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일부의 비성경성에 대한 연구

 

 

이상욱, 최태영

 

 

I. 서언

  

사도신경의 비성경성이란 용어는,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교회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대부분의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신뢰로 인하여 사도신경은 정확무오한 신앙고백문으로 인정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비성경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행 17:11) 신사적으로 응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 논문은 사도신경의 비성경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신사적인 토론을 기대하는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사도신경은 중세시대에는 서방교회 곧 로마가톨릭교회(이하 ‘로마교회’)에서만 사용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알지 못했다. 동방과 서방 교회가 화해를 모색하였던 플로렌스회의(1438-1445)에서 동방교회 대표들은 사도들의 신조를 갖고 있지 않으며 보지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현재 로마교회와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교회들, 예를 들면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에서만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다. 서방교회 이외에 동방교회, 즉 처음부터 로마교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의 후예들, 즉 현재 미국의 많은 침례교회들도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II. 사도신경의 역사

  

사도신경은 12사도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전통이 있으나 역사적 신빙성은 거의 없다. 교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단 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기간을 통하여 서서히 만들어졌다. 대략 3단계가 있는데 곧 로마의 세례문답, 로마신경,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발전된 것이다.

 

 

1. 로마의 세례문답

 

사도신경은 로마의 세례문답에 그 기원을 둔다. 로마에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세례문답을 하였는데, 그것은 다음의 질문으로 구성되었다.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이 세 번의 질문에 세례후보자는 각각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하면 되었다.

 

 

로마의 세례문답의 내용이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 다양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배양서박사는 다음과 같은 세례문답을 소개한다.

 

 

장로: (형제, 자매) 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입교자: 예, 믿습니다(Credo).

 

장로: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 빌라도 통치하에 못 박혀 돌아가 묻히시고, 셋째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우편에 않으시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입교자: 예. 믿습니다.

 

장로: 그대는 거룩한 교회와 성령과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입교자: 예, 믿습니다.

 

 

2. 로마신경

 

 초대교회 시대 때 나타난 많은 이단들과 싸우면서 교회는 많은 신조 혹은 신경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로마신경이다. 그것은 로마의 세례문답을 서술형으로 고친 것이다. 390년에 루피누스(Rufinus)에 의해 소개된 로마신경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으며,

 

사흘 날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올라 아버지의 오른편에 좌정하셨고,

 

거기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죄의 사함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3. 사도신경

 

 로마신경은 다시 사도신경으로 발전했는데, 이형기에 의하면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맨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글에서였다. 손봉호에 의하면 주후 340년에 마르셀루스라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유행했는데, 그것에는 “거룩한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로 바뀌었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없다. 나채운은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분석하였다.

 

 

 하나님에 관한 고백이 처음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이었으나, 그 후 7세기에 “천지를 만드신”이란 말이 첨가 되었다. 다음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고백내용에 “잉태하사”, “고난을 받으사”, “죽으사”, “음부에 내려가사”, “전능하신 하나님” 이란 말 등도 처음에는 없었던 것들로서 후에 첨가된 것이다. 그 다음 성령에 관해서는 첨가되지 아니하였으나, 교회에 관해서는 처음의 “거룩한 교회”가 4세기 경에 “거룩한 공회(공교회)”로 바뀌고, 다음 성도에 언급하여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첨가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도 처음에 없었던 것이 첨가되었다.

 

 

 세계적인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8-1893)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여러 차례의 첨가를 한 뒤 750년경 현재와 같은 사도신경으로 완성하였다”고 주장했다. 또 정홍열은 사도신경이 오늘날의 형태로 최종 확정된 시기를 9세기 중엽인 867-872년으로 추정한다.

 

정리하면, 현재의 사도신경은 로마의 세례문답형식에서 시작하여 2세기에 로마신경이 만들어지고, 그 후 9세기까지 약 700년 동안 시대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다가, 마침내 사도신경으로 이름이 바뀌고, 내용도 여러 차례 수정되고 첨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신구약 정경과는 달리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비성경적인 부분도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거기에 비성경적인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부분을 밝혀내어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비성경적인 부분으로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III. 비성경적인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부분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비성경적인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은 대략 3가지이다. 곧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거룩한 공교회”,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차례대로 살펴보자.

