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공의의 검(劍) 감사)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What went ye out into the wilderness for to see?
A reed shaken with the wind?
누가복음7:24]

젊은 날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다.
믿음과 허무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믿음이란
소망이라는 무지개를 쫒아 성경을 인용하여 세뇌하고 유도하는 사상으로
적당히 정신적인 죄의식을 심어주고 스스로 죄인이라 시인하여
죄에서 자유스럽지 못함을 자각케 하고
끝없이 감성을 자극하여 이성을 조종하고
육체적인 고통스런 삶을 성경의 구절로 협박하고
지키지 못하는 계명으로 압박하고
모임의 의식과 분위기 등 외압으로 종교지도자의 의도를 유도하여
그들의 주머니를 채우고
또 그런 세뇌로 자기 자신의 위안을 삼는 자기 심취와 자기만족으로 합리화 하여
그 길이 진리임을 세뇌당한 자 들의 집단 중독 현상이라 보기도 하였지만
정말 신이 있다면 세상은 정의로워야 하는데
바라보는 세상은 썩었고 썩어 부패의 냄새가 진동하는 욕망이라는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는
그러다 적당히 자신의 양심과 타협하며 자기도취와 성취에 만족을 채우는
종교라는 위선의 탈을 쓴 자들의 세뇌 화 의식 행위라 단정하기도 하였지만
악하게 바라보기에는 세상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였고
인간이 인간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마치 세상에서 격리된 채 거친 광야 같은 환경에서
세상의 바람에 스스로 흔들리는
흔들림의 연속도 실체가 아닌 허상에 놀아나는 삶 같아 우습게 보였고
그런 삶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삶에 애착도 없었고
무엇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다 가진들 깨달은 들 고통뿐인 삶을
종당엔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애당초 신기루를 잡으려는 공중누각(空中樓閣)인 것을.

그렇게 유년시절의 믿음은
허무라는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거대한 세계에 대항하다 스스로 무너졌다.

허무의 세계에서 마음의 바탕은 그 허무에서 조차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 자유는 진리라는 논리를 성경에서 찾기에는
세상의 사회적인 신분의 귀천(貴賤)과 부조리한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었고
설령 시대적인 사상의 우상 놀음에 놀아난들
신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뿐인데
내가 왜 신의 양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이 종교지도자의 양이 되어야 하는지
양이란 단어 자체가 역겨웠고
양이 된들 세상이 달리 보일까 변할까.

왜 헐벗고 궁핍한 가난하여 상처 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더 싸워 상처를 더 내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진 자들의 힘의 수레에 밟혀서
반복된 착취의 생활에서 신음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공평한 세상이어야지
한 생명 생명이 존귀하고 평등해야지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공정(公正)을 외면한 신이라면 신은 죽었다.
만약 살아계시더라도 신은 부조리한 세상을 창조하신
인간에게 신은 또한 구속(拘束)의 존재일 뿐이다.
그런 신이라면 그 신이 못 다한 정의로운 세상,
파라다이스는 못되더라도 더 나은 위한 세상을 위하여 신과 투쟁하고
가진 자의 억압으로 해방을 위하여 혁명가가 되겠다고 자신에게 수없이 다짐했지만
도대체 세상에 정의가 없는데 어떠한 정의감으로 혁명을 할 것인가...
그렇다고 누구나 평등한 공산주의자들의 구호처럼 실현한들
권력의 분배자를 만들어 그들의 욕망이라는 배만 불릴 것을.
또한 투쟁을 한들 물리적인 폭력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폭력을 어떻게 합리화가 되며 그 폭력이 정당하더라도
신이 있다면 그 폭력을 허락한 신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본들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이며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을 원망하여 도피한 자신을 발견했다.

집을 나와 자주 들리는 중국집
항상 웃음을 지시고 인자하시며 기품이 있으시며 정숙하시며 미인이신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의 중간자리에 열 살이나 된 듯 한 소년 거지아이가 음식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고
기도가 끝나자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아주머니는 물어 보았다.
그 아이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기쁜 표정의 그 아이의 말이 내게는 충격적 이었다.
(나는 네 나이 때까지 감사하기커녕
나이 스무 살이 넘도록 감사한 기억도 오래 되었고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기도와 그보다 원망만 해 보았는데 감사라니...)
그 아주머니는 그 애의 옆에 서서 더럽고 엉클어진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울고 계셨고 아이가 면을 젓갈로 집어 먹을 때 마다 천천히 먹으라며
국물을 먼저 마셔야 체하지 않는다 시며 물도 따라 주시고
오랜 만에 만난 아들마냥  대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 그 아주머니의 갓 고등학생이 된 귀엽고 예쁜 딸이 어머니를 도우려 왔다
그 아이를 보더니 동생처럼 대 하며 반가워하지 않는가.
순간 그 거지 애가 부럽게 느껴졌다.
나는 누구에게 들킬까봐 조용히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데
아주머니가 내게 닿아 오시더니 ‘너는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 아버지 걱정하시겠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에 아버지가 불쌍히 느껴졌다.
그 후 군인이 되어 휴가를
영화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영화구경을 하고
그 집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식당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고
그 식사는 아버지와 한 마지막 식사였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한 기억으로 남아 있고
그 모습으로 인해 아버지께서 ‘늘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아버지가 갖고 계신 성경의 첫 페이지에 써 놓으신 그 구절은
찬송가의 첫 페이지도 써 놓으신 것을 보았고
벽에 까지 붙여 놓으신 걸 바라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늘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는 이미 신자이셨던 아버지의 신앙을 인도하셨고
아직 불신자였던 아버지의 형제자매를 전도하여 신앙인으로 이끄셨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종당에는 당신이 찬송하시던 하나님께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닳고 헤어진 성경책 안에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을 간직하셨고
오래전 아버지의 성경책에서 어머님의 사진을 발견하였을 때
그 사진의 낯선 분이 어머니인줄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오래 동안 읽으셔서 닳아 헤어진 성경책만큼
성경을 읽었을 때 아버지의 ‘감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원망은 분노를 일으키고
분노는 원망을 일으키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감사란
왜 감사에 조건이 없고
왜 감사가 믿는 자에게 능력임은,
당시의 고통은 괴로움으로 영혼의 눈을 가리고
당시의 기쁨은 교만으로 영혼의 눈을 가리기 쉬워서
고통과 기쁨을 넘어 주의 나라에 이어진 소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소망의 끈 믿음을 잃지 않는 다면 천국을 볼 것이고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의 의 보다 낫지 못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도 없어 이룰 수도 없기에 결국 현대판 서기관과 바리새인 인
종교인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다.

