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의심나기도 하다. 이렇게 믿음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⑴ ‘구원하는 믿음’ 또는 ‘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1문).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 정의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7항).

 

 

이 지식은 당연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사항들이다(22문).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심정에 보증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은 지성적(mind)이라기보다 심정적(heart)이다(3권 2장 36항). 믿음은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루터파가 주장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이다(3권 24장 3항). 한 마디로 말하면, 삶 속에서 체험되어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어떤 자들이 믿게 되나? 복음 선포가 이뤄지더라도 어떤 이는 믿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의 사역이 불성실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미완성이라기보다 거절하는 자의 잘못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거절하는 자는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6항).

 

당사자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선물’이라고 부른다(엡 2:8).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만사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돌드레히트 신조> 3~4장 14항). 이와 유사하게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의지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권 2장 33항)라고 한다.

 

⑶ 연약한 믿음이 있나? 믿음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불완전함과 불안이 왜 이뤄지는 것일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3항)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기독교강요> 3권 17~28항을 읽어보도록 하자. ‘육체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던 불신앙이 내면에 있는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3권 2장 18항). 공격에 취약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고, 이 무지가 불신앙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이다(3권 2장 20항).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숱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3권 2장 21항).

 

이러한 내적 투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겸손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3권 2장 23).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상적 은혜로 이뤄졌음을 삶을 통해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으려면 믿음을 붙잡고 있는 돌쩌귀가 있다. 하나는 복음에 나타난 약속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3권 2장 16항). 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면 살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분의 말씀 공부와 연구는 필연적이다.

 

⑷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은 ‘없다’. 성숙한 믿음과 미성숙한 믿음도 ‘없다’. 이런 질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억지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양적으로 표현한다. 무엇을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을 동의로 주장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것을 신뢰하고 따르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참된 교회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뤄지지 않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원하고 바라는 바가 기적같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공적으로 간증하거나 예화를 드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시적인 현상은 단지 믿음의 준비일 뿐 구원과는 무관하다(3권 2장 5항). 그런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고 시작일 뿐이다. 여러 삶을 통해 참과 거짓이 증명되어야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684

 출처: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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