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앞 단락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이제 두 맹인의 눈을 열어주십니다.(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변치 않고 흔들림 없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눈들이 열린지라' 입니다.

닫힌 문을 열듯이 소경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닫힌 문과 열린 문, 문을 여닫는 것은 들어가고 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창이란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또 보이는 광경을 받아들이는 열린 공간을 말합니다.

육신의 눈이 밝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떤 '당달봉사'가 있듯이 눈을 뜨고도 보지 못 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일반적인 영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일하심의 영역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양 알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위 본문의 맹인은 보지 못할뿐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성한 사람처럼
활동할 수 없을뿐입니다.

현대에는 이들을 시각장애인이라 부릅니다. 필자는 장애인을 돌보는(케어) 일을 십년 가까이 해오고 있어서 시각장애인들도 꽤 접해봤습니다.

전임사역은 아니고 건강한 자로서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늘 아쉽고 부족할 따름입니다.

따라오며 소리질러-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귀에 들립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눈도 뜨게 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기에 예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어디 쯤 계시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따라가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일컫는 유대인들의 표현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Person)과 하시는 일(Work)에 대해서 바르게 알았기에 그렇게 부르며 간구한 것입니다.

요즘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어떤 여인의 헌금봉투에 쓴 기도제목을 보니까, 자신의 가정과 딸을 위해 복을 비는 게 전부더군요. 하나님은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나 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으로서 지극히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식으로 드리는 헌물은 뇌물 내지는 복채 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나 봉사, 헌금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강남의 모 대형교회에 다녔다고 하는데 어떤 설교를 들으면서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신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 셈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바른 말씀(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은 곪아서 터질 지경인데, 아까징끼(머큐롬) 발라주는 듣기 좋은 설교나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번영복음은 교회 안에서 추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나 눈을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눈먼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불쌍히 여겨주십사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바른 복음(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노중에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지만 아무 반응도 없이 집에 들어가십니다.

맹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는냐?"

"예, 주님!" - (원문 상)

능히 - 뒤나미스입니다.

능력이지요. 예님의 능력을 알기에
간단명료하게 답변합니다.

미사려구를 사용해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나 다름없습니다. 긴 시간의 기도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주님되심'을 바르게 알아서 분명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9절,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전능하신 분이 말씀만 하셔도 나을텐데 굳이 눈을 만지신 것은 긍휼하심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들의 삶을 터치하십시오. 돈 몇 푼 적선하듯이 하지말고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접촉하십시오.

내가 드린 구제와 선교헌금이 영혼을 살리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드려 눈물로 씨를 뿌릴 때, 죽은 자 살리시는 예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너희의 그 믿음대로 너희에게 되어라"

그 믿음-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말씀(성경)으로 말미암는 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시,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많이 베풀지 못하셨습니다. 이는 고향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 예수'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피조세계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밝히 계시하시고 두 팔을 벌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요 믿음의 시작입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표적을 쫓는 신앙을 경계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의 그릇된 메시야왕국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상으로 바라보며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좌지우지, 우왕좌왕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계의 말씀은, 이 시대에 자기를 선전하고 알리지 못해서 안달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31절은 문자적으로 '예수의 소문'이 아니라, "그를 온 땅에 퍼뜨리니라"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믿었던 그 분 자신과 그 분이 하신 일을 일컫는 '그를' 말합니다.

카더라 통신과 생방은 엄연히 다릅니다. '풍문으로 들었소'가 아니라 말씀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 분'을 온 땅에 퍼뜨린 것이지요.

지식은 좋은 것이로되 지식에만 머물면 지적 교만과 함께 자칫 '비없는 구름'처럼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선생들은요.

다음은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듣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농아인들을 만나보면 중간에 수화통역자가 있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데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듣지 못하면 말도 못하는 법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장난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서 하는 말인지...

영분별이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언어(말과 글)를 통해서 알수가 있습니다. 말이란 속에 있는 것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성경말씀으로 말미암는 말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적이 없다고 말하건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성령훼방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생명주시는 그 분을 거부하고서야 어찌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자가 식음을 전폐하고서 죽기를 바란다면 하나님도 살리지 못합니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성령훼방죄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생명주시는 주 예수님을 죽고살기로 거부하는 죄가 바로 성령훼방죄인 것이지요.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멀쩡한 넘(?)을 자기 기준의 작대기로 내리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바리새인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삼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럼과 함께 교리나 지식의 잣대로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맹인과 말 못하는 자!

이 시대에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자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영적 우맹, 신앙적 우맹, 인간사회의 우맹...

본다고 하는 소경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눈뜨고 삽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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