구약의 감사는 감사제(Thank offering)로 드려졌고
화목제(Peace offering)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을 직접 가져오고
서원이나 자원이나 감사할 때 드렸으며 기름과 콩팥을 화목제로 드린 이유는
기름은 가장 좋은 것, 귀중한 것을 의미 하였으며
콩팥은 인간의 생각과 양심과 감정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에(레3:4)
가장 순수한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가 감사제이기에
드려진 제물은 당일에 먹고 다음날 까지 남겨 두지 못했는데
여기에 나날이 새로운 감사의 의미가 있지 아니한가.

신약은 화목제로 돌아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린 예표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드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현실의 삶에 적용하여
삶이 예배가 되는 나날의 삶이 예배라
교회의 예배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본받자는 결단의 마음을 주시는 성령님과 함께 한 자들의 모임이라
세상과 같이 관료적인 무책임한 수직의 관계가 아니기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갈라놓은 집단이나 조직은
이미 하나님의 진정한 감사함을 잃은
무늬만 남은 현대교회의 겉모습일 뿐이다.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주님!
허무의 세계, 허무한 세상의 허무로 상한 갈대 같은 저를 보았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저의 생명을 보았으나
사랑의 하나님의 사람을 보아
하나님 뜻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He shall not fail nor be discouraged, till he have set judgment in the earth:
and the isles shall wait for his law. 이사야42:4]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상한 갈대가 되어 이리 저리 흔들리고
꺼져가는 심지가 되어 어둠을 밝히지도 못하고
풍비박산(風飛雹散)
바람풍(風), 날비(飛), 우박(雹), 흩어질 산(散)
바람에 날리고 우박에 흩어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삶 같더라도
바람과 비 그리고 우박과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듯
무지개는 언약을 세우신 징표로 보여주셨고(창9:9-17)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했다.(겔1:28 계4:3)
또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퀘쉐트(qesheth)' 로 ’활‘을 의미함은
그런 어려운 세월도 활 같아 날아가니
인생이 들에 핀 꽃처럼 쉬이 지니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공의를 지키라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till he send forth judgment unto victory.
마태복음12:20]

무엇 때문에 살까
무엇으로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치 않거나 회의(懷疑)가 들 때
삶에 지쳐 근심 걱정으로 고통스러울 때
검을 주러 오신 주님께
검(말씀)으로 공의를 이 땅에 이루려는
하나님과 화목을,
자신의 삶으로 이루려는 신앙인의 힘은 감사라
감사는 성령님과 함께 하시는 증거라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자
공의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근원의 힘이라면
검은
그런 자들이 생명 같이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자 하는 말씀의 칼이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이루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 누림이 기쁨이며 평안이라면
주는 우리의 힘이 되시고 좌우에 날선 검의 말씀이 되어
먼저 내 영혼을 찔러 쪼개기 까지 하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고
다시 뵈올 주님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공의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의 힘
곧 자녀 된 자의 권세(權勢)의 능력이 검이 될 때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을 가질 때
세상이 아름답게 보임은
형제자매가 아름다워 보임은
다가오는 천국의 모형을 영혼의 눈으로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정경(canon)이란
canon 은 표준, 척도, 모델을 뜻하며  
그리스도교(개신교)에 공식적으로 채용한 경전을 이르며
그리스어 kanon에서 유래한 말로 그 어원은 슈메르어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아시리아어, 우라리트어, 헤브라이어를 걸쳐 유래하였다 하며
그 본 뜻은 곧은 ‘갈대’를 가리켰다 한다.
바울은 ‘인간행위의 기준’ 으로 규례를 언급했으며(갈라6:16)
규례는 ‘판결’이란 말로 공의를 가리키며
그 어원인 ‘choq’ 는 ‘새겨 넣다’ ‘조각 하다’ 라는 뜻이며
법도(mishpat)도 ‘판결하다,는 말로 공의를 가리키며
율례(regulation)은 율법의 적용에 관한 법례와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는 공의를 뜻하며
초대교부들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과 행동의 기준’으로 여겼으며
공의(Justice)는 이모든 의미를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이며
그래서 공의란, 말씀이란 칼을 가슴에 새겨 넣고
나의 삶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조각하여
곧은 갈대가 되어 바람에 흔들릴 지언즉 쓰러지지 아니하는
꺾이지 아니함의 신앙을 의미해 보면
예수님의 물음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은 믿음의 근본과 그 근본의 믿음에 바로선 신앙의 본질의 질문이시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는
예수님의 대답(Jesus is the answer)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응답(應答)이시며 길이시라
우리의 구원자로서 오늘날 꾸며진 허례와 의식에 찌들어 종교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물으시는 우리를 향한 근본의 가르치심 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10:3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누가복음 7: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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