 

  

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이 구절은 로마의 세례문답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신경에 나타나지만, 거기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라고 되어있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라는 말은 2세기 당시에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으로 실존한 빌라도라는 인물을 언급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 보여 진다. 영지주의적 이단으로부터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언급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로마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라고 되어있었으나, 어느 사이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라고 바뀌었다는 것이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장로교에서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틴어, 영어, 독일어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로마교회, 성공회 등의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1864년에 한국천주교에서 나온 ‘천주교 종도신경(宗徒信經)’에는 “본시오 빌라도 벼슬에 잇살 때에 난을 밧으샤”로 되어 있다. 그러나 1894년에 발간한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찬양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본듸오 빌나도 손에 고난을 밧으샤”로 되어 있다. 1905년에 발간된 대한장로교공의회가 편집한 찬셩시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본듸오 빌라도의게 고난을 밧으샤”로 되어 있다. 1930년에 발간된 동양성경교회출판부의 부흥성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도 “본듸오 빌나도의게 고난을 밧으샤”로 동일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 장로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회는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으사’이며, 천주교도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로 되어 있다. 라틴어 사도신경에는 Passus sub Pontio Pilato 로서 ‘sub’는 아래라는 뜻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영어에도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로 되어 있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감리교와 함께 장로교의 사도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는 것과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예수님의 고난이 빌라도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므로 빌라도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어긋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곧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이유가 이런 표현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간략하게 고백한 신경이라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고백되어야만 제대로 된 신경이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도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더욱 더 적절하지 않는 고백일 뿐이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나대신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어야 죄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 죄 때문에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이 부분은 빌라도를 삭제하고 “우리 죄를 인하여 고난 받아”로 고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다.

 

 

2. “거룩한 공교회를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는 “the Holy Catholic Church”를 번역한 것이다. ‘Catholic’이란 보편적, 공(公)적인, 보통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인, 우주적인 등의 뜻이 있다. 어떤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로마교회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 또는 “거룩한 공교회”로 번역하여 그 난관을 얼버무리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 라고 적혀 있다.

 

‘Catholic’이 무슨 뜻인지는, 이것을 사도신경에 직접 첨가한 로마교회의 교리사전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박도식 신부는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밝혀 놓았다. “공번된 교회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믿을 수 있는 천주교회를 말한다.” ‘공번된 교회’는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사도신경 번역본에 사용된 용어로서 지금의 공회 또는 공교회를 뜻한다. 그런데 천주교는 그것을 자기들의 교회 곧 천주교회, 로마교회를 뜻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가 삽입된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로마의 황제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제국의 평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한 가지는 제국의 모든 종교를 기독교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이전의 로마제국의 가장 큰 종교였던 태양신교를 기독교와 통합시키고, 또 세미라스 여신 숭배를 기독교와 통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에서 통합의 원리는 순수한 성경적 교리라기보다는 정치적 힘의 원리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는 다른 종교와의 교리적 통합을 용납하지 않고 순수한 성경적 교리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이 통합에 방해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배격하는 장치로서 2세기에 이단들을 규정하던 로마신경에다가 “우리는 연합된 종교를 믿는다”라는 말을 삽입하여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일반화된, 즉 연합된 종교를 믿는다”라고 주장한 것은 “연합된 종교 즉 가톨릭 이외에는 모두가 이단이라는 것을 믿는다.” 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리하여 순수한 기독교인들은 지하로 숨었다.

 

 

312년 이후에 기독교가 다른 이방종교와 야합하는 데에 반대한 많은 교회들이 지하로 숨었다. 그들은 야합되어 혼합된 가톨릭을 반대하다가, 암흑시대라 불리었던 1200년 동안에 5000만 명이 학살당했다. 그들은 바울파, 아놀드파, 헨릭파, 베드로-부르시안파, 알비겐스파, 웰던스파, 그리고 재침례파들이었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고백할 때 로마 가톨릭은 오직 자기들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교황직을 물러난 베네딕토 16세는 교회는 로마가톨릭 외에는 없다고 선언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 장로교나 감리교 등 개신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들은 그들의 눈에는 이단일 뿐이다. 로마 황제가 주도하여 만든 모든 종교의 연합, 즉 세미라스도 인정하고, 다곤도 인정하고, 태양신도 인정하는 혼합교회인 공교회는 장로교도 아니고, 감리교도 아니고, 오직 로마교회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외면해도 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는 영어로 “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교제한다는 뜻으로 보통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신앙 고백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원래 이 말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성도(saints)라는 낱말을 생각해 보자. 성경적인 의미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전 1:2). 그러나 로마교회에서 말하는 성도는 매우 다른 뜻을 가진다.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saints’는 ‘성자’, 즉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되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비성경적인 개념이다”

