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그리스도의 몸(3) / 루이스 B. 스미디즈

 

 

2. 그리스도의 몸이 계신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그 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몸이 어떤 특정한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해서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조직인가? 그것이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교단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은 제도적인 교회에 의해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공동체인가?

 

바울은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은 예배와 섬김의 행위로 나타나는 친교라는 것이다. 둘째, 그 몸은 지역적(local)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다"(고전12:27). 바울이 고린도의 한 가정의 거실에 모인 어떤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 무리ㅡ그 이름, 직분들, 예배의식, 그리고 가시적인 활동들과 더불어 그 무리ㅡ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사진처럼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은 조직이나 구조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나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구성 요소들이 부재한 경우는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그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들은 하나의 기관에 달려 있으며, 그 가장 주된 구성 요소는 그 기관의 대주교인 베드로의 권위 하에 살고 예배를 드리는 곳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삶을 나타내는 개신교도들이 등장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러한 공식을 계속 유지하는 데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밝히 증거하는 북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성장과 진정한 기독교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종의 교리적인 승인을 만들어 내려고 고심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회때 출간된 교회에 관한 법은 그리스도의 몸이 가톨릭 교회에 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법은 몸과 가시적인 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의 두 차원 혹은 국면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신비적인 국면인 몸은 그 가시적인 구조를 초월하여 확장된다. 이런 식으로 교회와 유사한 차원이 비 로마 가톨릭의 영역들과 중첩된다.

 

반면,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그 몸의 위상을 그리스도인들의 비가시적인 친교에 두는 경향이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기관(제도-역자주)은 기껏해야 그 몸을 양육하기 위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을 모호하게 하거나 방해하기도 한다. 그 의미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인 '몸'이라는 단어는 믿음과 감정에 있어서 무정형이며, 막연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관계를 언급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교회의 분리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때로는 분리를 일으키는 데 대한 허가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가톨릭 성례주의자들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이 내주하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믿는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교회에게 은혜와 생명의 저장소를 제공해 주며, 각 개인들은 성례를 통해 그것들을 받는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개인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며, 각 개인은 다른 개인들 안에서 동일한 실재[성령]를 인식한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몸 안에 계시며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 없이 창조하신 몸 안으로 인도된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서로간의 사귐에 의해서 새롭게 된 몸을 구성하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주장한 대로 그리스도이 몸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환영과 같은 몸에서 위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역동적인 실재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기관이 그리스도의 몸 신분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몸은 성령 안에서 주의 역동적인 활동에 반응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환언하자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것은 오직 몸으로서 활동할 때에만 진정한 몸이다. 그 공동체는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위해 활동할 때에만 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3. 얼마나 많은 몸이 존재하는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에게는 지상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는 몸이 하나밖에 없는가? 아니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많이 만들어 왔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느냐"고 도저히 못믿겠다는 어조로 질문하였다. 교회의 정체성을 고려해 볼 때,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교회의 분열은 믿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이상한 것이었다.

 

몸의 분열은 새창조와는 기괴한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있는 일이다. 몸이 나뉘인다는 것은 이상하고, 모순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무나도 실제적인 현상이다.

 

몸은 나누어질 수 없으며, 사람들은 오직 그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로마 가툴릭의 견해가 되어 왔다. 몸은 세상에 흩어져 있는 "진정한 신자들" 간의 비가시적인 친교의 끈이며, 따라서 제도가 해체되고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 몸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앞 단락에서 내렸던 결론이 옳다면, 이러한 신학적 해답들은 그 문제의 정곡을 찌른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해답은 어떤 것인가?

 

바울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지역 공동체의 연합[통일성]에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고 성찬 예식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그의 즉으심을 선포하는, 남.녀.노.소로 구성된 매우 구체적인 공동체를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 성찬 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함으로 인해 파괴된 그 연합은 한 지역 회중의 연합이었다. 사람들간의 사소한 마찰이 구체적인 실예에서 몸을 분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한 구체적인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몸의 하나됨을 위해 하셨던 기도 가운데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 몸의 하나됨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대한 가시적인 선포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디에서 새 사람의 연합 혹은 분리를 볼 수 있는가?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최소한 무엇보다 먼저 지역 교회 안에서 그 몸의 하나됨을 보지 않겠는가? 세상이, 인종과, 사회적 배경, 직업상의 신분과 세상적인 성취 등이 각기 다른 개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아가페적인 사랑 안에서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곳은 구체적인 지역 교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된 것과 얼마나 거리가 멀게 나타나는 것도 지역교회가 아닌가? 분열의 첫째 되고 최우선 되는 비극은 지역교회에 개인주의와 분파주의가 존재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세상에 가장 걸림돌이기도 하며 따라서 가장 해로운 곳이 바로 지역 교회가 아닌가?

 

고린도나 근교의 다른 곳에 있는 한 공동체 안에 서로 분리된 혹은 서로 분쟁을 벌이는 몇 개의 몸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도저히 못할 짓을 행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누어진 것이다. 가장 긴급하고도 힘든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의 문제이다.

 

연합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다 커다란 의미에서 존재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전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한다(엡1:22, 23; 골1:18). 지역 공동체들은 단지 커다란 몸의 지체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전체적인 몸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 흩어진 몸들, 그리고 몇몇 지역에 흩어진 교파들은 모두 함께 지상에서 화목케 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이다.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각자는 상대방을 인식히고, 상대방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 당시 각 지역에 흩어진 몸은 한 몸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되었었다. 예를 들어, 안디옥에 있는 몸은 그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그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기도하며 고난을 받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새로운 실재, 즉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여야 하며, 마음 아파해야 한다. 서로 다투고, 배척하고 적개심을 품고, 분열하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우쭐대며 주장하는 것은 지상교회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지역적인 면에서 분명히 사실인 것은 대륙의 국경을 초월한 교회 일치 운동이 점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각 교파가 상대방의 사역을 배척하고, 서로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경쟁을 일삼으며, 다른 교파의 성례전에 대해 배타적이며, 공개적으로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곳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보게 된다.

 

세계 교회 협의회(ecumenicity)에 대한 거부는 대개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쁘게 말해 그 거부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신학적인 껄끄러움, 진실성 없는 고백에 기인한다. 좋게 말해 그것은 주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구속에 신실한 몸을 유지하려는 바람에 기인한다.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령의 실재, 그리고 그의 구원의 역사성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동맹들에 가입하기를 매우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그처럼 동맹을 꺼리는 교회들은 주님께서 한 몸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그리스도의 몸-비록 그것은 항상 병약하고 죄로 가득찼지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은 어떤 이름 그리고 어떤 신조를 지니고 있던 간에 그것은 하나의 몸이며 동일한 실재인 것이다.

 

복음주의적 배타주의자들과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일치주의자들은 칼빈이 가톨릭 교도인 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돌레토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일행에게 교회적인 연합의 유일한 참된 띠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하셨으며, 현재 흩어져 있는 우리를 불러 그의 몸의 친교 안으로 모으시는 주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하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칼빈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 중심적인 마음과 소망을 좀더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께서 그 일을 행하셔야 하며,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 사역을 수행하신다는 확신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51-25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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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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