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흔들리는 갈대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흔들리는 공동체(교회),

첫 번째의 기대를 간직하고
두 번째 도착한 오산리 기도원에는
눈이 쌓이고 녹아 황토 흙이 보이는 황량한 벌판의 언덕아래에 입구가 있어
방범 초소 같은 임시초소(?)가 설치되어 입장료를 받았고
찾아간 기도원의 숙소는 가건물로 합판을 깔아 만든 마루에 장판을 씌운
강당 같은 커다란 방에 어림잡아 이백 명 넘을 사람들로 붐비었고
입구에 만들어 놓은 신발장의 신발이 넘쳐서 바닥에 이리 저러 흩어져
나중에 외출할 때면 신발을 찾기가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가지고 간 담요와 세면도구가 들은 가방을 놓아야 할 텐데
벽면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인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가지고간 담요위에 앉아 기도를 하였으나 강당 같은 커다란 공간에
통성기도와 찬송으로 목쉰 칼칼한 음성의 말소리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
방언 기도하는 소리 등 온갖 소리는 울림이 되어 떠들썩하고 어수선 하였고
겨울이라 난방을 하고 조그만 창을 막아놓았기에 환 풍이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와 발 고린내 같기도 한 냄새는 비위를 상하게 하였고
정신 집중을 할 수 없어 짧은 기도를 하고 밖으로 나오며 바라본 실내는
피난민 수용소가 아마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아니 피난민이리라
세상의 비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티끌 같이
삶의 소망과 절망의 경계인 절벽에서 구원을 잡고자
새해를 며칠 남겨든 연말을 가족과 친지를 떠날 만큼 절박하고도 가난한 사람들
축농증 심장병 천식 등의 환자에다
겨울이라 더운물에 목욕도 못하여 피부병 걸려 이중으로 힘든 사람들
가정문제 사업실패로 의지 할 곳 없어 머물며 이제 주거지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람들
굶주려 눈이 힁하여 힘이 없어 바닥에 두러 누운 사람들
오늘이 절박한 그들의 문제...
연말이라 붐비지 않을 거라 짐작했고
잠시 다시 온걸 환경으로 실망했던 자신이 한 없이 못났음을 한탄했다.

