계신다. 그분은 덧없는 영(an ephemeral spirit)으로 변화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들"은, 만일 그분의 행하신 바가 우리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면,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삶의 현장(out there)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분의 행위들의 혜택들은 이제 그분의 인격과는 불가분리에 있다. 그것들은 그분 자신인 것이다.

 

성령은 그분과 우리들 간의 살아있는 끈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직분(what is Christ)을 취하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성령은 언제나 인격적인 용어들을 통해 묘사된다. 그분은 생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물질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지는 도관(a pipeline)이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있는, 역동적인 생명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지각을 일깨워 주시고, 그리스도의 실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양육하시고, 우리를 훈련시키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접붙여 주신다.

 

칼빈이 성령에 대해서 생각하는 역동적이고 기능적인 방식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논의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성령은 모든 신적 행동의 능력이자 효력이시다: "행동의 시작과 만물의 샘과 근원은 하나님께 속한다. 지혜, 계획(counsel), 그리고 만물의 질서 있는 배열은 아들께 속한다. 그러나 그 행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속한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것들을 지상에서 효력있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활동하시며 생명을 유지시키시고, 피조물을 발전시키시며, 인간 역사를 전적인 혼돈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종종 칼빈이 성령을 중보자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에 관해 기록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아버지로서의 성령이라는 이름과 연합되었기 때문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자신의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우신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에게 이러한 능력이 제공되지 않았었다면, 그분의 강림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게 되는 것이라면 그분은 "이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이 틀림없다. 여기서 언급된 능력이 바로 성령이다.

 

그러나 칼빈이 성령을 증발하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분을 모호하게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신 반면에,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존재하신다.(참고. 신성과 그리스도의 영 사이의 동일한 중첩이 하이델베르그 요리 무답에서 발견된다. 질문 47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인데,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가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지만, 그의 신성, 엄위와 은혜와 영으로는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을 통해서 존재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이제 하나님의 오른손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분의 몸이 하늘 위로 올리워졌듯이 그분의 힘과 능력은 분해되었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을 넘어 퍼졌다.(Institutes II. x vi.14)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힘"과 "능력"을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으 성령이 아버지의 "덕과 효력"(virtue and efficacy) 이셨던 것처럼, 그가 실제적으로 효력있게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칼빈의 표현 방식인가?

 

칼빈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의 동일시에 직면케 될 때 그는 갑자기 멈추고 있다. 바울이 주와 성령을 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구절(고후3:17)을 주석하는 가운데, 칼빈은 바울이 "단순히 그분의(즉 성령의) 직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은 존재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 부활하신 중보자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 가운데 제한되고 국한되어 있는 중보자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여기 지상에서 우리와 연합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계시며, 그는 성령 안에서 여기 계신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구별되지만 기능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분께 종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필자는 우리가 칼빈의 일반적인 방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더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바울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자료들을 좀더 고찰해야 할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57-61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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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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