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 번째 
질문 기독교인의 소송

기독교인은 소송에 연관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의 원칙이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고소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다른 신자들을 소송하는 것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권면(고린도전서 6:1-8)하면서 바울이 가진 주요한 관심사는 그러한 행위가 교회의 평판과 그리스도에 미치는 불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이해하면서, 언제 법적 행동이 적절하고 언제 적절하지 않은가를 질문하는 것은 적합합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행위에 대한 권위있는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일 그것이 그러한 행동을 허락하는지 아니면 금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은 상해나 손실에 대해서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 니다. 복수에 관한 모세의 율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 출애굽기 21:23,24)은, 오늘날의 공의에 대한 서구세계의 표준으로는 잔인하고 미개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복수하는 일을 제한하고 가족의 불화를 없애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생명 은 생명으로 혹은 눈에는 눈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형벌은 없습니다. 덜 심각한 경우에는 유죄 당사자가 가해자가 받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금전을 지불할 수 있 었습니다 (비고. 출애굽기 22:12 - 23:9). 사울과 그의 후계자의 왕정시대 전에는 재판은 흔히 그 도시의 장로들이 행했습니다 (룻기 4:1-12). 왕정시대에는 시민 사이의 잘못과 범죄에 대한 징벌은 왕과 그의 행정관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열왕기상 3:16-28).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표준의 행위를 가르쳤습니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며, 겉옷까지 내어주고, 그리고 십리를 동행하라고 지시했 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8-48, 6:14,15). 그러한 행위는 악을 선으로 극복하게 만들었으며, 잘못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를 개심(改心)하게 만드는 의도된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로마서 12:17-21). 이러한 “새로운 의로움”은 상해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상해한 것 에 대해 벌을 주며, 혹은 손해에 대해서 배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속 마음 가짐과 그의 “원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가해 한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보상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 하 는 행위가 개인의 화해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 삼자인 기독교인에게 그들 사이를 중재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었습 니다. 만일 그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그 문제를 전체 교회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기를 거절할 때에는 그를 이교도인과 같이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18:15-20). 

고린도전서 6:1-8에는 사도 바울이 신자가 다른 신자에 대해 세상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으며 (고린 도전서 1:26-31), 그 소송은 재정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인 사람에 대한 것을 취급했었기 때문에, 그 소송은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는 이름있는 부자 두 사람이 포함되었을 것 같습 니다. 그 소송에 대한 원고(原告)는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거나 (마태복음 5:38-48)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교회를 포함시키는 대신에 (마태복음 18:15-20), 소송을 제기한 것처 럼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세상 법원 앞에서 두 신자들이 투쟁하는 것이 알려짐으로서 기독교 지역 사회가 추문을 빚어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혜” 로 소문났던 교회(고린도후서 11:19)에 그러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고린도전서 6:5)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치욕을 안겨주는 것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을 뻔하였다고 (고린도전서 6:1-7) 그 원고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피고가 불의를 행하고 속였다고 (고린도전서 6:8)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그러한 일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2-6). 바울은 만일 죄를 범한 사람이 “이방인과 세리”라고 교회가 선언하면 그 소송이 적당 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7). 아마도 그러한 소송은 세상의 정부가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며,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고 하는 로마서 13:1-5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를 끼쳤을 때, 그 피해를 입은 신자는 그 문제 를 하나님의 판단에만 맡기고 단순히 잊어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 신자가 기도하고 또 주의 깊게 고려한 후에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에는 먼저 당사자와 직접 만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만일 그것 을 통해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믿는 사람인 중재인을 찾아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교회 앞으로 (담임 목사, 인정받는 장로나 집사,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중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때때로 법적 충돌은 신자와 신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바울 자신은 로마 법 아래서 자신을 방어하는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사도행전 16:37-40. 18:12-17, 22:15-29, 25:10- 22). 

명백히 바울은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을 시민에게 관계된 모든 법적 권리의 상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정부의 기능이 정의를 구현하고 잘못할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령님께서 주신 총명함으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또한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신자에 대한 질문은 절대로 “어떻게 내가 개인적인 복수를 할것인가?” 가 아닙니다. 대신에, 적절한 질문은 “내가 어떤 행동을 (소송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해야 사회의 정의를 가장 잘 구현하며,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고,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향을 가장 적게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소진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잘못된 일을 고치기를 거절한다면, 그 때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마태복음 5:38-48, 6:14,15의 말씀과 로마서 13:1-5의 말씀의 균형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개인의 동기부여를 검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1. 상해의 배상에 대한 나의 욕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속 법원의 힘에 호소하려는 것인가? 
2. 고린도 사회가 아닌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 만일 내가 세상 법원에 소송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인가? 
3. 나는 나의 청구(혹은 방어)에 완전히 정직한가? 아니면 자기기만을 통하여 상해금 액보다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보상을 받기 위하여 (혹은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 고 있는가? 
4. 성령님은 절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에 반하는 권면을 하지 않으시기 때 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기도한 후에, 어떻게 하는 행동이 “성령님에게 좋게 보이는가?” 
5. 추가적인 보호의 일환으로, 교회의 지도자나 장로 직분의 위치에 있는 다른 신자들의 권면은 무엇인가? 

관심사: 
미국 사회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배상 책임 보험 (liability)과 다른 형태의 보험이 그것입니다. 공중을 위한 정책은 여러 가지 상해에 대한 개인 보상의 방법으로 보험을 제정했습니다. 여러 경우에 소송 관계자는 법적으로 피고일 지는 모르지만 그 상해에 대한 실제적인 지불인은 보험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기독교인이 다른 신자의 나쁜 운전 때문에 심하게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두 당사자 사이의 법적 소송은 개인적인 악한 감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사고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보험자의 자동차 배상 책임 보험이 보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신자는 (고린도의 경우와 같이) 세상의 법정으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기 전에 교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지는 않으며, 공중의 정책에 의해서, 피해자가 단지 법적 체계를 이용하도록 함으로서 그 상해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 지역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신자인 변호사들이 해를 끼친 사람을 위한 조정 혹은 중재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그러한 그룹으로부터 중재를 받는 것에 대한 법적인 이점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적절한 합의서를 통하여, 기독교 중재 그룹이 내린 결정이 세상 법정에서의 결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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