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를 누가 외칠 것인가’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시편89:14-18]

무리에게 말씀하신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en clothed in soft raiment?]

보고 들어서 믿고 체험하여 더 믿고
더하여 은사를 받으라는 유혹적인 기도원식 예배는
방언은 필수가 되어 주문을 하듯이 외우듯 연습과 훈련을 하여 받고
치유가 기본이 되더니 어느 때부터
사이비 부흥사나 사이비 선교단체들은 순회(巡廻)팀을 만들어
집회 때 강사의 시나리오(?)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연출을 하게 되었다.
강사의 인도로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다가
‘보혈’ ‘피로 산 구원’등 자극적인 강사의 바람이 새는 마이크소리를 시작으로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하라는 강권(强勸)적이 되면서
부흥사가 팀이 된 여기저기에 섞여있는 사람들 중 한사람을 지명하여 나오게 하여
그 사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하면서 머리를 밀면 쓰러지고
바닥에 엎드려 입신하고...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강사의 손이 몸에 대기만 하면
쓰러지는 일을 연출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제 참석자들에게 그리하여 군중심리처럼 쓰러지는
쓸어져야 죄 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라 여기는
이제 쓰러지지 않으면 아직 죄가 남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회개하라는 강사의 핀잔이나 야단을 여러 사람 앞에서 들어야 했다.
시범을 보인 입신 자는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체험의 간증을 하고
또 다른 간증 자는 특별히 믿음 좋은 자로 인정된 자가 되었고
은사도 무당 식 귀신분별은사, 예언을 받고 예언을 하여야 최상의 믿음이 된 예언의 은사, 영혼을 읽는 분별의 은사, 등 온갖 분별없는 분위기 몰 이식
선동인지 협박인지 예배인지 간증인지 분간 못할 형태였고
다른 신유집회도 그런 팀을 짠 사람들과 더불어
개척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존의 중소형 교회의 부흥을 위한 방편으로 누룩이 되어 전국에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형태의 모임은 공식처럼 매 순서 마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할 때 마다
은사를 주고받듯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였고
그 집회의 헌금은 강사와 교회의 목사가 헌금을 나누거나
강사의 강사비와 유행처럼 번진 기도원 건축과 교회건축비로 사용하였고
집회의 마무리는 늘
지상명령인 선교를 위하여 'OO선교회, ‘선교연합회,
‘국내 국제 선교회, ‘선한...이웃, 마리아, 장애인..., 등 수 많은 단체의 이름으로
작정헌금 작정서를 나누어 주고 우편으로 헌금할 것을 다짐 받았다.

보여주기 식 치유 예배와 온갖 간증과 입신 경험의 간증 등
무분별한 행위로 체험이 성경으로 여과된 분별이 아니라
특정한 구절의 성경을 대입하여 그럴듯한 해석과 인식과 분위기 잡기 식 집회는
기존 예배의 엄숙한 형식에 얽매인 율법적인 환경에서 감성의 해방 같은
죄에서 해방 같은
죄의식의 해방으로 의식(意識)하여
복을 빌어주고 복을 받는
헌금을 낸 만큼 배로 차고 넘친다는 물질적인 세속화는 성경의 의를 초월하고
경험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리 저리 성경을 짜깁기하는
반 복음적인 일이 다반사 이었다.

미국에 온지 십년 만에 또 똑같은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금이빨, 금가루 기적,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기적, 키 크기 기적, 입신, 성령의 춤
예언, 직접 계시, 선지자 학교 등 ...
그리고 오늘날 자극적이지 않으면 고리타분한
분위기 몰 이식 감성의 경배와 찬양, 같은 찬송가를 몇 번씩 부르고
외치는 구호와 박수...
그런 모든 자극적인 집회나 예배는
이를 테면 믿음이라는 기관차가 감성이라는 열차를 이끄는 형태가 아니라
감성이라는 열차가 믿음이라는 기관차를 끄는
믿음에 의(義) 보다 감성적인 자극이 의(義)를 끌기에
성경을 읽고 성경의 구절과 장을 대조하여 뜻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설교를 듣고 그런가 상고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스턴트 음식이 음식의 고유한 참 맛을 잃게 하듯이
성경의 참뜻을 이해하기 보단 쉽고 간단하게 단정하여 다수의 뜻을 좇는
인스턴트 신자가 되어갔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린 이 세대의 우리들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천 명에게 떡을 떼어 준 예수님의 말씀은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And he said unto them, How is it that ye do not understand? 마가복음 8:21]
마음이 둔함을 탓하신다.
둔함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 라
믿음이 있다하나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지 아니하고
마음의 중심에 깊지 않은 믿음의 뿌리는
작은 거슬림의 못마땅한 감정에
조금 힘든 환경에
작은 사건에 갈대처럼 끝없이 흔들리는 생활이 습성이 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면
주께 주시는 평강과 평안을 누릴 수 없어
그리스도의 사랑만 입으로 외쳐대는 어리석음이
사랑을 말하고 노래하고 찬송하나 사랑 없는 사랑이 갈증이 되어
서로의 의를 바라는 굶주린 갈등이 되어 삶을 지배하면
화려한  자색 옷을 입은 자의 높은 마음을 품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여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니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는 [디모데 후서3:2-7]
그런 자들은 화려한 가운이나 자색 천을 걸치기를 권위의 상징으로 좋아하고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를 자청하여 자기 자랑의 교만에
스스로 침몰(沈沒)한 자 이거나 그들을 좇는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으신 자색 옷은
친히 세상에 오셔서
로마 군병이 조롱한 유태인의 왕으로서 우리의 왕으로의 상징 이였고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종교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하여 돌아가심으로
친히 낮아 지셔서 언약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그 언약을 증거하고
다시 오시어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눈부시고 호화로운 헤롯 성전의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갈릴리
빈자(貧者)들의 갈릴리
경멸의 땅 갈릴리 그 길로 향하셨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태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도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27: 28-31]