저녁시간이 되어 식당을 가신다는 아주머님께 여쭈었더니
식권을 사야지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알려주셨지만
이미 금식을 하고 있어 식권이 필요 없지만
식사시간이라 돈이 없어 배고픈 사람들의 군침을 삼키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수중의 돈을 어림잡아 헤아려 보았고 금식을 하기에 준비한 돈이 넉넉하지 않아
망설이다 중년의 남자 분께 식권을 사드릴까 물어 보았으나 얻은 식권이 있다는 대답을
들었고 그 분의 처지를 숨기는 듯 한 그 분의 말과 표정으로도 알 수 있어
그 분에 대한 연민과 망설였던 내 마음의 연민이 겹쳐져
자신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사람은 00성전으로 저녁예배를 드린다는 어느 분의 고함소리를 들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힘이 없어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모두들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관리인 인 듯한 분의 성화에
주위를 돌아보니 나 혼자 뿐이었다.
어두운 밖을 나가 도착한 00성전에는 울부짖는지 고성인지 모를 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할렐루야’ ‘주여 주여’ 목터지는 인도자 목사나
이를 따라 화답하는 사람들의 함성으로 정신이 사나운데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예수사탄을 이겼네’
‘내주의 보혈은’ 등의 똑같은 찬송을 반복하여 악을 쓰듯 목이 터져라 부르고
볼륨을 올려놓은 마이크 음성에 ‘믿씁니다 믿씁니다’ 는 바람이 새는 듯 한 음성은
귀를 막고 싶은 만큼 휭휭 거렸다.
이윽고 설교 전 찬송이 끝나자 헌금 바구니를 돌리고
또 찬송 몇 곡을 군가처럼 부르고 헌금 걷으며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양심이 있으면 죄만큼 헌금을 내야 선교에 쓰고 그만큼 죄가 사함을 받지 않겠냐’
‘죄로 인해 병이 걸렸으니 회개하고 은사를 받으려면...’
이상한 논리로 헌금 결단을 촉구하는 강압적인 말투도 듣기 싫었지만
설교도 많이 내야 많이 복 받는다는 내용으로
중간 중간에 회개기도 하고 회개 찬양이라고 부르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죄를 만들어 회개하는 듯하여
설교자가 입은 가톨릭 신부 같은 가운이 이상하게 보이더니
무당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조목사의 이야기와 최자실 전도사의 이야기
그리고 설교를 마치고 또 헌금
예배를 마치기전 또 헌금
한 번의 예배에 네 번의 헌금과 강제적인 새벽예배, 오전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 등
쉴 틈 없는 예배와 헌금 시간은 매일 계속되었고
어느 날은 예배 전에 후에 광고를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오신 목사님은 따로 방이 준비되어 있으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따듯한 독방을 쓰고 다른 사람은 강당같이 넓은 방에서 추위에 떨고...
화가 났다.
인간 세상이야 차별이야 그렇지만 기도원에서 차별이라니
광고하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밖으로 나와 바람 찬 동산을
거닐었으나 추위에 떨기 까지도 화는 누그러지지 않아
친척의 기도제목을 갖고 왔던 목적을 되새기며 진정하려 했고
이곳 분들과 처지와 내 처지를 비교하여 억지로 감사하려했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병에 걸린 어린아이와 같이 온 부모도 있었고
내 나이 또래는 20대는 없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삼사십 오십대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들이 많았고
노인들도 더러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한 방을 쓰면서
그들의 공통점은 급박하게 응답을 받고 문제해결이 되기를 바라기에
더하여 유행 같은 방언을 받고 싶어 하기에
그 추운 날 낮과 밤으로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고
어느 이는 나무를 하나 잡고 기도하면서 간절히 몸부림 쳐서
나무 하나를 부러트려서야 방언을 받을 수 있었다 하여
이에 동요하여 또 동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어느 이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위하여 습기 찬 토굴에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듯 기도했고
또 그들은 그들의 응답되기를 바라며 예배의 기도시간이나 어느 때나
방언 받은 것을 어린 아이가 자랑하듯이 떠들썩하게 기도를 하기에 언짢았지만
그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연말에 가족과 떨어져서 기도원을 찾을 만큼 절박하고 심각했기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내 기도제목과 함께 기도했으나
답답한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불쌍하고 가난한 그들의 금식과 방언과 기도응답과 같은 자랑이
밤이면 이곳저곳의 소곤대는 말소리로
이따금 고함치는지 기도하는지 모를 소리로
힘들게 잠들어 자다 깨고 보면
앓는 이의 신음소리가 짜증스러워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내 불쌍한 그들의 처지에 내 자신을 비교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스스로 나무라고
그들의 고통의 신음을 탓한 잘못을 용서하시길 기도하다
잠을 설치고 아침을 맞이하면
그들과 비교하여 안심 하는 미련함과 어리석은 비교가
아직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찔렀고
무엇이 얹힌 것처럼 답답하여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예배를 빙자하여 빚 진자 에게 빚 독촉하듯이
예배시간에도 교대로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수금 하는
그들의 말투 ‘하늘나라에 금고’ ‘하늘나라 확장’이라는 말이 가증스러워
속이 미식 거려 나중에는 얼음이 붙은 수도꼭지에 나오는 지하수 물을 이가 시리게 마셔
더러워진 속을 닦듯이 마시고 마셔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의 금식도 채우지 못한 다섯째 날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전도사가 계시를 받아서 짓기 시작했다는 기도원을
이를 성지를 여겨 모여든 사람들을 떠나오면서
탄식하는 마음에 기도원을 들어오기 전 보다 더 마음이 무거워
주님은 내게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는지 화가 났다 감사했다 또 부아가 났다.
임시초소 같은 입구를 나오니
금식을 위하여 한 동안 음식을 줄이다 굶은 허기가 몰려왔다.
입구 앞 몇 식당 앞에서 머뭇거리다 식당에 들어가
빨리 준비되는 국물을 시키고 허겁지겁 음식을 몇 숟가락 먹을 때
눈물이 뚝배기 속의 국물에 떨어졌고 마음에 파문이 일어
목이 메여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돌아온 집에서
아직 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았고
허기지고 휑한 마음에 먹은 반 그릇도 채 되지 않는 떡국 물을 먹고 체하여
그 후 떡국을 먹으면 체하여 오래 동안 떡국을 먹지 못했고
빈속에 먹은 음식으로 인해 위장이 탈나 오래 동안 고생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너는 기도원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성전으로 둔갑한 기도원 이냐?
선지자로 둔갑한 무당이냐?
세속에 절은 돈을 밝히는 바리새인 이냐?

그 누구도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본받겠다는 자라면
십일조 등 어떠한 헌금을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하는 마음에는 이미 생명을 경시(輕視)한 자라
그 누구라도
더하여 작정 헌금을 강요하는 그 마음에는
이미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기로 작정한
신앙인에서 사이비 종교인으로 변절한 변절자의 욕심이고

은사를 사모하라 하는 말은
은사 받기를 원한다면
한 알의 씨가 되어 죽어야 생명을 얻듯
나의 욕심과 나의 생각마저 버려진 마음의 중심에
그 자리를 대신하여 채워지는 은사라
믿음으로 믿음을 세우고 더하여 덕을 세워
공동체를 세우라는 공동체를 사모하라는 말로
동체를 위하여 헌신 하겠다는 결심이 결여된
마음의 정함 없는 은사는 탐심(貪心)이며 부당한 욕심이며
이를 가르치지 못한
이를 인지(認知)하지도 못한 기도원식 은사는
이미 은사가 아니다.

