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과 의미' (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 / 마이클 호튼

 

 

구약 성경에 대한 모호성

 

~~'율법'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명령을 가리킨다. '복음'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본문을 가리킨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아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신 사실과 하나님이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성취하신 일들을 가르쳐 준다.(23p)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때부터 모든 신자는 성령에 충만하고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수놓인 마음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성령의 열매'로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덕성이나 인품의 성과가 아니라 율법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고 우리 속에서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도록 일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 - 심지어 가장 변태적이고 문란한 사람까지도 - 은 자기 양심에 기록된 법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지만 신자만이 자기 마음에 기록된 율법을 가진다. 다시 말해, 사람은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 수 있다. 거듭나기 전에 율법은 정죄하고 저주할 뿐이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끌 뿐이다. 더 이상 율법은 "당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맡으신 본분을 다하시지 않을 것이다."는 말로 위협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완전한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맡겨진 본분'까지 친히 이행하셨다. 이제부터 이 무조건적인 약속은 자신의 순종이나 노력으로 약속의 어느 한 부분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줄뿐 아니라,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는 새 심령을 우리에게 준다. 바울 사도가 신자의 삶에서 율법을 없애기는커녕,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고후3:3~4)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고 선포한 사실에 주목하라. 

 

이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과 대립되는 위치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생명을 주는 성령을 배제한다면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의 복음 약속도)은 죽은 것임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히려 죽은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고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힘쓸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혹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든지 '더 큰 성령 충만'을 받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생명은 온전히 모든 신자에게 속한다. 성령만이 "허물과 죄"(엡2:1)로 죽은 사람을 끄집어 내어 소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되살아난 사람은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긍정적이고 다정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는 아브라함이 그렇듯이 약속의 후사이며,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의무를 갖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19:6)으로 삼으신 일은 이제 신약 성경의 교회에 적용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벧전2:9)로 구성된다.(27~29p) 

 

바리새인은 성경(오늘날 구약 성경)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도덕규범이나 생활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구약 성경이(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도덕법은 이미 죽음 반대편에 있는 천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 조건 없이 구속받고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오늘날 구약 성경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접근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을 따분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통해 펼쳐지는 구속의 관점에서 구약 성경의 주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새롭게 환기시킬 것이다.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라합과 여러 선지자와 더불어 우리도 율법과 약속이라는 가보를 이어받는다.(32p)

 

율법에 대한 강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미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이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 백성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마치 계명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새 생명에 들어가거나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첫 계명을 시작할 필요가 없으며,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모든 일 -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조건의 성취까지 포함시켜 - 에 기초해 자기 백성에게 친히 주장하시는 전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우리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신다.(34p)

 

도덕적 용도

 

율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이 율법에 완전히 순응할 수 없으며, 자신은 그 도덕적 탁월함에 근접할 수 있다는 식으로 율법을 다루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에 따라 요구하신 완전한 기준으로 율법을 다루어야 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므로) 단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목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님 그분의 의에 도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마음먹지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에 자비로운 천국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에게 율법은 정죄와 심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다윗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율법은 의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로 다가온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시119:32). 양자 됨의 특권을 아는 자만이 시편 기자와 같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말할 수 있다.(36~37p) 

 

 

마이클 호튼의 '삶의 목적과 의미'(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췌, 23~3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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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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