홍포(Scarlet fobe)는 홍색 염료로 물들인 홍색 옷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마가는 홍포를 자색 옷으로 표현했고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And they clothed him with purple, and platted a crown of thorns,
and put it about his head, 마가복음 15:17]
요한도 자색 옷으로 표현했다.
자색 옷도 왕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이고
성막을 지을 때 장식으로 쓰인 자색 실,
성막의 기구를 싸 두던 자색보자기 등이 있으나
자색은 권위의 상징이자 존귀를 상징이며 성(聖)스러운 상징이지만
그러나
자색 가운을 입은 종교지도자는 이미 제사장이 되어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 노릇을 하기에
그런 자 무리들의 모임 공동체는 투명할 수 없고
투명하지 못함은
신자와 신자사이에 높아 질려는 교만이 직책이 되어
낮은 곳으로 오셔서 높아지신 예수님의 복음이 사랑이 됨을 알지 못하고
진리에서 멀어졌기에
공의와 멀러진 까닭이었기에
우리가 사는 미국이 신앙의 공동체로 공의가 시들었기에
정의가 희미해져 가고
그 원인은 초심으로 살려는 청교도 신앙이 둔해졌기에
이 도시 저 도시에 화려했고 거대했던 교회는 황폐(荒廢)한 건물이 되었고
수많은 church street 의 교회는 건물만 남아 교인이 없는 거리가 되었듯이
한국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의 건축과 더불어
신앙이 초심을 잃은 종교집단이 되어 감은
교회사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처럼 역사에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시고 경고하신다.
기억하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무리는
다름 아닌 호화(豪華)한 대제사장이며 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이며
그들을  따르는 맹신자 광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함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또 배교가 있을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주어 또 경고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나나기 전에는
그 말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 후서2:3]

공의를 잃어버린 교만의 길은
박수 받기 좋아하고 그 박수에 열광하는 권위와 존경의 길은
고귀하고 존귀한 길 같으나
비천하고 미천한 길이라
이미 세속화된 신앙이라 분별력을 잃어버렸기에
그래서 보고 듣지도 못하고 자기 합리화의 긍정의 늪에 빠져서
자극이 없으면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자극이 없으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마음의 둔함은
영혼의 눈을 가려서 단순한 진리가 혼미한 머리와 혀에 머물러
몸에 미치지 못하는 지식에 함몰(陷沒)하면
그 지식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자기 지식에 갇혀 습관적인 예배와 관례(慣例)적인 의식에 머문
예배의 지속(持續)이 타성(惰性)이 되어 젖으면 굳어지고
둔한 마음에 둔한 영혼이 길들려져 배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라
얼마나 사이비가 많은지
이 세대를 본받고 이 세상을 본받아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곡해(曲解)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세속의 욕심에 탐욕(貪慾)한 자들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And 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e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 and perfect , will of God. 로마서12:2]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지 않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자들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to every man that is among you,
not to think of himself more highly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berly,
according as God hath dealt to every man the measure of faith.
로마서 12:3]

돌아보라
보이는 만큼 그 만큼의 믿음의 분량으로 라도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의
맘몬(manmon)의 우상이여.
세상을 보라
세상의 막장 연속극을 보고 감동하고 흥분하고
연속극의 이야기가 설교에까지 등장하는 비극을.
세상의 언론을 보라
세상의 언론이 공정하지 못함은 정의 보다 인기를 모색한 선전으로 빛바랬고
시대와 사상에 굴절된 정의를 정의라 하기에
충동과 선동을 조장함은
회칠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의 건물에서 일어나는 진리와 무관한
세속화된 획일한 인간관계와 맘몬니즘과 무엇이 다른가.
빛이 곧듯이 빛이 밝듯이 진리가 그렇듯
투명하지 못한 조직과 재정은 이미 진리에서 멀어진 상태라
진리를 얘기 하고 들은 들 진리의 변함없음에 떠난
진리의 항구를 떠나 세상의 거친 풍랑에 떠밀려
언제 부셔질 줄 모르는 난파선과 같은 현대의 교회는
이미 공동체의 공의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 외쳐야 한다.
누가 외칠 건가
공의가 사라진 삭막한 광야에서
사랑이 메마른 광야의 공동체에서.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사야4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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