 

교제(Communion)란 무슨 의미인가? 이것 역시 그것을 사도신경에 직접 삽입한 로마교회에서 어떤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성인의 통공’은 무슨 뜻인가? 박도식 신부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통공은 공이 서로서로 통한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공이 많은 자가 공이 적은 자를 공으로 도와줄 수 있고, 힘이 모자라 공이 적은 자는 힘 있는 자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교회, 즉 모임은 넓은 뜻으로 천당, 연옥, 세상 이 세 가지 모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천당에 있는 영혼은 불쌍한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빌어주고, 연옥에서 보속하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리하여 이 세 모임은 서로서로 도와주고 있는데, 이것을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박도식 신부는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하였다. 즉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지상교회가 기도와 희생을 바치면 그 공으로 빨리 승천하게 되고, 이러한 공으로 승천한 영혼은 천국에서 이 지상교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스테펀 벵코(Stephen Benko)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신경에서의 ‘성도들과의 교통’은 죽은 성인들과의 교통을 말한다. 이 말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정확히 드러내는 말이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제’라는 것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까지 확대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신경을 성자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그들의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 예를 들면, 죽은 부모가 연옥에서 천국에 가려고 하니, 기도나 선행 같은 하나님에 대한 공적이 적다고 하자. 달리 말하자면 천국 갈 차비가 부족하다고 하자. 이 때 지상에 있는 아들이 연옥에 있는 부모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하면, 그 부모는 이 지상에 있는 아들의 공적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상에 있는 아들이 연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천국 갈 여비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근거로 로마교회는 십자군 원정이나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건축(줄리어스 2세, 레오 10세)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면죄부까지 만들었는데, 이 세상에서 자식이 면죄부를 사는 순간, 죽은 부모가 연옥에서 천당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리아 숭배, 성인숭배는 바로 이 교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개신교의 많은 사람들은 “the Communion of Saints”를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과의 교제”가 아니고, “죽은 자와의 교제”를 의미하기 위하여 사도신경에 첨가된 것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교리로서 우리는 결코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2: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리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단의 속임수로, 성경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산 자(지상교회의 사람들)를 위하여 죽은 자(마리아, 바울, 베드로, 김대건신부 등등)에게 기도하고 부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죽은 자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인의 통공’은 비성서적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의 원뜻은 ‘성인의 통공’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IV. 의심스러운 고백문의 배경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뒤이어 로마의 제국종교가 되었을 때부터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서방 교회는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혼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혼합종교가 아닌가 하고 의심받고 있다. 기독교는 4세기에 태양신교와 혼합한 결과 태양신 숭배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결정하였고, 주의 날을 태양의 날(Sun-day)로 일치시켰다. 예수님을 그릴 때에 예수님의 머리 뒤에는 태양신이 그려졌다. 곧 둥근 태양의 모습 속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예수님과 태양신의 멋진 통합을 이루어내었다. 또 니므롯의 아내인 여신 세미라스와 기독교의 통합을 위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자리에 아들 담무스를 안고 있는 세미라스를 앉힘으로써 마리아와 세미라스를 통합시켰다.

 

성모 마리아는 4세기 이전에는 기도의 대상, 예배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지만, 세미라스 여신 종교와의 통합의 과정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나와 그 지위가 갑자기 크게 격상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기적을 일으키고, 고난 받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엄청난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언제나 젖먹이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남으로써 로마교회는 예수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리아교에 더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기독교와 통합되어, 통합종교인 로마교회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통합 과정에 가장 장애물이 되는 것은 성경 말씀이었고, 특히 디모데 전서 2:5 같은 말씀이었다.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종교통합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 보다 더 권위 있고, 더 영향력 있는 신경을 만들어야했고, 그 신경에다가 “거룩한 공회”와 “성인의 통공”을 첨가해야만 종교통합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종교통합의 과정과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통합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AD 390년, ‘로마신경’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무시무시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아니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렇게 믿을 것을 결의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니케아 신경)라든지, “칼케돈 회의에서 이렇게 믿기로 결정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칼케돈 신경)라고 하여, 어떤 종교회의 이름을 넣어서 자신이 그렇게 믿는다고 주장하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루피누스 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 신경”처럼,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루피누스가 이렇게 믿었는데, 나도 그렇게 믿는다”, “아타나시우스가 이렇게 믿었는데, 우리도 그렇게 믿는다” 라고 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사도들이 이렇게 믿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라는 뜻으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이다. “사도들이 이렇게 믿었다”고 주장하면 누가 감히 이의를 달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도들의 신앙이었을까?