그 후
기도원 짓기가 유행하였고
기도원식 예배를 받아들인 교회들이 많아졌고
조용기 목사의 음성을 흉내 내는 목사들과 부흥사들은
그들은 며칠을 금식하였다는 금식 기간을 자랑으로 삼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예수님의 금식 40일을 따라 40일 금식을
거룩한 금식의 기간 이라며 자랑으로 삼았고
그들과 야합하여 수많은 종류의 헌금을 만들고
헌금과 복을 연관시켜 믿음의 평가 기준으로 삼았고
더해 교회를 짓게 되면 교회가 성전으로 둔갑하였고
기도원이 그랬고
방언이 믿음의 척도로 유행처럼 변질되어갔고
방언의 자랑으로 예배 중 방언 기도로 경건한 예배가 사라졌으며
신유 은사집회, 심령 각성 부흥회, 치유 은사집회 등 수많은 기적을
보고 믿으라는 체험 집회가 늘어나면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고 입신하고 환상을 보고 영분별을 하는
능력의 은사를 추구할수록 누룩이 번성하여
그런 헌신에 반비례하여 교회는 세상의 질타(叱咤)의 대상이 되어갔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며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베드로후서 2:14-16]

헌금의 종류를 수 없이 만들어 놓은
외식하는 현대판 바리새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무조건 믿으라는 분별없는 맹신자를 양산(量産)하였고
열성은 있으나 의가 사라진 광신자를 양산하였고
보여주기 식 수많은 은사예배와 간증
천국 간증, 지옥 간증, 입신, 예언, 치유 간증 등 수 많은 행위로
자신의 능력이라 자랑으로 삼는 자기도취의 신실한 의(義)로
박수받기를 원하고 존경받기를 원하는 자기 능력의 나타냄의 영광으로
공동체의 의라는 본연의 의는 사라지고
기도도 하나님의 의(義) 보다 자신들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 인양
목적을 위장하거나 호도(糊塗)하여 기도했고
진실하지 않은 외식을 행하는 자들이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보다 헌금이 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하나님의 의가 사라진 장로의 유전을 지키려는 전통을
예수님은 속은 더러우면서 깨끗한 척 꾸미는 회칠한 무덤과 비교했음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세속화는 물질 만능의 맘몬(Mammon)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가증한 행위를 일삼고
천국 문을 가로막는 거짓 선지자는
멸망으로의 회귀(回歸)라 경고 이었고 경고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화가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 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화가 있을 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5-18]

광야와 같은 세상의 삶에
사치에 물들면 영혼이 황폐하여 지고
화려한 신앙을 추구(追求)하면 믿음이 변절되었다는 반증이고
광야와 같은 세상의 교회가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면 진리와 멀어진 겉모습만 남은 종교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영리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교제가 사라진 기업 같은 모임이 되어
목회자가 세상의 CEO인 최고 경영자라 스스로 칭하면
이미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었고
그런 그가 설교가 ‘말씀 선포’ 라 하면
자기가 그린 그림인 자화(自畵)로 교회를 재단하는 자라
진리를 이미 짜깁기한 상태라
글과 설교가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니기에
그의 설교는 예문의 적응에 중독된 자기 고백을 갖추지 못한 화려한 말의 잔치고
의식을 갖춘 듯 하나 허례(虛禮)일 뿐이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였건만
이미 교회는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안식과 나눔의 교제가 사라진
교회가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온갖 헌금을 강요하고 작정하게 하고 헌금자를 주보에 공포하면
이미 은혜를 복(福)으로 연관시킨 결부(結付)라
헌금의 금액이 믿음의 측도가 되면
교회의 건축이 ‘성전 건축’ 이란 미명(美名)이 되면
성전이 헐림을 예언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복음에 반한 반 복음적인 행위라
구약의 성전 건축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인 교제의 회복을
예배의 회복으로 회복하려는 진정한 의미를 무시한 무지로
이미 교회는 교회의 의(공의)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행위라
화려한 왕궁을 바라보는 행위라
화려한 가운을 입고 사치한 종교인의 허세는
반 공동체의 길인 종교적인 획일한 모임으로 변절되어
생명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의
생명인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고 화려한 건물인 교회를 바라보게 되어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고 의와 단절된 종교인의 집단으로 되어간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고
닿아올 보이지 않는 성전(천국)
즉, 천국의 모형이 됨을 알지도 못하여 인지(認知)하지도 못하고 인정치 않아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공의의 무지라
세상의 도덕과 윤리에 미치지도 못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너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선지자 적인 사명을 가진 자냐?

스스로 지도자라 칭하는 자가 많은 세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선생들이 많은 시대
진정 지도자가 무엇인지
진정 선생이 무엇인지
진정 우리의 모습, 우리의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모습인지
그런지 묻고 싶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17: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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