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률 폐기론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 내지 완전주의 반대편 극단에는 도덕률 폐기론이 있다.

문자적으로 '반(反) 율법주의'를 뜻하는 이 관점에서는 율법이 - 율법의 형벌과 준엄함뿐만 아니라 율법의 규범적 지위도 - 신자에게는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앞에서 제시된 많은 논증들이 여기서도 타당하다. 우리는 신명기부터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에 이르기까지 삶의 규범으로서의 도덕법에 대한 호소의 완벽한 일관성을 살펴보았다. 차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 사이에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율법으로 인해 정죄를 받는다. 사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킬 의무를 더 명시적으로 지운다(갈5:3).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의미에서의 (삶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법 없는(아노모스) 상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다(13절). 바울은 바로 14절에서 율법의 요약이 사랑임을 상기시키며 계속해서 사랑의 표출을 성령의 열매로 추론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도덕법을 루터파 및 개혁파 신학자들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라고 부르는 것 -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지도하는 용도 - 에 따라 적용한다.

 

여러가지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에 대한 똑같은 오해를 공유한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처럼  삶을 위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규정들이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기능한다. 율법 언약에서의 원리는 "이것을 하면 살 것이고 그것을 어기면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복과 저주의 기초는 언약의 조건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다. 그러나 은혜 언약에서 기초는 우리의 대표자이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심으로써 개인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는 이 교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의 가장 충만한 문자와 영에 따라 의롭다고 선언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율법은 믿음으로 가득한 감사의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다.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 심지어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는 기능이라고 가정하는 듯하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의 법과 맺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도덕률 폐기론은 율법주의처럼 전형적으로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 '사랑의 법' 또는 성경에 결코 언급되지 않은 다양한 규칙들 같은) 율법에 대한 몇몇 개념을 재도입하며 - 마치 이런 명령들이 어떤 식으로든 십계명보다는 덜 까다로운 듯이 - 그 개념을 복음과 쉽사리 혼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을 '외적인 준수'와 대비되는 내적인 영에 대한 거의 영지주의적인 집착으로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율법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구약에서 주어지고 예수님이 가장 심오하게 추론하신 율법에 대한 해석이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태도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성화를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자아의 모든 의식을 폐하라는 권면으로 표현하면서도 종종 성화란 결국 인간의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의 규범조차 도닥법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권면은 일종의 법이다.

 