 

 

둘째,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도신경의 권위를 성경보다 높이려 하였다. 사도들이 한 구절씩 말하여 사도신경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잭 로저스(Jack Rogers)에 의하면, 사도들이 한 구절씩 만들었다는 사도신경의 사도적 기원을 뒤집어 그것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 사람이 있었다.

 

문예부흥시기의 학자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는 영국의 감독 레지날드 피콕(Reginald Pecock)과 함께 문서의 사도적 기원을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압박에 의해서 발라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피콕은 1458년 감독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톨릭은 그들의 입을 막고자 핍박을 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어도 갈릴레이의 입만 막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로호만(J. M. Lochmann)의 책에서도 사도들의 저작은 간단히 부인되고 있다.

 

 

동방교회의 에베소 대주교는 “우리는 이 사도신경을 가지고 있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했다. 만일 그것이 이전에도 존재했었다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의 첫 사도들의 모임을 서술할 때, 그것에 대해서도 보고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배양서 박사도 사도신경의 열 두 사도 저작설을 다음과 같이 부인했다. “사도신경은 12사도가 만들었는가?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열두 사도가 작성했다는 전설이 유포되었으나, 16세기에 이르러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그 전설을 믿지 않습니다. 2-3세기 초대교회의 세례문답 본문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열 두 사도 저작설을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로마교회는 오랫동안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어 유포시켰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권위를 사도신경에 부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무엇이었을까? 로마교회를 모든 종교를 통합한 유일한 종교권력으로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중세에는 사도신경 안에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가장 핵심구절이었다. 다른 구절은 들러리에 불과하였다. 이단을 구분하는데 역사적으로 상당히 공로가 있는 기존의 로마신경이라는 유명한 신경의 끝부분에, 이 두 구절이 끼어 들어가 가장 중요한 주인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사도신경으로 바꾸었다. 로마교회는 이 두 구절이 필요하였고, 이 두 구절을 위하여 로마신경의 명성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내용은 처음부터 들어가지 못했다. 영지주의가 없어진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2세기에 사용하던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라는 말을 그대로 두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인 복음을 살짝 가려놓은 채로 말이다.

 

원래의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한 교회이며 다른 교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 이단인 셈이고, 우리 장로교도 이단에 속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따른다. ‘성인의 통공’ 즉 ‘죽은 자와의 교제’, 혹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것은 마리아숭배, 성인 숭배, 면죄부를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원래의 의미에 따르면, 현재의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정죄한 예수회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처럼 로마교회로 회귀해야 할 것을 요청하는 결과가 된다.

 

혹자는 ‘거룩한 카톨릭교회’를 ‘거룩한 공교회’로 바꾸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한다. 또 ‘성인의 통공’을 ‘성도의 교제’로 바꾸었으니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라틴어 원문을 그대로 둔 채 우리 말만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 때 루터와 칼뱅은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한 나머지 그것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수영에 의하면 현재 전세계 개신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절반가량이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파별로 보면 다음과 같은 교단들이 사도신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 연합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복음주의 루터교, 하나님의 성회, 개혁교, 커뮤니티교회, 형제교회

 

캐나다: 연합교회, 침례교, 성공회, 하나님의 성회, 형제교회

 

독일: 복음주의루터교회, 개혁교회

 

이탈리아: 침례교연맹, 복음감리교

 

네덜란드: 복음 개혁교, 복음감리교

 

스위스: 구 가톨릭

 

영국: 침례교연맹, 영국감리교, 연합 개혁교

 

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 연합교회, 그리스도교

 

뉴질랜드: 침례교연맹, 감리교, 장로교

 

