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다

 

 

 

 

 

종교개혁사를 쓰면서 부제로 ‘진리의 재발견’이라고 붙인 적이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청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의 부패의 고리를 풀려고 무수한 순교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던가? 성경에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타락했다. 종교개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칭의’를 주장하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즉 스콜라주의자들은 당황했다. 그것의 의미를 몰랐을 뿐 아니라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성자로 추앙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역시도 칭의에 대한 개념을 희미하게 말할 정도였다. 약 1500년 동안 ‘칭의’개념은 묻혀 있었고 감춰져 있었다.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이 진리가 재발견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놀랍게 전해준 진리 중에 진리인 칭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자.

 

 

1. 칭의란?

칭의의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33문과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70문에 잘 밝히고 있는데, “죄들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한 정의를 위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11장 2항, 11항, 23항 그리고 17장 8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죄들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의로움에 근거하여 죄들을 사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와 다를 바 없음을 볼 수 있다.

 

 

2. 죄들의 용서란?

죄들의 용서가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행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회개로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무상적으로 우리에게 죄들의 사면이 이뤄진 것이다(3권 3장 18~19항 참고). 최초의 부모로 인한 부패와 타락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푸신 것이다.

죄들의 용서라는 의미는 시편 32장과 로마서 4장에서 잘 나타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23항). 죄들의 용서란 ‘덮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죄들을 우리가 범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졌기에 또는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긴다. 이것을 과거나 미래에 범한 죄들이라도 용서한다고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용서를 지운다거나 없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3. 오직 믿음이란?

아르미니우스파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영생의 보상을 받는 가치로 여기고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거절 4항). 믿음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죄들의 용서를 받고 그분이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단순히 수용하는 도구에 불과하지 무슨 힘을 제공하는 뭔가가 결코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밝힌다. “내 믿음의 가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수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만족, 그분의 의와 거룩만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3째 주간 61문).

그런데 왜 ‘이신칭의’라 부를까? 그것은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것을 받을 수 없고 내 것으로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62문). 그래서 지식을 의미하는 믿음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 죄들의 사하여 주는 것을 신뢰하고 그것에서 위로를 얻는다(21~22째 주간 54~58문). ‘오직 믿음’의 의미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오직’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이신칭의는 행위로부터 모든 것을 제거하는 자만이 오직 믿음에만 모든 것을 기인시킨다”(<기독교강요> 3권 11장 19항). 오직 믿음이란 의는 칭의를 얻기 위한 인간의 어떤 행위를 배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4. 의의 전가란?

칭의는 죄들의 용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분이 행하신 구속 사역이 곧 우리가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순종을 내가 성취한 것처럼 또 내가 결코 모든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신다”는 것이다(23째 주간 60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으로 여기신다. 지상에서 인간의 그 어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수천 년 동안 모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치 물 한 방울을 태평양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 오시안더 뿐만 아니라 아르미니우스파는 칭의를 무슨 알약을 먹어 힘을 얻는 것처럼 여긴다. 구원을 얻게 하는 선행을 행할 수 있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 즉 인격을 보시지 외모를 판단하지 않는다(3권 23장 10항). 무상적 칭의를 믿음으로 확신하므로 그분의 자녀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양자됨인데 다음 호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811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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