율법은 칭의에 대해서나 성화에 대해서나 여전히 측정 기준이다. 율법을 통해 죄인은 정죄받고 심지어 신자의 가장 훌륭한 행위조차 부족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다.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우리를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로 몰고 가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세 번? 용도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생략하는 이들이 종종 부과한 성화를 위한 부담스러운 규칙들, 기술들, 공식들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단순히 우리의 양심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신자들은 소중히 여긴다. 신자들은 생명을 얻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받은 생명을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율법을 지키기를 갈망한다. 율법은 칭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성화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계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당황하지 않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사랑, 오래 참음, 자비 절제 온유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그와 같은 요약에 잘 들어맞는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의 표현으로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의 심각한 요구 조건과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죄와의 싸움에 대한 비현실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복음은 설령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라"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변형되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실제 관행에 있어서 이 권면은 가장 가혹한 율법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자신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쳤다는 것을 실제로 알겠는가? 완전주의의 율법주의적인 흐름과 도덕률 폐기론적인 흐름은 그와 같은 신비적인 정적주의에서 수렴된다. 도덕률 폐기론은 결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율법주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성화를 다루면서 의기양양한 직설법,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베푸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되살리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은 자신을 완전히 넘겨주었거나 하나님이 자기 방식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둔 특별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두 번째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복이다. 우리가 세례로 말미암아 연합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위기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린다(롬6:13). 우리가 이 기준에 따른 행동에 얼마나 많이 못 미치느냐와 관계없이 우리가 처한 직설법적인 상황에 관한 사실은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가 그 지배권을 상실한 것은 바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은 이 사실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도리어 그런 싸움은 우리의 거듭남과 성화의 실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지을 길이 없다. 그 둘은 사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과 은혜와의 갈등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과의 협력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 사랑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베르카우어는 종교개혁의 관점이 성화나 거룩한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의 관점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되돌려놓기 때문에 성화와 관련이 아주 많다. 믿음은 아무런 주관적인 영향이 없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과 더불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시킨다.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언제나 순수한 선물로서 그 기초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언약은 듣고 응답하며 수동적으로 받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 드리며 이웃을 섬기는 진정으로 쌍방적인 관계를 낳는다. 칭의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반면, 성화에 있어서 그 둘은 씨앗과 꽃처럼 서로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칭의는 신앙생활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성화와 선행의 끊임없는 원천이다. 루터는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믿으며 너의 믿음은 내가 너에게 너를 의롭게 하는 자요 구주로 값없이 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는 의롭게 되어라.'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 때문에 당신을 받아 주시거나 당신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 우리가 유익한 권면은 말할 것도 없고 (거듭남, 죄의 폭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과 우리의 일평생 동안 우리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 우리 몸의 부활과 죄의 현존으로부터의 자유 등과 관련한) 어떤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하더라도 루터가 여기서 요약하는 소식만이 의롭다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이는 믿음 안에 있는 어떤 미덕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각 행위의 혼합된 동기로 인한 번민 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유롭게 선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 때문에 우리의 선행조차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몫이나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닌 우리 이웃의 몫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율법의 이런 가혹한 요구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완전한 엄격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기분 좋게 매우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의 멍에에 메인 이들은 매일 자기 주인에게 특정한 임무를 할당받은 종들과 같다. 이 종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임무의 정확한 분량을 성취하지 못하면 주인 앞에 감히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더 관대하고 공평하게 대접받으므로 자신이 한 일이 불완전하고 반밖에 못했고 심지어 흠이 있더라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저 없이 내어놓고 비록 자신이 아버지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순종과 자발적인 마음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런 자녀가 되어 우리의 섬김이 제아무리 작고 무례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우리의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께 인정받을 것임을 굳게 신뢰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상당한 정도로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칭의 때문에 선행의 불결함은 그 선행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보상받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와 같은 관점은 올바르게 행위의 근거를 믿음에 둘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동기나 그 호의를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떠나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한다. 그런 관점은 우리의 사랑과 섬김은 하나님과 우리 인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는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않지만, 아무리 무기력하게 열성 없이 불완전하게 행해졌더라도,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돌보시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세상을 포용하는 행동주의를 위해 우리를 해방시킨다.

 

복음주의적인 신앙고백서(1560년)는 성화와 윤리가 없는 전가로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기는커녕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성화의 영이 없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가 참된 믿음으로 받는 주 예수의 영은 누군가의 마음을 차지하자마자 곧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이전에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육체와 성령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싸움이 찾아온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의롭다 하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종교개혁의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렇게 되풀이한다.

 

같은 사도가 믿음을 효력 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부른다(갈5:6). 믿음은 또한 양심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섬김을 베풀게 하고 역경 중에 우리의 인내를 강하게 하며 참된 고백을 만들어 내고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좋은 열매와 선행을 낳는다.

 

그런 선행은 개인적인 이득이나 공로에 대한 어떤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라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보완하는 인간의 프로젝트도 아니고 자유의지와 주입된 은혜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다루는 과정도 아니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말씀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창조된 사람들은 그들 안에 거하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을 통해 실제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더욱 거룩해진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이중적 원천(신인협력설) 대신 칭의와 내적 갱신이라는 이중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 자신의 의라는 개념은 죄의 정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즉 단순히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지 않는 거룩함이나 의의 모든 흔적에 대해 우리는 바울 못지않게 강경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과 똑같이 우리도 만일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 창조, 허구가 아닌 실제 초자연적인 거듭남, 영혼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B. 도덕률 폐기론)에서 발췌, 674~67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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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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