V. 평가 및 대안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은 것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름만 ‘사도’신경이다. 사도들은 절대로 그렇게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 간결하게 요약된 복음을 고린도전서 15:3,4,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에서 찾는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우리 죄” 즉 “나의 죄”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셨다고 한다.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하시려고 내 대신 사형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셨다면, 나의 죄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고,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예수님이 만약 유대인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면, 우리의 죄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 소식이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고,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일 것이다. 하물며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신 것으로 끝이라면 우리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다른 한 편으로 내 죄 때문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억측이다 -한광기-).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 해당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게 고난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로써,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도신경 대로라면 거기에는 복음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복음 없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신앙고백이 아니고, 그저 역사일 뿐이다.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면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신앙의 고백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고백하거나, 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 중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이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그것은 신앙고백으로서는 너무 모자라는 것이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이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빌라도라는 엉뚱한 사람이 들어가 복음을 흐려놓고 역사공부를 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린도후서 11:4에서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또 갈라디아서 1:8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는 무서운 말을 하였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대목에 빌라도 때문에 돌아가셨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예수요 다른 복음이 아닐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면,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심판하러 오신다면 우리는 완전 절망상태에 이를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 때문이 아니라 빌라도 때문에 죽으신 것이라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사도신경 속에 들어가 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빌라도로 대체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가 사도신경에 들어와서, 복음을 변개하여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그러고도 (천주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찌어다.”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사도신경 보다 훨씬 이전의 신조인 니케아신조(325년)나, 콘스탄티노플신조(381년) 속에는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는 말이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구절이 없다. 세계적인 교회사가인 샤프(Shaff)에 의하면, “거룩한 카톨릭교회”는 650년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그 이후에 첨가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의 보편적 교회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교리가 로마교회에 의하여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대신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신 예수님이 고백되고 있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빠뜨린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대신에 ‘우리 죄를 인하여 고난을 받아’로 바꾸어야 진실로 사도들의 이름에 걸 맞는 신앙고백이라 할 것이다.

 

둘째, ‘거룩한 공교회’는 원래 이방 종교를 혼합시킨 로마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합종교인 로마교회를 믿는다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순수한 교회를 부정하는 고백이 되고 만다. 설령 오늘날 그 의미를 재규정하여 로마교회가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적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만의 해석일 뿐이다. 로마교회는 여전히 자기들의 교회만을 의미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바뀌어야 사도들의 이름에 합당한 신앙이라 할 것이다.

 

셋째, ‘성도의 교제’는 원래 죽은 성자들과의 교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죽은 성인들의 공덕을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의 존폐가 걸린 이신칭의의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자 루터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로마교회의 면죄부 신학일 뿐이다. 그것을 오늘날 살아있는 신자들의 교제라고 재해석하는 것은 위 둘째와 마찬가지 이유로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삭제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바꿀 필요도 없다. 살아 있는 신자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 속에 들어 있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신경에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리쓰(J. Leith)에 의하면, 그들은 “고대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 다시 말해서 사도신조, 니케아 신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칼케돈 정의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이후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고, 부활하셨고, 승천, 심판하신다 하더라도,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왜 그동안 감쪽같이 간과되고 말았을까? 사도신경이 진짜 사도들이 만든 것이었다면 그와 같은 복음의 핵심이 빠졌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재해석해서 사용하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궤변에 이를 뿐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해석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원어를 공부하고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원래의 의미에 무관하게 독자의 임의로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고 이단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을 처음 만들기 시작해서 최종 완성한 주체인 로마교회가 그것을 어떻게해석하고 있는지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수영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카톨릭교회가 자체 교회의 교리 보호를 위해 만든 내용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다르게 개신교가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本末顚倒)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위 두 가지의 원래의 의미가 필자가 조사한 대로가 맞다면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의 해당부분을 확실하게 수정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하나의 대안으로서의 사도신경을 예시해 본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으며,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장사되어 음부에 내리신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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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원저자는 이상욱이다.

 

그는 대구신명여고를 명예퇴직한 영어교사이며 대구삼덕교회(예수교 장로회 통합) 집사이다.

 

최태영(영남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은 이상욱과의 협의를 거쳐 그의 글을 논문형식으로 바꾸었으며, 그 과정에 상당부분은 삭제하고 나머지는 보완하였으나 원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고자 하였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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